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 베를린 올림픽

 


10회

11회

14회[1]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36 베를린 올림픽'''
1948 런던 올림픽
1. 소개
2. 특징 및 분위기
3.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조선 선수
4. 뒷이야기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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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ele der XI. Olympiade
(Die Olympische Sommerspiele 1936)

베를린에서 열린 11회 하계 올림픽으로, 독일 제3제국 시절에 개최되었다. 다만 베를린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을 때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이었다. 히틀러가 유력 정치인으로는 부상했지만, 아직 정권을 잡기에는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1930년에 유치했다. 올림픽 포스터에는 베를린의 상징물인 브란덴부르크문이 그려져 있으며, 19개 언어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나치에 대한 반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46개국 3738명의 선수가 참여했으며, 올림픽의 권위는 이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었다.[2] 10만명 규모의 경기장과 2만명 수용 가능한 수영장, 베를린 교외에 선수촌을 지었다. 베를린 올림픽의 최대 공로자는 정치와 예술을 구별하자는 관점에서 반대국들을 설득한 미국 NOC 위원장 브런디지.
히틀러가 친히 경기장에 나와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확인하려 했지만, 정작 미국 선수, 그것도 서구인들이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 경멸해 마지 않았던 아프리카인이었던 제시 오언스가 금메달 4개를 휩쓸어 버렸다.[3]
개막 전야 베를린에 도착한 성화를 맞고 있는 루스트가르텐 광장. 나치 전당대회 사진이 아니다. 초대형 나치깃발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가운데, 히틀러 청년대 및 유년대 단원들과 군인들이 무겁게 정렬하고 있다.

