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94
1. 개요
2차 세계대전 중 타치카와 비행기(立川飛行機)에서 계획하고, 만든 고공 요격기다. 쌍발기 형태에 목업 1기만 만들어진 Ki-94-I[1] 과 기존 단발기 형태의 시제기 1대가 만들어진 Ki-94-II가 있다.
2.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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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Ki-94-I의 개발과 중단
1943년(쇼와 18년) 태평양 전쟁에서 서서히 승기를 잃어가던 일본, 훈련기나 다른 회사로부터 설계를 넘겨 받아 전환 생산을 주로 맡고 있던 2류 업체 다치카와 비행기(立川飛行機)는 35세의 하세가와 타츠오(長谷川龍雄 : 1916~2008)[7] 를 중심으로 전투기 자체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주력 전투기 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한 나카지마 비행기(中島飛行機)와 가와사키 항공기(川崎航空機) 같은 대형 업체와 정면으로 부딛혀 경합을 벌이게 되면 적어도 다치카와 에게는 승산이 없었으므로 이전에 테스트했던 고고도 실험기의 경험을 이용하여 폭격기 요격용 고고도 전투기라는 특화된 영역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다치카와사는 2기의 엔진을 동체에 앞뒤로 배치한 직렬 쌍발 엔진에 전륜식 착륙장치를 채택한 단좌 전투기로 계획을 정리하여 이 설계를 육군항공본부(陸軍航空本部)에 건의했다.
B-29에 관한 첩보를 입수하고 잔뜩 쫄아있던 일본 육군은 같은 해 6월에 승인을 내리고 시작기 번호 Ki-94(キ94)를 부여해 개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8] 육군이 요구한 성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은 실용기와 실험기를 떠나 700 km/h 이상의 속도를 넘긴 일이 없었고, 상승 한도는 비무장 상태의 실험기도 12,000m를 넘어 본 적이 없어 15,000m라는 고공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물며 최소한 500~800kg은 나갈 것이 분명한 대구경 화기와 포탄, 그리고 수백 갤런의 가솔린을 실은 채 그 고도까지 올라가 그런 속도를 낸다는 것은 완전히 꿈의 영역에 속했다.
나중에 육군과의 협의에 따라 일부 요구 성능이 하향 조정되기는 했으나 이것저것 개량점이나 장비[9] 를 추가하여 설계를 진행하여 1944년 2월의 모의 평가까지 재출할 수 있었다. 세부 설계 검토인 심사 자체는 별 문제없이 잘 통과했으나, 곧 이어진 육군측과의 검토 회의에서 몇 가지 수정 사항을 지적 받았다. 우선, 조종사가 탈출하는 경우 후방 프로펠러에 닿을 위험이 있고 선정한 엔진의 생산에 문제가 있으므로 더 이상의 개발이 무의미해져 버렸다. 개발 중단 이후의 정책은 일단 보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세부 설계로 들어가면 배기 터빈 개발과 동체 중간에 배치되는 신형 냉각기 같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Ki-94-I의 공격기(습격기)형인 Ki-104(キ104) 또한 Ki-94-I의 개발 중지로 함께 중지된다.
기타 Ki-94-I의 목업 사진들#
4. Ki-94-II로 재설계와 개발
그러나 1944년 3월 말이 되자 육군에서 나카지마 Ki-87(中島 キ-87)의 설계를 적용시켜 터보 수퍼차저를 설치한 단발 전투기로 다시 설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다치카와 개발진들은 Ki-87 같은 재래식 설계[10] 로는 충분한 고공 성능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개량안에 관해 정식으로 고사했다. 실은 나카지마 쪽도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있던 여압 캐빈의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상황이어서 대대적인 개선이 필요했다. 어쨌든 업체에서 군의 지시[11] 를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에 육군항공본부는 분노했다.
