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A
1. 개요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정부개발원조, 공적개발원조)
ODA는[1] 1969년에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2] 가 규정한 개념이다. DAC는 ODA를 공적 기구(중앙․지방 정부 또는 그 실무기구)가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과 복지의 증진을 위해 DAC의 수원국 명단에 있는 국가 또는 영토, 그리고 다자간 개발 기구에 제공한 증여(grant)와 양허성 차관(concessional loan)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도 해방 이후 정부를 수립하고 6.25 전쟁을 겪고나서 70년대 까진 원조를 많이 받았다.
2. 부패와의 밀착
추적하고 사용처를 확인하기 힘들다. 중간에 부패로 가로채는 자들이 많다. 현재도 이어지는 대표적인 경우가 멕시코인데, 정부와 몇몇 기업이 상당히 부패해있고 부의 분배가 잘못되어있어 가난한 사람들은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만큼 못사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해외원조 역사가 깊은 강대국들 조차도 약소국에 이 원조가 제대로 약소국민들에게 전달되는 건 전체의 30%면 잘 간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3. 한국과 ODA
한국은 1950년대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주로 미국과 UN을 통해 무상원조를 받았다. 이때는 거의 원조에 의존하다시피 한 경제 체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 국가 예산의 40% 이상을 원조로 충당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일본에서의 원조가 급격히 늘어나 1960년대 부터는 미국보다 일본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3] 다만 60년대 이전에는 무상원조의 비중이 높았으나, 60년대 부터는 양허성 차관이 주를 차지했다. ODA 비중을 살펴보면 미국과 일본이 각각 약 55억 달러와 50억 달러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독일은 그 뒤를 이어 약 8억 달러를 한국에 지원하였다.
그런데 1960, 1970년대라고 해서 한국이 원조를 받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1960년대에도 개발도상국들을 상대로 훈련생 초청이나 전문가 해외파견을 시행했고 1977년에는 최초로 9억원의 기자재를 해외 개도국에 공여하며 물자지원을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나이지리아와 차관계약도 체결했다.
동남아 같은 개도국 사람들 중에 한국의 발전을 폄하하기위해 한국은 순전히 미국의 경제지원 덕에 성장했다는 식으로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들이 이러한 원조를 받았으며 한국은 그 중 20위 정도 밖에 안된다.# 한국과 비슷한 또는 더 많은 원조를 받았던 자신들은 왜 아직도 발전을 못했을까?
1990년대 들어서서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상승으로 한국은 ODA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본격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95년에 세계은행의 차관 졸업국이 되었고 2010년에는 DAC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원조 수혜국에서 증여국으로 전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에 한국 정부는 TV나 교과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를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은 개발원조위원회가 권장하는 ODA 예산치인 GNI 대비 0.7%에 한참 미달하는 0.14%만 ODA 예산으로 쓰고 있다.[4] 즉 아직까지는 한국이 ODA에 기여하는 수준이 선진국으로서의 책임에 미달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최순실이 이 ODA사업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KOICA 인선에 개입한 사건이 있었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