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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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청나라 말기의 인물.
청의 제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후궁이라 약간 미묘하지만)이자 큰 이모. 또한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에게는 큰할머니가 된다.
2. 칭호
서태후는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칭으로, 공식 명칭은 햐오슝아 깅우지 일어투 황허오(ᡥᡳᠶᠣᠣᡧᡠᠩᡤᠠ ᡤᡳᠩᡤᡠᠵᡳ ᡳᠯᡝᡨᡠ ᡥᡡᠸᠠᠩᡥᡝᠣ, Hiyoošungga Gingguji Iletu Hūwangheo), 한국식 한자로는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이다. 성은 예허나라(ᠶᡝᡥᡝ ᠨᠠᡵᠠ, 葉赫那拉)씨다.[4] 그 외에도 자희태후(慈禧太后), 노불야(老佛爺)[5] 등의 이명이 있다.
시호는 다 써놓자면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로 줄여서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라고 한다.
영미권에서는 보통 Empress Dowager Cixi라고 부른다. Cixi(츠시)는 위의 시호 중 자희(慈禧)의 중국 발음.
본명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상술했듯이 별명은 저렇게나 많은데 정작 본명이 확실하지가 않다(…). 펄 벅의 소설 '서태후'에서 본명이 예허나라로 나오긴 하지만, 이건 이름이 아니라 성씨다.
심지어는 출신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안후이성 우후설,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설, 산시성 창치설의 3가지 출신설이 있다. 그 외 서태후의 부친인 혜징이 당시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베이징의 피차이 후통(劈柴胡同)이 출생지라는 주장도 있다.
부친은 만주 양람기인(鑲藍旗人) 예허나라 후이정(叶赫那拉惠徵, 엽혁나랍 혜징)이고, 모친은 푸차씨(富察氏, 부찰씨)이다. 후일 친정은 만주 양람기에서 만주 양황기(鑲黃旗)로 편입되었다.[6]
3. 생애
3.1. 후궁에서 황태후로
본래 의귀비(懿貴妃)란 직첩을 받은 후궁이었지만,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 동치제를 낳자 후계자의 생모로서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 그 후 함풍제가 1861년 사망하면서 아들 동치제가 6세 나이로 즉위하자,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동태후(효정현황후)와 같이 섭정을 행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서태후는 후궁이지만 동치제의 생모이기에 성모황태후가 되었고, 동태후는 함풍제의 황후이므로 모후황태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체는 서태후가 부린 억지가 아니라 청 황조에서 본래부터 존재한 규정이다. 청나라 황실에선 후궁의 아들이 황제에 즉위하면 선황의 정실 황후는 모후황태후, 황제의 생모인 후궁은 성모 황태후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같은 태후라 할지라도 모후황태후인 동태후가 지위도 높고 법적 정당성이나 명령의 권위 또한 더 높았다.
실질적인 권력은 대부분 권력욕이 있었던 서태후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두 태후 간의 알력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정작 동치제는 엄격하게 대하는 서태후보다는 온화한 성품인 동태후를 더 좋아했다고.
이런 알력다툼은 자그만치 20년을 갔다. 그러나 동태후가 1881년 어느 날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사망하면서 권력을 완전히 서태후가 장악했다. 동태후의 죽음을 두고 서태후가 손을 써서 암살을 했다는 음모론도 있었으나 공식적으로는 뇌진탕으로 인한 병사가 맞는다.
두 태후 외에도 황실의 어른으로서 정치에 관여하고 있던 공친왕(함풍제의 동생) 때문에 청 황실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동치제가 장성하여 친정을 시도하자 이번엔 모자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는 서태후가 매우 엄격하여 모자간 사이가 멀어진 탓도 컸다. 이런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동치제는 19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3.2. 권력 독점
동치제~광서제 연간에는 양무운동이 진행되었다. 서태후 본인도 '''청나라의 정신은 그대로 간직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지만 결과는 뭐... 청일전쟁에서 다 나온다.
