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제

 



'''
穆宗 同治帝
목종 동치제
'''
'''묘호'''
'''목종(穆宗)'''
'''시호'''
만주어: 피링아 후왕디(ᡶᡳᠯᡳᠩᡤᠠ ᡥᡡᠸᠠᠩᡩᡳ)
한자: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한호'''
야오닝아 다산 한(ᠶᠣᠣᠨᡳᠩᡤᠠ ᡩᠠᠰᠠᠨ ᡥᠠᠨ᠌)
'''칸호'''
부린 자사그치 칸(ᠪᠦᠷᠢᠨ ᠵᠠᠰᠠᠭᠴᠢ ᠬᠠᠭᠠᠨ)[1]
'''연호'''
만주어: 야오닝아 다산
한자: 동치(同治)
''''''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자이슌(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ᡯᠠᡳ ᡧᡠᠨ)
중국어: 아이신줴뤄 짜이춘(愛新覺羅 載淳)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재순
'''영문'''
Tongzhi Emperor
'''출생'''
음력 1856년 4월 27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자금성 저수궁
'''사망'''
음력 1874년 1월 12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자금성 양심전
'''능묘'''
'''혜릉(惠陵)'''
'''국적'''
청나라 [image]
'''신장'''
160cm[2]
'''재위기간'''
음력 1861년 11월 11일 ~ 1874년 1월 12일 (13년 62일)
1. 개요
2. 즉위 후
2.1. 양무운동
2.2. 죽음
3. 기타
4.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청나라의 10대 황제이다.''' 청나라 최후의 직계 혈통 황제이자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최후의 직계 혈통 황제다. 그의 죽음으로 청나라 황실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이어받은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함풍제의 외아들로 사실상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황제로 불운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그의 시기 청나라는 백련교도의 난,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 이미 수많은 국난들을 거치며 망해가고 있는 국가였다. 특히 제2차 아편전쟁 때에는 서구 침략군들이 수도 베이징까지 약탈하며 위신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함풍제는 청더로 튀어 국정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시름시름하다 죽은 후였다. 이후 함풍제의 아내인 서태후가 권력을 잡고 뒤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고, 청나라는 갈수록 망해만 갔다.

2. 즉위 후


5세라는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즉위 직후에는 함풍제의 유언에 의해 숙순을 비롯한 찬양보정팔대신이 섭정을 하였다. 함풍제는 이들과 태후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모든 성지는 어상과 동도당이라는 도장을 찍어야만 효력을 가진다라고 하여 동태후와 당시 황태자인 재순에게 각각 주었다.
그러나 보정팔대신과 황태후 간에 대립이 심해지고 베이징에 남은 재경대신과 열하에 있는 고명대신 간에 불화로 인하여 기상정변이 발발하여 삼촌인 공친왕의 도움을 받아 함풍제의 정식 부인인 동태후와 생모인 서태후가 공동 섭정했다. 사실상 실권은 대부분이 어머니 서태후에게 있었다고 하지만 동태후가 서태후보다 황실에서의 서열이 더 높아 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기에[3] 동치제 즉위 초기의 청나라는 혼란스러운 편이었다고 한다.
또한 두 태후의 갈등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동치제 양육 방식 문제도 끼여 있었다. 동치제 본인은 엄격했던 친어머니보다 어리광을 받아주고 절대 혼을 내지 않는 동태후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이것은 모자간의 사이가 나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4]
게다가 서태후가 그의 아내 효철의황후 알루터씨(孝哲毅皇后 阿魯特氏)를 싫어하자, 서태후와 동치제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참고로 안타깝게도 효철의황후 역시 불운했다. 그녀의 아버지 알루터 초치(阿魯特 崇綺)는 동치 4년(1865년)에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장원급제한 몽골인이였다. 이후 벼슬이 이부상서에 이르렀으며, 동치 11년에는 국구까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출세엔 동태후의 입김이 영향을 미친 거였고, 애초에 시어머니 서태후는 며느리 효철의황후를 싫어했기 때문에[5][6] 능력과 별개로 초치 역시 서태후의 미움을 샀다.
결국 초치는 추탈되었으며, 효철의황후는 동치제의 요절 이후 동치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도 서태후의 핍박을 받아 거의 유폐된 상태에서 지내게 된다. 그녀는 얼마 후에 금조각을 삼켜서 자살하는데,[7] 100년도 되지 않아 군벌 쑨뎬잉(孫殿英)의 도굴로 금조각을 찾기 위해 시체 복부를 갈라 내장을 헤집히는 만행을 당했다.

