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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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9대 황제이다.''' 강제 퇴위를 당한 선통제를 제외하면 사실상 가장 재위가 짧은[4] 청 황제이며, 중국 역사상 자기 아들이 황위를 계승한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재위 11년간도 평안치 못하여 온갖 종류의 재난이라는 재난은 모두 일어나 이때부터 청나라는 본격적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된다. 뒤에 나온 황제들이 전부 아무 힘도 없는 허수아비라서,[5] 진정한 실권을 가졌던 중국의 마지막 황제로 볼 수 있다.
2. 즉위 전
도광제의 넷째 아들이며, 생모는 효전성황후 뉴호록씨이다. 도광제가 사망할 시점에는 형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그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그가 즉위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도광제의 정실이었던 효목황후는 자녀가 없었고, 효신황후는 딸 1명을 낳았다. 도광제는 황자 시절 시녀를 범해서[6] 의도치 않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도광제의 장남인 혁위(奕緯)이다. 도광제는 신분이 낮은 시녀에게서 의도치 않게 아들을 얻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것으로 인해 자신의 평판에 흠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가경제는 처음 얻은 손자를 기뻐하여 혁위를 패륵에 봉했으나, 도광제는 이를 싫어하여 자신이 즉위한 직후, 혁위에게서 패륵지위를 박탈하고 평범한 황자의 지위로 내려가게 하였다. 도광제는 황후가 낳은 적자를 원하였기 때문에 혁위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없이 작위를 취소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청의 법제에 따르면 공이 있으면 작위를 올려주고, 죄가 있어야 작위를 강등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도광제가 혁위를 패륵으로 봉하면 제신(諸臣)들이 그를 후계자로 생각할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도광제에게는 적자가 태어나지 않았고, 당시 총애하던 정비(靜妃)가 낳은 차남과 3남은 유아기 때 요절하고, 또다른 총비 전귀비(全貴妃)[7] 는 공주를 연이어서 낳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광제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지면서 유일한 대안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은 아들인 장남 혁위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혁위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는 스승을 붙여주어 교육을 담당하게 하고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광제의 무시와 냉대를 받으며 사는 동안 혁위의 성격은 고집스럽게 변해 아버지와 자주 충돌하였고, 결국 1831년 5월에 혁위가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사고> 등에는 전년부터 아팠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야사에서는 혁위가 공부에 신경쓰지 않고 방탕하게 놀다가 도광제가 분개하여 질책하다가 혁위의 중요부위를 걷어차서 갑작스레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혁위가 1831년 5월에 죽은 직후, 그해 7월에 전귀비(全貴妃)가 도광제의 넷째아들인 혁저를 낳았다. 도광제의 나이 50세에, 그 시점에서는 유일하게 얻은 아들이었다, 1833년 효신황후가 죽자, 전귀비는 황귀비가 되었고. 효신황후의 3년상 이후에 황후로 책봉됨으로서 혁저도 적자로 승격되었다. 1840년 효전황후가 죽었는데, 이 때 혁저의 나이 10세였고. 그의 양육은 정귀비에게 맡겨졌다.
효전황후의 죽음에는 야사가 전해진다. 함풍제는 이미 황자 시절부터 후일 공친왕인 동생 혁흔에 비해 무능함이 드러나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효전황후는 자기 아들이 제위를 잇게하기 위해 혁흔이 먹을 생선요리에 독을 탔으나 고양이가 먹고 거품을 물고 죽자 추궁당하여 전모가 드러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고 한다. 물론, 야사일 뿐이다.[8]
정귀비에 의해 양육된 혁저는 정귀비를 생모처럼 여기면서 효로써 섬겼고, 정귀비의 아들은 혁흔(도광제의 6남)도 친동생처럼 여겼으며 유년시절을 같이 보냈다. 도광제의 5남 혁종은 숙부인 돈친왕 면개의 양자로 입양되어서 후계경쟁에서 탈락하였고, 7남 혁현 이하는 아직 어려 후계가 될 수 없었다. 자연히 도광제의 말년은 혁저와 혁흔이 후계자 지위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혁저는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었으며, 또한 수렵사냥 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이후부터 다리가 불편한 점이 있었다. 혁흔은 문무에 능통하고 활달한 기개가 있어서 도광제가 총애하였다. 도광제는 혁저는 유일한 적자이기도 했고, 효전황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총애하였다면, 혁흔은 그 재능으로 인해 사랑하는 바가 컸다.