그러나 양무개혁 당시 군함을 살 돈을 서태후가 유용하여 베이징에서 유명한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근거가 부족하다. 정확히 말해서 그 돈은 다시 메워졌기 때문이다.(더구나 이화원은 청이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과시용 건축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신식군함 2척을 사라고 제의했을 때 청국은 서태후의 생일비용 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 2척은 일본에 팔렸고 그중 1척이 청일전쟁 때 맹활약한 요시노(吉野)였다. 전함(!) 2척, 곧 정원(定遠), 진원(鎮遠)을 도입하여 정원을 함대 총기함으로 삼았으나, 주포 포탄의 구입비용을 생일비용 때문에 조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청일전쟁의 패배 원인은 지휘관의 삽질 때문이고, 청나라 해군의 전력은 분명 규모면에서 매우 거대했다지만, 이를 관리하고 증강하는 비용을 제대로 투자하지 않은 것 역시 패전의 중요 이유였다. 포탄이 부족하다고 안에 화약 대신 엉뚱한 콩 따위나 넣어[7] 관리비를 줄이고 훈련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고 기강까지 해이한 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다.[8]
동치제 사후 1875년 순친왕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동치제의 사촌동생이자 자신의 조카뻘인 아이를 양자로 들여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광서제다. 당시 황제는 4살 정도에 불과했기에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했다. 순친왕은 서태후에게 설설 기었다. 1881년에는 동태후가 급사하였는데 암살되었다는 추측이 있으나 증거는 없다. 이후 광서제가 16세가 되면서 명목상 친정을 시작했지만 서태후는 물러나지 않았고, 고로 정권은 여전히 서태후 손 안에 있었다.
3.3. 무술정변과 의화단 운동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을 곁에 두었고, 이들은 변법자강운동을 통해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광서제가 자신의 군대를 가지려고 하자 처음에는 그를 지지하던 서태후가 곧 지지를 철회했다. 변법파는 반발하여 서태후를 제거하려고 했고, 위안스카이는 변법파를 배신하여 이를 서태후에게 알렸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을 일으켜서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따르던 변법파들을 대거 숙청,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혁세력은 그저 황제와 측근들이 이런저런 법안을 제정하고 공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았지만, 청나라의 행정이 이를 소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18~19세기에 인구가 폭증했지만 행정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행정공백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소위 '개혁'에 성공하기란 불가능했다.
덧붙여 광서제는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 황제 교육을 받았고, 엄격한 서태후에게 눌린 탓인지 자기 의지를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한 예로 후궁을 들일 때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서태후가 권하는 여자가 다르자 잠시 고민하다가 말 없이 고르기로 한 후궁 전부를 서태후가 권하는 여자들로 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광서제 항목을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어디까지나 야사인 듯. 여하간 서태후는 정치엔 나름대로 능했지만 자식 농사는 완전 수준 미달이었다.[9]
반외세운동단체인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이들을 살살 구슬려서 구호를 청나라를 부흥시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바꾸게 했다. 이후 서양 열강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광서제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전포고를 했다가, 헛소문임이 밝혀지자 부랴부랴 취소했다. 하지만 이미 성질이 뻗친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으로 베이징을 점령했으며, 서태후는 시안까지 도주했다가 불평등조약 크리.[10]
3.4. 죽음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월이었다. 노쇠해졌어도 여전히 극심한 사치와 향락을 즐겼는데 이것이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며칠 간 계속되는 만한전석 형식으로 연 본인 생일잔치에서 과식한 뒤 서태후는 이질에 걸렸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 간 유폐되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누군가 보낸 독약을 먹고 38세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훗날 21세기에 광서제의 유해를 확인하기 전까지 광서제의 독살은 병사로 은폐되었다.
황실을 조종하던 서태후가 광서제를 직접 독살했거나 혹은 독살에 동참[11] 했을 수 있다. 서태후는 조카인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듣고도 매우 담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즉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였다.
거기에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광서제가 사망하기 전날 이미 푸이를 궁궐로 데려오고 순친왕을 섭정으로 세우라는 유지를 광서제의 이름으로 반포했다고 한다. 당시 광서제가 서태후의 허수아비였음을 생각하면, 서태후는 이미 광서제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후계자 선정을 공식화한 셈이다. 반대로 같은 날 광서제 본인은 치료를 위해 전국에 의사를 구하는 유지를 내렸으므로 광서제의 병세가 절망적이진 않았다. 적어도 죽음을 준비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실제로 후대에 시신을 조사해본 결과 독극물인 비소가 다량 검출되어서 사인이 독살로 확인되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의심한 대로, 서태후가 광서제 독살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참고)
세 살짜리 푸이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고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인 1908년 11월 15일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생을 마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했다.