2.1. 양무운동


이 시기 청나라는 양무운동이란 개혁을 추진한다. 우선 1861년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8]'이 설치됐는데, 이로서 청나라는 오랜 사대 외교 노선을 공식 포기하고 적어도 서양에 대해서는 '대등한 외교 관계'를 인정하게 된다. 또한 서구의 조선 기술을 들여와 명나라 시기 이후 거의 진전이 없던 중국의 군함을 발전시키려 노력하였고, 증기기관을 수입하여 나름대로 산업화를 시도해보았다. 주로 1860년대에는 강남기기제조총국, 금릉기기국, 복주선정국 등을 세워 군선과 무기들을 자체제작하였으며, 국비를 들여 외국에 고위급 자제들을 유학까지 보냈다. 70년대에는 해군 양성과 기술자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동치제 사후인 80년대에는 산업의 근대화에 온 힘을 쏟았다. 양무운동은 이같은 노력들 덕분에 나름대로 성과도 생각보다 괜찮았으나, 개혁파 관료들이 통일되지 못하고 각기 따로따로 개혁을 진행했기에 옆나라 일본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보수파들이 워낙 굳건하게 버티며 개혁을 반대하고 나서며 개혁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아무튼 동치제 연간에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기치 아래[9] 이른바 '양무 운동'으로 알려진 중국식 근대 개혁이 진행되었다. 물론 결과는 다 알다시피 1894년 -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증명되는 실패한 개혁이었지만. 그래도 이때가 청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그나마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지라[10] '동치 중흥'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동치제 시기의 청나라는 1864년에 태평천국이 장악하고 있던 난징을 함락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천왕 홍수전(洪秀全)이 자결하면서[11] 겨우 강남을 평정하고, 청 정부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동시에 태평청국 봉기를 진압하면서 성장한 향신(鄕紳) 출신 의병장들인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 또한 공친왕(恭親王)[12]의 개혁에 동참하게 된다.
청나라가 그나마 개혁의 모양새라도 낼 수 있었던 것은 동치제 연간 동안에 '''유럽이 그나마 좀 덜 찝적거렸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구 열강들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 ~ 1871년)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함풍제 시대에 이권을 나름 두둑히 챙겨놨었다(러시아도 1860년에 연해주를 얻는 선에서 만족한 상황.). 하지만 동치제가 죽을 무렵엔 그런 불안한 평화도 흔들리게 되었다.

2.2. 죽음


동치제는 성년에 가까워지자 황제로서 친정을 하기 위해 어머니에게서 실권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서태후가 그의 아내 효철의황후 알루터씨(孝哲毅皇后 阿魯特氏)를 싫어했기에 이로 인한 갈등이 발생했고, 이 탓에 정무에 흥미가 사라진 동치제는 유흥과 색에만 열중하다가 천연두로 죽었다.
일설에는 열병으로 죽었다고도 하고, 실권을 가져오려다 실패한 후 어머니 서태후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들을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하자 실의에 빠져 홍등가, 즉 창녀촌을 돌아다니다가 매독에 걸려 죽었다고도 한다.[13]
동치제가 후사를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안그래도 불안정한 청 조정에는 비상이 걸렸다. 결국 당시 황실 최고 어른이었던 서태후는 동치제의 3살짜리 사촌인 애신각라 재풍을 황제로 올렸으며, 이가 바로 광서제이다.

