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46

 




1. 개요


'''제식 명칭'''
100식 사령부정찰기 (一〇〇式司令部偵察機(ひゃくしきしれいぶていさつき)
'''제식 기호'''
키46 (キ46) / Ki-46
'''영문명'''
Japanese Army Type 100 Command Reconnaissance Aircraft Mitsubishi Ki-30
'''연합국 코드명'''
다이나(Dinah)
Ki-46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이 운용한 정찰기로 100식사정,신사정 등의 약칭으로 불리웠다. 고고도에서 적진에 침투해 정찰을 강행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현대의 강행정찰기와 비슷한 개념을 가졌다.

2. 제원[1]


'''운용 국가'''
[image] '''일본 제국'''
'''운용 집단'''
일본 제국 육군 항공대
'''제조사'''
미츠비시 항공기
'''개발 시기'''
1937년 12월
'''초도 비행 시기'''
1939년 11월
'''생산 시기'''
1938년 1월
'''승무원 수'''
2명
'''전장'''
11.00 m
'''전폭'''
14.70 m
'''전고'''
3.88 m
'''주익 면적'''
32.0 m²
'''자체 중량'''
3,263 kg
'''최대 중량'''
5,050 kg
'''엔진'''
하102 공랭식 엔진, 1.080마력
'''최대 속도'''
5,800 m에서 604 km/h
'''순항 속도'''
400 km/h
'''항속 거리'''
2,474 km
'''실용 상승 한도'''
8,570 m
'''상승률'''
8,000 m까지 11분 58초
'''무장'''
7.7mm 선회기관총 1정
'''사진기'''
100식 대항공사진기, 96식 소항공사진기
'''무선기'''
99식 비2호 무선기
'''생산수'''
1,742대

3. 상세


중일전쟁 전역에서 97식 사령부정찰기[2]를 운용하고 있던 일본 육군은 97식사정의 전과에 고무받아 재빨리 후계기의 구상에 착수했다. 육군이 미츠비시에 요구한 사양은 고도 4000km 이상에서 순항속도 400km/h 이상으로 최대 6시간 체공이 가능하고, 600km/h까지 최대속도를 낼 수 있는 공냉식 엔진 복좌정찰기였는데, 당시 시점에서 600km/h까지 낼 수 있는 항공기를 만들라는 것은 매우 빡센 조건이었다.
하지만 강행정찰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 외에는 별 다른 잡다한 조건이 붙지 않았기 때문에, 미츠비시 측은 고고도 고속 장거리 정찰능력에만 모든 것을 집중해서 신형 정찰기 개발에 착수했다. 시작기는 1939년 11월에 초도비행에 성공했고 1940년 8월에 테스트가 완료되어 9월 하순부터 제식화에 들어갔다. 테스트 시점에서 Ki-46은 상용고도에서 540km/h까지 낼 수 있었는데, 이미 이 시점에서 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Ki-43 1형과 제로센 21형을 뛰어넘는 스피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4. 사양


