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의 난

 

'''안사의 난(安史之亂)'''
'''시기'''
755년 12월-763년 2월
'''장소'''
북중국
'''원인'''
당(唐)의 사회기반인 율령제 붕괴.
'''교전세력'''

안록산·사사명
'''지휘관'''
당현종
당숙종
당대종
봉상청
고선지
양국충
가서한
복고회은
이광필
곽자의
장순
<^|1>안록산
안경서
사사명
사조의
'''병력'''
600,000 ~ 700,000 명
200,000 ~ 300,00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당(唐), 반란진압 성공.[1]
'''기타'''
당(唐)의 지방통제력 약화 및 중앙아시아 주도권 상실.
1. 개요
2. 배경
2.1. 사회적 배경
2.2. 군제의 변화(군사적 배경)
2.3. 정치적 배경
3. 영향과 결과
3.1. 종결 이후
3.1.1. 전후 처리
3.1.2. 위구르의 전횡과 새로운 불씨
3.2. 이어지는 전란(763~765)
3.3. 대내적인 영향
3.4. 대외적인 영향
3.5. 그 외
3.6. 대중 매체

[clearfix]

1. 개요


[2][3]
제국 중엽인 755년부터 763년까지 당현종부터 당숙종, 당대종까지 약 8년 동안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규모 군사반란. 중국사에 아예 나라가 사분오열되고 서로 다투는 군웅할거가 워낙 많다보니 안사의 난은 중국 내부의 단기성 전란이라 크게 다가오지 않지만, 현재까지도 역대 전란 및 동란으로 인한 사망자 순위에서 4위를 기록하고 있는 거대한 사건이다. [4][5]
'안사의 난'이라는 이름은 초기 주동자인 ''''''록산(安祿山)과 후기 지도자 ''''''사명(史思明)의 성을 따온 것이며, 사사명을 배제하고 그냥 안록산의 난으로, 혹은 당시 연호를 따서 '천보(天寶)의 난'으로 부르기도 한다. 당시까지 중국 역대 통일왕조에서 있었던 반란 중 가장 대규모였고 그 파급력도 가장 컸던 전란으로, 사실상 당을 붕괴로 몰고가기 시작한 전란이었다. 그러나 비록 큰 사건이었긴 하지만 이후 당나라는 당헌종 때에 중흥기를 맞이하여 150여 년의 기간 동안 제국을 유지한다.


1.1. 안록산의 난


755년 11월 10일 범양에서 거병한 안록산은 본거지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15만 병력에 투항한 거란, 해의 기마병력 8천여를 선봉에 내세워 거병한다. 당은 초기 대응에 실패해 그 해 12월 낙양을 내주고, 다음해 동관과 수도 장안까지 내주면서 당현종이 옛날 계한의 수도이었던 성도로 파천하나, 이후 757년 칭제한 안록산이 수세에 몰리고 그해 자신의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면서 세력이 약해지면서 일단락된다. 자세한 것은 안록산의 난 참조.

1.2. 사사명의 난


당이 전후처리를 허술하게 하는 틈을 타 758년 사사명이 재봉기하여 759년 낙양을 점령하나, 761년 그 역시 안록산처럼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한 후 세력이 약해져 결국에는 진압된다. 먼저 일어난 안록산의 난에 가려지는 감이 있지만 당조정은 이번에도 초기 대처에 실패하고 수도권 관중을 빼앗겨 피해의 수준은 더 심했고, 역시 전후수습 과정에서 복고회은의 난으로 이어진다. 자세한 것은 사사명의 난 참조.

