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1 머스탱
'''North American P-51 Must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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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D/K'의 앞글자 P는(Pursuit)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이 군용기의 명명규칙을 개정하면서 앞글자를 F(Fighter)로 변경하면서 'F-51D/K'가 되었다.
참고로 P-51B/C형은 같은 물건이다. 정확히는 B형은 P-51A형을 제작하던 잉겔우드 공장에서 제작되었고, C형은 라이선스를 받아 텍사스 주의 댈러스 공장에서 제작한 것이 차이점이다. 또한 P-51D/K형도 구분법이 동일한데 잉겔우드 제작은 D형, 댈러스에서 제작한건 K형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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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형은 머스탱이라는 이름만 있었고, 주로 영국에 판매하기 위하여 생산되었다. 장착된 엘리슨 V-1710 엔진(Allison V-1710)이 4000m 이상에선 출력이 떨어져, 본 개발 목적인 중폭격기 호위에는 사용되지 못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머스탱이 용솟음처럼 솟아오르게 만든 그 멀린 엔진도 기존의 엔진보다 고공성능을 강화시킬 수 있는 2단계 슈퍼차져 장착에 애를 먹고 있었고[3] , 덕분에 스핏파이어 Mk. V 가 Fw 190 에 고전하고 있던 상황이기도 하다. 어쨋든 고공 성능이 필요했던 미군은 이미 고공전투용으로 제작한 P-47이 있기도 했기에 고공전투기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대신 영국군이 이 기체에 12.7mm 6정 대신 20mm 히스파노 4문 혹은 12.7mm 2정과 0.303인치 4정을 달아 운용하기도 하였다. 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특유의 많은 폭장량과 기체 안정성, 내구도를 이용해 공격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20mm 히스파노 기관포 4문을 장착한 초기형 머스탱은(A형이 아님) 북아프리카 작전에 정찰기로 투입되었다(111전술정찰비행대대와 154관측비행대대).
이후 잔여 생산분은 P-51이라는 제식명칭과, A형이라는 형식을 받고 12.7mm 4정과 드롭탱크 파일런을 장착하였으며 CBI전선에 투입되었다.
초기형 P-51의 딸리는 엔진출력과 특유의 둔한 기체성능이 맞물려 공대공전투에선 제 역할을 못하자 대지공격용 항공폭탄을 장착할 수 있는 파일런을 달고 에어브레이크를 추가해 CAS및 공격기로 개조한 사양이다. 위 사항을 빼면 초기형 P-51과 거의 같다. 무장은 기수에 2정의 12.7mm 기관총과 주익에 4정의 12.7mm 기관총을 장착하며 중량감소를 위해 주익의 기관총을 제거한 경우도 있다.
훗날 이름이 AH-64에 계승된다.
P-51A에서 롤스로이스 멀린(Rolls-Royce Merlin) 엔진 교체를 비롯하여 조종석 후미 공간에 자동 방루 연료 탱크를 장착하고 외부 추가 연료 탱크를 장착한 개량형으로 '''항속거리(2,700km)'''도 무지막지하게 길어졌으며 최대속도는 80km/h 이상 증가하면서 700km/h 이상이라는 빠른 속도를 기록한 데다가 해수면 고도에서조차 600km/h 이상을 달성했다. 이후 P-51D/K형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개조키트 또한 제공되어 많은 수가 P-51D/K로 개조를 받게 된다. 자세한 성능은 하단 후술.
B형과 C형은 생산공장의 위치와 프로펠러 정도의 차이만 있다.
C형은 초창기 북극 유럽 항로를 개척한 기종이기도 하다.
2차대전 종전 후 민간에 불하된 머스탱은 주익에 연료 탱크를 넣는 등의 개조를 거쳐 에어 레이스용 기체로 활약했는데, 1951년 5월 29일, 2차 대전 참전 용사이자 당시 PWA사 소속 파일럿이었던 찰스 F. 블레어 씨는 이 에어 레이서로 개수된 C형 머스탱인 "엑스칼리버 3호"를 타고 노르웨이 바두포스를 출발해 알래스카 페어 뱅크스까지, 10시간 27분간의 무착륙 단독 비행에 성공한 것.
찰스 F. 블레어 씨는 지구 자기장의 영향으로 정확성이 떨어지는 나침반 기반 항법 대신 미리 정해진 위치와 시간에 태양선을 표시하는 방식의 항법을 고안해 무착륙, 무통신으로 자신의 북극 항로 비행을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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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7 썬더볼트와 함께 2차대전 중 다목적 전투기로 널리 쓰였다. 특히 전투기임에도 많은 폭장량을 가져 폭장을 달고 CAS기로 운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두리틀 장군의 명령 덕분. 당시에는 폭격기 편대에서 호위기들을 묶어두지 않고 풀어두는 전술이라 논란이 있었으나, 도리어 이 전술로 독일 공군의 전략은 엉망이 된다. 그나마 폭격기 편대 따라가면 몇 대는 부수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운 좋으면 슈바인푸르트 폭격 때 처럼 상당한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이제는 그냥 지상에서 다 터져나가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게다가 연료와 탄약이 없으면 전투기 뿐만 아니라 전차나 보병단도 제대로 작전을 할 수 없게 되므로 도리어 전략폭격의 목적 또한 달성하게 되는 전술이었다.
이후에 주방위군 공군 및 예비물자로 돌려졌는데, 대한민국 공군이 처음으로 운용한 전투기가 되었다. KBS 다큐에서 다룬 한국 공군 F-51의 활약상
여튼 이 때 영국서 전수받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체를 전반적으로 재설계한다. 덕분에 기존에 과도하게 설정되었던 규격을 줄여 랜딩 기어, 연료 탱크 등을 소형화 및 경량화시키고, 조종석 위치 전방으로 변경 및 크기 확장, 수직꼬리날개 디자인 변경, 프로펠러도 가벼운 것으로 교체, 엔진도 V-1650-9로 교체하여 Manifold Pressure를 최대 120 inches Hg로 늘리는 업그레이드도 진행한다. 이 덕분에 P-51의 '''고질적인 저속 비행시 불안정성이 해결'''되었으나 항속거리는 오히려 20% 정도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정작 배치되는 시기가 45년 7월부터라 몰락작전에나 투입할 상황이었지만 이 작전은 취소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도리어 투입되지 않다가 알래스카 주 방위군이 굴리게 된다.[6] 한때 미 해군에서 저속 비행 문제(특히 착함에는 저속 비행 성능이 안정적인 게 중요하다)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고 도입하려 했으나 이미 2차대전은 끝나버렸고 제트기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위의 영상은 복구한 기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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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H의 파생형[7] 으로 P-51H의 동체를 개조한 것을 두 개 연결하였다. 최초 개발은 태평양 전쟁 중 B-29의 전체 항정을 호위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개발이 지연되어 태평양 전쟁에는 투입하지 못했고, 6.25 전쟁에 미 공군이 투입하면서 북한군의 Yak-9을 격추하여 6.25 전쟁 최초의 공대공 격추기록을 세운 항공기이다. 이후 야간 전투 및 장거리 호위/정찰용으로 사용되었다. 조종사도 두 명이며, 두 명의 조종사가 돌아가며 밥도 먹고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재밌는 점으로, 전후 멀린 엔진의 라이선스 생산 비용이 증가하자, P-82C 모델 이후부터 앨리슨제 V-1710 엔진을 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는 엘리슨에도 제대로 된 과급기가 설계되어 있었기에 고고도 성능은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1940년 4월 자국 항공기 생산력만으로는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에 대항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영국은 미국에 구매단을 파견하여 좀 쓸만한 미제 전투기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전투기는 성능에서 Bf109에 미치지 못하는 P-39 에어라코브라, P-40 워호크나 F4F 와일드캣 정도 뿐이었다.
영국 구매단은 P-40을 계약한 뒤에 개발 회사인 커티스 사의 제조능력 부족 때문에 라이선스 생산해줄 회사를 찾다가 노스 아메리칸 사[8] 를 방문해서 "커티스 사의 생산 능력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P-40 좀 같이 생산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이 말에 제임스 킨델버거 사장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은 물론이다. 심기가 불편했던 킨델버거 사장은 당시 주임 설계기사였던 에드거 슈미트에게 가서 이렇게 질문했다. "영국 신사 양반들이 우리더러 P-40을 만들어 달라는데?" 사장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던 슈미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하의 영국 공군이 구닥다리 설계의 P-40이나 써서야 되겠습니까? 여기 제 책상에 제가 수년동안 혼신의 공력을 들여서 설계한 전투기 설계도가 있습니다. 이걸 영국 구매단에게 제안해 보면 어떻겠습니까?"[9]
사장은 좋아라 하고 설계도를 들고 바로 영국행 비행기에 올라 영국 공군에 역제안을 하게 된다.
사실 설계기사였던 에릭 슈미트는 오래 전부터 최고 성능의 전투기를 개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몇 년동안 혼자서 전투기 설계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최고 성능을 목표로 했기에 당시 최신 기술인 층류익[10] 이나 마이너스 항력(즉 추력)을 유발하는 라디에이터 흡기구 등을 설계에 통합시켰고 결국 당대 최저의 항력계수 0.0169를 가진 기체를 설계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영국 구매단은 P-40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국과 협의를 마친뒤에 P-40보다 좋으면 즉시 400기 구매, 아니면 계약은 무효라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에릭 슈미트가 예전부터 만들어온 전투기 설계를 바탕으로 117일만에 모든 면에서 P-40을 능가하는 신형 전투기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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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 중 사고난 NA-7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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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프로토타입인 NA-73X와 XP-51의 모습
이 성능에 만족한 영국 공군에서 320대를 머스탱 MK.I 이라는 이름으로 발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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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형의 모습, 엘리슨 엔진의 구조 덕분에 공기 흡입구가 프로펠러 기동축 위에 달려 있다.
P-40에도 사용된 엘리슨 엔진을 장착한 초기형(A형)은 저고도에서는 당대의 독일 전투기보다 우수했지만[11][12] 고도 4000m만 올라가도 성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영국 공군은 머스탱을 지상공격이나 저고도에서 적 공격기를 쫓아내는 정도로만 사용했다. 혹은 정찰 장비를 장착해 고속 정찰기로 사용했다. 물론 지상 지원용으로 사용된 모델은 히스파노 4정을 날개에, 50구경 2정을 카울링에 장착하여 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미군도 2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영국군을 위해 개발된 전투기니 미군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것라면서 흥미를 못 느껴 거의 방치해두었다. 1년 가까이 방치되어있다가 나중에 머스탱을 가지고 공압식 기관총 급탄장치를 시험해보던 테스트 파일럿이 말하라는 급탄장치 이야기는 안하고 기체 이야기만 하면서 '저고도에서는 미친 것 같다.'라고 보고를 올렸는데도 별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진주만 공격 후 2차대전에 참전하자 전투기 1기가 아쉬웠던 미국에게 저고도 비행성능을 인정받아서 미 육군 항공대는 급강하용 에어 브레이크를 다는 등의 마개조를 통해 공격기 A-36 아파치로 채용했다. 아파치는 영국 공군에도 채용되어 Mustang Mk. I (Dive Bomber)라고 명명된다. 이 물건은 50구경 6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에서도 아파치라는 이름은 얼마 안 가 머스탱으로 바뀌었고, 원본의 경우, 엔진을 고성능 엘리슨으로 교체하고 20mm 캐논만 4정을 장착해 사용했다. 비행 성능을 높이기 위해 개량을 거친 모델은 무장을 50구경 4정으로 다운그레이드하여 영국군에 Mustang Mk. II라는 이름으로 채택된다.
머스탱의 성능을 높이 평가했던 영국 공군 기술진들은 "내가 살펴봤는데 이번에 들어온 미제 전투기가 상당히 좋은 것 같아. 그런데 고도만 올라가면 힘을 못 쓰는데 한번 엔진을 바꿔보면 어떨까?"[13] 해서 당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DH-98 모스키토 등에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롤스로이스 멀린61 엔진을 달아보았다.[14] 그 결과 머스탱은 '''완전히 다른 전투기가 되었다.''' 특히 최대속도는 80km/h 이상 증가하면서 700km/h 이상이라는 빠른 속도를 기록한 데다가 해수면 고도에서조차 600km/h를 넘기는 등 훌륭한 능력을 지닌 전투기가 만들어진 것. 이로써 머스탱의 문제는 설계가 아니라 고고도 활동을 상정치 않고 개발한 미국 수냉식 엔진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어가야 할 것은 영국도 사실 고공 성능에서 상당한 고전을 하던 중이었다. 특히 FW190이 등장한 이후, 스핏파이어 Mk. V가 도망쳐야 할 상황에 놓이기까지 했으며 당연히 이 때문에 멀린 엔진을 분사식으로 개량하고 2단계 이상의 슈퍼차져를 장착할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러다 미국에서도 고공 성능이 필요한 머스탱 설계자들을 만났고 서로 기술교류를 하면서 결국 직렬 2단 슈퍼차져가 달린 멀린 엔진 개발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즉, 갑자기 머스탱에다 영국제 엔진만 딱 달았다고 날아다니는 물건이 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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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문제의 미제 엘리슨 V-1710 엔진.
엘리슨 엔진은 단발기에서는 보통 공간이 부족해서[15] 1단 슈퍼차저 밖에 장착할 수 없다는 제약으로 인해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는 성능이 매우 떨어졌다. 예외적으로 1단 터보 + 1단 슈퍼차저의 구성이 가능했던 P-38 라이트닝과 1단 슈퍼차져, 1단 터보슈퍼차져를 장착한 P-47은 설계 자체부터 고공 추격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라 제대로 된 고고도 성능을 낼 수 있었다.[16]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전장 상황에 따라 고고도에서의 운용이 필요한 경우도 많고 또한 이 엔진이 제 성능을 발휘하는 저고도에서만 운용하면 표적고착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원래 지상공격 중 입사각이 낮거나 빠른 속도로 인해 급강하 후 고도 회복을 못하고 그대로 추락해버리는 것을 표적고착이라고 하며 모든 비행기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는 프로펠러기든 제트 전투기든 가리지 않고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P-51은 동체가 워낙 무거워서[17] 2,000피트 이상으로 고도를 충분히 잡지 못하면 그대로 추락한다. 물론 표적고착은 고도만 잘 잡으면 일어나지 않는 매우 기초적인 실수라서 보통은 일어나지 않지만 저고도로만 날아다니면 한번의 실수로도 충분히 걸릴 수 있다.[18]
때문에 일정 고도 이상 높은 고도에서 활동해야 안전한데, 이럴 경우에는 당시 엘리슨 엔진이 급격하게 힘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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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이 개량형에 장착된 영국제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으로 미국에서는 패커드 사에서 V-1650이라는 이름으로 면허생산했다.#
멀린 엔진으로 장착한 시험 결과를 전해 들은 노스 아메리칸 사는 성능 향상에 대단히 기뻐했으며, 영국 공군은 지름신이 강림하여 멀린 엔진 탑재형 머스탱을 머스탱 Mk.III로 명명하고 무려 1000대나 주문했다. 그러나 가장 기뻐했던 건 사실 미군이었다. 급작스럽게 전쟁을 맞이해보니 장거리 폭격기 호위기가 급필요하게 되어 고민하고 있었는데,[19] 갑자기 세계 최고의 성능을 지녔을 지도 모르는 자국산 전투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이었다.[20]
P-51B형부터는 엔진의 교체로 속도의 향상 이외에도 조종석 후미 공간에 자동 방루 연료 탱크를 장착하고 외부 추가 연료 탱크를 장착하니 '''항속거리(2,700km)'''도 무지막지하게 길어졌다. 덤으로 머스탱의 순항속도는 443km/h. 이는 항속거리가 길기로 유명했던 일본군의 후기형 A6M(외부 연료 탱크 추가시)보다도 무려 100km 이상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초기형 제로센의 항속거리 3,300km(외부 연료 탱크 장착시)도 200km/h의 순항속도로 달성한 것이고 이조차도 전력출력의 상태로 비행하면 머스탱보다 더 숏다리가 된다.[21]
덕분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는 물론, 쌍발기인 P-38 라이트닝이나 항속거리를 억지로 잡아늘려도 2,000km에 불과했던 P-47 썬더볼트보다 더 효율적으로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원래 P-51 등장 이전까지는 연합군 기종 중 그래도 항속거리가 제일 길었던 P-47이 폭격기 호위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그러나 P-47도 프랑스-독일 국경 즈음 와서는 폭격기 대열과 작별(?)하고 기지로 귀환해야 했으며, 당연히 Bf109, Fw190 등 독일 전투기들은 이 때를 기다렸다는듯이 폭격기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폭격, 특히 미군의 주간폭격이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도 멀린 엔진의 라이선스를 롤스로이스 사로부터 부랴부랴 사온 후 해당 엔진 탑재형 머스탱을 생산하여 P-51B/C로 제식채용했다. 그러나 P-51B 배치 직후 미 육군 항공대는 A-36 시절의 떨어지는 고고도 비행 성능 때문에 의구심을 버리지 못해서 지상 공격부대에 우선적으로 배치하였다. 이후 폭격기 호위임무에 P-51B을 한 번 투입해보니 그야말로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최우수 클래스의 속도와 호위기치곤 괜찮은 비행성능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폭격기를 요격하기 전에 우선 호위로 붙은 머스탱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나 적당한 성능에 확실한 수적 우세로 밀어붙였기에 독일 공군이 머스탱을 압도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 당시 독일 상공을 수비하던 독일군의 전투기는 폭격기만 상대하면서도 상당한 출혈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항로 내내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가 따라붙게 되자 요격 난이도는 삽시간에 지옥불이 되었다.
한 가지 특이사항으로 물방울형 캐노피를 도입하기 전인 P-51B/C형 머스탱은 그 외형이 독일의 Bf109와 유사했다. 실제로 멀리서 보면 식별이 어렵다는 말이 자주 들려왔는데 이 때문에 P-51의 기체설계를 독일 회사에서 Bf109 관계로 일하다 미국으로 망명한 기사가 했다는 루머가 생겼다. 이 루머가 마치 사실인양 퍼져 있기도 한데 사실 에드거 슈미트(Edgar Schmued) 주임설계기사가 독일에 살다가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이긴 하지만 Bf109와는 관계없던 사람이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따지면 독일계 미국인은 다 체포해야 한다(일본인이었다면 행정명령 9066호에 적용됐을 것이다).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독일계 핏줄이 섞인 사람이 미국 백인 인구의 반이다.[22]
헷갈릴 정도로 유사한 외형은 전장에서 P-51 잔혹사를 만들어냈다. 잘 비행하는 중인데 아군 대공포가 사격한다거나 혹은 전장에서 아군 전투기, 심지어는 호위대상인 폭격기의 방어기총사수들까지도 적기로 착각하여 쏴버릴 정도였으니 이로 인해 아군오사에 고통받기도 했다(물론 반대로 Bf109가 P51으로 오해받아 팀킬당하는 경우 역시 다분했다).
유명한 일화 중에는 한참 독일 본토 폭격이 진행중일 때 폭격기의 기총사수가 신나게 기총을 쏘다가 실수로 아군 호위기 P-51을 격추시키는 사고를 터뜨렸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기총사수는 "아이고 맙소사 난 이제 죽었어"라 외치며 이걸 어떻게 변명해야될지 머리를 쥐어뜯다가 에라 모르겠다라며 당시 요격용으로 별로 쓰이지도 않았던 Bf109E형으로 격추보고를 올려버렸다. 그런데 다른 폭격기의 기총사수가 Bf109E 격추가 맞다고 증언해주는 바람에 적기 격추로 기록된 적도 있었다.[23][24] 수뇌부에서도 아군 오인사격을 막아보자고 독특한 줄무늬를 그려 넣었고 나중에는 아예 도색이 안된 기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은빛 무도장 간지는 P-51의 상징이 됐다. 미군 외에 일본군 전투기들도 나중에는 무도장 기체들이 나왔는데 이쪽은 페인트까지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한 짓이다.
