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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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원
- 전장: 30.17m
- 전폭: 43.05m
- 전고: 8.46m
- 익면적: 161.54㎡
- 엔진: 라이트 R-3350-23/23A 복열 18기통 공랭식 성형 엔진 (2,200마력) 4기, 슈퍼챠저 장비
- 자체중량: 33,800kg
- 전비중량: 54,000kg (최대이륙중량 60,560kg)
- 최대속도: 574km/h
- 작전고도: 10,200m
- 항속거리: 9000km
- 작전반경: 5,320km
- 무장
-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 2연장 원격 포탑[3][4] * 기체 4개소
-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2정 & 20mm M2 기관포 1문 - 꼬리 포탑[5]
- 각 폭탄창에 총합 9톤 이하의 각종 폭탄[6]
- 핵폭격기 한정으로는 우라늄 폭탄 혹은 플루토늄 폭탄 1개.
2. 개요
Boeing B-29 Superfortress. 실전에서 대량운용된 기종으로서는 '''가장 큰 2차대전기 항공기'''이자 '''세계 최초의 핵폭격기'''다. 물론 이보다 큰 항공기도 존재했지만 전부 페이퍼 플랜이거나 땅/물에서 살짝 점프만 해 본 수준 뿐이고, B-29는 1943년에서 1946년까지 고작 '''4년 동안 4,000대''' 가까이 생산되어 날아올랐다. 워낙에 기계적으로 복잡했기 때문에[7] 개발과 실전배치 당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엔진 과열 문제는 B-29를 계속 괴롭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기계적 결함을 상당부분 극복하고 우수한 전략폭격기로서 일본에 폭탄의 지옥을 선사했다.[8]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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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날아다니는 요새 B-29. 뒤의 조그만 전투기들이 호위기인 P-51 머스탱이다. 이 사진은 전쟁 후반 레이더항법장치가 없는 P-51을 일본까지 유도하면, P-51들이 깽판을 친 다음 다시 B-29와 합류해서 귀환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B-29는 자동으로 엔진 출력이나 조종 조건이 조절되고 여압이 되는 조종실을 갖추었다. 당장 유럽 전선의 B-17만 해도 두꺼운 항공 점퍼를 입고도 꽁꽁 얼어가면서 비행을 했는데, 그냥 적당히 근무복 입고 작전이 가능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러한 근무복 차림의 B-29 승무원들을 본 일본은 '미국도 물자가 궁핍해서, 비행복도 안 입히고 비행기에 태운다.'는 식으로 자국 국민들에게 선전했다고 한다. 이렇게 객실 여압이 되면서 3만 피트를 비행하는 대형 항공기를 몇 천 대나 만들어 본 경험은 결국, 보잉의 민수용 제트 여객기 사업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방어무장도 충실해서 자동으로 목표를 향해 사격 가능한 다수의 기관총을 보유했다. 원래 B-17 및 B-24의 선회기총좌는 각각 한 사람씩 달라붙어야 하고 조준은 기총수의 감에 맡겨야 하는 안습한 상황인데다 허리 기총좌는 뚫린 큼지막한 구멍으로 찬바람이 휭휭 달려들고[9] , 동체 하방의 볼 터렛이나 상방의 선회기총좌는 그 큼지막한 크기 때문에 항력을 발생시키는 등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이것이 B-29에 와서 사수들이 중앙에서 각 터렛을 제어할 수 있는 중앙제어식 터렛으로 발전, 조준장치의 도움을 받는 사수가 다수의 터렛을 동시에 제어하여 하나의 목표에 집중포화를 퍼부을 수 있도록 개량되었을 뿐만 아니라 터렛 자체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항력이 줄어드는 부수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중앙제어 체제를 제어하는데 '''컴퓨터'''가 사용되었다. 물론 현대 기준으로 보면 그냥 계산기에 가깝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것이었다.[10]
비행성능도 좋았다. 3만 피트가 넘는 최대고도, 5000km가 넘어가는 작전행동반경, 덤으로 최대속도가 570km/h, 순항속도 350km/h 등등, 2차 대전에 실전 투입된 중(重)폭격기들 중에서는 최고의 비행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미국만이 보유한 원시적인 레이더 연동 대공포를 제외한 타국의 대공포로는 요격이 거의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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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능의 핵심에는 출력이 2200마력(1640kW)[11] 에 달하는 '''Wright R-3350 Duplex-Cyclone''' 18기통 공랭식 성형엔진이 있었다. 이게 4기가 장착되었으며 엔진 자체 출력으로나, 합산으로나 당대의 폭격기 중에서는 최강이었다. 물론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엔진이었지만 냉각계통에 문제가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엔진 무게를 줄이기 위해 여기저기 마그네슘 합금을 사용하는 바람에 엔진이 과열되면 바로 불타오르는 일이 잦았다. 시제기도 비행 테스트 도중 위의 문제로 추락, 급히 엔진커버를 더 잘라내 엔진에 더 많은 공기가 들어가도록 개량이 이루어졌지만 미봉책에 불과해서 B-29의 항공기관사들은 항상 엔진 온도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고 대출력 엔진답게 엔진 자체의 수명도 짧다는게 문제였는데 쇼미더머니 미국은 '''쿨하게 75시간마다 엔진 교환으로 해결했다.'''
