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갓산토다 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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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전국시대 주고쿠 이즈모 국의 갓산토다 성에서 벌어진 오우치와 아마고 사이의 전투. 요시다고리 산성 전투 후 위축된 아마고 가에 대한 오우치 가의 대대적 공세로 벌어졌지만, 내부 분열로 인하여 오우치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2. 배경
오우치는 주고쿠의 스오, 나가토 2개 국과 기타규슈의 치쿠젠, 부젠을 지배하면서 오랫동안 주고쿠 지방에 강력한 가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우치 요시오키가 교토로 상경하여 10여 년 동안 교토에 머물러 있을 때 아마고 츠네히사가 등장해 이즈모, 이와미 등을 장악하고 오우치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키, 빈고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1] 요시오키는 귀환한 이후 아마고와 기나긴 전쟁을 벌였으나 츠네히사를 제압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당주의 자리는 그 아들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물려졌다. 그 후 두 가문은 아키 등지에서 국지전을 벌이며 팽팽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마고 츠네히사가 은거하고 아마고 하루히사가 아마고의 당주가 되었다. 하루히사는 오우치에게 종속되어 있던 아키의 고쿠진들에 대한 공세를 가했으나, 그들의 수장격이던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 요시다고리 산성 등지에서 가로막혀 지지부진한 공성을 벌인 결과, 오히려 오우치의 원군을 얻은 모토나리에 의하여 역공당해 패퇴하였다. 하루히사의 군사적 입지가 줄어든 데에 더하여 은거해있던 츠네히사까지 사망하는 악재가 겹치자 아마고 가의 기세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위축되었다. 오우치 가 당주 요시타카는 이에 기세를 몰아 아마고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거병, 아마고령 깊숙히 진군하였다.
3. 전개
오우치 군은 갓산토다 성 공성을 개시했다. 그러나 갓산토다 성이 위치한 교라기 산은 매우 험준한 지형으로 성을 공략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아마고 군은 농성전에 돌입하면서 소규모 부대로 오우치 군의 보급로를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개시하면서 오우치 군은 보급에 차질을 겪기 시작했다. 때문에 전투는 장기전으로 돌입하기 시작하는데 킷카와 오키츠네 등 일부 아키 고쿠진들은 '''대낮에''' 오우치를 배반하고 아마고 군과 함께 오우치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4. 결과
결국 이러한 전개에 1543년 5월 7일 오우치, 모리 연합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퇴각 중에 연합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오우치는 바닷길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요시타카의 양자 오우치 하루모치가 탄 전함이 침몰하면서 전사하는 등의 타격을 입었고 모리는 아마고 군과 지역 농민들의 저항에 의해 모토나리와 장남 타카모토가 가신 와타나베 카요우의 희생으로 간신히 아키로 귀환할 수 있었다.
5. 영향
요시타카는 이 패전으로 인해 정무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되고 사카라 타케토 등 문치파를 등용하면서 문예 활동에만 관심을 쏳게 되면서 오우치 가문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반면 아마고는 큰 위기를 넘기고 하루히사 대에 오우치에게 빼앗긴 이와미 은광을 탈환하고 이즈모, 호키, 미마사카, 이나바, 비젠 등 8개국의 슈고를 겸하면서 전성기를 이룩한다.
모리는 이 전투 이후 이노우에 가문 등 유력 가신 세력들을 제거해 주가의 권위를 세우고 킷카와, 코바야카와 두 가문을 병합해[2] 아키 고쿠진 연합 수장의 위치를 확고히 해 아키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오우치, 아마고 다음 세력으로 성장한다.
6. 창작물에서
NHK 대하드라마 모리 모토나리에서는 이 전투를 아마고 츠네히사가 죽기 전 내세운 책략으로 나오는데 정확히 말하면 오우치, 모리 등이 아마고를 침공하게 해서 반격을 가하려는 계략으로 표현된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도 역시 아마고 츠네히사의 계략으로 나온다.
[1] 요시오키의 교토 상락 때 츠네히사 역시 연합 형식으로 같이 있었으나 이후 곧바로 귀환해서 빈집털이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2]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 삼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각각 두 가문 당주의 양자로 보내 차기 당주로 만드는 형식이었는데 이를 모리 료센(양천)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