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 라디오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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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시에 위치한 라디오 일본 본사.
라디오 일본 베리카드.
라디오 일본 현재 사용중인 마크, 니혼 TV의 마스코트, 다베어가 쓰여져 있다.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2. 연혁
3. 사회의 목탁 선언


1. 개요


RF라디오닛폰은 가나가와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중파 라디오 방송국으로 요미우리 신문니혼 TV 소속이며, 1958년 12월 24일 개국했다.약칭은 콜사인 끝에서 따온 RF이다.
중파방송 주파수는 1422kHz이다. 방송구역은 가나가와로 설정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간토 평야 지역에서도 들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조정실도 도쿄에 있고 업무도 거의 도쿄 지사에서 하고 있다. 그러나 송신 안테나가 가나가와 현 방향으로 설치되어있어 가나가와 현 이외의 지역에서는 수신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같은 독립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간사이, 기후 방송과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고 JRN/NRN 네트워크에 가입해있는 구마모토 방송, 기타니혼 방송 등에서도 프로그램을 사서 편성하기도 한다. 80년대까지는 오키나와현에 있었던 극동방송(현재의 FM오키나와)의 프로그램도 방송하고 있었다.
원래 회사명이었던 라디오 간토에서 라디오 일본(닛폰)으로 회사명을 바꾸었지만 NHK와 닛폰방송이 상표등록 문제로 소송을 제기해 지금의 회사명으로 변경되었다.
1982년 실시한 사회의 목탁선언 이후 프로그램 시간 변경이나 중단이 매우 잦았으며 1993년 사회의 목탁 선언을 주도한 도야마 가게히사가 퇴진한 이후에도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도쿄의 광역 방송들과는 달리 엔카와 오래된 팝송 등 고령층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으나, 2015년부터 라디오 닛폰 NEXT 시간대를 선보인 이래로 아이돌이 진행하는 젊은 청취자 대상의 프로그램도 조금씩 늘고 있다.[1]
일본 민영방송사 중 가장 늦게 와이드FM을 개국했으며 2020년 3월 16일에 개국하였다.

2. 연혁


1958년 8월 15일 - 주식회사 라디오간토 설립(라디오 가나가와, 쇼난 방송, 가나가와방송이 신청한 면허 신청을 일원화해서 설립)
1958년 12월 24일 -일본 40번째 중파방송국으로 개국(1480kc, 1 kW)
1959년 - 10kW로 증력
1960년 3월 2일 - 라디오간토에서 주최한 공개 녹음회에서 압사사고가 발생해 사망자 12명, 중경상자 14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1964년 - 도쿄지사를 옮기면서 실질적인 본사 기능을 요코하마에서 도쿄로 이전시킨다.
1965년 9월 18일 - 태풍 취재중이던 라디오카가 바다로 떨어지면서 기자·아나운서 6명 익사
1968년 - 주파수를 1420kc로 변경
1971년 11월 - 30kW로 증력
1977년 11월 - 요미우리 신문과 자이언츠전 라디오 중계 독점 계약을 체결
1978년 1월 - 뉴스 제공처를 마이니치 신문에서 요미우리 신문사로 변경
1978년 11월 23일 - ITU(국제 전기통신 연합)의 결정으로 주파수가 오전 5시를 기해 주파수가 1422 kHz로 변경되었다.
1981년 7월 20일 - 오다와라 방송국 방송 개시
1981년 10월 1일 - 50kW로 출력을 키우면서 현재의 회사명으로 변경
1982년 4월 - 「사회의 목탁」선언(아이돌 라디오나 팝 프로그램이 줄어 들기 시작한다)
1989년 4월 - 젊은 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지
1990년 - 「어른의 방송국」을 편성의 기본방침으로 정하고 50세 이상의 청취자를 중심으로 한다
1993년 12월 - 사회의 목탁 선언을 한 도야마 회장 해임(이사회에 의한 쿠데타)
1994년 - 회장일가가 소유한 라디오닛폰 주식을 니혼 TV가 매입하면서 니혼 TV 관계회사가 된다.
2020년 3월 16일 - 와이드FM 개국(92.4MHz, 5kW)

3. 사회의 목탁 선언


과거, 라디오 간토 시절까지만 해도 여성 아이돌 중심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등 보통의 중파 라디오 방송국과 다른점이 없었던 라디오 일본이 1982년, 당시 사장이었던 도야마 가게히사(遠山景久, 1999년 사망)가 사회의 목탁이라는 선언을 실시하면서 프로그램 편성을 젊은 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에서 논설 프로그램이나 엔카를 중심으로 그야말로 샐러리맨과 중고령층을 대상으로 한 편성으로 바꾸었고 1989년 4월에는 마침내 젊은 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을 완전히 중단하고 젊은 층을 겨냥한 음악도 방송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택시·트럭 운전기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젊은 청취자가 라디오 일본을 듣지 않게 되었고 이를 지켜본 광고주들마저 잇따라 스폰서 계약을 해지하게 되어 방송국 경영을 악화시키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극단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라디오 일본의 「하야시바라 메구미의 Heartful Station」이라는 라디오 방송이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중지되거나, 프로그램중에서 진행자가 「(방송국 지정 장르 곡 이외의)다른 곡도 틀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는 등 도야마 사장 임기 말이었던 1993년에는 방송 도중에 중지된 프로그램이 21개에 달하는 등 청취자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도야마 사장은 방송국내에서 독단적인 경영을 시행하면서 자신의 경영방침에 반하는 사원을 추방하기 시작해 최전성기때 150명 이상 존재했던 사원이 50명 이하가 될정도로 철저히 자기중심 인사·노무 정책을 실시했지만, 1993년 12월 21일 도야마 사장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있던 간부들중 일부가 이사회에서 도야마를 「공공의 전파를 맡는 방송회사 대표로 적합하지 못하다.」라는 이유로 도야마를 추방하면서 도야마 독주체제를 무너뜨렸다. 그 후 이사회는 후임 사장으로 외부에서 사장 해임을 주도한 코바야시 요소지(小林與三次, 1999년 사망)와 요미우리 신문니혼 TV 출신인 도야마 시로(外山四郎) 사장을 선임하게 되었고 1994년 2월 도야마 사장측에 부당한 사업으로 회사에게 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등 도야마 경영 시대의 청산을 도모하였고 그 결과 도야마 사장측이 소유한 라디오 일본의 주식이 요미우리 신문의 계열인 니혼 TV가 매입하면서 경영이 안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