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広島・長崎 原爆投下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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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폭발한 리틀 보이버섯구름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서 폭발한 팻 맨버섯구름[1]
1. 개요
2. 상세
2.1. 소련의 동태
2.2. 인명 피해
2.3. 일본의 종전 묵살
2.3.1. 일본의 포츠담 선언 묵살
2.4. 미국 여론
4. 작전 준비 과정
4.1. 어디를 때릴 것인가
4.2. 제509 혼성 비행단 (509th Composite Group)
4.3. 세계 최초의 핵 폭격기, 에놀라 게이
4.4. 경고 사격만 한다면?
4.5. 기민한 작전변경
5. 첫 번째 폭발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5.1. 일본의 반응
6. 두 번째 폭발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6.1. 일본의 두 번째 반응
7. 일본 외의 반응
8. 그 외
9. 종전 후
9.1. 여론
10. 한국인 원폭 피해자
11. 논쟁
11.1. 찬성 - "전쟁을 끝낼 수단이었다"
11.2. 반대 - "학살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11.3. 결론: 일본은 재앙을 피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
12. 기타
13. 관련 문서


1. 개요


태평양 전쟁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일본 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1945년, 일본 제국의 도시인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이다. 현재까지 인류 역사상 살상 목적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유일한 사례이다.
이로 인해 수십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어 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겼다. 만약 이 때 일본 제국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후속 작전인 몰락 작전이 시행되어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중론이다.

2. 상세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맨해튼 계획을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에 후회하며.

저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 본디 맨해튼 계획나치 독일의 핵기술 병기화를 우려하여 이를 선점하고자 미국, 영국 공동계획하에 추진된 것이지, 실제로 어디를 지도에서 날리겠답시고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대의 핵무기는 아직 시험조차 되지 않은 신병기였으므로, 잘못 투하하였다가 불발이라도 나면 오히려 추축국에게 기술만 고스란히 넘겨주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기껏해야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트럭(Truk)제도에 투하해보자는 의견이 나왔을 뿐이었는데, 이것도 해상에 투하해야 핵기술 회수와 습득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중일전쟁에서 점차 패색이 짙어지고 있던 일본 제국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 공작을 펴고 있었다. 특히나 식민지로 삼고 있던 조선, 중국 동부, 만주, 사할린들을 깔끔히 포기하고 당장 항복하자는 고노에 후미마로와 같은 강경파는 이미 1944년부터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처음부터 홋카이도까지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할린이나 만주 정도 가지고 항복을 중개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아울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 또한 정치적 상징성으로든 군사적 실리성으로든 일본 본토를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화평 공작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45년 7월 말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일본 제국은 국체 보존과 천황제 유지가 불투명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여전히 소련의 중재를 통해 조약을 체결한다는 가정을 버리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발표를 해버렸는데, 이렇게 되자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은 전쟁 지속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고 마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당시 일본 제국은 1억 총옥쇄를 외치며 결사적으로 저항하였고, 이 저항의 정점으로 뽑히는게 바로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였다. 이 두 전투에서 예상 밖의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곧있을 몰락 작전에 앞서 일본을 압박할 새로운 수단으로써 핵무기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미국의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2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사 비밀로서 그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그 20억을 둘러싼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 명백했다. 이에 관련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귀중한 혈세로 헛짓거리 안 했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즉, 선거는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앞선 상륙 작전에서 유권자들의 아들들은 죽어나갔고, 그 와중에 전쟁을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무기를 20억 달러나 들여서 완성했지만 비인도적이라서 쓰지 않았다는 건 당시 유권자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이러한 당시 미국 내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존 키건은 다음과 같은 다소 섬뜩한 표현으로 묘사하였다.

"한여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p.856


2.1. 소련의 동태


독소전쟁이 끝나가면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얄타 회담에서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그만큼 소련 몫도 늘어나니, 태평양에서 소련 영향을 줄이려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다.
미국이 소련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독일이 항복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 소련은 한숨 돌린 상태에서 일본군은 이미 전쟁 수행 능력 태반을 잃어서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두려워한 시나리오는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자신들과 달리 육로로 연결된 소련이 동북아를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놓는 일이었다. 일제의 항복 이후 소련과 미국이 경쟁하듯 점령지로 진주하여 한반도에서 마주쳐서 이를 갈라먹고 냉전 상태에 돌입한 것도 '소련보다 빨리 극동에 입성하기 위해 핵을 사용했다'고 하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2.2. 인명 피해


일본을 공격하면 상륙시 너무 많은 피해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고,[2]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된 몰락 작전은 핵탄두 20여 발과 화학탄 사용까지 상정된 작전이라 너무나 잔혹하기도 했다.

2.3. 일본의 종전 묵살


사실은 이게 가장 큰 이유다. 당시 일본 상황은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했을지도 모를 판이었다. 일본 해군은 궤멸 수준을 넘어 구레 군항 공습으로 사실상 강제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일본의 국민들은 매일같이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자원도 없어서 군부에서 준비시키던 본토결전용 병기라는 것도 죽창, , 일본도 같은 단순한 냉병기 뿐이었다. 그리고 (결호작전 문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군은 투석기를 포병으로 편제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투석기와 죽창을 만들 나무마저도 바닥난 상태였다.
말이 본토 결전이지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과는 다르게 본토에서조차 전쟁 속행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 독일도 본토 방어전 후반부에는 전력이 후달려서 소년병을 징집하는 등 별 짓 다 하긴 했지만, 적어도 국민돌격대를 창설하여 제식무기나 노획한 무기와 탄약도 지급했으며, 후에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할 당시에도 무장한 시민 대부분은 적어도 칼이나 죽창 같은 냉병기가 아니라 총을 가지고 싸웠다. 또한 망가진 전차를 포탑만 수리해서 고정포대로 써먹는 등 일본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일본 지휘부와 기득권층은 자국 상황이야 어떻든 오로지 항복할 때 천황제 유지[3]라는 조건을 얻어 내겠다며, 자국민들을 반자이 어택카미카제옥쇄 등으로 갈아넣으며 허세를 부려서 조건부 항복을 얻어 내겠다는 포부를 내비친다. 이것이 '''1억 총옥쇄'''라고도 불리는 '''결호작전'''. 이런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미국은 '도대체 일본인어떻게 된 미친 놈들인가?'라는 식의 연구도 이루어졌고,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다.
미국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4]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5]'며 자살 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일본인의 완전 소멸 또는 국가 존속이 위협받아야 일본이 항복'''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 핵 투하가 결정되었다.

2.3.1. 일본의 포츠담 선언 묵살


한편 미국은 이미 핵 투하를 결정했음에도 마지막으로 일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일본 정부는 7월 28일 오후 4시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여기서 "포츠담 선언카이로 선언을 표현만 바꾸어 말한 것으로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묵살할 뿐이다. 우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뿐이다."라고 발언했다.
일본말에서 묵살(黙殺)이라는 말은 2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무시한다(ignore)'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유보한다(no comment)'는 의미가 있다. 이 이중적인 의미가 영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잘못 전해졌다는 주장이 있고, 이를 미국 NSA 정부 문건을 비롯하여 많은 공식 기관에서 일반적인 사실로 인정하고 있으나, 사실 일본 안에서도 1억 총옥쇄를 운운하던 당시의 광기 속에서는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고, 간타로 총리도 상술했든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덧붙였으며 미국 언론 역시 Ignore를 보다 직접적인 '''거부(reject)'''라는 표현으로 약간 바꿔 보도했다. 당장 영국 BBC가 "일본이 연합군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Japan formally rejected the Allied ultimatum)"고 보도했고, 7월 30일 뉴욕타임즈가 "일본이 연합국의 항복 촉구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Japan Officially Turns down Allied Surrender Ultimatum)"는 제목으로 보도했으며, 다른 언론들도 다 그랬다.
이 보도를 보고 완전히 빡친 트루먼 대통령은 8월 3일 원폭 투하를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2.4. 미국 여론


그 당시 미국의 여론은 속된 말로 눈이 뒤집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로는 1812년 전쟁 후로 처음으로 미 본토가 공격당한 것만으로 매우 빡쳐있는 상태기도 했고, 유럽 전선의 나치 독일이 항복하고 세계적으로 종전 분위기가 강해진 상태에서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국내에선 일본 본토 상륙으로 큰 희생을 치르느니 해상봉쇄를 실시해 ''''그냥 다 굶겨 죽여버리자''''는 여론도 해군을 중심으로 매우 강하게 대두될 지경이었다. 심지어 마침 추수철이 다가오고 있던 시점이라 일본의 모든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뿌려버리는 전략까지 있었을 정도였고. 이 가운데 해상 봉쇄는 항구에 기뢰 깔아두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더구나 선전포고도 없이 이뤄졌던 진주만 공습 때문에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매우 심각[6]해, 히로시마에 대한 핵폭격 당시에도 더 치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투하 전에 사이렌을 울려서 시민들이 하늘을 보게 하고서 터뜨려서 폭발 섬광으로 인한 실명을 최대한 유도해 인명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겠다고 하거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급 도시를 그대로 완파하지 못한다고 여겨 핵폭탄으로 소방 등의 도시 기능이 마비된 히로시마에 한 번 더 소이탄 폭격을 감행해 다 태워 흔적도 남기지 말자는 과격한 의견도 올라왔다. 그리고 이 과격한 의견이 취소된 건 원자폭탄 피해가 소이탄에 묻히면 원자폭탄의 '''정치적 상징성'''이 줄어든다는 다소 기묘한 이유였다. 반대로 정치적 상징성만 빼면 안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알다시피 원자폭탄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의 말이다. 원자폭탄이 가져온 끔찍한 결과는 아래 문단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니까.

3.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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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투하한 폭탄은 '팻 맨'(첫 번째 사진),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은 '리틀 보이'(두 번째 사진)라는 이명이 붙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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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보이는 우라늄 235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팻 맨의 경우는 플루토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그에 따라 달라졌다.
리틀 보이는 2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켜 임계질량을 넘김으로써 핵분열을 일으켜 폭발하는 원리이다. 1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다른 쪽 우라늄 덩어리로 발사하여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총류형), 상대적으로 길쭉한 모양을 지닌다. 리틀 보이는 너무나도 원리가 간단하기 때문에 불발의 우려가 거의 없었으며, 단 한 번의 실제 폭발 실험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물론 우라늄 235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실제 실험 없이 바로 실전 투입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트리니티 핵실험에서 실험한 것은 팻 맨 모델이다. 대신 리틀 보이는 한마디로 비효율적이며, 폭발력도 아래 설명하는 팻 맨에 비해 낮은 편이다.
팻 맨은 중심부를 비우고 그 속에 중성자원을 넣은 플루토늄 구체를 폭발 렌즈를 이용, 모든 방향에서 압축시켜 폭발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 내폭형)[7] 금속을 누른다고 압축이 될까 싶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적으로 직접 쥐어짜는 게 아니라 내부 폭약의 충격파를 이용해 알루미늄에 투사하고, 투사한 충격파를 받은 우라늄-플루토늄 복합 코어와 중성자 점화기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폭발하는 것이다. 별다른 가공 없이 바로 주조해낸 플루토늄 239라면 구멍이 송송 난 현무암 같은 조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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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발 렌즈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똑같은 압력으로 적절히(!) 플루토늄을 쥐어짜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제작이 매우 어려웠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희대의 천재인 존 폰 노이만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리틀 보이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별명이었으며, 팻 맨은 영국 총리 처칠의 별명이었다.

4. 작전 준비 과정



4.1. 어디를 때릴 것인가


원폭 투하지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1943년 5월 5일에 있었으나, 아직 원폭이 완성될 단계도 아니었으므로 체계적으로 논의가 된 것은 아니었고, 다만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떨어뜨린다는 대전제만 합의가 되었으며, 투하지로는 남태평양의 트럭섬 일본군 기지가 거론되었다. 구체적인 논의는 1945년 4월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원수가 맨하튼 프로젝트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Jr.)[8] 소장에게 원자폭탄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선정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그로브스 소장은 주요 책임자들을 모아 ''''원자폭탄 목표 선정 위원회'(Target Committee)'''를 조직하여 '어디를 때려야 잘 때렸다고 소문이 날지'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위원회의 멤버 중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 폰 노이만 등의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과학자들도 있었다.
목표 선정 위원회는 먼저 선정 기준을 정했다. 그것은 1) 지름 3마일(4.8km) 이상이고 주요 목표물이 있는 도시[9] 2) 원자폭탄 폭발의 피해를 효과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곳[10] 3) 1945년 8월까지 폭격을 받을 계획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목표 선정 위원회는 자신들의 일이 매우 어려운 업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것은 당시 일본에 '''"더 이상 폭격할 만한 대상 도시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도쿄를 비롯해서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 좀 그럴 듯한 군사 목표가 있는 일본의 주요 도시는 석기시대 성애자께서 친히 이끄시는[11] 제21 폭격사령부 휘하 수백 대의 B-29들이 들이닥쳐 이미 불태우고 지지고 볶은 뒤였기 때문이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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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공습 직후의 도쿄[13]
목표 선정 위원회는 일본의 남은 도시를 뒤지고 뒤져 겨우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곳을 한 군데 찾았다. 그곳이 바로 히로시마. 이어서 4개 도시, 즉 고쿠라(지금의 기타큐슈), 요코하마, 니가타, 그리고 교토가 추가되어 총 5군데의 우선 폭격 목표가 정해졌다.[14] 이들 도시가 선정된 이유는 그나마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경우 그 위력과 효과를 전세계인들이 더욱 잘 알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목표 선정 위원회는 대상 도시를 다시 AA, A, B의 3개 등급으로 구분했다. AA 등급, 즉 최우선 목표는 교토와 히로시마, A 등급은 요코하마와 고쿠라, B 등급은 니가타였다. 즉 히로시마는 원래부터 최우선적인 원자폭탄 폭격 목표지였다. 재밌는 것은 '도쿄의 일본 천황 황거에다 원자폭탄 먹이면 바로 전쟁 끝나는 것 아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목표 선정 위원회는 "황거는 다른 어떤 목표보다 명성이 높지만, 전략적인 가치는 가장 작다"고 일축했다.[15]
원자폭탄 목표선정 위원회가 최초로 권고한 투하 목표(영문). 교토와 히로시마가 1순위에 올라있고 나가사키는 아직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교토에 대해서 당시 전쟁성 장관(Secretary of War)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스팀슨이 1920년대에 신혼여행을 갔던 도시가 교토였는데, 여기서 일본 문화에 감명을 받은 스팀슨은 교토를 잿더미로 만든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신혼여행의 추억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 꺼림칙하기도 해서 교토를 원폭 투하 명단에서 빼자고 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정신적 문화적 중심지인 교토에 원폭을 투하하면 일본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해 전후 처리 과정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로브스 장군은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다. 맨하튼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끈 추진력 만렙의 이 젊은 장군은 일본의 전통 문화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교토에 원자폭탄을 한방 먹여야 일본인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표 선정 위원회가 초기 단계에서 교토를 AA 등급으로 정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로브스 소장의 위세가 막강하다 하더라도 상대는 전쟁성 장관(...) 더군다나 이 과정에 트루먼 대통령이 개입해서 스팀슨 장관에게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즉 민간인 주거 지역과 "옛/현 수도" 등을 투하 목표에서 배제하도록 주문하면서 사실상 쐐기가 박혔다.[16]
결국 1945년 7월 교토는 제외되고 대신 나가사키가 목표지로 추가되었다.[17] 그로브스 소장이 승인하여 트루먼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한 최종 목표는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의 4개 도시로 정해졌다.
교토가 제외된 것은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종전 이후까지를 생각한 그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고, 나가사키가 대신 선정된 것도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큰 도시이면서 일본의 전쟁 수행 시설 중에서도 핵심인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가 있었고, 일본 해군의 주요한 군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스팀슨 장관 등 고위층의 개인적 판단에만 의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상기의 원자폭탄 목표 선정 논의과정에서 오해하면 안되는 점이 있다. 히로시마, 고쿠라 등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1차적 원폭 투하 목표'에 불과했으며, 당시에는 원자폭탄을 맞고도 일본이 항복할지 여부가 미지수였으므로 미국측은 계속해서 다수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브스 장군은 향후의 원자폭탄 소요를 예측하여 문서로 남긴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1945년 개발 시점에서 3개,[18] 9월에 추가로 3개, 12월까지 매달 7개를 만들어내어 투하할 계획으로 있었다. 일본이 버티는 한, 미국은 계속해서 원자폭탄을 투하할 예정이었던 것이다.(...)[19]

