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M-48 스카이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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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M-48 '스카이볼트'(Skybolt)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공중 발사용 탄도 미사일(Air-Launched Ballistic Missile, ALBM)로 개발된 탄도 미사일이다.
당시 ICBM 이외의 백업용 핵공격 수단은 오직 핵폭격뿐이었는데,[1] 갈수록 강화되는 소련의 방공망에 핵폭격기가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따라서 사거리가 비교적 긴 탄도 미사일을 비행기에 탑재해 쏘자는 계획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미국이 단독개발했으나, 곧 빅터나 벌컨 등의 폭격기에 탑재하기 위해 영국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하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때마침 최초의 실용 SLBM인 UGM-27 폴라리스가 성공했다. 폭격기보다 훨씬 생존성이 높은 잠수함에서의 핵 보복이 가능해지면서 공중 발사 탄도미사일의 가치는 더욱 약화되었고, 결국 스카이볼트 개발 계획은 폐기됐다.
당시 영국은 전략 핵전력을 구형 폭격기의 핵폭격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폭격기에 탑재된 핵탄두의 생존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카이볼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스카이볼트의 개발취소는 영국의 전략 핵전력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NATO는 유럽의 독자적 핵억지력 보유에 관한 논쟁에 휩싸여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카이볼트의 취소는 미국이 영국의 전략 핵전력 보유를 탐탁치 않아 하고, 궁극적으로 무력화시키려 든다는 의심을 사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스카이볼트 위기(Skybolt Crisis)'라는 상황이 조성되어, 미영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미국을 어르고 달래서 스카이볼트를 취소하는 대신, 미국이 개발한 최초의 실용 SLBM인 UGM-27 폴라리스를 얻어내어 자국의 전략원잠에 탑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프랑스의 샤를 드 골 대통령은 영국이 미국의 핵전략에 종속되었다면서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후 영국은 1960년대 말 드골이 권좌를 떠난 후에야 비로소 유럽경제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비록 실제 전력화되지는 않았지만, 미영 양국의 동맹관계, 더 나아가 유럽의 외교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남기는 등 생각 외로 큰 파장을 일으킨 무기였던 셈.
한편 이후로도 스카이볼트와 같은 공중 발사 탄도 미사일(ALBM)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미 공군은 C-17의 MRBM 투하-발사와 C-5의 미니트맨 III ICBM 발사를 시도해 성공했다(…). 물론 실험의 결과가 성공적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실용화는 되지 않았다.
1. 개요
AGM-48 '스카이볼트'(Skybolt)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공중 발사용 탄도 미사일(Air-Launched Ballistic Missile, ALBM)로 개발된 탄도 미사일이다.
2. 개발 배경과 백지화
당시 ICBM 이외의 백업용 핵공격 수단은 오직 핵폭격뿐이었는데,[1] 갈수록 강화되는 소련의 방공망에 핵폭격기가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따라서 사거리가 비교적 긴 탄도 미사일을 비행기에 탑재해 쏘자는 계획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미국이 단독개발했으나, 곧 빅터나 벌컨 등의 폭격기에 탑재하기 위해 영국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하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때마침 최초의 실용 SLBM인 UGM-27 폴라리스가 성공했다. 폭격기보다 훨씬 생존성이 높은 잠수함에서의 핵 보복이 가능해지면서 공중 발사 탄도미사일의 가치는 더욱 약화되었고, 결국 스카이볼트 개발 계획은 폐기됐다.
3. 외교 분쟁의 대상
당시 영국은 전략 핵전력을 구형 폭격기의 핵폭격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폭격기에 탑재된 핵탄두의 생존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카이볼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스카이볼트의 개발취소는 영국의 전략 핵전력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NATO는 유럽의 독자적 핵억지력 보유에 관한 논쟁에 휩싸여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카이볼트의 취소는 미국이 영국의 전략 핵전력 보유를 탐탁치 않아 하고, 궁극적으로 무력화시키려 든다는 의심을 사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스카이볼트 위기(Skybolt Crisis)'라는 상황이 조성되어, 미영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미국을 어르고 달래서 스카이볼트를 취소하는 대신, 미국이 개발한 최초의 실용 SLBM인 UGM-27 폴라리스를 얻어내어 자국의 전략원잠에 탑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프랑스의 샤를 드 골 대통령은 영국이 미국의 핵전략에 종속되었다면서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후 영국은 1960년대 말 드골이 권좌를 떠난 후에야 비로소 유럽경제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비록 실제 전력화되지는 않았지만, 미영 양국의 동맹관계, 더 나아가 유럽의 외교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남기는 등 생각 외로 큰 파장을 일으킨 무기였던 셈.
4. 후일담
한편 이후로도 스카이볼트와 같은 공중 발사 탄도 미사일(ALBM)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미 공군은 C-17의 MRBM 투하-발사와 C-5의 미니트맨 III ICBM 발사를 시도해 성공했다(…). 물론 실험의 결과가 성공적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실용화는 되지 않았다.
[1]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처럼 구식 폭격기로 수평 폭격을 하는것.(...) 소련군의 조밀한 방공망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