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모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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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7년 4월 16일~1571년 7월 6일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 여러가지 모략으로 유명해서 모신(謀神)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며 서국 제일의 다이묘(西国一の大名)라고도 불린다.
젊은 시절에는 당대의 주고쿠의 패자인 아마고 츠네히사의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 어머니는 5세 때 잃고, 아버지는 10세 때 잃고, 형은 19세에 잃었다. 이것도 보통 고생이 아닌데, 그외 친척들도 도움을 안주었고 이후에 가문의 당주가 되었을 땐 이노우에 일족의 간섭을 받게 돼서 다시 한 번 고생의 세월을 보냈다. 오죽하면 모리 가문이 잘되라고 비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17세 때는 명나라 사람이 모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모토나리를 보고는 한 고조, 당 태종의 풍모가 있다고 평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외교와 모략에 능통하여[3] , 신흥 강자인 이즈모 아마고 가문과 전통의 명문인 스오우 오우치 가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가문을 보전했다.
모리 가문은 명가이기는 했지만 모토나리가 가독을 계승했을 당시 아키는 온갖 작은 고쿠진(國人) 세력으로 쪼개져 있었고 모리 가문도 가신들의 실권이 당주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당장 가문의 총령인 아버지와 형이 급사했었고 형의 뒤를 이은 조카 고마쓰마루도 9세로 요절해 자신이 가독이 된 처지였다. 모토나리는 횡포를 부리는 가신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元兼)를 숙청하거나 반역을 일으킨 동생 아이오 모토츠나(相合元網) 및 그와 함께한 와타나베씨 일족 등을 물리치는 등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답게 치열한 내부 분쟁을 통해 주가의 권력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아마고 츠네히사가 은퇴하자 오우치 가문에 장자 모리 타카모토를 인질로 보내 오우치를 주가로 모시게 된다.[4] 병상의 츠네히사는 "모리가 떠오르는 해의 기세와도 같으니 상대하지 말라"고 했으나 츠네히사의 손자이자 당주인 아마고 하루히사(당시 이름은 아키히사)는 말을 듣지 않았고, 그 결과 모리 모토나리에게 대패했다.[5] 이 패배로 많은 아마고 측 성주들이 오우치 가에 붙었다. 그러나 얼마 뒤 오우치 가가 아마고를 공격했다가 아마고의 작전에 말려들고 아키의 호족 킷카와 오키츠네[6] 가 배반하여 역으로 오우치가 대패하며 다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모토나리도 이 전투에서 부하의 희생으로 목숨을 겨우 건져 돌아갔다.
1546년 아내 묘큐와 의붓 어머니가 죽은 뒤 타카모토에게 가독을 넘겼다. 그러나 여전히 가문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킷카와 오키츠네가 그 전 아마고와의 전투에서 배반한 것 때문에 킷카와 가 내에서 지지를 잃고 결국 축출되자 모토나리는 둘째 아들 모토하루를 보내 당주로 세운다. 그 뒤 강한 수군을 보유한 아키 호족 누타 코바야카와 가에도 모략을 걸어 가문을 분열시키고 어렸던 당시 당주의 누나와 자신의 셋째 아들 타카카게를 결혼시키며 타카카게를 누타 코바야카와 가 당주로 세웠다.[7] 이로서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시작으로 모리 료센 체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대패 이후 오우치 가는 당주인 오우치 요시타카가 문화 생활에 빠져 무신들을 천시했는데, 이에 점점 가문 내에서 고립되어가던 무신파의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을 죽이고 분고의 오토모 요시아키의 차남으로 오우치 가에 양자로 들어온 오우치 요시나가를 당주로 내세워 주가를 장악했다.
하루카타는 원래 모토나리와는 험악한 사이가 아니어서 모토나리가 전 당주 요시타카를 지지하던 호족들을 공략하는 것에 대해 도움을 주었고, 아예 모리가 아키와 빈고의 호족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동맹까지 맺었다. 그러나 아마고 하루히사의 공격을 또다시 모토나리가 막아내며 모리 가문의 세력이 커지자 점차 경계하기 시작했다.