4.2. 제509 혼성 비행단 (509th Composite Group)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작전은 제509 혼성 비행단(509th Composite Group)에 의해 수행되었다. 제509 혼성 비행단은 1944년 12월 7일 미국 유타주 웬도버 육군 항공기지에서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오로지 원자폭탄 투하를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이다. 부대장은 그 유명한 폴 티비츠(Paul W. Tibbets) 육군 대령. 아래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에놀라 게이를 직접 조종하여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바로 그 인물이다.
왜 제509 폭격 비행단이 아니라 혼성 비행단이라고 이름이 붙었냐면, 이 부대는 B-29를 이용한 폭격 뿐만 아니라 원자폭탄과 기타 장비를 수송하기 위한 수송기들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원자폭탄을 현지에서 정비하고 조립할 수 있는 해군 인원들과 과학자 그룹들도 명목상으로는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통합비행단중에는 1st Air commando Group가 유명했다. 티니안 현지에서 활동한 이들 과학자들은 따로 '앨버타 프로젝트'(Project Alberta 혹은 Project A)로 불렸다. 196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루이스 앨버레즈도 이 당시에는 맨하튼 프로젝트의 소장파 과학자로 제509 혼성 비행단으로 보내져 티니안 섬에서 박박 구르고 있었다.[20]
제509 혼성 비행단의 핵심은 휘하의 제393 폭격비행대대(393d Bombardment Squadron)였다. 이 폭격비행대대는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작전을 수행할 당시 기준으로 총 15대의 B-29 폭격기를 보유했다. 근데 이 B-29 폭격기들은 그냥 보통의 B-29가 아니라, 이른바 '''"은쟁반 B-29"(Silverplate B-29)'''라 불린 특별한 모델들이었다. 은쟁반 B-29들은 후미 기관총을 제외한 다른 무장은 모두 철거하였으며, 가변피치 프로펠러[21], 공기압으로 작동하여 신속하게 개폐할 수 있는 신형 폭탄창, 초대형 폭탄을 장착하기 위한 영국제 G 타입 폭탄투하기 등을 갖추었다. 나중에 "은쟁반"이라는 단어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작전을 가리키는 암호명으로 발전하였다.
제509 혼성 비행단에서 B-29를 다룰 비행요원들도 유럽전선 등에서 충분히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로 채웠다. 부대장이었던 폴 티비츠 대령부터가 이미 미 육군항공대에서 가장 뛰어나고 경력이 많은 B-29 조종사로 알려져 있었으며 유럽/북아프리카전선에서 B-17로 43회의 출격을 달성했었다. 그 외의 대원들도 역전의 노장들이었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 투하 작전에서 에놀라게이에 탑승한 폭격수 토마스 페러비 소령은 무려 63회, 역시 에놀라게이에 탑승한 항법사 더치 밴커크 대위는 57회의 전투 비행 기록 보유자였다. 같은 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의 폭격수 커미트 비헌 대위는 그 폭격 솜씨가 워낙 예술적이라 아예 자신의 탑승기가 "Great Artiste(위대한 예술가)'로 이름 붙었을 정도.
제509 혼성 비행단은 유타주 웬도버 육군 기지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위한 훈련을 거듭했다. 이 훈련은 주로 고도 9,000m 정도의 성층권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것, 폭탄 투하 직후 60도 경사로 급선회 / 급강하하여 최대 속도로 도주하는 것 등이 있었다. 이 투하 방식은 바로 폴 티비츠 대령이 개발한 것인데, 원자폭탄 폭발의 충격파에서 투하 폭격기가 안전하게 이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폭격 후 그냥 수평 비행으로는 절대로 폭발 충격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서 급선회 급강하를 통해 B-29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속도를 내어 폭심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핵심이었다. 아래 히로시마 리틀 보이 폭격 영상을 보면 이 급선회 급강사 기동이 나타나 있다.
다만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전까지도 제509 혼성 전대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투하할지 잘 모르고 있었다. "원자폭탄"이라는 이름도 몰랐으며, 그냥 무언가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최신의 초대형 폭탄 정도로 알고 있었다. 원자폭탄의 원리와 위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은 부임 전에 로스 앨러모스에서 핵폭탄과 핵물리에 대해 교육을 철저히 받은 부대장 폴 티비츠 대령, 원자폭탄 개발과 관리를 책임진 파슨스 대령, 그리고 원자폭탄 조립과 관리를 담당한 과학자 그룹 정도 뿐이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할 부대원들조차 원자폭탄이 뭔지 몰랐다는 것은 맨해튼 계획과 원폭 투하 작전이 얼마나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준다. 뒤에 나오지만 대원들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히로시마 작전 직전의 최종 브리핑이었으며, "원자폭탄"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히로시마를 향해 출격 비행중인 에놀라 게이 안에서였다(...) 일본 폭격 작전을 총지휘하던 커티스 르메이조차 이를 모른 채 이전부터 "왜 상부에선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교토, 니가타는 폭격 목표에서 제외시키는 거요?"라고 떽떽거리는 판이었다.
제509 혼성 비행단은 폭격 훈련을 마치고 1945년 5월에 티니안 기지에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제509 혼성 비행단이 티니안에 배치될 무렵, 기지 전체에는 "509가 전쟁을 끝내려 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한다. 물론 무엇으로 전쟁을 끝내게 될 지는 아무도 몰랐지만.[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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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초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 불과 몇달 전까지 조그마한 일본군 비행장이었고 그 주변은 열대 밀림이던 곳이다. 여담으로 1945년 당시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은 미국 본토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었다(...)
여담으로 제509 혼성 비행단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제509폭격비행단(509th Bomb Wing)로 이름을 바꾸어 미합중국 공군으로 이관되어 현재도 존속하고 있다. 휘하에 393 폭격비행대대도 그대로 있다. 미국 미주리 주 화이트맨 공군기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육군항공대 시절의 B-29부터 시작해서 B-47, B-52, FB-111을 운용해 왔고 현재는 B-2를 운용하며 미국의 공중 핵 억지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이다. 2005년 2월부터 괌에 지속적으로 배치되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분쟁에 대비하기도 하며, 2015년 1월 6일에는 에놀라 게이 파일럿 폴 티베츠의 손자가 509 폭격 비행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세계 최초,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실전 투하 작전 부대라는 것을 패기 넘치게 자랑하는 제509 폭격 비행단의 부대 휘장을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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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세계 최초의 핵 폭격기, 에놀라 게이


에놀라 게이[23]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이다. 미 육군 항공대 제509 혼성전대 제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기체번호 44-86292. 기체의 심볼은 노즈아트(Nose Art)로 새겨진 기수의 ENOLA GAY와 수직 미익(꼬리날개)의 R.[24] 멘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 Mk-1 코드네임 Little Boy의 모기(母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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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 "Enola Gay" 일련번호 44-86292, 티니안 North Field 주둔, 1945년
[25]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하여 역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남겼다. 이름의 유래는 제509 혼성 전대의 부대장 폴 티비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정확히는 결혼하기 전의 이름)으로, 어린 시절 비행사가 되려 했던 그의 꿈을 북돋아줬던 자기 어머니 이름을 따 'ENOLA GAY'로 명명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폴 티비츠는 부대장이었고 당연히 이 기체 기장은 아니었다. 기존에는 히로시마 임무 직전에 지휘관으로서 독단을 부려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 대위를 빼버리고, 히로시마 작전을 자신이 맡는 것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국내에 많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최근에 국내에 알려진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부정되고 있다.
폴 티비츠 대령은 제509 혼성 전대를 창설할 때부터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는 자신이 담당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사람이고, 원자폭탄 투하 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즉 1945년 8월 4일의 최종 폭격 훈련에서도 원래 기장인 로버트 루이스 대위를 부기장 자리에 앉히고 자신이 직접 기장 자격으로 투하 훈련을 진행함으로써 본인이 원자폭탄 투하 작전에서 비행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26] 물론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는 자신이 실제 폭격을 진행할 것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꽤 불쾌해 했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 기체는 1945년 8월 5일, 그러니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하루 전까지도 공식적인 기체명이 없었고 당연히 노즈아트도 없었다. 그냥 호출부호 '빅터 82'(Victor 82) 로만 불렸다. 그날 저녁에야 폴 티비츠 대령의 지시로 Victor 82의 기수 부분에 ENOLA GAY라고 마킹을 한 것이다. 로버트 루이스 대위는 계류장에서 자신의 애기에 커다랗게 '에놀라 게이'라는 페인팅이 되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이런 염병할, '내' 폭격기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라고 불같이 화를 내었지만, 군대는 계급이며 이미 에놀라 게이는 폴 티비츠 대령의 비행기가 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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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직전 에놀라 게이 조종석 창문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흔드는 폴 티비츠 대령(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27]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에놀라 게이는 3일 뒤 나가사키 원폭 투하 작전에도 참가했다. 그때는 고쿠라 시에 대한 기상정찰 임무였다.
에놀라 게이는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기체 보존이 결정되어 1946년 7월에 미국 애리조나주 데이비스몬산 기지로 이송되었고, 1946년 8월 육군항공대에서 제적되어 스미소니언 박물관 명의가 되었으며, 1953년 12월에 앤드류스 공군 기지에서 해체 보존되었다. 여기서 보존한 이유는 당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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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박물관 우드바 헤이지 센터에 전시 중인 에놀라 게이
2003년에 복원이 완전히 완료되어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 우드바 헤이지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원자폭탄을 투하한 폭격기를 전시한다고 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에놀라 게이 전시 안내문도 논란을 피하기 위하여 최대한 기술적인 사양 및 간략한 설명 위주로 되어 있다.
나가사키팻 맨을 날린 비행기의 이름은 '복스카(Bockscar)'. 해당 B-29 기체의 기장인 프레드릭 복의 이름을 따왔는데, 정작 이 사람은 원폭 투하를 담당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나가사키 작전 참고.

4.4. 경고 사격만 한다면?


그래도 원자폭탄을 실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쓰는 건 너무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래서 일본 정부에 사전 경고와 더불어 성층권 정도의 고공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려서 위력을 시연해 보이거나 인구 밀도가 희박한 마을에 투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의 "성층권에서 거대한 핵불꽃이 터지고 실제 피해는 미미하다면 과연 일본 지도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는 의견처럼 효과가 미지수여서 묻혀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고공 폭파시켜서 그 위력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것은 제정신 박힌 사람에게나 효과가 있는 것이지, 눈이 뒤집혀 반자이 돌격이나 해댈 정도로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갔던 일본에게 효과가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거기에 당시 그 동네의 사고방식으론 그 어마어마한 폭탄이 공중에서 번쩍 하는 폭죽으로 끝난다면 십중팔구는 '''천황의 은총''' 따위로 절묘하게 선동하면서 더더욱 자폭 공격에 열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곳을 미리 예고해서 민간인이 대피하게 함으로써 실제 피해는 줄이면서 심리적 효과를 더 높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혹시 원자폭탄이 불발되면 차후 미국이 하는 모든 제안이 일본 대본영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일본인들이 연합군 포로를 히로시마에 끌어다놓고 인간 방패로 삼으면 어쩔 거냐는 의견도 나와서 기각되었다. 원래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독일을 폭격하던 당시 목표가 된 도시에 아군 포로가 있음이 확인됐더라도 거리낌 없이 폭격했는데, 아군 포로 희생을 막으려고 폭격을 중단하면 앞서 말했듯이 중요 지점마다 연합국 포로를 묶어놓아서 인간 방패로 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는 일단 폭격을 당하는 연합국 포로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고, 유명한 소설가인 커트 보네거트는 악명 높은 드레스덴에서 아군의 폭격을 당한 경험으로 <제5도살장>이라는 소설을 썼다. 게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히로시마에는 미군 포로가 20여 명 정도 있었다. 전후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그 중 시체가 남아있는 사람은 단 3명. 나머지는 말 그대로 원자폭탄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여명의 눈동자 원작에서는 이런 것을 감안해 OSS에서 윤여옥을 보내 포로수용소 위치를 밝히는 작전을 수행한다.

4.5. 기민한 작전변경


원래 작전상으로 리틀 보이는 기폭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기체에 싣고 이륙하도록 되어있었다. 일단 리틀 보이는 우라늄 기반의 원자폭탄이며, 우라늄이 물에 들어가면 물의 감속재, 반사재로서의 작용으로 인해 임계질량보다 작은 질량으로도 연쇄반응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리틀보이는 포신형 폭탄이었으므로 추락 과정에서 포신 내에서 우라늄 발사체가 흘러내려 '자동 조립'될 위험성도 있었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추락하게 된다면 임계사고를 막기 위해 폭탄을 분해해 뿔뿔이 흩어놓도록 지침이 내려져 있었지만, 지시한 사람도 그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리틀 보이도 4.5톤으로 B-29의 적재 한계인 9톤의 반이나 달할 정도로 매우 무거웠으며, 일본까지의 왕복 비행을 위해 연료를 만재해야 했으므로 이륙 중량을 초과할 정도였다. 또한 주둔지의 지질 때문에 활주로 노면 상태도 엉망이었으므로 이륙이 지극히 불안정했다. 자칫 이륙하다 추락하면 끝장이었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유폭할 경우 해당 비행장과 부대원 전원, 좀 넓게 잡으면 섬 전체가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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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인해 폭탄 관리 담당장교[28] 윌리엄 파슨스(William S. "Deak" Parsons) 미합중국 해군 대령은[29]은 이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당초 작전을 변경하여 '''조립 → 탑재 → 이륙 → 투하''' 순서를 '''탑재 → 이륙 → 조립 → 투하''' 순서로 바꾸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만약 원자폭탄을 탑재한 B-29가 이륙하다 추락하더라도 최소한 원자폭탄이 유폭되는 것은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자폭탄의 조립이 평시에도 매우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이걸 쉴 새 없이 흔들리고 프로펠러의 굉음이 몰아치며 발 딛고 서있기도 어려운 B-29 폭탄창에서 해보겠다는 이야기.
참고로 파슨스 대령은 미 해군에서 손꼽히는 병기 전문가였으며, 특히 탄도학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다. 파슨스 대령은 저 유명한 VT 신관의 개발 책임자 중 한 명이며,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맨하튼 프로젝트에도 초기부터 참여했고, 맨하튼 프로젝트 총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파슨스 대령이 상부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았냐면, 그로브스 장군이 원자폭탄 투하 작전 감독을 위해 티니안 기지에 토마스 패럴(Thomas F. Farrell) 육군 준장을 파견하면서 "파슨스를 전사하게 내버려 두지 마. 우리는 그가 필요해!"(Don't let Parsons get killed. We need him!)라고 따로 신신당부를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원자폭탄 중 포신형 폭탄인 리틀 보이의 "포신"을 설계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원자폭탄 개발에서부터 실제 투하 작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주도한 맨해튼 계획의 핵심 중 핵심인 인물이다. 트리니티 핵실험 때도 직접 B-29에 타고 상공에서 폭발 현장을 관측하고 있었다.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 대령을 만나 리틀 보이에 장착될 우라늄 코어(물론 멕베이 함장은 이게 뭔지 몰랐다)를 적재하도록 하고, 이를 티니안 섬까지 수송하도록 명령을 전달한 것도 파슨스 대령이다.[30]
파슨스 대령은 독단적으로 작전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이 계획을 직속 상관인 토마스 패럴 육군 준장에게 보고하였다. 물론 에놀라 게이를 조종할 폴 티비츠 대령에게도 당연히 알렸다. 패럴 준장은 폭탄을 이런 식으로 조립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한 파슨스 대령의 대답은 이러했다.[31]

'''"없습니다. 하지만 온종일이라도 시도해 볼 참입니다"'''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그로브스 소장은 깐깐하고 비타협적인 그의 성격대로, 티니안 섬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대해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고 처리하도록 지침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슨스 대령은 현지 책임자인 패럴 준장에게는 보고했으나, 맨해튼에 있던 그로브스 소장에게는 이를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하단에도 언급되어 있는 '파슨스 대령의 명령불복종 및 무단 작전변경 설'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브스 소장은 나중에 "내가 그때 보고를 받았더라도 그러한 작전변경을 당연히 승인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파슨스 대령을 두둔했다.
어찌되었든 패럴 준장은 작전 변경을 승인했으며, 파슨스 대령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는 총 11단계나 되는 원자폭탄 조립 과정을 수십 번이나 반복 연습했다. 처음에는 원자폭탄 보관실에서 연습했고, 원자폭탄이 에놀라 게이에 탑재된 이후에는 그 찌는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B-29 폭탄창 내부에 들어앉아 원자폭탄 조립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파슨스는 오후 늦게까지 연습을 거듭하다 공구에 손을 다쳐 피를 흘렸다. 이것을 보고 놀란 패럴 장군이 돼지 가죽으로 만든 좋은 장갑이 있다면서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파슨스는 "맨손으로 감을 잡아야 합니다"며 그것을 거절하고 연습을 계속했다.
오랫동안 한국 밀리터리 계에는 파슨스 대령이 상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무단으로 원자폭탄 조립과 기폭 순서를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으나, 이는 일본 측에서 원자폭탄 작전을 비판하기 위해 나온 설이 그대로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서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여러 문헌들[32]을 통해 완벽히 부정되었다.[33] 그는 원자폭탄의 현장 책임자로서 상관에게 보고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기민하게 작전을 변경한 것이며, '''그의 책임감이 결국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를 완벽한 성공으로 이끌었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 번역된 문헌에는 종종 윌리엄 파슨스 "대위"로 적혀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번역자들이 captain 계급이 미국 육군에서는 대위이지만 미국 해군에서는 대령을 의미하는 것을 모르는데서 오는 오해이다. 다시 한번 명확히 해두지만 윌리엄 파슨스는 히로시마 작전 당시 대령이었으며 전후 준장-소장까지 승진했다.