노쇠하였지만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니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상당히 장수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도 위안스카이에게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4. 평가
4.1. 사치 논란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하다.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어마어마한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우선 진귀한 음식에 관심도 많고 식탐 또한 대단했는데[12] 한 끼에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는데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100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농민 1천여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13] 이를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2000년 전후의 한국을 기준으로 약 8천만 원 정도다. 그리고 절대 같은 음식을 3번 이상 먹지 않았다.[14] 어떤 때는 '''관상용'''으로 호화스런 음식을 가득 차려서 따로 내놓기도 했었다. 오리고기, 돼지고기 등 육식을 무척 좋아했고[15] 서태후가 전용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는 날이면 16칸 열차에서 4칸이 주방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서태후의 식사 준비를 수행하는 요리사만 50~100여 명이나 되었다. 그것도 각종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빼놓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노년에는 자신의 미용을 위해 날마다 산모들을 처소까지 불러서 신선한 모유를 매일같이 마셨고 한다.[16] 이때 산모는 무릎을 꿇은 채 서태후에게 젖을 물려야 했는데, 이는 서태후 본인의 존엄성이 훼손됨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화원에 거주할 때도 전화를 설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가관. 바로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방이 건방지게 누워서 통화하는지 무릎을 꿇고 통화하는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서태후의 운전기사도 예외가 아니라서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차를 운전해야만 했기 때문에 서태후가 탄 차는 늘 잔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저런식의 자동차 운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의 운전 방법은 현대의 자동차와 운전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포드 모델 T 항목 참조. 사족이지만 현대의 표준화된 운전 방식은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군용 차량에서 사용된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옷은 3천여 벌이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다. 보석을 좋아하여 애착이 대단했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고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으며, 비취로 만든 팔찌와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17]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고,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버선과 신발에도 굉장히 신경을 썼는데, 아무리 예쁜 버선과 신발이라도 한 번 신고 나면 다시는 신지 않았다. 서태후의 버선과 신발을 만드는 데만 매년 3천 명 가량이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매년 1만 냥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태후는 중국에서 아직까지도 여후, 측천무후(또는 가남풍) 등과 함께 중국 역사상의 3대 악녀 중 하나로 꼽힌다.)[18] 이게 청나라 황실에 할당된 예산 하에서 이루어진, 원래 쓰던 정도의 사치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라가 망국지란의 위기에 있는데 이런 사치를 부림은 좋게 볼 수 없는 게 사실. 밑에서 설명할 이화원 문제만 봐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서태후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기도 했다. 사실 서태후가 문제가 많은 인물이고 서태후 생전에 청나라가 불안불안하며 무력했지만, 서태후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허약할지언정 분열되지는 않았다. 또한 양무운동과 동치중흥을 있게 한 것은 서태후 덕분이다. 서태후는 인권(특히 여성인권)과 교육, 전족 등 악습을 폐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서양 문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황실의 웃어른이었기 때문에 서태후가 시작하면서 유행하거나 알려진 패션 등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게다가 사치와 정치적인 면과는 별개로 당대 청나라 백성들에게는 많은 존경을 받은 모양이다. 서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펄 벅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골 농촌 같은 곳에서는 서태후가 아직도 살아있는 줄 알고 있었다고. 서태후가 사망한 지 수십 년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농부들은 '이제 우리를 누가 돌봐줄 것인가?'라고 외쳤다고 한다.
의화단 운동으로 피난 생활을 할 때의 야사로, 피난 생활로 인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서태후 일행이 곤란을 겪자 청나라 백성들이 평소 먹던 옥수수 빵을 바쳤고 허기에 지친 서태후는 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이후 자금성으로 돌아온 뒤 서태후는 그 맛을 떠올려서 황실 요리사들에게 옥수수 빵을 만들어 올리라고 했다. 하지만 피난 시절 때 허기진 채 먹었던 그 맛이 나올 리 없었다. 궁리 끝에 요리사들은 원래의 옥수수 빵에다 견과류와 설탕을 넣어 맛을 더한 음식을 만들어 바쳤고 그제야 서태후가 만족했다는 이야기다. 이 옥수수 빵이 중국에서 흔히 먹는 워워터우(窝窝頭)라고 한다. 선조와 도루묵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 하지만 해당 음식이 명나라 시절의 기록에도 언급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더불어 비슷한 이야기는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에게도 있는지라[19] 진실은 저 너머에.
4.2. 이화원 문제
'''서태후가 가장 욕 먹는 이유.''' 북양함대의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떠돌았지만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러시아를 막기 위해 북양함대의 예산 일부를 육군이나 광둥 해군 예산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 하지만 이화원에 쓴 은전 3천만 냥은 당시 청나라 전체 1년 예산의 30%에 달하는 수치로[20] 이 정도로 큰 돈이 정원 건설에 사용된 점은 분명하다. 해군의 예산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중국의 정세를 보건대 외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이런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라면 당연히 국방에 힘을 써야 했다. 마땅히 정원 따위에 쓸 돈이 있었으면 국방비로 돌려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결단이었다.[21] 청일전쟁의 패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총체적인 청군의 난맥과 지휘관들의 무능 때문이었지만 이 돈이 헛되이 낭비된 것이 청일전쟁 패배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중국은 물론 일본의 사학자들조차 인정하는 바이다.