B-29의 엔진 정비 주기는 매 25시간마다 실린더 분해정비, 매 75시간마다 전체 분해정비로 정해져 있었다. 즉 75시간 주기를 채운 엔진은 B-29 날개에서 탈거하여 전체 분해정비(오버홀)을 거치고, 그렇게 정비를 완료한 엔진을 다시 B-29에 돌아가면서 장착해서 사용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장거리 폭격기가 엔진수명이 75시간이라는 건 채 10회도 출격 못하고 엔진을 매번 들어내야 한다는 얘기이니 그만한 생산능력, 병참 능력이 받쳐주던 미국이니까 망정이지 다른 나라였다면 사실상 운용이 불가능했다.[12] 물론 경제력이 넘치는 미국이라 해도 고출력 엔진 4기를 수시로 갈아줘야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지만 초장거리 폭격이 가능한 유일한 기체다 보니 무리해서라도 운용해야 했기에(이마저도 타국이라면 불가능 할 수준이지만), 정비반에게는 여러므로 악몽이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티거 1마냥 B-29를 정비하기 위해 대규모의 정비반을 동원했으며 엔진 실린더 조율사같은 전문적인(?) 직책도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은 이미 2000마력의 출력을 자랑하는 프랫&휘트니 R-2800 더블와스프를 왜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R-2800을 듀플렉스-사이클론 R-3350와 비교하면 출력이 200마력 떨어지기는 해도 더 가벼워서 추중비는 약간 더 좋지만 유럽전선에서 P-47, F6F, F4U, B-26, PV-1,C-46 에 의해 43년이 돼서야 검증되었다. 그리고 B-29 설계시점에 이미 많은 기체에 공급이 예정되어 있는것과 맞물려 듀플렉스-사이클론 R-3350이 사용되었다.[13]
당시 7.7mm 기총은 이미 2차대전 초기에 일찌감치 화력부족 판정을 받고 주요 참전국의 전투기 무장에서 제외되었으나, B-29의 상대였던 일본의 경우 전쟁 초기의 주력기들을 제때 대체하지 못하는 통에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14] B-29는 미국제 기종답게 맷집도 좋아서 7.7mm 기총 따위는 그냥 씹어버리고, 20mm 기관포에 대한 내탄능력도 우수했다. 개발 당시에 주요 부위에는 12.7mm 중기관총도 모자라 20mm 기관포를 쏴가면서 테스트했고, 테스트 막바지에는 아예 연료에 모의폭탄까지 꽉꽉 채워넣은 전투중량의 B-29를 크레인으로 들었다 떨어뜨리는 식으로 기체의 강도를 측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거 개발/생산한다고 들인 돈이 원자폭탄 만드는 데 든 돈보다 많다는 소리도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20억 달러 정도 소요됐는데 B-29는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될때 아직 완성도 안된 개발단계에서 미 육군 항공대가 B-29 1600대를 선주문을 때려버렸다. 이때 미 육군 항공대의 요청액이 10억달러였는데, 개발과 실전배치,양산과정에서 비용이 불어나서 최종 약 30억 달러 남짓이었다고 한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때 단일 프로젝트에 가장 큰 돈을 때려박았던 게 이 계획일 정도
4. 실전
4.1. 태평양 전쟁
일단 좀 늦게 개발되다보니 미 육군 항공대에 배치되어 실전 투입된 것은 1944년으로,[15] 유럽 전선에서는 이미 형님뻘인 B-17과 B-24가 나치 독일을 충분히 갈아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B-29는 양산될 때마다 그 어마어마한 항속거리를 이용하여 일본을 공격하는데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 영국에도 소수의 기체가 배치되었으나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이미 B-17과 B-24, 영국 왕립공군의 랭커스터가 신나게 때려부수고 있으니 투입해도 별 이점이 없었다. [16]
미국의 전략가들은 어디에서 B-29를 출격시켜 일본을 공격할지를 연구했다. 별별 후보지가 다 있었는데 나중에 개발되는 마리아나 제도를 비롯해서 인도, 필리핀, 만주, 대만, 시베리아도 있었다. 특기할만한 계획으로는 알래스카의 알류샨 열도를 기지로 개발해서 일본을 치자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1942년~1943년 알류샨 전투를 치르면서, 이 동네는 전투를 치르기는 커녕 사람 사는 것조차도 적절치 않은 곳임을 깨닫고 B-29 운영계획을 쿨하게 포기했다.
그 다음으로 인도를 B-29 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이 실제로 추진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뜨다가, 그 뒤에는 중화민국 청두로 옮겨가고, 인도를 후방기지로 삼고 중국을 전진기지로 하여 일본을 치려는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 때문에 육지와 해상으로는 마땅한 보급로가 없었고, 남은 방법이라곤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 일명 '험프'(hump)를 넘어 중국 청두로 항공 보급하는 방법 뿐이었다. 폭탄과 기름은 물론이고 기지 병력들이 쓸 화장지조차도 하나하나 항공 보급을 하려다보니 당연하게도 가동율이 처참하게 낮았다. B-29 1기가 폭격임무 출격을 하기 위해 같은 B-29가 6회 이상의 험프 수송을 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비효율적인,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또한 당시 히말라야 산맥 험프를 넘는 항공 보급로는 그 자체로 대단히 위험해서 비전투 손실이 적지 않았다.[17] 타임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B-29의 일본폭격 편에서는 험프 수송을 이렇게 묘사한다. '''"험프는 단지 높은 봉우리였을 뿐만 아니라, 험상궂은 날씨의 번식처였다. 혹독한 추위와 갑작스런 폭풍 그리고 급작스런 낙하 현상은 마치 바윗돌로 비행기를 하늘에서 내리치는것 같았다."''' 험프 수송이 시작된 초기 수개월 간 손실은 무려 B-29 12기였으며 여기에 당시 비행단이 보유한 C-46 수송기 절반 손실이 더해진다.[18] 손실이 이렇게 심각했으니 당시 추락한 항공기의 잔해만으로도 항로를 잡을 수 있었다는 카더라가 나돌 지경이었다. 험프 수송비행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던지 이 물자수송 비행 임무는 전투 비행과 똑같은 영예가 주어졌으며, 험프 수송 비행을 무사히 마치면 B-29의 노즈 아트에 폭격 임무와 동일하게 표시를 할 수 있었다. B-29 기수에 낙타가 표시되어 있으면 험프 수송비행 임무 1회를 뜻한다. 폭탄 1개 그림은 당연히 폭격임무 1회이다.
