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오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우에스기 카게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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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早川隆景 (こばやかわ たかかげ) 소조천륭경
(1533년 ~ 1597년 7월 26일)
1. 소개
2. 생애
3. 기타
4. 기타 창작물
4.1. 노부나가의 야망
4.2. 전국무쌍 시리즈
4.3. 그외


1. 소개


센고쿠 시대의 무장,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의 적삼남으로, 모리가 3형제의 막내. 모리 료센의 일각으로 모리 가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지녔으며, 도요토미 정권 시기에는 세이카(清華) 다이묘 중 하나가 된 인물.

2. 생애


주고쿠 지방의 모리 씨의 분가 코바야카와가 당주. 코바야카와 가문의 지파 타케하라 코바야카와 가문의 후사가 없이 제 13대 당주 오키카게(小早川興景)[1]가 사망하면서 코바야카와 가문으로 보내져서 대를 이었다. 나중에는 아버지와 오우치 가문의 개입으로 코바야카와 씨 종파(누다 코바야카와 씨)도 계승을 가장하여 탈취하였다. 타케하라 코바야카와 가문 사람이 이름에 대대로 쓰는 글자인 '카게'(景)가 이름에 들어가고[2] 모리 가문에서 잘 쓰는 '모토'(元)는 이름에 없는데, 이는 장성하기 전에 이미 코바야카와 가문에 입적되었기 때문으로 원복해 '모리 모토하루'라는 이름을 쓰다가 다른 가문에 들어간 작은 형을 포함해 다른 형제들과는 이름이 이질적이다.
둘째 형인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와 함께 '모리의 두 강(毛利の両川)'이라고 불리며, 그 말 그대로 모리 가를 지탱하는 두 기둥으로 활약했다.[3] 주로 모리 가문의 수군을 인솔하였고[4], 수군의 정보력을 활용하여 계략, 외교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지모가 뛰어난 인물이라 맹장인 작은 형과는 어린 시절 눈싸움 할 때부터 스타일이 달랐다고 한다. 형 킷카와 모토하루가 무조건 왕뭉탱이로 날리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매복해있다가 날렸다고. 이를 지켜본 아버지 모토나리는 "용감한 모토하루는 용맹한 무장들이 많은 산인 지역에 배치하고, 지혜로운 타카카게는 정략이 많이 필요한 산요 지방에 배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며 이에 따라 모리 료센(킷카와 - 코바야카와) 체제가 성립되었다.[5] 모토나리의 세 아들 중 가장 아버지를 닮았다고 볼 수 있는 인물. 그래서 게임으로 등장할 때는 능력치도 무력만 더 높고 아버지의 마이너 버전이지만, 아버지가 워낙 먼치킨이기 때문에 아들도 훌륭하다.[6]
모토나리 말년, 오토모 소린, 우라가미 무네카게, 시노하라 나가후사 등에 의하여 모리 포위망이 형성되자 산요도 방면에서의 군사 작전, 외교전을 총괄하였고, 부친 모토나리가 사망한 이후에는 형 모토하루와 함께 조카 모리 테루모토를 보좌하였다. 본래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오다 노부나가와 모리 가의 사이가 틀어져 결국 전쟁이 발발(주고쿠 정벌)하자, 오다군을 저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빗추 타카마츠 전투 때는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쓰러지고, 그 사실을 숨긴 하시바 히데요시와 협상하여 휴전하였고, 이후 정식으로 세력을 구축한 히데요시와 오랜 협상[7]을 통하여 하시바와 모리의 협력 체계를 구축하였다. 시코쿠 정벌에도 참여해 이요 1국을 받았고, 규슈 정벌에도 참여해 치쿠젠, 치쿠고 등을 받았다.
임진왜란에 참가, 전쟁 초반부에 전라도[8] 금산군 일대를 빠르게 점령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전라도 지역의 공격을 맡았다. 두차례에 걸친 금산 전투는 거의 피해 없이 막아냈으나, 이치 전투에서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권율과 황진에게 막혀 전주 공략에 실패한다. 다시 금산으로 물러났다 북에서 밀고오는 명군의 압박을 받던 와중에 1592년 8월 16일, 우척현 전투[9]에서 거창군을 통하여 진입하려는 시도가 김면과 정인홍에게 저지되자 전라도 진입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명군의 물량에 밀린 고니시가 평양성에서 물러나자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퇴각 의견이 주된 의견였으나 고바야카와는 '''"여기서 그냥 물러난다면 아군의 사기도 떨어지고 적군의 기세도 올라서 오히려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주장하며 명군과의 일전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나온 전투가 바로 벽제관 전투.[10]
1593년 2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명나라 군에게 명성이 퍼졌다. 여담이지만 벽제관에서 명군이 후퇴하자, 서울 탈환을 위해 북상, 행주 산성에 주둔한 권율의 3천 전라도 병력은 갑자기 쭈구리 신세가 되었으며 승리로 승기가 오른 일본군은 이참에 함께 쓸어버리기 위해 공세를 계획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행주 대첩. 1593년 3월 14일 (음력 2월 12일), 행주 대첩 때에도 참전해서 그의 부대가 목책을 뚫고 들어오는 등 제법 선전했으나 조선군의 분전으로 결국 패퇴했다. 이후 낙동강의 수운을 장악, 통제하기 위해 지금의 부산광역시 구포 지역에 왜성을 쌓았고 이는 지금도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우세한 군세를 바탕으로 꾸준히 조선군과 명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금산에서는 강을 방어선 삼아 우주 방어를 준비하던 조선군을 야습으로 격퇴했고, 1차 금산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물량 차이를 바탕으로 출성 공격을 감행해 고경명의 조선군을 패배시켰다. 2차에서는 조헌의 의병이 후속 부대가 없고 수가 많지 않은 것을 노려 야간에 출성해 포위망을 짜고 승리. 권율과는 2번 싸웠는데, 이치 전투, 행주 대첩 2번 다 권율에게 패했다.
통설에는 말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 탄생 이후 히데요시가 처조카이자 양자였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로 하여금 모리 가를 잇게 하려 하자[11], 주가를 지키기 위해 조카 모리 히데모토를[12] 데루모토의 양자로 들이고 히데아키는 자신의 양자로 맞이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래 자기의 양자인 막내 동생 히데카네를[13] 파양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모리 히데모토를 테루모토로 하는 것을 히데요시가 공인한 것은 그 이전인 1592년의 일이며, 증거가 되는 문서 역시 남아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 히데모토를 폐하고 히데토시를 모리의 후계로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히데아키의 입양은 타카카게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정치와 지모가 뛰어난 인물로서 전국에 이름을 떨쳤는데, 히데요시는 '서쪽은 타카카게에게, 그리고 동쪽은 이에야스에게 맡겨두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이 일본에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는 인물은 타카카게와 나오에 카네츠구 뿐이다.'라고 했으며[14], 구로다 요시타카는 타카카게의 부고를 받고서 '일본의 마지막 현인이 죽었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3. 기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한천륭경"이라고 오기된 기록이 존재한다. 원본보기를 해보면 원본에도 조(早)자가 쓰여야 할 부분에 한(旱)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 기타 창작물