특히 이건 절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서구 열강도 갖지 못한 최신식 장비로 무장한 청의 북양함대는[22] 수병의 숙련도만 어느 정도 받쳐주면 일본의 함대 따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은 정작 훈련할 포탄과 연료 부족으로 수병들의 훈련 상태가 바닥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23] 전함은 전장에서 쓰는 가장 거대한 기계이고 자동화가 되기 전인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모든 함선은 수병의 숙련도가 절대적이었다. 특히 포술의 발달로 포의 사거리가 점점 길어지던 시기였기에 이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청일전쟁은 당시 일본이 국운을 걸고 전 함대를 긁어모아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에 비해 청나라의 전시 준비는 말 그대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이런 군대의 무능은 거국적인 시야와 통찰력 없이 권모술수만으로 정치적 생명만을 연장시켜 온 서태후의 책임이 매우 크다. 다시 말해 평균도 못해 먹었다는 거다. 특히 동북아에서 청일전쟁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서태후가 저지른 횡령은, 당시 시대상황상 국방비와 서구 문물 도입에 마구 부어버려도 모자랄 이 귀중한 백성의 피땀을 이런 식으로 마구 낭비해버리는 건 어떻게 봐도 실드를 칠 수가 없다.
당연히 청일전쟁을 국치 중의 국치로 생각하는 현대 중국에서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안 좋다 못해 바닥을 기는 수준이다. 중국 CCTV에서 2003년에 방영한 근현대사 TV 드라마인 주향공화(走向共和)에서는 이 부분을 묘사하면서 서태후를 신랄히 디스했을 정도다.
4.3. 의화단 운동 관련
의화단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의화단, 의화단 운동 문서 참고. 여기서는 주로 서태후에 관해서 기술. 이화원 다음으로 비판받는 실책.
서태후가 의화단을 얼마나 지지하고 지원했는지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리나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진압할 의도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의화단 활동이 거세지자 1900년 4월에 서양세력들이 두 달 안에 의화단을 진압하지 않으면 연합군을 편성하여 진압하겠다는 밝혔는데 서태후는 방관했다. 그 결과 의화단은 오히려 수도인 베이징에 들어와 학살하고 파괴했다. 사실 광서제를 중심으로 청나라 조정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여 서양과 강화하자는 의견도 많았고, 이홍장이나 위안스카이는 적극 의화단을 진압하려 했으나 서태후는 오히려 의화단을 옹호했다. 좋게만 보자면 서태후가 의화단을 평화적으로 해산시키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를 일이나, 이미 상황의 심각성은 그 정도를 한참 넘었다.
결국 1900년 6월 10일 연합군 선발대 2천여 명이 베이징에 들어오자 의화단의 반격으로 이를 저지해 톈진으로 후퇴했다. 이에 고무된 서태후는 사태파악 못하고 서양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하는 조서를 내렸다. 게다가 독일과 일본 공사가 의화단의 습격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에 빡친 서양 8개국 연합군이 7월 말에 파견한 병력이 무려 군함 54척과 병력 5만여 명이었다. 1, 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군 2만여 명 상대로도 탈탈 털린 청나라가 막을 수 있을 리가...당연히 개전 두 달 만에 베이징이 점령당하고 서태후는 피난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결과 맺은 것이 신축조약. 이때 청은 배상금으로 무려 4억 5천만 냥을 물어내야 했고, 외국 군대의 베이징 주둔을 허가했으며 기존의 통상조약에 불만이 있으면 열강들이 마음먹은 대로 고칠 수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 전에도 청나라가 열강들에게 이권을 강탈당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는 사실상 열강들의 반식민지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다. 거기다 처음에는 뒷배를 봐준 의화단을 이때부터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숙청했다. 의화단이 외국 열강들을 배척한다는 사상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이들은 잘 조직되고 규율잡힌 투쟁단체가 아니라 무질서한 폭동이라 민간인, 외국인들을 마구 강간, 학살하는 상황이라 결국 진압하지 않으면 외세가 개입할 것은 분명했다. 이 때문에 어차피 진압해야 하는 상황인데 서양 열강들이 개입하기 전에 진압했다면 이렇게까지 청나라의 사정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축조약의 내용은 청조에게 매우 불리하고 굴욕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열강간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청의 영토와 주권을 보장하고 서태후의 청조 지배를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신축조약의 배상금 4억 5천만 냥은 청나라의 4.5년치 예산이다. 여기에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물어야 하는 배상금 2억 3천만 냥을 합치면 무려 7년치 예산을 빼앗기는 상황이었다. 이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결국 이런 일련의 사태로 위안스카이, 쑨원 등에 의해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정작 위 문단에 나오는 서태후의 사치가 가장 심해진 땐 의화단 운동 이후다.