폭격 임무 23회와 더불어 험프 수송(낙타) 10회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기 3회 격추 킬마크는 덤이다.당시 미군기들은 일본기 격추 표시를 욱일기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미군 최고의 에이스 리처드 봉 같은 경우 자신의 애기를 욱일기 킬마크로 도배하고 다녔다. 유럽전선에서 활약한 개비 가브레스키 같은 경우에는 당연히 하켄크로이츠 수집가
인도-버마를 지나는 도로인 이른바 '레도 공로'는 1945년에나 제대로 기능했고, 그나마 매우 험악한 지형 때문에 제대로 운용하기 힘들었다. 거기에다 일본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작전기지가 노출되었다.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을 감행해서 중국 남부 해안마저 장악하고 내륙으로 달려들기 시작하면서 B-29 기지가 일본군의 작전권에 들어가 버린 것. 이를 막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조지프 스틸웰을 위시한 미군 참모진의 오판 때문에 정예부대이자 유일한 전략 예비대인 Y군 및 클레어 셰놀트의 중미연합공군을 버마로 보낸 상황이었고, 여기에 자체 역량 부족이 겹친 결과 말 그대로 대패했다. 마침 마리아나 제도가 미국의 손에 들어오면서, 미국은 B-29 운용 기지를 태평양 쪽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미군은 1944년 일련의 전투들을 통해 괌, 사이판, 티니안 등 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의 주요 섬들을 손에 넣는다. 이에 미군은 얼씨구나 하고 B-29들을 이 곳으로 옮겨 배치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폭격기만 배치해서는 될리가 없었기에, 미국은 이들 섬에 원래 있던 일본군의 허접한 비행장을 새롭게 개발하고 거기다 그 옆의 빽빽한 밀림까지 깔끔하게 밀어버리면서 불과 몇달만에 거대한 비행장을 깔아버린뒤 B-29를 줄줄이 띄우는 신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다 해군의 쇼미더머니급 해상 보급로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험프 수송같은 비효율적인 작전은 필요가 없었으며, 수송선들이 B-29 운용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들을 날라와서 기지마다 가득가득 쌓아올리고 있었기에 가동율이 크게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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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초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North Field). 불과 몇달 전까지 조그마한 일본군 비행장이었고 그 주변은 열대 밀림이던 곳이다. 미국은 괌에도 사이판에도 이와 똑같은 거대 비행장을 깔았다. 여담으로 1945년 당시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은 미국 본토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었다. 이 비행장은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조선인(한국인)들이 만들었다.
중국보다는 괌, 사이판 등이 훨씬 일본 땅에 가까웠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서 발진하는 B-29 폭격기들은 연료는 아끼고 폭탄을 더 많이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초기에는 유럽 전선처럼 정밀 조준 폭격을 실시했다. B-29의 성능을 살려서 더욱 더 높은 고도에서. 그런데 제트기류라는 뜻하지 않는 복병을 만나면서 폭격 성공률이 개판이 되어버렸다.[20] 그 때문에 일본 본토 국민들은 폭격이 언제 오나 하며 날짜를 꼽아가며 기다리고 있었으며, 폭격이 오면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대본영의 엉터리 선전 덕분. 그래서 이후에는 이런 조준 폭격 대신 커티스 르메이[21] 의 소이탄 작전으로 도쿄 대공습과 같은 융단폭격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대도시들은 전부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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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가 자기 폭탄에 맞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안전하다. 유럽 전선에서 초창기에 빽빽한 컴뱃 박스를 이루고 폭격할 시기에는 실제로 위에서 떨군 폭탄에 맞아 추락한 폭격기들도 있었다. 때문에 그 이후로는 모든 폭격기들은 폭격 직전에 고도를 똑같이 맞춰 이전과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려 했다. 당장 윗 사진도 실제로는 모두 같은 고도에서 투하하는 장면으로 촬영 각도 등의 문제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폭격이 계속되자 그동안 일본 군부의 일방적인 선전만 듣고 이를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던 일본 국민들은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일본 군부의 통제에 반발하는 심리가 은연 중에 확대되어갔다. B-29의 폭격은 일본의 생산능력과 국민들의 전의에 큰 악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유럽 전선에서 독일에 대한 공습보다 더 극적인 효과를 보였다고 한다.
B-29의 활약에는 일본의 열악한 방공능력도 한몫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조기 경보능력부터가 최악이었다.
일단 지리적인 조건에서 이미 불리했는데, 태평양 방향의 일본 본토 바깥에 조기 경보용 레이더를 안정적으로 설치할 수 있는 땅이라고는 본토와 마리아나 사이에 있는 이오지마 같은 일련의 섬들 뿐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이오지마를 점령하면서 조기 경보능력도 같이 잃어버렸다.
또한 기본 장비인 레이더의 성능은 참전국 중 최악이었고,[22] 일본 관료제의 경직성 때문에 공습 경보와 요격 명령의 전파속도마저 느려서 경보가 울리는 시점에서는 이미 B-29들이 머리 위에 와 있기 일쑤였다. 레이더 성능이 부족하던 일본은 조기 경보를 위해 이오지마와 같은 일련의 섬이나 조기 경보 목적으로 태평양에 띄운 어선 등에 의존했는데, 이오지마와 같은 섬이 상실되고 재해권까지 뺏기면서 활용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기본 장비인 레이더의 성능은 참전국 중 최악이었고,[22] 일본 관료제의 경직성 때문에 공습 경보와 요격 명령의 전파속도마저 느려서 경보가 울리는 시점에서는 이미 B-29들이 머리 위에 와 있기 일쑤였다. 레이더 성능이 부족하던 일본은 조기 경보를 위해 이오지마와 같은 일련의 섬이나 조기 경보 목적으로 태평양에 띄운 어선 등에 의존했는데, 이오지마와 같은 섬이 상실되고 재해권까지 뺏기면서 활용이 불가능해졌다.
- 요격기의 능력이 부족했다.