5. 첫 번째 폭발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히로시마는 일본에서 8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인구 35만-1944년 2월 당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까지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맨발의 겐>에 표현된 것처럼 호위기들이 옆동네 폭격을 지원하러 기총소사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와 옆동네 구레도 초토화가 되는 와중에 구레 군항의 보급창이라 할 수 있는 히로시마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전쟁이 끝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은 위 문단에서 설명된 것처럼 원자폭탄 최우선 폭격 목표로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고, "다른 폭격기는 손 대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던 덕분에 통상 폭격을 안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시마 사람들은 이런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트루먼 대통령의 어머니가 히로시마에 포로로 갇혀 있으며 이 때문에 히로시마는 살려두라고 미국 대통령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34]
폴 티비츠 대령은 1945년 8월 4일 대원들을 소집하여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 전 브리핑을 하면서 원자폭탄의 위력과 작전 개요를 공개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원자폭탄 투하는 처음부터 히로시마만을 유일한 목표로 하여 출격한 것은 아니다. 당시 작전에 따르면 제 1 폭격 목표는 히로시마, 이어서 고쿠라, 나가사키 순서로 총 3개 도시가 목표였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폭격기가 1차 목표만을 받아 출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전략폭격은 목표의 기상 문제 등을 고려하여 제2, 제3의 예비 목표를 여럿 받아 출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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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폭격 작전을 브리핑하는 폴 티비츠 대령(오른쪽)과 딕 파슨스 대령(왼쪽). 1945년 8월 4일 오후 4시
작전에 투입된 제509 혼성 전대 제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의 B-29는 총 7대였다.
  • 기상관측기 3대. 타격대보다 1시간 먼저 날아가 목표 도시의 날씨를 확인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받았다. 당시에도 이미 레이더 폭격 기술이 있었지만, 폴 티비츠 대령은 "이 신형 폭탄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므로 폭격수가 무조건 육안으로 확인하고 폭격해야 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따라서 타격대에 앞서 목표 도시의 기상을 미리 관측할 필요가 있었다. Jabit III(호출부호 빅터 71)는 고쿠라, Full House(호출부호 빅터 83)는 나가사키, 그리고 Straight Flush(호출부호 빅터 85)가 히로시마를 맡았다.[35]
  • 예비기 1대. 이 기체는 티니안과 일본 본토의 중간에 있는 이오지마 섬으로 가서 대기하다, 다른 작전 투입 기체가 고장나는 등 만약의 경우 임무를 교대하는 것이 역할이었다. 여기 투입된 기체는 Top Secret.(호출부호 빅터 72)
  • 타격대 3대. 두말 할 것 없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호출부호 빅터 91은 폭격 장면을 촬영하고 관측하는 역할이었다.[36] 이 기체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에는 기체명이 없었으며, 나중에 Necessary Evil(필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찰스 "척" 스위니(Charles Sweeney) 대위가 조종하는 The Great Artiste(호출부호 빅터 89)[37]는 원자폭탄 폭발력 계측이 임무였다. 이를 위해 여러 계측 장비를 추가로 설치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이 탈 예정이었다. 몇십 년 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루이스 앨버레즈도 이날 The Great Artiste에 타고 출격했다. 여담으로 찰스 스위니 대위는 3일 뒤 나가사키 투하 작전에서 Bockscar(호출부호 빅터 77)를 조종하여 원자폭탄을 직접 투하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타격대의 주인공은 리틀 보이를 싣고 목표물에 투하하게 될 Enola Gay(호출부호 빅터 82). 에놀라 게이의 이름이 붙여진건 출격 바로 전날임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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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직전 기념 사진을 촬영한 에놀라 게이 승무원들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항법사 Theodore J. “Dutch” Van Kirk 대위, 세번째: 폭격수 Thomas W. Ferebee 소령, 네번째: 제509 혼성 전대장이자 이날 작전 기장 Paul W. Tibbets 대령, 다섯번째: (이날만) 부기장 Robert A. Lewis 대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후미 기총수 George R. "Bob" Caron 중사. 장교들 외에 밥 캐런 중사를 따로 언급하는 이유는 작전 성공 직후 전세계에 뿌려졌고, 위키러들도 어디선가 봤을 '상공에서 촬영한 히로시마 원폭 폭발 장면 사진'이 바로 이 사람이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최종 기념 사진에는 승무원 두 명이 빠져있다. 병기사 Morris R. Jeppson 중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이 작전의 실질적 지휘관인 윌리엄 파슨스 대령이다.
원래 이런 작전일수록 기밀을 유지하면서 출격해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미국 국민들의 세금이 아낌 없이 들어간 원자폭탄의 위력을 최대한 홍보하기 위해서 맨하튼 계획의 총책임자 그로브스 소장은 티니안 기지에서 에놀라 게이가 출격하는 장면을 보도진에 공개했다.[38] 덕분에 수많은 영화 촬영 기사들과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어 승무원들은 물론 에놀라 게이 기체를 열심히 찍어댔다. 이때의 촬영이 얼마나 요란했는지 어떤 부대원은 '마치 할리우드 영화 시사회 같았다'고 증언했다. 부대장 폴 티비츠 대령은 이때의 광란을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사자가 격납고 앞 광장으로 걸어 나오거나, 하늘 높이 광선이 뻗쳐오를 줄 알았다."'''[39] 위의 출격 직전 기념 사진은 바로 이때 찍힌 것이다.
이러한 광란 끝에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에놀라 게이는 리틀 보이를 싣고 마침내 역사적인 출격을 감행한다. 실제 폭탄이 너무나 무겁기도 했고 가득 채운 연료 때문에 이륙 중량 초과였다고 한다. 더 충분한 활주 속도를 얻기 위해 티비츠 대령은 활주로 거의 끝에까지 가서야 겨우 이륙을 시켰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에놀라 게이가 이륙을 안하고 계속 달려나가자 활주로 끝에서 충돌하는 것 아니냐며 숨도 못 쉬었다고. 심지어 에놀라 게이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조차도 티비츠 대령이 이륙을 안하자 자신이 조종간을 당길 뻔했다고 술회했다.
이륙 후 약 10분이 지나 타격대가 순항 고도에 올라서자,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티비츠 대령은 "판사님 일하러 가신다"는 문장을 무전으로 송신했다. 이것은 파슨스 대령이 에놀라 게이 기내에서 원자폭탄 조립을 시작하겠다는 암호문이었다. 밤새도록 원자폭탄 조립을 반복 연습한 파슨스 대령은 병기사 모리스 젭슨 중사가 손전등을 비춰주는 가운데 굉음과 진동이 몰아치는 B-29 폭탄창에서 리틀 보이의 조립과 장전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리고 티비츠 대령은 에놀라 게이 기내에서 그들이 싣고 가는 신형 폭탄은 '원자폭탄'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표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 작전에서 대원들이 원자폭탄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폭격 1시간 30분 전, 모리스 젭슨 중사는 다시 폭탄창으로 가서 리틀 보이의 마지막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리틀 보이의 안전핀 제거 방법은 폭탄 후미의 녹색 플러그 3개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붉은색 플러그 3개를 꽂는 것이었다. 모리스 중사가 나중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독실한 모르몬교 신자였던 그는 붉은색 플러그를 버려서 리틀 보이를 불발로 만들어 버릴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고 한다.[40]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제 리틀 보이는 완전히 활성화되었으며, 모리스 젭슨은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을 마지막으로 만진 사람으로 기록에 남았다.
이러는 동안, 한 시간 먼저 출발한 기상관측기 3대는 각자의 목표 도시에 도달했다. 그런데 히로시마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제2 목표 고쿠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명한 하늘은 제3 목표 나가사키뿐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히로시마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B-29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히로시마 상공을 가로지르는 동안 요격기도, 방공포화도 없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기상 상황이 좋으므로 제1 목표에 대한 우선 폭격을 제안하였다. 이 무선 보고를 수신한 에놀라 게이의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은 "폭격 목표 히로시마"를 선언하였다.
이 상황을 히로시마의 시각에서 다시 구성해보면 우선 아침 7시, B-29 한대(기상관측기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많은 히로시마 시민들이 고고도에 유유히 떠있는 이 B-29를 목격했다. 공습 경보도 울렸지만 그러나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왜냐면 그 당시 일본 시민들은 B-29의 폭격은 보통 수백 대가 들이닥치는 것이고, 한두 대 출현하는 건 정찰 임무 같은 것이라서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일본 군부와 국민들의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폴 티비츠 대령이 호위전투기도 없이 B-29 두세대만 단독으로 보내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하는 작전을 짜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약 1시간 뒤 아침 8시, 히로시마 상공에 다시 3대의 B-29(그레이트 아티스트, 빅터 91, 그리고 에놀라 게이로 구성된 본 타격대)가 나타났다. 다시 공습 경보가 울렸지만 역시 히로시마 시민들은 하늘 높이 떠 있는 B-29들을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아침밥을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나중에 히로시마 생존자들의 증언 기록을 보면 "B-29 두 대는 바짝 붙어서 앞서고 있었고(에놀라 게이와 그레이트 아티스트) 그 뒤에 또 한 대가 좀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빅터 91)"고 하여 본 타격대의 포메이션까지도 정확히 기억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에놀라 게이는 최종투하 직전 목표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티비츠 대령, 파슨스 대령, 항법사 밴커크 대위가 눈 아래 펼쳐진 도시가 최종 목표 히로시마임을 차례로 확인 복창하였다. 임무에 참여했던 모든 대원들은 여름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아침 풍경이었다고 증언했다. 에놀라 게이는 고도 9,300m에서 폭격항정(Bomb Run)에 돌입했다.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은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폭격수 토머스 페러비 소령에게 조종권한을 넘겼다. 노든 폭격조준기 항목에도 있지만, 이 폭격조준기는 비행기의 자동조종장치와 연동되어 있어 폭격 항정 동안에는 폭격수가 기체 조종을 하게 된다.[41]
페러비 소령은 히로시마 중심부 아이오이 다리를 조준하여 리틀 보이 투하 스위치를 눌렀다. 항법사 밴커크 대위가 비행일지에 기록한 정확한 투하 시각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15초. 바로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위대한 예술가는 동시에 계측 장치를 투하했으며, 빅터 91은 히로시마 외곽 상공에서 촬영 준비를 마치고 선회하고 있었다. 투하 직후 에놀라 게이는 우로,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좌로 급선회,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42]
8시 15분에서 막 16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원자폭탄은 측풍으로 인해 원래 조준점이었던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m 정도 빗나가 시마 외과병원 상공에서 폭발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꽤 많이 빗나간것 같지만, 9,000미터가 넘는 성층권에서 투하한 폭탄임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정밀도[43]였으며, 만약 단 한발의 통상폭탄이었다면 작전 실패였을 것이나 '''리틀 보이는 일반적인 폭탄이 아니었다.'''
우라늄 235 기반 포신형 원자폭탄 리틀 보이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 방출 에너지량도 당초 예측대로였다. 다만 구조의 한계로 인해 비효율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중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핵물질의 단지 1.7%만이 핵분열에 관여하였다.[44] 측정된 폭발력은 TNT 환산 16kt ± 2kt.[45] 바로 위의 영상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15kt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이 빛이 얼마나 강한지 생존자들은 '순수한 흰색'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손으로 눈을 가리니 '자신의 뼈'가 보였다고 한다. 인간의 살은 어느 정도 빛을 투과시키는데, 가시광선만 해도 자기 뼈가 보일 정도로 강력했다는 얘기. 직접 쳐다본 사람들은 눈이 멀어버리거나 심지어 안구가 융해되었다. 수억 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뜨거운 화구가 공중에 생기고,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열복사로 약 3,000~4,000도가 넘었다. 참고로 태양의 표면 온도가 약 6,000도이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계단에 앉아있던 사람이 증발하기 직전에 열선으로 인해 계단에 찍힌 '''검은 흔적(원폭 그림자)'''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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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그림자
한편 폭탄이 터진 직후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은 방사선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납 맛이었다고. 체르노빌 사고 당시 주위를 시찰하던 조종사들과 방사성 폐기물을 치우던 인부들도 이러한 금속 맛을 경험했다.
엄청난 빛에 이어진 것은 천지를 울리는 어마어마한 폭발음이었다. 통상적인 폭탄의 폭발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굉음. 종말의 포효였다. 이 때문에 히로시마의 생존자들은 원자폭탄을 '피카 돈'(ピカ ドン)이라고 불렀다. 뜻을 번역하자면 "번쩍 쾅"이다. 많은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큰 인상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 천지를 울린 폭발음이었다.
뒤이어 잇따라 충격파로 인하여 최대 340m/s = 1,224km/h = 음속에 달하는 엄청난 폭풍이 주변 1.6km 내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인류가 기록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역사상 최악의 토네이도의 중심풍속은 불과 134.4m/s였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대도시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이 거대한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이것은 토네이도의 경우이며 핵폭발의 경우 토네이도보다 에너지가 훨씬 빠르게 소멸되기 때문에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다. 이 범위 안에 있던 건물들은 매우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 전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 1발의 폭탄이 도시를 완벽에 가깝게 파괴하였다. 그 때가 하필 출근 시간이었기에 피해는 더 컸다. 일례로 폭심지에서 불과 몇 백m 떨어진 은행에서는 일찍 출근해 두꺼운 석조건물의 가장 안쪽에 들어가 있었던 말단 여직원 2명만 살아남았고, 출근 중이던 다른 직원들은 모두 몰살당했다.[46]
폭심지에 있었던 생존자 중에 '''노무라 에이조(野村英三)'''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는 당시 47세로 연료배급통제조합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는데, 그가 일하던 조합 건물은 폭심지에서 서남쪽으로 불과 170m 떨어져 있었다. 8월 6일은 월요일이었기에 아침 8시에 전 직원 조례가 있었고, 그 후 노무라는 직장 상사가 깜박 잊어버린 서류를 가지러 건물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리틀 보이가 폭발한 것은 노무라가 지하 창고로 들어간 직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조합 건물에는 직원 37명이 있었으나, 노무라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즉사했거나 병사 혹은 행방불명. 노무라는 원폭 생존자 중에서 폭심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폭발 직후 폭심지 근처의 상황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많은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당연히 많은 양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기에 고열, 설사, 잇몸 출혈 등 피폭 후유증으로 생사를 넘나들었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이후 뜻밖에도 84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노무라가 생존한 연료배급통제조합 건물은 현재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레스트 하우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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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후의 모습.[47]
충격파에 이어 화재가 들이닥쳤다. 바로 ''''폭격 후폭풍''''의 영향이었다. 도시에 대규모 폭격으로 불길이 일어나면 뜨거워진 대기가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이 때문에 아래 쪽에는 부분적인 진공이 형성된다(음압 형성). 이렇게 되면 그 진공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외각에서 뚫고 들어오는 찬 공기가 도시 곳곳을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관통하게 되며, 이러한 폭풍은 곳곳의 불씨를 합쳐 대규모 화재로 만들어버린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고 한다.[48]
화재는 히로시마 시내 중심부 11평방킬로미터를 모두 삼켰다. 히로시마 시 전체는 열로 가득 찼고, 잿빛 대기가 태양마저 가려 사방이 밤처럼 어두운 가운데 사방팔방이 불지옥으로 변한 상태였다. 불교지옥도단테의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의 생지옥이었다.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히로시마의 대기는 지극히 건조해져,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가 되었고, 사방에 널린 죽지 않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으며 방황하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며 다리 밑으로 떨어져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나는 사람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을 전하는 목격담은 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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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서 원폭이 터진 후에 살아남은 여학생들의 모습.
이 때의 참상을 찍은 몇 안 되는 사진들이 존재한다. 바로 '주고쿠 신문'의 사진기자였던 '마츠시게 요시토(松重美人, 1913년~2005년)'가 폭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유키 다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그것이다. 사진을 볼 수 있는 곳, 당시 촬영 사진들. 폭탄이 터진 후 약 3시간 뒤에 찍은 사진들이며, 원폭 폭발 직후를 담은 유일한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면 화상에 의해 부상을 입은 히로시마 여자 상업 학교, 히로시마 제1 중학교 학생들이 미유키 다리에 앉거나 서서 경찰에게 식용유로 치료를 받고 있다. 물론 화상에 식용유로 치료가 될 리는 없었고, 통증을 달래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사진을 찍은 요시토에 의하면 이 학생들은 온 몸에 화상 물집이 잡혀 있었고, 물집이 터지자 피부가 양탄자 조각처럼 늘어졌다고 한다.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열기와 열풍으로 인하여 산발이 되어 있고, 옷이 찢어져 있으며, 화상을 입은 팔을 치켜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피폭되었던 부상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49] "피부가 양탄자 조각처럼 흘러내렸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 및 좁은 범위 내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유기 생물체가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 희생자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이 폭격으로 인해 의사와 간호사들도 무려 90%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은 고군분투했으나 피해 상황은 초월적이었다. 끝없이 넘쳐나는 중환자들로 트리아지 같은 분류는 무의미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환자의 화상 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방사선 화상은 DNA 파괴를 일으켜 조직 재생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은 다른 조직도 파괴하여 신체 내외에서 출혈을 일으키고(혈관세포 파괴) 구토, 설사(위장관세포 파괴)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영양 흡수가 안 되어 아무리 먹어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된다.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만에 죽어갔다. 방사선 피폭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뼈 저린 무력감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부 의사들은 비타민 A을 주사하기도 하였는데 결과는 끔찍했다. 주삿바늘이 꽂힌 곳부터 살이 썩어 나가더니 그런 다음에는 예외 없이 죽는 것이었다.[50]
14만명의 희생자 중 군인이 2만 명이었다. 2총군 대부분이 죽었다. 이 중 상당수가 원폭에서 8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 성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으로선 이 총군 병력의 피해도 심각한 일이었다. 미군의 본토 공격을 앞두고 일본군은 결호작전을 계획하였고, 2개의 총군이 각각 서일본과 동일본 지역을 맡았다. 히로시마의 2총군 사령부 및 병력은 바로 이 서일본 방위 임무를 맡은 부대인데, 이 부대가 통째로 소멸한 것. 10명 이상의 미군 포로들도 대부분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몇몇 포로는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일본인 생존자들에 의해서 맞아죽었다는 증언도 있고, 일본인 의사로부터 치료를 거부받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폭발 직후, 에놀라 게이는 사력을 다해 도주하고 있었다. 폭발의 반대 방향으로 비행하고 있었기에 최초의 폭발 장면과 버섯구름을 제대로 목격한 이는 B-29 꼬리 맨 뒤쪽에 있던 후미 기총수(Tail Gunner) 밥 캐런 중사 뿐이었다. 그가 찍은 7장의 사진이 히로시마 폭발을 상공에서 촬영한 최초의 것이다. 정작 폭발을 계측하라고 보내놨던 그레이트 아티스트에서 찍은 사진은 제대로 나온 게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안전거리에 들어서자 폴 티비츠 대령은 다른 대원들도 폭발 현장을 볼 수 있도록 에놀라 게이의 비행 방향을 조금 틀었다. 거대한 버섯구름과 그 밑에 통째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도시를 목격한 대원들은 "이제 전쟁은 끝난 거나 다름 없다"(항법사 밴커크 대위)거나 "우리가 티니안에 귀환하기도 전에 일본은 백기를 들 것"(부기장 루이스 대위)이라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너무나 엄청난 위력과 그것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투하했다는 사실 때문에 굳어버린 대원들도 꽤 있었다. 놀랍게도 윌리엄 파슨스 대령도 그 중 하나였다. 에놀라 게이는 방사능을 띈 버섯구름이 점점 확산되자 관측을 멈추고 다시 전속력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후미 기총수 밥 캐런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후 1시간 반이 경과하여 히로시마에서 무려 667km[51]나 떨어진 지점에서도 버섯구름은 그때까지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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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게이는 총 14시간의 작전 비행을 마치고 오후 3시경 티니안 기지에 착륙하였다. 그레이트 아티스트와 빅터 91은 환영 행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중간에 일부러 속도를 늦추어 에놀라 게이가 티니안에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태평양 전략공군 사령관 칼 스파츠(Carl A. "Tooey" Spaatz) 대장은 수훈 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미리 준비해놓고 활주로에서 기다리다가 티비츠 대령이 에놀라 게이에서 내리자마자 훈장을 수여했다. 티비츠는 훈장 수여를 전혀 예상 못했기 때문에 위의 사진에 보이듯이 왼손에 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윌리엄 파슨스 대령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의 마지막 업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는 몇 주 전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s-2를 통해 전달받은 리틀 보이 우라늄 발사체 인수증 원본에 사용 기록을 추가로 기재하고 서명했다.[52]

