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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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内義隆
1507년 ~ 1551년
1. 소개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 스오 오우치가 16대 당주. 오우치 요시오키의 장남.
2. 일생
1528년, 아버지 요시오키가 사망하자 가문을 잇고, 1530년에 규슈로 출병해 분고의 오토모(大友), 치쿠젠의 쇼니(少弐)와 대립한다. 가신 스기 오키카즈(杉興運)와 스에 오키후사[1] 에게 군을 맡겨 쇼니를 공격케 하고 히젠의 마츠라(松浦)를 복속시킨다.
하지만 다테나와테 전투(田手畷の戦い)에서 스기 오키카즈가 쇼니 가의 류조지 이에카네[2] 에게 대패해 쇼니 공략은 실패하며, 오토모와 쇼니가 연합하여 대항하자 이를 치기 위한 명분을 얻기 위해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貳) 관직을 얻기 위해 조정에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1534년, 고나라 덴노가 즉위하자 조정에 금 2천 량을 헌상하여 다자이노다이니[3] 관직을 얻었다. 원래 오우치 가문이 대대로 역임하던 관위는 사쿄다유였으나, 다테 하루무네가 오우치 요시오키가 사망한 후에 조정에 255량 정도를 헌상하여 이 관위를 손에 넣는다. 이에 오우치 요시타카가 격분하여 현재 가장 필요한 관위 즉 사실상 규슈의 총괄 지배권자를 상징하는 다자이노다이니 직을 내놓으라고 천황을 설득하였고 이에 천황 측은 이건 천황 혈족들에게만 내리는 자리로서 혈족이 아닌 자에게 수여하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였으나[4] 무려 '''황금 2천 량'''을 들이면서 다자이노다이니를 얻으면서 규슈 지배에 대한 가장 큰 명분을 가지게 되어 규슈의 중립 세력들을 모두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이건 당대의 그 어떤 다른 다이묘들도 따라올 수 없는 오우치 가문의 엄청난 부유함과 권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여담으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조정에 헌상을 반복하여 종 3위였던 아버지를 넘어, 종 2위로 추종되었다고 한다. 즉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의 우다이진 같은 관위를 노부나가보다 훨씬 더 먼저 받았다는 말. 진짜로 쇼미더머니의 끝판왕이다(...)
이후에는 심지어 쇼니 가의 가신인 류조지 이에카네와 내통하여 쇼니 가를 약화시키며, 오토모 요시아키[5] 와 화해하여 쇼니 가를 고립시킨다.
1536년,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를 공격하여 사실상 쇼니 씨를 멸망시키며 기타 규슈 패권을 차지한다. 다음 해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요청으로 상경하나 도중에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막혀 포기한다. 1540년에 스에 타카후사(스에 하루카타)를 보내 모리 모토나리를 도와 요시다코오리성에서 아마고 하루히사가 이끄는 아마고 군을 격파한다. 이후 아키 다케다(安芸武田), 토모다(友田)를 멸망시키며 아키까지 세력을 확대한다.
그러나, 1542년에 아마고씨의 갓산토다성을 공격하나 호족들의 배신으로 대패한데다가 귀국 길에 양자 오우치 하루모치가 익사하면서 이 때부터 정쟁에 관심을 잃고 문치파인 사가라 다케토를 중용하며 문치를 펼친다. 이로부터 오우치 문화라는 교토와는 다른 문화가 생겼지만, 무단파인 스에 타카후사(스에 하루카타)와 나이토 오키모리와 갈등이 생긴다.[6]
1547년에는 견명사를 파견하였고, 1550년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폐건물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절 건물인 다이도우지를 성당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 주고 크리스트교 포교를 허락하는 등 여러모로 오우치 문화가 빛을 낸다. 이 오우치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자신의 권력 강화 등을 위하여 이용한 조선에서 들여온 주자학이었다고 한다.[7]
2.1. 다이네지의 변
그러나, 1551년에 무단파인 스에 타카후사가 반란을 일으키고, 중신 나이토 오키모리가 이를 묵인한다. 친척인 요시미 마사요리에게 의탁하려 하지만, 운도 안 좋게 폭풍 때문에 여의치 않아 다이네이지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고 중신 레이제이 타카토요가 분전하지만 결국 이길 수 없음을 깨닫자 할복한다. 향년 45세.
요시타카의 할복 후에 아들 요시타카(義尊)를 비롯해 산죠 긴요리[8] 등 수많은 구게들이 살해되었으며, 사실상 스오 오우치 가는 멸망하며 명나라와의 무역은 단절된다. 스에 타카후사는 오우치 요시타카의 자형 오토모 요시아키의 둘째아들인 오토모 하루히데(大友晴英, 후일 오우치 요시나가)를 새 주인으로 들여왔으나 실권은 스에 하루카타[9] 에게 있었고, 오우치씨의 가신들이 스에 하루카타에게 동조하지 않으면서 오우치 가는 급속히 해체되어간다.
요시타카는 죽기 전, 사세구로써 금강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읊었다고 전한다.
'''如露亦如電 応作如是観'''(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세상 모든 것이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은 것이니, 이를 잘 관찰하여 사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라.'''
3. 기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본 선교를 위해 일본에 왔을 당시 그에게 화승총을 선물하고 절간 하나를 받아서 교회로 만들었다고 한다.
4. 대중 문화에서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 12 혁신을 제외하고 꾸준히 출장하였다.
창천록에서는 능력치는 무난한 편이지만 부친과 비교하면 많이 딸리는데다, 주변에 범같은 아마고와 모리가 매의 눈으로 노리는 중이라 애로사항이 꽃핀다.