B-29가 고고도 폭격을 하던 시절에는 B-29의 작전고도까지 올라가서 제대로 작전을 할 수 있는 기종이 얼마 없었다. 일단 해군의 제로센 같은 것들은 추격해서 올라가다가 뚝하고 추락하기 일쑤였고[23] 육군 항공대의 경우도 Ki-61 히엔이 수냉엔진을 갖추어 그나마 고도 10,000 m 까지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24] 대전말 일본의 열악한 공업능력으로 양산된 숫자도 그리 많지 않는데다가 품질까지 형편없어서 카탈로그상의 성능에 훨씬 못미치는 상황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B-29가 고도를 낮춘 뒤에야 어찌저찌 따라 붙었지만 이제는 고질적인 화력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거기에다 전쟁 후반기에 들어서 심각해진 본토의 공업능력 저하는 전투기 자체의 신뢰성과 성능을 제대로 갉아먹었다. 게다가 연료 수급 상황마저 열악해졌고, 전투기들을 운용하는 조종사와 정비사들의 자질도 수준 이하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러다보니 제대로 된 요격 전략이나 전술을 펼칠 수가 없어서 제각기 요격에 나선 전투기들은 20mm 기관포를 위시한 B-29의 우람한 방어화력에 공중분해당하기 일쑤였고, 궁여지책으로 카미카제까지 동원되는 판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P-51 머스탱 같은 강력한 전투기들이 호위기로 붙기 시작하자, 일본 육, 해군 전투기들의 손실은 급증했고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사실상 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예 건드리지도 못한건 아니어서 1945년 5월 25일 저녁에서 26일 새벽 사이 J1N 겟코로 B-29 5기를 격추한 해군의 쿠라모토 쥬조(倉本十三) 상등비행병조(B-29 총 6기 격추 2기 중파)와 Ki-45 토류로 격추 기록은 세운 육군의 카시이데 이사무(樫出勇) 항공대위(B-29 7기 격추), Ki-44로 6대를 격추시킨 요시다 요시오 대위[25] 등 일부 조종사들은 어찌어찌 격추시키기는 했다. 일본의 항공기에 의해서 격추된 B-29는 74대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 전선에서 영국이나 독일이 보여준 방공능력과 비교하면 참담한 수치다.[26]
B-29가 고도를 낮춘 뒤에야 어찌저찌 따라 붙었지만 이제는 고질적인 화력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거기에다 전쟁 후반기에 들어서 심각해진 본토의 공업능력 저하는 전투기 자체의 신뢰성과 성능을 제대로 갉아먹었다. 게다가 연료 수급 상황마저 열악해졌고, 전투기들을 운용하는 조종사와 정비사들의 자질도 수준 이하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러다보니 제대로 된 요격 전략이나 전술을 펼칠 수가 없어서 제각기 요격에 나선 전투기들은 20mm 기관포를 위시한 B-29의 우람한 방어화력에 공중분해당하기 일쑤였고, 궁여지책으로 카미카제까지 동원되는 판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P-51 머스탱 같은 강력한 전투기들이 호위기로 붙기 시작하자, 일본 육, 해군 전투기들의 손실은 급증했고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사실상 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예 건드리지도 못한건 아니어서 1945년 5월 25일 저녁에서 26일 새벽 사이 J1N 겟코로 B-29 5기를 격추한 해군의 쿠라모토 쥬조(倉本十三) 상등비행병조(B-29 총 6기 격추 2기 중파)와 Ki-45 토류로 격추 기록은 세운 육군의 카시이데 이사무(樫出勇) 항공대위(B-29 7기 격추), Ki-44로 6대를 격추시킨 요시다 요시오 대위[25] 등 일부 조종사들은 어찌어찌 격추시키기는 했다. 일본의 항공기에 의해서 격추된 B-29는 74대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 전선에서 영국이나 독일이 보여준 방공능력과 비교하면 참담한 수치다.[26]
- 대공포가 부족했다.
일본은 '신주불멸' 운운하며 본토의 대공화기 개발과 배치를 등한시한 탓에 B-29가 들이닥치던 시점에서 B-29에 대해 유효한 대공화기는 소수의 독일제 대공포의 복제품들 뿐이었다. 그나마도 계속된 공습에 차츰 소모되어갔고, 전쟁 말기의 미군 조종사들은 일본군의 대공포를 아예 없는 존재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다고 피해가 없었던건 아니고 일본 본토 공습 과정에서 54기 가량이 대공포에 의해서 격추되었다고 한다.
- 파일럿이 부족했다.
전쟁 후반 일본은 안그래도 요격기 성능이 형편없기까지 했던데다, 아군의 대공방어도 글러먹은(...) 상태에, 그놈의 카미카제에 쓰느라 숙련된 조종사도, 신참 조종사도 한참 모자랐다. 거기다 상대방은 킹왕짱 돈지랄 물량대국과 생산하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드는 콧수염 아저씨네 나라여서, 허구헌 날 폭탄 맞고 허구헌 날 포격당하고 허구헌 날 자살공격하다가 허구헌 날 털리는(...) 상태였다. 자세한 건 일본 본토 공습 문서 참고.