P-51의 도장제거는 경량화를 통한 기동성 향상의 목적도 있었으며 비슷한 이유로 1944년 이후로 생산되는 모든 전투용 항공기는 별도의 도장 없이 항력감소를 위한 왁스처리만을 하고 출고되었다. P-51의 경우 시험 비행에서 페인트 제거만으로 시속 23마일 정도의 속도 향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속도는 매우 우수했으며, 전투기로서의 선회성능이나 지속상승률 등도 평타는 쳤다. 다만, M2의 화력이 다소 빈약하고 급탄 불량이 자주 일어나며 후방 시야가 불량하다는 단점도 지적되었다. 이 캐노피의 경우 여닫는 방식이 약간 복잡해서(단순히 앞뒤로 미는 게 아니라 옆면과 윗면을 각각 열어야 했다) 탈출시 애로사항이 많았고 키가 큰 조종사들에게도 문제였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에 장착했던 말콤 후드를 가져와 마개조한다. 영국은 대부분 이걸로 바꿨고 미국은 몇몇 비행대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운용하다 D의 버블 캐노피로 갈아탄다. 때문에 물방울형 캐노피가 도입된 P-51D형(영국명 머스탱 Mk.IV)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처럼 반쯤 버블 캐노피 형상을 가지도록 개량되기도 했다. 이를 말콤 후드라 부른다. D형이 대세가 되고 이 B/C형을 D/K형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개조키트 또한 제공되어 많은 수가 개조를 받게 된다. 덕분에 숫자는 P-51D가 많았으며 이것이 P-51로 널리 알려진 모델이기도 하다. 실루엣의 개성이 확실해진 덕분에 오인사격 문제도 대폭 줄어들었다. 비슷한 개량은 P-47 썬더볼트에도 적용되었다.
그 결과 P-51D형은 약 8,000대 가량 생산되면서 P-51계열 중 가장 많이 생산된 모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실질적으로 활약을 시작한 게 1943년 11월 경이니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동안 P-51 계열기가 파괴한 적기는 공중전에서 4,950대, 지상파괴 4,131대에 달한다.[25] 단적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던 독일 공군의 소티 수는 1944년에 1만대를 겨우 넘겼던 반면 같은 기간 미 육군 항공대의 소티 수는 60만에 달했다. 이 당시는 전공 보고의 경우 도리어 독일 공군의 보고를 믿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미국쪽 자료를 참조하는 게 더 신빙성이 높다. 이 시기 독일은 독소전의 영향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고 심지어 마지막 반격(?)이라고 수행했던 시타델 작전도 쫄딱 말아먹어 서쪽으로 패주하던 상황이다. 즉, 44년의 독일군은 전쟁 초반부의 전격전으로 유명한 그 독일군이 아니고, 철십자 훈장 남발하던 독일군이었으니 도리어 신빙성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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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맥닐 육군 항공대 기지에 배치된 P-51D형, 출처
P-51D형은 주무장인 50구경 기관총이 B/C형의 4정에서 6정으로 늘었다. 물론 독일의 20mm 기관포인 MG 151보다는 위력이 약하지만 높은 발사율과 곧은 탄도, 신뢰성 등이 좋아서 B-17 같은 중폭격기를 상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화망을 순식간에 칠 수 있는 M2 중기관총이 전투기 상대로는 충분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여기에 기총의 배치형태 등을 수정, 종종 발생하던 기총의 탄걸림으로 인한 작동불능 상태를 막았다. 이 점이 개선되지 않은 종전의 P-51B~C형은 종종 기총 2, 3정으로 싸우게 되는 일도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화력증대는 더 컸다. 이 외에도 연료 탱크 용량이 늘어났으며 기타 몇 가지 부분이 개량되었다.
전체적으로 늘어난 중량 때문에 기동성이나 최대속도는 P-51B/C보다 약간 떨어지게 되었으나 엔진 세팅을 변경할 수 있게 되면서[26] 중-저고도 성능이 필요한 경우에도 대응이 가능했으며 강한 화력과 좋은 시야 때문에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P-51D를 선호하였다. 물론 일부 조종사들은 그래도 속도/기동성이 뛰어난 P-51B/C를 더 선호하기도 했다. 나중에 P-51B/C도 말콤 후드라는 측면이 불룩 튀어나온 캐노피를 사용하여 후방확인이 쉬워지고, 기총문제를 해결하여 기총고장 문제를 줄이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D형을 더 선호한 가장 원인은 수직 꼬리날개 디자인 변경으로 착륙 시 불안정성이 그나마 좀 덜해졌다는 것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D 후기형에는 자이로를 채택한 K-14 자이로 조준기가 장착되었다. 조종사들끼리는 통칭 '에이스 메이커'라 불리웠는데, 자이로 장치와 연동되어 예측 사격을 도와주는 흠좀무한 물건이었다. 기본적으로 조준선정렬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져 기계식 조준기보다 빠른 조준이 가능하고, 적기의 크기와 이동속도에 맞춰 레티클 크기가 조절되므로 탄도계산을 할 필요가 없이 직관적으로 예측이 가능하므로 리드샷을 쏘기에도 매우 유리하다. 탄도컴퓨터라든지 레이더 연동 조준기가 없던 당시로서는 일종의 수동식 탄도컴퓨터이자 '''에임핵'''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당시 외계인 고문에 특화되었던 독일군도 이런 장치는 양산기에 장착하지 못했다.[27] 독일이 자이로 조준기를 채택한 것은 Ta152인데, 이건 양산기였지만 워낙 늦은 1944년 12월에나 양산체제로 들어가는 통에 양산기 취급도 못받는다. Ta152가 양산 체제에 들어갈 정도로 독일이 버틸 수 있었다면 그 세계의 독일은 최소 다른 세계의 독일일테니 깊게 들어갈 필요는 없다.
P-51D의 연료를 반 정도로 계산해보면 도리어 수치상으로 Bf109 G-6와 호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선회율 및 상승률을 시뮬레이션해본 수치[28] 를 보면 매우 느린 속도가 아닌 이상 호각이다가 빠른 속도로 갈수록 P-51D의 성능이 더 나은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독일군은 MW50이 달린 G6/AS형을 얼마 생산하지도 못 했으며 생산했다 하더라도 사실상 저급 옥탄가 연료(그나마 기본 95를 써야 하는데 당시 원유 공급 사정이 좋지 않아서 89, 87까지 내려갔다)를 사용했으므로 150 옥탄가를 사용하는 머스탱을 따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TD7DqXfRno
P-51은 의외로 자잘한 문제점이 많았다.
P-51 계열기 전체는 장거리 호위기인 만큼 다량의 연료를 싣는데, 이 연료 탱크의 위치 문제로 동체의 균형이 비행시간 동안 극심하게 변화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이러한 문제점은 조종석 뒤 연료 탱크가 신설된 B/C 후기형과 D/K형에서 심했다. P-51의 엔진은 스핏파이어와 같은 계열임에도 스핏파이어와 비교하여 넘사벽의 비행거리를 보여준 것은, 그 자체의 공기역학적 설계가 출중하였던[29] 탓도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연료적재량이 엄청나서였다.
P-51B/C 초기형과 P-51B/C 후기형 이후부터는 주익 중앙 부근과 조종석 바로 뒤 후방에 연료 탱크가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꽤 위험한 자리이지만[30] 이 문제는 연료통에 구멍이 나면 자동으로 막히는 자동 방루식(Self Sealing) 설계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조종석 후방의 연료 탱크에 연료가 25갤런 이상 남아있으면 P-51의 무게중심을 지나치게 뒤로 옮기기 때문에 기체가 불안정하여 조종사가 조종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일단 이륙과 순항이야 지속적인 트림 조절로 해결할 수 있지만, 운 나쁘게 비행 특성이 최악일 경우 공중전이 벌어지면 조종사는 행여 불안정해진 기체 탓에 실속이나 하지 않을까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다른 전투기들은 장거리 작전을 위해 외부 연료 탱크를 달게 되면 일단 이 외부 연료 탱크의 연료를 먼저 써버린 다음 동체 내부의 연료를 썼지만, P-51 조종사들은 조종석 후방 연료 탱크를 최우선적으로 써서 작전지역에 도달할 때 즈음에는 조종석 후방 연료통이 다 비도록 했다.
특히 '''P-51의 수랭식 엔진'''은 평소에는 신뢰성 높아서 잘 작동하지만, 튼튼한 다른 부위와 달리 이 엔진은 한 발이라도 피탄될 경우 냉각수 유출로 순식간에 엔진 과열 크리가 작렬한다. 이럴 경우에는 회복이 불가능하여 조종사들은 엔진이 피탄될 경우 엔진을 정지시켜야 했었다. 물론 같은 엔진을 장착한 스핏파이어도 같은 문제를 일으켰으니 이건 머스탱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상대해야할 독일의 DB 601/605나 BMW 801 등은 엔진이 피격당하더라도 내장된 기계장치가 자동으로 엔진을 컨트롤하여 가능한 무사히 작동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걸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러나 독일 기체의 경우도 피탄당하면 엔진 출력이 떨어져 날으는 굼벵이가 된다는 점은 동일하므로 엔진 내구성 자체로 독일기보다 문제가 심했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독일기의 경우는 본토 방공전이었던 상황상 엔진이 그야말로 바로 멈춰도 탈출하면 아군 상공이었지만 머스탱은 그게 아니었으니 포로로 잡히거나 운 좋아도 목숨을 걸고 제3국 경유해서 탈출해야 하는 등 고초를 겼어야 했다. '''그리고 이게 정말로 치명적인 문제였으면 지상공격기로 전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걸 다 제껴두더라도, '''저속 비행시 불안정성'''은 매우 심각한 결점이었다. 이 문제가 다른 것들보다 심각한 이유는 전투를 안 하거나 회피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이착륙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속도가 거의 실속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지면 특정 상황(받음각, 기수 각도, 프롭 피치 등 복합적인 상황) 요우 축(양 옆으로 움직이는 축)의 안정성이 떨어져버렸고, 이렇게 느린 상황에서 약간이라도 조종간을 잘못 만지면 급작스럽게 롤[31] 이 되어버리는 괴악한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이 급작스러운 기동이 이루어지면(당연하게도 조종사가 일부러 한 것이 아니다!) 조종면이 날아가거나 아예 날개가 부러지는 등 기체가 손상을 입게 되었고, 이는 추락으로 이어지곤 했다. B/C 모델 중 이 문제로 추락한 경우가 보고되었으나 D/K형에서도 일어났던 문제다. 이 덕분에 개량을 거쳐 수직 꼬리날개를 앞쪽으로 살짝 늘리고[32] 러더 트림을 설치(B형에도 있었지만 약간 개량함)하는 등 개량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미군 조종사들의 압도적인 실력에 힘입어 상쇄될 수 있었지만 아무튼 결점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리고 자체적인 날개 디자인에 문제점이 다소 있었다. 항력을 줄이기 위해 층류익형을 채택하였는데, 층류익형을 설계했을 때의 풍동시험에서는 테스트용 익형의 표면조도가 거의 보석의 표면급으로 매끈해서 애초 의도한 대로 층류 흐름이 유지되면서 항력이 줄었던 반면 실제 항공기에서는 보석표면급의 표면조도(매끈한 정도)를 만들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층류익이 실전에서 설계 의도대로 동작하지는 않았던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층류익형의 형태 자체가 아음속 영역에서의 항력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설계의도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기획의도 달성은 어쩌다가 성공한 희귀한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 쉽게 말해서, 머스탱의 날개가 혁신적이었다는 언급은 허구에 가깝다.
P-51의 주요 장점이자 단점의 중심에 있는 게 이 층류익인데, 층류익은 익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우천시나 짙은 구름층에 들어가거나, 도색이 벗겨지거나 주익에 약간의 돌출물만 생겨도 효과를 상실하는 결점이 있었다. 특히 피탄시에 이 문제점이 두드러지는데, 날개 한쪽이 피격당해 구멍이 난다거나 하면 그곳에서 난류가 발생해 비행이 불안정해지곤 했다. 다만 머스탱에 적용된 익형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며 구멍나면 비행이 불안정해지는거야 층류익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비행기가 다 겪는 문제다. 진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스톨 특성. 즉, 층류익은 받음각 스톨특성이 상당히 후지기 때문에 기수를 들어올리기만 해도 앞전이 그대로 천이점이 되어서 기류 박리, 즉 실속이 발생한다. 이는 곧 같은 중력가속도를 받는 기동에서 층류익이 받는 압력이 더 크다는 뜻도 되므로, 주날개의 내구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결국 제작사인 노스 아메리칸 사는 층류익을 어떻게든 써먹기 위해 머리를 싸매던 끝에 P-51D의 조종간을 묵직하게 만드는 걸로 매듭짓는다.[33]
더군다나 머스탱은 수냉식 단발기 치고는 꽤 크고 무거운[34] 기체였기 때문에 전비중량에서의 익면하중이 높고 추중비가 낮아 에너지의 소모 또한 상당히 큰 편이었다. 이런 문제는 비행 시뮬 게이머들에게는 상당한 문제겠지만, 이러한 설계가 고속비행에는 오히려 적합하다. 일정 속도를 넘어 날개로부터의 양력수급이 과잉이 되면 양력은 오히려 항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속도면에선 악영향이다. 즉 비슷한 추중비를 가진 기종이라도 설계단계에서 비행기가 날아가기 적절한 양력을 넘어서는 시점을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저속선회전을 장기로 하는 기종과 고속의 일격이탈을 장기로 하는 기종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자면 대전초기의 단엽기 중에는 복엽기보다도 속도가 느린 기종이 있었지만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자 단엽기는 일격이탈로 손쉽게 복엽기를 압도할 수 있었다. 선회력이나 속도는 물론이고 추중비에서도 오히려 밀리는 상황이었음에도 능숙하게 에너지 관리하며 지나친 양력이 발생시키는 항력으로 인해 에너지의 소모가 빠른 복엽기를 압도한 것이다. 그리고 추중비와 익면하중이 저러니 지속상승력이나 수평가속력도 평범한 편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좋은 연료 공급으로 P51은 130, 150 옥탄가의 고급 연료를 사용함으로서 Bf109G-6에 비해 추장비는 40% 열세에 있었지만 정작 매니폴드 압력은 78% 가량 우위에 있었고 게다가 고고도에서는 2단 슈퍼차져 덕분에 주로 비교되는 Bf109G-6를 속도, 상승력에서 확실히 이겼다.
그러나 이 비교는 배기량은 적지만 각종 슈퍼차져 및 터보차져가 달린 레이스용 자동차가 고성능 자연흡기 엔진 일반차보다 느리다고 하는 단순한 비교일 뿐이다. 애초에 머스탱과 109는 주로 폭격기 엄호가 이루어지는 고공에서 맞붙었고, 이 상황에서는 당시 109들은 동부전선의 저공전투를 커버하던 모델에 폭격기 요격 무장만 달았던 것들이라 고공 성능은 확연히 뒤쳐졌다. 그나마 전쟁 최후반기에 MW50같은 것들을 장착한 독일기들이 나오게 되지만 이들도 제트기가 머스탱을 위협하듯 압도적인 것도 아니었는데다 숫자도 얼마 안 되었다. 괜히 갈란트가 262를 타고 천사가 밀어주는 것 같았다는 언급을 한 게 아니다. 그나마 지상군 엄호 및 지상공격이 벌어졌던 벌지 전투에서는 독일기들이 저공 성능으로 압도할 수도 있었으나(파일럿 수급 문제를 뒤로 하더라도) 이미 독일기가 1기 뜰 때 연합군이 10기 뜨는 상황이라 저공 우세는 의미가 없었다. 즉, 제공기로써 이미 제공권을 확보한 머스탱 덕분에 제아무리 고성능 기체를 가져와도 의미가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일단 선회력은 당시 적기였던 독일기들도 폭격기 요격을 위해 건포드까지 덕지덕지 붙이면서 출격한 기체들이 많아 대체적으로 영 좋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지속상승력이나 수평가속력은 Bf109G-10이나 K-4같은 후기형 기종들이 머스탱보다 조금 우수했기에 때문에 이런 기종들을 상대로 상황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물론 미군 파일럿들의 실력이 독일군 파일럿들보다 훨씬 우수했고 결국 공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일럿의 실력이었으니 이는 Bf109G 시리즈의 후기형, K모델이 등장한 이후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P51이 Bf109의 후기 생산형들에게 유의미할 정도로 성능 열세가 있었다면 1:11이라는 교환비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35] 다만, 저속 기동 성능이 제공기로써 단점이 된다면 2차대전 등장한 기체들로써는 제로센보다 더 좋은 기체가 없게 된다. 고로, 저속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고 단점에 서술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단락이므로 이 단락은 의미가 없다.
엔진의 경우도 공간이 부족해서 워터 인젝션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과열 문제로 WEP 사용시간이 5분 남짓으로 제한되었는데[36][37] (5000미터 이하에서는 사실 이거 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DB605 계열은 WEP 사용시간이 이보다 두 배 긴 10분 정도였다. 그러나 G-6의 경우 머스탱과 그나마 대등하게 싸울 당시 기체들은 대부분 WEP을 장착하지 않고 있었다. 반면 머스탱은 B/D로 개량되면서 기본적으로 2단 슈퍼차져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폭격기 엄호 전투가 벌어지는 상공에서 Bf109는 따라올 수가 없었다.
사실 위의 성능 수치 비교는 단순 테스트 비행 자료나 스펙 테이블만 가져온 단편적인 내용에 기인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당시 연합군은 원유 정제 능력이 충분했고 원유 자체도 엄청나게 널려 있어서 노스 아메리칸 공장에서 프린트되는 기체 매뉴얼에 나온 130옥탄가 연료[38] 보다 더 폭발력이 높은 150옥탄가 연료를 쓰고 있었다. 반면 독일군은 같은 109라도 MW50같은 건 없는(109는 슈퍼차져가 1단짜리 장착되어 있었다. 기수 왼쪽에 뜬금없이 튀어나와 있는 콧구멍!) G-6가 대부분이었고(나중에 개량되며 고공 성능을 높힌 기종들이 나오지만 이들이 투입되었을 때는 이미 이착륙조차 힘들어진 상황이었다), 이마저도 전쟁 후반부가 되면 원유를 주로 가져오던 동부전선 남부 지역이 털리면서 고순도 연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스펙 테이블에 나온 수치보다 머스탱은 우월한 비행 성능을 보이고 있었고, 독일 공군 기체들은 스펙에도 못 미치는 성능을 보이면서 고전중이었다. 고로 머스탱이 무겁고 엔진 출력이 낮아보여도 실질적으로 2차대전 당시 공중전에 필요한 고속 성능은 109나 190초기형과 비교하면 압도적이었고 후기형들과 비교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쉽게 말해 성적은 비슷한데 좋은 스폰서한테 빵빵한 지원을 받는 선수가 머스탱이면 월급도 제 때 안 나오는 저질 스폰서한테 지원을 받는 게 독일기들이었던 것이다.
떄문에 P-51은 여러 단점들이 있었지만 결코 약하거나 쓸모없는 전투기가 아니였다. 다른 기종을 언급하는 경우는 기종 자체의 전투력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이며 실제로도 대전중에는 전투기로서의 면에서 머스탱을 능가하는 기종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종도 머스탱의 장대한 항속력과 긴 체공시간, 그리고 적절한 성능의 조합이 가져오는 제공 장악력을 따라올 수 없었다. 그 전에 독일군은 전황 상 제공권을 장악당해 이륙조차 힘들었고, 그 고성능의 기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인력도 거의 없었다. 당장 제로센 수준의 기체가 항속거리만 길다는 이유로 유럽 전선에 배치됐다면 독일 입장에선 호위기도 별로 안 무섭고 오히려 격추수를 늘려준다며 좋아했겠지만 P-51의 성능에 긴 항속거리는 위협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미 육군 항공대가 그렇게도 좋아한 전략 폭격에 있어서 P-51은 매우 훌륭한 호위기였다. 폭격 편대를 사실상 완벽히 호위가 가능한데다 순항 속도까지 빠르니 일단 여러 문제가 있다해도 당시 미국 입장에선 굉장한 호사였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Fighter Sweep 전술을 수행하며 나치 독일의 영공을 완전히 지배하는 P-51 앞에선 P-51과 맞먹거나 우위의 성능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대전 후기 독일 전투기들은 제대로 이륙하기도 어려웠고 이륙에 성공해도 착륙할 때 공격당해 격추당하는 데다 전투 때에는 항상 상황적 열세속에서 제 성능을 살리지 못하고 소모되어 갔다. 나치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조종사 인적자원 수급이 1944년도에 와서 붕괴되면서 단순히 성능이 좋은 전투기 몇 대를 더 투입한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리도 없었다. 만일 고성능 전투기 몇 대로 전황이 달라졌다면 262가 등장했을 때 연합군의 제공권에 큰 구멍이 났어야 정상이다. 이미 양측 파일럿의 수준 격차는 너무나도 벌어져 있었고 미군 파일럿들이 모두 에이스급의 실력을 가진 반면 독일은 극소수의 에이스와 절대다수의 신참으로 이루어져 있어 P-51은 다소 평범한 성능으로도 1:11의 교환비로 루프트바페를 학살할 수 있었다.