천하창세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6 지력 27 정치 76. 첫 시나리오 가독 상속에만 등장하는데 여기선 통솔 71(+6) 지력 29 정치 82(+9) 교양 78(+10). 그해 늦가을만 되면 다이네이지의 변이 터져 오우치 요시타카가 사망한다. 그 뒤를 잇는 오우치 요시나가(이벤트와 함께 오토모 하루히데에서 개명함)의 능력치가 백하팔인급인지라 행동 횟수가 1로 확연히 줄어들어 옆동네인 이치죠 카네사다보다 더한 하드코어한 길이 도사리고 있다. 애당초 아마고와 모리의 우호도가 최악이라서. 타치바나야마성이 큐슈에서 유일하게 무역정이 개발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사수는 반드시 해야하고. 오우치 요시나가가 들어서면 요시나가의 친형인 오토모 요시시게에게는 개꿀 진행이 된다. 오우치 요시타카를 살리려면 이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스에 다카후사, 스기 시게노리, 스기 오키쓰라, 사가라 다케토, 레이제이 다카토요 중 하나라도 없으면 되므로 아무나 추방하면 된다. 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가신단은 곧 망하는 가문이라고 통솔 80 이상이 스에 다카후사뿐, 70대도 하라다 다카타네(原田隆種)라는 녀석밖에 없는 잉여들 집합이라 쉽지는 않다. AI는 규슈에선 쪼그라든 숙적 쇼니까진 자주 먹지만 주고쿠 쪽 진출로는 종속 다이묘인 모리에 막히는 일이 허다해서 그 이상 진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나마 초반에 털어먹고 좋은 무장 확보할 만한 류조지와는 동맹으로 시작하는지라, 가끔씩 데모를 돌리다 보면 류조지에게 털리기도 한다.
천도에서는 통솔 76 무력 34 지력 77 정치 89로 지력이 쓸만한 수준으로 상향되었다. 특히 가보와 직위빨로 정치는 등장 시나리오에서 2위. 특히 13 천도의 신장의 탄생 시나리오에선 사실상 끝판 보스의 면모를 보인다. 일단 성이 4개나 있는데다 주위에는 허접한 다이묘들뿐이며 야마나가와 무로마치 막부, 모리가와 동맹 상태라 쉽게 영토 확장이 가능하다. 여기에 문화나 기술 연구도 쉽다. PK PS판에는 아예 요시타카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도 존재. 여담으로 문화를 숭상한 군주인데 일러스트는 갑옷으로 무장한 장수다. 사실 갑옷은 아버지인 요시오키의 초상화에 나오는 것과 동일. 창조 PK판에서 문화를 숭상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관복 복장으로 일러스트가 바뀌었다.
센고쿠히메에서는 멋쟁이 당주로 나와 모리 가나에게 자신의 양자가 되지 않겠냐고 말하는 이벤트가 있다.[10] 3편에서는 여성화되어 집념의 권유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양자 권유를 하고 다닌다. 이쪽동네 여체화는 매번 변화되어. 꾸준히 등장한다. 다만. 오우치 요시나가는 애당초 등장하지 않는 시리즈이다 보니. 체제는 이쪽으로 굳힌듯하다. 4편에서는 통채로 삭제당했다. 이후 부활.
모리원취전에서는 그냥 한심한 영주로 나온다. 모리 모토나리의 중심이다 보니까, 규슈 패권을 다룬 얘기는 안 나오고 허구헌날 아미고와 싸웠다가 지는걸로.
1997년에 방영된 대하 드라마 '모리 모토나리'에서는 청춘 스타 출신의 미남 배우 카자마 토오루가 연기했다. 어렸을 때부터 시, 노래 같은 문화에 심취하지만 아버지의 꾸짖음에 억지로 후계자 수업을 받는 묘사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스에 타카후사와의 관계가 더욱 강조되어 요시오키 사후 타카후사와 의기 투합해 천하 제패를 노리게 된다. 정치에 관심을 잃은 이후에는 눈앞에서 막말을 하는 타카후사에게 화도 내지 않고 그저 믿는다고 말하는 요시타카와 그런 주군을 어찌 배신할 수 있느냐는 타카후사의 갈등이 극적으로 그려졌다.
[1] 陶興房, 스에 하루카타의 아버지로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와 함께 오우치 요시오키, 오우치 요시타카를 보좌해 오우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2] 龍造寺家兼, 류조지 다카노부의 할아버지[3] 종 4위하[4] 물론 당대의 천황이 책문을 열어놓고 = 시장을 만들어서, 관직을 팔았다는 소리를 듣고 있기는 하나 아무 관직이나 바로 내줘 버리면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 가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즉 팔 건 팔아도 못팔 건 절대 못 팔아야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는 일이라는 것.[5] 大友義鑑, 오토모 소린의 아버지[6] 하루카타와의 대립은 스에 가문이 횡령했던 도다이지의 옛 영지를 반환하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7] 김영호 저 아사이 료이 문학의 성립과 성격 중 삼강행실도 편 중, 일본 유학 연구자 스즈키(1982년)의 저작을 인용. 해당 인물의 정확한 본명은 기억이 안나서 이후 수정..[8] 다케다 신겐의 장인.[9] 원 주인의 이름자인 타카가 들어가는 타카후사에서 새 주인의 이름자인 하루가 들어가는 하루카타로 개명했다.[10] 실제 모리 타카모토는 요시타카의 사위다. 가신의 딸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타카모토에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