한편, B-29들은 주요 도시들에 대한 공습의 와중에 일본 근해에 대해 기뢰 부설 작전도 실시했는데 작전명이 Starvation(기아)이었다. 당시 일본의 물자 이동량 중 큰 비중을 가졌던 해상 수송을 사실상 마비시켜 전쟁 말기의 일본을 말 그대로 굶겨죽였다. 역시 자세한 건 일본 본토 공습 문서 참고.그리고 무엇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작전으로 B-29는 그 불멸의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게 된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B-29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태평양함대 사령관 미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나 태평양방면 지상군 총사령관 육군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같은 지역사령관이 아닌 총사령부격인 합동참모본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뢰부설작전 시행시에도 니미츠는 B-29를 운용하던 20폭격사령부에 직접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합참에 동원을 요청해야 했다. 전략무기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B-29의 특성을 반영한 편제였는데, 이는 종전 후 미 육군 항공대가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미합중국 공군으로 거듭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2. 한국전쟁
한국전쟁 때에도 B-29는 그야말로 대활약을 펼쳤다. 당시 B-29들은 주로 일본의 요코타 기지(横田基地)[27] 또는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고, 동해만 건너면 바로 한반도였기에 폭격 작전에는 최상의 환경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가장 유명한 작전으로는 1950년 8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의 '융단폭격'을 꼽을 수 있다. 낙동강 전선 교착상태에서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를 발진한 B-29들은 왜관 상공을 거쳐 낙동강 서쪽 구미~약목 구간 5.6㎞ × 12㎞ 직사각형 구역에 집중폭격을 가했다. 이때 투하한 폭탄은 무려 960톤, 3,234발로 북한군에게 실질적인 피해는 물론이고 지휘부에 매우 큰 정신적인 충격을 가했다고 한다.[2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p.63. 1950년 겨울까지 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UN군이 북진을 시작하면서 B-29는 일본에서처럼 마음 놓고 북한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북한 지역은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산업기반들이 많았는데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고, 휴전 당시에는 평양시에조차 멀쩡한 건물이 달랑 '''2곳'''만 남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29] 실제 미 공군은 한국전쟁 동안 2차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비좁은 북한 지역에 퍼부었다. 원산도 너무 많이 두들겨 맞아서 원산폭격이란 말이 탄생할 지경이었으며, 이때 제대로 당한 북한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평양이나 기타 요지에 방공망을 촘촘히 깔아놓는 대공 전략을 취하고 있다. 요컨대 B-29는 태평양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폭격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제트전투기인 MiG-15가 등장하자 사정이 달라진다. 만주 접경 압록강 지역 상공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MiG-15기들은 B-29에 대해 혹독한 통행세를 요구했다. MIG-15들은 기껏해야 20mm 기관포를 장비했던 일본군 전투기와는 차원이 다른, 중폭격기 요격용으로 개발된 대구경의 37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있었고, 대 프로펠러 전투기 추적에 맞춰져 있던 B-29의 기총 조준기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력과 기동력을 자랑했다. 덕분에 B-29는 제대로 이들의 먹잇감이 되어 우수수 털려나갔다. 결국 28대의 B-29를 상실한 끝에 "이대로 가다가는 B-29 폭격기 편대 전멸 예상"이라는 보고에 따라 주간폭격이 중단되었고, 1951년 11월 이후로 B-29의 모든 폭격작전이 야간폭격으로 전환되었다.[30] 한국전쟁 중반 이후 시점의 B-29 폭격기들을 보면 동체의 하부가 검은색으로 도색되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야간폭격을 위한 위장도색이다.[31]'''"특히나 미그기에게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꼬리를 내줘선 안된다. 공산군이 가진 이 경쾌한 은빛 제트기는 작은 덩치인 주제에 37mm 대포와 23mm 기관포 2문을 갖췄고, 그것들이 불을 뿜으면 제아무리 큰 비행기라도 순식간에 박살나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무기가 쏘아대는 테니스공만한 불꽃에 맞아 동체가 두동강나는 B-29를 직접 목격하고 몸서리친 일도 있었다. 하물며 내가 탄 세이버는 한 발만 명중해도 날개가 꺾이거나 공중분해될 것이다."''' - 브루스 힌튼 중령
참고로 B-29가 야간폭격으로 전환된 뒤 공석이 된 주간폭격기 자리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른 A-26이나 B-26이 꿰찼다.[32] 또한 폭장량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제트기라 속도가 빨랐던 F-80 썬더제트 역시 주간 CAS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 사태는 당시 개발이 진행중이던 후계 폭격기 개발사업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이에 따라 최종 개발된 것이 B-52 스트라토포트리스다.
전선이 교착되어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주된 전황을 이루던 한국전쟁 중후반부터는 야간에 일단 폭탄을 적재하고 뜬 다음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 상공을 비행하면서 지상의 요청에 따라 목표에 폭탄을 투하하는, 오늘날로 치면 근접항공지원(CAS)과 유사한 폭격작전을 많이 수행했다.[33]
한국전쟁 B-29편제중 특이한 점은 기존의 전투비행단/비행단들이 미 공군으로 독립후 Group에서 Wing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581 통신/보급 Wing을 제외하면 전부 2차대전 편제인 Group으로 운용된 점이다. 이들은 전략공군사령부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배속된 FEAF(극동공군)에서 하위제대인 Bomb wing을 구성하지 않고 FEAF bomber command 아래에서 Group과 독립 squadron으로 운용되었다.
B-29 운용부대(98 Bomb Group은 예하 4개대대, 나머지 Bomb Group은 예하 3개대대 구성)
FEAF bomber command 가데나 - 19 Bomb Group
FEAF bomber command(전략공군) - 22 Bomb Group, 92 Bomb Group, 98 Bomb Group, 307 Bomb Group,
31전략정찰대대, 3레이더조정분견대, 10레이더조정분견대, 512기상정찰대대,
56전략정찰대대, 514기상정찰대대, 54기상정찰대대, 2구조대대, 34구조대대, 37구조대대,
43공중급유대대, 91전략정찰대대, 581통신보급 Wing.
4.3. 퇴역 후
4,000대 가까이 생산되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폐기처분된 것이 많다. P-51 머스탱 같은 단좌 전투기들은 비행 애호가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경우라도있지만, B-29 같은 거대한 4발 엔진 폭격기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2020년 현재 외형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남아있는 B-29 기체는 총 26기이다. 이 중 미국 내에 전시되어 있는 기체가 24기, 그리고 미국 이외의 국가에 전시된 것은 단 2기로서, 1기는 영국, 1기는 바로 한국에 있다.
실제 비행이 가능한 기체는 정말 희소한데, 2020년 기준으로 단 2기, FIFI 및 Doc 뿐이다.
'FIFI'(일련번호 44-62070)는 미국의 민간 항공기 수집단체인 CAF(Commemorative Air Force)가 복원하여 소유하고 있는 기체이다. 처음엔 거의 폐품 상태였던 걸 간신히 살려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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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비행 가능한 기체인 'FIFI'
'Doc'(일련번호 44-69972)는 'Doc friends'라는 비영리 단체에서 차이나호에 버려져 있던 기체를 수리해서 비행가능한 상태로 복원한 것이다. 2016년 7월 17일 초도비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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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가능한 2번째 기체인 B-29 'Doc'
비행이 가능할 수도 있었던 기체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린란드에서 사고로 불시착해서 버려졌던 'Kee Bird'(테일 넘버 45-21768)라는 기체인데, 복원 과정 중에 화재가 발생해서 불타 버려졌다(...).