1945년 8월 6일 09시 15분 정각. 상기 자재가 일본국 히로시마시 상공에서 사용되었음을 정히 확인하는 바임. 윌리엄 S. 파슨스 (서명).


5.1. 일본의 반응


이 전례없는 참혹한 공격이 가해진 이후 일본 군부가 보인 반응은 '''현실부정'''이었다. 일본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박사[53]가 원폭 투하 다음날인 8월 7일에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현장을 조사하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원자폭탄임을 확인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히로시마가 괴멸하면서 히로시마 안의 보고체계는 아예 증발해버렸고, 피해 보고는 외곽 주변의 관찰부터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피해 보고는 원거리에서의 열풍·열복사 등에 관한 것으로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는 막을 수 있었다" 라든가 하는, 아직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혹독했던 미군의 대공습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모아도 해당 폭탄이 평범한 재래식 폭탄은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맛이 간 일본군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장 위의 니시나 박사의 히로시마 방문조사에는 정보부서를 담당하는 참모본부 제2부장이던 아리스에 세이조(有末精三) 중장이 동행하고 있었고 그는 니시나 박사로부터 이것이 원자폭탄임이 분명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대본영은 여전히 그럴 리가 없다고 일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상층부가 현실도피&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도부는 항복과 관련된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게 항복 의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소련을 통한 대미 강화협상은 진행 중이었고, 국체의 온존 및 약간은 온건한 방식으로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대일 참전을 생각하던 소련으로서는 그걸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원폭 투하 이후 군부와 정부가 모두 항복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싹싹 빌어보자는 화평파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최소한도로 단기간에 끝마쳐야 하며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어이 없는 조건을 내거는 강경파가 서로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되었고, 미국은 일정에 따라 한 발을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화평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화평파가 입장을 확고히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는데,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항복을 결정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하고 8월 9일, 즉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에서야 열렸다. 즉 이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건 일본은 히로시마에 대한 대응은 너무 늦었던 것이다. 더구나 8월 9일 회의 중에 두 번째 핵이 떨어질 때까지도 일본 지도부는 미국에게 더 이상 핵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하층부에서는 이미 소문이 다 퍼진 뒤여서 다음 공격 타겟이 어디냐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물론 보도통제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히로시마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들 선명한 버섯구름을 목격했고, 히로시마의 피난민들을 보았다. 그리고 민간 보도는 통제되었을지언정, 군 통신망은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 전역의 군 부대 장교들 사이에선 하루만에 히로시마에 무언가 강력한 폭탄이 터졌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알려졌고 그 폭탄의 종류가 원자탄이라는 것도 금새 전파되었다. 이는 군부에도 대패닉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8월 7일 밤에 오사카에서 격추되어 포로가 된 전투기 파일럿 마커스 맥딜다의 사례가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측에서는 장군이 직접 포로심문을 진두지휘했고,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일본도로 목을 치겠다며 칼끝을 목과 입으로 겨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구한 대답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의 정체, 그리고 그 폭탄의 다음 타겟이었다. 일개 전투기 파일럿인 맥딜다에게는 그런 고급정보따위 없었고, 그는 대충 자신이 알고있는 범주 내에서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설명한 다음 (대답을 안했다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으로 다음 타겟이 도쿄나 교토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와 별개로 히로시마의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도쿄가 다음 타겟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아래에 있는 것은 이 시기에 일본 관동지방에 뿌려졌던 미군 삐라다. 정황상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이후-나가사키 원폭 투하 전인 8월 8일 오후에서 9일 오전 정도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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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에게 고함!!'''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시오"'''

이 삐라에 쓰인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주의하여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

일본국민들은 지금 중대한 시기에 직면해있다. 연합군 수뇌부는 삼국공동선언에 의거한 13개조로 이루어진 관대한 조항을 제시하여 무익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일본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미국은 현재 몇 명을 희생시킬지 모르는 무서운 원자폭탄을 발명하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원자폭탄은 단 한 개만으로도 그 거대한 B-29 폭격기 2천대가 한 번에 투하할 수 있는 수준의 폭탄의 위력에 필적한다. 이 무서운 사실은 여러분은 히로시마에 폭탄 한 개가 떨어졌을 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익한 전쟁을 지속하려는 군사상의 모든 것들은 무서운 원자폭탄에 의해 파괴된다. 미국은 이 원자폭탄을 여러 개라도 쓸 준비가 되었으며 여러분들이 이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천황 폐하께 청원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미국 대통령은 여러분들에게 요구한 13개조로 이루어진 관대한 조항을 신속히 받아들여, 평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일본의 건설을 종용하는 바이다. 따라서 일본 국민 여러분은 즉시 무력저항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은 단호히 원자폭탄을 비롯한 우수한 무기들을 사용하여 이 전쟁을 신속하고 강제적으로 종결시킬 것이다.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시오"'''

한편 일본 군부는 미국이 7월에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뒤 v600번대 콜 사인을 가진 소규모의 B-29 부대가 티니안 섬에 배속되었다는 정보를 감청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콜 사인만을 알 수 있었고, 그 부대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띠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폭 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 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대피 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원자폭탄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 트리니티(서해문집 출판)에서는 일본의 대공 부대는 대규모 폭격에 너무 익숙해져서 비행기 몇 대에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6. 두 번째 폭발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칼 스파츠 태평양 전략공군 사령관과 커티스 르메이 제21 폭격사령관, 폴 티비츠 제509 혼성전대장, 파슨스 대령 등 원폭 투하 작전의 핵심 인물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을 성공시킨 후 괌에 모여 다음 작전을 논의했다. 윗 단락에 설명된 바와 같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대외적으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바로 다음 원폭 투하 작전을 속행하기로 결정하고 워싱턴 D.C.에도 보고하였다. 당초 계획은 8월 11일 투하를 목표로 했고 앨버타 프로젝트의 과학자들도 이 일정에 맞추어 팻 맨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부터 일본 기상 상황이 안 좋다는 일기예보가 들어오자 티비츠 대령을 위시한 지휘부는 8월 9일까지 일정을 당기라고 명령했다. 앨버타 프로젝트 소속 과학자들도 어디까지나 현역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까라면 까야 했다(...)
2번째 원폭 투하 작전의 제 1 폭격 목표는 고쿠라, 제 2 목표가 나가사키였다. 목표가 2개로 줄어든 것은 사흘 전에 히로시마가 지도에서 지워졌기 때문. 따라서 작전에 투입된 B-29는 총 6대로 줄어들었다. 기본적인 작전의 얼개는 히로시마와 거의 동일했다.
  • 기상관측기 2대. 앞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에놀라 게이는 나가사키 작전에도 출격했다. 제1 목표 고쿠라에 대한 기상관측이 임무였다. 제2 목표 나가사키 기상관측은 Laggin' Dragon(호출부호 빅터 95).
  • 예비기 1대. 이오지마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역할은 Full House가 맡았다.
  • 타격대 3대. 원자폭탄 투하는 복스카(Bockscar, 기체번호 44-27297, 호출부호 빅터 77)가 담당했다. 원래 The Great Artiste 기장이자 뛰어난 비행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찰스 "척" 스위니 소령이 임시로 복스카의 조종을 맡았다. 제393 폭격비행대대에서 토머스 패러비 소령과 폭격 솜씨 제일을 놓고 겨루던[54] 폭격수 "예술가" 커미트 비헌 대위도 복스카로 옮겨왔다. 원래 당초 계획에서 첫번째 작전 투하는 에놀라 게이, 두번째 투하는 그레이트 아티스트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첫번째 작전에서 그레이트 아티스트에 폭발 관측을 위한 과학 장비들을 잔뜩 설치해놓다 보니, 두번째 작전에서 이 장비들을 해체하고 다른데 옮기기가 너무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와 승무원 팀만 바꾼 것이다. 따라서 폭발 계측 임무는 당연히 The Great Artiste가 계속 담당했다. 사진 촬영과 관측은 Big Stink(호출부호 빅터 90)이 맡았다. 두 번째 작전에서는 윌리엄 파슨스 대령을 대신하여 프레드릭 애시워스(Frederick Ashworth)가 폭탄 관리 담당으로 복스카에 탑승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뉴욕타임스 윌리엄 로렌스 기자가 취재를 위해 복스카에 동승하였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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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 "Bockscar" 일련번호 44-27297, 티니안 North Field 주둔, 1945년
팻 맨은 폭축형, 내파형 원자폭탄이었으므로 리틀 보이와 달리 B-29가 이륙 중 추락하더라도 유폭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팻 맨은 조립 및 장전을 마친 상태로 복스카에 적재되었다. 다만 앞 단락에서 서술된 안전장치(초록색/붉은색 플러그)는 리틀 보이와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있었으며, 폭격 직전에 수동으로 해제해야 했다.
급하게 준비를 한 탓이었는지, 두번째 원자폭탄 투하 작전은 시작부터 문제를 드러내었다. 작전 시작 직전의 최종 검사에서 복스카의 예비 연료 펌프가 고장났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고장으로 약 640갤런(약 2,400리터)의 연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작전 계획대로 일본까지 왕복 비행할 수는 있었지만 매우 빠듯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펌프를 교체하려면 또 몇 시간이 소요되고, 이미 팻 맨을 탑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티비츠 대령은 그냥 작전 속행을 명령했다.
문제는 계속 이어졌다. 타격대를 구성하는 3대는 심야에 티니안 기지를 이륙한 다음 각자 날아가다가 일본 가고시마현 남쪽의 야쿠시마에서 규합을 하기로 했다. 사흘 전 히로시마 작전에서도 에놀라 게이, 위대한 예술가, 빅터 91은 일출과 동시에 규합점이었던 이오지마 상공에서 정확히 만나 타격대를 구성하여 히로시마로 향했다. 그런데 8월 9일 작전에서는 사진 촬영을 담당했던 Big Stink가 항로와 고도를 잘못 선택하여 규합에 실패하였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Big Stink는 당초 계획 고도보다 9,000피트(2,700m) 가량 더 높은 곳에 있었고, 규합 항로도 야쿠시마 상공에서 당초 계획했던 패턴 비행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56]
더 큰 문제는 전대장인 폴 티비츠 대령은 타격대 규합에 15분 이상을 소요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복스카를 조종하는 척 스위니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무려 40분을 야쿠시마 상공에서 소비하고 말았고, 연료도 그만큼 더 줄어들었다. 그동안 목표 기상보고가 들어왔는데 고쿠라는 아침 안개가 끼어있지만 곧 쾌청해질 것으로 기대, 나가사키 역시 아침 안개가 걸려있고 구름 2/10으로 비교적 쾌청이라는 내용이었다. 복스카 기장 척 스위니는 제1 목표 고쿠라를 폭격하기로 하고, 위대한 예술가만을 대동하여 고쿠라로 향했다.
그런데 복스카가 고쿠라 상공에 도착해보니, 기상보고와 달리 안개가 계속 끼어있고, 더군다나 전날에 제21 폭격사령부의 B-29 폭격대가 인근 야하타 제철소를 폭격한 여파로 짙은 연기가 끼어있어 목표를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57]
복스카는 고쿠라 상공을 3번이나 폭격 항정(bomb run)[58]으로 비행하였으나, 안개와 연기로 결국 육안 목표 확인에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서 무려 50분 이상이 소요되었고 이 와중에 통신 담당 제이콥 비저 중위(히로시마 폭격 때는 에놀라 게이에 탑승)는 인근에서 일본군 요격기의 활동을 통신 감청하고 경고를 발령했다. 더 이상 고쿠라 상공에 머무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척 스위니 소령은 제2 목표인 나가사키를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위대한 예술가와 함께 기수를 돌렸다. 이로써 고쿠라는 2번이나 원자폭탄 폭격 대상지에 올랐음에도 이를 모두 피하는 행운의 도시가 되었다.
약 20분의 비행 후에 복스카는 나가사키 상공에 도달했다. 문제는 여기에도 기상 보고와 달리 구름이 많이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연료는 부족해지고 있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척 스위니 소령은 폭탄 담당 애시워스와 상의한 뒤 티비츠 대령의 엄명을 어기고 레이더 조준 폭격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결정을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만약 폭탄 투하에 실패하면 기체의 안전과 착륙 중량을 위해서 그 귀중한 원자폭탄을 바다에 버리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가사키는 고쿠라와 달리 운이 없었다. 순간 구름이 열리면서 나가사키를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맑은 개구부 구역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일본 제국 군부는 원자폭탄을 탑재한 복스카가 규슈를 향해 접근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같은 V600번대 콜 사인을 사용하는 B-29가 출격했으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 판단하여 보고했지만, 당시 상층부가 소련 참전으로 인한 긴급회의 중이어서 무시되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서 핵무기가 폭발하였다.''' 4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그날 사망했다.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16kt짜리 리틀 보이보다도 컸는데, 피해는 히로시마에 비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이름부터 넓은 섬(広島)일 정도로 완전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산지 지형이라,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열선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막혀 인명 피해가 히로시마의 1/4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조준이 어려웠기에 원래 노렸던 투하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3km 이상 빗나간 것도 겹쳐서 위력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59] 그러나 그것은 히로시마에 비해 위력이 줄었다는 것이고, 원자폭탄으로 인한 참상은 나가사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어간 것은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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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이전, 이후의 모습
한편 타격대의 혼란은 원폭 투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규합에 실패해 가고시마 남쪽에서 해메고 있던 Big Stink는 나가사키 시에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멀리서 관측하고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와서 관측과 촬영을 시작하였다. 한편 복스카는 연료가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원래 작전 계획은 비상 상황이 생기면 항로 중간에 위치한 이오지마에 착륙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거기까지도 갈 연료조차 없었다는 것.
복스카 기장 척 스위니는 이에 거리상으로 훨씬 가까왔던 오키나와로 가서 비상착륙을 하기로 한다. 복스카가 오키나와 욘탄 비행장 상공에 도착했을 때는 단 한 번의 착륙 시도만 가능할 정도의 연료가 남아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오키나와 관제소에서는 복스카의 착륙 요청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복스카는 플레어를 있는 대로 쏘아올리고 그냥 욘탄 비행장에 강행 착륙을 감행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활주로에 접근하다가 엔진 하나가 연료 부족으로 꺼졌고, 착륙 활주하다가 엔진 하나가 더 꺼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추락 안하거나 아니면 착륙하다 다른 비행기와 충돌 안하고 무사히 착륙한 게 기적이었다.
복스카는 오키나와에서 연료를 다시 보급받고 겨우겨우 티니안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혼란"은 끝까지 계속되었는데, 윌리엄 로렌스 기자가 최초 보도에서 자기가 탑승했던 폭탄 투하한 기체를 그레이트 아티스트로 보도해버린 것이다. 작전 직전에 비행팀이 서로 교체된 것을 기자가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사실 제일 불쌍한 건 자기 이름 붙은 기체 빼앗기고 관측 비행이나 해야했던 복스카 원래 기장 프레드릭 복스 대위였지만...
이 폭격 이후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인한 성과 파악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한 포츠담 선언 이행을 다시 한 번 촉구하기 위해서 당분간 원폭 투하를 중지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폭격하고 싶어도 폭탄이 없었다. 당시 플루토늄 폭탄용 폭축렌즈는 폭약 설계 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새 폭탄을 위한 플루토늄 추출은 진행 중이었으며, 플루토늄 폭탄의 필수품인 핵기폭기(베릴륨폴로늄)도 예비가 없었다. 우라늄 폭탄은 아예 3~4개월 이상 추가 농축 작업을 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는데 생산시설에 기계적 문제가 생겨 생산중지 상태였다. 이 때문에 3번째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그나마도 빨라야 8월 20일에야 준비가 가능했다. 첫 핵폭격 후 10개월 뒤까지도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은 7발에 머물렀으며, 플루토늄은 9발분 있었다. 22개월 뒤 시점에도 가용 폭탄은 13발에 불과했다.