모토나리도 스에 하루카타와의 결전을 생각했지만 병력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다. 하루카타는 3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모토나리는 5천이 고작이었다. 거기다 영지를 늘려놓긴 했어도 주코쿠의 호족들이 언제 배반하고 하루카타 쪽으로 붙을지도 모를 일인 데다 아마고 가문이 배후를 공격해 올 수도 있었다. 모리 모토나리가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거짓 편지를 보내 하루히사로 하여금 숙부 구니히사를 의심하여 죽이게 하고, 구니히사가 이끌던 아마고 가문의 정예 무사 집단인 '신궁당'을 제거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하루히사가 원래 신궁당의 두목이자 숙부인 구니히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구니히사의 아들 사네히사의 횡포로 이미 신궁당은 아마고 가 내에서 지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현대의 연구에서는 이 일이 모토나리의 모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루히사가 직접 신궁당을 제거했다는 쪽으로 굳어졌다.[8]
어쨌든 뒷조심을 없앤 모리 모토나리는 편지 한 장[9] 이 스에 하루카타에게 입수되게 하여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로 꾀어낸다. 스에 하루카타는 2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이츠쿠시마로 왔지만 이츠쿠시마 자체가 대군이 움직이기에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악천후가 겹쳐 통제가 불능해진 하루카타의 대군은 모리 가문의 3천 군세에 각개격파로 대패했고 대기시켜놨던 군선들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인솔해온 무라카미 수군에 의해 전멸했다. 하루카타는 근처의 동굴로 피신했으나 곧 자신의 형세를 비관하여 자결했다. 이것이 일본 3대 기습 중 하나인 이츠쿠시마 전투이다. 이후 오우치 가문은 모토나리에게 공략당했고 당주 요시나가는 자결하여 서국 최고 명문인 스오우 오우치 가는 멸망한다.
이에 아마고 하루히사는 오우치의 영향력에 있던 이와미 은광을 공략한다. 모토나리는 반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뒤 하루히사가 급사하고 아들 요시히사가 뒤를 이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중재로 휴전을 맺는다. 그러나 모토나리는 이즈모 공략을 결심했고, 얼마 뒤 맹약을 깨고 다시 공격을 개시한다. 1년 넘는 농성전 동안 모리 타카모토가 급사했지만 아마고가의 거성인 이즈모 갓산도다 성을 함락시키고 사실상 아마고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모리 모토나리는 평생의 숙적을 모두 처단하고 쥬고쿠의 패자가 되었다.
이후에는 오우치 가문의 영토였던 북 규슈에 진출해 오래도록 오토모 가문과 분쟁을 벌였고, 산인 지방에서 아마고의 잔당들을 일소하고 모리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노력했다.
모리 모토나리의 말년에 아마고 가문의 가신이었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가 등장하여 잠시 난동을 부렸는데, 모리 모토나리 생전에는 결판이 나지 않았다.
장남인 타카모토가 일찍 죽고,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데루모토는 유약한 인물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모든 정무를 도맡아했다.
부하 다이묘들의 독립성도 어느 정도 인정하여 보수적이긴 했지만 안정적이었다.
'자신의 형과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셔서 단명했는데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이렇게 장수했으니 너희도 술을 마시지 말아라.'라는 논지의 말도 남겼다. 근데 한편으론 한 가신에게 "술은 마시면 기분 좋게 한다."라고 하고선 한편으론 "저런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야."라고 말하기도. 아마 부하들 기분 풀어주려고 한건지도. 어쨌든 모토나리 본인은 평생 금주했고 그 때문인지 당시 인물로는 제법 장수한 편이다.
젊어서(10대 초반) 이츠쿠시마에 참배하러 갔을 때 부하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냐고 묻자 부하는 "주군께 츄고쿠(혼슈 서단)를 달라"고 빌었다고 대답했다. 이를 들은 모토나리는 '''천하를 달라고 빌어도 츄고쿠를 얻을까 말까 하거늘 소원을 비는데 고작 츄고쿠를 달라고 했단 말이냐'''고 얘기했다고 한다. 젊어선 확실히 야심이 있었던 듯.