Kee Bird 복원과정과 화재사고가 발생하는 순간을 담은 유튜브 영상[34]
위에서 언급했지만, '''현재 B-29가 미국 외의 국가에 전시되어 있는 건 한국과 영국 뿐이다.'''[35] 그만큼 귀한 기체.
영국에 있는 기체는 덕스포드(Duxford) 제국 전쟁 박물관 분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잉 랜턴 공장 생산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한 기체이기도 하다.
한국에 있는 기체는 1972년에 미 공군이 기증한 것으로서 보잉 위치타 공장 생산분(일련번호 45-21739). 현재 경남 사천 항공우주박물관에 있다. 기증받을 당시 시대가 시대인만큼 "통일호"(Unification)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다. 1972년 6월 3일 B-29의 한국 도착을 알리는 전우신문
이 기체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여의도 안보종합전시장(여의도광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 B-29 본체 말고도 R-3350 엔진 프로펠러 1개가 따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직접 들어보고 어마무시한 무게를 체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여의도공원 문서 중간에 있는 여의도광장 사진에 보면 거대한 B-29 기체가 주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전쟁기념관이 용산에 따로 개관하면서 주관 기관 간 인수협상이 틀어지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경남 사천의 항공우주박물관으로 이전 전시되어 있다. 만약 B-29가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었다면 B-29와 B-52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단한 일이었을텐데 아쉬운 일이다.
B-29를 개량한 B-50과 XB-44는 2차 대전 이후에 생산이 시작되어 한국전쟁까지 생산되었다. 그리고 공중급유기 버전인 KB-50은 베트남 전쟁 초기까지 이용되었고, 기후 정찰용인 WB-50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정찰기의 활동을 보조했다. 수송기 버전인 C-97도 있었고, 이를 여객기 버전으로 개수한 보잉 377 등.
5. Tu-4
소련에서 B-29를 복제하여 생산한 중 폭격기, 장비들이 소련제로 바뀌고 일부 성능이 개량되었다. 문서 참조
6. 핵폭격기(실버 플레이트)
핵무기 운용 임무를 맡은 509 혼성 비행단에서는 조금 특별한 사양을 운용했다. 이른바 "은쟁반 B-29"(Silverplate B-29)로서, 일반 B-29와는 차이가 있다. 가변피치 프로펠러 등 많은 신기능이 들어갔고, 핵무기 투하로 인한 일반형보다 높은 고고도 비행을 위해 후미 기관총좌를 제외한 모든 무장을 제거하고 심지어 장갑판도 일부 떼어냈다. 일반형 B-29와 외견상으로 가장 큰 식별점은 기체 후미 총좌를 제외하고 기체 상부/하부/측면의 모든 총좌(터렛)가 제거되어 있다는 것.
6.1. 에놀라 게이
'''세계 최초의 핵폭격기.'''
미 육군 제509 혼성비행단(BG) 제393 폭격비행대대 소속 B-29의 애칭. 원자폭탄을 투하한 기체로서 B-29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에놀라 게이 문서 참고.
7. 창작물에서의 B-29
- 일본에게는 이 폭격기가 여러가지로 안 좋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 배경이 등장하는 창작물에서는 꼭 나오며 대체역사물 비스무리한 장르에서는 아예 주인공들이 주로 써는 몹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일본제 프라모델은 후지미에서 1/144 스케일로 발매한게 전부.[36] 그런데 재현한 모습이 에놀라 게이와 도쿄 대공습이란 게 아이러니. B-24나 B-25도 존재하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 기체를 재현한 아카데미 1/72 B-29는 일본에서 아주 대박으로 팔렸다고 한다. 기본형도 매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핵폭격기는 특히 대박이었다고.[37] 미제 모노그람 1/48 빅스케일 B-29 역시 핵폭격기 마킹이 제일 인기 좋았다고.
- 반딧불의 묘(애니메이션)에서 초반부 장면이 B-29 편대의 폭격 장면으로, 당시 소이탄 폭격과 화재의 무시무시한 위력이 잘 드러난다. 참고로 이 장면을 그린 애니메이터는 바로 그 안노 히데아키라고 한다. "이 메카닉만큼은 내가 그리고 싶다"며 지브리를 찾아왔었다고...[38]
-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등장인물인 카누카 클랜시의 할아버지가 B-29 폭격기의 기장인 미군 장교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 건쉽배틀에서 4티어 폭격기로 나온다. 자동 기관포가 달려있어 돈벌이에 좋은 기체로 꼽힌다.
- 폴아웃: 뉴 베가스: 부머들이 넬리스 공군 기지에 보관된 B-29와 미드 호에 빠져있는 B-29를 수리해서 후버 댐 전투에서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이나 카이사르의 군단에게 시원하게 폭격을 퍼붓는다. 옛날부터 부머들의 꿈은 B-29를 타고 하늘을 날아 야만인들에게 폭격을 퍼붓는거라나.
- 폴아웃 4에선 주인공의 독백 인트로에 등장하여 핵을 투하한다. 다만 미익의 외형이 H 모양으로 바뀌어있다.
- 더 퍼시픽 9화에서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타 지역으로 이동할 때 저공비행하는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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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5에선 원자폭탄을 투하할 때 등장한다. 핵미사일이 나오기 전의 유일한 핵 투발수단으로, 유닛 이름은 원자폭탄이지만 거점 도시에서 B-29가 발진해 핵 폭격을 하는 애니메이션이 쓰인다. 엄연히 소모성 유닛 원자폭탄의 연출일 뿐이므로 돌아온 B-29에 재래식 폭탄을 실어 재사용하거나 할 수는 없다. 다만 다음 시대의 핵미사일이 도시 외에 미사일 순양함과 핵잠수함에 탑재 가능한 것과 달리, 원자폭탄은 도시를 제외하면 오직 항공모함에만 탑재 가능하다. B-29를 발진시킬 수 있는 항공모함이 있을 리 없지만 어쨌든 핵잠수함에 탑재시키는 것보다야.
-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에서 연합군 중폭격기로 등장한다.