2. 배경



2.1. 사회적 배경


당 제국의 기본 사회체제인 율령제는 토지분배를 기본으로 한 '''균전제'''와, 균전제를 기반으로 한 조세제도인 '''조용조''' 체제, 그리고 마찬가지로 균전제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로 이루어진 제도로, 북위 시절부터 내려오던 여러 제도를 당 제국이 보완하고 연계시켜 완성시킨 것이다. 이를 토대로 당은 농민생활을 크게 안정시키고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으며 군비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가히 고대 ~ 중세 사회제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율령제는 당 제국의 최전성기인 8세기 초중반을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호적에 오른 백성만 조세와 군역을 부여할 수 있다는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균전제 하에서 호구를 등록한 농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상당한 토지를 부여받았으나 실제로는 이미 인구가 지나치게 증가해 규정의 절반 이하에 달하는 토지만을 받았으며, 그 대가로 져야 할 부담은 너무 컸다. 굵직한 것만 들어보자.
  • 한번 등록되는 순간 몇 년간 변방오지에 무보수 자비부담으로 끌려간다.
  • 죽을 때까지 머리수대로 무거운 세금이 떨어진다.
  • 현지 주민도 구하기 힘든 지방 토산품을 대량으로 바치라고 압력이 들어온다.
  • 심심하면 부과되는 각종 잡세와 임시세금의 압박이 가중된다.
  • 역시 무보수 자비부담으로 험악한 공사현장에 강제로 끌려간다.
이러니 대체 누가 호구 등록을 하고 싶어하겠는가? 덕분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율령제는 막대한 미파악 인구를 양산했고, 이것이 당 현종대에 들어서는 '''1 / 4 정도 되는 인구가 정부의 호구수 파악 대상에서 벗어난 상태'''[6]가 된다. 상당수는 조용조 제도에서 벗어나는 귀족의 사유지 및 사원전 아래로 들어갔고, 관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 도호(逃戶)도 다수 있었다. 이에 대한 처벌조항도 있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사실 율령제의 이러한 문제는 1000년 가까이 지난 청나라대까지 이어지며, 강희제 ~ 옹정제 시기의 지정은제라는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을 토지세로 통합해 이월한 제도가 시행된 후에야 해결되었다. 여담이지만 지정은제의 시행 이후 청의 호적에 등록된 인구 수는 자연 증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는데, 이는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고,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게다가 유교 질서하에서는 호구 수를 꼼꼼히 기록해 세금을 걷는 것을 오히려 학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호적의 부실로 인한 전반적인 세제 구조의 붕괴는 후대에 오히려 더 강하게 나타나기까지 한다. 호적의 최대 40%까지 등록되지 않은 인구를 가산해 인구를 세기도 할 정도다. 심지어 등록되지 않은 호구와 은전의 색출을 기조로 총체적 개혁에 나선 장거정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죽은 뒤에 모든 영예를 박탈당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대토지 소유자, 호족의 세력이 강성해진 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감시 감독해야 할 조정은 문제에 무관심해졌고, 또 문제를 해결할 힘을 잃었다. 천보 연간에 접어들자 이는 표면화되었다.

2.2. 군제의 변화(군사적 배경)


'''이 시기에 접어들어서 당의 부병제가 붕괴되면서 군제가 크게 변화한다. 자세한 것은 당/군제절도사 문서를 참조.'''