애처가로 유명하며 그 당시에는 드물게도 아내가 죽기 전에는 측실을 단 한 명도 들이지 않았고 아내 사후에도 끊임없이 아내를 그리워했다. 이 때문인지 모리 가는 아예 측실을 들이지 않은 모리가 3형제를 포함하여 한 여성에게 충실한 경향이 있다. 다만 손자 데루모토는 여성 문제가 복잡했기 때문에 예외. 하지만 아내의 친정인 킷카와 가를 박살낸 건 다름 아닌 모토나리.(...)[10]
정실 사후에는 측실과 유능한 아들들이 그를 계속 보좌했으며 금주를 생활화하는 것처럼 평생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기에 '''71세의 나이에도 자식을 얻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모리 히데카네로, 형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도요토미에 인질로 들어가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의형제를 맺는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서군 측에 섰으며, 직후 요절한다.
정실 자식들인 3형제와는 달리 측실 소생 자식들에 대해서는 모토나리가 남긴 편지에 ''''버러지 같은 녀석들'''(虫けらなるような子どもたち)'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홀대한 것만은 아니었는지 "만일 그놈들 중 좀 현명하게 크는 녀석이 있다면 타카모토, 모토하루, 타카카게 너희 셋은 불쌍히 여겨서 먼 국경에라도 보내주고, 좀 덜 떨어진 녀석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 말아라"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정실과 측실 자식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도 측실이 낳은 넷째 아들이 바로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元清)'라는 사람인데 그 역시 제법 유능한 인물이여서 '네 번째 화살(四本目の矢)'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고, 모리가 영지 동쪽 지역에 주둔하면서 주로 이복 형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행동을 같이 했다. 실제로도 친해서 타카카게를 '카게 님(景さま)'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고[11] , 죽기 전에도 타카카게와 나란히 와병중이었는데 "둘 중에 누가 먼저 죽을까"라는 대화도 나눴다고 한다. 결국 타카카게가 죽고 약 1개월 뒤에 모토키요도 사망한다.
사세구는
그의 모략의 특징은 장기간에 걸쳐 끈기 있게 계략을 짠다는 것으로 화려함은 없지만 주로 내부의 정치적인 조략을 통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놓는 편이었다.
일본의 소설가 키쿠치 칸은 일본합전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죠 소운을 합치고 둘로 나눈 것과도 같다며 자비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 뛰어나며 동시에 '''모략을 즐겨쓰는 점''' 또한 이에야스보다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12] 실제로 모토나리와 이에야스는 인생 행적이나 개인적 성격이나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다.
세 화살의 교훈[13] 이란 얘기로도 유명한데 사실 이 얘기는 태평양 전쟁 때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모리 모토나리의 성격에 맞다고 여겨지는지 이렇게 간간이 등장한다. 모리 모토나리의 가장 큰 힘은 그의 가족으로부터의 협력이었기에 그런 듯. 하지만 최근에는 이것을 비틀어 '''세 개의 화살을 꺾어버리는''' 패러디가 종종 나오고 있다. 분위기 파악 못 한 모토하루가 꺾어버린다거나, 전국무쌍 3에서는 타치바나 긴치요가 꺾어버린다거나, 교훈을 주는 사람이 꺾어버리거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영화)에도 꺾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일단 가족들끼리 잘 도와 살라는 말은 모토나리의 남긴 글에 나와있다.
유명한 말로는 유언이라고 알려진 '''"천하의 일부분을 차지해서 오랫동안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으면 그것도 좋지."'''가 있다.
백만일심(百萬一心)이란 말로도 유명하다. 모토나리의 양어머니 스기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고 하며, 요리다 고리야마 성의 공사를 끝내고 당시 있던 풍습대로 산 제물을 바치려하는 것을 막고 대신 백만일심(모두가 힘을 합치면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의 말)이라고 쓰인 비석을 묻었다고 한다. 다만 이것도 모토나리가 했다고 확신할 순 없고 모리 가에 구원을 온 오우치 군의 장수가 했다는 말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가문의 협력을 중시한 모토나리의 성격에 맞다고 여겨지고 딱히 모토나리가 한 말이 아니란 증거도 없는지라 대중 매체에선 간간히 언급된다.
