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궤
劉仁軌
(602 ~ 685)
1. 개요
당나라의 인물. 자는 정칙(正則).
2. 생애
변주 울지 사람으로 어릴 때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했고 640년에 진창현위를 지내다가 절충도위 노녕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노녕이 높은 관직을 믿고 거만하게 굴면서 모욕하자 그를 때려죽였다. 이로 인해 장안으로 압송되었고 유인궤는 백성들 앞에서 능욕했기에 분해서 죽였다고 했다.
위징이 수나라가 망한 까닭을 이야기하면서 유인궤를 죽이는 것을 말려서 죽지않았으며 역양현승에 임명되었으며, 당 태종이 동주에 사냥을 나가려고 하자 이에 대해 충고해 칭찬을 받아 신안현령으로 승진되었다. 정관 연간[1] 에 급사중에 올랐다가 656년 8월에 순우씨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죄를 범해 감옥살이를 했다가 이의부가 그 여자의 미모가 뛰어나는 것을 알고 옥리 필정의에게 석방해주도록 했다.
그 여자가 석방되어 왕의방이 그 일을 고발하고 이의부는 이 일을 모른 척 하면서 필정의를 문책했으며, 필정의는 그 압력에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유인궤는 이 일을 법대로 처리하려 해서 이의부가 이를 원망해 유인궤는 청주자사로 쫓겨났는데, 660년에 백제를 공격하게 되자 바다에 배를 띄워 군량을 운반하게 되었고 그 때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의부의 독촉으로 운송했다가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혔다.
이 일로 인해 평민이 되었고 백제를 공격하는 원정에 백의를 입고 종군했으며, 661년에 백제부흥군과 싸울 때 대방주자사에 임명되어 유인원이 사비성에서 포위되자 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했다. 유인궤는 군사를 통제하는 것이 엄정하고 돌아다니면서 싸워 향하는 곳마다 모두 떨어졌으며, 백제부흥군이 웅진강 입구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자 신라의 군사들과 함께 격파했다.
662년에는 유인원과 함께 지라성, 윤성, 대산, 사정의 성책을 부쉈다가 7월 30일에 유인궤와 함께 백제부흥군을 공격해서 웅진의 동쪽에서 물리치고 진현성을 함락했다. 663년에는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과 왜군 구원군을 만나 네 차례 싸워서 모두 승리해 왜군의 배 400척을 불살랐으며, 흑치상지, 사차상여 등이 투항하자 그들에게 임존성을 함락시키는 일을 맡겨 임존성을 함락했다.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후 유인궤는 그 지역을 수습했고 이 때의 공으로 여섯 급의 품계로 올려졌다가 대방자사에 임명되었으며, 상관의는 유인원과 함께 유인궤을 칭찬하면서 유인궤에 대해 쫓겨나 관직을 삭탈당했으니 충성을 다할 수 있었다면서 군자라 할 만하다고 했다. 664년에 검교웅진도독을 지내고 있다가 귀국하려고 했지만 유인원이 이를 만류하면서 충고하자 그대로 백제 지역에 머물렀으며, 665년 8월 13일에 신라, 백제, 탐라, 왜 등의 사자를 바다에서 태워 당나라로 가게 했다.
666년에는 대사헌, 검교태자좌중호를 지내다가 우상, 지정사 등을 역임했으며, 668년에는 요동도부대총관이 되었고 670년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했다. 그러나 신라와 당 사이에 나당전쟁이 진행되자 다시 복직해 674년에는 좌서자, 동중서문하삼품을 지내다가 계림도대총관에 임명되어 신라를 공격, 675년 칠중성을 함락한 이후 귀국했다. 칠중성 전투의 공으로 직후 공작으로 작위가 오르고 재상급 지위인 좌복야에 임명되었다.
677년에 티베트에서 발흥한 토번과 맞닿은 도하도대총관 겸 안무대사가 되었다. 이후 지휘권이 이경현에게 교체되었다.
681년에는 상서좌복야, 동중서문하삼품을 지내다가 태자소부를 겸임하게 되었고 683년 12월 21일에는 좌복야에 임명되었으며, 684년에는 지서경유수사에 임명되었고 685년에 문창좌상, 동봉각난대삼품인 악성문헌공으로 있다가 사망했다.
[1] 627 ~ 64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