2.3. 정치적 배경


직접적으로 안록산과 양국충으로 대표되는 궁내 궁중권력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양국충은 양귀비의 사촌오빠로서 사촌동생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안록산은 변방의 절도사임에도 여러 공적이 있는 덕분에 장안에 자주 드나들며 현종의 신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양귀비와 안록산이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리가 나돌기도 했다. 그 와중에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며 안록산을 통제했던 재상 이임보가 병사했고[7], 궁중권력은 양국충이 장악했다.
양국충은 재물을 모으는 재주와 재무능력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그것 빼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서 앞서기만 좋아했다.''' 중앙군 7만여를 이끌고 남조[8] 원정을 갔다가 제대로 패배하자 병력을 억지로 끌어모아 다시 공격했지만 이것도 완전히 박살이 나서 병력 손실이 20만에 달하는 엄청난 망신을 당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황제라도 된 것마냥 대부분의 관직을 독점하고 매관매직을 벌여 재산 축적에만 열을 올렸다. 문제는 이임보와 그 일파인 관롱 귀족세력의 영향력이 너무 강했던 탓에, 명색이 명군으로 불렸던 황제인 현종과 과거를 통해 올라온 비관롱계열 관료들이 '''이런 양국충의 행태를 눈감아주거나 오히려 도와주기까지 한 것'''[9]
이윽고 중앙세력을 장악하다시피 한 양국충은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절도사들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그 절도사 중 제일 큰 세력을 가진 안록산을 가장 경계하게 된다. 실제로 안록산 또한 자기 멋대로 중앙에서 세력을 키우는 양국충을 좋아하진 않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차근차근 군비를 증강시키며 여차하면 역모를 저지를 기회까지 보고 있었다. 이 당시 정확히는 천보 14재(년)[10]의 안록산은 최대최강의 절도사로서, 다수의 절수직을 겸직하고 이를 장기간에 걸처 역임하면서 '''동북변의 강대한 군사를 자신의 사병으로 만들었다.'''
이 당시 안록산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는 이 시기의 절도사들과 금군 장수들의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다.
  • 범양(范陽)+평로(平虜)+하동(河東)절도사 - 안록산
  • 삭방절도사 - 안사순 [11]
  • 하서+농우절도사 - 가서한
  • 안서절도사+북정도호 - 봉상청[12]
  • 우금오대장군 - 고선지
  • 금오장군 - 정천리
보다시피 안록산은 '''혼자서 3개 절도사직을 겸직하며 사실상 당 제국 동북면의 모든 군사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의 휘하의 병력만 해도 10개 절도사의 총병력 (약 45만)의 4할이 넘는 약 18만 4천이었고, 자신과 양부자 관계를 맺은 이민족들을 통해 수만에 달하는 개별 사병집단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상술했듯 안록산은 장기간 수많은 공적을 쌓아올려 장수로서 경력도 길었으며, 이에 비해 금군은 중앙관직이란 특징상 그 관직에 비해 가지고 있는 군사 자체는 많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상황조차도 안록산 쪽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의 중앙군은 부병제의 붕괴, 그리고 착기 제도의 실패로 인해 유명무실화되었으며, 개원 25년 장정건아제의 실시로 인해 모병제 체제로 돌아서면서 과거의 부병제 시절처럼 급할 때 대규모로 동원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위협이 될 만한 다른 절도사들은 국경 방위 문제로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고, 예비병력이라 할 수 있는 단련병들은 그 질이 천차만별인 데다 바로 직전에 남조 원정에서의 손실로 인한 손실이 극심하였고, 안록산은 이런 환경에서 거리낌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사실 안록산도 751년 평로절도사, 범양절도사 휘하 병력 10만여를 끌고 거란을 공격했다가 다 날려먹은 적이 있으므로 군사적 재능이 양국충보다 그리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군대 지휘 경험이 풍부하다는 강점이 있었다.
물론 조정도 바보는 아니라 천보 13재(년) 즈음엔 당현종을 보좌하던 내시 중 하나인 고력사가 "변방 장군들이 이리 많은 병사를 다스리는데, 이걸 그대로 놔둬도 이들이 가만히 따라줄거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식으로 변방 장수들의 약화를 건의하는 등 중앙에서도 여러모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물론 안록산의 경력이 경력인지라 그리 쉽게 통과될 이야긴 아니었고, 그래도 어찌저찌 안록산을 조정으로 부르고 그가 맡고 있던 절도사 3개는 가순, 여지회, 양굉홰에게 각각 주기로 반쯤 결정했지만 당 현종의 신임 때문에 이 안건의 가결은 계속 미뤄져왔고 결국 그 사이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고 만다.