6.1. 일본의 두 번째 반응


이 시점부터 일본 제국의 모든 군부는 더 이상 연합군을 상대로 어떠한 형태의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걸 확실히 인지했다. 3일 간격으로 떨어진 핵탄두의 다음 목적지는 교토가 될 게 굉장히 유력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으며[60], 교토에 버섯구름이라도 피어오르는 그 순간 일본 제국군은 모든 형태의 명분까지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한다면 일본 수뇌부에겐 굉장히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자살밖에 없다는 인식이 지휘부 대부분의 머리에 박히고 말았다.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쇼와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다. 일본 국민들은 천황을 신적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옥음방송은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그닥 깔끔하지 않았다.[61] 또 그 내용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매우 힘든 일본어 고문어체로 작성되어있었다. 옥음방송 문서를 참조. 때문에 이게 처음 방송될 때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그 후 방송요원이 일상언어(일본어 구어체)로 해석해 재차 방송하여, 마침내 항복 사실이 대중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나마 결정된 항복에 대해 청년 장교들이 반발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단장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며 천황이 거주하는 궁성이 반란군에 의해 점령, 쑥대밭이 되는 등, 히로히토고 나발이고 화평파를 싸그리 잡아 죽이려고 시도한 궁성사건이 발생했다.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자결하거나 카미카제 공격에 참가하는 식으로 반항했고, 그 와중에서 항복 선언이 발표되게 된다. 때문에 항복을 결정한 날이 '''일본의 가장 길었던 날'''로도 불린다.
당시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 생활을 하던 작가 오오카 쇼헤이는 소련의 관동군 공격과 스웨덴을 통한 일본의 항복 요구 타전을 발표한 8월 10일을 '포로들에게 사실상의 전쟁이 끝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에 항복이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즉 10일부터 15일까지 죽은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죽은 것이고, 왜 항복 요구 타전 후 대국민 발표를 늦게 했는지 한탄하고 있다.[62] 이미 1945년초부터 항복 논의가 오갔음을 상기한다면, 두 원자폭탄은 그러한 결정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소식을 접한 소련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잽싸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소련의 일본 공격 준비가 양과 질에서 대단히 우수했고 그 준비 기간이 결코 하루 이틀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미국이 소련에게 일본으로의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었고, 참전 시점까지 못을 박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약속에 따라 유럽전선에서 수십만의 병력과 수만대의 장비를 지구 반대편의 동아시아 전선까지 가져왔고, 참전 약속일의 마지막 날에 전격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련군이 준비한 노력만큼 이미 잡병이 된 수십만 일본 관동군은 대부분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무장해제했다.[63]
일단 학자들에 따라서 원폭과 소련 참전 중 과연 어느 것이 항복에 더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일단 다이쇼 이래로 제국의 절대 방위선인 북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상황에 내지에서도 그러한 공격을 당하면 일단 국체보전'''만'''이라도 한 상태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64] 그러나 당시 일본의 전선은 이미 10개에 육박했고, 관동군은 더 이상 예전의 관동군이 아니었다. 모든 정예관동군 사단들은 본토 방위와 남방 작전으로 빠진 상태였다.
반면에 소련은 오직 일본을 겨냥해서 내려왔고, 사실상 1주일 남기고 다급하게 내려왔다. 거기다가 일본 측도 이미 관동군이 일본군 내에서 최약체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945년 6월달 자체 사찰에서 대본영은 이미 전체 관동군과 지나 파견군 180만명이 미군 7개사단보다도 약하다고 평가했다. 관동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일본이 관동군이 무너졌다고 항복할 리가 없다. 이미 관동군 최정예가 갈려버린 사이판 전투나 오키나와에서 졌다고 항복하지 않았듯이.

7. 일본 외의 반응



7.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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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가 촬영한 '''V-J Day in Time Square'''.
조각상 Unconditional Surrender(무조건 항복)의 바탕으로도 알려져 있다.

"핵폭탄은 위대한 결정이 아닙니다. 그저 정의의 무기고에 있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해리 S. 트루먼 전미국 대통령

일본에서 나온 작품에는 핵폭탄 투하 소식에 미군 장병들이 죄책감을 갖고 숙연해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그러나 정작 당시의 미군 장병들은 핵폭탄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전쟁을 끝내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각하께 '너무 감사해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려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반자이 어택이나 카미카제 등 일본군의 미친 짓들을 보며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미군 장병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준 걸 반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핵무기의 정확한 위력과 후폭풍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원폭 피해자 등을 담은 끔찍한 사진들은 검열되었다. 그래서 미국 본토에서도 딱히 동정심이나 죄책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다. 그럴 거면 애초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프로파간다와 국민적 인식 역시 한 몫 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그래도 동양의 선진국이라는 인식이었지만 일단 진주만 공습으로 본토가 사전 통보 없이 공격당한 분노가 큰 데다가 학살, 포로 학대, 반자이 어택, 카미카제처럼 인명 따윈 장식으로 여기는 일본군의 미친 짓거리 등등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역시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승리의 영광으로 우쭐거리던 유럽 전선 폭격과는 다른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폴 티비츠 본인은 죄책감에 전혀 시달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2005년 원폭 60주년을 맞아 '원폭은 필요했고 우리는 죄책감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다음 해 티비츠 자신은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방어기제로 그런 생각을 가진 것 아닐까 싶을 수 있지만, 티비츠는 전역 후에 원폭 투하를 흉내내 버섯구름을 재현하는 에어쇼를 벌인 적도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정부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과까지 했다. 티비츠는 2007년 심부전증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거나 묘의 비석을 만들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는 시위나 묘소 테러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뜻대로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재가 영국 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티비츠를 포함해 조종사 상당수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선택한 정당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50주기를 맞이하여 당시 MBC에서 에놀라 게이를 몰던 조종사(티비츠는 아니었다) 중 하나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나는 전쟁에서 일본에 의해서 죽을 뻔한 수백 만의 연합국 국민들을 구했습니다. 조금도 원폭 투하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원폭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더했을 겁니다."라 언급했다.
  • 기장 폴 티비츠: 1975년 인터뷰에서 "나는 맡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습니다. 매일 밤마다 잠을 잘 잡니다."라고 했으며 2005년에는 "만약 같은 상황이 또 다시 내게 주어진다면 똑같이 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 또 2005년 BBC 다큐멘터리에서는 "나는 맡은 바 임무를 다했으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나 다행스럽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2007년 사망하기 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라고 말했다. #
  • 폭격수 토머스 W. 페러비: 폴 티비츠처럼 폭탄을 투하한 일에 대해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
  • 레이더 담당 장교 제이콥 베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진주만일본이 한 잔학 행위들을 기억합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
  •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똑같은 상황이 다시 주어질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네, 저는 다시 할 겁니다. 우리는 5년간 전쟁했고 항복하지도 패배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적과 싸웠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비키니섬 핵실험에도 참가한 바 있다. #
  • 부조종사 로버트 A. 루이스: 폭탄 투하시 "맙소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라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도 죽을 때까지 그의 임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저 발언은 '우와, 우리가 방금 떨군 게 저렇게 센 거였어?' 같은 뉘앙스로 폭탄의 엄청난 위력에 놀란 것으로는 볼 수 있을지라도 후회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부 항공 기관사 로버트 슈머드: "어느 사람의 다리에 괴저가 생겨, 반드시 절단해야만 한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 괴저(일본)는 세계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암 덩어리였습니다."라고 1960년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 유일하게 죄책감을 보였다고 알려진 것은, 기상정찰 임무를 맡고 에놀라 게이보다 1시간 먼저 비행에 나섰던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다. 그는 한두 번 자살 시도한 적도 있었고, 직접 히로시마에 사과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의 사과 편지를 읽자마자 불쾌한 내색을 보이며 가짜라고 여겨 무시하고 사과 편지를 불태워버렸고, 나중에는 위조죄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 겸 작가 William Bradford Huie는 그의 사죄의 진위성이 의심스럽다고 밝혔는데, 이유로 전후 이덜리 소령이 몇 년간 핵폭탄 투하 훈련을 계속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반핵주의자들이 날조하고, 이덜리 소령 자신은 명성을 얻거나 주의를 끌고 싶어서 그랬다고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기장인 폴 티비츠는 그에 대해 "폭탄이 떨어질 때는 거기 있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

7.2. 한국


당시의 1차 사료나 해방 직후의 반응을 보면, 전시에 해외의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뭔가 엄청 센 폭탄이 일본 본토에 떨어졌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듣고 조선인들이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는 인식이 상당수 많이 퍼져있지만,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땅에서 태어나 사실상 일본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인데 그러한 반응을 보였을것이라는건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일단 일본 현지에서조차 정보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식민지 조선에 상세한 정보가 전달되었을리가 만무하거니와, 현대의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당시 식민지 조선의 대다수 사람들은 일본에 극히 적대적이라거나 미국 등 연합국에 우호적이라거나 하는 감정은 별로 없었다. 그냥 일본의 식민지, 2등 국민 정도의 지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가 뭔지 모르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8.15 광복 문서에 상세한 있지만, 당시 조선인들의 상당수는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김구백범일지에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감상이 드러나 있다. 광복 이후 한국의 지식인들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부국강병뿐만 아니라 국가의 독립에 있어서도 과학 기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 과학 기술에 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김구의 후손들이 공군 장교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전통이 생기는 것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병옥의 경우는 일제의 탄압으로 시골에 요양을 살았던 1942년에, 이미 미국에서 원폭을 개발해서 떨어뜨릴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몰래 알려주었다고 회고록에 적을 정도였으나, 회고록에서 자주 나오는 거짓말이다. 원폭 개발은 당시 미국에서도 초극비 프로젝트였다. 에놀라게이 탑승원들조차 히로시마로 출격하는 B-29 기내에서 '원자폭탄'이라는 명칭을 처음 들었을 정도의 극비작전인데 조선의 시골마을에 살던 조병옥이 원자폭탄 계획을 알았겠는가. 해리 S. 트루먼은 '''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부랴부랴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도 원폭 개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7.3. 소련


스탈린은 이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소련 간첩 클라우스 푹스를 통해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안 상태였다[65].그러나 그런 소련도 핵무기의 완성시기와 실전 사용 여부는 모르고 있었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나 이 사실을 알게된 스탈린은 그야말로 '''격노했다.''' 각료들과 원폭투하에 대해 얘기하면서 스탈린은 명색이 동맹국인데 자신들에겐 투하에 대해 말 한마디 제대로 안했다며 서방 연합국들이 자신들을 협박한거나 다를 바 없다며 격분한 모습을 보였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후 소련의 정부지 프라우다에선 이 소식을 전면이 아니라 신문 중간에 단신으로 짧게 처리하는 등 정보통제를 가했으나, 모스크바 주재 미국 특파원에 따르면 그 소식이 알려진 후 며칠동안 모스크바 시내에선 온통 원폭 이야기만 시민들이 말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물론 스탈린처럼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으며, 특히 서방 연합국이 원폭을 선점함으로서 독소전쟁으로 얻은 소련의 국제적 지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는 반응들이 많았다고 한다.[66]

8. 그 외


동남아시아, 특히 싱가포르에선 축복의 불꽃이라고 대단히 기뻐했다. 4년 동안 일본에게 지배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이 학살당하던 지옥을 겪었기 때문이다.
1994년 개최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원폭에서 완전히 회생한 히로시마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상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타국(아시아) 선수들과 스탭들의 공식 일정 중 관광차 원폭 희생자 위령 기념물에 가는 일정이 있어서 마찰을 겪었다.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어쩌구 하는 일본인 가이드의 말에 "'''지들이 전쟁을 일으켜 놓고 누굴 기리라는 거야!'''"라면서 타국 선수들과 스탭들이 발끈해서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졌다고.
2005년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 추모관 야드 바셈 박물관의 개막식에 '원폭을 운운하며 피해자 그룹에 참가하려다가 박물관 측에서 나치라는 비난을 들었다'라는 이야기가 웹에 퍼져있는데, 사실 이스라엘 에서의 외교부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원수가 초대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주 이스라엘 일본 대사관의 직원들은 초청되었다) '원폭을 홀로코스트에 비견하려 할까봐' 초대되지 않았다는 것은 루머이며, 단지 일본은 홀로코스트 해방에 기여한 국가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 딱히 관심이 있는 나라도 아니기 때문에 초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피해자 드립' 이나 '나치 비난' 등의 사실은 그냥 루머.
최근 도쿄신문주니치신문이 미국의 원폭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관련 공문서 중 당시 기밀 자료였던 '글로브스 문서'를 분석한 결과 '''3번째 원폭 투하 계획'''을 확인했다고 2018년 8월 10일자로 보도했다.[67] 하지만 이런 3번째 원자폭탄 투하 계획은 곧 중단되었는데, 당시 미국 정부 관계자의 일기 등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이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의 참상을 담은 사진을 본 뒤에 더 이상의 원자폭탄 투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3번째 원폭 투하 계획'은 곧바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미국,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이어 3번째 원폭 투하 계획했었다, "美, 히로시마·나가사키 이어 3번째 원폭 日 투하 계획했었다". 그리고 그 3번째 투하 장소로는 고쿠라니가타 중 하나였다.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저 두 도시 역시 현세에 강림한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쿠라는 원폭 투하 위험을 세 번이나 피한 운 좋은 도시로 남게 되었다. 해당 도시는 주변에 바다와 인접해 있는데 만일 이때 정말로 떨어졌다면 태평양 쪽에 피해가 미쳤긴 했겠지만 훗날 캐슬 브라보 실험에서 증명되었듯 수중 폭발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해수가 방사능으로 오염되긴 해도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9. 종전 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로 리틀 보이는 모든 핵무기의 위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새로 나온 핵폭탄의 위력을 언급할 때 '히로시마의 몇 배다' 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놈은 16킬로톤(kt). TNT 16,000톤을 동시에 터뜨려야 발생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다. 자세한 것은 원자폭탄/위력을 참조. 핵폭탄 실험이나 화산 폭발, 지진 등 대규모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공 또는 자연적 사건에 비공식적이지만 아예 몇 히로시마라는 단위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경우 통상 TNT 15 킬로톤(kt), 63 테라줄(TJ)을 기준으로한다.
가장 큰 비핵폭발은 N1 로켓의 2차 발사 시도 때의 폭발인데 TNT 6kt급으로, 0.4 히로시마(15kt x 40% = 6kt)에 대응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방사선 피폭은 불행중 다행으로 반감기가 길지 않았다. 그래서 1950년대에는 도시기능을 거의 복구한다. 방사선 피폭에 대해 참고할만한 기사 #
2020년 7월 29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내린 일명 '검은 비'에 의해 건강상의 피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시와 히로시마현이 피폭자 건강 수첩의 신청을 거부 한 것은 위법이라며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히로시마 지방 법원이 1심에서 피해자들의 승소를 인정했다.# 하지만 후생노동성은 이에 항소를 하였다.#