젊었을 적의 일화로는 천하에 뜻이 있었음에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후손들의 성향을 미리 꿰뚫어 보아 가문의 보존에 더 신경을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14] 모략가의 차가운 이미지도 강하지만 한편으론 온화한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이외에도 번창해 후손을 남긴 집안답게 많은 본인의 서찰이 남아있는데, 대부분이 가족과 부하들에게 남긴 잔소리여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꼰대'''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15] 모토나리의 명언으로 알려진 어구들의 출전을 따지고 보면 사실 대부분 잔소리에서 그럴싸한 어구를 추려낸 것이다.
가족을 아끼는 성격으로, 아내와 양어머니[16] 를 연이어 잃고 충격으로 인해 며칠간 두문불출하거나, 아들인 타카모토가 원인 불명의 죽음을 당하자 큰 충격을 받아 슬픔에 빠지고 측근을 대거 숙청하기도 했다. 냉혹한 인물이라곤 하지만 아들들에게 남긴 글에서 "자신은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게 만들었기에 인과 응보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으며 자신은 힘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선행을 많이 한 것도 아니라 어째서 자신이 60세 되도록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다고 쓰는 등, 마냥 음흉한 모습만 보이진 않았다.
후손을 잘 두어서[17]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급 천하인이 아님에도 그들과 동급인 정1위에 추숭되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모리 모토나리에게 오다 노부나가 토벌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한 적이 있다.
모리 모토나리/기타 창작물 참조.
[1]
毛利元就(もうり もとなり)能や芸や慰め、何もかも要らず。ただ武略、計略、調略が肝要に候。'''謀多きは勝ち、少なきは負け候と申す。'''
(노나 예능이나 위안 같은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 단지 무략, 계략, 정략[2]
이 중요한 것이니라. '''꾀가 많으면 이기고, 적으면 패하는 것이다.''')- 장남 모리 타카모토에게 보낸 서신에서
1497년 4월 16일~1571년 7월 6일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 여러가지 모략으로 유명해서 모신(謀神)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며 서국 제일의 다이묘(西国一の大名)라고도 불린다.
2. 생애
젊은 시절에는 당대의 주고쿠의 패자인 아마고 츠네히사의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 어머니는 5세 때 잃고, 아버지는 10세 때 잃고, 형은 19세에 잃었다. 이것도 보통 고생이 아닌데, 그외 친척들도 도움을 안주었고 이후에 가문의 당주가 되었을 땐 이노우에 일족의 간섭을 받게 돼서 다시 한 번 고생의 세월을 보냈다. 오죽하면 모리 가문이 잘되라고 비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17세 때는 명나라 사람이 모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모토나리를 보고는 한 고조, 당 태종의 풍모가 있다고 평한 적도 있다고 한다.
외교와 모략에 능통하여[3] , 신흥 강자인 이즈모 아마고 가문과 전통의 명문인 스오우 오우치 가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가문을 보전했다.
모리 가문은 명가이기는 했지만 모토나리가 가독을 계승했을 당시 아키는 온갖 작은 고쿠진(國人) 세력으로 쪼개져 있었고 모리 가문도 가신들의 실권이 당주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당장 가문의 총령인 아버지와 형이 급사했었고 형의 뒤를 이은 조카 고마쓰마루도 9세로 요절해 자신이 가독이 된 처지였다. 모토나리는 횡포를 부리는 가신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元兼)를 숙청하거나 반역을 일으킨 동생 아이오 모토츠나(相合元網) 및 그와 함께한 와타나베씨 일족 등을 물리치는 등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답게 치열한 내부 분쟁을 통해 주가의 권력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아마고 츠네히사가 은퇴하자 오우치 가문에 장자 모리 타카모토를 인질로 보내 오우치를 주가로 모시게 된다.[4] 병상의 츠네히사는 "모리가 떠오르는 해의 기세와도 같으니 상대하지 말라"고 했으나 츠네히사의 손자이자 당주인 아마고 하루히사(당시 이름은 아키히사)는 말을 듣지 않았고, 그 결과 모리 모토나리에게 대패했다.[5] 이 패배로 많은 아마고 측 성주들이 오우치 가에 붙었다. 그러나 얼마 뒤 오우치 가가 아마고를 공격했다가 아마고의 작전에 말려들고 아키의 호족 킷카와 오키츠네[6] 가 배반하여 역으로 오우치가 대패하며 다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모토나리도 이 전투에서 부하의 희생으로 목숨을 겨우 건져 돌아갔다.