4.1.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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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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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아버지의 다운 그레이드 판 능력치를 가지고 등장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A급 무장. 아버지를 제외하면 항상 가문 지모 1위를 놓치지 않는다. 천도 기준으로 통솔 87 무력 71 지력 92 정치 93에 특기는 천궁. 노부나가나 이에야스보다도 나이가 많은데 코에이 게임에서는 "삼형제 중 막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항상 청년 일러스트로 등장하는 편.
창조에선 통솔 88 무용 74 지략 95 정치 95로 능력치 상한이 100으로 돌아간 시리즈인데도 오히려 능력치가 상향되었다. 아버지 모토나라와 함께 서부일본 전체에서 손꼽히는 지략/정치수치의 소유자. 전법은 큰형 타카모토, 작은형 모토하루와 더불어 가지고 있는 고유전법 <세개의 화살>로 사격시 드물게 적을 혼란시키는 효과가 부여되는 전법이다.

4.2. 전국무쌍 시리즈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전국무쌍) 문서 참조.
소셜 게임인 백만인의 전국무쌍에서는 군배를 바이올린처럼 다뤄 선율을 자아낸다. 조카 모리 테루모토를 상당히 엄하게 다루는지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자 테루모토가 덜덜 떠는 이벤트가 있다.

4.3. 그외


전국란스코바야카와 치누의 모티브가 되기도.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김시원[15]이 맡았다.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에서도 등장. 모리가 삼형제 중 유일하게 아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고 엔딩까지 가는 캐릭터이다[16] 이쪽도 지모 계열 캐릭터로 어려운 책을 즐겨 읽는다고 시녀와 타카카게의 아내의 입으로 설명된다. 젊은 시절 일러스트는 다소 중성적인 분위기의 청년인데 나이가 들면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초기 작품들의 아버지 일러스트처럼 에이브러햄 링컨 수염을 기른 일러스트로 변경된다.
[1] 모리 모토나리의 조카 사위다.[2] '타카'(隆)는 이 시절 이 동네가 다들 그렇듯이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받은 것.[3] 두 성씨 모두에 내 천(川) 자가 들어감에서 유래한 말.[4] 본래부터 코바야카와 가문은 강한 수군을 보유한 세력이었다. 그랬기에 모리 수군은 초기부터 타카카게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모리 수군이 아키의 호족 수군 세력을 병합하면서 그 세력 역시 타카카게가 통제하게 된다.[5] 이 때 큰 형 타카모토는 아버지와 함께 가만히 눈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모토나리는 그걸 보고 "자기도 끼고 싶었을 텐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타카모토는 당주 자리에 어울린다."고 했다고 한다.[6] 무력도 사실 거기서 거기다. 혁신과 천도에서만 모토나리보다 살짝 더 높고 통솔과 무력이 분리된 시리즈인 패왕전, 열풍전, 창조에서는 오히려 더 낮다.[7] 하시바측에서는 하치스카 고로쿠 등이 나서 협상하였다.[8] 당시에는 전라도 였으나 갑오개혁, 을미개혁을 거치면서 충청남도에 편입되었다.[9] http://ko.wikipedia.org/wiki/%EC%9A%B0%EC%B2%99%ED%98%84_%EC%A0%84%ED%88%AC[10] 실제로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 이후 명군의 군사 행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외교적인 협상으로 정책이 바뀌었다.[11] 당주 모리 데루모토에게 당시 아들이 없었다.[12] 모리 모토나리의 4남인 호이다 모토키요의 아들이다. 호이다는 모토나리가 50 이후 측실에게서 얻은 아들로서 정실 소생의 아들들과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난다. (20년 정도) [13] 모리 모토나리의 막내 아들로서 그의 나이 칠순이 넘어 본 늦둥이 of 늦둥이. 태어났을 때 큰형 타카모토는 이미 사망한 상태.[14] 단, '하지만 타카카게는 용기가 부족하되, 카네츠구는 지혜가 부족하다'라고 덧붙였다.[15] 태조 왕건수달 (능창) 역 배우[16] 타카모토는 사후 테루모토가 등장, 모토하루의 경우는 끝판 직전에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고 리타이어해서 히로이에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