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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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 白丁 (백정)
1. 개요
2. 고려시대
3. 조선시대
4. 구한 말~일제강점기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 기타


1. 개요


현대의 인식으로는 옛날에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했었던 사람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최하급 계층이었으며 법률상 양인이였지만 조선시대의 팔천에 속하는 존재였다. 그나마 8천중에서 가장 천한 신분이였던 천민보다도 더 안좋은 취급을 받았으니 이른바 불가촉천민의 조선시대 버전이였다. 대개의 경우 현대에서 백정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도축, 발골, 정형을 담당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린 것은 조선시대 세종 이후의 일이었다. 그 전에는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조선 세종 이후 백정이 다른 뜻으로 바뀐 후에도 도축업자가 백정일 수는 있었지만 [1] 모든 백정이 다 도축업자는 아니었다. 도축업자는 백정의 일부였으며 도축업 이외에도 다른 직업군을 포괄하고 있는 다른의미의 단어였다.엄밀히 따지면 직업군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혈통, 혹은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였다.
어원은 중국 수나라(隨)에서 온 말로 당시 뜻은 그냥 일반 백성을 뜻하였을 뿐이다. 나라에서 군인이나 향리 등의 직역을 부여한 집을 정호(丁戶)라 불렀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집을 백정호(白丁戶)라고 불렀다. 여기서 백은 하얗다는 의미가 아니라, '00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게된 백정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하면 바로 고려시대 화척이라고 불리는 무리들이였다.
이들은 수척(水尺)·양수척·무자리라고도 한다. 신라고려 초 혼란기, 북방 역시 발해가 몰락하는 등 혼란이 있었고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북방의 인구구조상 말갈, 거란, 여진족 등 북방민족들도 함께 유입되었다. 이들 즉 양수척(楊水尺)이 고려 후기에 이르러 화척으로 불렸다가 조선 초에는 백정(白丁)이라고 바뀌어 불렸다. 화척은 집단으로 유랑하면서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을 자행하였다. 고려 말의 홍건적 침입 때에는 길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제주 사람과 재인을 모두 찾아내어 서북면 수졸(戍卒)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화척이 서북면 지역 군사로 충당되거나 왜구를 사칭해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은 그들의 유목민적 기질과 농경에 정착하지 못해 항산(恒産)이 없는 열악한 처지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화척은 호적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지배를 받는 공민(公民)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조선 태조 이후 성종 때까지 조정은 이들을 호적에 올려 파악하려고 하거나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하였고, 그러한 자에게는 신공을 면제시켜주는 정책을 계속 펴나갔다. 아울러 독립된 집단 생활과 자기들끼리의 혼인을 금지시키는 한편, 일반 양인과 함께 살게 하면서 혼인을 장려하였다. 또한 지방 관아에서 이들을 찾아내 각 방(坊)과 촌(村)별로 보호하게 하고, 장적을 만들어 형조·한성부·감영 및 각 고을에 보관했다가 출생·사망·도망 등의 사항을 기재하도록 하는 등 철저히 점검하였다.[2]
역사채널e - 외면당한 진실, 백정