9.1. 여론


태평양 전쟁이 원폭 투하로 끝나긴 했지만, 여지껏 보지 못했던 엄청난 위력에 곧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그리고 인류 멸망에 대한 위기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인식은 전후의 냉전과 탈핵 운동, 반전 운동, 히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68]
원자폭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가 산출된 실질적인 사건인 만큼, 원폭에 대한 부작용과 그 공포에 대해 실질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는 만화 맨발의 겐(전 10권)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뒤에서 훈도시를 늘어뜨린 줄 알고 자세히 봤더니 원폭으로 인한 고열에 등가죽 살이 녹아 늘어난 것이었고, 팔의 살도 늘어진 게 땅에 끌리기에 하박을 들고 걷는다거나 입고 있는 옷이 타면서 옷의 무늬가 고열로 살가죽에 아예 녹아 인쇄되어 버린다거나[69] 폭풍으로 깨진 유리창이 온 몸에 박히고 그 살가죽에 멍이 들어 온몸이 시퍼렇게 되었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원폭의 사용을 반대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후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나중에 독일은 핵 개발에 거의 관심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일단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나치 독일이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독일이 핵을 보유할 때 뒤처지지 않으려고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 무기가 사용되는 것은 반대하고 있었다.[70] 물론 그렇다고 이런 원폭 투하 이후 핵 개발에 반대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이 일본에 동정을 하거나 일본을 편든 건 아니다. 이들도 일본의 잔인함과 전쟁 범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핵 개발에 뛰어든 것이다.
이들이 핵 개발을 반대하게 된 것은 정말 나쁜 놈들인 일본 지도층들은 안 죽고 무고한 일반인들만 잔인하게 죽은 것[71] 때문이다. 물론 일부 저서에서는 이런 과학자들이 일빠가 되었다는 등의 잘못된 정보가 실려 있기도 했다.
원폭 투하가 반전(反戰)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같다. 이건 문제가 없지만 이러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서 이러한 역사 인식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그것이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전쟁에 대한 미화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순수하지만, 그러한 원동력이 역사적 반성의 방향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내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히로시마의 경우 전쟁의 피해자란 인식이 강해서 '''강한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 1999년 히로시마에서는 기미가요(일본 국가) 제창과 히노마루(일본 국기) 달기를 거부하여 교사와 교장의 충돌 끝에 교장이 자살한 사례가 있었으며, 나가사키는 시장이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거론한 이후로 히로히토의 분노를 사서 극우 성향의 야쿠자들이 두 명의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끝내 사망했다.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다 보니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져 일본의 피해를 입은 외국에 대한 반성도 어느 정도 있다.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투하를 이유로 국가지원금을 받아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이것을 '원폭산업'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위키리크스의 정보에 따르면 2009년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해 이 원폭 투하에 대해 일본 국민에게 사과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는 모양. 이 원폭 투하를 잘못된 것으로 미국이 인정해버리면 미일 동맹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구실이 된다는 일본 측의 정치적 판단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일본 측에서 '미국이 우리에게 사과를 해선 안 된다'며 반대를 하고 있다는 소리다. 이후 2016년에 방문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2016년 5월 27일, G7 이세시마 서밋을 위해 방일한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 투하 장소를 방문하여 연설을 가졌다. 연설의 내용은 대략적으로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72]을 위로하고 앞으로도 핵 사용을 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다짐 등이다.
2007년 1차 아베 내각 당시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일본 방위상이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과 관련,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져 비참한 꼴을 당했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 나의 정리된 생각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다"'''[73]고 말했다가 일본 내부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사임한 적이 있었다. 일 규마 방위상, 전격 사임.
추가로 2007년 조지 부시 정부 시절 미국 행정부의 핵비확산 담당 특사인 로버트 조지프 전 국무차관이 미 국무부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폭 투하에 대해 '''“결과적으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며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더 희생될 지 몰랐던 전쟁을 끝낸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가가 동의하는 내용"'''이라고 발언한 적도 있었다.[74] 이 발언 때문에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원폭 논란으로 외교적 마찰 조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日, 美와 원폭 논란으로 마찰 조짐.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원자폭탄 투하'와 관련해 미국에 '''단 한 차례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日, 종전 후 美에 원폭투하 항의 한 번 안했다>.

10. 한국인 원폭 피해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내 왼 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죠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있는 나의 왼손

김승진의 '새끼손가락'[75]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수 도시였기에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시달리다가 원폭을 맞은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다. 2016년 5월 13일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심진태 합천지부장이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총 74만명의 원폭 피해자 중 한국인 피해자는 10만여명이라고 한다. 피해자 10만명 중 5만은 즉사하고 5만이 살았다니, 피폭자 13%, 사망자 17%가 한국 사람이라는 소리다. 여기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하는 걸로 일본 내무성에서 발표됐다고 한다. 다른 연구에서는 피폭자 7만명 중 4만명 사망이라는 데이터도 있다. 그리고 징용자는 이 중 최소 만3천명이었다는 연구 보고서도 나왔다. 거기다가 부상자들은 일제에서는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접을 받았고, 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해당 사례는 1979년 4월 7일 KBS-TV의 'KBS 무대'란 단막극 프로에서 방영된 <희망>[76]과 재일교포 소설가 홍가이의 작품 <히바쿠샤>에서 다뤄졌고, 이 소설은 1989년 광복절 당시 KBS1 2부작 특집드라마 <영주의 증명>으로 영상화됐으며 여러 차례 연극화되기도 했다. 나카자와 케이지 화백의 만화 맨발의 겐에서도 나온다.
물론 일본에도 비양심적인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고, 제대로 된 사람은 있다. 이를테면 2011년 10월 3일 도요나가 게이자부로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40년간 지원해준 공로로 외교통상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하시마 섬에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던 조선인들이 원폭이 터진 나가사키에 강제로 다시 끌려가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동원됐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아무런 방호복 없이 맨몸으로 사역을 당했는데, 당연하게도 이들은 오래지 않아 피폭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당시 피해자들에 따르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피가 계속 분출했다고 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한국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서있다.
유명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꼽는다면, 대한제국의 황족인 이우도 이 투하로 인한 피폭으로 사망했고, 또한 일본프로야구의 유명인인 장훈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강한 전신 화상을 입었고 제대로 치료도 못해 12살 나이로 사망했다.[77]

(원폭 때) 밤처럼 깜깜하고, 덥고, 냄새가... 사람 타는 냄새?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큰 소리, 고함을 지르면서 이 강[78]

에 들어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렇게 이쁜 우리 누나... 하루 정도밖에 못 살았어요. 아프다, 덥다... 아츠히(暑ひ/暑い)[79][80]? 덥다(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하루 정도 울면서 약도 없고 의사도 없고. 자기 딸이 죽는 걸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장훈. KBS 휴면다큐 사미인곡 출연 당시 소회.

장영준은 원폭 투하 3일 후 부친을 찾아 나가사키시로 왔다가 폭심지 근처를 지나면서 피폭당했고, 2009년 1월에 수첩교부를 신청했지만 나가사키시가 "증인이 없다" 며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안타깝게도 장영준은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하고 8월 17일에 사망했다. 2012년 9월 18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가 나가사키시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장영준 씨에게 원폭 수첩을 교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는데, 나가사키 시에서 증인이 없다는 이유로 또 거부하자 2016년 9월 27일에 한국인 2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
경상남도 합천군에 원폭피해자 복지회관과 평화의 집이 있는데, 원폭 당시 히로시마에서 사망한 한국인 중 피폭된 60%의 사람들이 합천 출신이라고 한다. 한국의 '히로시마' 경남 합천.
참고로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홈페이지도 있다. 링크.
원폭 투하에 대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의견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원폭 피해자임에도 "나는 원폭을 투하한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지지하는 부분도 있다"라는 견해를 밝힌 사람도 있고,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미국은 반성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물론 원폭으로 죽은 사람들의 의견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어차피 몰락 작전에는 더 많은 원폭이 투입되고, 작전이 꼬이면 한반도에도 원폭을 터트렸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더 참혹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현재 현재까지 살아있는 생존자는 2,600여명이며, 1974년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의 소송 끝에 일본인 피해자에게만 이루어졌던 무료 전액 치료를 한국정부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당시 피해자들에게 일본 외 타국 어디에 있든지 진료비를 지원 받는 걸로 재판이 마무리 되었다. 2016년에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2017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어느 정도 실질적인 피해 보상이 이루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원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자식들도 '원폭 피해 2세 환우'가 되어 진상 규명과 의료지원 투쟁을 벌이고 있다. 활동가 김형률을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 결성된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 계속된 투쟁을 해왔다. 2세의 경우 투하 당시 태아상태가 아니면 의료비지원을 받을수 없다.

11. 논쟁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된 첫번째이자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기 위해서는''' 일본 제국을 과격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굴복시켜야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원폭 투하를 어쩔 수가 없는 결정이였다고 주장하며 긍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반대로 '''민간인들을 핵무기로 대량 학살한 것은 정당화하기 어려운 일'''이며, 이것이 추축국의 학살 행위와 근본적으로 다른게 무엇이냐며 원폭 투하에 비판적인 이들도 있다.

11.1. 찬성 - "전쟁을 끝낼 수단이었다"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은 자유진영과 파시즘의 싸움이었고, 당시 여건상 이 방법 말고는 일본의 항복을 빠르게 받아내기 힘들었다고 본다.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직전까지 일본이 항복을 거부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며, 아래에서 주장하는 일본의 교섭 내용은 휴전 내지는 무승부 수준의 조건이라서 연합군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81][82] 그때 당시 미국 여론은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몰락 작전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행하기 꺼릴 수밖에 없었고, 또한 만주 작전이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르게 성공한 것이지, 소련이 참전했다고 100만이 넘는 일본 관동군이 1주일만에 깨지기라고는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원폭 투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몰락 작전이 실행되어 일본의 사상자는 급증했을 테고, 모 제독의 말처럼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말이 됐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일본에 대한 전략 폭격을 담당하던 커티스 르메이 소장이 도쿄에 네이팜탄 폭포를 퍼부어 모조리 태워버린 작전을 쓴 이유에서도 나타난다. 저 작전을 시행하기 이전에 커티스 르메이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몰락 작전이 시행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의 산업역량을 무력화시켜라"였다.[83]
실제로 트루먼이 핵투하를 결정한 건 일본이 항복을 논의한 건 3건에 불과하고, 결사항전을 결의한 정보는 13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울트라 특수도청팀이 도청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일본 외무재상이 주소일본대사에게 "우리는 러시아에게 무조건 항복 같은 중재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원폭 투하와 전후처리를 서두른 이유 중에 하나가 소련의 대일 행동을 의식해서란 말도 있다. 일본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면 소련이 일본 열도의 일부를 점령할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4년 가까이 태평양에서 거의 혼자서 일본을 상대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84] 실제로도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8월 내내 홋카이도의 남북 분할을 요구했지만 트루먼이 무시했던 바가 있다.[85]
현실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한국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이 원폭투하가 조금이라도 일본의 항복을 앞당겼으면 앞당겼지 그 반대의 효과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만약 원폭투하가 일어나지 않고 일본 본토 결전이 일어나는 형식을 취하면서 훨씬 뒤에 일본이 항복했더라면 미국·소련에 의해 분단되는 것은 '''일본'''이었을 것이고, 한국은 분단을 피했을 가능성이 있다.[86] 다만 이 경우엔 전쟁 양상에 따라서 한반도가 전쟁의 직접적인 참화를 입을 수도 있었고, 소련 휘하의 공산국가가 되었을 확률도 존재한다.[87]
사실 학살이라는 부분도 머리 아픈 부분이 있다. 민간인 지역에 대한 공중폭격이라는 것만 보면, 떨어진 폭탄의 종류만 다를 뿐이지 일반적인 공습이나 원자폭탄 투하나 그놈이 그놈이다. 2차대전으로 한정지어도 영국 대공습이나 드레스덴 폭격, 도쿄 대공습은 일상적인 전투행위이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만 별도로 떼어서 학살로 볼 이유는 없다. 도시를 거의 소멸시켜버리고, 군사적 목적보다 압도적인 민간인 피해를 냈다는 점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코벤트리나 독일의 드레스덴은 수 년간 도시가 소멸해버렸을 정도였다. 이걸 학살로 부른다면 전략폭격기는 학살무기라고 불러도 이론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 제국은 엄청난 악의 제국이었다. 당장 731부대의 경우만 하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을 생으로 잡아다 생체실험과 이를 빙자한 그냥 살육 파티[88]를 벌였다.''' 또한 난징대학살 같은 짓거리나 저지르고 다녔으며, 100인 참수 경쟁 같은 절정의 미친 악행을 여러 번 자행하는 나라였기에 '''이 짓거리를 막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주민들의 무고함 여부는 훨씬 중요한 문제에 의해 뒷전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기회도 안주고 느닷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한것도 아니다. 포츠담 선언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미 사이판 전투의 결과로 일본의 본토가 B-29의 폭격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고. 45년 상반기엔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굵직한 폭격 세례들이 날아왔고 이로 인해 일본은 궤멸적인 피해를 이미 입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항복하지 않고 연합국의 요구에 비협조적으로 굴은것이 바로 일본이다. 이는 정말로 바보 같은 행위인게, 협상에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자기 주장만 하거나 상대방의 요구만을 들어준다면 상대는 자신을 협상 가치가 없다&호구로 볼것인데, 전자의 경우를 초래한것은 바로 일본 자신들이었다. 결국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본의 고집이 원자폭탄 투하를 피할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11.2. 반대 - "학살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국제법상 대량살상 그 자체가 전쟁범죄이다.'''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의 헛된 입장이거나 제2차 세계 대전은 본질적으로 착취자의 입장에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끼리의 다툼일 뿐이었다고 본다.[89] 전쟁을 벌이는 건 늘 착취하는 자들이고, 전쟁에 희생당하는 건 늘 민중이니 참으로 딜레마'''이다. 전쟁을 통한 국익은 정작 국민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일본의 전쟁 지도층이 아닌 민간인들이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일본 국민들 중에는 조선인을 차별하고 전쟁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국민 모두가 전쟁 광신자도 아니었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원폭 투하 지점에는 일본의 전쟁 범죄와는 무관한 어린이들도 살았으며, 거기다 일제강점기 당시 내지로 끌려오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상당했다. 심지어는 '''연합국''' 포로들도 있었다.
원폭 논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미국이 원폭을 쓰지 않아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았느냐" 다. 굳이 도시 한가운데에 떨어뜨릴 것 없이 근처 해상에 투하해 무력시위를 벌여도 일본의 투쟁의지를 꺾기에는 충분할 것이고, 그래도 항복하지 않고 죽기 살기로 저항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투하해도 문제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
원폭 투하 전에도 모든 고위급 인사들이 찬성한 건 아닌데, 이 때 반대하던 고위 장성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체스터 니미츠 원수 등도 있었다.[90]
당시 핵폭탄 투하를 승인한 트루먼 대통령도 깊은 후회를 하였는데, "한 나라 지도자들의 외고집 때문에 인구 전체를 없애야 하는 일이 생긴 데 대해 후회하고 있다"며 "앞으론 원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겠다"고 리처드 러셀 민주당 상원의원에게 쓴 서한이 2015년 8월에 공개됐다.[91] 세계대전 종전 70년 만에 공개된 서한이다. 관련기사
서구권에서도 원자폭탄을 두 번이나 투하해 민간인들의 엄청난 희생을 자아낸 것이 과연 정당했는가에 대해 심심치 않게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지만, 어떻게 봐도 본보기 차원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전 직후 태어나 교육을 받은 베이비부머 세대와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청년 세대 간의 시각차도 한 몫을 하는데, 2015년 YouGov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응답자 65%가 원폭투하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답했으나, 반면 30세 미만에서는 응답자 31%만이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답했다. 학살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저 정도 수의 희생자면 충분히 학살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전쟁을 끝내겠다고 결정한 것 이전에, 이거 터뜨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만큼 원자폭탄 투하가 얼마나 필요했는지는 이미 답 나왔다. 독일 같은 경우 이미 항복해서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지만 결사항전했다. 아이들까지 끌어모았고 건물 하나에서 죽을 때까지 버텼다. 그럼 이들도 항복 안하니까 폭탄 던져야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건 이후 무슨 시대가 열렸는지 보면, 피해자만 개죽음이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상륙전을 펼쳤으면 미군측에 끔직한 피해가 야기될 것이라고 하여 투하했다 하는데, 이미 저때 당시는 미군의 전략폭격으로 전쟁 수행 능력이 없는 수준이었고[92], 무엇보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열악함과 미군의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미군 사상자가 꽤 많이 나왔던 건 어디까지나 주 전장이 정글로 가득찬 조그만 섬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우회로가 없기에 일본군의 방어선을 정면 돌파해야 했고, 이로 인해 피해가 꽤 컸던 것이다. 같은 섬임에도 면적이 커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기동할 수 있었던 뉴기니필리핀에선 미군이 일본군을 말 그대로 학살했다. 이로 말미암아 비슷한 환경인 일본 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93] 원폭투하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쟁에 피로를 느끼던 미국 여론 상 대규모 군사작전을 시행하기 꺼렸던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신무기 실험도 할 겸 투하한 것이라 봐야 한다.
철학적으로 봤을 때는 아무리 직접적으로 희생자가 줄었다 하더라도,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핵 폭격해서 소수의 희생 정도로 끝낸다는 것은 그저 희생을 숫자로 비례한 극단적 공리주의라 생각해볼 수 있다.

