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친링

 


མགར་ཁྲིང་འབྲིང་བཙན་བྲོད / 論欽陵(논흠릉)[1]
? ~ 699년
1. 소개
2. 등장
3. 영토확장의 일선에 서다
4. 최후
5. 기타


1. 소개


토번무장재상. 정식 이름은 가르 친링 첸드로. 당시 천조국인 지구 상 최강의 국가 였던 당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토번의 영토를 확장시킨 토번의 기틀을 마련한 명장이다. 덕분인지 미국 군사잡지 암체어가 위대한 장군 100명을 선정했을때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다만 후술되어 있듯 최후에는 숙청당했다.

2. 등장


아버지가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을 성사시킨 가르통첸(薛東贊)이다.[2] 667년에 가르통첸이 사망 이후 당과의 관계에 전면적으로 등장했으며, 이후에 685년 형인 가르친네(論贊悉若)가 죽자 재상의 자리까지 장악했다. 중국 기록에는 처음부터 가르친링이 재상인양 묘사되고 있지만 이건 당시 가르친링이 대외적으로 활동한게 크다. 형인 가르친네가 곧 사망했다고 하지만 티베트 기록은 그가 685년까지 생존했다고 명시한다.
667년 강주, 황중 일대를 약탈했으나 당군의 공성계에 속아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3. 영토확장의 일선에 서다


662년경부터 토번 왕조는 서역진출을 시도했고, 이러한 노력은 670년 안서사진 장악이라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당의 서역경영을 통째로 중단시키는 거대한 사건이었고 즉각 당 조정은 대응에 나섰다.
670년, 당고종설인귀를 나살도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으로, 아시나도진과 곽대봉을 그 부장으로 삼아 10만 군대로 토번을 공격하게 했다. 지휘권 다툼에 의해 혼란스러운 당군 상황을 활용해(곽대봉이 직전까지 설인귀와 동급이었는데 설인귀 명령을 받게 해서 불만을 품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대비천(大非川)에서 당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대비천 전투) 설인귀 등 당군 장수들은 가르친링과 겨우 화친하고 돌아왔다.
675년, 찬포 망송망첸이 급사하자, 정통성을 가진 장남과 군사권을 장악한 가르가문의 지지를 받는 차남이 대립해 내란 직전까지 갔으나 가르가문의 군사권을 그대로 지속한다는 전제 조건하에 장남 치토슨을 치둑송첸으로 즉위시켰다. 차남이 어떻게 됐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를 두고 책부원구는 '마침내 대의를 위해 살약과 협심하였으니 치토슨의 왕위가 정해졌다. (중략) 가르친링의 위세가 마치 왕과 같았다.'라고 서술하였다.
675년, 한편 중종(仲宗), 논토혼미(論吐渾彌)를 이달아 당나라에 파견하여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당이 거부하였다.
이후 토번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를 두고 구당서에서는 '당시 토번은 양동(羊同), 당항(党項; 탕구트) 및 여러 강족(姜族)의 땅을 모두 점령했으니 동쪽으로는 양주(涼州), 송주(松州), 무주(茂州), 휴주(巂州)등지와 서로 접했고 남쪽으로는 파라문(婆羅門; 인도)에 이르었으며 서쪽으로 또한 구자, 소륵등 4개의 진을 점령했고 북쪽으로 돌궐과 맞닿아, '''땅이 만여 리에 이르니 한(漢), 위(魏) 이래 서융(西戎)의 번성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라고 할 정도였다.
676년, 날로 기세가 오르는 토번에 두려움을 느낀 당나라는 대륙 반대편에서 같이 벌어지던 나당전쟁을 포기하고[3]. 대토번 전쟁에 집중하기로 결정, 신라 전선에서 돌아온 유인궤(劉仁軌)를 조하로 보내 방비를 굳힌다.
677년, 당은 현지 지휘관을 이경현(李敬玄)으로 교체하고, 678년에 유심례(劉審禮)를 함께 보내 다시 한번 청해 일대로의 공격에 나선다. 이에 가르친링이 맞대응하는데, 유심례는 선봉군을 거느리고 밀고 들어가 호소에 주둔했다가 포위, 괴멸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경현은 도주하다가 승풍령(承風嶺)에서 따라잡혀 마찬가지로 사로잡힐 뻔 했으나, 백제 출신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5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토번군을 기습하는 바람에 놓치고 만다. 이후 토번은 여러차례 당을 습격하나 대부분이 흑치상지의 방어에 가로막혀 실패하는 통에 강제 정전을 맡게 된다.
685년, 가르친네가 사망하고 가르친링이 직위를 계승했으나 이후 그는 티베트 동부의 농노반란진압과 연이은 지배부족 이탈로 골머리를 썩히게 된다. 더불어 당시 안서사진 일대 또한 당과 토번이 서로 확실한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는 689년, 위대가(韋待價)에게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토번을 치라 명한다. 이에 가르친링도 군사를 이끌고 나서고 양 군은 인식가(寅識迦)강에서 대치하게 되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추위 때문에 당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눈이 내리자 우라돌격을 감행, 그야말로 처절하게 당군을 관광보냈고 그나마 살아남은 당군들도 추위 때문에 퇴각하는 도중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측천무후는 위대가를 귀양보냈다.
692년, 청해일대에서 당항족, 사천일대에서 강족이 연이어 대규모로 당에 내투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를 틈타 당은 왕효걸을 앞세워 당시 토번이 점유하던 안서사진을 공격했고, 토번은 안서사진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당은 693년/694년 있었던 토번-서돌궐의 공격을 안서사진과 청해일대에서 격파하면서 토번, 아니 가르친링의 권력은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게 된다.
695년, 가르친링은 임조를 약탈하였고 당은 즉각 토번군을 요격하게 하였다. 이에 가르친링은 이 요격군을 정면으로 상대하기로 결정한다. 조주 일대에서 펼쳐졌을 양군의 전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고, 당은 696년 1월 누사덕을 추가로 보내 지원하였다.
696년 3월,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당군을 대파하였다. 왕효걸과 누사덕은 이로 인해 면직되었다.[4] 가르친링은 이걸 빌미로 서돌궐 지역의 분할과 안서사진의 수병 철수을 요구했으나 측천무후는 이를 거절했다. '''이미 가르가문의 정권이 붕괴 직전인 걸 알아버렸기 때문'''.
가르가문의 대당 강경책은 분명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한 가문의 직책 독직은 왕실, 다른 대귀족들과 중소귀족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또 지속적인 당과의 전쟁은 토번에게 상당한 무리를 가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첸포였던 치둑송첸은 가르친링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되찾고 싶어했다.

