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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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기쉬(서돌궐의 별부) 가서부 사람이다. 당나라의 번장으로 대토번전선 선봉에 섰다. 또한 농우, 하서의 군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749년 토번군의 난공불락의 요새 석보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755년, 하북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는 가서한이 안록산의 서진을 동관에서 막도록 했다. 그러나, 양국충의 삽질로 좌절되었고, 낙양으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있다가 757년, 전황이 불리해진 연나라 수뇌부가 낙양에서 업으로 퇴각하는 도중 살해되었다.
2. 생애
본래 가서한의 집안은 안서에서 대대로 살았다. 아버지 도원은 안서도호장군 적수군사를 역임했는데, 아버지처럼 용맹하여 장수의 길을 걸었다. 집안이 부유해 딱히 가난과 시름하지는 않았다. 40세 때 그는 장안으로 내려가 당시 하서절도사 왕충사의 휘하 무장으로 들어가 실력을 쌓았고, 왕충사의 아장으로써 토번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해 대두군부사에 임명되었다.
747년, 왕충사가 재상 이림보의 모함을 받아 하옥되자 그를 대신하여 가서한이 농우절도사에 계임하여 지속적인 토번의 침공에 대응하며 기습하기도 했다. 741년 토번이 청해호 부근에 홍산에 건설한 석보성이 당나라의 타림 분지 진출에 심각한 장애가 되자, 당나라는 대군을 보내 여러차례 석보성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가서한은 749년 6만 3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결국 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공성전 와중에 공격군은 절반이 전사하였으나 성을 수비하던 토번군 병력은 장수 한 명의 지휘를 받는 400여명에 불과하였다. 여하튼 가서한의 석보성 공략이 없었다면 고선지의 서역 원정과 탈라스 전투도 불가능했다. 후에는 전횡을 일삼던 양국충의 눈에 들어와 안록산의 권력에 맞서는데 동조했다. 양국충은 주문을 올려 가서한을 하서절도사를 겸임시키고, 작위를 내려 서평군왕에 삼았다.
술과 여색을 즐기다가 풍질에 앓아 군영에서의 생활을 그만두고 장안에서 쉬는 도중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자 태자 이형의 병마부원수에 임명되었다. 낙양에서의 방어 작전에 실패한 봉상청이 고선지와 함께 방어선을 섬서에서 동관(潼關)으로 이전시키다가 변령성의 모함을 받아 참수되자 가서한이 전권을 위임받았다. 가서한은 난공불락인 요새에서 동관에서 안록산의 군을 막고자 했으나 간신 양국충이 당현종에게 독촉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라고 명령했다. 가서한을 어쩔 수 없이 18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갔으나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좁은 길목에 대군이 몰리면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고 이를 안록산의 부장 최건우가 놓치지 않고 공격하면서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757년, 안경서(安慶緖)가 업으로 후퇴하면서 포로로 잡아놓았던 당의 장수 30여 명을 살해했는데 가서한 자신도 그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