혁저가 도광제의 유일한 적자(공친왕 등은 서자)이긴 했지만, 사실 청나라는 중국사의 다른 흔한 한족왕조와 달리 능력있는 아들이 계승한 사례가 많았고 태자밀건법 같은 제도도 있어서 적자 함풍제가 너무 소질이 없어보인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뒤집고 다른 서자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무능했던 그가 어떻게 즉위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야사(野史)가 있다. 도광제가 죽기 얼마 되기 전에 함풍제와 공친왕을 같이 불렀는데, 공친왕은 여러 국정 현안에 대해서 막힘없이 답했지만 반면 두수전(杜受田) 등 스승들의 코치를 받은 함풍제는 '''황제의 병세가 이리도 악화되었으니 이는 다 자식인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 작전이 먹혀서(…) 후계자는 함풍제가 되었다. 그래서 '공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다면'이란 가정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된다고 한다.
정사에는 도광제와 황친들이 수렵사냥을 나갔을 때, 혁저가 단 한 발의 화살도 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도광제는 그가 생명을 중히 여기는 인효한 인품임을 크게 칭찬했다고 하며, 그로서 혁저를 후계자로 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1846년의 일)
입태자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자들 간에 논쟁이 많다. 함풍제가 즉위 이후 보여준 무능함으로 인해 공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더라면 하는 가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는 있으나, 현재 새롭게 득세하고 있는 학설은 함풍제가 황자시절 꽤나 능력이 있었던 인재로 각인이 되었으며, 인효 등 유교적 가치가 중시되던 사회에서 함풍제의 인품이 도광제와 조정중신들 사이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점도 연구도 있다. 함풍제에 대한 재평가를 둘러싸고 현재 대륙학계에서는 상당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3. 즉위 후
3.1. 태평천국의 난
즉위한 바로 그해인 1850년 12월, 중국 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시작되었다. 낙방한 유생 홍수전이 야훼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부르며 금전촌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청나라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거 모여들며 세를 빠르게 불렸다.[9] 이후 태평천국은 멸만흥한(滅滿興漢)[10] 를 기치로 내걸고 영안(永安)을 점령하였으며, 우한 등도 손아귀에 넣었다. 1853년 3월에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핵심부인 난징을 점령하였으며, 이후 난징을 천경(天京)으로 개칭하고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얻은 후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들이치자는 북벌론과, 일단 장강 유역을 따라 영토를 불리며 힘을 키우자는 서정론으로 나뉘었다. 당시의 실권자였던 동왕(東王) 양수청[11] 은 이를 동시에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1853년 5월에 북벌군에는 임봉상과 이개방을, 서정군 지휘관에는 익왕 석달개를 임명하여 각각 보냈다. 다만 북벌군은 청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와 인적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1855년에 고립된채 농성하다가 전멸당했으며, 이개방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여 죽는다.
한편 서정군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올렸다. 함풍제가 북벌군의 진군에 놀라 모든 병력을 베이징에 몰빵하는 사이, 증국번이 이끌던 청나라의 상군은 태평천국 군대에게 연이어 패배하였고, 이때문에 증국번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다만 홍수전이 수도 바로 옆에 주둔한 청군을 몰살하기 위하여 익왕 석달개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중국 서부의 청나라 군대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석달개의 군대는 난징으로 돌아가 난징 바로 곁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의 강북대영과 강남대영을 몰살시켰고, 이로서 태평천국에는 진정한 전성기가 도래한 듯 보였다.
태평천국은 남녀 평등, 구시대 악습 타파, 사유재산 금지, 아편 금지 등 급진적인 사회 개혁 정책들을 내놓으며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이들의 이상도 변질했고 태평천국 지도층은 오히려 청나라 관리 못지않은 약탈 행위를 저지르며 인심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지도층의 내분도 상당히 심각했는데, 특히 동왕 양수청이 점차 홍수전의 지위를 노리자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와 연왕(燕王) 진일강(秦日綱)를 은밀히 불러 양수청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고, 1856년 9월 2일, 북왕부와 연왕부의 군대가 동왕부를 기습해 양수청을 살해했으며, 이를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고 한다. 게다가 유능한 군지휘관이었던 석달개는 홍수전의 친인척 감싸기를 참다못해 1857년 여름에 정예군 10만을 이끌고 사천 지방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12] 아무튼 지도층 간의 내분은 갈수록 심해졌고, 한편 함풍제는 증국번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반격에 들어갔다. 이후 이홍장은 연합군인 상군(湘軍)을 이끌고 서구 열강들의 도움을 받아[13] 태평천국을 멸망시켰다.
