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미나 여왕
1. 소개
즉위 이래 58년 가까이 재위해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군주이다. 前 네덜란드 율리아나 국왕의 어머니이자 前 네덜란드 국왕 베아트릭스의 할머니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네덜란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2차 대전 때는 독일 국방군에 쫓겨 영국 런던[1] 으로 망명했지만 그곳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며 나치 독일에 대한 싸움을 그치지 않아 '''저항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2. 출생에 얽힌 사연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와 그의 후처 발데크피르몬트의 엠마[2] [3]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빌럼 3세는 전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와의 사이에서 빌럼, 마우리츠, 알렉산더르 세 아들을 두었으나 삼남 알렉산더르를 빼고는 요절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렉산더르조차도 빌헬미나가 4세 때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그녀의 이복 오빠들이 후사 없이 잇따라 죽었기 때문에 빌럼 3세의 자녀로서 유일하게 생존한 자녀인 빌헬미나가 잠정적인 왕위계승자가 되었다.[4]
3. 재위기간
3.1. 어린 여왕
1890년 11월 23일, 41년간 재위한 부왕이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10살의 나이로 여왕이 되었으나, 나이가 어렸던 탓에 어머니 엠마 왕대비가 8년간 섭정하였다. 권위주의적이었던 남편과는 달리 의회와 헌법을 존중한 엠마 왕대비의 섭정 기간은 여왕이 훗날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게 되는 기반으로 자리매김했다. 즉위 초인 1895년 영국을 방문해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는데, 60년 넘게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 여왕은 이제 갓 즉위한 소녀 여왕에 대해 '우아하고 지적이며 귀여운 소녀'라고 평가하며 일기에 적었다. 1898년 9월 6일, 여왕이 대관식을 거행하고 성인이 되자 엠마 왕대비는 섭정을 거두고 물러났다.
3.2.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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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사진.
네덜란드 의회는 너무 한미한 가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대가문의 후계자여도 안되는 조건으로 여왕에게 맞는 적당한 배필을 찾길 원했다. 왜냐하면 너무 한미한 가문은 여왕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고, 너무 대가문인 경우 네덜란드의 내정에 다른 나라가 간섭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이 바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하인리히였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은 독일의 오래된 왕가중 하나였으며, 그의 이복형이자 후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령을 상속받은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는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으며 그의 장녀인 알렉산드리네[5] 는 덴마크의 왕비가 되었고, 차녀인 체칠리에는 독일의 마지막 황태자비였다. 여담으로 이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하인리히의 이복누나인 마리인데, 그녀는 알렉산드르 2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해 러시아에서 '미헨 대공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마리아 파블로브나 대공비이다. 미헨 대공비는 동서였던 마리야 황후(결혼 전엔 덴마크의 다우마)와 함께 러시아 사교계를 이끌어가던 인물이었으며, 언제나 '야심만만하다'라는 평가를 들었다고. 그 외에도 그의 누나들 중에 올덴부르크 공작부인도 있었다.
게다가 하인리히는 막내아들이라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어서[6] 그야말로 딱 적당한 신랑감이었던 셈.
1901년 2월 7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하인리히가 독일출신이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왕위가 독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서 하인리히는 결혼하고나서 독일 내의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에서의 그의 권리를 네덜란드로 귀속시켰으며 이름도 네덜란드식인 '헨드릭(Hendrik)'으로 개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결혼했음에도 두 사람의 금슬은 썩 좋지 않았는데, 헨드릭 공은 마음 좋고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던 반면 빌헬미나 여왕은 언제나 의무만을 강조하는 삶을 살았다.[7] 또다른 문제는 수익에 대한 문제였는데, 헨드릭 공은 고국에서의 수익이 끊어지게 되면서 언제나 돈이 부족했고 여왕은 남편의 빚에 대해서 매우 언짢게 생각했다.