3. 기타


한편, 그 당시 조선은 1863년 26대 고종이 등극, 흥선대원군에 의해 10년 간 섭정 통치가 진행되었다. 동치제가 죽을 무렵(1874년)은 고종이 친정을 선포(1873년)하면서 명성황후 민씨의 세도 정치가 막을 올린 시기였다. 또한 운요호 사건(1875년), 강화도 조약 체결(1876년)도 멀지 않았다. 결국 동양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조선도 나라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또한 일본메이지 덴노의 등극과 함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근대 국가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일본의 제국주의 경향도 점차 심해져 동치제 연간 동안 명목상 청나라와 일본의 동시 번국이었던 류큐 왕국을 완벽한 지배하에 두었으며[14], 동치제가 죽던 1874년에는 대만에도 군사를 파병하여 찝적거리기도 했다. 20년 뒤에 일어날 충돌의 전주곡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청나라에 의해 실록이 편찬된 마지막 청 황제이기도 하다. 동치제의 실록인 목종실록은 사후 광서제 재위 기간에 편찬되었지만, 다음 황제인 광서제의 실록인 덕종실록은 청나라에 의해 편찬되지 못하고 청나라 멸망 후 민국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목종실록은 왕조시대에 편찬된 실록으로서는 중국의 마지막 실록이 되었다.

4. 매체에서


주성치 주연의 코미디 영화 구품지마관에서 배우 황일산(黄一山)이 동치제로 분했다. 봉래루에서 기생 여연을 억지로 취하려다가 협리대신이 나타나자 협리대신에게 들키면 안된다고 포룡성과 함께 숨게 되지만, 포룡성의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척씨 일가 살인사건의 재심을 허락하고 포룡성을 1품 관직인 팔도순안에 임명하여 재심을 맡게 한다. 근데 막판에 반전으로 매독으로 죽었음이 드러나서 주인공들을 경악하게 한다.

[1] bürin ǰasaɣči qaɣan. 현대 몽골어로 Бүрэн засагч хаан (Büren Zasagch Khaan)[2]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3] 사실 동태후는 온화한 성격이라 권력욕이 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태후가 아예 안 나선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서태후의 말에 동의한 편이었다지만 간혹 두 태후는 충돌했다.[4] 물론 서태후는 동치제를 자식으로서는 많이 생각해주었다.[5] 효철황후의 생모가 정친왕 단화(鄭親王 端華)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정친왕 단화와 그의 아우 숙순(肅順)은 서태후가 정권을 잡기 전 최대의 정적이었고, 정친왕 단화와 숙순을 제거한 신유정변 이후에 서태후는 온전히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6] 정친왕 단화의 처는 동태후의 고모이다[7] 광서제의 후궁인 진비와 달리 서태후가 죽이지 않은 것은 정실 황후인데다 임신을 하였고 동태후가 살아있었고 반목을 겪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신 중에 금조각으로 자살을 할정도면 서태후의 핍박이 상상 그 이상으로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다.[8] 조선의 통리기무아문의 모델이기도 했다.[9] 이 슬로건 역시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영향을 미쳤다.[10] 태평천국을 무너뜨리며 강남을 다시 평정하였으며, 러시아와의 국경도 확정하였고 서양도 그나마 덜 청나라에 간섭했다.[11] 단, 잔당은 1866년까지 활동했다.[12] 함풍제의 동생. 즉, 동치제의 삼촌이다.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이힌(愛新覺羅 奕訢). 베이징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동치제의 즉위 직후 서태후와 손을 잡고 이친왕 재원(怡親王 載垣), 정친왕 단화(鄭親王 端華), 숙순(肅順) 등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으나 이후 경계를 받아 1865년에는 의정당 대신에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13] 이 내용은 마오쩌둥주치의였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리즈수이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다. 리즈수이의 조상이 동치제를 치료한 황실 어의였는데, 동치제가 사창가를 즐겨 다니면서 창녀들과 음란한 놀이를 즐기다가 매독에 걸렸다고 말하자 서태후가 분노하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14] 사실 청나라의 번국이란 것도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었고,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여하간 류큐는 1872년 일본의 번이 되었고, 1879년엔 강제로 합병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