4.4. 사후에 당한 재난
청나라가 멸망한 지 얼마 안 된 1920년대에 중국 북부에 군벌이 난립하면서 북경 인근에 있던 청나라의 황릉은 여러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도굴을 당했다. 서쪽에 청서릉, 동쪽에 청동릉이 있었는데 심양에 있던 천명제와 숭덕제의 무덤을 제외하면 역대 황제와 황족의 무덤은 모두 여기 있었다. 결국 순치제를 제외하면 이 지역에 있던 무덤은 죄다 도굴당했다. 순치제가 왜 안 털렸나고 하면 애초에 부장품이라곤 부채와 신발밖에 없기 때문.
이때 시범 케이스로 군벌 쑨뎬잉이 맨 처음으로 정동릉(定東陵)을 털면서 갖은 수모를 다 당했다. 쑨뎬잉은 중국 국민당의 북벌로 상황이 불리해지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덤을 도굴하기로 마음먹었다. 무덤에는 늙은 병사 하나만 지키고 있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아예 대놓고 폭약으로 입구를 폭파해버리고 들어갔다. 쑨뎬잉이 부장품을 무진장 챙길 때 서태후의 시신은 옷이 벗겨짐은 물론, 도굴하던 군인들이 입에 넣어진 야명주를 꺼내기 위해 시신을 입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세로로 갈라버린 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24] 쑨뎬잉과 그의 참모들이 먼저 자신들의 몫을 챙긴 다음 쑨뎬잉은 부하 장병들에게 나머지를 약탈하도록 허가했다. 결국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서로 싸우고 밟고 엉망진창으로 약탈하다가 밟혀 죽은 사람들도 있을 정도. 쑨뎬잉은 약속한 약탈 시간이 다하자 자신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가지고 갈 정도였으나, 이 사실은 선통제에게도 알려져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선통제는 분노하여 위령제를 올리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당시 찍은 도굴 후에 참혹한 모습 혐짤 주의
그러나 위의 도굴 사건만 보고 당대 중국인들이 모두 서태후를 증오했다고 보는 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당대 청나라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생전의 서태후를 청나라의 상징이자 자신들의 보호자로서 사랑했다. 지금의 나쁜 이미지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그 후 쑨뎬잉은 도굴을 얼버무리기 위해 국민당 간부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쳤는데, 물론 거기에는 서태후의 무덤을 포함한 청나라 황릉에서 나온 보물들도 끼어있었다. 심지어 서태후의 보관에 박혀있던 진주가 쑹메이링(장제스의 아내)의 신발 장식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선통제 푸이는 이 일을 계기로 국민당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일본에 협조했다.
4.5. 후대의 평가
서양에서 이미지가 굉장히 나쁜 듯하다. 의화단 사건에서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데다 죽을 때까지 통상 개화에 소극적이었고 동양식 전제군주제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니 아무래도 곱게 보였을 리 없다. 특히 선통제의 영어교사를 맡고 나중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레지널드 존스턴은 자기 책에서 '''이 여자가 청나라 황실을 망친 여자'''라고 맹렬하게 깠다. 또한 서태후가 달라이 라마와 만났는데 이에 중국 민중들이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둘이 만났으니 하나는 곧 죽을 것이라 했는데, 서태후가 곧 죽었다며 깠다.[25]
나쁜 점이 과장되었다는 게 밝혀진 현대에 들어서도 서태후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서태후가 권력을 잡은 이후 국가 최고수반인 황제는 서태후의 바지사장 격으로 변해버렸고 뭘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데다 계속해서 자기가 권력을 쥘 수 있도록 갓난아기를 갓 벗어난 황제들을 계속 즉위시켰다. 결국 마찬가지로 갓난아기였던 선통제가 황제가 된 후 서태후가 급사하자 권위 있는 어른이 없는 청나라 황실의 지도력은 진공상태가 되어버렸다.[26] 특히 광서제를 동정하는 쪽에서는 서태후가 광서제를 학대하고 죽게 하는 데 원인제공을 하여 서태후를 결코 좋게 보지 않는다.