2. 특징 및 분위기


암스테르담 대회부터 성화가 들여졌지만 이 대회부터는 그리스 아테네 올림피아신전에서 시작해 '''올림픽 개최 도시까지 성화를 옮기는 성화봉송이 진행된 최초의 올림픽'''이다. 총 3,000km를 운반하였으며, 성화는 '''도로 한가운데에다 지펴놓았다'''.
이 대회는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현장 중계이자,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생방송이 이루어진 계기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촬영한 영상을 별도의 기록 매체에 저장한 뒤 방송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전파로 주조정실로 무선 송신하는 형태였다.
당시 나치 언론당국은 올림픽 개회식 및 주요 경기들에 대한 텔레비전 생중계를 실시하였다. 올림픽 이전에도 제3제국이 라디오 생방송을 최초로 시행하기도 하였다. 히틀러의 주요 연설들은 라디오 생방송으로 방송하였고, 베를린 올림픽 시행 당시에 독일에는 이미 라디오 생방송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베를린 전역에 28개의 간이 상영실을 설치하고, 텔레풍켄사의 상영장비들을 설치하여 경기 모습을 베를린 시민들이 무료로 시청할 수 있도록 하였고, 영국의 BBC에서도 이 전파를 받아 중계를 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중계 카메라의 종류가 세 가지라서 ''' 카메라가 통일이 안 되는 바람에 자주 화면이 끊기고 화질도 들쭉날쭉이었다는 것. 당시 뉴욕출신 기자가 쓴 말에 따르면 "폴로 게임에서 서로 다른 색깔의 말이 뛰는 장면이나 되어야 뭔가 좀 확실히 보였다". 독일에서 최초의 기계식 텔레비전이 발명되기는 하였으나, 이것을 상용화한 것은 영국이었다(1929년에 기계식 텔레비전을 방송 시작). 독일은 흔히 브라운관이라 불리는 음극선관을 이용한 전자식 텔레비전 기술을 국가적으로 육성하였고, 1933년부터 시험방송을 시작하여 1935년 정규 전자식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텔레비전 기술은 발터 브루흐(Walter Bruch)라는 당대 가장 높은 전자공학자에 뜻하여 연구되고 있었고, PAL(독일, 영국 등)과 SECAM(프랑스, 소련 등) 신호 전송 표준을 개발한 장본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30~40년대 독일의 텔레비전 방송은 당시 기술 수준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품질로 이름났다. 기계식 텔레비전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완전히 사장되고, SECAM, PAL, NTSC 등의 TV 표준이 제정되면서 전자식 텔레비전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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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주경기장에 입장하는 미국 선수단을 향해 나치식 경례를 하는 관중들. 그 뒤로 입장하는 흰색 옷을 입은 선수단이 나치 독일 선수단이다.
비록 처음에는 반대하긴 했지만, 이 대회는 철저하게 아돌프 히틀러가 기획한 올림픽이다. 나치 정권이 수립된 뒤에 개최된 올림픽이라 독일의 국기는 나치당기를 사용하였으며, 대회장과 시내 곳곳에 이 깃발을 게양해 두는 등 심혈을 기울여 대회를 열었다. 개회식 때는 독일 대표팀의 입장 시에는 정복을 빼입은 군장교들을 기수 뒤에 세워 행진하게 했으며, 심지어 독일 선수단 입장에 맞춰서 나치 독일의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가 연주되었다. 몇몇 유럽 국가들도 입장 시에는 로마식 경례를 하고 입장하였다.
인종차별스런 분위기도 있었지만, 독일도 대외관계와 국제여론을 의식하여 대회 기간 중 인종차별적 분위기는 생각보다 심한 편은 아니었다. 올림픽 기간을 비롯해 외국 선수들이 베를린에서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도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각 상점마다 걸린 유대인 출입 금지 간판을 모두 내리게 했고, 유대인들의 사회 활동도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다만 올림픽에 유대인 선수가 출전하는 것은 철저히 막았다.[4] 그리고 올림픽이 끝나고 원상복귀…
'''아프리카계 미국인'''선수인 제시 오언스(1913~1980)는 이 대회에서 육상 4관왕(100m, 200, 4x100m 계주, 멀리뛰기)이 되었다. 400m는 원래 미국팀 우승 후보가 2명 있었는데, 히틀러가 그 두 명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출전 금지시켜 제시 오언스는 금메달을 하나 더 딸 수 있었다. 이 기록은 84년 LA 올림픽에서 칼 루이스가 깨기 전까지 육상 단거리 기록으로서는 철옹성과 같았다. 특히 나치당국이 미국 선수단의 보조 노무자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목화 노예 노동자의 손자인 오언스는 개막 첫날부터 아리안족의 트랙을 마음껏 누볐다.
그러나 바로 그 아리안족 육상 선수인 루츠 롱이 아니었다면 오언스의 신화는 완성되지 않을 뻔 했다. 오언스의 넓이뛰기 라이벌인 롱은 이어지는 실격으로 탈락 위기에 놓은 오언스에게 도약 지점을 손수건으로 표시해 줌으로써 오언스는 마지막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이라는 따가운 눈빛에도 무릎꿇지 않고 올림픽 정신이 우월하다는 것의 작은 예증이다.''' 멀리뛰기 결선에서의 루츠 롱과 제시 오언스.