11.3. 결론: 일본은 재앙을 피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


이러한 논란과는 별개로, 어떤 식으로든 일본 스스로의 책임을 완전히 부정할 근거는 없다. 일본은 핵을 맞지 않을 기회가 표면적으로만 보아도 두 번이나 있었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뒤에도 나가사키 핵 투하를 막을 기회도 있었다. 당장 구 일본군만 봐도 상황 구분 못하고 가미카제나 하고 앉아있었으니...
우선 연합군은 핵무기에 회의적이었다. 핵무기는 극비에 붙여져서 연합군이라 하더라도 그 실체를 모두가 알았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맨해튼 계획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와중에도 계획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시간과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중도 포기했다. 미국에서도 맨해튼 계획은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였는데, 맨해튼 계획은 ''''나치'''가 핵폭탄을 개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치에게 핵폭탄 같은 건 없었고, 당시 과학자들에게 핵분열을 다루는 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맨해튼 계획 역시 좌초 위기에 이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일본이 전쟁을 그만했더라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는 핵무기 개발의 당위성도 '''당장에 사라진다.''' 미국은 승전국이지만 GDP의 40% 정도를 전쟁에 쏟아부으면서 경제 상황이 매우 나빠졌고, 옛날 전쟁들과 달리 패전국에게서 자원을 강탈하거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낼 수도 없었고, 자력으로 무너진 경제 복구에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당시로써 보면 핵 같은 공상과학에 매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점차 일본의 패전은 명확해지기 시작했고, 1944년쯤 되면 일본 내에서도 "한국이고 필리핀이고 식민지 다 포기하고 GG치자" 는 정상인들이 몇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은 1945년 3월 9일 도쿄 대공습을 당했다. 일본 정부의 집계에 의하면 4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100만 명의 이재민이 나왔다! 사실 이것도 의도적으로 통계를 낮게 잡은 것이고, '''도쿄 대공습이 히로시마 핵폭격보다 피해자가 더 많다는 통계도 있다.'''
늦어도 1944년 9월 무렵에는 일본의 전승 가능성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자국민이 입는 피해가 날마다 누적되어가는 반면 폭격을 저지하거나 반격을 가하여 성공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미 일본의 주력함대는 마리아나 해전레이테 만 해전을 거치면서 B-29의 작전기지인 이오지마를 미군에 내어주고 괴멸된지 오래였다. 잔존한 함대세력도 외형상으론 상당한 규모라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특공을 보내 미군 앞에 내던져 관심을 끌고 카미카제가 공격할 틈을 만들어 주는것 정도 밖에는 없었다.
자력으로 전황타개가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끌며 유리한 상황[94]이 오기를 기대할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동서 양면에서 신명나게 두들겨 맞고 있으니 이미 전쟁 전에 세웠던 절대국방권을 사수하며 독일의 승리에 편승한다는 계획도 박살난지 오래였다. 시간을 번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다면 무리한 전쟁을 그만두고 협상책을 찾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광기에 찬 군부는 여전히 전쟁을 지속했고, 전쟁은 이후로도 '''거의 1년 가까이 더 지속되었다.''' 만약 여기서 전쟁을 그만두었더라면 '''핵폭격은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일본이 전쟁 수행 의지를 보이자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다. 연합군은 식민지 포기, 무장 해제, 전범 처벌이라는 '''상식적이고 당연하며, 그동안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너그러운 조건'''을 제시했다. 이후의 경제제재도 논의에 없었고, 재무장 제한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으며 식민지에 대한 배상 따위도 전혀 없었다. 이는 독일에게 제시한 항복 조건에 비하면 엄청나게 너그러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조건 제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고,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아예 '선언을 묵살한다'며 애매한 표현[95] '우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뿐이다.'라며 항복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연합군은 이 선언에서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의 파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만약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다면 '''역시 핵폭격은 없었을 것이다.'''
포츠담 선언과 독일의 항복 조건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 상당히 너그러운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정지적 상황 등이 원인이다.
  • 일본군은 무장해제 후 고향에 복귀할 수 있다. 독일군은 영미에 항복해도 소련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간주한다.[96]
  • 일본군은 항복 후 산업 복구를 위한 무역에 참가할 수 있음을 명시했으나, 독일은 이런 수혜조건이 없었다.
  • 이후 베를린 패전선언(Berlin Declaration)에서, 독일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not exist)으로 간주되었다.[97] 그러나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은 여전히 국가 지위를 유지한다.
  • 독일 군대를 연합군의 평화유지 목적을 위해 사역에 동원할 수 있었다. 말이 평화유지 목적이지 실제로는 지뢰 제거 등 매우 힘들고 위험한 업무에 투입되었다. 문서에 '지뢰 제거 등'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일본군은 단지 무장해제 후 고향에 복귀하는 것뿐이었다.
  • 독일 민간인에 대한 처분도 애매하게 표시되었다. 독일의 민간 기구는 연합군 명령에 의하여 얼마든지 소환될 수 있었으며, 독일 시민은 연합군의 지시에 불응할 경우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다. 이는 사실상 독일의 민간인이 연합군에 의해 사법처리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일본은 영토에 대한 손해 없이 식민지를 포기하는 조건에 불과했으나, 독일의 경우 일부 독일 영토가 할양되는 조건이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논란거리였던 Saargebiet 지역[98]은 결과적으로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완전히 자국에 귀속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1957년에서야 서독에 반환된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도 군부는 1억 옥쇄 같은 망상에 빠져서 전국민 옥쇄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역시 이 때 늦게라도 항복했다면 '''최소한 나가사키 핵투하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는 2차 핵폭격. 결국 일본은 핵폭격을 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변명을 해주자면 핵무기가 기존에 존재했던 무기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기술적, 정치적 위력의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가 그에 따른 파급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일본이 전세가 기운 전쟁을 무리하게 고집하면서, 자국민들에 대한 더 크고 무의미한 피해를 막을 기회를 스스로 외면했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12. 기타


  • 히로시마 원폭 투하 상황에 대해 자세한 책으로 <카운트다운 히로시마>가 있다. # 방대한 자료 조사와 중립적인 시각으로 원폭 투하 준비 과정(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의 비극도 나온다)부터 생존자들의 이야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같은 제목의 BBC 다큐멘터리도 있다. 다만 '일본 민간인도 피해자가 맞을지라도 마치 그걸 이용해서 일본이 피해자인 양 묘사했다'고 주장하면서 역시 불쾌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으니 판단은 알아서. 무엇보다 일본, 미국 외 제 3자의 입장에서 만들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는 있다.
  • 캐나다의 전설적인 락 밴드 러쉬의 대표곡 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소재로 한 노래다. 러쉬의 드러머 닐 피어트는 이 곡을 작시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10권이나 독파했다고 한다.
  • 폴란드의 작곡가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는 원폭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곡인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위한 비가(悲歌)(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를 작곡하였다. 다만 흔히 생각하는 진혼곡의 잔잔하고 슬픈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곡이다. 심약자 조심. 소리건 앨범 이미지건 무섭다. 그러나 음악적으로는 상당히 잘 작곡한 곡이다. 52개의 현악기를 사용했지만 현악기의 잔잔한 사운드와는 달리 히로시마 희생자들의 비명소리 처럼 들리는 찢어질 듯한 소음 등이 들리는 것 같다. 한 마디로 음악적으론 잘 만든 곡이지만 듣기엔 다소 거북한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는 1984년 이 사건을 노래한 'Hiroshima(히로시마)' 라는 노래를 냈다. 'Dirty Fingers'라는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 일본의 작가 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의 초반부에서 화자인 주인공이 코쿠라가 고향인 어머니가 이때의 일을 이야기해주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인공 '나'는 항상 어린 마음에 "날씨가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그런 정도에 그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리고 말고 하다니,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는 짓이 참 어설프고 바보 같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 폴란드볼에서 다룬 일본의 트라우마. 설명하자면 중국공이 말하기를 리틀 보이가 왔다는데 미국인 꼬마였고, 대만공이 말하기를 팻 맨이 왔다는데 미국 출신 비만인인 것. 그런데도 일본공은 둘 다 기겁부터 하며 피하는 모습이다.
  • 종전 이후에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 극우 세력들을 비판하기 위해 잔향의 테러라는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다.
  • 미국 만화 슈퍼맨 언체인드라는 작품에선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건 폭탄이 아니라 핵폭발 능력을 지닌 외계인 초능력자라는 설정이 나왔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두 번 맞은 사람도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156명이고, 그 중 일본 정부가 인정한 사람은 야마구치 쓰토무 1명이다. 그는 미쓰비시 소속의 선박 설계 기사로 히로시마에 출장을 갔다가 하숙집 노부부와 수다를 떠는 등 느적거리다가 원폭을 맞았는데, 제 시간에 도착했다면 폭심지 근처라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한다. 폭발이 일어난 것을 봤을 때 방공 훈련 내용대로 바닥에 바짝 엎드렸지만, 후폭풍에 몸이 수십 미터 가량 날아가 도로 옆 감자밭에 떨어져 한동안 기절해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쪽 팔과 상반신에 화상을 입고 고막에 손상을 입은 채 지옥도가 된 히로시마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까스로 히로시마에서 빠져나가는 열차에 타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심한 화상으로 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황에 미쓰비시에선 회사로 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라며 명령했고, 그는 나가사키 사무소에 출근해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며 동료와 상사에게 원폭의 위력을 설명했다. 그리고 상사가 "단 한 발의 폭탄이 도시 전체를 파괴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는 와중 원폭을 맞았다. 운 좋게도 가족들은 폭격을 피해 방공호로 가서 살아남았지만, 쓰토무 본인은 두 번의 연달은 피폭으로 몇 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었다. 쓰토무는 다행히도 건강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교사로 생활하다가 2010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2005년에 일본 히로시마 방송국에서 해롤드 애그뉴[99] 박사를 대담을 초빙하는데 내용이 총체적 난국이다. 요약하면 원폭을 겪은 히로시마 출신 2명이 해롤드에게 사죄하도록 종용했다.# 정확히는 해롤드 박사에게 원폭 떨구고 어떤 마음이냐 뉘앙스인데 "버섯구름 아래에서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 당연히 책임을 묻는 뉘앙스라 박사는 못봤고 도쿄 대공습과 비슷할것이고 "비난하고 싶으면 그런짓을 한 일본군을 비난해야죠"라고 반박했다. 이 같은 내용에서 라디오 방송에 개그맨 마츠모토 히토시가 박사에 대한 비판을 했다.# 마츠모토는 히로시마만 원폭 투하했으면 됐지 왜 나가사키도 떨어트렸냐고 비판했지만, 이 역시 오류. 상술했듯 나가사키를 구할 기회는 있었으나, 그걸 걷어찬 건 일제지 미국이 아니다.
  • 2018년 방탄소년단의 한 멤버가 원폭투하 셔츠를 입었던 것으로 인해 논란이 일어났을 때 소속사인 빅히트 측에서는 11월 13일 공식 페이스북에 "원폭 투하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상처를 드릴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라며 상세한 입장을 담은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일본과 한국의 원폭 피해자협회 관계자들과 접촉해 현재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설명하고, 상처받은 이들에 사과를 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해당 셔츠를 입었었던 멤버 지민은 이 날 도쿄 돔 첫날 공연에서 마지막에 일본어로 "우리들은 2014 년 처음 일본에 와서 시부야의 작은 장소에서 라이브를하고 드디어 도쿄돔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일본과 세계에 염려[100]를 끼친 것 같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얘기했다. # 일본 tbs는 이것을 "정말 미안해요. 일본 여러분"이라고 지민이 마치 일본에 대해 사과한 것처럼 날조하였으나 거짓임이 드러나자 tbs는 사과하고 정정보도하기도 하였다.# 빅히트와 방탄소년단 측은 어디까지나 양국의 원자폭탄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이지 일본정부나 일본 극우들에게 사과한 것이 아니다. 11월 16일에는 빅히트 측에서 경남 합천의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관계자들을 만나 의도치 않은 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측도 사과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일본이 이 셔츠를 문제삼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을 지적하며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13. 관련 문서