2. 고려시대


고려시대까지는 백정이란 자기 조상 대대로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 짓는 농민, 즉 자영농을 칭하는 말로 의미가 조선시대의 백정과는 다르다.[3] 고려시대에 백정이 어떤 계층이었는지를 알기위해서는 고려시대의 사회제도를 알아 볼 필요가 있는데, 고려시대 양인이라는 계층은 생각보다 많은 계층이 포함되어 있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그 이유가 고려는 신분제가 급속도로 변화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까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세습귀족들은 고려 초 광종의 개혁(특히 과거제도 실시)에 따라 많은 귀족들은 물론 왕족들까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상류층으로는 정부의 고관들과 그래도 지방에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대지주에 속하던 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중류층으로는 하급관리와 초기에는 지방의 향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층 간의 결혼까지 엄격하게 제한되던 천민 계층을 제외한다면 이 이외의 계층은 모두가 양인으로 분류되던게 고려 사회였다. 그러나 지방의 향리들은 전까지 중앙관리였던 귀족들이 중앙에서 실권을 잃고 대거 낙향하고 중앙에서 지방관들이 파견되기 시작하자 지방에서 영향력을 잃고 점차 양민으로 격하되었으며 그 전까지는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어 천민취급을 받던 향, 소 부곡민들이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위치가 점점 더 올라가 양인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향, 소, 부곡의 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양인에 속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인계층이었던 향리나 군, 현민들과는 확실한 격차가 있었던 걸로 보여진다. 이들은 외거노비만큼은 아니지만 서양의 농노와 비교될 정도로 군, 현 민보다는 훨씬 더 강도 높은 세금과 역 등을 부과받았다. 이처럼 일반적인 고려시대 양인은 꽤 폭넓은 계층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백정이라 불리던 자영농들은 양인들 중에서는 그리고 고려 신분제 전체를 통틀어서도 중산층이라고 불릴 만한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었으며 실질적으로 고려를 떠받치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 당시 우리가 흔히 아는 백정은 양수척(楊水尺), 수척(水尺), 화척(禾尺), 무자리라고도 불렀다. 이 명칭은 조선 시대에도 사실 그대로 불렸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떠돌아다니며 천업에 종사하던 양민 계층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 시대나 일제 시대에는 도부 또는 도한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향소부곡민과 함께 양민 중에서는 최하급 계층으로 분류되었으며 일반 농민들과 같은 형태로는 국가에 대한 조세 부담을 지지 않았고, 노비와는 달리 어디 한 군데에 매여살지도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사냥, 축산, 도축/고기판매업(화척), 무두질/가죽제품 제작(양수척 = 조선시대엔 갖바치로 불림), 고리, 예악/배우, 망나니 활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고리는 버드나무 가지나 지푸라기를 엮어 갖가지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일명 유기라고 불렀다.
고려사에 보면 후백제 정벌 시 굴복하지 않아 압록강 밖으로 쫒아보낸 자들이 시초라고 나온다. 이 외에 국가의 부역과 호적에도 제외된 방랑인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기녀들의 시초라는 기록도 나온다. 그리고 북방 민족 출신으로 포로로 잡힌 거란인의 후손이나 동북면에서 흘러들어온 여진인 등, 귀화했으나 정착 생활에 적응하지 않고 방랑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어째 집시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다만 백정이 민폐나 어그로가 훨씬 심했다. 세종, 문종 실록에 수록된 백정의 범죄기록과 전국 감옥의 살인, 강도범 절반이 백정이다. 조선 전기까진 '''남녀 구분없이 말타고 활쏘며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이었고 이민족들이 농경민족에게 행해온 약탈도 그대로 저질렀다. 집시도 유괴나 절도, 구걸로 악명이 높지만 이쪽은 강력범죄라는 점에서 훨씬 심하다. 하지만 집시고려 시대 백정은 기원 면에서는 차이가 있는데, 집시는 고대 북인도의 농경민들이 모종의 이유로 유랑생활을 하게 된 것이 그 기원이며, 백정은 전술했듯이 귀화한 유목민 출신 부랑자나 고려 사회 내부의 범죄자들이 그 기원이다.
즉, 백정이란 고려땅에서 살던 이민족들, 유목민인 거란인이나 수렵민인 여진인들이 고려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지킨 것이다. 버드나무 고리를 잘 만든 것도 가재도구가 이동에 편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익숙해진 것이다. 사냥과 축산, 도축 및 고기판매업도 유목민 출신인 이들이 이것을 농경민들보다 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마을을 만들어 살던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 사회적으로 고려와 반체제적 문제가 있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대국가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조선,부여의 경우 유목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축에 대한 향기가 역사 이곳저곳에 깊숙히 남아있다. 