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소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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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당전쟁 중인 675년 음력 9월 29일 매소성(지금의 연천군)에서 벌어진 신라와 당나라의 대결. 신라군[3] 이 당군 4만[4] 혹은 20만[5] 을 물리친 전투다.
삼국사기에는 이근행이 당군 20만 명을 이끌고 매소성에 진을 쳤고, 신라군이 이를 공격해 적을 도망하게 하고 전마 30,380필과 그에 필적하는 병기를 얻었다고 적고 있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20만 명은 나당전쟁에 파견된 당군의 총 병력이었고, 매소성 전투에 참여한 당군 병력은 대략 4만 전후다.[6] 어쨌건 군마 3만 380필이라는 기록을 볼 때 당군의 숫자가 20만까지는 아니라도 나당전쟁 후반의 분수령이 될 만큼 상당했음은 분명하다.
한편 매소성은 학자에 따라 매초성[7] 이라고도 읽기도 한다.
2. 배경
668년 보장왕이 항복하고 평양성 함락으로 당나라와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신라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당나라는 한반도 전역에 지속적인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해 신라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하고 압박한다. 이에 신라가 반발해 나당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초반에는 석문 전투 패배와 신라의 우군인 고구려 부흥군의 패망 등 신라에게 다소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673년 신라군은 임진강선을 중심으로 많은 성을 만들고 방어선을 구축해 전선이 고착화됐고, 당나라는 675년 계림도대총관 유인궤가 지휘하는 침략군을 대대적으로 편성해 동시다발적으로 임진강선 돌파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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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소성 전투 기록화. 전쟁기념관 소장
3. 전개
3.1. 철옹성 매소성
675년 2월, 유인궤의 당군이 칠중성을 공략해 신라군을 격파한 후, 당나라로 돌아가고 이근행을 안동 진무 대사로 삼고 매초성에 주둔시키게 했다. 신라군이 3차례에 걸쳐서 교전을 펼쳤지만 모두 패배했고, 이 때문에 문무왕이 당고종에게 사신을 보내 사죄를 하는[9] 상황까지 벌어지는 등 좋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었다.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자, 조서를 내려 이근행(李謹行)을 안동 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고, 매초성에 주둔하여 경략[8]
케 하였는데, 이근행이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동국통감》 권9 신라기 문무왕 을해년
3.2. 설인귀의 실수
675년 9월, 설인귀는 신라인 김풍훈[10] 을 길잡이로 앞세워 신라의 천성(泉城)[11] 에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이때, 신라의 장수 문훈(文訓) 등이 맞서 싸워 1,400명의 목을 베고 40척의 함대를 탈취했으며, 말 1천필을 획득했다. 설인귀는 포위망을 뚫고 겨우 살아날 정도의 대패였다. 이러한 대 참패에 당나라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4만의 병력을 매소성 일대에 주둔 시킨다.
3.3. 매소성을 공략하다
이에 신라군은 북한산성을 출발해 매소성 근처의 수철성, 초성리 산성, 초성리 토성[12] 일대에 주둔 시켰다. 그리고 9월 29일, 교전이 시작되었다.
(9월)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말 3만 3백 8십 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얻은 병장기도 그만큼 되었다.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 稱是)
'''《삼국사기》권7 신라 본기 문무왕 下'''
이날 승리는 대승이었다. 20만에 달하는 당나라 병사들은 30,380필의 말과, 어마어마한 수의 병장비들을 놔두고 임진강변의 칠중성으로 도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소성 근처에 "말 무덤"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당나라 말들을 묻었다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 오는 것을 보아 엄청난 수확을 거둔듯 보여진다.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습격하여 패주시키고 전마[13]
3만 3백 80필을 얻었으며, 그 나머지 병장기도 이와 맞먹는 수치였다.
'''《동국통감》 권9 신라기 문무왕 을해년'''
이 전투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참전하였는데 간혹 김원술을 매소성 전투를 이끈 지휘관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매소성 전투를 이끈 신라군 주력의 지휘관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없고 김원술은 이미 전장에서 도망친 죄로 아버지 김유신에게 버림받아 가문에서조차 쫓겨난 관계로 관직이 없이 그저 의용군의 입장에서 참전했을 따름이다. 김원술은 이 전투에서 용맹히 싸워 죄를 씻으려 했지만 결국 복권되지 못했다.[14]
3.4. 실제 교전이 있었는가?
보통 전투를 나타낼때 삼국사기에선 "싸워서(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매소성 전투에서는 "우리 군대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我軍擊走之)"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따라서 전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천성을 공격했던 부대는 사실 보급을 담당하던 부대였는데, 이 부대가 격퇴되니 당군이 물러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특히 당나라 병력은 기병 3, 보병 7의 분포로 인해 보급의 중요성은 보병 부대보다 더욱 중요했는데 이러한 부대가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는 것은 보급의 문제일 것이라는 것이다.
4. 결과
이날의 승리만으로 당나라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주진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매소성 이후로도 당나라는 얼마 안 있어 석현성(石峴城, 개풍군 청석동으로 추정[15] )을 함락시켰고, 이후 지금의 경기도 북부, 강원도(북한) 지역 등에서 총 18번의 신라군과의 교전이 있었으며 많은 신라 성주가 싸우다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당나라의 병력에 큰 타격을 준 전투는 아닌 듯 보인다. 그러나 매소성의 패전으로 당군은 신라 전선 남침이 또다시 임진강 근처에서 막혔고, 결국 침공을 포기하게 되는 기점이 되었다.