게다가 후계자 문제까지 겹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여왕은 두 번의 유산 끝에[8] 1902년에 사산된 아들을 낳았다.[9] 이후 수많은 유산을 한 끝에 결혼 8년만인 1909년 4월 30일에 외동딸 율리아나가 태어났다. 율리아나가 태어난 후에도 두 차례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했다. 여담으로 헨드릭 공은 외동딸 율리아나를 매우 끔찍하게 아꼈다고.
이 외에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 내내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질서가 여전히 유지되던 시절인 20세기 초에 아내의 신하로 산다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고,[10] 헨드릭 공은 이런 문제를 다른 여성을 찾아다니면서 해소했다. 특히 Mien Abbo Wenneker이라는 여성과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해서 여러 명의 사생아까지 낳았을 정도. 또 헨드릭 공은 사냥과 바다로 나가는 것을 즐겼는데,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국서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게 했다. 멋진 요트를 마련해 여친들과 함께 바다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고.
헨드릭 공은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는데, 살이 찌기 시작했고 류머티즘도 생겨났다. 1929년에 첫 심장마비가 왔으며 1934년에 두 번째 심장마비가 왔다. 두 번째 심장마비가 온지 며칠 후 사망했다.
여왕은 문란한 사생활에 빚까지 지고 의무에도 소홀했던 남편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워낙 앨버트 공이 '여왕의 부군'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케이스다보니 보니 헨드릭 공에 대한 평은 매우 나쁘고 실제로 그런 인물이었지만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앨버트 공같은 케이스는 정말 희귀한 케이스였다.[11]
3.3. 제1차 세계 대전
20세기 초반의 유럽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 전운이 감돌 때, 젊은 여왕은 독일을 방문해 빌헬름 2세를 만났다. 여왕을 작은 나라의 풋내기로 깔본 빌헬름 2세는 "내 병사들 키는 7피트인데 당신의 키는 그들의 어깨밖에 안 되는군."이라고 빈정대자 이 말을 들은 여왕은 "그 말이 맞네요. '''근데 우리가 제방을 열면 10피트 깊이로 잠길 겁니다!'''"라고 미소지으며 맞받아쳤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국이 독일을 봉쇄할 때 이웃 나라인 네덜란드도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고심하고 독일의 침공을 경계하던 여왕은 전쟁 와중에 군주정을 폐지하자는 사회주의자들의 움직임과도 맞닥뜨리지만, 국가를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는 젊은 여왕에 대한 국민의 지지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퇴위당한 빌헬름 2세의 망명을 받아주고 그를 인계하라는 연합국의 요구를 물리치는 대인배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3.4.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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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중 라디오 연설을 하고있는 빌헬미나 여왕. 전문 들어보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약 20년이 지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이 국경을 넘어 침공해 오자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파견한 구축함 HMS 해러워드 호에 승선, 영국으로 망명했다. 네덜란드는 얼마 못가 나치 치하에 들어간다. 여왕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우고서[12] 21만 5천 파운드를 기부해 스핏파이어 43대를 구입하고, 심야 라디오 방송 라디오 오라녜(Radio Oranje)를 통해 아돌프 히틀러를 '인류의 공적'이라 비난하며 네덜란드 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을 촉구했다. 연설이 끝난 뒤 네덜란드의 국가인 Het Wilhelmus 2절이 흘러나왔다. 국가가 2절부터 제창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지만 2절의 의미를 볼 땐 그만큼 긴박했다는 상황.