고조선의 5부가 인간이 목축화했던 가축을 상징하는 단어이고 부여또한 건국설화에 돼지우리가 등장하고 왕이 이곳에 직접 행차할 정도로 반농반목의 형태였으며 이는 삼국시대의 고구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삼국시대 초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반농반목의 생활형태였으며 고구려의 경우 다수의 말갈족, 거란족을 지배하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고구려와 이민족들 사이는 계급상의 차별이 있었지만 그들을 생활방식으로 차별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간의 차별은 존재했지만 짐승을 잡아 도축하는 걸로 차별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뭐 당연한 게 고구려는 초기 국내성에서 출발해 부여, 옥저, 동예, 숙신, 거란, 선비(연)와 겨루며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한 나라이다. 고구려의 영역 아래 다수의 이민족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유목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거란은 고구려민들과의 접점은 거의 없었고 말갈은 이미 이 당시에도 농업과 유목 수렵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근거지 없이 떠돌아다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고구려의 전쟁에 많이 동원되어서 고구려에서는 일부 지위를 인정받는 측면이 있었다. 그 중 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올린 자들은 그들에게 벼슬을 주는 고구려의 풍습대로 고구려 지배 계층에 편입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말갈이라는 말이 여진, 만주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고구려 지방민을 통칭하는 단어라는 연구도 나와 있다. 각설하고 수렵과 목축의 전통이 남아있던 고구려는 무덤에 수렵도가 말하듯 양인 이상의 성인 남성이라면 사냥과 도축 등은 당연히 할 줄 알아야 되는 일이었다. 즉 고구려에서 짐승을 사냥해서 해체하는 일이 성인 남성이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 모두 왕권 강화를 목표로 불교를 도입하고 농업을 장려하게 되고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국교로 자리잡게 되고, 원효와 같은 고승들이 활약으로 불교의 사상이 민간으로 깊숙히 스며들게 된다. 따라서 고려에 자리잡았던 대승불교의 가르침중 핵심인 자비와 불살생의 사상이 사회 깊숙히 자리잡고 사냥과 육식을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잡자 자연히 도축관련 업종을 천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러나 일본과는 달리 고기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왕이 불국토를 부르짖건 말건 귀족들이나 상류층은 계속 고기를 먹었으며 불국토 사상에 심취한(혹은 왕권강화를 목표로 한) 고려시대 왕들이 왕명으로 육식을 절제시키고 심하게는 농사 짓기 힘들다고 도축을 금지했지만, 그래도 먹을 사람은 다 먹었고 하다 못해 왕들이 고기 그만 먹으라는 말은 안 할 테니 좀 적당히 먹어 하고 말한 기록이 많다. 이자겸이 한창 세도를 부렸을때 뇌물용 고기를 하도 많이 받아챙겨서 다 먹지 못해서 고기가 썩어나갈지경이었다는 대목이 나오고 이규보 같은 사람은 허구헌날 술먹으며 고기먹는 자신이 싫어서 금주와 금육을 실시했는데 눈앞에 고기가 보이자 아무생각없이 먹게 되더라 라고 자아성찰을 담긴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몽골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몽골의 영향을 받아 육식이 권장되고 목축이 장려되던 기간을 거치면서 다소 희석되었다. 이후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불교가 구석으로 밀려남으로서 끊어질 뻔했던 한국 고기요리의 명맥은 어찌어찌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어찌 됐건 살아남게 된 일본은 불교의 영향력이 더 강해져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고기 요리가 사실상 멸종되다시피 했다.[4]
여튼 통일 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한국으로 유입된 이민족이 이런 직업을 전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이민족의 대부분은 거란족, 여진족 등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애시당초 고기를 늘상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고기를 먹을수 있는 건 귀족이거나 부자이거나 해야지 먹을 수 있었다.
이런 반체제적인 사상을 가지고 고려에 유입되지 못하고 겉돌던 이들은 왜구를 가장해 노략질을 하거나 거란의 침입시에는 길잡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백정에 대한 편견은 있었으나 한국만큼은 아니었다. 고대 중국에서부터 제례에 바치는 희생은 군주에 의해 주관 및 분배되었고, 포인이라고 불렸던 왕실 요리사들은 직접 도축을 집행했으며 심복 대우를 받았다. 정복국가인 북위, 요나라, 서하,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는 백정을 우대하는 유목민족 특성상 백정을 기술자로 존중해 주었으며 서양에서도 일부 계층이 안 좋게 볼 뿐이지 사회 전체 분위기는 백정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되었고 유대인의 경우에는 종교적으로 깨끗한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종교 가르침 때문에 종교 지도자인 랍비가 백정 일을 하는 일도 있었다. 고기를 정형하고 배분하는 것은 승자 혹은 강자의 권위와 권리로 인정되어 왔고 이러한 면면이 집안 남자들이 주도하는 BBQ 파티 등에까지 남아있어 왔던 것이다. 한국에 유난히 백정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백정 대다수가 이민족의 후예였고 한국 문화에 융화되지 않은 채 틈만 나면 민족의 전통을 시도했던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5]