머스탱은 1:1 전투에서 최강은 아닐지라도 고속과 괜찮은 비행성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양산가가 싸고 상기한 제공장악력 덕분에[39] 다른 기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전략적 우위성을 가져다 주었다. 즉 다른 전투기가 전투에서 이길 때 머스탱은 특유의 체공시간과 미국이 원하는 이상적 전투/호위기로서 톡톡히 활동했으므로 최강은 아니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체라는 평가는 받아도 부족하지 않다. 무엇보다 속도성능에서는 대부분의 기체에 대해 우위를 점하기도 했고다. Bf109 후기형인 G-10, K-4와 비교하면[40] 상승력, K-4의 최대속도 등에는 밀리나 G-10에게는 최대속도에서 우위, 순항속도는 G-10 및 K-4 양쪽 모두에게 우위를 가진다. Fw190 D형의 경우엔 선회력을 제외하면 P-51이 전체적으로 열세에 있으나 D형은 워낙 생산량이 적은 기종이다. 게다가 대부분 제트기 부대 이착륙 엄호용으로 저공비행하느라 제성능도 못 냈다. 태평양 전선을 본다면 Ki-84 하야테, N1K 시덴, 시덴카이 같은 일본군의 전투기에게 화력과[41] 선회력을 제외한 나머지 성능에서 우위를 가진다. 고옥탄 연료의 사용으로 하야테의 상승력까지 넘어섰기 때문이다. 캐노피나 조종석 등, 파일럿의 피로도나 편의성 면에 있어선 매우 좋게 평가되었다.
B-17 등 폭격기만 상대했을 때에도 폭격기의 강력한 자체 방어 때문에 조종사/기체 손실을 차근차근 강요받았던 독일 공군에게, 호위에 중점을 둔 기체이면서도 적절한 공중전 성능을 갖춘 P-51의 호위는 '''재앙'''이었다. 강력한 P-51의 호위를 뚫고 또 다시 방어기총으로 중무장한 폭격기에 접근해야 하는, 훨씬 어려운 임무를 강요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폭격기 요격에 나선 독일 공군, 특히 숙련 조종사의 손실은 당연히 급증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격추에 성공한 B-17의 숫자도 줄어들었기에 그만큼 독일은 연합군의 폭격에 더욱 취약하게 노출되었다.
독일 전투기들이 호위기를 무시하고 폭격기에만 달려들도록 지시받았기 때문에 교환비가 불리하게 나왔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내용이다. 첫째, 요격부대가 요격받을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호위전투기를 배치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전술중 하나로 막장으로 악명을 떨친 일본군의 카미카제조차도 가급적 호위기를 붙이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그나마 상식적이었던 독일 공군은 호위전투기의 위협을 받게 되자 중무장/중장갑의 Fw190에 요격임무를 주로 맡기고 Bf109는 Fw190을 호위하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위의 호위전투기를 무시하라는 지시도 Fw190이 요격임무를 전담하고 이를 Bf109의 호위부대가 막아낸다는 가정하에서나 성립하는 것이지 독일기 전체가 호위전투기를 무시하라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둘째, 정작 연합군의 전투조종사들은 1940년의 영국 상공에서의 독일 전투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의 불리함을 안는 것을 감수해야만 하는 폭격기 호위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전투기 단독으로 수행하는 Fighter-sweep 임무를 더 선호했다. 셋째, 어차피 1944년에 들어서면서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보유한 전투기가 남아도는 나머지 지상공격 임무에 전투기를 대거 투입하기 시작하고, 지상공격중 입는 손실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걸 버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서방 연합국의 공군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는 전술적 실책 한 두개가 만회되었다고 해서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다.[44]
전략 폭격에 의한 생산 시설 등의 중요 시설의 파괴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과가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폭격기 편대의 호위와 지상공격을 통해 폭격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에도 꾸준한 전투기와 파일럿의 손실을 일으키고, 연료 수송과 연료 그 자체를 망가뜨려버린 것이 또다른 큰 타격으로 작용했다. 그 상황이 이제 더욱 악화되어 폭격기 호위에 만족하지 않고 베를린이든 어디든 독일 땅이라면 어디든지 떼거지로 날아와 독일 전투기들을 많이 격추했고 기지, 비행장, 전차, 트럭, 열차, 독일군 행렬, 그외 눈에 보이는 모든 표적에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어 기관총탄, 폭탄, 로켓탄으로 공격을 퍼부어대는 P-51과 영국군의 호커 타이푼, 미 육군 항공대의 P-47마저 공격에 가담했다.
더욱이 독일 공군이 영국군 미군 소련군 전투기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통에 조종사 인력들의 질적인 저하가 서서히 오기 시작해 1944년 후반이 되면 서부전선에서는 숙련 조종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그 생존한 조종사들 중에서는 정말 톱급의 에이스 조종사만 몇 명 존재했다. 반면 P-51은 척 예거, 클라우드 크렌쇼, 빌 위스너, 조지 프레디 등 단 하루에 다섯 대 이상의 독일기를 격추하는 1일 에이스 조종사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이 위와 같이 한탄했다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항공 우세를 상실한 상황에서 이는 사실상 종전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P-51D 머스탱은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 독일이 항복하는 날까지 '''독일 영공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독일군 병사라면 언제 어디서나 먹이를 찾는 송골매처럼 하늘을 떠도는 P-51의 은빛 날개를 볼 수 있었고 독일 공군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Me262도 전투 손실중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기지에서 이/착륙 도중에 P-51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P-51와 연합군의 제공권 장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Me262는 제트기이고 제트기의 속도를 이용하여 폭격기 요격을 위해 이륙했으며 속도를 이용하여 호위기를 무시하고 요격 후 이탈하는 전략의 특성상 공중전이 벌어질 일이 없으니 당연히 이착륙 도중의 손실이 커질 수 밖에 없기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본인들 기지에서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연합군이 제공권을 철저히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종래의 P-47과 비교했을 때 P-51이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에 대해 갖고 있는 우위는 그 항속거리라고 할 수 있는데 직접적인 전투성능과 큰 관계가 없던 이 장점이 전략적 측면에서는 실로 엄청난 강점이 되었다.
1940년 영국 본토를 공격하는 독일 공군이 큰 피해를 입고 결국 히틀러가 계획한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되면서 영국 왕립 공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 전투조종사들은 독일 폭격기들을 '동속으로 동행하며 근접호위하라'라는 괴링의 명령이 전달되었을 때 일제히 탄식을 했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제공권 장악을 위해서 폭격기들과 동행하는 것은 당시에도 상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으며 장점이라고는 폭격기 조종사들의 사기진작 이외에 전술적으로는 딱히 없다는게 중론. 호위편대는 전투기의 장점을 살려 고속, 고공으로 폭격기 본대에 한 발 앞서 가며 다가오는 적들을 색출하여 선제적으로 교전하고 막는 것이 최상의 호위전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독일 공군 조종사들은 자조적으로 'kettenhunde'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슬에 묶인 개'라는 뜻이다. 즉, 호위기는 개집에 사슬로 묶여있어봤자 소용이 없고 사냥개가 사냥꾼들 앞서 나가며 사냥감을 몰이하듯 줄을 풀어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1944년 초반까지 미군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호위방식을 사용했으나 준장으로 승진하여 미 육군 항공대의 공중전 전략전술을 총괄하게 된 제임스 둘리틀의 등장과 함께 상황이 크게 바뀐다. 둘리틀 준장은 기존의 호위방식을 버리고 "모든 전투기들은 호위기에 앞서 나가 독일 깊숙히 들어가서 자유롭게 사냥하라"는 사실상의 프리헌트(free-hunt) 방침을 낸다. 폭격기들과 함께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독일 공군 전투기들이 공격해오는 것을 반격하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숫적우위를 충분히 활용하여 폭격기들에 앞서 독일 영공 깊숙히 침투하여 독일 공군을 상공으로 유인하여 일제섬멸하는 유연한 전략을 택한 것이다. 떼거지로 폭격기 멀리 앞서 몰려다니면서 독일 공군이 대규모 요격편대를 형성하기 전에 이끌어내어 박살내고 돌아다니면서 맘대로 하라는 대담한 요격섬멸 전술이었다. 그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독일 깊숙한 영토까지 날아들 수 있었던 것이 P-51D였다.
이 방침은 폭격기 비행대 입장에서는 직접적인 보호자들이 사라지는 불안한 상황을 초래하기에 반대가 있었으나 도리어 결과적으로 독일 공군에 보급되는 연료, 탄약, 심지어 먹을것까지 전선으로 보내지는 게 차단되는 효과가 나왔고, 이는 독일 공군의 작전이 힘들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독일 육군마저도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연합군의 지상군을 막아낼 수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마찬가지로 소련의 물량을 처절하게 받아내고 있었던 상황에서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닥치는 서방연합군의 지상공격기들을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찌 보면 전술적으로 전략 폭격기들을 희생하는 어이없는 방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전략 폭격의 목적을 전투기들이 대신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P-51의 항속거리였다.
이미 600km/h 초반대의 F6F 헬캣과 600km/h 중반대의 P-38 라이트닝에게도 앓는 소리를 내던 일본 해군/육군 항공대의 안습 기종들에게 700km/h이 넘어가는 속도 + 고도에 관계없는 성능 + 고속 순항 + 장대한 항속력 + 소이탄 세례를 퍼부어 줄 50구경 기관총 6정을 갖춘 P-51은 '''이미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물론 극소수 살아남은 일본 에이스들은 상황 판단력과 조종술로 헬캣이나 머스탱을 상대로도 격추수를 조금씩 추가해나갔다. 2차대전 시기 공중전의 특징은 공중전의 결과가 기체의 스펙만으로 결정되는 게 절대로 아니며, 조종능력, 상황판단,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골라 싸울 수 있는 기량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3,000m 이하의 저고도에서는 저속선회전이 통용될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저고도에서는 에이스 파일럿이 모는 하야부사나 하야테가 애송이 파일럿이 모는 머스탱이나 헬캣을 잡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워낙 빈약한 일본 전투기의 방어력과 일본측 수뇌부의 병크 등이 겹치는 등의 악재로 종전까지 살아남은 일본 에이스는 독일보다 훨씬 적었다. 거기다 숙련 조종사의 부족이 독일보다 훨씬 심했던 일본군은 안습 그 자체. 거기에 일본 전투기 자체가 빈약한 방어력을 가졌기에 6정의 50구경 중기관총의 사격선을 일부러 흐트러지게 정렬해서 마치 분무기로 총알을 뿌려대듯이 대충 긁어대도 그 대충 긁어댄 총알에 격추되는 일본군 전투기들은 말 그대로 줄줄이 밥이 되었다. 일단 유럽 전선의 독일기는 그래도 방어력이 시망은 아니었기에 이런 식으로 조준선 정렬을 해두면 결정적인 화력이 부족해서 슬쩍 건드리고 마는 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군 전투기들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시망이라서... 이런 식의 정렬법은 헬켓이나 콜세어 역시 일본기를 대상으로 사용했다. 오죽하면 라바울 상공에서 일어나는 공중전을 보며 일본군들끼리 "연기를 내뿜으며 떨어지는 건 미군, 폭발하고 떨어지는 건 아군." 이렇게 알고 있었으니...
유럽 전선에 비해 P-51이 그렇게 부각되지는 못했던 이유는 유럽 전선과 달리 4발 중폭격기의 대편대에 의한 전략폭격이라는 양상이 대전 후반에 가서야 벌어졌고(사실, 제로센이 4발 폭격기 작전고도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기에 그 후계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고공 엄호의 필요성이 떨어지기도 했다. 미군은 대전 중반기에도 중국서 전략 폭격기들을 띄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항공전역이 섬을 거점으로 한 비행장간의 교전양상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P-38 정도의 항속거리로도 어지간한 작전 수행에 큰 문제가 없었고 이들의 항속거리를 벗어나는 목표물에 대해서는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가 목표로 다가가서 함재기로 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헬캣, P-38 등 기존에 배치되었던 연합군 전투기로도 일본군 전투기들을 신나게 학살하고 있던 상황에 똑같은 학살자가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당시 일본의 파일럿들의 수기를 보면 머스탱은 마왕급으로 취급된다. 여기서 P-51D보다 경량화되고 항속거리와 속도까지 강화된 P-51H가 몰락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일본이 항복해버려서 F5U 팬케이크, F7F 타이거캣, F8F 베어캣처럼 벤치 멤버가 되었다.
태평양 전선에서도 P-51의 기나긴 항속거리는 큰 힘이 되었다. 청두(성도)나 충칭(중경), 쿤밍(곤명) 등 중국 내륙에서 출격한 미군의 P-51들이 대만과 상하이의 일본군 항공대 기지를 공격하는 등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항속거리의 기체를 보유하고 있던 미군의 행동반경을 더욱 넓히는데에 공헌한 것이다.
P-51의 항속거리가 특히 빛을 발한 것은 1944년 6월 사이판 전투/괌 전투 이후이다. 이곳에서 출격한 B-29의 본토 폭격을 엄호하는 것은 종전시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P-51이 잘 수행해 낸 가장 중요한 전략적 역할이었다. 사이판/괌에 이어 이오지마, 오키나와 본토와 더욱 가까워진 기지에서 출격한 P-51은 F6F 헬캣, F4U 콜세어 등 미 해군의 함재기들과 함께 본토의 일본군 항공기를 일소하고 제공권을 확보하는 임무(fighter sweep)까지 확실하게 수행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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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미국 육군 항공대의 올리버 스트로브릿지가 몰던 코드네임 '에발리나(EVALINA)'의 P-51C는 쿠로에 야스히코 소좌의 Ki-84 하야테에 피격당해 불시착하여 일본 측에서 노획, 수리해서 일본 본토의 항공대 기지를 순회하면서 모의전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때 '''조종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머스탱의 압도적인 비행성능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고''' 모의전을 했다고 술회했다.[48] 일본 측의 기록과, 머스탱을 최초로 격추한 일본 파일럿인 요헤이 히노키 등 여러 파일럿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일본이 소수 수입한 Fw190과의 비교했을 때 최고속력은 밀리지만 강하성능은 매우 우수했다고 한다. 야스히코 소좌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 전투기들보다 조종하기 쉬웠다고 한다. 프랑스 만화 <엔젤 윙스:버마 밴시>에도 해당 기체가 야스히코 소좌와 함께 적 기체로 출연해 동남아 전선에서 주인공의 P-47을 포함한 미 육항대 기체들과 맞붙는데, 저 노획한 머스탱을 가지고 B-29의 정찰 비행 중에 시치미 뚝 떼고 호위기인 척 붙어서 같이 편대비행도 한 일화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
또한 아군 격추 사례도 알려졌는데, P-51 "Bad Angel" 기가 작전 첩보가 잘못되어 일본군 비행장에 착륙접근(정말로 착륙했으면 그 순간 전부 포로가 될 뻔 했다)하던 아군 C-47을 엔진 두개를 싹 다 작살내서 물에 강제착수시킨 사례도 있다. 당시 그 비행기에 P-51 조종사의 애인이 타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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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출력으로 제트엔진을 사용하는 머스탱도 실험되었다. 위의 것은 XRJ-30-MA 램 제트 엔진을 날개 끝에 달아놓은 실험기고 아래는 포드 펄스 제트엔진(PJ-31-1)을 달아놓은 형태이다.
미국 육군 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 개편되자, P(Pursuit: 추격기) 부호는 F(Fighter) 부호로 교체되었으며, P-51도 F-51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원래는 주방위군 공군으로 돌리거나 퇴역시킨 다음에 해체하거나 표적기로 사용했는데 한국전쟁 발발 후 전투기가 부족한 한국 공군에게 공여해보니까 이게 의외로 쓸만해서, 결국 미 공군은 부랴부랴 F-51을 재취역시키기로 결정하고 남아있는 기체를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원래 머스탱만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우선 수송의 편의성을 위해 한국에서 가까운 미국 서부의 주방위군 기체부터 끌어모으니 마침 '''미시시피 강 서쪽'''의 주방위군 공군이 장비하는 전투기가 머스탱이었다. 미시시피 강 동쪽의 주방위군 공군은 썬더볼트를 장비하고 있었고, 대지공격 임무에는 P-47이 튼튼한 장갑과 공랭식 엔진으로 인해 더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보급 편의성 문제 때문에 한국전쟁에서는 거의 쓰이지 못했다.
이렇게 소집한 F-51은 한반도 전장에서 지상 공격 임무에 투입되어 대활약했다. 당시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한국의 거친 활주로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이륙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짧은 활주로에서도 쉽게 출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F-80C는 네이팜탄을 장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상 공격 임무에서 네이팜을 장착한 F-51이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49]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시찰 당시 호위로 따라붙은 전투기도 당대 최신예 기종인 F-80이 아니라 F-51이었다. 이때 북한군의 Yak-9 전투기와 맞붙었지만 그대로 격추시켜버린 전적도 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2차 대전 당시 '붉은 꼬리의 천사들'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터스키기 비행대'도 P-51로 Me262를 잡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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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촬영된 한국 공군의 F-51 편대. 한국전쟁 도중 촬영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중간에 복좌형인 TF-51이 보인다. 한국 공군이 TF-51을 보유한건 전후이다.
F-51D/K형은 6.25 전쟁 당시 신생 한국 공군에 지원되어 한국 공군 최초의 전투기가 되었고[50] 조종사들은 일선에서 열심히 활약해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등 어려운 임무들을 멋지게 수행해냈다. 이 때 김영환 장군이 목에 두른 빨간 마후라가 한국 공군 조종사의 상징이 되었고 교관인 딘 헤스 대령의 전용기인 18번기에는 그 유명한 신념의 조인이라는 문구가 적히기도 했다. 당시 참전하신 한국 공군 조종사들에게는 조종하기가 힘든 기체라는 인상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아마도 기존에 경험했던 연락기, 연습기나 일본제 전투기에 비해 일단 기체가 무거운데다가 조종간을 엄청 무겁게 해놓은 것이 겹쳤기 때문인듯하다.
6.25 전쟁 당시 제공권은 미 공군을 필두로 UN군이 담당하고 있었고 게다가 제트엔진을 장착한 1세대 전투기인 F-86이 있어서 사실상 한국 공군의 경우 제공권을 장악하는 전투기로 사용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훈련기가 아닌 한국 공군의 최초의 제대로 된 전투기이기도 하고 공격기, 즉 지상공격용으로 사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대한민국 공군은 전쟁 기간 동안 머스탱으로 총 8,495회(소티) 출격해서 각종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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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딘 헤스 소령의 18번기를 구현한 것인데, 노즈아트만 신념의 조인일 뿐 딘 헤스 소령이 탔던 해당 기체는 한국전쟁 당시 사고로 손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사진을 비롯한 신념의 조인으로 전시하고 있는 기체들은 그냥 노즈아트만 그린 것이다. 실기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복원기들의 사진을 참고하지 말고 차라리 당시 사진을 찾아보는 것이 낫다. 그런데 저 기체는 한국전쟁 발발일 기념으로 KBS에서 틀어준 머스탱 관련 다큐에서 무려 '''한국의 리히트호펜'''으로 불렸던 김영환 대령의 탑승기체로 밝혀졌다!
그나마 군 관련으로 재현을 잘 한거라면 타 비행단은 모르나 제10전투비행단 영내에 있는 전시관에 신념의 조인 머스탱 모형이 있는데 전쟁기념관에 있는 실물 머스탱보다 고증이 더 나은 편이다.
P-51D는 한국전 이후에도 중동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51] 구매자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당시 일어난 1차 중동전쟁에서는 밀수입한 P-51D를 투입하여 아랍 공군 측의 스핏파이어를 격추시키기도 했다. 더 재미있는건, 이 당시 이스라엘 공군의 장비에 독일제 Bf109도 있었을 정도였다.[52][53] 이후 수에즈 운하 사태 및 영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의 비공식적인 지원을 받은 카데쉬 작전(1956)에도 전폭기로 투입되어 많은 활약을 한다. 어느 용자 이스라엘군 파일럿은 수에즈 시와 이집트군 사이에 깔린 '''전화선을 프로펠러로 갈아버려서''' 통신두절 사태를 초래했다고.