[13] 여왕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나치 치하의 네덜란드인이 청취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었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은밀하게 라디오를 들으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 여왕은 1942년 6월 24일부터 8월 11일까지 미국을 국빈 방문해 8월 5일에는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격화되는 동안 잇따른 공습으로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나치에 대한 여왕의 저항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런던에 자리잡은 네덜란드 망명정부의 디르크 얀 더헤이르(Dirk Jan de Geer) 총리는 연합군이 승리하지 못할 거라며 독일과 협상하려 했기 때문에, 침략자와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며 강경론으로 일관한 여왕은 더헤이르와 마찰을 빚었다. 여왕은 더헤이르 총리에게 반대하던 법무장관 '피터르 슈르츠 헤르브란디(Pieter Sjoerds Gerbrandy)'를 통해 더헤이르를 굴복시켰다. 그 결과 더헤이르는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헤르브란디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14] 이렇듯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 여왕에 대해 윈스턴 처칠 총리는 '''"런던에 있는 망명정부 인사들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사람."'''[15] 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마침내 1945년에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네덜란드로 복귀한 여왕은 전후 재건에 힘을 기울였지만, 환갑을 넘긴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아 외동딸 율리아나 공주에게 양위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4. 양위와 사망
노년에 접어든 여왕은 율리아나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장녀 율리아나는 "어마마마께서 즉위 60주년까지는 채우셔야 합니다."라며 왕위를 고사했다. 그러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병을 앓던 여왕은 식민지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해이자 자신의 대관식을 거행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인 1948년 9월 4일, 57년 286일의 재위를 마무리하고 딸에게 양위했다.[16]
양위 후 별궁에서 지내던 여왕은 1962년 11월 28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델프트 신교회의 묘실에 안장되었다. 만일 그녀가 양위하지 않고 그대로 왕위를 지켰다면 재위기간은 모두 72년 5일이 되는데, 이는 유럽의 국왕들 중 프랑스의 루이 14세 다음으로 긴 재위기간이자 역사상 군림한 여왕들 가운데서 가장 긴 재위기간이 된다.
5. 평가
재위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입헌군주제를 확립했으며 보통선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 개혁을 위해 법률과 헌법을 개정했다. 그녀의 치세 때 사회가 안정되고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비록 여왕의 치세 이후부터는 왕실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게 되지만 율리아나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물러난 후에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그녀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네덜란드의 정신적 지주로 부족함이 없었으며 그녀에 대한 국민의 사랑과 존경 또한 변하지 않았다. 1953년에 일어난 북해 대홍수 때는 일흔셋의 노구를 이끌고 피해지역을 방문하며 네덜란드 국민을 격려해 국가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기도 했다.
6. 여담
-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유치에 반대 의사를 내비쳤고, 개막식에도 불참했다. "고대 이교도들의 제사 의식이 네덜란드 한복판에서 재현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 그러다 노르웨이를 다녀온 뒤 생각이 바뀌었는지 폐막식에는 참가했다.
- 1949년 4월 23일 전쟁 배상을 이유로 독일 침공을 직접 지휘해 니더라인(Niederrhein)에 있는 엘텐(Elten) 지방을 1963년까지 네덜란드가 점령하였다. 당초 여왕은 동프리슬란트와 쾰른, 아헨을 잇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독일 난민을 대규모화 하는 것을 막으려는 연합국최고사령부의 반대로 엘텐을 비롯한 몇 개의 마을만 얻었다.[17] 자세한 것은 오데르-나이세 선 문서 참조