3. 조선시대


조선초 세종은 국가체제 정비 과정에서 양수척 등을 양민화시켜서 국력을 증진시키고 동화시키려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양수척 화척을 백정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적극적인 정착유도정책을 꽤하였는데, 문제는 양수척 화척의 생활상이 일반농민들과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유목민의 후예들 즉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않고 온 부족이 말을 타고 유랑하던 집단을 강제로 정착을 시키니 땅은 없고, 농사일은 익숙하지도 않고(...)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르던 버릇이 있으니 강도짓의 유혹에 빠지고, 고기를 먹고 살았으니 소고기 금지령에 대놓고 반하고 싶고, 기존의 거친 생활상으로 인하여 범죄에 대한 거부감도 약한 편이었으니, 화척들도 백정에 편입되는걸 원치 않았고 기존의 백정들도 어마어마한 반발이 튀어나왔다. 결국 백정들은 스스로를 구백정이라 부르고 화척들은 신백정으로 구분하고 동화되는 걸 꺼려했으며 이로인해 기존의 농민들과 신백정들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그리고 결국 시간이 흘러 구백정은 백성이라 칭하게 되고 백정이란 말은 화척들만을 칭하게 되는 단어로 남는다.
세조 시절에 왕 앞에서 논쟁을 벌인 안효례와 최호원 사이에서 욕설로 '백정의 자손' 패드립이 시전된다. 여기서 시전자는 상민이고, 역으로 반박한 이는 양반으로 전신분에 걸쳐서 백정이 욕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앞서 세종이 양민화를 시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화이다. 이건 게이하고도 좀 비슷한 게, 게이들도 "호모라고 하지 말고 '즐거운 사람(gay)'이라고 불러다오" 했는데 이제는 게이가 동성애자를 지칭하게 되어버린 것처럼. 상인(常人), 혹은 상민(常民)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등장한 것이다. 세종 전만 하더라도 백정이라는 말은 고려시대처럼 일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나, 세종 때는 양수척도 백정으로 편입하려고 하자 일반 농공상인부터 양반들까지 다 반대한 탓에 생겨난 현상.
결국 양민화는 실패했는데 세조 대에는 백정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묻는 내용이 과거 시험 문제인 책문으로 출제될 정도였다. 하지만 중종 때에 한양 인근에 백정 도적떼가 출몰해 토벌 논의가 벌어질 정도니 해결은 요원했다. 죽어라고 말을 안들어 처먹으니 결국 별도 거주지에서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특별한 허락까지 필요한 말 그대로 요주의 대상으로 굳어버린다. 그 정도는 심각하여 과거시험에서 '''강도의 8~9할이 백정과 재인'''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살인 강도범 380명을 조사하니 과반수가 역시 백정과 재인''' 무리(...).
이건 조선 조정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백정의 문제였다. '''조선 조정은 전근대 왕조 국가치고는 이례적으로 보일 정도로 강한 인내심으로 어떻게든 안고 가려 노력했다.''' 유럽에서 집시나 유대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보면 그와는 비교도 안될 어마어마한 민폐를 끼친 백정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굉장히 온건했다. 조정에서는 어떻게든 이들을 일반 백성과 동화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유랑생활을 하면서 수렵까지 하던 그들은 칼을 쓰는데 일가견이 있었고 말도 잘 탔기 때문에 조선에서 겉돌며 걸핏하면 산적으로 위장해 농민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관가까지 털었다. 조정이 추진한 양민들과 통혼, 동화는 양민들 뿐 아니라 백정들도 거부했다. 당시 조선 백정 집단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느냐면 '''강도들을 잡으면 다 백정, 살인범의 절반은 백정, 가축 훔친 흔적을 조사하면 죄다 백정 마을로, 방화범을 잡으면 반은 백정, 마적단을 잡으면 모두 백정'''(...) 정말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검거도 쉽지가 않은 게, 관리가 몇 번이나 우마를 잃고 그 흔적을 따라가니 백정 마을 앞이었으나 남녀 구분 없이 말 타고 활 쏘는 집단이다 보니 '''백정 마을에 들어가기 무서워서''' 처리를 못한 정도였다. 백정 마적단의 난리는 세종, 문종, 세조 내내 골치거리였다가 중종대에 수그러들고 명종대에 임꺽정이 난리 한 번 터트린 걸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후 백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지며, 임진왜란기에는 기존의 서술과 달리 활도 못 쏴서 군인으로 쓸모가 없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로 변화하였으나,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적개심을 재고시키기엔 지난 600년 간 백정들이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았다.고려시대 내내 그리고 조선 초 100여년 간 트러블은 백정과 양민 사이에 뿌리 깊은 불신을 야기시켰다. 즉 간단히 말하면 '''유럽의 집시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지독한 유랑 범죄 집단이 조선 초기의 백정이었다는 말이다.'''
'''고로 현대매체에서 나오는 백정의 이미지는 조선후기의 백정에 가깝고, 가장 가진 것들이 없는 이들의 분노라는 클리셰적 카타르시스를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정이 한창 문제였던 조선 초기에는 조선조정이나 일반백성보다 백정 자체의 문제가 훨씬 컸다. '''
한편 백정의 이미지인 도축업은 다른 이유로 백정이 전담하게 되었는데, 성종기까지는 양인들도 도축업을 하였으나 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양에서 도축업을 금지시키면서 양민 도축업자들은 몰락했다. 허나 그 때에 백정들은 사실상 법을 무시하는 법외의 존재들(....)이며 고기먹고 싶다고 수시로 소와 말을 훔치던 존재(...). 강력범죄를 일으켜도 관군이 출동할 급이 되어야 처리하던 이들이라 마치 금주법시대 마피아들처럼 도축업을 전담하게 되었다.[6]
사실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저 조선초기 백정이라는 집단이 완전히 이질적인 형태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실제로 고려시대에 이들은 신량역천인에 포함되었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다.[7]