1943년도에 머스탱을 받은 영국의 요구에 따라 경량화된 머스탱 연구가 진행되어 XP-51F를 시작으로 G, J형식의 시험기가 등장하였고 전쟁 말에 최후의 머스탱인 P-51H형이 개발되었으나, 소수가 실전 배치될 쯤에 전쟁이 끝나버려 대량 생산이 좌절되고 소수만 생산되어 알래스카 방어에 사용되었다. P-51H는 무거워진 P-51D보다 경량화되고[54] 항속거리도 D형의 3,412km보다 길어진 4,667km이며 대대적인 재설계로 더욱 날렵한 형상을 가지게 되었고 최대출력 2천마력을 넘기는 신형 V-1650-9[55] 엔진을 장착하여 최고속도가 758km/h에 달했다.[56] P-51H는 몰락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핵 두 방 맞고 일본이 항복하여, 비슷한 처지의 F8F 베어캣과 함께 한국전쟁 시기 주요 벤치 멤버로서 전쟁에 투입되지 않고 있다가 전후에 퇴역했다. 애초부터 만능기로 두각을 나타내던 F4U 콜세어와는 달리 P-51H나 F8F는 한국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항공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 F-51D는 콜세어보다 떨어지는 성능을 지녔지만 프로펠러기 특유의 기동성과 저속을 살려[57] 지상공격에서 큰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콜세어가 지상공격만이 아니라 아예 주력 야간전투기 자리도 차지하고 해군 유일의 에이스이자 프로펠러기 최후의 에이스까지 배출했으며 심지어 제트기인 미그기까지 때려잡는 무쌍을 찍은 것에 비하면 수수해 보이지만 머스탱의 엔진은 수냉식이었음을 명심하자.
그러나, F-51H의 파생형인 P-82(F-82) Twin Mustang은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공산군의 항공기를 격추한 미 공군 전투기로 기록된다. 여기서 격추된 것도 Yak-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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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에어쇼한다고 아들, 손자, 증손자급의 전투기와 함께 날아다녀 보는 사람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기도 한다. P-51에서 F-22까지 반세기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인류 과학 기술의 발전을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머스탱은 재현품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2차 대전 전투기들 중 하나다. 특히 미국에서 종종 개최되는 프로펠러기 레이스에서도 F8F 베어캣과 더불어 매우 인기있는 기종이라고 한다. 당장 미국의 유명한 포니카 포드 머스탱의 이름도 이 P-51 머스탱(Mustang)에서 따온 것이다. 그만큼 항공 레이싱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헨리 포드가 항공 레이싱 매니아이기도 했고. 물론 항공 레이싱을 할 때는 최고의 속도를 뽑아내기 위해 모든 무장을 제거하고, 엔진을 무려 3000마력짜리로 교체하는 한편, 날개 모양을 손보는 등 마개조를 거친다. 그렇게 개조를 거쳐 나오게 되는 속도는 현재까지 공식기록 531MPH(=854km/h), 비공식기록 900km/h이며 왕복엔진을 사용한 항공기중 가장 빠르다고 할 수 있다.
양덕후들 중에서는 부품만 구해서 자신만의 머스탱을 만드는 사람들도 꽤 많다. 영화 촬영 때마다 해당 항목 덕후로 돌변했다던 톰 크루즈도 그 중 한 명. 물론 매일매일 철저한 정비를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60년된 '날아다니는 관'을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짓. 실제로 2011년 9월 17일 미국 네바다 주 리노에서 열린 '내셔널 챔피언쉽 에어 레이스'에서 P-51D 머스탱이 관중석으로 추락했다.
퇴역무기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머스탱도 오랜동안 그저 옛날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머스탱의 인기가 급격히 상승하더니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상징이 되어있다. 과거에 방치되어 버려져 있던 머스탱들은 항공밀덕들의 드림 아이템이 되어 수리된 후 100만 달러에 거래된다.
또한 능력있는 양덕은 사람이 탈 수 있는 미니 머스탱을 만들기도.
국공내전 때에는 공산당이 최소 39기의 머스탱을 노획하여 몇년 간 잘 굴렸고 이후 몇 대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
머스탱의 마지막 운용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무려 '''1984년'''까지 운용했다. 다른 제트전투기들이 모두 퇴역한 뒤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쿠바와의 무력충돌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은 후 A-37로 대체되면서 완전히 퇴역. #
그 이후 10년간 소식이 없다가 1990년대에 JSF 사업에서 보잉이 제안한 기체 F-32 머스탱 II로 부활하려 했으나 충격적인 외형으로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젠 아예 터보프롭(터빈)을 얹은 머스탱도 나왔다.
동명의 전설적인 머슬카 때문인지 포드(자동차) 사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다.
일부 밀리터리 사이트에는 우리나라에서 유독 가죽옷을 무스탕이라 부르는 것이 이 P-51 머스탱(무스탕)의 조종사들 옷 때문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머스탱(무스탕)'이란 상표의 가죽원단이 많이 들어와서 이 원단으로 만든 옷을 무스탕이라 부르게 된 것. 이 원단은 양가죽 중에서도 어른 양의 가죽을 가지고 양쪽 면을 다 쓸 수 있게 한 것으로, 원래 국제적으로는 더블 페이스라고 부른다.
미군내 최초의 흑인 비행대인 제332전투비행대, 일명 터스키기 에어맨을 이루기도 했다.
또한 고속기동중 발생하는 마치 독수리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마찰음이 있다. 원리는 주익 기관총구의 미세한 구멍에 공기마찰이 일어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콜라병 주둥이에 특정 조건으로 바람을 불면 악기처럼 소리가 나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보면 된다. 비슷한 예로, 호커 헌터가 있다.
직접 들어보자.
우리나라 등록문화재 제666호가 바로 P-51 머스탱으로 2016년 10월 20날 지정되었다.
1. 개요
'''P-51 Mustang''',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육군 항공대/한국전쟁 시기의 미 공군에서 운용한 프로펠러 전투기이다. 천하의 독일 공군을 상대로 '''1:11'''의 압도적인 교환비와 막대한 항속거리로 서부전선의 하늘을 지배한 기종이자 P-47과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양대 산맥이다. 선회능력 등은 머스탱보다 우수한 기종도 존재하지만 전투기로서의 가치는 선회능력 같은 것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일명 하늘의 캐딜락이다. 이 별명은 2차 대전 당시에 나온 것은 아니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인 태양의 제국에서 나온 것이다."제2차 대전 중 미국에서 가장 빠른 전투기는 무엇이었나요? , 2차 대전 때 우리 편 전투기 중 가장 멀리 날아간 전투기는 무엇이었나요? , 다른 전투기보다 더 높이 날아간 미국 전투기는 무엇이었나요? 돌 하나로 새 여러 마리를 잡을 수 있겠군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 막강! P-51 머스탱입니다. 야후! - 밀리터리 Q&A, 히스토리 채널[2]
2. 제원 및 파생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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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D/K'의 앞글자 P는(Pursuit)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이 군용기의 명명규칙을 개정하면서 앞글자를 F(Fighter)로 변경하면서 'F-51D/K'가 되었다.
참고로 P-51B/C형은 같은 물건이다. 정확히는 B형은 P-51A형을 제작하던 잉겔우드 공장에서 제작되었고, C형은 라이선스를 받아 텍사스 주의 댈러스 공장에서 제작한 것이 차이점이다. 또한 P-51D/K형도 구분법이 동일한데 잉겔우드 제작은 D형, 댈러스에서 제작한건 K형으로 불렸다.
2.1. P-51 초기형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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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형은 머스탱이라는 이름만 있었고, 주로 영국에 판매하기 위하여 생산되었다. 장착된 엘리슨 V-1710 엔진(Allison V-1710)이 4000m 이상에선 출력이 떨어져, 본 개발 목적인 중폭격기 호위에는 사용되지 못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머스탱이 용솟음처럼 솟아오르게 만든 그 멀린 엔진도 기존의 엔진보다 고공성능을 강화시킬 수 있는 2단계 슈퍼차져 장착에 애를 먹고 있었고[3] , 덕분에 스핏파이어 Mk. V 가 Fw 190 에 고전하고 있던 상황이기도 하다. 어쨋든 고공 성능이 필요했던 미군은 이미 고공전투용으로 제작한 P-47이 있기도 했기에 고공전투기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대신 영국군이 이 기체에 12.7mm 6정 대신 20mm 히스파노 4문 혹은 12.7mm 2정과 0.303인치 4정을 달아 운용하기도 하였다. 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특유의 많은 폭장량과 기체 안정성, 내구도를 이용해 공격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20mm 히스파노 기관포 4문을 장착한 초기형 머스탱은(A형이 아님) 북아프리카 작전에 정찰기로 투입되었다(111전술정찰비행대대와 154관측비행대대).
이후 잔여 생산분은 P-51이라는 제식명칭과, A형이라는 형식을 받고 12.7mm 4정과 드롭탱크 파일런을 장착하였으며 CBI전선에 투입되었다.
2.1.1. A-36 아파치
초기형 P-51의 딸리는 엔진출력과 특유의 둔한 기체성능이 맞물려 공대공전투에선 제 역할을 못하자 대지공격용 항공폭탄을 장착할 수 있는 파일런을 달고 에어브레이크를 추가해 CAS및 공격기로 개조한 사양이다. 위 사항을 빼면 초기형 P-51과 거의 같다. 무장은 기수에 2정의 12.7mm 기관총과 주익에 4정의 12.7mm 기관총을 장착하며 중량감소를 위해 주익의 기관총을 제거한 경우도 있다.
훗날 이름이 AH-64에 계승된다.
2.2. P-51B / C
P-51A에서 롤스로이스 멀린(Rolls-Royce Merlin) 엔진 교체를 비롯하여 조종석 후미 공간에 자동 방루 연료 탱크를 장착하고 외부 추가 연료 탱크를 장착한 개량형으로 '''항속거리(2,700km)'''도 무지막지하게 길어졌으며 최대속도는 80km/h 이상 증가하면서 700km/h 이상이라는 빠른 속도를 기록한 데다가 해수면 고도에서조차 600km/h 이상을 달성했다. 이후 P-51D/K형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개조키트 또한 제공되어 많은 수가 P-51D/K로 개조를 받게 된다. 자세한 성능은 하단 후술.
B형과 C형은 생산공장의 위치와 프로펠러 정도의 차이만 있다.
C형은 초창기 북극 유럽 항로를 개척한 기종이기도 하다.
2차대전 종전 후 민간에 불하된 머스탱은 주익에 연료 탱크를 넣는 등의 개조를 거쳐 에어 레이스용 기체로 활약했는데, 1951년 5월 29일, 2차 대전 참전 용사이자 당시 PWA사 소속 파일럿이었던 찰스 F. 블레어 씨는 이 에어 레이서로 개수된 C형 머스탱인 "엑스칼리버 3호"를 타고 노르웨이 바두포스를 출발해 알래스카 페어 뱅크스까지, 10시간 27분간의 무착륙 단독 비행에 성공한 것.
찰스 F. 블레어 씨는 지구 자기장의 영향으로 정확성이 떨어지는 나침반 기반 항법 대신 미리 정해진 위치와 시간에 태양선을 표시하는 방식의 항법을 고안해 무착륙, 무통신으로 자신의 북극 항로 비행을 성공시켰다.
2.3. P-51D /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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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단발 단좌 전투폭격기
- 전장 : 9.83m
- 전폭 : 11.28m
- 전고 : 3.71m
- 주익면적 : 21.9m²
- 익면하중 : 192kg/m²
- 자체중량 : 3,465kg
- 전비중량 : 4,175kg, 최대 5,490kg
- 엔진 : 패커드 V-1650-7 V자형 12기통 수냉식 엔진 1기, 1,490마력(부스터 사용시 1,720마력)
- 최대속도 : 705km/h (고도 7,620m에서)
- 항속거리 : 1,931km (내부 연료), 최대 3,412km (110 US갤런 외부 연료탱크 2개 장착시)
- 무장 :
- 주익에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 내측 2정 : 탄약 400발 / 외측 4정 : 탄약 270발 - 총 6정 1,880발 (D형)
- 주익에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또는
- 내측 2정 490발, 외측 2정 490발 - 총 4정 1920발 (A/B/C형)
- 2개소의 무장 탑재 하드포인트
- 2,000파운드(907kg)까지 폭장 가능[4]
- 폭탄 장착/미장착시 4.5인치 3연장 바주카 로켓 2문(주익아래 각1문, D형에서 단기간사용)
- 폭탄 장착/미장착시 10개의 5인치 H.V.A.R. 로켓(3연장 바주카 폐지이후)
P-47 썬더볼트와 함께 2차대전 중 다목적 전투기로 널리 쓰였다. 특히 전투기임에도 많은 폭장량을 가져 폭장을 달고 CAS기로 운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두리틀 장군의 명령 덕분. 당시에는 폭격기 편대에서 호위기들을 묶어두지 않고 풀어두는 전술이라 논란이 있었으나, 도리어 이 전술로 독일 공군의 전략은 엉망이 된다. 그나마 폭격기 편대 따라가면 몇 대는 부수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운 좋으면 슈바인푸르트 폭격 때 처럼 상당한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이제는 그냥 지상에서 다 터져나가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게다가 연료와 탄약이 없으면 전투기 뿐만 아니라 전차나 보병단도 제대로 작전을 할 수 없게 되므로 도리어 전략폭격의 목적 또한 달성하게 되는 전술이었다.
이후에 주방위군 공군 및 예비물자로 돌려졌는데, 대한민국 공군이 처음으로 운용한 전투기가 되었다. KBS 다큐에서 다룬 한국 공군 F-51의 활약상
2.4. P-51H
- 전장 : 10.16m
- 전폭 : 11.28m
- 전고 : 3.88m
- 주익면적 : 22.2m²
- 익면하중 : 194.7kg/m²
- 자체중량 : 2,986kg
- 전비중량 : 4,322kg, 최대 5,216kg
- 엔진 : 패커드 V-1650-9, 1,580마력(부스터 사용시 2,220마력)
- 최대속도 : 758km/h (고도 7,620m에서)
- 항속거리 : 2,172km (내부 연료), 최대 4,667km (165 US갤런 외부 연료탱크 2개 장착시)
- 무장 :
- 주익에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 내측 2정 : 탄약 390발 / 외측 4정 : 탄약 260발 - 총 6정
- 2개소의 무장 탑재 하드포인트
- 2,000파운드(907kg)까지 폭장 가능
- 폭탄 장착시 6개/미장착시 10개의 5인치 H.V.A.R. 로켓
- 주익에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여튼 이 때 영국서 전수받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체를 전반적으로 재설계한다. 덕분에 기존에 과도하게 설정되었던 규격을 줄여 랜딩 기어, 연료 탱크 등을 소형화 및 경량화시키고, 조종석 위치 전방으로 변경 및 크기 확장, 수직꼬리날개 디자인 변경, 프로펠러도 가벼운 것으로 교체, 엔진도 V-1650-9로 교체하여 Manifold Pressure를 최대 120 inches Hg로 늘리는 업그레이드도 진행한다. 이 덕분에 P-51의 '''고질적인 저속 비행시 불안정성이 해결'''되었으나 항속거리는 오히려 20% 정도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정작 배치되는 시기가 45년 7월부터라 몰락작전에나 투입할 상황이었지만 이 작전은 취소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도리어 투입되지 않다가 알래스카 주 방위군이 굴리게 된다.[6] 한때 미 해군에서 저속 비행 문제(특히 착함에는 저속 비행 성능이 안정적인 게 중요하다)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고 도입하려 했으나 이미 2차대전은 끝나버렸고 제트기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2.4.1. P-82 트윈 머스탱
위의 영상은 복구한 기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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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H의 파생형[7] 으로 P-51H의 동체를 개조한 것을 두 개 연결하였다. 최초 개발은 태평양 전쟁 중 B-29의 전체 항정을 호위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개발이 지연되어 태평양 전쟁에는 투입하지 못했고, 6.25 전쟁에 미 공군이 투입하면서 북한군의 Yak-9을 격추하여 6.25 전쟁 최초의 공대공 격추기록을 세운 항공기이다. 이후 야간 전투 및 장거리 호위/정찰용으로 사용되었다. 조종사도 두 명이며, 두 명의 조종사가 돌아가며 밥도 먹고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재밌는 점으로, 전후 멀린 엔진의 라이선스 생산 비용이 증가하자, P-82C 모델 이후부터 앨리슨제 V-1710 엔진을 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는 엘리슨에도 제대로 된 과급기가 설계되어 있었기에 고고도 성능은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3. 개발 및 개량
1940년 4월 자국 항공기 생산력만으로는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에 대항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영국은 미국에 구매단을 파견하여 좀 쓸만한 미제 전투기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전투기는 성능에서 Bf109에 미치지 못하는 P-39 에어라코브라, P-40 워호크나 F4F 와일드캣 정도 뿐이었다.
영국 구매단은 P-40을 계약한 뒤에 개발 회사인 커티스 사의 제조능력 부족 때문에 라이선스 생산해줄 회사를 찾다가 노스 아메리칸 사[8] 를 방문해서 "커티스 사의 생산 능력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P-40 좀 같이 생산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이 말에 제임스 킨델버거 사장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은 물론이다. 심기가 불편했던 킨델버거 사장은 당시 주임 설계기사였던 에드거 슈미트에게 가서 이렇게 질문했다. "영국 신사 양반들이 우리더러 P-40을 만들어 달라는데?" 사장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던 슈미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하의 영국 공군이 구닥다리 설계의 P-40이나 써서야 되겠습니까? 여기 제 책상에 제가 수년동안 혼신의 공력을 들여서 설계한 전투기 설계도가 있습니다. 이걸 영국 구매단에게 제안해 보면 어떻겠습니까?"[9]
사장은 좋아라 하고 설계도를 들고 바로 영국행 비행기에 올라 영국 공군에 역제안을 하게 된다.
사실 설계기사였던 에릭 슈미트는 오래 전부터 최고 성능의 전투기를 개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몇 년동안 혼자서 전투기 설계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최고 성능을 목표로 했기에 당시 최신 기술인 층류익[10] 이나 마이너스 항력(즉 추력)을 유발하는 라디에이터 흡기구 등을 설계에 통합시켰고 결국 당대 최저의 항력계수 0.0169를 가진 기체를 설계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영국 구매단은 P-40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국과 협의를 마친뒤에 P-40보다 좋으면 즉시 400기 구매, 아니면 계약은 무효라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에릭 슈미트가 예전부터 만들어온 전투기 설계를 바탕으로 117일만에 모든 면에서 P-40을 능가하는 신형 전투기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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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 중 사고난 NA-7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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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프로토타입인 NA-73X와 XP-51의 모습
이 성능에 만족한 영국 공군에서 320대를 머스탱 MK.I 이라는 이름으로 발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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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형의 모습, 엘리슨 엔진의 구조 덕분에 공기 흡입구가 프로펠러 기동축 위에 달려 있다.
P-40에도 사용된 엘리슨 엔진을 장착한 초기형(A형)은 저고도에서는 당대의 독일 전투기보다 우수했지만[11][12] 고도 4000m만 올라가도 성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영국 공군은 머스탱을 지상공격이나 저고도에서 적 공격기를 쫓아내는 정도로만 사용했다. 혹은 정찰 장비를 장착해 고속 정찰기로 사용했다. 물론 지상 지원용으로 사용된 모델은 히스파노 4정을 날개에, 50구경 2정을 카울링에 장착하여 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미군도 2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영국군을 위해 개발된 전투기니 미군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것라면서 흥미를 못 느껴 거의 방치해두었다. 1년 가까이 방치되어있다가 나중에 머스탱을 가지고 공압식 기관총 급탄장치를 시험해보던 테스트 파일럿이 말하라는 급탄장치 이야기는 안하고 기체 이야기만 하면서 '저고도에서는 미친 것 같다.'라고 보고를 올렸는데도 별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진주만 공격 후 2차대전에 참전하자 전투기 1기가 아쉬웠던 미국에게 저고도 비행성능을 인정받아서 미 육군 항공대는 급강하용 에어 브레이크를 다는 등의 마개조를 통해 공격기 A-36 아파치로 채용했다. 아파치는 영국 공군에도 채용되어 Mustang Mk. I (Dive Bomber)라고 명명된다. 이 물건은 50구경 6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에서도 아파치라는 이름은 얼마 안 가 머스탱으로 바뀌었고, 원본의 경우, 엔진을 고성능 엘리슨으로 교체하고 20mm 캐논만 4정을 장착해 사용했다. 비행 성능을 높이기 위해 개량을 거친 모델은 무장을 50구경 4정으로 다운그레이드하여 영국군에 Mustang Mk. II라는 이름으로 채택된다.