4. 최후


699년, 치둑송첸은 다른 귀족들과 연합해 가르(喝爾) 가문에 대한 전면적 숙청을 단행하였다. 방법은 가르친링이 바깥에 있을 때, 사냥을 빌미로 군사를 모은 다음, 가르친링의 수하 2000여 명을 죽이고 가르친링 등을 소환했다. 그리고 '''자살하라는 거나 마찬가지인 이 명령'''에 가르친링은 당연히 거절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군이 도착하자, 가르친링의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대다수가 달아나버려 붕괴됐고, 남은 백여 명의 수하와 함께 가르친링은 자살했다. 또한 동생 가르찬파와 친링의 아들 가르궁린은 당으로 도주해버려 이후 토번에서 가르가문의 계승은 단절되었다.

5. 기타


많은 작은 새가 한 마리 매에 의해 살해되며
많은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의 수달피에 의해 죽임을 당하네
크게 자란 뿔에도 불구하고
수사슴은 짦은 뿔을 가진 야크를 당하지 못하네
백년된 소나무도 하나의 도끼에 베어지며
강은 작은 배로 건널 수 있다네
평야전체에서 자라나는 대맥과 쌀은 하나의 물방아로 빻아지고
뭇별들은 하나의 태양에 의해 빛을 잃네
계곡 밑에서 발화된 불이 산을 태우고
한 샘물의 물이 산과 평원의 모든 나무를 운반하네
하나의 돌이 평원에 있는 단단한 돌을 흙으로 만들고
풀전체는 버려진 철조각 보다 빨리 썩네
솥에 가득 찬 물도 소금을 넣으면 짜게 되고
무수한 풀도 낫 하나로 베여지며
가느다란 화살로 여러마리 야크가 죽는다네.
  • 가르친링이 지었다는 시로 Dpa'o gTsug-lag phreng-ba 연대기, Lhobrag판, 목판본에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준걸이 여러 사람들을 당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전설에 따르면 문성공주와 가르통첸이 서로 사통해서 태어났다고. 물론 설득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1]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2] 아버지와 아들의 성이 다르다는게 의아할수있지만 토번에서 논은 성씨가 아니라 재상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다. 한편 가르통첸의 성은 설(薛)이라고 한다.[3] 천성 전투, 매소성 전투, 기벌포 전투 등의 연이은 패전으로 이 시기 신라 전선도 그리 전황이 좋지는 않았기도 하고, 당나라는 수도가 대륙 서쪽 장안에 있으므로 안보는 신라보다 토번 쪽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4] 참고로 이때 누사덕은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 웃어넘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