3. 영향과 결과


당은 안사의 난을 정말 간신히 진압했으며 뒤이은 토번의 침공, 복고회은의 난 또한 곽자의의 맹활약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은 간접적으로는 당이 멸망할 때까지 그 영향을 끼쳤으며, 직접적으로는 당헌종의 '원화중흥' 이전인 약 4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친 국가존망의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3.1. 종결 이후


거진 8여 년에 걸친 기나긴 전란이었던 안사의 난은 사조의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혼란은 멈추지 않았다.''' 반란의 뒷처리 문제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으며,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 장안이 함락되기도 했다. 간신히 평화가 찾아왔을 때 이미 동쪽의 '''번진들은 사실상 독립왕국으로 뿌리를 내린 상태였고, 이후 장기간에 걸친 번진과 당 중앙정부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반란의 종결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던 것.'''

3.1.1. 전후 처리


763년 윤정월[13], 당은 전란의 종결을 확인하고 전후처리에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조의 측에 붙었던 절도사들에 대한 처우. 당측은 이에 대해 '''원래 관장하던 지역을 대부분 인정해 주면서 용서하는''' 유화책을 사용한다. 이는 당의 국력이 지나치게 소모되었던 데다가 사사명의 아픈 기억 때문인 걸로 보인다. 19일, 당은 설숭을 상·위·형·명·자육주 절도사로 삼고, 전승사를 위·박·덕·창·영오주도방어사로 삼았으며, 이회선은 유주·노룡 절도사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조의가 임명했던 연의 번진의 이름을 바꾼 셈이므로 이는 이들이 항복하기 전에 절도사로서 지배하던 지역을 거의 그대로 인정한 것이였다. 거기다 이들의 항복을 받은 복고회은도 이들이 재반란을 일으킬 경우 반란을 평정한 자신의 공로가 퇴색할 것을 우려해 이들의 통치권을 인정해줄 것을 당에 요청함과 동시에 스스로 이들의 후원세력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번진 병사들이 절도사를 제멋대로 세우는 관행도 꾸준히 이어졌는데, 산남동도절도사 내진이 비명에 간 후 그 휘하의 제장이였던 행군사마 방충이 군을 움직여 양주를 습격하는 등 도적화할 모습을 보이자 좌병마사 이소와 부사 설남양이 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그런데 휘하 병사들이 우병마사 양숭의를 지휘관으로 추대한 후 이소와 설남양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당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손을 쓸 수 없었으며, 결국 양숭의를 양주자사·산남동도절도유후로 사후임명하고 만다. 4월 27일, 이광필이 '원조를 사로잡고 절동을 모두 평정하였다'는 주문을 올린다.
5월 25일, 하북의 여러 주들을 나누어준다. 유주·막주·규주·단주·평주·계주는 유주에서 관장하여 노룡절도사로 삼고, 항주·정주·조주·심주·역주는 성덕군에서 관장하여 성덕절도사로 삼으며, 상주·패주·형주·명주는 상주에서 관장하여 상위절도사로 삼고 위주·박주·덕주는 위주에서 관장에 천웅군절도사로 삼고, 창주·체주·기주·영주는 평로번진에 더하여주고[14] 회주·위주·하양은 택로번진에 더하여 주었다. 이를 통해 하북의 모든 지역은 절도사들이 관장하게 되었으며, 이는 여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 763년 7월에는 연호를 광덕으로 고첬으며, 보응원성문무효라는 존호를 받았다.