3.1. 엔진의 교체
머스탱의 성능을 높이 평가했던 영국 공군 기술진들은 "내가 살펴봤는데 이번에 들어온 미제 전투기가 상당히 좋은 것 같아. 그런데 고도만 올라가면 힘을 못 쓰는데 한번 엔진을 바꿔보면 어떨까?"[13] 해서 당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DH-98 모스키토 등에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롤스로이스 멀린61 엔진을 달아보았다.[14] 그 결과 머스탱은 '''완전히 다른 전투기가 되었다.''' 특히 최대속도는 80km/h 이상 증가하면서 700km/h 이상이라는 빠른 속도를 기록한 데다가 해수면 고도에서조차 600km/h를 넘기는 등 훌륭한 능력을 지닌 전투기가 만들어진 것. 이로써 머스탱의 문제는 설계가 아니라 고고도 활동을 상정치 않고 개발한 미국 수냉식 엔진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어가야 할 것은 영국도 사실 고공 성능에서 상당한 고전을 하던 중이었다. 특히 FW190이 등장한 이후, 스핏파이어 Mk. V가 도망쳐야 할 상황에 놓이기까지 했으며 당연히 이 때문에 멀린 엔진을 분사식으로 개량하고 2단계 이상의 슈퍼차져를 장착할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러다 미국에서도 고공 성능이 필요한 머스탱 설계자들을 만났고 서로 기술교류를 하면서 결국 직렬 2단 슈퍼차져가 달린 멀린 엔진 개발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즉, 갑자기 머스탱에다 영국제 엔진만 딱 달았다고 날아다니는 물건이 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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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문제의 미제 엘리슨 V-1710 엔진.
엘리슨 엔진은 단발기에서는 보통 공간이 부족해서[15] 1단 슈퍼차저 밖에 장착할 수 없다는 제약으로 인해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는 성능이 매우 떨어졌다. 예외적으로 1단 터보 + 1단 슈퍼차저의 구성이 가능했던 P-38 라이트닝과 1단 슈퍼차져, 1단 터보슈퍼차져를 장착한 P-47은 설계 자체부터 고공 추격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라 제대로 된 고고도 성능을 낼 수 있었다.[16]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전장 상황에 따라 고고도에서의 운용이 필요한 경우도 많고 또한 이 엔진이 제 성능을 발휘하는 저고도에서만 운용하면 표적고착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원래 지상공격 중 입사각이 낮거나 빠른 속도로 인해 급강하 후 고도 회복을 못하고 그대로 추락해버리는 것을 표적고착이라고 하며 모든 비행기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는 프로펠러기든 제트 전투기든 가리지 않고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P-51은 동체가 워낙 무거워서[17] 2,000피트 이상으로 고도를 충분히 잡지 못하면 그대로 추락한다. 물론 표적고착은 고도만 잘 잡으면 일어나지 않는 매우 기초적인 실수라서 보통은 일어나지 않지만 저고도로만 날아다니면 한번의 실수로도 충분히 걸릴 수 있다.[18]
때문에 일정 고도 이상 높은 고도에서 활동해야 안전한데, 이럴 경우에는 당시 엘리슨 엔진이 급격하게 힘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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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이 개량형에 장착된 영국제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으로 미국에서는 패커드 사에서 V-1650이라는 이름으로 면허생산했다.#
멀린 엔진으로 장착한 시험 결과를 전해 들은 노스 아메리칸 사는 성능 향상에 대단히 기뻐했으며, 영국 공군은 지름신이 강림하여 멀린 엔진 탑재형 머스탱을 머스탱 Mk.III로 명명하고 무려 1000대나 주문했다. 그러나 가장 기뻐했던 건 사실 미군이었다. 급작스럽게 전쟁을 맞이해보니 장거리 폭격기 호위기가 급필요하게 되어 고민하고 있었는데,[19] 갑자기 세계 최고의 성능을 지녔을 지도 모르는 자국산 전투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이었다.[20]
3.2. 엔진 교체 이후
P-51B형부터는 엔진의 교체로 속도의 향상 이외에도 조종석 후미 공간에 자동 방루 연료 탱크를 장착하고 외부 추가 연료 탱크를 장착하니 '''항속거리(2,700km)'''도 무지막지하게 길어졌다. 덤으로 머스탱의 순항속도는 443km/h. 이는 항속거리가 길기로 유명했던 일본군의 후기형 A6M(외부 연료 탱크 추가시)보다도 무려 100km 이상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초기형 제로센의 항속거리 3,300km(외부 연료 탱크 장착시)도 200km/h의 순항속도로 달성한 것이고 이조차도 전력출력의 상태로 비행하면 머스탱보다 더 숏다리가 된다.[21]
덕분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는 물론, 쌍발기인 P-38 라이트닝이나 항속거리를 억지로 잡아늘려도 2,000km에 불과했던 P-47 썬더볼트보다 더 효율적으로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원래 P-51 등장 이전까지는 연합군 기종 중 그래도 항속거리가 제일 길었던 P-47이 폭격기 호위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그러나 P-47도 프랑스-독일 국경 즈음 와서는 폭격기 대열과 작별(?)하고 기지로 귀환해야 했으며, 당연히 Bf109, Fw190 등 독일 전투기들은 이 때를 기다렸다는듯이 폭격기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폭격, 특히 미군의 주간폭격이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도 멀린 엔진의 라이선스를 롤스로이스 사로부터 부랴부랴 사온 후 해당 엔진 탑재형 머스탱을 생산하여 P-51B/C로 제식채용했다. 그러나 P-51B 배치 직후 미 육군 항공대는 A-36 시절의 떨어지는 고고도 비행 성능 때문에 의구심을 버리지 못해서 지상 공격부대에 우선적으로 배치하였다. 이후 폭격기 호위임무에 P-51B을 한 번 투입해보니 그야말로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최우수 클래스의 속도와 호위기치곤 괜찮은 비행성능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폭격기를 요격하기 전에 우선 호위로 붙은 머스탱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나 적당한 성능에 확실한 수적 우세로 밀어붙였기에 독일 공군이 머스탱을 압도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 당시 독일 상공을 수비하던 독일군의 전투기는 폭격기만 상대하면서도 상당한 출혈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항로 내내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가 따라붙게 되자 요격 난이도는 삽시간에 지옥불이 되었다.
한 가지 특이사항으로 물방울형 캐노피를 도입하기 전인 P-51B/C형 머스탱은 그 외형이 독일의 Bf109와 유사했다. 실제로 멀리서 보면 식별이 어렵다는 말이 자주 들려왔는데 이 때문에 P-51의 기체설계를 독일 회사에서 Bf109 관계로 일하다 미국으로 망명한 기사가 했다는 루머가 생겼다. 이 루머가 마치 사실인양 퍼져 있기도 한데 사실 에드거 슈미트(Edgar Schmued) 주임설계기사가 독일에 살다가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이긴 하지만 Bf109와는 관계없던 사람이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따지면 독일계 미국인은 다 체포해야 한다(일본인이었다면 행정명령 9066호에 적용됐을 것이다).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독일계 핏줄이 섞인 사람이 미국 백인 인구의 반이다.[22]
헷갈릴 정도로 유사한 외형은 전장에서 P-51 잔혹사를 만들어냈다. 잘 비행하는 중인데 아군 대공포가 사격한다거나 혹은 전장에서 아군 전투기, 심지어는 호위대상인 폭격기의 방어기총사수들까지도 적기로 착각하여 쏴버릴 정도였으니 이로 인해 아군오사에 고통받기도 했다(물론 반대로 Bf109가 P51으로 오해받아 팀킬당하는 경우 역시 다분했다).
유명한 일화 중에는 한참 독일 본토 폭격이 진행중일 때 폭격기의 기총사수가 신나게 기총을 쏘다가 실수로 아군 호위기 P-51을 격추시키는 사고를 터뜨렸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기총사수는 "아이고 맙소사 난 이제 죽었어"라 외치며 이걸 어떻게 변명해야될지 머리를 쥐어뜯다가 에라 모르겠다라며 당시 요격용으로 별로 쓰이지도 않았던 Bf109E형으로 격추보고를 올려버렸다. 그런데 다른 폭격기의 기총사수가 Bf109E 격추가 맞다고 증언해주는 바람에 적기 격추로 기록된 적도 있었다.[23][24] 수뇌부에서도 아군 오인사격을 막아보자고 독특한 줄무늬를 그려 넣었고 나중에는 아예 도색이 안된 기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은빛 무도장 간지는 P-51의 상징이 됐다. 미군 외에 일본군 전투기들도 나중에는 무도장 기체들이 나왔는데 이쪽은 페인트까지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한 짓이다.
P-51의 도장제거는 경량화를 통한 기동성 향상의 목적도 있었으며 비슷한 이유로 1944년 이후로 생산되는 모든 전투용 항공기는 별도의 도장 없이 항력감소를 위한 왁스처리만을 하고 출고되었다. P-51의 경우 시험 비행에서 페인트 제거만으로 시속 23마일 정도의 속도 향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속도는 매우 우수했으며, 전투기로서의 선회성능이나 지속상승률 등도 평타는 쳤다. 다만, M2의 화력이 다소 빈약하고 급탄 불량이 자주 일어나며 후방 시야가 불량하다는 단점도 지적되었다. 이 캐노피의 경우 여닫는 방식이 약간 복잡해서(단순히 앞뒤로 미는 게 아니라 옆면과 윗면을 각각 열어야 했다) 탈출시 애로사항이 많았고 키가 큰 조종사들에게도 문제였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에 장착했던 말콤 후드를 가져와 마개조한다. 영국은 대부분 이걸로 바꿨고 미국은 몇몇 비행대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운용하다 D의 버블 캐노피로 갈아탄다. 때문에 물방울형 캐노피가 도입된 P-51D형(영국명 머스탱 Mk.IV)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처럼 반쯤 버블 캐노피 형상을 가지도록 개량되기도 했다. 이를 말콤 후드라 부른다. D형이 대세가 되고 이 B/C형을 D/K형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개조키트 또한 제공되어 많은 수가 개조를 받게 된다. 덕분에 숫자는 P-51D가 많았으며 이것이 P-51로 널리 알려진 모델이기도 하다. 실루엣의 개성이 확실해진 덕분에 오인사격 문제도 대폭 줄어들었다. 비슷한 개량은 P-47 썬더볼트에도 적용되었다.
그 결과 P-51D형은 약 8,000대 가량 생산되면서 P-51계열 중 가장 많이 생산된 모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실질적으로 활약을 시작한 게 1943년 11월 경이니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동안 P-51 계열기가 파괴한 적기는 공중전에서 4,950대, 지상파괴 4,131대에 달한다.[25] 단적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던 독일 공군의 소티 수는 1944년에 1만대를 겨우 넘겼던 반면 같은 기간 미 육군 항공대의 소티 수는 60만에 달했다. 이 당시는 전공 보고의 경우 도리어 독일 공군의 보고를 믿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미국쪽 자료를 참조하는 게 더 신빙성이 높다. 이 시기 독일은 독소전의 영향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고 심지어 마지막 반격(?)이라고 수행했던 시타델 작전도 쫄딱 말아먹어 서쪽으로 패주하던 상황이다. 즉, 44년의 독일군은 전쟁 초반부의 전격전으로 유명한 그 독일군이 아니고, 철십자 훈장 남발하던 독일군이었으니 도리어 신빙성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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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맥닐 육군 항공대 기지에 배치된 P-51D형, 출처
P-51D형은 주무장인 50구경 기관총이 B/C형의 4정에서 6정으로 늘었다. 물론 독일의 20mm 기관포인 MG 151보다는 위력이 약하지만 높은 발사율과 곧은 탄도, 신뢰성 등이 좋아서 B-17 같은 중폭격기를 상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화망을 순식간에 칠 수 있는 M2 중기관총이 전투기 상대로는 충분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여기에 기총의 배치형태 등을 수정, 종종 발생하던 기총의 탄걸림으로 인한 작동불능 상태를 막았다. 이 점이 개선되지 않은 종전의 P-51B~C형은 종종 기총 2, 3정으로 싸우게 되는 일도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화력증대는 더 컸다. 이 외에도 연료 탱크 용량이 늘어났으며 기타 몇 가지 부분이 개량되었다.
전체적으로 늘어난 중량 때문에 기동성이나 최대속도는 P-51B/C보다 약간 떨어지게 되었으나 엔진 세팅을 변경할 수 있게 되면서[26] 중-저고도 성능이 필요한 경우에도 대응이 가능했으며 강한 화력과 좋은 시야 때문에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P-51D를 선호하였다. 물론 일부 조종사들은 그래도 속도/기동성이 뛰어난 P-51B/C를 더 선호하기도 했다. 나중에 P-51B/C도 말콤 후드라는 측면이 불룩 튀어나온 캐노피를 사용하여 후방확인이 쉬워지고, 기총문제를 해결하여 기총고장 문제를 줄이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D형을 더 선호한 가장 원인은 수직 꼬리날개 디자인 변경으로 착륙 시 불안정성이 그나마 좀 덜해졌다는 것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D 후기형에는 자이로를 채택한 K-14 자이로 조준기가 장착되었다. 조종사들끼리는 통칭 '에이스 메이커'라 불리웠는데, 자이로 장치와 연동되어 예측 사격을 도와주는 흠좀무한 물건이었다. 기본적으로 조준선정렬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져 기계식 조준기보다 빠른 조준이 가능하고, 적기의 크기와 이동속도에 맞춰 레티클 크기가 조절되므로 탄도계산을 할 필요가 없이 직관적으로 예측이 가능하므로 리드샷을 쏘기에도 매우 유리하다. 탄도컴퓨터라든지 레이더 연동 조준기가 없던 당시로서는 일종의 수동식 탄도컴퓨터이자 '''에임핵'''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당시 외계인 고문에 특화되었던 독일군도 이런 장치는 양산기에 장착하지 못했다.[27] 독일이 자이로 조준기를 채택한 것은 Ta152인데, 이건 양산기였지만 워낙 늦은 1944년 12월에나 양산체제로 들어가는 통에 양산기 취급도 못받는다. Ta152가 양산 체제에 들어갈 정도로 독일이 버틸 수 있었다면 그 세계의 독일은 최소 다른 세계의 독일일테니 깊게 들어갈 필요는 없다.
P-51D의 연료를 반 정도로 계산해보면 도리어 수치상으로 Bf109 G-6와 호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선회율 및 상승률을 시뮬레이션해본 수치[28] 를 보면 매우 느린 속도가 아닌 이상 호각이다가 빠른 속도로 갈수록 P-51D의 성능이 더 나은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독일군은 MW50이 달린 G6/AS형을 얼마 생산하지도 못 했으며 생산했다 하더라도 사실상 저급 옥탄가 연료(그나마 기본 95를 써야 하는데 당시 원유 공급 사정이 좋지 않아서 89, 87까지 내려갔다)를 사용했으므로 150 옥탄가를 사용하는 머스탱을 따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TD7DqXfRno
4. 평가
P-51은 의외로 자잘한 문제점이 많았다.
P-51 계열기 전체는 장거리 호위기인 만큼 다량의 연료를 싣는데, 이 연료 탱크의 위치 문제로 동체의 균형이 비행시간 동안 극심하게 변화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이러한 문제점은 조종석 뒤 연료 탱크가 신설된 B/C 후기형과 D/K형에서 심했다. P-51의 엔진은 스핏파이어와 같은 계열임에도 스핏파이어와 비교하여 넘사벽의 비행거리를 보여준 것은, 그 자체의 공기역학적 설계가 출중하였던[29] 탓도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연료적재량이 엄청나서였다.
P-51B/C 초기형과 P-51B/C 후기형 이후부터는 주익 중앙 부근과 조종석 바로 뒤 후방에 연료 탱크가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꽤 위험한 자리이지만[30] 이 문제는 연료통에 구멍이 나면 자동으로 막히는 자동 방루식(Self Sealing) 설계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조종석 후방의 연료 탱크에 연료가 25갤런 이상 남아있으면 P-51의 무게중심을 지나치게 뒤로 옮기기 때문에 기체가 불안정하여 조종사가 조종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일단 이륙과 순항이야 지속적인 트림 조절로 해결할 수 있지만, 운 나쁘게 비행 특성이 최악일 경우 공중전이 벌어지면 조종사는 행여 불안정해진 기체 탓에 실속이나 하지 않을까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다른 전투기들은 장거리 작전을 위해 외부 연료 탱크를 달게 되면 일단 이 외부 연료 탱크의 연료를 먼저 써버린 다음 동체 내부의 연료를 썼지만, P-51 조종사들은 조종석 후방 연료 탱크를 최우선적으로 써서 작전지역에 도달할 때 즈음에는 조종석 후방 연료통이 다 비도록 했다.
특히 '''P-51의 수랭식 엔진'''은 평소에는 신뢰성 높아서 잘 작동하지만, 튼튼한 다른 부위와 달리 이 엔진은 한 발이라도 피탄될 경우 냉각수 유출로 순식간에 엔진 과열 크리가 작렬한다. 이럴 경우에는 회복이 불가능하여 조종사들은 엔진이 피탄될 경우 엔진을 정지시켜야 했었다. 물론 같은 엔진을 장착한 스핏파이어도 같은 문제를 일으켰으니 이건 머스탱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상대해야할 독일의 DB 601/605나 BMW 801 등은 엔진이 피격당하더라도 내장된 기계장치가 자동으로 엔진을 컨트롤하여 가능한 무사히 작동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걸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러나 독일 기체의 경우도 피탄당하면 엔진 출력이 떨어져 날으는 굼벵이가 된다는 점은 동일하므로 엔진 내구성 자체로 독일기보다 문제가 심했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독일기의 경우는 본토 방공전이었던 상황상 엔진이 그야말로 바로 멈춰도 탈출하면 아군 상공이었지만 머스탱은 그게 아니었으니 포로로 잡히거나 운 좋아도 목숨을 걸고 제3국 경유해서 탈출해야 하는 등 고초를 겼어야 했다. '''그리고 이게 정말로 치명적인 문제였으면 지상공격기로 전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걸 다 제껴두더라도, '''저속 비행시 불안정성'''은 매우 심각한 결점이었다. 이 문제가 다른 것들보다 심각한 이유는 전투를 안 하거나 회피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이착륙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속도가 거의 실속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지면 특정 상황(받음각, 기수 각도, 프롭 피치 등 복합적인 상황) 요우 축(양 옆으로 움직이는 축)의 안정성이 떨어져버렸고, 이렇게 느린 상황에서 약간이라도 조종간을 잘못 만지면 급작스럽게 롤[31] 이 되어버리는 괴악한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이 급작스러운 기동이 이루어지면(당연하게도 조종사가 일부러 한 것이 아니다!) 조종면이 날아가거나 아예 날개가 부러지는 등 기체가 손상을 입게 되었고, 이는 추락으로 이어지곤 했다. B/C 모델 중 이 문제로 추락한 경우가 보고되었으나 D/K형에서도 일어났던 문제다. 이 덕분에 개량을 거쳐 수직 꼬리날개를 앞쪽으로 살짝 늘리고[32] 러더 트림을 설치(B형에도 있었지만 약간 개량함)하는 등 개량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미군 조종사들의 압도적인 실력에 힘입어 상쇄될 수 있었지만 아무튼 결점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리고 자체적인 날개 디자인에 문제점이 다소 있었다. 항력을 줄이기 위해 층류익형을 채택하였는데, 층류익형을 설계했을 때의 풍동시험에서는 테스트용 익형의 표면조도가 거의 보석의 표면급으로 매끈해서 애초 의도한 대로 층류 흐름이 유지되면서 항력이 줄었던 반면 실제 항공기에서는 보석표면급의 표면조도(매끈한 정도)를 만들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층류익이 실전에서 설계 의도대로 동작하지는 않았던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층류익형의 형태 자체가 아음속 영역에서의 항력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설계의도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기획의도 달성은 어쩌다가 성공한 희귀한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 쉽게 말해서, 머스탱의 날개가 혁신적이었다는 언급은 허구에 가깝다.