사실 나당 전쟁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갈랐던 전투는 기벌포 전투다. 기벌포 전투에서도 22회에 걸친 크고 작은 교전이 있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거점인 매소성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나당 전쟁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4만명에 달하는 대군이 힘을 쓰지 못하고 도망갔으며, 그 결과로 중요 요충지인 매소성을 함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또한 우리 병사가 당나라 병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의 목을 베고 전마 2백 필을 얻었다.
(又我兵與唐兵大小十八戰 皆勝之 斬首六千四十七級 得戰馬二百四)
한편 이 시기 당나라 서쪽의 토번이 군사적으로 강성해 지는데,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당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있었다. 이에 대 신라전선을 담당하던 이근행과 그의 부대가 청해로 이전 배치되었다.[16] 신라는 방어를 강화하고 내부 사정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5. 매소성의 위치?
매소성은 경기 양주시의 "양주 산성설"과, 남방동의 "남방동 산성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1984년 역사편찬위원회의 실측조사가 진행되었고, 이후 여러 조사가 진행되면서 경기 연천군 청산면(靑山面) 대전리(大田里)의 "대전리 산성"이 매소성의 터로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다.[17] 현재 남아있는 성터는 둘레 670m, 넓이 1,960㎡이다. 물론 여전히 다른 성에 대한 설도 제기되곤 있다.
6. 기타
대왕의 꿈에서는 드라마 후반부에 폼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라 나레이션과 함께 매우 짧게 묘사되어 소정방 휘하의 장수 두 명이 매소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는데, 김원술이 말갈족 출신의 소정방 휘하의 장수를 죽이는 모습이 나오고 당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자 함성을 외치는 것으로 나온다.
이준익 감독이 구상한 삼국 시대 3부작 시리즈가 황산벌, 평양성 그리고 이 매소성 전투를 다룬 영화였다고 한다. 하지만 평양성이 흥행에 실패하면 상업 영화계에서 은퇴하겠다는 발언을 했고, 그뒤 평양성의 흥행이 실패하며(...) 은퇴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고. 출처.[18] 그러나 이준익 감독이 소원을 연출하고 이어 사도세자를 다룬 사도, 윤동주를 주인공으로 한 동주 등 역사 소재 영화 연출에 다시 나서 성공을 거둔 만큼 매소성 기획이 부활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다만 아직까진 별다른 기별도 없는 상황.
HQTeam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 신라군 미션 최종전 직전 미션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상술했듯 당군이 성을 점거하고 신라가 공격한 것을 반대로 신라가 성을 점거하고 당군이 공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션은 평범한 섬멸전.
[1] 김유신의 아들인 김원술이 매소성 전투에 참여했으나 신라군의 지휘관이 아닌, 벼슬을 잃은 채 의용군으로 참전한 것이다.[2] 중국 측 기록과 한국 측 기록의 병력수가 다른데 대체로 이 전투에만 단독으로 당군 20만명이 투입됐다는 설에는 회의적이고 수정적 관점에선 4만 명은 교전 병력, 20만 명은 주변 지역을 주둔 병력의 총합, 혹은 나당전쟁 동안 투입된 당군의 총합으로도 추측한다.[3] 간혹 이때 신라군 병력이 3만이라는 말이 있지만 정작 삼국사기에는 신라군의 병력은 물론이고 지휘관이 누구인지조차 기록에 없다[4] 중국 측 기록[5] 삼국사기 측 기록[6] 신라인들이 나당전쟁의 주요 전투인 매소성 전투를 기록할 때 상징적으로 20만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았다.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2012, 212p[7] 肖는 현재 '닮을 초'라고 하나, 반절 표기가 私妙切 또는 相邀切 등으로 그 원음은 '소'이다. 이 때문에 용어의 혼란이 있어왔다.[8] 침략하여 점령한 지방이나 나라를 다스림.[9] 말 그대로 사죄라기보다는 전후 상황을 보면 신라 측의 시간벌기용 화전양면전술에 가깝다. 나당전쟁 내내 사죄사를 보내면서도 한 쪽에선 공격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10] 원래 당나라에 파견된 신라의 유학생인데 그의 아버지 김진주가 국정을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신라에서 처형당해 신라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11] 현재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변에 위치한 오두산성(烏頭山城)으로 추정된다.[12] 초성리 산성 바로 아래에 위치[13] 전쟁에 쓰는 말.[14] 라고는 하지만 문무왕은 김유신의 요청으로 벼슬은 빼앗았어도 김원술을 책한 건 아니었다. 애시당초 김원술은 김춘추 딸의 자식이니 문무왕에게도 조카기 때문. 당장 김유신이 김원술을 처형할 것을 상주했을 때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문제는 김유신의 집에서 쫒겨났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복권 실패는 결국 의절당한 집안에서 다시 받아주지 않았다는 말이고 당연히 의절당한 김원술이 벼슬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15] 문경시의 석현성과는 다른 성이다.[16] 이후 이근행은 토번군을 격파하면서 급한 불을 끄지만, 당은 말갈족인 이근행이 요동에 독자 세력을 다질까봐 두려워하여 그대로 청해 방면에 배치시켰다. 이근행은 나당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요동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결국 682년 병사한다.[17] 여담으로 박정희 정권 당시엔 양주대모산성이 매소성으로 추측되어 조사 중이라고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올라간 상황이라, 학자들이 대전리산성 연구에 선뜻 나서질 못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18] 기사 원본 링크가 깨져 여기로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