[1] 대전 당시 런던은 네덜란드를 포함해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폴란드 등 추축국으로 인해 점령당한 많은 국가들의 망명정부 본부였다.[2] 엠마가 빌럼 3세보다 '''41세'''나 연하인데다가 빌럼 3세가 워낙 바람둥이여서 결혼 당시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원래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엘리사베트와 덴마크의 튀라에게 청혼했으나 퇴짜 맞았다. 그리고나서 엠마의 언니인 발데크피르몬트의 폴린에게도 청혼했지만 이 역씨 퇴짜를 맞아 마침내 엠마에게 청혼했던 것. 그래도 결혼한 뒤에는 그녀의 내조 덕분에 남편의 바람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부부의 금슬도 매우 좋았다. 여담으로 빌럼은 전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과 사이가 최악이었는데, 엠마는 이들의 사이를 개선시킬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3]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아들인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의 아내인 헬레나 왕자비가 어머니 엠마 왕비와 자매다.[4] 이 때 네덜란드는 빌헬미나의 왕위 계승을 위해 살리카법을 폐지했고, 동군연합이었던 룩셈부르크의 대공위는 원래 나사우 공작가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도 남성 계승자가 단절되어서 2대 만에 살리카 법을 폐지하고 부르봉파르마 가문으로 넘어갔다가 현재는 부르봉파르마 가문이랑 완전히 관계를 끊어 다시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되었다.[5] 現 덴마크의 여왕인 마르그레테 2세의 친할머니.[6] 아들 많은 가문의 막내아들인 경우,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에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해야 해서 많은 이들이 성직자나 군인의 길을 갔다. 실제로 하인리히도 다른 이들처럼 직업군인으로 평범하게 살아갈 예정이었다.[7] 빌헬미나 여왕의 의무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헨드릭 공을 받아들일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헨드릭 공도 초창기엔 많이 의욕적이었지만, 여왕이 거의 무산시켜버렸다. 심지어 심한 경우에는 '당신이 나설 일이 아니다'라며 면박까지 줬다고.[8] 여담으로 첫 번째 유산 때, 아이가 유산된 것은 헨드릭 공이 여왕에게 성병을 옮겨서라는 소문이 파다했다.[9] 당시, 여왕의 후계자 문제는 네덜란드 사회에서도 걱정거리였다. 이 무렵 왕위 추정상속인은 빌헬미나의 고종사촌의 아들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빌헬름 에른스트였고, 그 다음은 빌헬름 에른스트의 고모인 마리 알렉산드리네 대공녀였다. 전자는 네덜란드 왕위계승권을 포기할 것이 예상되었고, 후자는 여왕이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아들인 로이스-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32세는 독일 군부와 관계가 깊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여왕이 후계자가 없이 사망한다면 네덜란드가 독일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많았다.[10] 지금도 그런 점에서 여왕의 남편은 prince가 아닌 king으로 해달라고 말하는 모 국가도 있다. 사실 왕비는 princess가 아닌 queen이 되는데 여왕의 남편도 king 해줘야 하는 것도 맞는말이긴 하다[11] 심지어 현대 '여왕의 부군'으로서 너무 나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죽어있지도 않게 밸런스를 잘 조율하기로 유명한 필립 공조차 앨버트 공에 미치지 못한다. '''왜냐면 이분도 왕년에 바람을 엄청 피운데다 엄청나게 실언을 많이 했기 때문'''.[12] 런던이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만일을 대비해 왕위계승자인 율리아나 공주는 캐나다로 피신시켰다. 실제로 여왕의 거처도 폭격을 받았고,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다.[13] 더군다나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2절의 상황이나 언급된 '폭군'이 누군지 딱 매치가 되던 상황.[14] 이후 더헤이르 전 총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발령받지만 명령을 거부하고 '독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중립국인 포르투갈을 통해 네덜란드의 가족들 곁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귀국 후에 독일에 협력하는 방법을 담은 지침서를 발간하는 등 충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전후에는 재판에 회부되어 모든 작위와 명예를 빼앗겼고 이에 즉각 항소를 했으나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는 굴복했다.[15] 영어 원문은 man이다. 빌헬미나 "여왕"인데 제대로 된 "남자"는 여왕뿐이라며 망명정부 인사들에는 남자가 없다고 돌려서 까는 처칠의 블랙코미디가 섞인 말이다.[16] 양위하면서 메클린부르크 여공작 호칭과 네덜란드의 공주(프린세스) 호칭을 사용했다. 태상황이라는 게 있는 동아시아에서 선왕에게 공작 호칭을 준다면 모독으로 취급받았지만 네덜란드가 있는 유럽은 동아시아와 예법이 달라서 상관없다.[17] 아직 서독 정부가 세워지기 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아데나워 정부는 네덜란드와의 협상을 통해 2억 8000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1963년 5월 엘텐 지역을 다시 돌려받았다. 단 다위벨스베르흐(Duivelsberg) 란 작은 숲만 네덜란드의 소유로 그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