그리고 우유소 폐지 때 보면 알 수 있지만, 세금 피하겠다고 일반 농민들이 그들사이에서 끼어 살았던 일도 많았다. 기록상으로는 1집에 20명이 넘게 살았다는 식도 있었으니.]. 아니 신량역천이라는 표현이 조선시대에 나왔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어부나 목축업[8]도 신량역천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이들을 일반농민들과 동화시키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 그 예이다. 어간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어부가 되고, 소금만드는 이들이 염간이라고 하다가 염부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중앙정부의 공식적 시책기준에서만 사실이다. 하지만 천민 문서에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법제상으로는 양민이지만, 고려시대 이래의 신량역천 대우인 것처럼 하는 일이 차이가 없는데, 시선이 변할리가 없다[9].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식은 극초기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반발, 이전에 유목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경제적 기반도 없이 사회적 차별을 받으면서 동화되라고 했으니 신백정이 역시 반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목집단에게 도축업을 금지하는 것도 어렵고, 유목집단이라는 이야기는 땅 없는 사람들이라는 소린데 이 사람들 제대로 정착하게 하는 정책도 사실상 없었다. 세종대에 신백정들을 정착시키려는 방안으로 제기한 것이 공물 좀 적게 걷고 땅 많이 가진 사람들 땅을 주자는 것이다.
전자는 근본적 해결책이 못되고, 후자는 조선시대에 제대로 실현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중앙집권과 국력이 나름 있었던 조선초기 중앙정부는 '섞어놓고 살게 하면된다' 정도의 정책을 펼쳤다. 이는 사민 정책만 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결과 신백정은 조선 내부에서 살고 있는 여진부락 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이들이 유목적 성향을 잃은 뒤에도 변함이 없다는 것에서, 신량역천에 여진족 후예 추정하는 백정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결국 드러난다.
사실 재가승이 진짜로 여진 후예인지 의심하는 것처럼, 이들이 진짜로 유목민족 후예인지는 알 수도 없고, 사실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행동풍습이 달랐다는 것이 주변과 차이를 만들었고, 이 시각이 사상적으로 유목민족의 흔적이 거의 없어지게 된 이후인 조선시대 말기까지 갔을 뿐이다.
임꺽정이 백정 출신으로,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 이들은 어느 일정한 곳에 모여 살았으며, 이런 마을엔 양민이나 포졸들조차 가까이 하길 꺼려했다. 심지어 양반과는 같은 길에서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야기를 하려면 길 밑으로 내려가서 이야기를 한다던지.
하지만 성균관에 소속된 특수집단인 반인(泮人)들은 성균관에 제사용 및 식용으로 육류를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도축 일을 함께 해야 했는데, 이들은 공자님이 드실 고기를 바치는 몸이라고 오히려 세력 과시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반인들은 성균관 일을 도우면서 양반집 자제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이 양반들이 나이가 들고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면 그 친밀한 관계가 든든한 연줄이 되곤 했다. 그래서 반인들은 양반집 자제들, 궁에서 일하는 별감들과 함께 한양의 유흥가를 주름잡던 물주들 중 하나가 되었고, 이들이 살던 반촌(泮村)은 이러한 세력+성균관 출신 고위층의 비호로 인해 사실상 치외법권 유흥가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대학 주변 유흥가를 연상하면 딱 들어맞는다. 재미있는게, 실제 반촌의 위치도 대학로(서울) 상권과 거의 겹친다.
전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대신 납세의 의무가 적었으므로 생활이 곤란해지면 양민이 일부러 백정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능력만 있으면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원래 도살업은 이익이 많이 남았다. 특히 소는 예나 지금이나 허가된 소 외에는 잡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몰래 잡는 경우 더욱 이익이 많았고, 이들은 주로 양반이나 잔치 등의 대형 행사에 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더욱 수익이 많았다. 이처럼 수익이 많은 반면에 옷차림이나 집에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돈이 나갈 구멍이 없었다. 때문에 곳곳에서 백정 부자들이 등장했고 이후 신분제 폐지 등으로 백정들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이 형평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예전에 KBS에서 저연령층 대상으로 방영하던 모 역사프로에서 나온 역사적 일화 중에는 조선시대 한 늙은 백정의 장례에 백정들이 관에서 꽃상여를 빌려 쓰려 할 때 양민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자, 백정들이 남아도는 돈으로 더 좋은 꽃상여를 만들어 양민들을 기 죽이는 일화도 있었다. 물론 양인들이 들이닥쳐 꽃상여가 바닥에 떨어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등 난장판이 일어나는 내용이 후술된다. 당시 백정은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고, 옷차림만으로도 구별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창옷(?衣)이라 불리던 중치막이나 비단옷은 입지 못했고, 머리에는 갓(모자)이 아닌 패랭이를 써야 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백정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7종 천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라는 말과 함께 백정들이 쓰는 패랭이, 또는 평량갓을 벗겨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여기에 결혼할 때 말이나 가마를 못 타고, 죽은 뒤에도 상여를 못 쓰는 것이 당시 법도로 취급받았다. 당연히 천민 취급이므로 평민의 아이들에게 존대해야 하고, 서당은 당연히 못 간다. 신분은 양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천민인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는 점에서는 고려시대와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대표 천민인 노비도 백정을 천하게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마이뉴스에서 노비와 백정에 대해서 서술했는데, 백정은 옷이나 그런 것에 모두 제약이 있었던 반면 노비는 겉만 보면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백정은 노비를 함부로 뭐라 하지 않았지만, 법정 싸움에 들어가면 양인인 백정이 유리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로 끌려간 백성들을 환향시킬 때 환향을 거부한 일부 조선 백성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백정도 있었다. 농경사회로 백정을 천시하는 조선과 달리 유목사회의 특징이 있었던 청나라의 만주족들 입장에서는 백정은 고급 기술자라 우대받았고 이는 청나라에 끌려간 백정들도 마찬가지로 우대받았기에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것이다.[10] 임진왜란 후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일부 사기장이들과 같다.[11]

