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통신
[clearfix]
1. 개요
미국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규모[1] 의 비영리 뉴스통신사로 전세계적으로 최고의 통신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1917년 퓰리처상이 제정된 이후, 현재까지 54개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 상세
1846년 5월, 유럽에서 미국으로 유입되는 정보를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수집하기 위해[2] 신문사들의 합의로 항구뉴스협회(Harbour News Association)라는 이름의 미국 최초의 언론통신사가 만들어지게 됐고, 나중에 AP통신(Associated Press)으로 개칭됐다.
미국에 본부를 둔 신문사, 방송사라면 자격제한 없이 AP통신의 조합원이 될 수 있으며, 현재에 이르러 미국 내 대부분의 신문사와 방송사가 AP통신의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다.[3] 협동조합이기에 동등한 권리를 지닌 1,500여 조합원 신문사들과 방송사들에 의해 AP통신의 구조적 소유가 분산되어, 내부에서 보도의 방향을 좌지우지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또한 수익구조가 조합원 언론사들이 AP통신 기사 사용료 명목으로 AP통신에 지불한 비용만으로 운영되기에, 광고주와 같은 외부의 자본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언론의 본령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유의 분산과 제한, 자유의 원칙 등 협동조합의 고유한 특징이 언론사에 투영된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로이터, AFP, 연합뉴스, 교도통신, 신화통신, 타스, UPI 등과 더불어 흔히 들을 수 있는 뉴스통신사 이름이다.
AP통신은 기사 사용료가 유일한 수익원이고, 협동조합 형태의 비영리로 운영되기 때문에 낮은 전재료와 높은 취재료 등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에서 타 뉴스언론사들보다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서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소재에도 AP통신이 취재를 나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AP통신은 사실 보도의 관행으로 기자의 사견을 배제하고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하는 스타일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어, 정치적 경향에서 벗어나 언론으로서 객관성을 확보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본사는 AP통신발 기사가 프로파간다로 이용될 것을 우려해 원칙적으로 해외 국영/관영언론사와 기사 제공 계약을 맺지 않고 있고, 타 언론사들에 비해 매스미디어를 불신하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AP통신의 보도 공신력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4]
3. 역사
- 1849년: 항구뉴스협회[5] 는 미국 국외 지역인 노바스코샤(Nova Scotia)의 핼리팩스(Halifax)에 첫 해외 지국을 개설했다. 이는 유럽에서 오는 배가 뉴욕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한발 먼저 배에 승선하기 위함이었다.
- 1861년: 남북전쟁 취재 도중 검열에 직면하게 되자, 기자들은 바이라인[6] 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대신 AP라는 익명을 사용했다.
- 1876년: 스트링거이자 AP통신의 첫 특파원이었던 마크 켈로그(Mark Kellogg)는 리틀 빅혼 전투 취재 도중 살해당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사에 송고한 기사는 "나는 커스터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마크 켈로그는 취재 중에 사망한 최초의 AP통신 기자로 기록되었다.
- 1893년: 멜빌 E. 스톤(Melville E. Stone)은 AP통신의 총책임자가 됐다. 그는 1921년까지 이 자리에 있으면서 AP통신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통신사로 키워놓았다.
- 1899: 뉴저지주샌디훅에서 열린 미국 요트 경주 기사를 송신하기 위해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무선 전신 기술을 채용했다. 이는 신기술을 뉴스 테스트를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 1914년: 텔레그래프 와이어를 통해 전송된 기사가 바로 프린트되는 텔레타이프(Teletype)를 도입했다. 결국 1분에 60 단어를 송신하는 세계적인 텔레타이프 네트워크가 건설됐다.
- 1935년: 세계적으로 첫 사진 통신 서비스인 와이어포토(WirePhoto)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를 통해 첫 송신된 사진은 1935년 새해 첫날에 뉴욕 모어하우스빌(Morehouseville)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 사고 사진이었다.
- 1938년: AP통신은 뉴욕에 새로 건설된 록펠러 센터 50층에 새 사무실(이른바 50 Rock)을 개설했다. 이 사무실은 이후 68년간 AP통신의 본사 역할을 수행했다. AP통신 본사는 2004년에 맨해튼 33번가 450 W. 더 큰 건물로 이주했다.
4. 여담
'기사 작성 지침서'라고 불리는 AP스타일북은 AP통신 뿐 아니라 미국 언론들의 기사 쓰기 교본으로 통한다. 그중 AP통신이 개발한 역피라미드형 작성법은 점차 일반화되어 칼럼이 아닌 보도 기사의 경우 일반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2016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팀이 2020년 또 한 번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일반인들도 알법한 퓰리처상 사진 부문 유명한 수상작으로는 소녀의 절규, 6.25전쟁 무너진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 이오지마의 성조기 등이 있다.
유튜브에 동영상 뉴스 아카이브 서비스를 제공 중이며 채널 내에서 KOREA로 검색하면 대한민국과 북한의 오래된 과거 뉴스 자료도 시청이 가능하다.
[1] 한 때 로이터통신이 세계 최대 규모의 통신사였지만 규모면에서 현재는 역전되었다. 전세계 121개국에서 기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248개 지국을 운영하고 있다.[2] 이전까지 미국 전역의 신문사들은 유럽에서 온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기자들이 그 배에 올라타 유럽 승객들로부터 각종 정보를 수집하려 경쟁을 벌였다. 신문사 소유주들은 자신들이 똑같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과 한 회사를 만들어 수집한 정보를 공동으로 사용하는게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3] 미국 내 언론사들이 AP통신으로부터 AP통신의 기사를 제공받으려면 AP통신의 조합원으로 참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국 밖의 언론사들은 AP통신에 이용료를 지불하면 기사를 제공받을 수 있다.[4] 미국 뉴스공급 시장에서 AP통신과 경쟁 구도에 있던, 영리 조직적 성격으로 운영되며 스피드와 센세이셔널리즘으로 유명한 미국의 뉴스통신사 UPI와 대치되는 점이다. UPI는 흥미 위주의 기사들로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훗날 UPI는 가장 먼저 뉴스를 전해주지만, AP는 가장 먼저 정확한 소식을 전해준다는 대조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런 인식이 확산되고 결국 UPI 몰락의 원인이 됐다. 결국 흥미 위주의 심도 없는 뉴스 남발로 AP통신에 밀려 만성적인 경영난의 시작으로 1992년 파산한 뒤, 중동 자산가에게 매각되었고, 이후 2000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일명 통일교)계 미디어 회사인 뉴스 월드 커뮤니케이션스에 다시 한번 매각되어, 현재는 통일교 소유가 됐다. [5] AP통신의 전신이다[6] 기자가 기사를 마칠 때 "(언론사)의 취재기자 (이름)입니다" 라고 밝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