3.1.2. 위구르의 전횡과 새로운 불씨


이당시 위구르의 기세는 매우 강성했고, 당을 상당히 우습게 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정월 5일 밤에는 위구르인 '''15명(!!!)'''이 '''황궁으로 돌진해 들어오자 문지기들이 감히 막지 못한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고, '''위구르군이 주둔했던 지역은 너무 심하게 약탈당해 조세 징수를 면제해 줘야 할 정도였다.''' 이에 당은 빨리 위구르를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노력했고, 가한과 가둔을 높이고 휘하 장수들 또한 왕과 국공으로 봉함과 동시에 2만 호에 달하는 실봉을 덧붙여 주는 등 크게 후사하여 만족한 위구르로 하여금 돌아가게끔 했다.
그러나 위구르는 귀환하면서도 약탈을 자행했고, 지나가는 지역의 절도사들은 이런 애꿎은 피해를 막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때마침 진정·택로 절도사인 이포옥이 어떻게 해서든 위구르의 만행을 억제하려 시도하자 조성의 현위였던 마수가 자원하여 나아가 위구르군 지휘관과 대화하여 회흘군에 대한 군령권을 일시적으로 획득해 이를 통해 약탈을 억제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당덕종시대 당나라를 지켜낸 세 대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성, 마수, 혼감 중 한 명인 마수가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 된다.
위구르가 당을 무시한 것, 그리고 지독한 약탈을 자행한 것은 또다른 불씨를 낳았다. 위구르와 가까운 사이이자 전쟁 종결의 최대 공로자 중 한명인 '''복고회은이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의심을 받기 시작한 것.''' 마수 또한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면서 이포옥에게 "복고회은은 공로를 세운 것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며 그 아들인 복고창은 용감한 짓을 좋아하고 가벼운데, 지금 안으로 네 명의 장수(설숭(상위절도사), 전승사(천웅군절도사), 이회선(노룡절도사), 이보신(성덕절도사))를 세워놓고 밖으로는 위구르와 왕래하니, 반드시 하동과 택로를 넘볼 뜻을 가지고 있다."며 경고했으며, 하동절도사 신운경 또한 복고회은이 위구르를 전송하기 위해 태원으로 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기도 했다. 이에 복고회은은 불만을 가지고, 또한 토사구팽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복고회은의 난이 일어나는 하나의 큰 원인이 된다.'''


3.2. 이어지는 전란(763~765)


사사명의 난까지 종결되면서 전란은 종식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이은 두 번의 대규모 전란, 토번의 장안 침략과 복고회은의 난'''이 몰아닥첬고, 이 모든 전란이 끝나는 건 사조의가 죽은 뒤 2년 후인 765년이었다. 이 두 큰 사건은 결국 안사의 난과 연관되어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안사의 난 기간 동안 강성해진 토번과 약해진 당의 현실을 보여주고, 또한 절도사들이 당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사건이 토번의 장안 침략이며, 안사의 난의 최고 공로자가 반란의 주동자가 되었고, 당-토번-회흘이 서로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를 형성함을 보여주는 것이 복고회은의 난이기 때문. 거기다 안록산의 봉기로 시작된 전란이 거의 쉼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곳에 기술한다.
덤으로, 이 두 사건을 통해 곽자의는 그 위상이 하늘을 뒤덮었다 할정도로 절정에 다다랐고, 반대로 복고회은은 결국 반역자로 몰락해 사망했으며, 이광필은 그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일찍 죽는다. 이 세 인물이 안사의 난을 통해 군왕까지 오른 최고 공로자로 꼽힌다는 걸 생각하면 참 명암이 갈린 운명이 아닐 수 없다.