1546년 아내 묘큐와 의붓 어머니가 죽은 뒤 타카모토에게 가독을 넘겼다. 그러나 여전히 가문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킷카와 오키츠네가 그 전 아마고와의 전투에서 배반한 것 때문에 킷카와 가 내에서 지지를 잃고 결국 축출되자 모토나리는 둘째 아들 모토하루를 보내 당주로 세운다. 그 뒤 강한 수군을 보유한 아키 호족 누타 코바야카와 가에도 모략을 걸어 가문을 분열시키고 어렸던 당시 당주의 누나와 자신의 셋째 아들 타카카게를 결혼시키며 타카카게를 누타 코바야카와 가 당주로 세웠다.[7] 이로서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시작으로 모리 료센 체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대패 이후 오우치 가는 당주인 오우치 요시타카가 문화 생활에 빠져 무신들을 천시했는데, 이에 점점 가문 내에서 고립되어가던 무신파의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을 죽이고 분고의 오토모 요시아키의 차남으로 오우치 가에 양자로 들어온 오우치 요시나가를 당주로 내세워 주가를 장악했다.
하루카타는 원래 모토나리와는 험악한 사이가 아니어서 모토나리가 전 당주 요시타카를 지지하던 호족들을 공략하는 것에 대해 도움을 주었고, 아예 모리가 아키와 빈고의 호족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동맹까지 맺었다. 그러나 아마고 하루히사의 공격을 또다시 모토나리가 막아내며 모리 가문의 세력이 커지자 점차 경계하기 시작했다.
모토나리도 스에 하루카타와의 결전을 생각했지만 병력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다. 하루카타는 3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모토나리는 5천이 고작이었다. 거기다 영지를 늘려놓긴 했어도 주코쿠의 호족들이 언제 배반하고 하루카타 쪽으로 붙을지도 모를 일인 데다 아마고 가문이 배후를 공격해 올 수도 있었다. 모리 모토나리가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거짓 편지를 보내 하루히사로 하여금 숙부 구니히사를 의심하여 죽이게 하고, 구니히사가 이끌던 아마고 가문의 정예 무사 집단인 '신궁당'을 제거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하루히사가 원래 신궁당의 두목이자 숙부인 구니히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구니히사의 아들 사네히사의 횡포로 이미 신궁당은 아마고 가 내에서 지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현대의 연구에서는 이 일이 모토나리의 모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루히사가 직접 신궁당을 제거했다는 쪽으로 굳어졌다.[8]
어쨌든 뒷조심을 없앤 모리 모토나리는 편지 한 장[9] 이 스에 하루카타에게 입수되게 하여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로 꾀어낸다. 스에 하루카타는 2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이츠쿠시마로 왔지만 이츠쿠시마 자체가 대군이 움직이기에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악천후가 겹쳐 통제가 불능해진 하루카타의 대군은 모리 가문의 3천 군세에 각개격파로 대패했고 대기시켜놨던 군선들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인솔해온 무라카미 수군에 의해 전멸했다. 하루카타는 근처의 동굴로 피신했으나 곧 자신의 형세를 비관하여 자결했다. 이것이 일본 3대 기습 중 하나인 이츠쿠시마 전투이다. 이후 오우치 가문은 모토나리에게 공략당했고 당주 요시나가는 자결하여 서국 최고 명문인 스오우 오우치 가는 멸망한다.
이에 아마고 하루히사는 오우치의 영향력에 있던 이와미 은광을 공략한다. 모토나리는 반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뒤 하루히사가 급사하고 아들 요시히사가 뒤를 이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중재로 휴전을 맺는다. 그러나 모토나리는 이즈모 공략을 결심했고, 얼마 뒤 맹약을 깨고 다시 공격을 개시한다. 1년 넘는 농성전 동안 모리 타카모토가 급사했지만 아마고가의 거성인 이즈모 갓산도다 성을 함락시키고 사실상 아마고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모리 모토나리는 평생의 숙적을 모두 처단하고 쥬고쿠의 패자가 되었다.