태평천국의 난은 13년이나 계속되어 함풍제가 죽은 이후인 1864년 8월에야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이 함락되어 끝났으며, 흡사 강희제 시절의 오삼계의 난처럼... 아니 그보다 더더욱 중국의 남쪽 절반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5년)으로 재정을 소진했던 청은 또 없는 살림에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여 재정이 완전히 탕진되었고,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강남이 초토화되어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3.2. 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이 한참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인 1856년, 영국은 애로호 사건[14] 을 들먹이며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게다가 프랑스도 자국 선교사가 중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빌미로 전쟁을 선포하였고, 결국 청나라는 당대 최강대국인 두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15]
이미 태평천국 때문에 국력을 거의 소진해버린 청나라는 더이상 서구 강대국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이때문에 청나라는 얼마 싸우지 않고 톈진 조약을 맺어 이권을 어느 정도 더 떼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선에서 그치려 했으나, 그 사이에 또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마찰이 생기며 조약 파기 수순까지 들어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기회에 제대로 청나라를 밟아버리기 위해 수도인 베이징을 공략한다는 초강수를 두었고, 끝내 그해 10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했다. 한편 전쟁을 지지했던 함풍제와 조정대신들은 모두 겁에 질려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튀었고, 베이징을 점령한 연합군대는 원명원, 이화원 등을 마음껏 약탈하며 유린하였다.[16][17]
그 결과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을 또 맺어 추가로 개항장을 지정하고 배상금을 늘렸으며 구룡반도까지 강제 할양해버렸다. 한편 러시아는 중개를 빌미로 아무르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떼어먹었다. 한편 2010년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제작된 옥새가 경매에 올라와서 중국 네티즌들을 격노케 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그 옥새 또한 이 시기에 영국군이 원명원을 분탕질 할 적에 반출된 것으로 추정한다.
3.3. 죽음
아무튼 이때 함풍제는 앞서 말했듯 수도를 버리고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몽진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 중개료로 연해주를 차지했다(…) 참고로 연해주는 만주와 함께 여진-만주족의 성지였다. 조약은 체결되었지만 크게 상심한 그는 외국 공사와 친견을 거부해 계속 열하에 있었다. 비참한 처지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인지 열하에 있는 동안 함풍제는 연회와 공연 감상에만 열중했고, 곧 병사하였다.
4. 평가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청나라 최악의 암군'''[18] 으로 평가받지만 그래도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일부에서는 '''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왕조와 나라 모두에 재앙'''이라는 극악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19] , 하는 짓과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변명거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함풍제는 너무 이른 31세의 나이에 사망해서 아들 동치제는 1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황제에 올라야 했고 이는 결국 자신의 후궁 '''서태후'''가 동치제의 어머니 자격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서태후의 실정이 청나라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다.[20][21] 이괄의 난이 청나라에 유리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냈다면 함풍제의 즉위는 청나라에 불리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풍제가 죽고 딱 50년 뒤인 1911년에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함풍제의 치세는 조선 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의 재위 기간과 대략 일치한다. 자연 재해는 빗발쳤고, 민란은 연이어 일어났지만, 정작 왕은 무능하여 그냥 놀고 먹다가 가버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22][23] 반면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로 나라의 문을 열면서 일시적으로는 혼란해졌으나, 1867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1] Tügemel Elbegtü Qaɣan. 현대 몽골어로 투게멜 엘벡트 칸 Түгээмэл Элбэгт хаган (Tügeemel Elbegt Khaan)[2]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3] (지금의 랴오닝성) 후루다오시(葫蘆島市)에 속한 행정 구역, 싱청시(興城市).