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현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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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太后
(1837 ~ 1881)
1. 개요
함풍제의 두 번째 황후인 효정현황후 니오후루(뉴호록)씨(孝貞顯皇后 鈕祜祿氏). 자안황태후라고도 불린다. 가장 유명한 이름은 서태후(西太后)와 비교하여 동태후(東太后)
2. 상세
삼등승은공 목창아의 딸로 적모는 극군양군왕 경항[1] 의 손녀다. 언니는 장친왕 혁인의 처이고, 여동생은 봉은장군 면림의 후처이다. 고모는 정친왕 단화의 처이다.
함풍제 등극 후 함풍 2년(1852년) 2월, 후궁 서열 제4위인 정빈(貞嬪)에 봉해졌고, 동년 5월에 귀비로 승진, 6월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초고속 승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함풍제의 양모인 효정성황후의 의중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녀의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태후라는 별칭이 생겼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고 하며, 동치제와 광서제가 제위할 때 서태후와 함께 섭정을 했다. 본래 청 황실에서는 후궁이라 할지라도 친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그 황제의 친모라는 자격으로 황태후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서태후 또한 황태후가 된 것. 물론 같은 황태후라 할지라도 함풍제의 정실인 효정현황후가 서태후보다 지위도 높고 법적 정당성이나 명령의 권위도 더 우월했지만 서태후만큼 정치적으로 영민하지 못해 항상 서태후의 의도대로 끌려다녔고 뒤에는 아예 서태후에게 모든 걸 맡겨버렸다.
물론 서태후를 어느 정도 제어할 힘은 충분했던 덕에 서태후는 동태후가 살아있을 때는 그토록 싫어하는 동치제의 황후를 죽이질 못했고[2] 광서제가 즉위해서 6년 동안 공동 통치를 할 때도 서태후가 자신을 무시하고 권위를 뽐내려하자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한편, 동치제는 어머니이지만 엄격한 서태후보다 양어머니지만 다정하게 대해주던 동태후를 더 따랐다고 한다.
2.1. 독살설
44세의 이른 나이에 급사해서 서태후에 의한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병상 기록 등이 발견되고 서태후가 동태후를 암살해야 할 정치적 타당성이 없다는 점 등이 지적되면서 독살설은 수그러들었다.[3]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사고로 계단에서 떨어져서 생긴 뇌진탕이 악화되어서 사망한 병사이다.
하지만 광서제가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서 섭정에서 물러났으면 서태후도 섭정이나 간섭을 할 명분이 없어 광서제가 친정을 무사히 본인 뜻대로 할 수도 있었으므로 어찌보면 권력욕이 적으면서[4] 권위가 높았던 동태후의 이른 죽음이 광서제에게는 무척 악운이라 할 수 있다.
[1] 예친왕 대선의 후손[2] 직접 죽이지 못했기에 심리적으로만 압박하여 자살을 하도록 유도했다.[3] 서태후의 후일 행적을 생각하면 동태후를 죽이고자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그랬다는건 서태후가 동태후만큼은 죽일 마음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게 맞다면 동태후는 서태후를 유일하게 브레이크 할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단 뜻이다.[4] 이 부분은 좀 애매한게, 자신이 태황태후로 물러나고 효철의황후가 권력을 잡을까봐 동치제 아랫항렬이 아닌 동일 항렬인 광서제를 고르는데 영향을 끼쳤다. 서태후 독단이 아니라 동태후도 깊게 관여를 했다. 동치제가 막장으로 큰 이유는 서태후 때문도 있지만 동태후의 동치제를 서태후로 부터 떨어뜨리기 위한 양육도 한몫 했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