"운동답고 기사다운 시합은 사람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개회사 연설을 당시 올림픽 준비위원회 위원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쓴 뒤 아돌프 히틀러가 읊었다. 다만 의도야 어떻든, 진짜 개회사대로 역사에 남을 드라마 같은 올림픽이었다. 아리아인을 위한 경기에서 유색인종인 손기정과 제시 오언스가 영웅이 되었고, 경쟁 상대임에도 제시에게 충고한 독일선수 루츠 롱과 손기정 항목에도 나오는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 선수 같은 경우들이 있었으니.
훗날 힌덴부르크호 폭발 사고로 전소되긴 했지만 비행선 힌덴부르크 호에도 오륜기를 그려놓을 정도로 나치독일 당국의 올림픽 홍보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 이전 대회들보다 경기 운영 면에서 혁신적인 대회로 평가받고 있다. 위 영상에서 보다시피 도시전역에 설치된 폐쇄 회로 화면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경기를 관람했고, 뛰어난 제반시설의 개발, 시간을 측정하는 장비들도 정확해지는 등, 당시 독일의 산업과 기술력을 과시하는 장이었다. 위 영상의 출처가 되는 레니 리펜슈탈이 감독한 기록영화 올림피아도 역대 어떤 올림픽 기록영화보다 예술성과 기술력에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1904년과 1908년 시범종목까지 갔다가, 한동안 제외되었던 골프는 이 대회에서 다시 시범종목으로 지정되었다. 1936년 당시에는 개인전이 아닌 국가별 팀전으로 시행했다. 팡야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1홀당 기록을 비교하여 승리, 패배, 무승부를 기록하고, 그 기록상에 나타난 승리 숫자가 많은 팀이 이기고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단 빠른 경기를 위해서 9홀로 제한했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12개 국가가 참가해서 3개국 1조의 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렀다.(4개국은 1회전 부전승) 골프에도 취미가 있던 히틀러는 골프 종목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결승전에서 미국이 독일을 이기는 바람에 체면을 구겼다. 그리고 골프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드디어 정식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베를린의 경쟁지는 스페인바르셀로나였고, 여기에서 베를린에 밀린 인민전선 정부는 인민 올림픽을 열려고 했으나, 스페인 내전으로 망했다. 그리고 56년 뒤인 1992년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이 올림픽 때 대한민국 마라토너인 황영조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얻게 된 지 56년 만에 금메달을 얻게 되었다.

3.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조선 선수


마라톤경기에서 당시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손기정남승룡'''이 일본 선수로 출전하여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하였으며, '''일장기 말소사건'''이 이때 일어났다. 자세한 사항은 손기정 문서를 참조.

손기정 문서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지만, 베를린 올림픽 이야기를 하면서 손기정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리고 어느 운동선수의 1승이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이토록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하다. 손기정은 난공불락의 담으로 생각되던 2시간 30분의 담을 최초로 돌파한 마라토너이며, 베를린 올림픽 우승기록 2시간 29분 19초 2는 마라톤 세계 기록 사상 가장 오랜 시간을 두고 세계기록으로 군림한 위대한 업적이다. 한국인 육상 세계기록 보유자는 손기정, 45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25분대의 기록을 세웠던 서윤복과 북한까지 확대하면 60년대 중반 여자 800미터 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우며 최초로 2분담을 돌파했었던 신금단 등, 단 세 명 뿐이다. 세계 기록이 아니라 올림픽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단, 같은 42.195km라고 해도 동등한 조건이 아닌 코스에 따라 다양한 영향을 받는 마라톤의 특성 상 기록 자체를 중시 여기지 않는 풍토가 있어 세계 기록 또는 올림픽 기록 달성 여부를 주요 쟁점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가 일본에서 기록한 2시간 26분 42초는 전세계 육상인들을 경악시켰으나 그들은 이 기록을 인준하는 대신 '기록이 수립된 도쿄의 마라톤 코스는 정규 거리보다 짧았을 것'이라는 성명을 낸다. 세계 기록을 5분 위로 당겨버린 이 경이의 업적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으리라. 손기정의 기록이 더욱 빛났던 까닭은, 마라톤 출전권 두 장이 모두 조선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일본육상협회가 손기정, 남승룡, 일본인 후보 선수를 대상으로 '현지선발전'이라는 기상천외한 경기를 실시한 데서 온 체력소모를 극복하고 거둔 승리라는 데 있다. 코치가 페이스 조절을 해 주었더라면 손기정은 가히 불멸의 기록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의 마지막 100m 구간 기록은 지금까지도 그 유례가 없는 13초대의 초고속.
당시 독일의 라디오 보도를 보면 언론에서 손기정이 조선인임을 알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조선 학생인 일본육상선수)
이전 1932 LA 올림픽에 이어 조선 출신 선수들이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하였다. 전술한 손기정과 남승룡을 포함하여, 축구의 김용식, 농구의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복싱 웰터급의 이규환 등 7명이다. 사실 손기정, 남승룡에 대한 견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쪽에선 조선인 선수들을 최대한 뽑지 않으려고 했다. 축구의 경우 김용식뿐만 아니라 김영근도 선발됐는데, 김영근이 '실력에 비해 조선인 축구 선수들이 차별 받았다. '며 차출을 거부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농구의 경우 11명의 선수단 중 3명이 조선인으로 선발됐는데, 이는 당시 일본 농구협회 상무이사이자 일본 선수단 총무였던 이상백의 존재 때문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일본 축구나 농구가 메달을 못 따서 그렇지, 땄으면 한국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처우에서 골치가 아플 뻔했다(축구의 경우 일본은 8강 진출. 그래서 김용식은 올림픽 8강에 2번 진출한 선수이다.). 이 선수들은 어쩌면 메달리스트면서도 개인 종목의 손기정, 남승룡과는 달리 이를 대놓고 이야기 할 수 없었을지도.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는 손기정과 남승룡이 살아있을 적에 한국 대표로 메달을 딴 선수들과 똑같이 연금을 지급했다. 일본 축구나 농구가 메달을 땄으면 이 선수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게 옳을까 안 하는 게 옳을까 하는 그 밖의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용식 등은 나무위키 항목이 있는 것으로만 보아도 이후 한국체육에 끼친 공적이 크기 때문에 아마도 예우해 주었으리라고 본다.