- 워 썬더 미국 4랭크 폭격기로 등장한다. 최초 게임에 추가되던 시점에는 미쳐돌아가는 폭장과 떡칠된 방어기총으로 진정한 공중요새가 뭔지 보여주었으나 기관포 강화, 기관총 강화, 폭격기들의 내구성 전체적 하락 등 계속되는 폭격기 죽이기 정책으로 인해 20 mm급을 초과하는 기관포 세례를 받고 몇 초 사이에 불덩어리로 화하는 신세가 되어, 자매인 Tu-4와 함께 괜히 수리비만 눈 돌아가게 비싼 뒷방 퇴물로 전락해 버렸다. 특히 풀업 수리비가 8만 라이온을 넘기기에 한번 출격하면 적자를 피하기가 쉽지 않다.
- RTS게임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에서는 미국 진영의 2차 세계대전 생산 가능한 특수유닛으로 등장한다. 주 무장은 핵폭탄이며, 한발만 투하할 수 있다.[39] 대신 가격이 비싸다는게 단점. 독일의 V2 로켓과 같은 슈퍼무기 포지션이다.[40]
- 도미네이션즈에서 글로벌 시대의 두 번째 폭격기로 등장한다.
8. 그 외
- B-29 생산공장이 있던 도시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오마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떨어트린 에놀라 게이도, 박스카도 모두 오마하에서 생산되었다.
- 일본을 쑥재배가 풍년인 곳으로 만든 장본인인데다가 한국전쟁에서도 쓰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나름대로 알려졌다. 나이 80을 넘어 90을 바라보는 노인 분들 중 '삐이구', '삐이십구'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심지어 이름을 따온 과자도 있었다.
- 크고 아름다운 폭장량 덕에 작은 비행기를 탑재할 수도 있었다. 이 덕에 대전 이후 척 예거, 스캇 크로스필드 등으로 대표되는 로켓 추진 초음속 비행 연구는 물론이고 기생 전투기 연구에도 애용되었다. 물론 한국전 이후 점점 퇴역하면서 B-52로 대체되었으나 B-52는 의외로 가늘기 때문에 결국 날개 한 쪽에 비행기를 매달고 불균형한 상태로 날아야 했고 여러 엔지니어와 테스트 파일럿들은 B-29 다시 불러오라고 성화를...
- Tu-4라는 복제품이 있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 군정 당시 독도 폭격 사건에 동원된 기체이기도 하다. 당시 미군은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였는데, 폭격 예정을 사전에 고지하지 않아 독도에서 어업을 하던 한국인이 백 명 가까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으며 미군의 상습적인 독도 폭격이 독도의 강치 멸종에 일조했다고 보는 저작도 있다. 다만 강치는 일제시대 멸종하지 않았고 1950~60년대까지 상당한 개체가 남아있었으며, 직접적인 멸종 원인은 우리 어민들의 남획이었기 때문에 독도 폭격으로 인한 강치 멸종 운운은 그냥 그런 주장이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1]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도장 상태를 보여주는 B-29. 참고로 이 기체는 하단에 서술된 2019년 현재 실 비행 가능한 "Doc"이다.[2] 위 사진은 실험기인 YB-29이다. 총 14기가 생산되었다.[3] 모델에 따라 기수 상단에 위치한 포탑은 4연장이기도 하다.[4] 핵폭격기에서는 꼬리 포탑을 제외하고 포탑이 모두 제거되었다.[5] 20mm AN/M2는 초기형에만 장착되었으며 이마저도 운용될때 제거되었다.[6] 이전 문서에는 폭탄창이 2개이므로 총합 18톤이라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총합 9톤이다. [7] B-29를 운용하는 조종사, 승무원 및 정비장병들도 입문단계부터 전용 양성과정을 두고 육성했다고 한다.[8] A6M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한다면, B-29는 해방을 상징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의미를 갖던 기체였다.[9] 이런 방식의 허리 기총좌들을 가진 미군 폭격기들의 후기 생산형들의 경우 총안구를 뚫은 방풍창으로 이 구멍을 막는 개선이 이뤄졌지만 총안구나 여타 틈새로 외부 공기가 들어왔으므로 바람만 좀 덜 들이친다 정도로 그쳤다.[10] 컴퓨터란 이름 자체가 계산하는 기계를 의미하고 본래의 개발 목적을 안다면 당연한 것이긴 하다. 대전 중반을 넘어서면서 도크에 들어갔다 나온 미군함들 역시 레이더+사격통제계산기와 연동되는 전동식 대공포 마운트를 채용했다. 정작 그걸 공여받은 우리 해군은 쓸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안습한 이야기.[11]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엔진의 약 3배.''' [12] 독일의 He 177만 봐도 알 수 있다. He 177은 엔진의 부적절한 설계로 인하여 뜨거운 배기가스가 빠져나오는 곳으로 윤활유가 떨어져서(...) 화재의 위험이 매우 컸고 이후 아예 엔진을 교체해서 이 문제를 완화시키지만 근본적인 냉각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전후 영국의 롤스로이스 기술진이 이 설계를 보고 경악해서 이건 다임러-벤츠에서 설계한게 아닐거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13] 혹은 전투기와 폭격기의 엔진 구조가 각각 달랐다 쳐도 기체 설계를 거기 맞춰서 하면 된다. VLR 폭격기 계획의 백업기종인 B-32도 R-3350엔진이 쓰이도록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수급문제를 떠나 애초에 결전병기성격+신기술투입의 예외라고 봐야한다. 실제로 미국이 전시 체제에 돌입하고 국방비가 대폭 증가하면서 전시 특수로 탄생한 신무기 체계의 연구 개발, 양산에 성과가 컸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체계도 대거 활용하여 비용절감과 조기생산을 위한 노력도 어마했다.[14] 물론 주무장은 일단 20mm 기관포를 달아주기는 했다.[15] 그래도 '''동시에''' 개발되던 B-32보다는 일찍 투입되었다.[16] 다만 시간이 지난 뒤 1950년, 보유중인 폭격기의 노후화와 신규 폭격기의 개발 지연으로 당장 핵 폭격기가 필요했던 영국 공군이 B-29를 '워싱턴 B.1 (Washington B.1)' 이라는 제식명으로 소수 도입한 적은 있다. 그러나 불과 2년만에 캔버라 폭격기가 등장했고, 사고로 손실된 기체나 호주로 보내진 2기를 제외한 전량 미 공군으로 반환되면서, 남아있는 워싱턴 폭격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https://forum.warthunder.com/index.php?