4. 구한 말~일제강점기


구한 말~일제강점기에는 형평운동이라는 것을 벌여 그들의 권리를 더 받으려 했었다. 이때 일제는 주민등록부에 도부라 적고 붉은 점을 찍어 여전히 차별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해 1920년대 무렵에 일어난게 형평운동이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천민에 해당하는 부라쿠민들이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으론 차별받는 것이 사회 문제가 되는 일이 있다. 이걸 다르게 본다면 그동안 사회에 어울리기를 거부하던 백정들이 드디어 사회의 일원이 되고싶어하도록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가 어떻게든 백정을 포용하려고 한 것이 시간이 좀 많이 걸렸지만 어떻게든 성과가 나오긴 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형평운동을 벌인 인물 중 장지필(張志弼)은 백정 부호인 장덕찬의 아들로 백정의 아들이기 때문에 양민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 도부라고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 형평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편견이라는 게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이후에도 실질적인 대우는 계속 그대로 이어졌다. 드라마 "제중원"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박서양도 백정 출신으로 많은 차별을 당했는데, 1920년대 서울에서 의학 강의를 하다가 일부 학생들이 그가 백정 출신인 것을 문제 삼아 수업을 거부한 사태가 있었다. 일본의 민족분열정책에 따라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어느 정도였냐면 백정들은 농민에게 자신이 이야기할 때도 그 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농민이 말할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학교 진학이나 직업도 도축 분야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백정에 대한 천대는 형평 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예천 형평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분사의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인 예천청년회장 김석희가 한 말[12] 때문에 형평사 임원과 김석희간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 장외에서 관람하던 일반인이 그것을 백정들이 버릇이 없어졌다로 인식하고 그들을 박멸하자고 주장하여 며칠동안 형평사를 공격하거나 형평사 임원의 집을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하는 일을 벌였다. 이에 평소 조선의 사회운동을 아니꼽게보던 일본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한동안 예천이 무정부상태가 되기도 했었다.[13]
이런 형평운동에 대한 대립을 보여준 것이, 백정 관련 풍습으로 알려진 것이 백정각시놀이이다. 이규태는 생전 이 에피소드를 들어 조선시대부터 그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규태의 글도, 그 외의 다른 글에서도 풍습이라기 보다는 사건 사고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관련 글의 구조를 보면 모두 '백정의 아내가 동네 행사에 참여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구도'인데, 조선시대라고 가정하면 사는 곳부터 달랐기 때문에 이런 사건 자체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심리상 양인이나 양반은 특히 공공장소에서 백정과의 접촉 자체를 굉장히 꺼렸는데 각시를 타고 말고 하는 보편적 풍습이란게 생길 수도 없고. 즉, 형평운동으로 대표되는 백정들의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 있고, 이에 대한 저항이 충돌하면서 벌어졌던 사건이 해당 일화인 것이다.
이런 사건사고급 일화들을 몇몇 인물들이 일반적인 풍습인 것처럼 글을 쓰고, 이걸 박경리의 토지 등에서 인용하면서 널리 퍼진 것이다. 여기에 섹드립이 포함된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인터넷상에서 유행한 결과 존재하지 않았던 풍습이 나타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쇠좆매의 잘못된 유행과 비슷한 감이 있다.
실제로 초기 항일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신분차별이 있었고[14], 백정출신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물론 후기로 가면 신분 같은 것을 신경쓰면서는 독립운동이건 항일독립투쟁이건 할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약해진다. 백정 출신의 독립운동가로는 박서양이 있다.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백정에 대한 차별은 정부 수립 후 1950년까지도 지속되었으나 6.25 전쟁[15] 때문에 온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가는 뒤집어졌으며 사람들은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족보가 소실되거나 백정 마을이고 전통 지역사회고 뭐고 다 해체되어 사라져버렸으며 더욱이 사회 분위기가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게 용납되는 사회로 바뀌면서 백정이나 노비 출신을 천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상당 부분 희석되게 된다. 북방 유목민족의 후예였던 백정들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대에는 도축업자 등을 직접적으로 백정이라 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뿐더러 그렇게 부르는 것 자체가 차별표현이다.
하지만 비칭이 되다시피 한 '백정' 대신 '육가공 기술자', '정형 기술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활동하는 지금에 와서도 아직까진 본인의 직업이나 직장 등에 대한 공개를 꺼린다고 한다. 외부인에 의한 작업장의 오염과 열악한 작업환경 문제도 있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치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던 점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듯. 이 부분이 집중적으로 묘사된 작품 중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조금 오래되긴 했으나 허영만의 만화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편의 13화 대분할 정형 에피소드와 15권 돼지고기 열전 편의 두당 에피소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해당 편의 취재일기, 후일담에서 작가의 탄식으로 극명히 드러난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문서에 소개된 일화들을 참고할 것.

예비 사돈댁: "네 아버지의 직업을 옛날엔 뭐라 했는지 아니? 백정! 백정들은 마을에서 같이 살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 모여 살 정도로 천대받던 천민 중의 천민이다! 아무리 세상이 개명되었다 해도 어렵게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통과한 기범이 색시로는 적합지 않아!"

-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대분할 정형」, p. 205

성찬 - "정형 기술자가 칼을 잡지 않으려는 이유가 뭡니까?"

조경기 - "정형 기술자? 아니야! '''우린 백정이야!''' 암. 백정이고 말고!"

-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대분할 정형」, p. 198

김학도 - "사장님께 따님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더니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표정… 아직도 눈에 선해. 마치 나를 개돼지 보듯 경멸하는 표정으로 내뱉는 말. '''『주제도 모르는 백정 놈!』''' 칼을 잡고 짐승의 배를 가르는 내가 백정이라면 고기를 파는 사장님은 뭐가 다르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 식객 15권 돼지고기 열전, 「두당」, p. 97