4. 뒷이야기


그리고 이 올림픽이 열린지 3년 뒤인 1939년, 개최국이었던 나치 독일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강제로 병합하고,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게 된다. 그로 인해 다음 올림픽도 12년 뒤인 1948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런던에서 다시 개최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학팀인 워싱턴 허스키스 조정 대표팀이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딴 대회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이것도 현장에서 보고 언짢아했다고 한다.
당시 리히텐슈타인아이티 국기가 같다 보니 자주 혼동하는 사례가 있어서 리히텐슈타인은 다음 해에 왕관을 추가해서 현재의 국기가 되었다.
다음 대회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국제사회의 여론이 나빠지자 개최권을 되돌려 줬고, 결국 올림픽이 열리진 못했다. 게다가 전쟁은 제2차세계대전으로 길어졌기 때문에 다다음대회도 넘겨졌으며, 1948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개최할 수 있었다.
주경기장인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은 패전 뒤 해체될 위기도 있었지만, 결국 나치 상징들을 떼어내거나 그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등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쳐 계속 쓰이고 있으며, '''딱 70년 뒤''' 2006년에 FIFA 독일 월드컵의 경기장으로도 쓰였다. 또한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트랙, 필드경기도 열렸다.
근대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생전에 열린 마지막 올림픽이기도 하다. 쿠베르탱은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다음 해인 1937년 9월에 사망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확인하러 왔다가 유색인종인 제시 오언스가 4관왕을 따자 자존심이 매우상해서 흑인과 불결한 악수를 피하기 위해서 자리를 일찍 떠났고 이 일화가 영화 레이스(영화)에 나온다...지만 실제로 제시 오언스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히틀러가 VIP석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주었고 자신도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고. 히틀러는 자신과 악수를 하고 축하해줬으며 오히려 루즈벨트가 자신을 무시하고 냉대했다고 술회한다.

[1] 12회 올림픽(1940년)과 13회 올림픽(1944년)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됨.[2]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세계대전이 다시 일어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3] 그러나 히틀러는 제시 오언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오언스와 밝게 악수와 환담을 나누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심지어 동양에서 온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에 대해서도 축하인사를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제시 오언스는 '히틀러는 자신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나눴지만 본국에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면담이나 공식석상에서의 언급은 커녕 서한 한 장도 받아보지 못했다' 고 증언한다.[4] 다만, 다큐멘터리 '20세기 사건 TOP 101' 2화에 따르면 독일 선수로 유대인을 뽑기도 했었다는데, 그저 대외 눈치를 보고 뽑은 후보군이었는지 다큐 혹은 나무위키 문서의 오류인지 교차 검증이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