/topic/112485-raf-washington-b1-the-british-b-29/ [17] 항공기가 엄청나게 발달한 요즘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 항공편은 사실상 없다.[18] 라이프, WORLD WAR II B-29의 일본 폭격, p. 54.[19] 에디 앨런(Eddie Allen)은 보잉의 유명 테스트 파일럿이자 설계자이다. 그는 B-29 설계와 제작에 직접 관여하였고 무엇보다 원형 제1호기로 B-29 처녀비행을 성공시킨 사람이다. 에디 앨런은 1943년 2월 원형 제2호기 시험비행을 하던 중 엔진 화재로 인한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본 기체는 그를 기리기 위해 보잉 직원들이 돈을 모금하여 미 육군항공대에 기증한 기체이다. 총 24회의 전투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45년 전투비행 중 심하게 손상되어 티니안 기지로 귀환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그 뒤로 다시 이륙하지 못했다. 현재도 티니안 섬에는 에디 앨런 기체의 잔해가 남아있다.[20] 일본 상공은 제트기류중 하나인 편서풍이 부는 지역이다. 그 당시까지는 제트기류라는게 있는지도 몰랐다.[21] 그래서 커티스 르메이는 이전의 조준 폭격 전술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전임 지휘관이자 조준 폭격 작전을 주장하고 이를 시행한 인물인 해이우드 핸셀 소장 본인에겐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르메이는 핸셀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전술 자체의 한계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22] 일본 과학기술자들은 1920년대 '야기 우다 안테나'라는 선구적인 기술을 확보했으나 일본군이 적에게 전파를 쏘는 건 자기 위치를 적에게 알리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속 연구를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레이더 개발에서 미국한테 뒤쳐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야기-우다 안테나 문서 참고.[23] 당시 목격한 미국 조종사의 말로는 무서운 기세로 올라오는가 싶더니 에프킬라 맞은 모기 마냥 갑자기 연료 부족으로 뚝하고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제로센 자체가 문제가 많았었다.[24] 일본 육군의 기체 중 이 고도에서 전투가 가능한 기체는 히엔 뿐이었다. (太平洋戦争研究会 2001, pp. 62-63) Ki-84 하야테가 더 고성능이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카지마 호마레에도 터보슈퍼차저 같은 설비는 없기 때문에 고고도 성능에는 특출난 구석이 없다. 2단 3속 과급기를 장비한 고고도 배리에이션 NK9A가 있었지만 A라는 기호에서 보이듯 가장 먼저 개발된 버전임에도 프로토타입을 벗어나지 못했다.[25] 나중에 5식전으로 기종을 전환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투입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26] B-29는 유럽 전선에 배치된 B-17, B-24보다 고성능인데다가 B-29가 본격적으로 일본을 공습하기 시작할 무렵이면 미군의 폭격 교리 자체도 완성단계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B-29가 본격적으로 일본을 두들기기 시작하는게 1944년 중반쯤인데 이 무렵이면 유럽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미 8공군의 월간 소티 대비 손실률은 1%까지 떨어지게 된다.(1943년에는 심할 때는 6.6%까지도 기록함) 하물며 독일보다 상황이 더 떨어지는 일본이야 뭐...[27] 현재도 주일미군의 기지로 사용되고 있다.[28] 출처: 백선엽, '군과 나'.[29] 보통문과 초가집 1채. [30] 사실 이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일본 본토 공습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쿄 대공습 문서 참고.[31] 다만 이러한 야간 도색은 이미 1945년 경부터 일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주간 폭격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야간폭격으로 전환하면서 이러한 도색이 한국전쟁 당시 B-29에서 더 많이 보인다.[32]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인앙도 남아공 공군 소속 A-26 투하한 소이탄에 의하여 사망했다.[33] 2020년 개봉한 중국 영화 금강천을 보면, 주간에는 B-26이, 야간에는 B-29가 중공군 진지를 공습하여 무수한 피해를 입히는 장면이 나온다.[34] 영상을 보면 지상 활주가 가능할 정도까지 복원이 완료되어 있었다.[35] B-52 폭격기도 미국 외에 전시된 것은 영국과 한국 뿐이다. 사실 베트남도 한 대가 있긴 한데 월남전때 격추당한 잔해다.[36] 보통 일반적으로 항공기 프라모델의 절대강자로 하세가와가 꼽히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발매 당시 후지미는 비싼 가격에 그닥 좋지 않은 품질로 악명이 높았었다. 비슷한 경우로 엔터프라이즈(CV-6)가 일본에서는 타미야에서 워터라인 시리즈로 발매한 게 전부인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타미야는 조립성도 품질도 모두 좋은 편이다. 가격이 조금 비싸서 문제지.. 반면 후지미는 좀 저렴한 편이나 지느러미도 많고 조립성이 떨어진다.[37] 각 기체, 에놀라 게이와 박스카의 노즈아트와 테일마킹, 그리고 1/72 동 스케일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팻 맨이 포함된 무시무시한 구성이다.#[38] 이는 나중에 마호로매틱 오프닝 장면에서도 다시 한 번 오마주된다. 마호로가 날아오는 미사일을 피하며 박살내는 장면.[39] 체공중 폭탄을 1발만 투하(게임 시스템상 B-29를 포함한 폭격기 전부 다 폭탄 투하 이후 연료가 0으로 바뀌며 공항으로 돌아온다. 공항이 없는 경우 그자리에서 폭발한다.)할 수 있으며, 이후에는 강제로 공항으로 복귀한다.[40]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독일과 함께 핵폭탄 포지션을 겸하지만 데미지는 5000이 낮은 20000이며, 범위도 상기한 둘(V2와 프랑스 폭탄은 45)과 달리 35로 다소 작다. 그러나 저러나 왠만한 건물과 유닛은 다 부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