먼나라 이웃나라 저자 이원복은 서태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사실 이원복이 지적한 1차 사료의 문제는 이미 이전에 나온 이야기이고, 문제는 휴 트레버 로퍼(1914~2003)와 같이 1차 사료의 허구성을 지적한 학자들도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서태후의 이미지를 대단히 나쁘게 본다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서태후는 좋게 평가받지 못한다. 서태후가 의화단 운동에 불을 지폈으니 반서방주의 때문에 미화한다는 낭설도 있으나, 중공의 정통 사관에서는 오히려 외세에 굴복하여 의화단의 통수를 치고 탄압했다고 여긴다. 즉 의화단을 미화할지언정 서태후를 미화하지는 않는다. 혁명을 추구하는 중공 입장에서 변법자강운동을 탄압한 서태후는 혁명으로 타도해야 할 수구꼴통봉건주의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 서태후에게 탄압을 받은 캉유웨이조차도 공화제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 때 시신이 능욕을 당했을 정도니...
5. 창작물에서의 등장
- 한제국일본침략사에서는 공친왕 혁흔의 언급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공친왕과 증국번 등을 매국노라고 매도한다.
- 만화 방과 후의 카리스마에서는 서태후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복제인간이 주인공의 클래스메이트 중 하나로 등장. 1권에서 색기담당역할을 맡았고 그 뒤로는 묻혔는지 계속 안 나온다. 일단 미모만은 확실히 절륜하게 묘사됐다.
-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중국계 미국 배우 리사 루(Lisa Lu, 盧燕)가 분했다. 시작부터 어린 주인공 선통제를 불러다 그의 천진난만함을 지켜보며 "남들이 다들 노불야라 두려워하며 죽기만 바라는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는구나."라며 흐뭇함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대사를 한다. 그리고 푸이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사망하고 훗날 군벌 쑨뎬잉의 손으로 토막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는 야명주를 입에 물게 된다. 실제로 서태후는 선통제가 즉위한 지 며칠 후에 사망하고 비록 잠깐 나왔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이 영화 마지막 황제가 한국에서 대박을 거두자 부랴부랴 중국에서 만든 서태후란 영화가 마지막 황제 연관작처럼 홍보되어 개봉했으나 1989년 당시 관객 집계조차도 없을 정도로 쫄딱 망하고 막을 내렸다.
- 위의 마지막 황제의 드라마판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드라마 말대황제전기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선 선통제가 무거운 분위기에 못이겨서 울먹이며 자리를 피하려 한다. 서태후는 사탕을 주며 달래보려 하지만, 결국 푸이에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저 어린 아이가 황제라니......'라는 식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워 한다. 이 드라마에선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뿐만 아니라 서태후 역시 독살했다고 묘사한다.
- 서태후가 주인공이었던 작품인 홍콩 드라마 소녀자희(少女慈禧)도 있다. 다만 액션신이 들어있는 등 각색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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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중화일미에서는 최종 보스는 아니고 유마오신과 카이유의 마지막 대결의 심판으로서 등장한다. 작가의 그림체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회춘. 뒷요리계 최종 보스 카이유의 "인격지배독선요리 파마팔진"으로 산송장이 될 뻔했지만 유마오신(비룡)의 만리장성까지 냄비로 응용한 '어머니의 태양볼' 요리로 기력을 회복한다.마오의 요리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지 이 작품에선 내내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오는데 작가의 후속작인 푸드 헌터에선 기존의 이미지대로 음험한 실루엣으로 나온다. 달랑 한 컷뿐이긴 하지만.
- 펄 벅의 소설인 <연인 서태후>에서는 고뇌에 찬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도 연인인 환관(환관이 되기 전) 영록대부와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로 나온다. 의화단 사건이나 무술정변은 한때의 잘못된 생각이 되었다. 말년에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기품 있게 늙어가면서 중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노인으로 나온다.다시 말하지만 소설이다.[27]
- 홍콩배우 구숙정이 주연한 에로영화 외전 혜옥란(원제: 慈禧秘密生活(자희비밀생활))이 바로 서태후 라이징을 다룬 영화다.[28] 여기서 서태후는 황제의 승은을 입지 못하다가 유곽에서 고도의 성관계 기술을 배워 결국 황제의 승은을 얻었고, 황제가 병석에 드러눕자 황제의 동생을 유혹해 불륜 관계를 가지고 임신하여 출산까지 한다. 이후 그를 이용해 조정을 장악한 다음 그마저 토사구팽하고 절대권력을 손에 넣는다.[29]
- 확산성 밀리언아서에서는 희우형 서태후라는 기사 카드로 등장. 이 게임 카드들이 대개 그렇듯 미소녀 버전으로 변신 당했다. 이 게임에서 실존 인물들 중 기사 카드로 등장한 것은 서태후 외에도 잔 다르크, 마리 앙투아네트, 어우동 등이 있으나, 그 캐릭터들과 비교해서도 서태후는 미소녀 이미지와 괴리가 지나치게 심하다(…).