이후에는 오우치 가문의 영토였던 북 규슈에 진출해 오래도록 오토모 가문과 분쟁을 벌였고, 산인 지방에서 아마고의 잔당들을 일소하고 모리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노력했다.
모리 모토나리의 말년에 아마고 가문의 가신이었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가 등장하여 잠시 난동을 부렸는데, 모리 모토나리 생전에는 결판이 나지 않았다.
장남인 타카모토가 일찍 죽고,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데루모토는 유약한 인물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모든 정무를 도맡아했다.
부하 다이묘들의 독립성도 어느 정도 인정하여 보수적이긴 했지만 안정적이었다.
'자신의 형과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셔서 단명했는데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이렇게 장수했으니 너희도 술을 마시지 말아라.'라는 논지의 말도 남겼다. 근데 한편으론 한 가신에게 "술은 마시면 기분 좋게 한다."라고 하고선 한편으론 "저런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야."라고 말하기도. 아마 부하들 기분 풀어주려고 한건지도. 어쨌든 모토나리 본인은 평생 금주했고 그 때문인지 당시 인물로는 제법 장수한 편이다.
젊어서(10대 초반) 이츠쿠시마에 참배하러 갔을 때 부하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냐고 묻자 부하는 "주군께 츄고쿠(혼슈 서단)를 달라"고 빌었다고 대답했다. 이를 들은 모토나리는 '''천하를 달라고 빌어도 츄고쿠를 얻을까 말까 하거늘 소원을 비는데 고작 츄고쿠를 달라고 했단 말이냐'''고 얘기했다고 한다. 젊어선 확실히 야심이 있었던 듯.
애처가로 유명하며 그 당시에는 드물게도 아내가 죽기 전에는 측실을 단 한 명도 들이지 않았고 아내 사후에도 끊임없이 아내를 그리워했다. 이 때문인지 모리 가는 아예 측실을 들이지 않은 모리가 3형제를 포함하여 한 여성에게 충실한 경향이 있다. 다만 손자 데루모토는 여성 문제가 복잡했기 때문에 예외. 하지만 아내의 친정인 킷카와 가를 박살낸 건 다름 아닌 모토나리.(...)[10]
정실 사후에는 측실과 유능한 아들들이 그를 계속 보좌했으며 금주를 생활화하는 것처럼 평생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기에 '''71세의 나이에도 자식을 얻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모리 히데카네로, 형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도요토미에 인질로 들어가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의형제를 맺는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서군 측에 섰으며, 직후 요절한다.
정실 자식들인 3형제와는 달리 측실 소생 자식들에 대해서는 모토나리가 남긴 편지에 ''''버러지 같은 녀석들'''(虫けらなるような子どもたち)'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홀대한 것만은 아니었는지 "만일 그놈들 중 좀 현명하게 크는 녀석이 있다면 타카모토, 모토하루, 타카카게 너희 셋은 불쌍히 여겨서 먼 국경에라도 보내주고, 좀 덜 떨어진 녀석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 말아라"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정실과 측실 자식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도 측실이 낳은 넷째 아들이 바로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元清)'라는 사람인데 그 역시 제법 유능한 인물이여서 '네 번째 화살(四本目の矢)'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고, 모리가 영지 동쪽 지역에 주둔하면서 주로 이복 형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행동을 같이 했다. 실제로도 친해서 타카카게를 '카게 님(景さま)'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고[11] , 죽기 전에도 타카카게와 나란히 와병중이었는데 "둘 중에 누가 먼저 죽을까"라는 대화도 나눴다고 한다. 결국 타카카게가 죽고 약 1개월 뒤에 모토키요도 사망한다.
사세구는
죽기 세 달 전에 꽃놀이에서 읊은 싯구라고 한다.'''友を得て なおぞうれしさ 桜花 昨日にか はる 今日のいろ香は'''
'''벗을 얻음에 나와 같이 기뻐해주는 벛꽃이여 오늘은 어제보다 색도 향도 더하는구나.'''