[4] 물론 초대 황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도 10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은 즉위하기 30년전부터 이미 만주족의 군주였으며, 1626년 영원성(寧遠城)[3] 전투에서 패한 뒤 부상 때문에 병들어 죽었으니 다르다. 지못미.[5] 광서제가 정말 잠시 실권을 되찾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서태후의 쿠데타로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실권을 빼앗겨 버리고 이후 몇십년 간 유폐를 당하다가 독살당해 죽어버렸다.[6] 화비 나라씨이다.[7] 함풍제의 생모 뉴호록씨는 14세때 도광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명문가 출신에 미인에다 총명하고 성격도 온순해서 전부 뛰어나다 라는 의미로 '전귀비'라 불리었다. (이후 황후로 책봉)[8] 청 황실에서 자살은 큰 죄이다.[9] 대체적으로 만주족인 청 황실에 대한 뿌리깊은 모멸감, 아편 전쟁 등으로 갈수록 피폐해지는 경제, 자연재해의 연이은 등장 등으로 당시 청나라 국민들의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10]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이 흥한다[11] 태평천국은 천왕인 홍수전 아래에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 풍운산(馮雲山),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 등 총 5명의 왕들을 따로 두었다.[12] 이들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했으나, 나중에는 보급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청군에게 전멸당했다.[13] 서구 열강들은 반외세, 자주를 주장하는 태평천국의 도움을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만하고 친숙한 청나라를 훨씬 선호하였기에, 나중에는 청나라를 본격적으로 도와주었다.[14] 청나라가 영국인 소유의 애로호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명예로운 영국 국기를 모욕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사실 별거 아닌 사건이지만 영국이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게 하는 빌미를 만들어주고야 말았다.[15] 당시 이 황당한 개전 사유 때문에 영국 의회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결국 전쟁 선포는 의회에서 부결되었으나, 당시 총리였던 헨리 존 템플은 의회를 해산하고 전쟁 선포를 통과시켜버렸다. 다만 영국 내부에서는 제1차 아편 전쟁을 지나치게 일찍 끝냈다는 불만이 있었으며, 지난 전쟁을 통해 얻은 이익이 상대적으로 너무 작다는 인식이 만연하였기에 은연중에 전쟁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16] 당시에는 자금성을 불태워버리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청나라의 정궁을 아예 태워버리는 것은 심하다는 반대 의견 때문에 실행되지는 않았다.[17] 한편 황제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며 진귀한 보물들이 쌓여있던 원명원은 그딴거 없고 그냥 태워버렸다. 이때 반출된 국가급 문화재들이 요즘에도 간간히 영국, 미국 등지에서 발견되고는 한다.[18] 태조 누르하치부터 건륭제까지는 모두 명군이었고(물론 건륭제는 말년에 타락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가경제와 도광제는 각각 희미한 존재감과 아편전쟁으로 인해 좋은 평을 받지 못할지언정 암군은 아니었다. 동치제와 광서제는 모두 서태후의 꼭두각시의 불과했기에 망국의 책임을 온전히 그들에게 떠넘기기 어렵고, 어린 나이에 잠깐 즉위했다 망국으로 인해 퇴위했을 뿐인 선통제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19] 물론 이 인간은 한 영제나 당 의종, 송 휘종, 명 만력제같이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는 아니었기에 인간 취급은 해준다. 차라리 황위에 오르지 않고 일반 황족으로 평생을 보내거나 외세가 없었다면 청나라 최악의 암군 타이틀을 갖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20] 다만 함풍제는 도장을 두 개 만들어 어상은 동태후에게, 동도당은 후계자 재순(사실상 서태후에게 준것)에게 주었다. 성지에 두 개의 도장을 모두 찍어야 성지가 효력이 있게 함으로써 서태후에 대한 견제장치는 두었다.[21] 서태후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라를 쥐락펴락 한것은 견제장치라 할 수 있는 동치제와 동태후가 일찍 죽은게 컸다. 동치제는 친정을 할 20세가 되기도 전에 병으로 너무 일찍 죽었고 동태후는 광서제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22] 근데 철종 위에 있던 게 세도 가문들이었다. 뭘 해보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철종은 오히려 광서제와 비교하는 게 적절할 듯 싶다.[23] 철종이나 함풍제가 이전의 군주들에 비해 정치력이 미달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기에는 어폐가 있다. 조선이나 청나라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되는건 이 시기가 아니라 몇십년쯤 지난 이후이며 그것도 당시 재위했던 군주가 아니라 '''실권을 쥐고있던 서태후와 공친왕,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삽질이 결정적인 원인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기까진 두 나라 모두 회생의 기회가 충분히 존재했었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중론. 특히 청나라의 경우에는 자그마치 100년도 전인 건륭제 때부터 곪아있던게 폭발해서 함풍제의 할아버지인 가경제 때부터 반란이 줄지어 일어나는 등 나라꼴이 조선 이상으로 개판인 상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