[1] 보통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의 버섯구름 사진은 나가사키의 버섯구름 사진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 중의 하나는 '''사진발.''' 보다시피 히로시마의 버섯구름 사진은 나가사키의 것에 비해 어딘가 흐릿하고 구름의 형태가 살짝 뭉개진 듯한 모습이다.[2] 이러한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육군부 장관 헨리 스팀슨도 전후에 한다. 1946년 7월에 발표된 미국과 일본 공중전 결과에 대한 공식 보고서인 '미국의 전략 폭격 조사(strategic bombing survey)'는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침공을 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이 항복했을 것이라는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헨리 스팀슨은 "일본을 침공하였더라면 희생되었을 100만 명에서 150만 명의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폭탄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차대전 당시 참모장들은 본토 침공을 하더라도 2만에서 2만 5,000명 사이를 예상했고, 당대 최고 추산은 6만 3,000명이었다. 따라서 처칠의 발언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3] 당대 용어로는 '국체호지(國體護持)'라고 하였다. 천황=국가라는 이야기이다. 전후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했으나, 천황은 전쟁 후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끌려가서 인간 선언을 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이후 총리내각제가 도입된 일본에서 천황이란 유럽 왕실과 마찬가지로 한낱 연예인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법적 형식상으로나마 국왕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어느 정도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는 데다가, 정치에도 일부 관여하기도 하는 등 권한 행사가 가능한 유럽 왕실과는 달리 일본 왕실은 일일히 행보를 제한받으며, 최종결제권은커녕 거부권도 형식적으로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본국의 상징',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일 뿐이다.[4] CIA가 공개한 보고서 원문 링크[5] 이거 빈말이 아닌 것이 당시 일본군 군가 중 하나인 도키노사쿠라, 즉 동기의 벚꽃이 이 내용이다.[6] 농담이 아니다. 당장 행정명령 9066호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과달카날에서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를 외친 제독도 있을 정도.[7] 원자폭탄 연구 초기에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포신형 폭탄도 연구하였으나 개발이 매우 어려워 중단되었다. 이 폭탄의 이름은 THIN MAN이었다.[8] 펜타곤을 6개월만에 짓도록 이끈 엄청난 추진력의 소유자이다.[9] 순수한 민간인 거주 지역만 폭격한다면 나중에 욕 먹기 딱 좋았으므로 중요한 군사적 표적도 있는 도시여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뒤에 서술되어 있지만 히로시마에는 육군 2총군 사령부와 많은 병력이 있었다.[10] 즉 기존에 폭격을 받지 않은 도시여야 한다는 뜻이다. 순수하게 원자폭탄만으로 어느 정도의 피해가 발생하는 지를 측정하기 위해서다.[11] '''말 그대로 자신이 직접 폭격기에 같이 탑승한 적도 있다(…)'''[12] 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알려진 바와 다르게, "Iron Ass"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원자폭탄 반대론자에 가까웠다고 한다. 왜 굳이 힘들게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도시를 때려야 하는지를 잘 이해 못했다고. 왜냐하면 '''원자폭탄 같은 거 없어도 이미 자신의 부하들이 수많은 일본의 도시들을 열심히 지지고 볶고 있었기 때문이다.'''[13] 고폭탄소이탄을 조합한 통상 폭격만으로도 이러한 싹쓸이 폭격 효과는 충분히 거둘 수 있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원자폭탄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14] 출처: 목표 선정 위원회 회의록[15] 출처: 목표 선정 위원회 회의록, "The Emperor's palace in Tokyo has a greater fame than any other target but is of least strategic value."[16] 그러나 첫번째 투하지를 병사들과 수병들밖에 없는 곳으로 제한하겠다던 트루먼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원폭이 제일 먼저 투하된 히로시마는 공업도시였으므로 사상자 절대 다수가 민간인일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폭격 목표로 정한 이상 민간인의 다수 희생은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기도 했다.[17] 맨해튼 계획 전체를 통틀어 그로브스 소장이 자기 고집을 꺾은 정말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뒤에 서술되지만 나가사키는 목표 선정부터 시작해서 실제 폭격 작전에서도 2차 목표였음에도 불운의 연속으로 결국 원폭을 맞게 된다.[18] 트리니티 실험, 히로시마 투하, 나가사키 투하에 각각 사용되었다.[19] 스티븐 워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황금가지, 2005, pp. 171.~172.[20] 루이스 앨버레즈 또한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다. 미 육군 중령 계급을 받아 활동했다.[21] 은쟁반 B-29들은 이 가변피치 프로펠러 덕분에 "마치 스포츠카를 주차시키듯" 자체 후진으로 바로 주기할 수 있었다. 스티븐 워커, 앞의 책, p. 118. 현대의 제트 전투기들조차도 자체 후진은 불가능하며 토잉카로 밀어주어 주기해야 한다.[22]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p. 117~118.[23] 조종사의 어머니의 이름[24] 원래 393 폭격비행대대의 수직 미익 심벌은 동그라미 안의 화살표였다. 원자폭탄 투하작전을 앞두고 일본군을 교란하기 위해 수직 미익 심벌을 바꾼 것이 동그라미 안의 R 표식이다.[25]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역 당시의 전형적인 무도장 은빛 기체 형상이다. 다만 에놀라 게이와 복스카는 제509 혼성 전대에서 운용한 이른바 "은쟁반 B-29"(Silverplate B-29)로서, 일반형 B-29와는 차이가 있다. 외견상으로 가장 큰 식별점은 은쟁반 B-29는 기체 후미 총좌를 제외한 모든 터렛 총좌가 제거되어 있다는 것.[26]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218.[27] 사진을 잘 보면 몇 시간 전 부랴부랴 페인트 칠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28] 작전의 전체 지휘는 제509 혼성 전대의 티비츠 대령이 했지만, 실제 폭탄의 관리는 그의 소관이었다.[29] 1922년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생으로 바로 하이먼 리코버 제독과 동기이며, 초급 장교 시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 경력을 해군 병기장교로서 종사해 VT신관 개발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제독 진급에 필수 조건이었던 주력함의 함장 직책을 1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지만, 원폭 투하 직후 그는 임시 준장으로 진급했고 전후 46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30] 여담으로 이때 파슨스 대령은 멕베이 함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1) 티니안 섬까지 최고속도로 달릴 것 2) 화물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말 것 3) 배가 침몰해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화물부터 구할 것(함장을 포함해 전 승무원의 생명보다 화물이 우선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설도 있음) 4) 당신이 항해 일자를 단축할수록 이 전쟁도 단축됨.[31]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p. 236~237.[32] 원자폭탄 만들기(사이언스 북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황금가지),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뿌리와 이파리) 등을 참고하라.[33] 아마도 최고책임자인 그로브스 소장에게 직접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러한 낭설의 원인이 아닐까 추정된다.[34]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181. 트루먼 대통령의 모친은 히로시마에서 11,000km 떨어진 미국 미주리 주 그랜뷰에 살고 있었다.[35] 원래 제393 폭격비행대대의 호출부호는 빅터였으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작전에서는 보안을 위해서 임시로 dimple(보조개)이라는 단어로 호출부호를 변경했다. 본 문서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당초 호출부호 빅터로 통일하여 서술한다.[36] 왜 촬영 관측기가 따로 필요했냐면, 뒤에 나오는 것처럼 원자폭탄 투하 담당기와 폭발력 계측기는 폭탄 투하와 동시에 급선회하여 전속력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에 사진을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37] The Great Artiste(위대한 예술가)는 509 혼성전대 303 폭격비행대대에서 에놀라 게이, 스트레이트 플루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기체 중 하나였다. 이러한 기체명이 붙은 이유는 이 B-29의 폭격수였던 Kermit Beahan 대위의 두 가지 솜씨가 그야말로 예술이라서. 하나는 노든 폭격조준기 다루는 솜씨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 작전 계획에는 1차 원폭 투하는 에놀라 게이, 2차 원폭 투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후술하는 것처럼 1차 원폭 투하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폭발 관측/계측 임무를 맡으면서 온갖 장비를 덕지덕지 설치해놓았는데, 불과 며칠 뒤 2차 작전을 하려다보니 이들 장비를 떼어내서 다시 다른 기체에 설치하는 것이 너무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결국 위대한 예술가를 조종하던 척 스위니 대위 팀만 "복스카(BocksCar)"로 옮겨가고, 복스카를 조종하던 프레드릭 복스 대위 팀이 위대한 예술가로 옮겨와서 2차 원폭 투하 작전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결국 2차 원폭 투하의 영광은 복스카 기체가 가져가고 위대한 예술가는 사람들이 거의 모르게 되었다... 현재 미국 미주리 주 화이트맨 공군 기지에는 The Great Artiste 노즈아트를 그린 B-29가 전시되어 있으나, 이 기체는 노즈아트만 그려넣은 다른 기체이다. 진짜 The Great Artiste는 1948년에 훈련하다가 착륙 도중 크게 부서졌고, 결국 1949년에 스크랩 처리 되었다.[38] 물론 생중계는 당연히 아니었고, 나중에 원폭 투하 성공 이후에 홍보 뉴스에 쓰기 위함이었다.[39]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270.[40]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300.[41] 유럽전선 전략폭격을 그린 영화 멤피스 벨에도 B-17 폭격수가 조종을 넘겨받아 폭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42] 앞에서 설명되어 있는 급강하 급선회 회피 기동이다. 투하와 동시에 충격파와 방사선 피해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43] 이정도의 폭격 오차는 대량의 폭탄을 일거에 투하해서 목표물 일대를 덮는 방식의 통상폭격이라면 당연히 대성공의 범주에 들어간다.[44] 유명한 군사 소설가 톰 클랜시의 소설 '공포의 총합'(베카의 전사들)을 보면,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핵폭탄 제조를 돕는 독일인 프롬 박사가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를 가르켜 "그건 대부분의 핵물질을 낭비해 버린 것이었지" 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45] 출처 : The Atomic Heritage Foundation, "The Bomb-Little Boy", 2007.[46] 두 생존자 둘 중 한 명도 결국 살아남은지 몇 시간 뒤 사망해버렸다. 그 입장에서는 기적적인 생존이라고도 못하는 게, 무시무시한 방사능 피폭과 폭탄에서 나온 초고열의 여파로 죽기까지의 몇 시간 동안 고통받았을 것이다.[47] 사진 한가운데 T자 형 다리가 바로 폭격조준점 아이오이다리이다. 뜻은 상생(相生)의 다리. 다리 남쪽 삼각형 지형에 있던 모든 건물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원폭 폭발로 깨끗하게 지워졌다. 지금 그곳은 히로시마 평화공원이 되어 있다.[48] 도시 외각에서 들어오는 찬 공기와 불씨가 만나 거대한 화재선풍을 일으키는 이러한 현상은 잇시키 토키히코(一色登希彦)의 만화 '일본침몰'에서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49] 마츠시게 요시토(松重美人)는 참상에 질려 차마 시신들의 사진을 찍지 못했고, 부상자들의 사진만 간신히 찍을 수 있었다. 24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을 넣고 나왔지만 찍은 건 7장의 사진 뿐이었고, 그 중에서 5장만이 남았다. 그 스스로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충격에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고. 요시토에 의하면 사진을 찍은 '미유키 다리' 양 옆으로 시신들이 쌓여 있었고, 폭심지에서 200m 떨어진 카미야초에 세워진 전차 안에는 벌거벗은 시신들이 15구가 넘게 누워 있었다. 그 외에도 그 날 본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츠시게 요시토가 찍은 사진 속에서 부상자로 등장하는 츠보이 스나오 역시 눈알이 빠져 흔들거리는 여자아이, 수족을 잃은 부상자들, 흘러나온 내장을 주워담는 남자, 미유키 다리 너머 강 속의 수 많은 시신들을 보았다고 증언하였다.[50]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9월 5일자 1면 머리기사의 일부다. '원자병(Atomic Plague)', 부제는 '나는 세계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기사를 쓴다.' 호주 출신 윌프레드 버체트(1911~1983년)는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에 들어간 최초의 서방 기자로, 당시 히로시마에 넘쳐나는 백인에 대한 증오에 맞서며 원자병의 참상을 폭로했다.[51] 김해 ~ 신의주 간 직선거리외 같은 거리이다. [52]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 385.[53] 닐스 보어의 제자이다.[54] 그들은 이것 솜씨를 놓고도 치열하게 겨루는 사이였다...[55] 이 기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인데, 맨해튼 계획이 알려지기도 전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상당부분 원자폭탄 실체를 밝혀나가던 유능한 기자였다. 맨하튼 계획의 두목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은 이 기자를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계획 내부로 끌어들여서 아예 맨해튼 계획 홍보를 맡겨버렸다. 윌리엄 로렌스 기자는 원자폭탄의 성공/실패 등등 각각의 상황에 대비하여 수십 개의 보도자료를 미리 준비해놓았다고.[56] 이때의 타격대 규합 실패는 사실 거의 미스테리에 가깝다. 나름 맹훈련을 거듭했던 509 혼성전대의 승무원들이 이런 초보적인 고도/항로를 잘못 잡는 실수를, 그것도 원자폭탄 실 투하 작전이라는 중대한 작전에서 저질렀다는 것은 뭐라 이유를 대기조차 어렵다.[57] 당시 고쿠라 상공을 덮고 있던 이 연기에 대해서는 2014년에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히로시마 폭격 이후 "B-29 한두 대가 날아오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특수폭탄 폭격이다"라는 소문이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었고, 고쿠라에는 제철소와 무기 공장 등도 있어서 "다음은 우리 차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8월 9일 아침 소규모의 B-29들이 고쿠라로 접근한다는 얘기를 들은 야하타 제철소에서 직원들이 드럼통에 대량의 콜타르를 태워서 연기를 발생시켜 시야를 가렸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원자폭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증언도 있으니 위키러들이 판단하자. 관련 일본 기사[58] 폭격 항로와 고도를 잡고 폭격수가 조종권한을 인계받아 노든 폭격조준기로 목표를 찾으면서 비행하는 것을 말한다.[59] 구글 지도로 보는 폭심지와 주위 지형.[60] 그러나 하술하듯 실제 세 번째 투하 예정지는 고쿠라였다.[61] 이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여느 날들처럼 조용했다. 다음날 재방송이 나온 후에야 전국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가 요란했다고.[62] 교전도 교전이지만, 항복 당일까지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이 계속되었다. 가장 불쌍한 게 아키타인데, 항복 전날인 8월 14일 늦은 밤부터 항복 당일인 8월 15일 아침까지 100기가 넘는 B-29의 공습을 받아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63] 게다가 만주 침공을 지휘한 사령관은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소련군 최고의 명장 투톱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였다.[64] 여기서 고려할 점은 일본의 관동군은 이미 정예병이 아닌 잡병 수준이고, 일본이 진정으로 자랑하던 해군을 몰살시킨 게 미국이다.[65] 이걸 모르는 트루먼 대통령이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자신들이 일본을 항복시킬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며 넌지시 미국의 힘을 과시하자 그걸 일본에게 잘 쓰길 바란다고 에둘러 답변했다.[66] 1945(20세기를 뒤흔든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6개월)에서 발췌.[67] 실제로 몰락 작전이 시행되었다면 첫 상륙인 1945년 11월 1일에 앞서 최대 일곱 발의 대규모 핵폭격이 있을 예정이었다.[68] 이게 우리가 아는 형태로 못박은 전쟁은 당연 베트남 전쟁이다.[69]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사했다. 반대로 검은색 혹은 짙은 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옷이 그대로 피부에 들러붙어버렸다.'''[70] '이건 무슨 개소리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강력한 무기는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냉전의 핵무기 개발이 대표적인 예이며 미국소련은 서로 핵전력에 있어 '상대방 거보다 무진장 강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그 경쟁으로 태어난 대표적인 폭탄이...[71] 일본 제국을 이끌고 한국 등을 식민지로 만든 건 일본 지도층들이었다. 더 정확히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 다이묘의 후손들이며 동시에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물론 일반 일본 시민들이 한국인들을 차별했다는 등의 이유 때문에 일반 일본인들까지 죽어도 싸다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모든 일본인이 한국인과 중국인을 2등 국민이나 노예 취급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만화 맨발의 겐 작가의 아버지. 만화 주인공 나카오카 겐이 그랬듯이 작가도 어릴 적 중국인과 한국인을 모욕하는 노래를 뜻도 모르고 부르다가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러한 정치 성향 때문에 강제 수용소 생활도 많이 겪었다고.[72] 피해의 대다수를 차지한 일본인은 당연하고, 그 다음으로 많았던 한국인을 비롯해 당시 일본에 있다가 참변을 당했던 외국인들까지 언급하였다.[73] 日 방위상 "美 원폭투하 어쩔 수 없었다".[74] "원폭투하로 수백만 추가희생 막아"[75] KBS2 주말연속극 달빛가족 수록곡으로, 원폭 참사 희생자들을 다루는 곡이다. 1회에서 등장했다.[76] 박수복 극본 / 이유황 PD의 작품으로, 배우 나시찬과 김난영이 주연을 맡았다. 원래 1978년 가을에 방영하려 했으나 유신 치하에 10대 총선 시기라 방송사의 자체 심의로 불방됐다가, 이듬해 서독 ZDF 푸트라에서 특별상을 받고서야 방영됐다.[77] 또한 장훈은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도 단 두 명 뿐인 사례다. 나머지 하나는 전 롯데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78] 히로시마 겐코 강. 장훈 가족은 강 바로 옆의 조그마한 집에서 살았다.[79] 덥다, 뜨겁다의 일본어. 문맥상 '뜨겁다' 라고 하고 싶었던 듯.[80] 앞은 역사적 표기법, 뒤는 현대 표기법[81] 이미 연합군은 독일과의 휴전 협정을 배후중상설의 싹을 싹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그냥 거부하고, '''무조건 항복하든지 다 죽든지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했고 항복할 때까지 독일 영토를 양쪽에서 무력으로 밀어버렸다. 연합군이 유독 일본에 자비로웠던 이유는 일본을 점령한 뒤 향후 냉전 구도에서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해주길 원했던 의향 때문.[82] 다만 정말로 일본에게 전후 냉전 구도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길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딱히 연합군이 일본에 자비로웠다고 보기도 어려웠던 데다가, 전후 처리만 봐도 일본에게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권을 막아낼 교두보 역할을 목적으로 한 뒤처리가 아니었기 때문. 원폭 투하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만들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고, 일본에게 요구한 내용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무조건 항복이었으며, 말도 안 되는 조건이긴 했으나 일본이 내건 천황제 유지나 전쟁 전에 보유했던 식민지 유지 등의 조건들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또한, 전후 일본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재벌들을 모조리 해체시키고, '동양의 스위스' 운운하며, 근대적 농업국가로 개편하려했던 미국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냉전 구도에서 공산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일본에 요구하려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이 지금의 공업화와 산업선진국으로 재도약한 계기는 '''한국 전쟁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었으며, 한국 전쟁은 스탈린조차도 김일성의 생떼를 48번이나 거절할 정도로 급작스러운 변수였기에 당시 미국은 예측할 수도 없는 변수였다. 한국 전쟁이 없었다면 일본은 지금의 스위스처럼 근대적 농업국가의 형태로 재개편된 채 그대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3] Kozak, W.,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 2009.[84] 물론, 임팔 작전 같이 미국을 제외한 연합군도 일본을 상대로 전투를 치른 적이 있긴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 무대는 당연히 바다였고, 일본과의 해전은 거의 99% 미국과의 해전이었다.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한창 싸울 때는 불가침 조약 운운하며 도움 하나 주지도 않더니, 다 조져놓으니까 뒤늦게 와서 자기 지분을 떼 가려고 하는''' 소련의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는 문제였다.[85] 그러나 결국 소련은 만주 작전을 계기로 만주까지 진출하였고 그 과정에서 청진과 같은 한반도 북부 일부 지역까지도 무장해제한다, 미국은 일본을 완전히 점령하고 뒤늦게 한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갈라먹게 되고, 이게 지금까지 내려져오는 것이다. '똑같은 전범국임에도 독일은 영토가 분단된 적이 있는데, 일본은 왜 분단되지 않고 엉뚱하게 한반도가 분단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이거다.[86] 물론 가능성이 있다 뿐이지 당시 소련이 만주 작전을 펼치며 남하하는 상황이었기에 한국이 분단을 피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87] 원폭이 투하되지 않았을 경우에 관한 보다 자세한 추측들은 몰락 작전 문서를 참조 바람[88] 731 부대에서 자행한 실험 중에 보병총 성능 실험은 사람 대신 송판으로 만든 허수아비에 옷을 입혀서 해도 되는 실험인데 굳이 실제 사람으로 실험했다.[89] 단적인 예시로, 그나마 남아있던 식민지를 모조리 잃어버린 추축국과 달리, 승전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끝나고도 식민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영국은 인도와의 독립 약속을 어기고 계속 식민지로 통치하려 했으니... 프랑스의 경우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알제리 원주민을 탄압하며 알제리가 원래부터 프랑스의 적법한 영토였다는 억지를 부렸고,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 도중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90] 그런데 이때 반대한 맥아더는 6.25 전쟁 때 만주에 핵을 떨군후 대만군을 중국 본토에 상륙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아마 원폭의 위력을 보고 난 뒤 생각이 바뀐 듯.[91] 트루먼 역시 분명 원폭에 민간인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고, 본인도 그것을 알기에 이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1945년 포츠담 회담에 대한 트루먼의 일기에는 그가 폭탄의 정치적 의미를 아주 분명히하고 일본이 항복하기 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있다. 즉 그는 폭탄이 전쟁 종결에 필수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92] 죽창과 책상으로 만든 화승총을 써서 맞서라고 하던 시기다.[93] 영토가 가늘고 길쭉한 모양이라 체감이 안되기도 하지만, 일본의 본토인 4개섬(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의 국토 면적은 오늘날 독일과 맞먹는다.[94] 외부 변수와 같은[95] 위에서 언급했지만 카이로 선언을 거부한다는 명백한 항복 거부선언이었다.[96] 이런 일이 발생한 건, 독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나치의 만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유대인을 떠올리지만, 600만 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에 비해 소련인은 2천만 명이나 죽었다. 그렇다보니 영미 연합군은 베를린 점령 당시 일부러 군대를 멈추고 소련이 가장 먼저 입성하도록 배려해 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우리가 소련에 한 것의 1/10만 소련이 우리한테 해도 우린 다 죽는다'라는 독일인의 말이 남아있을까.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엄청난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굴라그에 끌려가며 매우 고생할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5월 8일 주코프가 서명한 이 항복 조건은 일부 독일군이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로 전쟁 말기 독일 본토 방어전에서 특히 동부전선의 독일군들이 해당되는 부분이었으나 서부전선의 경우에도 예를 들면 전쟁 초기 동부에 있다 서부로 전속되어 싸운 자들과 전쟁 중 히틀러에게 찍혀서 예편되어 전쟁 말기에 지방에서 은신중였던 일부 장성, 원수들도 소련이 수배하는 인물이었다면 넘겨지곤 했다. 물론 소련군에게 인계된 독일군의 각급 포로의 숫자는 결코 적진 않았으나, 모두가 넘겨진 건 아니었다. 소련에서 특별히 수배하는 인물이 아니거나, 연합군의 직권으로 서방의 포로가 되었을 땐 종전 후 1948년까지 석방될 수 있었다.[97] 물론 국제법상 문제가 있었으므로 실제로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98] Gebiet은 "권역"이라는 뜻이다. 동의어 반복.[99] 원폭 개발자중 한명이며 당시 애놀라 게이의 파일럿중 한명이자 히로시마 버섯구름 사진을 찍었다.[100] 당시 원폭 뿐 아니라 나치 관련 문제도 있어 이것도 소속사 측이 입장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