3. 기타
그의 모략의 특징은 장기간에 걸쳐 끈기 있게 계략을 짠다는 것으로 화려함은 없지만 주로 내부의 정치적인 조략을 통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놓는 편이었다.
일본의 소설가 키쿠치 칸은 일본합전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죠 소운을 합치고 둘로 나눈 것과도 같다며 자비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 뛰어나며 동시에 '''모략을 즐겨쓰는 점''' 또한 이에야스보다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12] 실제로 모토나리와 이에야스는 인생 행적이나 개인적 성격이나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다.
세 화살의 교훈[13] 이란 얘기로도 유명한데 사실 이 얘기는 태평양 전쟁 때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모리 모토나리의 성격에 맞다고 여겨지는지 이렇게 간간이 등장한다. 모리 모토나리의 가장 큰 힘은 그의 가족으로부터의 협력이었기에 그런 듯. 하지만 최근에는 이것을 비틀어 '''세 개의 화살을 꺾어버리는''' 패러디가 종종 나오고 있다. 분위기 파악 못 한 모토하루가 꺾어버린다거나, 전국무쌍 3에서는 타치바나 긴치요가 꺾어버린다거나, 교훈을 주는 사람이 꺾어버리거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영화)에도 꺾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일단 가족들끼리 잘 도와 살라는 말은 모토나리의 남긴 글에 나와있다.
유명한 말로는 유언이라고 알려진 '''"천하의 일부분을 차지해서 오랫동안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으면 그것도 좋지."'''가 있다.
백만일심(百萬一心)이란 말로도 유명하다. 모토나리의 양어머니 스기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고 하며, 요리다 고리야마 성의 공사를 끝내고 당시 있던 풍습대로 산 제물을 바치려하는 것을 막고 대신 백만일심(모두가 힘을 합치면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의 말)이라고 쓰인 비석을 묻었다고 한다. 다만 이것도 모토나리가 했다고 확신할 순 없고 모리 가에 구원을 온 오우치 군의 장수가 했다는 말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가문의 협력을 중시한 모토나리의 성격에 맞다고 여겨지고 딱히 모토나리가 한 말이 아니란 증거도 없는지라 대중 매체에선 간간히 언급된다.
젊었을 적의 일화로는 천하에 뜻이 있었음에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후손들의 성향을 미리 꿰뚫어 보아 가문의 보존에 더 신경을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14] 모략가의 차가운 이미지도 강하지만 한편으론 온화한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이외에도 번창해 후손을 남긴 집안답게 많은 본인의 서찰이 남아있는데, 대부분이 가족과 부하들에게 남긴 잔소리여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꼰대'''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15] 모토나리의 명언으로 알려진 어구들의 출전을 따지고 보면 사실 대부분 잔소리에서 그럴싸한 어구를 추려낸 것이다.
가족을 아끼는 성격으로, 아내와 양어머니[16] 를 연이어 잃고 충격으로 인해 며칠간 두문불출하거나, 아들인 타카모토가 원인 불명의 죽음을 당하자 큰 충격을 받아 슬픔에 빠지고 측근을 대거 숙청하기도 했다. 냉혹한 인물이라곤 하지만 아들들에게 남긴 글에서 "자신은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게 만들었기에 인과 응보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으며 자신은 힘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선행을 많이 한 것도 아니라 어째서 자신이 60세 되도록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다고 쓰는 등, 마냥 음흉한 모습만 보이진 않았다.
후손을 잘 두어서[17]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급 천하인이 아님에도 그들과 동급인 정1위에 추숭되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모리 모토나리에게 오다 노부나가 토벌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한 적이 있다.
4. 대중 매체
모리 모토나리/기타 창작물 참조.