  • K-46-II
1941년 3월부터 제작에 들어가 1942년 6월 제식채용된 사양. 엔진을 기존 하26에서 하102[3]로 교체했으며 고도 5,800m에서 최대 604km/h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비행성능 외에도 무선기와 사진기가 개량되었으며 익면하중의 증가로 인해 이륙거리와 실용상승한도는 다소 저하되었다.
  • K-46-III
등장 초기에는 획기적인 속도와 고고도 항속능력을 보유한 K-46이었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연합군 쪽에서도 속도와 고도를 따라잡을만한 전투기들이 나오고 있었다. 때문에 육군은 1942년 5월부터 기존의 II형에서 보다 최대속도와 항속능력을 향상한 III형의 개발에 착수했다. III형은 기존 엔진보다 출력이 높은 하112-II[4]로 엔진을 교체했고, 공기저항을 낮추기 위해 엔진 덮개와 캐노피도 재설계했다. 또한 기수부에 내장 연료탱크를, 기체하부에 추가 연료탱크를 증설해 항속거리의 증가를 꾀했다. 낙하형 추가 탱크까지 장비했을 경우 III형은 기존의 2,400km를 훌쩍 뛰어넘는 4,000km까지 비행 가능했다.
III형은 6000m에서 최대속도 630~642km/h를 낼 수 있었는데, 2차대전기 일본 전투기의 완성체였던 Ki-84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속도였다. 실용상승고도도 8,000~10,000m로 올라갔지만 캐노피 유리의 시계가 왜곡되거나 난반사가 일어나는 단점도 있었다.
  • 무장형
전쟁 후기에는 Ki-46-III의 고고도 성능을 살려 기관포로 무장한 고고도전투기로 운용되기도 했다. 이럴 만도 한게 1943년 시점에서 일본 군용기 중에서 III형만큼 고고도에서 건실하게 비행할 수 있고 실전을 통해 검증된 물건은 거의 없었다. 당장 B-29 요격에 필요한 고고도전투기가 필요한 일본 입장에서는 적어도 고고도 비행능력만은 검증된 III형이라도 일단 개장해서 써 먹어 봐야 했다.
무장형은 1944년 6월부터 등장했는데 기수에 20mm 기관포를 장착한 III형을(乙), 기체 상면에 37mm 기관포를 추가 장착한 III을+병(乙+丙)형이 출시되었고 총 90기가 생산되었다. 이로 인해 기존 정찰기 사양은 III형갑(甲)으로 명명되었다.
이들 무장형은 소수가 시험배치되어 B-29 1기를 격추시키기도 했으나 정찰기라는 태생적 한계상 고전을 면치 못했다. 처음부터 고속비행에 모든 것을 건 설계다 보니 B-29의 기총 화망도 피하거나 버티기 힘들었고 P-51 머스탱 같은 호위기라도 따라붙는 날엔 초상을 피할 길이 없었다. B-29가 중 저고도 폭격으로 전술을 선회하고 Ki-84가 요격기의 자리를 차지한 뒤로는 무장 기체들도 다시 정찰 임무로 돌아갔다.
  • K-46-IV
터보 차저가 엔진을 장착한 최종 개량형. 4기만 생산되고 실전에는 투입되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했다. 시제기의 경우 1945년 2월 북경부터 도쿄에 이르는 2,250km의 거리를 평균시속 700km로 주파한 이력이 있다. 다만 이 때는 편서풍의 덕을 봤다.

5. 실전


정찰기로서의 요구조건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한 일본 육군의 걸작으로, 고고도/장거리/고속 비행능력에 한해 당시 일본의 항공기술을 끝까지 쥐어짜내 만든 물건이었다. 중일전쟁부터 남방작전, 태평양 전쟁 전 구역에 걸쳐 충실히 활약했다. 남방작전 당시 연합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이 녀석이 하늘에 보인다는 것은 곧 일본군이 우르르 밀려온다는 전조였기 때문이다.
의외일 수 있지만 해군도 육군 정찰비행대를 지휘체계에 두는 식으로 이 기체를 잘 써먹었고, 나중 가면 기체를 해군항공대에 도입해서 정찰 및 기상관측, 전과확인용으로 활용했다. 해군 정찰기는 생각보다 사정이 좋지 못해서 주력으로 쓰던 C5M의 경우 Ki-46의 이전 기체인 Ki-16의 해군형 모델이었다. 함상정찰기인 C6N 사이운은 1943년에야 나왔으며 2식 육상정찰기의 경우 1942년 후반에야 나왔고 정찰에 특화된 성능도 아니었다. R2Y 케이운의 경우 전쟁 내내 개발이 지지부진하다 갈아엎어졌기 때문에 육해군 간의 앙금이고 뭐고 간에 융통성을 발휘해서 상부상조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무장 정찰기로서는 활약이 미미했는데 정찰기라는 태생적 한계에 고고도 성능 하나만을 믿고 급조되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6. 기타


현재 남아 있는 기체는 영국 왕립 공군 박물관 코스포드관[5]에 전시되어 있는 1기가 유일하다.

7. 미디어



[1] K-46-II 기준[2] 제식 기호 Ki-16. 약칭 97사정, 97사정[3] 해군의 수성 엔진 계통에 해당된다.[4] 해군의 금성 엔진 계통에 해당된다.[5] 런던관이 아닌 슈롭셔주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