P-51의 주요 장점이자 단점의 중심에 있는 게 이 층류익인데, 층류익은 익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우천시나 짙은 구름층에 들어가거나, 도색이 벗겨지거나 주익에 약간의 돌출물만 생겨도 효과를 상실하는 결점이 있었다. 특히 피탄시에 이 문제점이 두드러지는데, 날개 한쪽이 피격당해 구멍이 난다거나 하면 그곳에서 난류가 발생해 비행이 불안정해지곤 했다. 다만 머스탱에 적용된 익형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며 구멍나면 비행이 불안정해지는거야 층류익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비행기가 다 겪는 문제다. 진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스톨 특성. 즉, 층류익은 받음각 스톨특성이 상당히 후지기 때문에 기수를 들어올리기만 해도 앞전이 그대로 천이점이 되어서 기류 박리, 즉 실속이 발생한다. 이는 곧 같은 중력가속도를 받는 기동에서 층류익이 받는 압력이 더 크다는 뜻도 되므로, 주날개의 내구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결국 제작사인 노스 아메리칸 사는 층류익을 어떻게든 써먹기 위해 머리를 싸매던 끝에 P-51D의 조종간을 묵직하게 만드는 걸로 매듭짓는다.[33]
더군다나 머스탱은 수냉식 단발기 치고는 꽤 크고 무거운[34] 기체였기 때문에 전비중량에서의 익면하중이 높고 추중비가 낮아 에너지의 소모 또한 상당히 큰 편이었다. 이런 문제는 비행 시뮬 게이머들에게는 상당한 문제겠지만, 이러한 설계가 고속비행에는 오히려 적합하다. 일정 속도를 넘어 날개로부터의 양력수급이 과잉이 되면 양력은 오히려 항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속도면에선 악영향이다. 즉 비슷한 추중비를 가진 기종이라도 설계단계에서 비행기가 날아가기 적절한 양력을 넘어서는 시점을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저속선회전을 장기로 하는 기종과 고속의 일격이탈을 장기로 하는 기종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자면 대전초기의 단엽기 중에는 복엽기보다도 속도가 느린 기종이 있었지만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자 단엽기는 일격이탈로 손쉽게 복엽기를 압도할 수 있었다. 선회력이나 속도는 물론이고 추중비에서도 오히려 밀리는 상황이었음에도 능숙하게 에너지 관리하며 지나친 양력이 발생시키는 항력으로 인해 에너지의 소모가 빠른 복엽기를 압도한 것이다. 그리고 추중비와 익면하중이 저러니 지속상승력이나 수평가속력도 평범한 편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좋은 연료 공급으로 P51은 130, 150 옥탄가의 고급 연료를 사용함으로서 Bf109G-6에 비해 추장비는 40% 열세에 있었지만 정작 매니폴드 압력은 78% 가량 우위에 있었고 게다가 고고도에서는 2단 슈퍼차져 덕분에 주로 비교되는 Bf109G-6를 속도, 상승력에서 확실히 이겼다.
그러나 이 비교는 배기량은 적지만 각종 슈퍼차져 및 터보차져가 달린 레이스용 자동차가 고성능 자연흡기 엔진 일반차보다 느리다고 하는 단순한 비교일 뿐이다. 애초에 머스탱과 109는 주로 폭격기 엄호가 이루어지는 고공에서 맞붙었고, 이 상황에서는 당시 109들은 동부전선의 저공전투를 커버하던 모델에 폭격기 요격 무장만 달았던 것들이라 고공 성능은 확연히 뒤쳐졌다. 그나마 전쟁 최후반기에 MW50같은 것들을 장착한 독일기들이 나오게 되지만 이들도 제트기가 머스탱을 위협하듯 압도적인 것도 아니었는데다 숫자도 얼마 안 되었다. 괜히 갈란트가 262를 타고 천사가 밀어주는 것 같았다는 언급을 한 게 아니다. 그나마 지상군 엄호 및 지상공격이 벌어졌던 벌지 전투에서는 독일기들이 저공 성능으로 압도할 수도 있었으나(파일럿 수급 문제를 뒤로 하더라도) 이미 독일기가 1기 뜰 때 연합군이 10기 뜨는 상황이라 저공 우세는 의미가 없었다. 즉, 제공기로써 이미 제공권을 확보한 머스탱 덕분에 제아무리 고성능 기체를 가져와도 의미가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일단 선회력은 당시 적기였던 독일기들도 폭격기 요격을 위해 건포드까지 덕지덕지 붙이면서 출격한 기체들이 많아 대체적으로 영 좋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지속상승력이나 수평가속력은 Bf109G-10이나 K-4같은 후기형 기종들이 머스탱보다 조금 우수했기에 때문에 이런 기종들을 상대로 상황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물론 미군 파일럿들의 실력이 독일군 파일럿들보다 훨씬 우수했고 결국 공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일럿의 실력이었으니 이는 Bf109G 시리즈의 후기형, K모델이 등장한 이후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P51이 Bf109의 후기 생산형들에게 유의미할 정도로 성능 열세가 있었다면 1:11이라는 교환비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35] 다만, 저속 기동 성능이 제공기로써 단점이 된다면 2차대전 등장한 기체들로써는 제로센보다 더 좋은 기체가 없게 된다. 고로, 저속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고 단점에 서술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단락이므로 이 단락은 의미가 없다.
엔진의 경우도 공간이 부족해서 워터 인젝션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과열 문제로 WEP 사용시간이 5분 남짓으로 제한되었는데[36][37] (5000미터 이하에서는 사실 이거 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DB605 계열은 WEP 사용시간이 이보다 두 배 긴 10분 정도였다. 그러나 G-6의 경우 머스탱과 그나마 대등하게 싸울 당시 기체들은 대부분 WEP을 장착하지 않고 있었다. 반면 머스탱은 B/D로 개량되면서 기본적으로 2단 슈퍼차져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폭격기 엄호 전투가 벌어지는 상공에서 Bf109는 따라올 수가 없었다.
사실 위의 성능 수치 비교는 단순 테스트 비행 자료나 스펙 테이블만 가져온 단편적인 내용에 기인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당시 연합군은 원유 정제 능력이 충분했고 원유 자체도 엄청나게 널려 있어서 노스 아메리칸 공장에서 프린트되는 기체 매뉴얼에 나온 130옥탄가 연료[38] 보다 더 폭발력이 높은 150옥탄가 연료를 쓰고 있었다. 반면 독일군은 같은 109라도 MW50같은 건 없는(109는 슈퍼차져가 1단짜리 장착되어 있었다. 기수 왼쪽에 뜬금없이 튀어나와 있는 콧구멍!) G-6가 대부분이었고(나중에 개량되며 고공 성능을 높힌 기종들이 나오지만 이들이 투입되었을 때는 이미 이착륙조차 힘들어진 상황이었다), 이마저도 전쟁 후반부가 되면 원유를 주로 가져오던 동부전선 남부 지역이 털리면서 고순도 연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스펙 테이블에 나온 수치보다 머스탱은 우월한 비행 성능을 보이고 있었고, 독일 공군 기체들은 스펙에도 못 미치는 성능을 보이면서 고전중이었다. 고로 머스탱이 무겁고 엔진 출력이 낮아보여도 실질적으로 2차대전 당시 공중전에 필요한 고속 성능은 109나 190초기형과 비교하면 압도적이었고 후기형들과 비교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쉽게 말해 성적은 비슷한데 좋은 스폰서한테 빵빵한 지원을 받는 선수가 머스탱이면 월급도 제 때 안 나오는 저질 스폰서한테 지원을 받는 게 독일기들이었던 것이다.
떄문에 P-51은 여러 단점들이 있었지만 결코 약하거나 쓸모없는 전투기가 아니였다. 다른 기종을 언급하는 경우는 기종 자체의 전투력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이며 실제로도 대전중에는 전투기로서의 면에서 머스탱을 능가하는 기종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종도 머스탱의 장대한 항속력과 긴 체공시간, 그리고 적절한 성능의 조합이 가져오는 제공 장악력을 따라올 수 없었다. 그 전에 독일군은 전황 상 제공권을 장악당해 이륙조차 힘들었고, 그 고성능의 기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인력도 거의 없었다. 당장 제로센 수준의 기체가 항속거리만 길다는 이유로 유럽 전선에 배치됐다면 독일 입장에선 호위기도 별로 안 무섭고 오히려 격추수를 늘려준다며 좋아했겠지만 P-51의 성능에 긴 항속거리는 위협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미 육군 항공대가 그렇게도 좋아한 전략 폭격에 있어서 P-51은 매우 훌륭한 호위기였다. 폭격 편대를 사실상 완벽히 호위가 가능한데다 순항 속도까지 빠르니 일단 여러 문제가 있다해도 당시 미국 입장에선 굉장한 호사였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Fighter Sweep 전술을 수행하며 나치 독일의 영공을 완전히 지배하는 P-51 앞에선 P-51과 맞먹거나 우위의 성능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대전 후기 독일 전투기들은 제대로 이륙하기도 어려웠고 이륙에 성공해도 착륙할 때 공격당해 격추당하는 데다 전투 때에는 항상 상황적 열세속에서 제 성능을 살리지 못하고 소모되어 갔다. 나치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조종사 인적자원 수급이 1944년도에 와서 붕괴되면서 단순히 성능이 좋은 전투기 몇 대를 더 투입한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리도 없었다. 만일 고성능 전투기 몇 대로 전황이 달라졌다면 262가 등장했을 때 연합군의 제공권에 큰 구멍이 났어야 정상이다. 이미 양측 파일럿의 수준 격차는 너무나도 벌어져 있었고 미군 파일럿들이 모두 에이스급의 실력을 가진 반면 독일은 극소수의 에이스와 절대다수의 신참으로 이루어져 있어 P-51은 다소 평범한 성능으로도 1:11의 교환비로 루프트바페를 학살할 수 있었다.
머스탱은 1:1 전투에서 최강은 아닐지라도 고속과 괜찮은 비행성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양산가가 싸고 상기한 제공장악력 덕분에[39] 다른 기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전략적 우위성을 가져다 주었다. 즉 다른 전투기가 전투에서 이길 때 머스탱은 특유의 체공시간과 미국이 원하는 이상적 전투/호위기로서 톡톡히 활동했으므로 최강은 아니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체라는 평가는 받아도 부족하지 않다. 무엇보다 속도성능에서는 대부분의 기체에 대해 우위를 점하기도 했고다. Bf109 후기형인 G-10, K-4와 비교하면[40] 상승력, K-4의 최대속도 등에는 밀리나 G-10에게는 최대속도에서 우위, 순항속도는 G-10 및 K-4 양쪽 모두에게 우위를 가진다. Fw190 D형의 경우엔 선회력을 제외하면 P-51이 전체적으로 열세에 있으나 D형은 워낙 생산량이 적은 기종이다. 게다가 대부분 제트기 부대 이착륙 엄호용으로 저공비행하느라 제성능도 못 냈다. 태평양 전선을 본다면 Ki-84 하야테, N1K 시덴, 시덴카이 같은 일본군의 전투기에게 화력과[41] 선회력을 제외한 나머지 성능에서 우위를 가진다. 고옥탄 연료의 사용으로 하야테의 상승력까지 넘어섰기 때문이다. 캐노피나 조종석 등, 파일럿의 피로도나 편의성 면에 있어선 매우 좋게 평가되었다.
5. 운용
5.1. 유럽 전선
머스탱은 대주간(big week)이라 불린 1944년 2월 나치 독일의 군수공장과 연구, 개발시설에 대한 공격부터 본격적으로 참전한다.[43]졌어, 우리는 이미 전쟁에 진 거야.
B-17 등 폭격기만 상대했을 때에도 폭격기의 강력한 자체 방어 때문에 조종사/기체 손실을 차근차근 강요받았던 독일 공군에게, 호위에 중점을 둔 기체이면서도 적절한 공중전 성능을 갖춘 P-51의 호위는 '''재앙'''이었다. 강력한 P-51의 호위를 뚫고 또 다시 방어기총으로 중무장한 폭격기에 접근해야 하는, 훨씬 어려운 임무를 강요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폭격기 요격에 나선 독일 공군, 특히 숙련 조종사의 손실은 당연히 급증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격추에 성공한 B-17의 숫자도 줄어들었기에 그만큼 독일은 연합군의 폭격에 더욱 취약하게 노출되었다.
독일 전투기들이 호위기를 무시하고 폭격기에만 달려들도록 지시받았기 때문에 교환비가 불리하게 나왔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내용이다. 첫째, 요격부대가 요격받을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호위전투기를 배치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전술중 하나로 막장으로 악명을 떨친 일본군의 카미카제조차도 가급적 호위기를 붙이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그나마 상식적이었던 독일 공군은 호위전투기의 위협을 받게 되자 중무장/중장갑의 Fw190에 요격임무를 주로 맡기고 Bf109는 Fw190을 호위하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위의 호위전투기를 무시하라는 지시도 Fw190이 요격임무를 전담하고 이를 Bf109의 호위부대가 막아낸다는 가정하에서나 성립하는 것이지 독일기 전체가 호위전투기를 무시하라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둘째, 정작 연합군의 전투조종사들은 1940년의 영국 상공에서의 독일 전투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의 불리함을 안는 것을 감수해야만 하는 폭격기 호위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전투기 단독으로 수행하는 Fighter-sweep 임무를 더 선호했다. 셋째, 어차피 1944년에 들어서면서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보유한 전투기가 남아도는 나머지 지상공격 임무에 전투기를 대거 투입하기 시작하고, 지상공격중 입는 손실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걸 버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서방 연합국의 공군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는 전술적 실책 한 두개가 만회되었다고 해서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다.[44]
전략 폭격에 의한 생산 시설 등의 중요 시설의 파괴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과가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폭격기 편대의 호위와 지상공격을 통해 폭격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에도 꾸준한 전투기와 파일럿의 손실을 일으키고, 연료 수송과 연료 그 자체를 망가뜨려버린 것이 또다른 큰 타격으로 작용했다. 그 상황이 이제 더욱 악화되어 폭격기 호위에 만족하지 않고 베를린이든 어디든 독일 땅이라면 어디든지 떼거지로 날아와 독일 전투기들을 많이 격추했고 기지, 비행장, 전차, 트럭, 열차, 독일군 행렬, 그외 눈에 보이는 모든 표적에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어 기관총탄, 폭탄, 로켓탄으로 공격을 퍼부어대는 P-51과 영국군의 호커 타이푼, 미 육군 항공대의 P-47마저 공격에 가담했다.
더욱이 독일 공군이 영국군 미군 소련군 전투기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통에 조종사 인력들의 질적인 저하가 서서히 오기 시작해 1944년 후반이 되면 서부전선에서는 숙련 조종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그 생존한 조종사들 중에서는 정말 톱급의 에이스 조종사만 몇 명 존재했다. 반면 P-51은 척 예거, 클라우드 크렌쇼, 빌 위스너, 조지 프레디 등 단 하루에 다섯 대 이상의 독일기를 격추하는 1일 에이스 조종사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이 위와 같이 한탄했다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항공 우세를 상실한 상황에서 이는 사실상 종전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P-51D 머스탱은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 독일이 항복하는 날까지 '''독일 영공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독일군 병사라면 언제 어디서나 먹이를 찾는 송골매처럼 하늘을 떠도는 P-51의 은빛 날개를 볼 수 있었고 독일 공군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Me262도 전투 손실중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기지에서 이/착륙 도중에 P-51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P-51와 연합군의 제공권 장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Me262는 제트기이고 제트기의 속도를 이용하여 폭격기 요격을 위해 이륙했으며 속도를 이용하여 호위기를 무시하고 요격 후 이탈하는 전략의 특성상 공중전이 벌어질 일이 없으니 당연히 이착륙 도중의 손실이 커질 수 밖에 없기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본인들 기지에서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연합군이 제공권을 철저히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종래의 P-47과 비교했을 때 P-51이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에 대해 갖고 있는 우위는 그 항속거리라고 할 수 있는데 직접적인 전투성능과 큰 관계가 없던 이 장점이 전략적 측면에서는 실로 엄청난 강점이 되었다.
1940년 영국 본토를 공격하는 독일 공군이 큰 피해를 입고 결국 히틀러가 계획한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되면서 영국 왕립 공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 전투조종사들은 독일 폭격기들을 '동속으로 동행하며 근접호위하라'라는 괴링의 명령이 전달되었을 때 일제히 탄식을 했다고 한다. 본질적으로 제공권 장악을 위해서 폭격기들과 동행하는 것은 당시에도 상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으며 장점이라고는 폭격기 조종사들의 사기진작 이외에 전술적으로는 딱히 없다는게 중론. 호위편대는 전투기의 장점을 살려 고속, 고공으로 폭격기 본대에 한 발 앞서 가며 다가오는 적들을 색출하여 선제적으로 교전하고 막는 것이 최상의 호위전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독일 공군 조종사들은 자조적으로 'kettenhunde'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슬에 묶인 개'라는 뜻이다. 즉, 호위기는 개집에 사슬로 묶여있어봤자 소용이 없고 사냥개가 사냥꾼들 앞서 나가며 사냥감을 몰이하듯 줄을 풀어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1944년 초반까지 미군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호위방식을 사용했으나 준장으로 승진하여 미 육군 항공대의 공중전 전략전술을 총괄하게 된 제임스 둘리틀의 등장과 함께 상황이 크게 바뀐다. 둘리틀 준장은 기존의 호위방식을 버리고 "모든 전투기들은 호위기에 앞서 나가 독일 깊숙히 들어가서 자유롭게 사냥하라"는 사실상의 프리헌트(free-hunt) 방침을 낸다. 폭격기들과 함께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독일 공군 전투기들이 공격해오는 것을 반격하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숫적우위를 충분히 활용하여 폭격기들에 앞서 독일 영공 깊숙히 침투하여 독일 공군을 상공으로 유인하여 일제섬멸하는 유연한 전략을 택한 것이다. 떼거지로 폭격기 멀리 앞서 몰려다니면서 독일 공군이 대규모 요격편대를 형성하기 전에 이끌어내어 박살내고 돌아다니면서 맘대로 하라는 대담한 요격섬멸 전술이었다. 그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독일 깊숙한 영토까지 날아들 수 있었던 것이 P-51D였다.
이 방침은 폭격기 비행대 입장에서는 직접적인 보호자들이 사라지는 불안한 상황을 초래하기에 반대가 있었으나 도리어 결과적으로 독일 공군에 보급되는 연료, 탄약, 심지어 먹을것까지 전선으로 보내지는 게 차단되는 효과가 나왔고, 이는 독일 공군의 작전이 힘들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독일 육군마저도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연합군의 지상군을 막아낼 수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마찬가지로 소련의 물량을 처절하게 받아내고 있었던 상황에서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닥치는 서방연합군의 지상공격기들을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찌 보면 전술적으로 전략 폭격기들을 희생하는 어이없는 방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전략 폭격의 목적을 전투기들이 대신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P-51의 항속거리였다.
5.2. 태평양 전선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머스탱은 일본 본토에 쑥을 재배하기 위해 폭격기를 보낼때 호위기로써 나가거나 육상에서 일본군 항공기와 전투를 벌이었고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군 항공기를 상대로 싸우고 있던 헬켓이나 콜세어에 비해 덜 유명하기는 했지만 일본군 입장에서는 그거나 그거나 다 재앙이었다."가장 까다로운 게 카치스[45]
(P-51 머스탱, P-47 썬더볼트), 그 다음이 운동성 좋은 구라망[46] (F6F 헬캣)[47] 이다." - 사카이 사부로, 이와모토 테츠조
이미 600km/h 초반대의 F6F 헬캣과 600km/h 중반대의 P-38 라이트닝에게도 앓는 소리를 내던 일본 해군/육군 항공대의 안습 기종들에게 700km/h이 넘어가는 속도 + 고도에 관계없는 성능 + 고속 순항 + 장대한 항속력 + 소이탄 세례를 퍼부어 줄 50구경 기관총 6정을 갖춘 P-51은 '''이미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물론 극소수 살아남은 일본 에이스들은 상황 판단력과 조종술로 헬캣이나 머스탱을 상대로도 격추수를 조금씩 추가해나갔다. 2차대전 시기 공중전의 특징은 공중전의 결과가 기체의 스펙만으로 결정되는 게 절대로 아니며, 조종능력, 상황판단,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골라 싸울 수 있는 기량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3,000m 이하의 저고도에서는 저속선회전이 통용될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저고도에서는 에이스 파일럿이 모는 하야부사나 하야테가 애송이 파일럿이 모는 머스탱이나 헬캣을 잡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워낙 빈약한 일본 전투기의 방어력과 일본측 수뇌부의 병크 등이 겹치는 등의 악재로 종전까지 살아남은 일본 에이스는 독일보다 훨씬 적었다. 거기다 숙련 조종사의 부족이 독일보다 훨씬 심했던 일본군은 안습 그 자체. 거기에 일본 전투기 자체가 빈약한 방어력을 가졌기에 6정의 50구경 중기관총의 사격선을 일부러 흐트러지게 정렬해서 마치 분무기로 총알을 뿌려대듯이 대충 긁어대도 그 대충 긁어댄 총알에 격추되는 일본군 전투기들은 말 그대로 줄줄이 밥이 되었다. 일단 유럽 전선의 독일기는 그래도 방어력이 시망은 아니었기에 이런 식으로 조준선 정렬을 해두면 결정적인 화력이 부족해서 슬쩍 건드리고 마는 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군 전투기들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시망이라서... 이런 식의 정렬법은 헬켓이나 콜세어 역시 일본기를 대상으로 사용했다. 오죽하면 라바울 상공에서 일어나는 공중전을 보며 일본군들끼리 "연기를 내뿜으며 떨어지는 건 미군, 폭발하고 떨어지는 건 아군." 이렇게 알고 있었으니...