격노한 육군항공본부의 기술부장이 직접 다치카와 본사까지 쳐들어와 압력을 넣으며 Ki-87 개조안을 강력히 재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다치카와사의 원래 구상인 직렬 쌍발 전투기 제작은 일단 보류되고 새롭지만 구태의연한 형태를 따른 Ki-94 II의 설계가 시작되었다. 육군으로부터 다시 주어진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더해 생산의 단순화와 기계적 신뢰성 확보 또한 요구되었다. 같은 해 5월, 프로펠러가 장착된 나카지마 Ki-87과 비교 검토가 이루어졌는데, 같은 계열의 엔진이었으나 과급기가 보다 안정성이 높은 Ki-94 II가 더 우세함이 분명해졌다. 이 테스트 이후 쌍발기 방안에 관한 제작은 완전히 취소되었고, 단발 전투기 복안이 정식으로 승인이 떨어졌다.
그 후 실물 심사, 배기 터빈에 대한 테스트를 통과하자 1944년 11월이 되었다. 이 과정을 지켜 본 육군으로부터 시제기 36대의 발주를 받을 수 있었는데, 납기는 1945년 8월 말이었다. 이듬해인 1945년 1월에는 대본영의 육/해군 통합 군수 정책에 따라 해군의 차기 전투기 미츠비시 렛푸(三菱 烈風)와 경합을 벌이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미군의 전략 폭격이 더욱 극심해지고 있어 도쿄에서 가까운 다치카와 공장 또한 피해를 입어 시제기의 제작은 자꾸만 늦춰지다가 7월에야 드디어 1호기 조립이 완료되었다. 8월 8일에는 지상 운전에 성공했으나 결함을 고치고 수정하던 작업이 한창이던 8월 15일에 패전을 맞이했다.
기타 Ki-94-II의 시제기 사진들#[12]
5. 패전 후의 Ki-94
유일하게 완성되어 있던 프로토타입 1호기는 미군 정보부가 일본에 와서 접수하여 그대로 미 본토로 옮겨졌지만, 다치카와 기술자들이 해산해버려 기체를 원상 복귀시키는 작업이 어려워져서 실제 비행 시험은 성사되지 못했고 그 후 1호기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엔진과 날개가 떨어져 나간 채 녹슬어가고 있는 동체의 사진만 전해지고 있다. 다만, 개발 주임 하세가와 테츠오의 아들 하세가와 아키오(長谷川明夫)와 하세가와 미츠오(長谷川光雄)는 아버지로부터 키-94의 도면과 기술 자료들을 넘겨받아 지금까지 간직해오고 있다.
6. 대중매체
6.1. 게임
- 월드 오브 워플레인에서 Ki-94-I이 일본 7티어 프리미엄 중전투기로, Ki-94-II가 일본 2차 전투기 트리의 8티어 전투기로 등장한다.
7. 둘러보기
[1] 처음엔 그냥 Ki-94였으나 개발 중지와 Ki-94-II의 개발에 따라 구분을 위해 Ki-94-I이 됐다.[2] 하219(Ha219) 엔진의 육해군 통합 명칭이다.[3] 1,100 m에서 2,350마력, 4,400 m에서 2,200마력, 11,000 m에서 2,040마력.[4] 10,000 m까지 17분 38초, 13,000 m까지 21분 3초.[5] 실물 크기 목업 1기[6] 조립까진 완료했지만 미완성인 기체를 포함하여 2대라고도 한다.[7] 훗날 토요타에서 주임과 설계, 심사 등을 맡는다.[8] 육군 장교들은 Ki-94의 이상한 형태에 놀라 처음에는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육군항공 심사부(陸軍航空審査部)의 장교들이 찬성하여 독특한 설계의 기본은 바꾸지 않아도 되었다.[9] 폭장, 자동 조종 장치, 기상 색적(機上索敵 : 레이다 같은 탐지장비를 가리킴), 여압실(気密室 : 여압 캐빈), 터보 수퍼차저 등등[10] 흔히 생각하는 일본 전투기의 그것,위쪽 참조[11] 유화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명령이다.[12] 5번째 사진 시제기 앞에 사람들이 찍힌 사진이 있는데, 가운데 인물이 하세가와 타츠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