- 천공의 옥좌라는 일본만화에서는 서태후는 아니지만 가상의 중국왕조 덕나라의 황태후가 나온다. 내용을 보면 미녀에다 사치하는 것까지 완전히 서태후 판박이다. 남편인 선황 사후 자기 친아들을 황제로 세우지만 12년후 그 아들이 죽고 만다. 결국 옛날에 향중독으로 독살당한 남편의 후궁 소생의 황자를 황제로 세운다. 이 황제가 평범한 민가에서 살다가 후계가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황제가 즉위하게 되는데, 황제의 나이가 어리고 병약하다는 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다. 이 작품에서 황태후를 서태후로, 죽은 황태후의 친아들을 동치제로, 주연격 황제는 광서제로 비교하면 실제역사와 거의 똑같을 정도로 들어맞는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광서제는 도광제의 7번째 아들 순친왕의 소생이다.
- 영화 8인 최후의 결사단에서는 잠깐 1~2분 분량이지만 쑨원이 잠시 홍콩을 들린다는 소식을 듣자 극중 보황파(만청황실세력)의 암살단 두령에게 위의 일화처럼 옷을 갈아입으면서 장막 속에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쑨원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는 포스가 압권이다.
- 시오노 에토로지의 괴작 오토코노코물 만화 브로켄블러드에서는 레오타드 격투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설정도 있다. 전설의 레오타드 중에 서태후가 입었던 레오타드도 있다는 언급으로...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청나라를 실제 역사보다도 더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보면 볼수록 이렇게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나 혀를 내두를 정도.
- 중일합작 드라마로 <창궁의 묘>가 있다. 서태후 역을 다나카 유코가 맡았으며 서태후와 가장 외모가 비슷한 배우로 꼽힌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무려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능가하는 대사업의 최대주주가 된다! 그 대사업에서 사재까지 털면서 지분의 절반을 홀로 차지할 수 있는 자본을 대면서 대륙의 기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실제 역사와 같이 의화단 운동의 시발점으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점점 소식이 끊기더니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고 만다.
[1] 現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창지시 상당구 샤친촌[2] 양력 1908년 12월 8일[3] 現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시청구 중난하이[4] 서태후 일족이 예허 나라씨가 아닐 가능성을 중국 사학계에서 제기했다.[5] 풀이하면 높으신 부처님(老爺주인마님 + 佛부처)이다. 청대에는 태상황제와 황태후에게 그런 극존칭을 썼는데, 그래서 중국드라마(ex: 황제의 딸)에서 '숭경황태후'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자막이 자주 등장해서 한국인들이 어리둥절해 했다.[6] 황후와 황태후의 친족은 원칙적으로 정황기나 양황기 둘 중 하나여야만 했다.[7] 물론 콩이 들어간 포탄도 전쟁에서 아예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터지는 포탄인 비격진천뢰뿐만 아니라 터지지 않는 전근대식 쇳덩어리 포탄에도 충분히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청일전쟁 당시 청군이 상대한 일본군은 임진왜란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화력과 튼튼한 군함을 갖춘 군대였다. 콩이 들어간 포탄은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처럼 중화기가 부족하고 나무로 된 군함을 탄 전형적인 전근대적 군대한테나 치명적이었지 근대적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한테는 사실상 종이호랑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8] 청이 쇠하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해 이화원을 짓는 데 '''무려 1년 예산의 30%인 은 3천만 냥이나 소모했다.''' 서구열강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청을 지키려면 모두 군사력에 집중 투입해 군을 정예화하고 증강해야 했는데, 서태후는 그러지 않았다. [9] 특히 광서제를 대한 것을 보면 학대라 할 수준이었다. 친아들인 동치제에게도 엄하게 대해서 동치제가 어머니를 불편하게 여겼다.[10] 이때 서태후를 보좌하여 신임을 얻어 양광총독까지 승진한 사람이 훗날 중화민국의 정학회 정객의 거두 천춘쉬안이다.[11] 위안스카이의 짓인 듯하다.[12] 최후도 생일잔치에서 과식을 하다가 이질에 걸려서 죽었다.[13] 어떤 설에서는 '''백만 냥'''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터무니없이 부풀린 금액이다. 1차 아편전쟁 후 청에 부과된 배상금이 백은 1200만 냥, 2차 아편전쟁 배상금은 800만 냥이었고, 청나라 최고전성기 때인 1803년 1년 세수가 3800만 냥을 조금 넘겼다. 