식객 3권의 해당 에피소드를 일례로 들자면, 상술한 바와 같이 예비 사돈댁이 문자 그대로 지랄육갑을 하며 혼삿길을 파토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름난 육가공 기술자였던 '무사' 조경기는 칼을 놓고 대형 음식점에서 화부 업무에만 전념하게 된다. 같은 조선시대에 '''법률만 다룬''' 것은 중인들이 보던 잡과의 하나인 율과로 선발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트집이다. 덤으로 외교관후보자시험(구 외무고시), 의사 국가시험도 조선시대 기준이면 역시 잡과 중 역과, 의과에 속한다. 이후 조경기는 자신을 찾아와 정형 기술자로 대하는 성찬에게 자기와 같은 사람은 백정이라며 자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습. 다행히 조경기의 딸은 도축업자에 대한 편견과 천시가 없고 직업이 7급 지방직 공무원인 남자와 만나 잘 살게 되었다. 결혼 전 남편이 아내로부터 그 말을 듣더니 "장인어르신께서 정형 기술자이시니 우리 가족은 질 좋고 양 많은 고기를 원없이 먹을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고. 조경기는 성찬의 부탁만 들어주고 이후 다시 칼을 잡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말에 기운차려서 다시 칼을 잡아야겠다고 했다. 어찌 보면 나름 해피 엔딩. 더불어 15권의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최고의 도축 기술을 선보이며 두당으로 일하던 김학도가 어느 고깃집 사장의 딸과 서로 사랑하여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고, 아이까지 임신해서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사장의 멸시와 분노 등으로 일이 그르쳐져 딸은 자살하고 '돈아(豚兒)'라 이름붙였던 복중의 아이 역시 죽어버리는 등의 비극을 맞이했고, 이에 독기와 한을 품게 되었다. 작중에서 그 한을 추적하는 중심 소재가 되었던, '돈아'가 새겨진 발골칼을 회수한 김학도가 자살한 옛 연인의 넋 앞에 칼을 바치며 해당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 조경기 때와는 다른 새드 엔딩.
또한, 1962-64년에 황순원의 소설 일월에서도 백정에 대한 차별이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백정이지만 신분을 세탁해 사업가로 변신했던 집안의 차남 기철은 백정을 연구한다면서 호의적으로 대하던 지교수의 말에 넘어가 자기 집안의 역사를 연구하다, 이 과정에서 백정이라는 신분이 탄로나 아버지의 사업은 망하고 국회의원을 꿈꾸던 형은 잠적하며, 기철 자신은 스스로의 어줍잖은 자각이 집안을 망쳤다는 자책에 도망가 버린다는 비극적 결말이다.[16]
그래도 2010년대 들어서 EBS 극한직업편에서 육가공공장에서 정형사와 발골사들이 실명과 얼굴을 보이며 떳떳하게 그들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 방송되는 모습을 보면 그 인식은 상당히 개선된 편이다. 물론 여전히 기피하기는 하나 이는 백정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닌 3D직종으로서의 문제이다. 육가공사가 왜 ''''극한직업 프로그램''''에서 다뤄지는 건지 한 번 생각해보자. 축산물단지 육가공사 초임 월급이나 임금 수준은 바닥을 기는 수준이고 일이 힘든 건 덤이다. 3D라는 인식이 만연하기 때문에 근로조건이나 환경 등의 개선이 매우 더디고, 초과나 연장근로, 휴일근로에 대한 체계적인 연장수당에 대한 것이나 철저한 근로시간 준수 따위도 잘 안 지켜진다. 그나마, 비슷한 계열인 조리사들이 온갖 똥군기에 시달리는 데 비해, 사장이나 직원이나 수습이나 모두 사람 하나 한방에 보내는 칼을 상시 들고 다니기에, 상호간 존중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는 수평적인 직장 분위기가 있다는 장점도 있다.
사회 인식조차도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에 들어가"라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처럼 멸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개선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베테랑 도축업자들은 자기 건물이나 점포를 가져 엄연히 사장님 대접, 자영업자 취급이다. 사실 비하나 존경 같은 인식을 떠나서 이제 도축업자라고 해도 세간의 인식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로 별 관심이 없다.

