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키르히 전투
[image]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10월 14일 작센의 호크키르히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오스트리아군이 승리를 거뒀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의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다.
2. 배경
1758년 8월 25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적을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조른도르프 전투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투 양상은 매우 팽팽했고,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로 인해 수많은 베테랑 병사들을 상실했다. 그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과 연계하기 위해 작센으로 침입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를 무찌르기 위해 작센으로 돌아갔다. 한편, 평소 신중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다운 백작은 베를린 행진은 적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테니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신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재빨리 작센으로 돌아와 9월 10일까지 드레스덴 근처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동생 하인리히 왕자의 군대와 합세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으로 돌아오자, 레오폴트 요제프는 바우첸의 동쪽으로 9km 떨어진 호크키르히 마을 동쪽에 참호를 파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며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일단 적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진지를 치는 건 상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적이 먼저 공격해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이를 응하지 않았고 프로이센군의 거듭된 도발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에 10월 10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장군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운 백작의 진영과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위치, 즉 호크키르히 서쪽에 진을 쳤다. 이에 많은 휘하 장교들이 오스트리아군이 기습해올 것을 우려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이 소심한 사람이니 그럴 리 없다며 비웃었다.
사실 다운 백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상대로 프로이센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경계해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등이 적이 아군을 무시하며 완전히 방심하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기습을 감행할 호기라고 설득했고,때마침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이를 축하할 승전보가 필요하다는 건의도 제기되었다. 이에 다운 백작은 고민 끝에 10월 13일 저녁 전쟁 협의회에서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3일 밤에서 10월 14일 새벽에 걸친 기습 작전을 수립, 집행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대왕
- 부관: 키스 공작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 병력: 30,000 ~ 36,000명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1758년 10월 13일 해질녁, 다운 백작은 말에 재갈을 물려 소리를 내지 않게 한 뒤 전군을 이끌고 진영을 떠나 적을 향해 접근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이 동쪽만 경계하고 있는 것을 이용해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우회하여 프로이센군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군대가 메슈비츠, 슈틴드뢰르펠, 와디츠 북쪽까지 진군해 적의 양측면과 후방을 에워싸게 되자, 다운 백작은 다음날 새벽 5시 때까지 전군에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맡은 다렌베르크 군단은 2열로 행진하여 스트롬베르크 언덕과 비에체 언덕을 좌측면으로 두고 코디츠 후방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본군이 프로이센군의 우익을 습격했을 때 좌익을 견제해 그들이 우익을 도우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프로이센군은 다운 백작이 이런 과감한 작전을 감행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다운 백작이 5시가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이윽고 10월 14일 새벽 5시, 다운 백작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적을 공격했다. 프로이센 사령부는 난데없는 머스켓 발사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그렌저끼리 교전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러나 총격전이 격렬해지자,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급히 숙면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을 깨우고 적에 맞서 싸우려 애썼다. 하지만 어둠이 짙은 데다 안개까지 껴 있어서 아군 식별이 여의치 않았고 프로이센 병사들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오인 사격을 일삼았다.
오전 6시가 되어서야 프로이센군은 적이 대대적인 기습을 개시했음을 알아챘다. 그들은 서둘러 대형을 구축한 후 진지를 기습해온 적을 어렵게 물리쳤다. 이에 다운 백작은 잠시 멈춰서서 그의 군단을 재편성한 후 포병대로 하여금 포격을 퍼붓게 했다. 그 결과 호크키르히 마을은 화염에 휩싸였고 프로이센군 우익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은 호크키르히 마을에서 시가전을 벌였는데, 특히 호크키르히 교회와 교회 묘지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총격전을 벌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양산했다.
프로이센군 우익의 지휘를 맡고 있던 키스 공작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수습한 뒤 적에게 빼앗긴 진지를 되찾고 적을 마을에서 완전히 밀어내기 위해 돌격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맹렬한 반격을 가해오자, 에드워드는 용감히 맞서 싸우면서 본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워낙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본대 역시 혼란에 빠져서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는 심장이 총탄에 관통당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직후 지텐의 기병대가 도착해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을 몰아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 우익의 측면 또는 후방을 공략할 수 없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처음엔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믿지 못하고 단순히 양군 기병대간의 단순한 교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키스 공작이 전사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그는 그제서야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즉시 몇개 대대를 우익으로 급파해 우익이 붕괴되는 걸 막게 하고 자신도 말을 타고 전선으로 달려가 병사들을 수습하려 애썼다. 또한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장군은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에게 역공을 가해 호크키르히 마을에서 몰아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재차 역공을 가했고, 뒤이어 오스트리아 보병대가 반격을 가했다. 모리츠는 격전을 벌이던 중 큰부상을 입고 후송되다가 오스트리아 기병에게 붙들러 포로가 되었다.
모리츠가 포로 신세가 될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른 대대와 함께 호크키르히 마을로 진격했으나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의해 측면과 후방이 공격당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휘하 기병대가 이들을 격퇴하긴 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그러다가 오전 8시가 되자 안개는 걷히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인들은 높은 고지에서 전열을 정비했다. 프리드리히는 반격을 시도해봤지만 오스트리아군이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역공을 가했고, 결국 프로이센군의 모든 공세는 실패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클라인-바우젠 부근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크레체비츠와 벨제른 사이의 평야에 배치되어 군대의 후퇴를 엄호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장군들이 다운 백작에게 추격할 것을 요구했지만, 다운 백작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기고 적을 방해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시도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호크키르히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9천명이었고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8천명이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30개의 깃발과 102문의 야전대포, 그리고 대부분의 프로이센 텐트와 야영용 가구들을 확보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이 효과적인 기습 작전을 시행할 만큼 발전했음을 인정하고 전장에서 65km 떨어진 보르첸 근처의 도비르슈츠의 고지로 후퇴했다. 이렇게 해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콜린 전투에 이어 2번째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패배를 안겼다.
프리드리히 대왕한테 이 호크키르히 전투는 정말 뼈아픈 패배였다. 능력 있는 두 장군 키스 공작과 모리츠를 잃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