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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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s of the X Olympiad
(1932 Summer Olympics)
미국 LA에서 열린 10회 올림픽이다. 1984년 올림픽에서도 사용된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을 포함 한 본격적인 선수촌과 체육관이 새롭게 건설되었지만 교통 문제로 37개국 1,331명의 선수만 출전. 세계 대공황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150만명의 관중이 운집, 통신 기술의 혁신으로 프레스 센터를 통한 보도가 과학적으로 이루어져 신기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흑인 육상의 시대가 서서히 개막되었다.
LA는 올림픽이 자본주의의 합리성과 만났던 도시이다. 3회 세인트루이즈 대회의 치욕은 LA에 의해 말끔히 씻겨졌고 올림픽은 이제 좀 더 많은 사람과 만나는 등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국기 아래 올림픽과 조우한다.
2. 특징
당시 중화민국이 처음 참가한 대회이다. 다만 사연이 있는데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일대에 식민정권을 세운 일본은 이 정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해 '만주국'이란 이름의 단일팀 참가 신청을 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묵인하되 그들의 식민정권만은 인정치 않는 방법으로 일본의 술책을 방지. 한편 만주를 빼앗긴 중국은 이러한 일본의 술책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계 최다의 인구수를 자랑하면서도 단 1명의 육상 선수만 출전 시킨다.[1]
식민지 한국 선수들이 처음으로 참가한 올림픽이기도 하다[2] . 한국 선수들 중 최고 성적을 올린 선수는 육상 마라톤의 김은배(공식 기록상은 일본식 이름인 긴 온바이) 선수로서 6위. 같은 종목에서 권태하(곤 다이카) 선수가 9위, 그리고 복싱 남자 라이트급에 황을수(고 오쓰슈[3] ) 선수가 1회전 탈락이라는 성적을 각각 기록했다.
한국 마라톤의 신호탄이 이 대회에서 울린다. 그 주역은 각각 6위와 9위를 차지한 김은배와 권태하. 이들은 경성과 동경에서 가진 올림픽 파견 선발전에서 일본 선수들을 압도적으로 따돌리고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현지에 도착해서는 일본 임원들의 유치한 계략으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임원들은 3위로 선발된 쯔다만을 코스 답사를 시켰으며 육상화조차도 차별적으로 지급하는 등 일본 선수를 우승시키기 위해 우리 선수들의 희생을 노골적으로 강요했다. 제대로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자신의 기록도 내지 못하고 권태하는 9위로 주저앉았으며, 10km 지점까지 꼴찌로 달리던 김은배는 연도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교포들의 독려에 분전, 6위로 입상한다. 현지에서의 불이익만 아니었다면 손기정의 영광은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두 선구자들은 육상에서 유일하게 정상권에 진입해 있는 한국 마라톤의 건국신화임에 틀림없다. 김은배,권태하 선수가 당시 코치로 참가한 파보 누르미와 찍은 사진. 악수를 하는 이가 권태하, 그 왼쪽이 김은배 선수이다.
당시 한국 선수들이 올림픽에 당당히 참가한다는 소식은 현지 교민들을 들끓게 했다. LA의 한인 교포들은 선수들을 위해 성대한 환영식을 열었고, 마라톤 코스 곳곳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을 보냈다. 김은배는 LA의 동포로부터 건네받은 태극기를 몰래 숨기고 귀국해서 평소 친분이 있던 이길용 기자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길용은 김은배와 권태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슬쩍 지우고 게재한 주인공이기도 한데 이때는 다행히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4년 후에... 일장기 말소사건 참고.
미국 흑인 육상의 연대기는 100m와 200m에서 각각 10초 3과 21초 2의 세계신기록과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2관왕에 오른 툴란에 의해 시작된다. 물론 이 혁혁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미국 언론의 시선은 오로지 전설적인 야구왕 베이브의 애칭을 달아 준 육상의 만능 여성 밀드렛 엘라 디드릭슨에서 몰렸다. 그리고 디르릭슨은 당연히 백인이었다.
전 대회에서 육상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한 일본의 도약은 이번 대회에서도 무서웠다. 서구인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이 신기하고 낯선 동양인들은 6개의 금메달이 걸린 남자 수영에서 4개의 올림픽 신기록을 포함한 5개의 금메달을 독식, 미국 수영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 100m 자유형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야쓰지 마자키의 기록은 무려 58초 2. 그리고 그는 17세에 불과했다. 더욱 놀랄만한 것은 자유형 1500m 우승자 기타무라는 14세의 소년이라는 사실. 이 때부터 초인적인 강훈으로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 일본 스포츠의 신화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LA에 올림픽타운이 지어졌긴 하지만 여자들은 들어갈 수 없었으며 130여명에 달하는 여자 선수들은 따로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여자들이 남자 숙소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카우보이들이 지키고 서 있었을 정도...
예전 올림픽들처럼 웬만한 종목들에 선수들이 어느 정도 참가했지만, 그 해 신설된 필드하키의 경우는 참가팀이 고작 3팀밖에 되지 않았다. 예전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20년대 이후로는 거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화제가 일었다고..
시범종목으로 3연속으로 있던 라크로스와 미식축구가 새로 시범종목으로 들어갔으며, 필드하키도 정식종목화되었다.
올림픽 주경기장인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은 20여년 후 브루클린에서 연고 이전한 '''LA 다저스의 홈구장'''으로 다저 스타디움이 세워지기 전 3년 동안(1958~61) 기묘한 모양의 야구장으로 이용되었고, 제1회 슈퍼볼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이후 1984 LA 올림픽에서도 주경기장으로 다시 사용되었다. 다저스 말고도 프로 미식축구 팀인 LA 램스, LA 차저스, LA 레이더스 등이 이 구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USC 대학의 미식축구팀인 트로이잔스가 사용하고 있는데, 트로이잔스는 무려 1923년부터 지금까지 이 구장을 사용하고 있다.
[1] 사실 그 중국 육상 선수는 원래 만주국 선수로서 출전할 예정이었다. 이름은 류창춘으로, 1909년 랴오닝성 와팡뎬에서 태어나 장거리 선수 우시웨이와 함께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할 예정이었으나, 그는 만주국 선수임을 거부했고, 국제올림픽위원회도 5월 21일 보낸 올림픽 참가 원서를 거부한다, 그는 대궁보에 자기가 중화민국 선수로 출전하겠다고 하였으나, 국민당 정부가 지원하지 않겠다고 밝혀 무산될 뻔 하였지만, 다행히도 장쉐량이 그를 도와줘 8,000달러의 경비를 지급해줘 100M, 200M, 400M 경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의 생애는 Liu Changchun 위키백과 참고. [2] 일본 선수단에는 조선 출신뿐만 아니라 대만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메달 획득은 실패. 즉 중화민국의 유일한 선수가 이 대회의 유일한 한족 선수는 아니었다는 말.[3] 해외 문서에 오쓰 슈코로 나와 있는 경우가 있는데 띄어쓰기의 오류로 보인다. 성인 황(고)을 뒤에다 놓고 슈를 오쓰에 붙이지않고 잘못 붙여서. Otsushu Ko가 Otsu Shuko로 나온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