조선이 병자호란 후 청에 바친 세폐가 백은 1천 냥이다. 조선 후기의 소설 허생전에서 조선의 산물을 매점매석하는 데 필요한 돈을 백은 1만 냥으로 잡았다. 당시 중국 농민의 1년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라면 더더욱 백만 냥일 수가 없다.[14] 자신의 선호 음식을 알지 못하게 해서 독살의 우려를 없애려 했다는 말도 있다.[15] 서태후는 한 번 먹은 음식은 두 번 다시 입에 대기를 꺼려했지만, 오리고기, 돼지고기로 만든 요리만큼은 빠진 적이 없었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리고 돼지고기 요리 중에서도 동파육을 특히나 좋아해서 '향령(響鈴)'이라 이름을 붙이고 매번 즐겼다고 한다.[16] 하지만 모유에는 미용과 관련된 효과가 전혀 없다. 모유의 원료는 혈액으로 단지 아기에게 필요한 면역물질이나 영양소들이 분유에 비해서 풍부하게 있는 아기 특화 식사일 뿐이다. 즉, 그냥 하등 쓸모없는 뻘짓이었다.[17] 중국 사극들 중 청나라 시기를 배경으로 한 궁중사극을 보면 극 중 비주얼을 위해 시대적 고증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과 '대랍시'란 머리 스타일이 많이 나오는데(예: 후궁견환전, 환주격격), 이런 의상과 대랍시는 청 말기에 서태후가 주로 즐겨 입거나 꾸미던 의상과 머리 형태였다. 오히려 옹정제나 건륭제 시기에는 황실 차원에서 사치를 금하여 의상과 머리가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수수한 편이었는데, 드라마 보보경심이 이를 잘 고증한 편.[18] 다만 통설적으로 악녀라며 가남풍과 측천무후, 서태후를 싸잡아 매도하기엔 좀 애매한 감이 있다. 여자가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유학자들에게 지나치게 매도됐다. 공포정치나 사치 향락 등 문제점이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시대상으로 참작되는 부분도 있고, 재평가될 만한 구석도 분명히 있기 때문. 특히 무후는 기어오르는 반동세력을 마구 때려서(...) 누르며 국가 안정에 힘썼는데 시대상을 생각하면 과하게 절하되는 감이 있다.[19] 거지 시절, 먹다 남은 여러가지 채소를 끓인 찌개가 그렇게 맛있어서 황제가 된 후 찾았다는 이야기.[20] 1874년 기준으로 청나라 예산은 1억 냥이었는데 은 4천 톤에 해당한다. 청일전쟁 패배로 청이 일본에 지불한 배상금이 2억 냥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받아낸 랴오둥 반도를 서양 열강들의 반발(삼국간섭)로 중국에 다시 돌려주는 대가가 딱 3천만 냥이었다.[21] 한무제만 해도 흉노, 고조선, 남월과의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대토목 공사를 벌여 국가재정을 파탄내는 원인제공을 했다.[22] 당시 청나라가 독일 조선소에 발주한 함선은 독일 해군도 발주 못한 최신예함이었다. 괜히 대륙의 기상이 아니다.[23]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일본 장교가 청나라 함대를 방문했을 때 두 가지 놀란 게 있는데 하나는 배와 포의 거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포 사이로 널린 빨랫감들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당시 전함에서는 포 사이에 빨랫감을 너는 것을 금지했다.[24] 항간에는 야명주가 입 안에 있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시체가 빼자마자 순식간에 썩어버렸다'''는 말도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쑨뎬잉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야명주가 시신의 부패를 막아준다고 하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썩어있었다.'고 한다. [25] 존스턴은 입헌군주국가인 영국 출신으로 변법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변법운동의 원수인 서태후와 위안스카이를 열심히 깔 수 밖에. 물론 이 인간은 청나라를 멸망시킨 쑨원도 미워했다.[26] 서태후의 뒤를 이어 황태후가 된 융유태후는 인간성 면에서는 서태후보다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말 그대로 서태후보다 나은 것이었다. 황후 시절에 광서제의 후비들을 핍박하고 남편 광서제를 감시하며 오만하게 대하여 남편과 후비들에게 증오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융유태후의 카리스마와 권모술수는 서태후에 비해 한참 떨어졌다.[27] 펄 벅이 당대에 페미니즘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여성 지배자상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 심하게 각색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28] 감독이 유위강으로 훗날 무간도 시리즈 감독을 맡았다.[29] 단순 에로 영화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권력을 탐하다 나중엔 권력의 화신이 되어가는 서태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