6. 기타


흔히 극악무도한 독재자살인마에게 인간백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인간인 백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을 가축처럼 도살하는 백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으로 불렸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다. 다만 스탈린의 경우에는 그가 죽은 다음에야 재평가를 통해 그런 별명이 붙었다. 왜냐하면 그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시절에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이 사용하는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혀 숙청되었을 테니까.
서구에서도 비슷한 뜻인 듯 하다. 백정과 뜻이 비슷한 영어 단어인 butcher(도살업자, 정육업자 란 뜻)엔 "잔인한 살인자"란 뜻도 있다. 아군을 무수히 갈아넣는 지휘관에게도 가끔 붙는 별명이다. 물론 이런 별명이 붙는다고 반드시 무능한건 아니다. 아서 해리스나 더글러스 헤이그가 그 예시로 둘 다 런던에 동상까지 세워질 정도니 무능하다는 평가와는 거리가 있다. 이 butcher는 사람의 성으로도 쓰인다. 이 쪽은 smith(대장장이) 등과 같이 조상의 직업이 성으로 붙은 경우.
라틴어로는 Carnifex. 어원이 참 깔끔하다. Carn(고기) - i(발음을 위해 첨가된 음운) - fex(만드는 자). 아울러 Lanius라는 말 또한 백정이라는 뜻이며, 폴아웃2의 등장 노예상인 메츠거(Meztger)또한 독일어로 백정이라는 뜻이다.
야구선수 정대현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대호 전담 투수로 불릴 만큼 이대호를 잘 상대했고, 그 이대호의 별명 중 하나가 돼지였기 때문.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한편 같은 야구선수인 백정현은 이름 때문에(...) 백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 상에서 직업을 비하하는 의미로, 의사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 외과계열 의사하면 메스를 들고 사람의 몸을 갈라 수술하는 이미지 때문인 것 같다.
정형기술자, 도축업자들을 멸칭할 때도 쓰이는데 본인들에게 "백정"이라고 부르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본다. 식객에서도 자주 소재로 다룬 부분이다. 물론 이런 류의 표현이 그렇듯 도축업자 본인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백정으로 부르는 경우는 있지만. 육가공 업체가 밀집한 곳은 절대 조폭들이 설치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 군인, 경찰, 경호원등 합법적으로 살인이 가능한 직종 및 살인청부업자같이 살인 자체가 일인 직업에 종종 붙인다.
그 외 스포츠에서의 백정은 주로 소속 선수들을 마구 혹사시켜서 끝내는 부상으로 나가 떨어지거나 안 좋게 퇴단하게 만드는 지도자를 주로 꼽는다. 특히 야구의 경우가 이게 가장 심한데, 이유노예(야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한 마디로 손쉽게 선수 한명의 커리어를 작살낼 수 있는 권한을 가졌기 때문. 대표적으로 김성근, 김경문, 조범현, 서정환 등이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정글러를 부르는 별명으로 자주 쓰인다. 전 라인을 돌아다니며 라이너들을 도와주는 포지션에다 선호도도 떨어지다보니 주로 멸칭으로 쓰인다.
[1] 그렇다고 모든 도축업자가 다 백정은 아니였다. 양인 도축업자도 있었다.[2] 출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삼봉집(三峯集)』 『아언각비(雅言覺非)』 『성호사설(星湖僿說)』 「선초백정고」(강만길,『사학연구』18, 1964)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 양수척, 재인, 화척, 달단-그 내력과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이준구,『조선사연구』9, 2000) 『花郎攷·白丁攷·奴婢攷』(鮎具房之進, 國書刊行會, 1932) [3] 앞에 취소선이 그여 있으나 사실이 실제로 그러하다. 세금을 내는 양민과 그 밑의 천민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한다.[4] 하지만 아예 씨가 마른 건 아니다. 해산물은 예외로 두었기 때문에 회와 초밥이 존재한 것이고, 또 이걸 근거로 오리에게 물갈퀴가 있다는 이유로 물고기라 주장해서 오리고기를 많이 먹었다. 이 외에도 여러 고기들을 갖은 편법을 써가며 잘만 먹었다. 물론 대놓고 길러서 먹어야 하는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는 비주류가 되긴 했지만.[5] 북방기마민족의 전통 즉 약탈이란 풀한포기를 남기지 않고 모든 물자를 수탈하는 동시에 약탈한 마을의 사람들 중 수레바퀴보다 큰 남자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모두 다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로 끌고 가거나 반항적인 여자는 그자리에서 처벌하거나 하는 수준으로 시대적인 잣대를 고려하더라도 굉장히 악질적이였다. 그런 민족들이 부족다위로 떠돌아 다니며 행정적 군사적 영향이 미치는 마을은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며 지나가고 만만한 마을은 털어버리는 형식이였다. 그 와중에 추적을 받으면 안 되니 왜구로, 홍건적으로, 마적으로 위장하기도 했기에 고려시대 내내, 조선시대 초중기까지는 국가의 골치거리였다.[6] 관련 문제를 다룬 블로그 포스팅 링크. 조선시대 백정차별이 심해진 이유는? 조선전기 백정 개판기(...) 대백정군사작전 조선전기 백정을 보는 시선은 이렇지 않을까. 백정에 대한 썰 추가.[7] 신량역천인 중에서는 여진인 추정 정도가 아니라, 원나라 시기에 고려에 이주해서 매 기르고, 낙농업 하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몽골어로 '-치'로 끝나는 직업을 의미하는 '00적'이라고 불렸으며, 스스로도 달단인(북방 오랑캐식 표현)의 후예라고 주장하던 이들도 있었다.[8] 뭐 이시기 목축업이라는 것이 원나라가 제주도에 만든 말목장이나, 우유소 같은 낙농업 등이지만.[9] 조선시대에 천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보면 결국 고려시대 신량역천인들과 같은 뿌리, 같은 직업을 하고 있다. 봉화간은 봉수꾼이 되었고, 수호간은 성문 문지기가 되었고, 역을 지키거나, 뱃사공이라거나 공천이건 사천이건, 상당수는 고려시대에도 신량역천이었다. 전문적인 기술을 요구하지만, 일이 힘들고 하고 싶지도 않은 천한 일이라는 평가는 결국 거기서 거기였던 것이다.[10] 상술한 것처럼 조선시대 백정들의 조상이 거란족이나 여진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이었으므로, 어찌보면 이들은 자기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간 셈이다.[11] 하지만 도공 같이 특별한 기술이 없는 대다수의 평범한 조선인 포로들은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일본 각 지역의 영주들이 숨겨두고 놓아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으로 잡혀간 모든 조선인들이 다 대우받고 살았다는 인식은 엄연히 잘못된 것이다.[12] '지금 새삼스럽게 형평사를 내세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것이니 그보다 백정의 실질적 향상에 힘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13] 김희곤 외 4인, '경북독립운동사 5', 청솔, 2014, p238~240[14] 평민의병장이 양반에게 즉결처형 당하던 것이 초기 의병의 모습이다.[15] 1950년 6.25 전쟁 전쟁 당시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장교 임관을 앞둔 학생이 부모가 백정 출신으로 밝혀져 장교 임명이 취소되고 강제퇴학당했다는 야사도 있다고 전하니(...). 이 사람의 후일담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북한으로 넘어갔을 성 싶다.[16] 이 사건은 60년대 청파동의 어느 집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며 이 집안을 망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교수의 실제 인물 서정범은 늘그막에 추문에 휩쓸려, 좀 늦기는 했지만 업보를 받기는 했다. 비록 그 사건은 그가 억울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가 60년대에 한 짓의 댓가를 그렇게 치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