유럽 전선에 비해 P-51이 그렇게 부각되지는 못했던 이유는 유럽 전선과 달리 4발 중폭격기의 대편대에 의한 전략폭격이라는 양상이 대전 후반에 가서야 벌어졌고(사실, 제로센이 4발 폭격기 작전고도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기에 그 후계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고공 엄호의 필요성이 떨어지기도 했다. 미군은 대전 중반기에도 중국서 전략 폭격기들을 띄우고 있었다) 대부분의 항공전역이 섬을 거점으로 한 비행장간의 교전양상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P-38 정도의 항속거리로도 어지간한 작전 수행에 큰 문제가 없었고 이들의 항속거리를 벗어나는 목표물에 대해서는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가 목표로 다가가서 함재기로 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헬캣, P-38 등 기존에 배치되었던 연합군 전투기로도 일본군 전투기들을 신나게 학살하고 있던 상황에 똑같은 학살자가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당시 일본의 파일럿들의 수기를 보면 머스탱은 마왕급으로 취급된다. 여기서 P-51D보다 경량화되고 항속거리와 속도까지 강화된 P-51H가 몰락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일본이 항복해버려서 F5U 팬케이크, F7F 타이거캣, F8F 베어캣처럼 벤치 멤버가 되었다.
태평양 전선에서도 P-51의 기나긴 항속거리는 큰 힘이 되었다. 청두(성도)나 충칭(중경), 쿤밍(곤명) 등 중국 내륙에서 출격한 미군의 P-51들이 대만과 상하이의 일본군 항공대 기지를 공격하는 등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항속거리의 기체를 보유하고 있던 미군의 행동반경을 더욱 넓히는데에 공헌한 것이다.
P-51의 항속거리가 특히 빛을 발한 것은 1944년 6월 사이판 전투/괌 전투 이후이다. 이곳에서 출격한 B-29의 본토 폭격을 엄호하는 것은 종전시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P-51이 잘 수행해 낸 가장 중요한 전략적 역할이었다. 사이판/괌에 이어 이오지마, 오키나와 본토와 더욱 가까워진 기지에서 출격한 P-51은 F6F 헬캣, F4U 콜세어 등 미 해군의 함재기들과 함께 본토의 일본군 항공기를 일소하고 제공권을 확보하는 임무(fighter sweep)까지 확실하게 수행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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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미국 육군 항공대의 올리버 스트로브릿지가 몰던 코드네임 '에발리나(EVALINA)'의 P-51C는 쿠로에 야스히코 소좌의 Ki-84 하야테에 피격당해 불시착하여 일본 측에서 노획, 수리해서 일본 본토의 항공대 기지를 순회하면서 모의전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때 '''조종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머스탱의 압도적인 비행성능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고''' 모의전을 했다고 술회했다.[48] 일본 측의 기록과, 머스탱을 최초로 격추한 일본 파일럿인 요헤이 히노키 등 여러 파일럿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일본이 소수 수입한 Fw190과의 비교했을 때 최고속력은 밀리지만 강하성능은 매우 우수했다고 한다. 야스히코 소좌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 전투기들보다 조종하기 쉬웠다고 한다. 프랑스 만화 <엔젤 윙스:버마 밴시>에도 해당 기체가 야스히코 소좌와 함께 적 기체로 출연해 동남아 전선에서 주인공의 P-47을 포함한 미 육항대 기체들과 맞붙는데, 저 노획한 머스탱을 가지고 B-29의 정찰 비행 중에 시치미 뚝 떼고 호위기인 척 붙어서 같이 편대비행도 한 일화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
또한 아군 격추 사례도 알려졌는데, P-51 "Bad Angel" 기가 작전 첩보가 잘못되어 일본군 비행장에 착륙접근(정말로 착륙했으면 그 순간 전부 포로가 될 뻔 했다)하던 아군 C-47을 엔진 두개를 싹 다 작살내서 물에 강제착수시킨 사례도 있다. 당시 그 비행기에 P-51 조종사의 애인이 타고 있었다고(...).
5.3. 2차 세계대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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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출력으로 제트엔진을 사용하는 머스탱도 실험되었다. 위의 것은 XRJ-30-MA 램 제트 엔진을 날개 끝에 달아놓은 실험기고 아래는 포드 펄스 제트엔진(PJ-31-1)을 달아놓은 형태이다.
미국 육군 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 개편되자, P(Pursuit: 추격기) 부호는 F(Fighter) 부호로 교체되었으며, P-51도 F-51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원래는 주방위군 공군으로 돌리거나 퇴역시킨 다음에 해체하거나 표적기로 사용했는데 한국전쟁 발발 후 전투기가 부족한 한국 공군에게 공여해보니까 이게 의외로 쓸만해서, 결국 미 공군은 부랴부랴 F-51을 재취역시키기로 결정하고 남아있는 기체를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원래 머스탱만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우선 수송의 편의성을 위해 한국에서 가까운 미국 서부의 주방위군 기체부터 끌어모으니 마침 '''미시시피 강 서쪽'''의 주방위군 공군이 장비하는 전투기가 머스탱이었다. 미시시피 강 동쪽의 주방위군 공군은 썬더볼트를 장비하고 있었고, 대지공격 임무에는 P-47이 튼튼한 장갑과 공랭식 엔진으로 인해 더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보급 편의성 문제 때문에 한국전쟁에서는 거의 쓰이지 못했다.
이렇게 소집한 F-51은 한반도 전장에서 지상 공격 임무에 투입되어 대활약했다. 당시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한국의 거친 활주로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이륙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짧은 활주로에서도 쉽게 출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F-80C는 네이팜탄을 장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상 공격 임무에서 네이팜을 장착한 F-51이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49]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시찰 당시 호위로 따라붙은 전투기도 당대 최신예 기종인 F-80이 아니라 F-51이었다. 이때 북한군의 Yak-9 전투기와 맞붙었지만 그대로 격추시켜버린 전적도 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2차 대전 당시 '붉은 꼬리의 천사들'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터스키기 비행대'도 P-51로 Me262를 잡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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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촬영된 한국 공군의 F-51 편대. 한국전쟁 도중 촬영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중간에 복좌형인 TF-51이 보인다. 한국 공군이 TF-51을 보유한건 전후이다.
F-51D/K형은 6.25 전쟁 당시 신생 한국 공군에 지원되어 한국 공군 최초의 전투기가 되었고[50] 조종사들은 일선에서 열심히 활약해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등 어려운 임무들을 멋지게 수행해냈다. 이 때 김영환 장군이 목에 두른 빨간 마후라가 한국 공군 조종사의 상징이 되었고 교관인 딘 헤스 대령의 전용기인 18번기에는 그 유명한 신념의 조인이라는 문구가 적히기도 했다. 당시 참전하신 한국 공군 조종사들에게는 조종하기가 힘든 기체라는 인상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아마도 기존에 경험했던 연락기, 연습기나 일본제 전투기에 비해 일단 기체가 무거운데다가 조종간을 엄청 무겁게 해놓은 것이 겹쳤기 때문인듯하다.
6.25 전쟁 당시 제공권은 미 공군을 필두로 UN군이 담당하고 있었고 게다가 제트엔진을 장착한 1세대 전투기인 F-86이 있어서 사실상 한국 공군의 경우 제공권을 장악하는 전투기로 사용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훈련기가 아닌 한국 공군의 최초의 제대로 된 전투기이기도 하고 공격기, 즉 지상공격용으로 사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대한민국 공군은 전쟁 기간 동안 머스탱으로 총 8,495회(소티) 출격해서 각종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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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딘 헤스 소령의 18번기를 구현한 것인데, 노즈아트만 신념의 조인일 뿐 딘 헤스 소령이 탔던 해당 기체는 한국전쟁 당시 사고로 손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사진을 비롯한 신념의 조인으로 전시하고 있는 기체들은 그냥 노즈아트만 그린 것이다. 실기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복원기들의 사진을 참고하지 말고 차라리 당시 사진을 찾아보는 것이 낫다. 그런데 저 기체는 한국전쟁 발발일 기념으로 KBS에서 틀어준 머스탱 관련 다큐에서 무려 '''한국의 리히트호펜'''으로 불렸던 김영환 대령의 탑승기체로 밝혀졌다!
그나마 군 관련으로 재현을 잘 한거라면 타 비행단은 모르나 제10전투비행단 영내에 있는 전시관에 신념의 조인 머스탱 모형이 있는데 전쟁기념관에 있는 실물 머스탱보다 고증이 더 나은 편이다.
P-51D는 한국전 이후에도 중동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51] 구매자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당시 일어난 1차 중동전쟁에서는 밀수입한 P-51D를 투입하여 아랍 공군 측의 스핏파이어를 격추시키기도 했다. 더 재미있는건, 이 당시 이스라엘 공군의 장비에 독일제 Bf109도 있었을 정도였다.[52][53] 이후 수에즈 운하 사태 및 영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의 비공식적인 지원을 받은 카데쉬 작전(1956)에도 전폭기로 투입되어 많은 활약을 한다. 어느 용자 이스라엘군 파일럿은 수에즈 시와 이집트군 사이에 깔린 '''전화선을 프로펠러로 갈아버려서''' 통신두절 사태를 초래했다고.
1943년도에 머스탱을 받은 영국의 요구에 따라 경량화된 머스탱 연구가 진행되어 XP-51F를 시작으로 G, J형식의 시험기가 등장하였고 전쟁 말에 최후의 머스탱인 P-51H형이 개발되었으나, 소수가 실전 배치될 쯤에 전쟁이 끝나버려 대량 생산이 좌절되고 소수만 생산되어 알래스카 방어에 사용되었다. P-51H는 무거워진 P-51D보다 경량화되고[54] 항속거리도 D형의 3,412km보다 길어진 4,667km이며 대대적인 재설계로 더욱 날렵한 형상을 가지게 되었고 최대출력 2천마력을 넘기는 신형 V-1650-9[55] 엔진을 장착하여 최고속도가 758km/h에 달했다.[56] P-51H는 몰락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핵 두 방 맞고 일본이 항복하여, 비슷한 처지의 F8F 베어캣과 함께 한국전쟁 시기 주요 벤치 멤버로서 전쟁에 투입되지 않고 있다가 전후에 퇴역했다. 애초부터 만능기로 두각을 나타내던 F4U 콜세어와는 달리 P-51H나 F8F는 한국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항공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 F-51D는 콜세어보다 떨어지는 성능을 지녔지만 프로펠러기 특유의 기동성과 저속을 살려[57] 지상공격에서 큰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콜세어가 지상공격만이 아니라 아예 주력 야간전투기 자리도 차지하고 해군 유일의 에이스이자 프로펠러기 최후의 에이스까지 배출했으며 심지어 제트기인 미그기까지 때려잡는 무쌍을 찍은 것에 비하면 수수해 보이지만 머스탱의 엔진은 수냉식이었음을 명심하자.
그러나, F-51H의 파생형인 P-82(F-82) Twin Mustang은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공산군의 항공기를 격추한 미 공군 전투기로 기록된다. 여기서 격추된 것도 Yak-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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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에어쇼한다고 아들, 손자, 증손자급의 전투기와 함께 날아다녀 보는 사람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기도 한다. P-51에서 F-22까지 반세기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인류 과학 기술의 발전을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머스탱은 재현품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2차 대전 전투기들 중 하나다. 특히 미국에서 종종 개최되는 프로펠러기 레이스에서도 F8F 베어캣과 더불어 매우 인기있는 기종이라고 한다. 당장 미국의 유명한 포니카 포드 머스탱의 이름도 이 P-51 머스탱(Mustang)에서 따온 것이다. 그만큼 항공 레이싱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헨리 포드가 항공 레이싱 매니아이기도 했고. 물론 항공 레이싱을 할 때는 최고의 속도를 뽑아내기 위해 모든 무장을 제거하고, 엔진을 무려 3000마력짜리로 교체하는 한편, 날개 모양을 손보는 등 마개조를 거친다. 그렇게 개조를 거쳐 나오게 되는 속도는 현재까지 공식기록 531MPH(=854km/h), 비공식기록 900km/h이며 왕복엔진을 사용한 항공기중 가장 빠르다고 할 수 있다.
양덕후들 중에서는 부품만 구해서 자신만의 머스탱을 만드는 사람들도 꽤 많다. 영화 촬영 때마다 해당 항목 덕후로 돌변했다던 톰 크루즈도 그 중 한 명. 물론 매일매일 철저한 정비를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60년된 '날아다니는 관'을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짓. 실제로 2011년 9월 17일 미국 네바다 주 리노에서 열린 '내셔널 챔피언쉽 에어 레이스'에서 P-51D 머스탱이 관중석으로 추락했다.
퇴역무기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머스탱도 오랜동안 그저 옛날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머스탱의 인기가 급격히 상승하더니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상징이 되어있다. 과거에 방치되어 버려져 있던 머스탱들은 항공밀덕들의 드림 아이템이 되어 수리된 후 100만 달러에 거래된다.
또한 능력있는 양덕은 사람이 탈 수 있는 미니 머스탱을 만들기도.
국공내전 때에는 공산당이 최소 39기의 머스탱을 노획하여 몇년 간 잘 굴렸고 이후 몇 대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
머스탱의 마지막 운용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무려 '''1984년'''까지 운용했다. 다른 제트전투기들이 모두 퇴역한 뒤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쿠바와의 무력충돌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은 후 A-37로 대체되면서 완전히 퇴역. #
그 이후 10년간 소식이 없다가 1990년대에 JSF 사업에서 보잉이 제안한 기체 F-32 머스탱 II로 부활하려 했으나 충격적인 외형으로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젠 아예 터보프롭(터빈)을 얹은 머스탱도 나왔다.
6. 그 밖의 이야기들
동명의 전설적인 머슬카 때문인지 포드(자동차) 사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다.
일부 밀리터리 사이트에는 우리나라에서 유독 가죽옷을 무스탕이라 부르는 것이 이 P-51 머스탱(무스탕)의 조종사들 옷 때문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머스탱(무스탕)'이란 상표의 가죽원단이 많이 들어와서 이 원단으로 만든 옷을 무스탕이라 부르게 된 것. 이 원단은 양가죽 중에서도 어른 양의 가죽을 가지고 양쪽 면을 다 쓸 수 있게 한 것으로, 원래 국제적으로는 더블 페이스라고 부른다.
미군내 최초의 흑인 비행대인 제332전투비행대, 일명 터스키기 에어맨을 이루기도 했다.
또한 고속기동중 발생하는 마치 독수리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마찰음이 있다. 원리는 주익 기관총구의 미세한 구멍에 공기마찰이 일어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콜라병 주둥이에 특정 조건으로 바람을 불면 악기처럼 소리가 나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보면 된다. 비슷한 예로, 호커 헌터가 있다.
직접 들어보자.
우리나라 등록문화재 제666호가 바로 P-51 머스탱으로 2016년 10월 20날 지정되었다.
7. 매체에서의 등장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등장, 영화가 절정 중 절정에 다다른 그 장면의 충격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P-51은 밀덕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제법 눈에 익은 기종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도 존 밀러 대위(톰 행크스 분)가 권총으로 전차를 날려버린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59] 이 장면에서 라이언 일병과 존 밀러 대위가 주고받는 대사가 꽤 인상적이다.
- 같은 감독의 작품 태양의 제국에서도 일본군 비행장을 박살내버리며 엄청난 포스를 뿜어낸다.[61] 크리스찬 베일(당시 12세)이 연기한 주인공 제이미가 옥상에서 이 광경을 보며 환호하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 덕분에 P-51의 별명이 '하늘의 캐딜락'인 줄 아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사실 두 영화에서 P-51이 인상깊게 나온 것은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P-51 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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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 세시방향. 아군 항공기들이다.
>룩: 아, 나도 전투기 한번 몰아보면 소원이 없겠네... 자기 마음대로 하는게 진짜 비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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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가서 없애봐, 꼬마들아!
>버지: 세시방향. 아군 항공기들이다.
>룩: 아, 나도 전투기 한번 몰아보면 소원이 없겠네... 자기 마음대로 하는게 진짜 비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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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가서 없애봐, 꼬마들아!
>이런, 꼬마들은 벌써 돌아가나?
첫번째 독일 Me109 전투기 웨이브 때에는 주변에서 싸우는 모습이 보이지만 긴 항속거리라는 머스탱의 위상과 달리 중간에 연료가 모자라다며 철수한다.[62] 이는 시대배경상 P-47이 등장해야 하지만 당시 CG 기술의 한계상 실제 비행가능한 전투기를 촬영에 사용했는데 지금까지 비행가능한 전투기들이 충분히 남아있는게 머스탱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독일 Me109 전투기 웨이브 때에는 주변에서 싸우는 모습이 보이지만 긴 항속거리라는 머스탱의 위상과 달리 중간에 연료가 모자라다며 철수한다.[62] 이는 시대배경상 P-47이 등장해야 하지만 당시 CG 기술의 한계상 실제 비행가능한 전투기를 촬영에 사용했는데 지금까지 비행가능한 전투기들이 충분히 남아있는게 머스탱이기 때문이다.
- 한국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는 계획 단계에서 고증에 따라 이 P-51이 미군 전투기로 등장할 예정이었으나, 이후 고증을 무시하고 좀 더 강렬한 인상을 지닌 P-47 썬더볼트로 교체했다. 자세한 것은 영화속 공중전 장면의 오류 참조.
- 온라인 게임 라테일에서는 의인화를 당했는데, 비프로스트의 몬스터로 등장한다. 프로펠러 모자를 쓰고 날아다니며 모티브가 된 전투기 모양의 총을 쏘는 남자아이의 모습. 걸리쉬한 성격을 가진 듯 하다. 패션 아이템도 나왔다.
- 슈팅 게임 스트라이커즈 1945에도 본 기체가 등장하며, 스트라이커즈 1945 II 및 스트라이커즈 1945 PLUS에서는 P-38 라이트닝의 지원기체로 등장한다.
- NMK 제작, UPL 퍼블리싱의 1990년작 횡스크롤 슈팅 게임 US AAF Mustang에서 주인공 기체로 등장하여 루프트바페와 IJN을 상대로 맹활약한다. 이 게임은 이후에 타이토에 의해 메가 드라이브용으로 Fire Mustang이라는 제목의 이식작으로 발매된다.
- 고지전에서는 미 공군의 공중폭격을 맡는 기체로 잠깐 나온다.
-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에서 퍼시픽 한정 전투기 유닛으로 운용 가능하다.
- 큐라레: 마법 도서관에서는 유명세를 감안한 성능인지 최상등급인 슈퍼 레어+ 등급의 마도서로 등장한다. 일러스트도 예뻐서 한 인기하는 마도서.
- 월드 오브 워플레인에서는 미 육군 항공대 트리로 A, D, H형이 6, 7, 8티어로 등장하고 D형의 댈러스 생산형인 K형이 중국 7티어 프리미엄 전투기로 등장하며 쌍동체 전투기인 P-82B 트윈 머스탱과 F-82E 트윈 머스탱이 8티어 프리미엄 중전투기로 등장한다. 클로즈베타 시절에는 H형 대신 제트 엔진이 장착된 사양(P-51JP)이 들어가기도 했다.
이외에도 영국 6티어 프리미엄 기체로 2대가 등장하는데, 1대는 12.7mm 2정과 7.62mm를 장착한 Mk.I이고, 나머지 1대는 머스탱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20mm 4문이 장착된 Mk.IA이다.
- 워 썬더에서는 20mm 4정을 단 초기형 머스탱이 미국, 영국 소속으로 나오고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6정을 장착한 D-5형과 D-30형이 4티어로 나온다. 또 M2보다 연사력이 두배 정도 빠른 M3 6정에 추가로 8정을 더 달 수 있는 F-82E 트윈머스탱도 등장한다. 최근에는 H형도 추가되었다. 극후기형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약간 애매하지만 나머지는 버프먹고 날아오른 50구경의 강력한 화력으로 적기를 찢어버린다.
-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 에서도 미군 육군 전투기 트리에 등장했다. 실제 기체가 그랬듯이 이 게임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일단 속도 기동 스텟이 굉장히 높아 고수들이 잡으면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 녀석이 출시될 당시엔 이미 옆동네 나치의 Hs 132 급강하 폭격기가 공방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이기에(...)전투기 유저들은 그저 광광우럭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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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부전선 예고편에서는 다수의 편대가 등장해 지상공격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나중에는 영광이 모는 T-34의 전면 기관총에 맞아 불시착한뒤 다시 이륙하려하자 부러진 포신에 맞아 방향타가 떨어져 나가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 문명 6 미국 문명의 현대 시대 고유 유닛으로 등장한다. 극후반 유닛이라 일반적인 게임에서 오래 볼 일은 별로 없고 성능도 위상과는 다르게 영 좋지 않다.