[1] 옷에 한 일(一)자 아래에 점이 세 개 박힌 문양이 여럿 그려져 있는데, 이 문양은 모리 가문의 가몬인 이츠몬지 미츠보시(一文字三つ星) 문장이다. 이 문장을 나가토 미츠보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토나리의 손자 테루모토 때 모리가 다른 영지들을 잃고 스오 나가토의 두 개 국만 영유하게 되었을 때 본거지가 나가토에 있었기에 붙여진 별칭이다.[2] 調略은 국어사전에도 있는 단어지만, 국어사전에서는 '싸움터로 나아가 공격하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일본어에서 조략(ちょうりゃく, 쵸랴쿠)은 계략과 비슷한 의미지만 일반적으로 특히 '정치적인 공작'을 의미한다. 일본어의 '쵸랴쿠'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조략'으로 그대로 쓰는 것은 오역이다.[3] 희생을 최소화하며 최대의 효과를 얻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평생 동안 모략과 암살을 자주 행했다. 이츠쿠시마 전투만 해도 절대 열세였던 모토나리가 모략을 통해 전세 역전한 전투로 과거 자신과 함께 싸운 경험이 있는 명장 에라 후사히데가 회유되지 않자 내통 위장의 공작으로 그를 처리하고, 자신의 가신인 카츠라 모토즈미를 거짓 투항시켜 상대를 해로로 몰아넣었다.[4] 정확히는 아마고 츠네히사쪽에서 먼저 모토나리가 모리가의 당주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 방해 공작을 폈고, 그것들을 물리치고 모토나리가 당주가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계를 파기했다.[5] 그러나 당시 아키의 호족 몇몇이 아마고를 도울 것을 약조한 상태였다. 하루히사는 이 상황을 이용하려 한 것이지만...[6] 모토나리의 아내 묘큐의 조카이다.[7] 그전에 코바야카와의 분가인 타케하라 코바야카와 가의 당주로 타카카게를 보냈다. 이 일로 코바야카와 가는 통합되었다.[8] 이 변화를 보여주는 게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묘사인데, 노부나가의 야망 천상기에서는 모토나리의 책략으로 의심에 빠진 하루히사가 신궁당을 제거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는 신궁당 제거가 모토나리의 책략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 뿐 모토나리는 아들들에게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는. 나는 아무 것도 안 했다'는 식으로 혀를 차면서 “우리 영내에 있던 아마고 가의 간첩들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나야 모르지”라며 능청을 떤다. 직접 손을 썼다기보단 불씨를 던져놓은 것 정도로 묘사한 것.[9] 이츠쿠시마가 요충지이며 빨리 점거해야 유리하다는 내용[10] 하지만 위에 서술했듯이, 먼저 배반한 것은 킷카와다.[11] 형제 서열로 보면 타카카게 바로 아랫동생이 모토키요지만 둘은 18년이나 차이난다. 당시 시대상에 비춰보면 아버지와 아들 뻘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12] 키쿠치는 이에야스의 자비심과 소운의 모략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 모토나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자비심 면에서는 이에야스든 모토나리든 전국시대 다이묘인 이상 현대인의 기준에서 보면 죄다 무자비해 보이지만 아무래도 모토나리 쪽이 훈훈한 일화가 더 많다. 다만 모략을 보자면 호조 소운이 전국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로 평가받으므로 차마 소운보다 뛰어나다곤 못하고 애먼 이에야스만 얻어맞는 꼴이 된 것..[13] 모토나리가 세 아들을 불러 놓고 화살 하나 하나는 쉽게 꺾이지만 화살 세 개를 한꺼번에 꺾을 수는 없는 것을 보여 주며 형제 간의 우애 및 가족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내용. 이는 J리그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팀명 유래이기도 하다.[14] 오우치와 아마고가 천하에 뜻을 두어서 세력을 키우다가 멸망한 걸 보아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물론 그 두 가문을 멸망시킨 건 모리 모토나리 자신이었다.[15] 모토나리가 남긴 서찰에는 가족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잔소리는 물론, 스스로도 잔소리임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는지 '지겹게 들릴 것은 알지만...' '자꾸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한마디 더 하자면...' 하는 방어적인 어구들이 계속 등장한다.[16] 아버지 히로모토의 측실인 스기를 말한다. 양어머니였지만 모토나리를 지극 정성을 다해 키웠고 모토나리 역시 친어머니로 대했다고 한다. 여러 서찰에서 양어머니에 대한 애정이나 그리움을 묘사하는 구절이 발견되었다.[17]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 조슈번이 그의 후손인 모리가문이 다스리는 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