- 야후 재팬에서 서비스중인 웹게임 편대소녀에서는 4성 미국기체로 등장. 문제는 대체 뭘 기준으로 수치를 정한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스테이터스. 대충만 설명하자면 같은 레어도에 속한 전투기 중에선 Yak-3, F6F 헬캣에 비하면 조금 낫고, Ki-100과는 엎치락 뒤치락, P-47 썬더볼트에게는 명중력에서 밀리며, A7M 렛푸는 체력 제외한 모든 면에서 밀린다. 날으는 캐딜락의 굴욕.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는 초반에 B.J. 블라즈코윅즈가 소속된 연합군 부대를 호위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그러나 게임 배경상 나치 독일은 이미 제트 전투기를 실용화한지라... 별 도움도 못되고 털린다.
- SD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공대공 공중유닛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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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함소녀에선 특이하게도 중국군 머스탱이 빤스템으로 등장. 국민당군 머스탱이 국공내전후 중공군에 넘어간것이라고.
- 대만 드라마인 일파청에서도 등장했다. 작 중 배경이 국공내전부터 50년대를 주 배경으로 하였고, 실제로 국공내전시기 운용한 기체이기 때문에 등장해도 이질적이지 않다.
- IL-2(게임)에서 1946을 플레이하면 미군기 진영에서 몰 수 있다.
- DCS World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도 등장한다.
- Bomber Crew의 DLC인 USAAF에서 전투기 호출 시 폭격기를 지원해준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P-51C가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
- 배틀필드 V에서 P-51D와 P-51K가 미군 항공 장비로 등장한다.
- 모바일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인 Gunship Sequel WW2에 전투기로 등장한다.
8. 둘러보기
[1] 말콤 후드(Malcolm Hood)는 장착되지 않은 상태이다.[2] 사실 실전 투입된 미군기중 2차대전 최고 속도를 가진 기체는 P-47M이다. 고고도 기체인 만큼 상승한도와 고고도에서의 피크속도는 더 빨랐던 것이다. 아예 F4U-4 처럼 모든 고도에서 더 빠른 기종도 있었다.[3] 실제로 이 슈퍼차져 기술 부족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스핏파이어는 독일군 Bf109에게 불리했다. 그나마 미국이 보내준 100옥탄가 연료로 버틴 것이다. 독일군은 8-90옥탄가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스핏파이어보다 상승력이 좋았다.[4] 그러나 1000lb 폭탄이나 110갤런 연료탱크는 날개에 무리가 가니 사용을 자제하라고 권고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론 500lb 폭탄이나 75갤런 연료탱크를 사용했다.[5] 이를 단순히 '비행 성능이 부족하다' 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2차대전 내내 머스탱의 공중전 성능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무게 배분 문제로 착륙 시 사고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한 목표로 보인다.[6] 도리어 한국전쟁에는 P-51D/K가 투입되어 지상공격용(어?)으로 사용된다. [7] 정확하게는 H형을 개발하기 위한 시제기를 기반으로 하였다.[8] 당시 미 국방부에게 "새 전투기 좀 개발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필요 없어요."하는 식으로 무시당하고 있었다.[9] 농담이 아니라 혼신의 공력을 들여 만든 설계가 맞다. P-51의 항력계수는 2차대전때 운용하던 레시프로 항공기중 최강이었던 0.169였다.[10]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으로 많은 미디어나 서적에서 이 층류익이 머스탱 설계의 핵심인것처럼 설명하나 NASA의 전신인 NAKA의 리포트나 NASA의 공식 서적들을 살펴보면 설계와는 별개로 층류익 효과는 40% 수준으로 공기역학적으로 동시대 다른 기체들과 비교해 그 효과를 체감할 수준은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총알이 창공을 가르고 생사여부가 종이 한 장 차이로 바뀌는 전장에서는 무의미하지는 않았다.[11] 여기서 말하는 저고도 성능은 속도 성능이다. 저고도에서 엔진수명을 팍팍 깎아먹는 고압분사를 했을시 약 3800m에서 637kph의 수평속도를 가졌다. 그에 비해서 동시대의 bf109 G-6와 같은 엔진을 지녔던 G-2의 경우 최고속력이 636kph였다 G-6는 G-2보다 무겁지만 MW50이 장착되어 있었으므로 최고속력은 비슷할 것임을 생각하면 확실히 고속이었던 모양.[12] G-6가 MW50을 장착한 건 AS모델로 넘어가서(44년 중 후반기) 이루어졌다. 즉, 머스탱 A형이 등장한 시기에는 그런 거 없었다. 즉, A형 머스탱이 세간에 알려진대로 비행성능 고자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고공에서 맥을 못 췄을 뿐...인데 미군은 장거리 폭격기 호위전투기가 필요했으므로 A형 머스탱은 계륵같은 존재였다.[13] 동시기에 미군도 같은 생각을 했다.[14] 이 때 기수 디자인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멀린 엔진이 기존의 엘리슨 엔진보다 100kg 가량 더 무거웠다. 이를 보조하기 위해 프로펠러도 4엽으로 교체하고, 동체 하부의 라디에이터도 큰 것으로 교체했다. 즉, 전반적으로 무거워졌다.[15] 이 공간 만들다가 크고 아름다운 P-47이 나오게 된 것. Ta152도 그 거대한 기체가 된 이유가 바로 3단 슈퍼차져가 들어갔기 때문이다.[16] 사실 P-39도 엔진을 후미로 돌리고 더 여유로워진 공간을 이용해 슈퍼차져를 달아서 고공성능을 높히는 게 목적이었지만 그걸 못 하고 출시했다가 저공에서만 쓰이게 된다(...).[17] 당대 미국제 전투기들과 비교하면야 가벼운 축에 속하지만, 동시기 타국 전투기들과 비교하면 영락없는 중량급 기종이다.[18] 당장 한국전쟁 때 F-51을 몰던 이근석 대령도 낮은 하강고도로 추락해 전사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표적고착인지 피탄당해서 추락했는지는 불명확하나, 태평양 전쟁 당시 1,400피트만 확보해도 충분히 공격후 이탈이 가능할 정도로 가벼웠던 일본 전투기(Ki-27을 몰았다고 한다)에 익숙했던 이근석 대령이었기에 표적고착이 유력한 추락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19] 사실 P-47이 바로 고공 장거리 폭격기 호위기였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유럽에 투입된 기체들은 전 코스를 붙어다니며 호위하지 못 했다(...).[20] 미군은 400대를 주문했다. 물론 실질적 이유는 미군이 필요했던 장거리 호위기의 등장 때문이었다.[21] 연료 탱크 탑재가 밸런스에 악영향을 주어 성능을 저하시킨다는 얘기가 있지만, 머스탱은 장거리 호위기라서 전투공역 상공에 도달할 때 즈음이면 성능을 저하시켰던 연료는 이미 써버리고 없어서 비행성능에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더군다나 항속거리 저하는 폭격기 호위임무에 피해를 준다. 영국 본토 항공전때 Bf109의 낮은 항속거리 때문에 결국 루프트바페가 패배한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제로센과 머스탱의 단순 비교가 무리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조종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답이 간단히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제로센의 항속거리편 조종사의 피로와 관련된 내용을 보면 된다.[22] 게다가 아이젠하워나 니미츠같은 미군 수뇌부도 독일계다.[23] 항공전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미국에서는 현장의 조종사 출신이라고 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심각한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빠심이 작용하는 분야이기도 하기 때문에 특히나 실증 및 비행역학, 유체역학연구를 통한 '실증'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다. 더구나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인간의 기억은 매우 편향적이며 실제로 매우 제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종사들의 증언이나 '이야기(anecdote)'에는 항상 '조금 회의적인 태도로 들어라(take in with a grain of salt)'라는 격언이 존재할 정도. 저런 프로그램에서 '기억하는 그대로' 재현해주는 것은 실제로 조종사는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믿고 있고, 굳이 그것에 실증으로 태클걸만한 가치가 없는 흥미 위주의 대중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저 일화에 대해서도 실제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분야든 학계는 만만치 않다.[24] 그러나 역시 학계에서도 각종 자료를 동원해 조종사의 증언을 옳다고 뒷받침하기도 한다. 모든 상황이라는 게 단순히 카탈로그 스펙에서 보이는 수치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며, 당시 상황을 원자 단위 수준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이상 제아무리 반론 자료를 가져와도 반박할 부분이 산더미처럼 나온다. 그나마 여기 나온 상황은 폭격기 승무원이 잘못을 감추기 위해 사기를 친 상황이라 거짓으로 판명단 것이지 유명 에이스의 수기나 인터뷰는 무조건 거짓이라고 넘겨짚는 순간 그걸 재현하려 노력했던 학계 인사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격이다. 역시 학계는 만만치 않다.[25] 미 육군 항공대의 P-51 손실집계는 2,520대이다. 독일측에선 2700대 가량을 잃고 3000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독일 측 자료는 대전 말 혼란으로 인하여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리고 각 비행대에서 각자 기록한 단편자료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기 요격 노력은 단발전투기 뿐만 아니라 쌍발전투기, 심지어는 경폭격기까지 동원한 총력 요격체제였고 폭격기만 중점적으로 요격하면 되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전술적 상황이 단순했다. 하지만 P-51의 등장으로 호위전투기와의 교전이 본격화되면서 숫적으로 열세인 방공부대가 폭격기 요격부대와 요격부대의 호위부대로 이원화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폭격기의 방어화망과 호위전투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압사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연합군 전투기들이 호위뿐만 아니라 자유추적 임무로 풀려나서 단독 전투기 공격을 시작하면서 공중에서 독일 공군 군용기가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게 된다.[26] -3 와 -7을 비교하면 도리어 고공 성능은 -3이 더 좋고 -7이 중/저고도에서 더 빠르다. 그리고 당시 엔진을 한 번 달면 끝이 아니고 개조 키트를 사용해 임무에 맞게 -3/-7을 교체하면서 사용했다.[27] 다만 머스탱이 원시적인 탄도컴퓨터라 할 수 있는 자이로 조준경을 탑재했다면, Fw190부터의 독일기는 원시적인 출력조절컴퓨터인 코만도게래트(kommandogerät)를 탑재해 간편한 조종 난이도를 자랑했다. 즉,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 독일기가 막 뒤쳐지는 것은 아니고 머스탱은 화력, 독일기는 조종성에서 장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28] 단 이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RC 비행기를 위해 개인이 Excel로 제작한 그래프이다. 신뢰성은 보장 못한다.[29] 그러나 사실상 라미나 프로우 날개가 혁신적이었다는 주장은 NACA에 의해 허구로 판명되었다.[30] 당장 조종석 바로 뒤와 바로 밑에 폭발물질인 연료통이 있는 셈이다.[31] 이 현상은 곡예 비행기들이 일부러 시도하는 기동으로 Snap-Roll이라 부른다. 에일러론을 이용한 기동이 아니라 테일 러더를 이용하는데다 엄청난 속도로 롤이 가능하기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에어쇼에서도 간혹가다 보여주는 재미있는 기동인데, 이걸 시행하는 기체들은 대부분 곡예 기체지 머스탱같은 전투기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32] 도살 핀(Dorsal Fin, 등지느러미)라고 부르는 것으로 수직꼬리날개가 실속에 좀 더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사실상 그 역할은 스트레이크와 같아서 높은 옆미끄러짐각 상황에서 도살 핀이 와류(Vortex, 소용돌이)를 생성, 수직꼬리날개의 실속을 막는다. 대문 사진에 나온 물건이 바로 앞쪽으로 늘린 모델. B형과 비교해보면 수직 꼬리 날개가 약간 앞으로 늘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33] 훗날 연구에 따르면 최고속도에서 기동시 1G당 필요한 스틱포스가 20파운드를 넘었는데 이것은 당대 미군기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수치이다.[34] 기체구조가 지나치게 튼튼하여 P-51H에서는 오히려 기체 무게를 줄이기 위한 경량화 조치가 취해졌다. P-51D의 G-limit은 설계단계에서 8/12G였는데 이는 지속/순간적인 제한치였다. 그에 비하여 P-51H는 7.3/11G을 기준으로 재설계가 이루어졌다.[35] G-10이나 K-4의 경우엔 고속이 아닌 이상 머스탱을 확실히 선회에서 이겼다. 특히, G-6의 엔진만 G-10, K-4의 엔진으로 교체한 기체와 스핏파이어 MK.IX를 몰아본 조종사의 경우, 격투전에 있어서 둘을 동급으로 보았다. 물론 이는 지속 선회력에 해당하는 말으로 정작 공중전에 중요한 급선회는 플랩 조작, 반응성이 뛰어난 P51이 우세를 점할 수 밖에 없다. Bf109의 플랩은 조작, 반응성이 낮기로 유명한 반면 P51은 버튼으로 간단히 움직일 수 있었다.[36] 그러나 이것도 운용 매뉴얼에 적혀 있었던 수치였을 뿐이다. 실제 상황에서는 엔진 과열만 잘 컨트롤한다면 그보다 더 오래 잘만 썼다. 이렇게 제한해둔 이유는 WEP 사용 시간이 총 5시간을 초과하면 엔진을 전부 분해 점검하는 귀찮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정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관리의 편의성을 위한 제한이었을 뿐. 총30분 지나면 엔진이 맛 가버리는 MW50과는 다르다. 물론 이는 109K형, Ta152 등에서 이 문제가 개선되기는 한다. 사실 이건 109가 워낙 엔진을 큰 걸 넣어서 보조 장치를 더 넣어줄 여유가 없어진 탓이 크다.[37] 살짝 비켜나가 보자면 머스탱은 엔진 출력은 살짝 딸리지만 고공 성능을 보충해줄 각종 장비가 다 들어갈 공간이 있었고, 109는 엔진 배기량빨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크다. 솔직히 말해서 독일군이 쓰잘데기 없이 비밀무기 만들지 말고 독소전 개전 때부터 MW50을 모든 109에 장착하도록 설계했다면 이 꼬라지 안 났을 거다.[38] 이 연료로 테스트 비행 자료를 작성했다. 그야말로 공장제 스펙을 뽑을 때.[39] 권터 랄도 이 훌륭한 항속거리에 칭찬을 남겼다. 미군의 물량과 머스탱의 훌륭한 항속거리의 시너지는 위협적이었다.[40] K-4같은 경우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너무 늦게 나와서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41] 사실 12.7mm 6정의 무장은 일본군의 20mm 2정, 12.7mm 2정 조합에 적어도 전투기끼리의 싸움에선 화력으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20mm를 4문이나 달고 다닌 호커 템페스트나 미넨게쇼스를 장탄해서 화끈한 불맛을 선사해준 독일 전투기들과 비교한다면 몰라도..[42] 베를린 상공에 나타난 P-51D Mustang을 본 순간 좌절하며 한탄한 말로 전해진다.[43]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없던 이유가 대주간의 손실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한가지 요인은 맞지만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며 독일측 지휘부의 오판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대주간 당시 독일 공군의 손실은 전투기 약 262기 가량, 100명의 파일럿 전사, 250명의 항공기 승무원 사상이며, 영미 공군의 손실은 폭격기 352기, 호위기 28기, 항공기 승무원 2000명 이상 포로 또는 사망으로 오히려 손실 자체는 연합군이 더 컸다. 물론 독일이 상실한 기체는 전부 전투기이며 슬슬 인적자원도 부족해지는 시점이라 방공능력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44] 여기에 대해서 반론으로는 1943년 10월 11일 슈바인푸르트 공습( 77기의 B-17 격추, 132기의 B-17 경파/중파, 호위기 P-47 한대 격추)과 역시 1944년 2월 넷째 주 Argument 작전(대주간)(357기의 영미군 폭격기 격추, 호위 전투기 28기 격추)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손실한 연합군 전투기/폭격기의 비율은 0.84로 폭격기 1대당 전투기 0.84대가 격추되었으므로 폭격기뿐 아니라 전투기와의 교전 또한 회피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첨언하자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의 전투기/폭격기 손실비가 0.86이므로 양쪽의 비율은 비슷한데 BoB에서 영국 공군이 독일 폭격기만 노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연합군 폭격기가 대주간 이전에는 제대로 된 호위기의 호위를 받지 못했던 점을 고려하면 호위받기 시작한 이후의 격차는 더 좁혀질 것이다.[45] 사카이 사부로를 비롯한 구일본해군 파일럿들은 육군전투기를 싸잡아 커티스 P40에 빗대어 카치스라고 불렀다.[46] 위의 카치스와 마찬가지로 해군기는 보우트, 그루먼을 통틀어 전부 구라망이라고 불렀다.[47] 사실 F6F 헬캣은 2000마력대 엔진 전투기 중에서는 가장 느렸다는게 함정. 함재기 중에서는 빠른 편이었다만, F4U 콜세어에 비해서는 별로이다.[48] 이는 현대의 군대도 같은 사상을 갖고 있으며, 적의 무기가 아군의 무기보다 성능이 월등할 경우 전장에서 적의 무기를 노획했을 때 그것의 성능을 아군에 다 드러내면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는커녕 역으로 깎아먹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적절한 행동이긴 하다. 이런 경우는 현대의 전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며, 대표적인 예가 걸프전 당시 이라크가 미국의 전투기를 노획했을 때이다. 강대국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할 경우 크고 아름다운 전략 무기 & 최신예 무기 위주로 선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다. 상대의 전술이나 실제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서 훈련생들에게 대항법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인 경우가 그것으로, 가령 미군의 어그레서 임무를 맡은 교관들은 교육생들을 쥐잡듯이 잡아댄다. 이때 어그레서 기체들은 자국의 항공기를 투입시키기도 하지만 종종 노획된 상대편 항공기를 투입해서 한도치에 이르는 성능 테스트와 훈련을 겸하기도 한다.[49] 출처.[50] 여기서 K형은 한국 공군형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D형과 거의 같은 사양의 파생형으로 기존의 잉겔우드 공장이 아닌 댈러스 공장에서 생산한 버전이다. 비행기의 프로펠러 외엔 D형과의 차이가 거의 없다.[51] 한국 공군에서는 1960년대까지 예비용으로 보관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52] 체코산 Bf109였다.[53]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종전 후 체코가 독일이 남기고 간 Bf109 생산라인을 가동했는데, 불행히도 엔진 공장은 없었기 때문에 폭격기용 융커스 엔진을 급한데로 장착해 생산한 기종이다. 엔진 자체는 폭격기 엔진답게 강력했으나 Bf109와는 궁합이 전혀 맞지 않았기에 운동성능이 나빠 체코 조종사들에게 mezek(노새)라 불리며 욕을 먹고 빨리 퇴역했다. 그러나 전투기 1대가 아쉬웠던 이스라엘에 싼값에 처분된 뒤에는 구국의 전투기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54] D형 기본 중량은 7,635 lb(3,363 kg)이고 H형은 6,585 lb(2,986 kg)으로 B형보다도 7,010 lb(3,179 kg) 가벼워졌다. 단 탄약과 연료를 넣은 상태에선 B형보다 무거웠다.[55] 물 분사 시스템을 장착한 엔진이다 #[56] 자주 언급되는 787km/h는 사실 잘못된 정보이다. 787km/h가 기록된 그래프는 아래의 그래프인데 [image] 공란을 보면 알겠지만 미완성된 이 그래프는 44년의 것이고 실제로 보고서에 들어간 그래프는 아래의 45년 그래프이다. [image] 보고서 코드가 같고 리비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완전한 보고서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57] 재미있는 점은 프롭기 중에서는 오히려 두 분야에서 별로인 기종이 머스탱이었다는 것이다.[58] MBC 방영판의 더빙은 기종 명을 모르는 관객들을 배려하여 '아군 항공기에요. '하늘이 도우셨군.'으로 바뀌었다.[59] 고증을 조금 더 보태자면 당시 항공기의 지상공격용 무장의 절망적인 명중률로는 티거만 정확하게 격파할 수는 없었다.[60] 해당 장면은 진짜 기체로 촬영한게 아니라 RC 비행기를 사용하여 촬영했다.[61] 이륙 중이던 일본군 전투기의 뚜껑을 따버리곤 기지 이곳저곳을 마구 폭격한 다음에, 할게 없으니까 활주로에 기총소사를 한다던가 여유롭게 주인공한테 손까지 흔들어주는 등 일본군을 아주 제대로 관광태운다.[62] 국내 자막판에는 이때 부조종사 룩의 대사에 "프랑스 놈들은 벌써 돌아가나?"라는 자막이 떠서 프랑스인 조종사들로 구성되었다는 오해가 있었으나 이는 리틀 프렌즈의 오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