3.2.1. 토번장안 침략


'''당이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참 정신없던 동안 토번은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토번이 장안을 점령하고, 노략질한 사건이다. 가르친링 사후의 토번사를 살짝 보면, 안사의 난 이전까지는 당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었던 상황이라 볼 수 있다. 개원연간에 이루어진 절도사체제로의 군제개혁과 그로 인한 군사력의 강화는 오랫동안 토번을 압박했으며, 청해성 전역, 운남성일대, 사천성 북서부의 요충지가 당에게로 넘어가고 고선지의 활약으로 인해 서역지방도 대거 상실하는 등 토번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던 것.
그러나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구도는 역전된다. 하서와 농우의 정예 부대가 동쪽으로 이동하자 토번은 여러 요충지를 수복했을 뿐만 아니라 꾸준히 당을 공격해 기여코 광덕 원년(763년) '''대진관으로 들어와 하서와 농우의 모든 당의 영토를 점령하고 만다.''' 비록 난주를 통해 가느다란 선이 이어져 있기도 하나, 이는 회흘의 호의에 통행 여부가 갈리는 길이였기 때문에 사실상 절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서, 농우는 오랫동안 북방 유목민족과 토번을 맞상대하는 최전선이자 매우 중시되는 지역으로, 천보 연간의 10 절도사 중 2개가 이지역 방위를 위해 존재하며 거진 15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배치될 정도로 중요한 곳이였다. 당은 이 지역에 수십 개 주에 달하는 행정체계를 구축하기까기 하면서 중시했었으나, 그 모든 지역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하서와 농우의 상실은 곧 중앙아시아에 설치되었던 당의 군현과 절도, 즉 안서와 북정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이 지역은 하서와 농우를 통해 당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서와 농우의 상실로 인해 회흘, 토번 양대 세력 사이에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당숙종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막대한 양의 선물(매년 비단 5만필. 토번의 기록에는 조공으로 기록된다.)을 토번에게 주어 침략을 막으려 했으나 토번은 후에 전승비에 기록하기를 '재물과 땅을 매년 바치기로 했다'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당 대종이 즉위하면서 선물을 주는 것을 중지하자 '''토번은 이것을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러한 토번의 대대적인 침략은 하서와 농우를 모두 장악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서, 농우의 침탈과 동시에 검남(지금의 쓰촨성(사천))지역에도 계속 공세를 가해 성도 근방까지 침탈해 들어온 것. 거기다 상시적으로 주던 선물(토번 입장에선 조공)을 당대종이 거부하자 '''토번은 20만 병력을 동원해 관중 그리고 장안으로 침공해 들어온다.'''
763년 10월 1일, 전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 토번은 장안 서쪽의 경주(涇州, 감숙성 경천현)를 점령한 후 그대로 서진해서(경주자사 고휘가 향도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10월 2일엔 봉천과 무공까지 진격한다. 장안과 무공의 거리는 100km 미만. 거기다 그러나 당대에 정국을 좌지우지하던 정원진은 변방에서 날라온 급보를 계속 가로막았고, '''결국 당 조정이 이를 파악한 것은 무공이 점거당한 이후였다.'''
이는 절묘한 빈집털이라고 할 수밖엔 없는데, 사조의의 난 진압과 사후 처리를 위해 금군의 주력은 신책관군용사(神策觀軍容使) 어조은의 지휘하에서 하북에 있었다. 당의 다른 군대도 마찬가지여서 '''사실상 장안 주변에는 관군이 없었기 때문.''' 때문에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대의 권신으로 정국을 농락하던 정원진이 하도 절도사들의 원망을 많이 사서 심지어는 '''복고회은과 이광필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대당제국의 수도 장안은 토번에게 함락당한다.''' 곽자의가 분투하지 않았다면 당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토번의 장안 침략시에 분투한 곽자의의 활약은 곽자의 문서에 수록. 여기서는 토번이 10월 9일 장안에 입성했으며, 허수아비 황제까지 세웠다가 10월 21일 곽자의의 활약에 의해 장안을 떠났다는 사실만을 기록한다.
이후 당 조정 내에서는 이런 사태를 불러온 정원진을 문책하기 시작한다. 조정 내에서도 충용스러운 절도사들마저 움직이지 않은 것은 모든 이가 정원진을 원망했기 때문이라는 걸 파악하고 있었으며, 태상박사 유향은 '정원진을 처형하고 모든 환관들을 조정에서 내보내며, 신책병들의 지휘권은 대신들에게 붙이고 스스로 존호를 깎아 책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만약 그래도 군대가 이르지 않다면 '''내가 능지형을 받아 폐하께 사죄하겠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결국 11월 2일, 당대종은 정원진의 관직을 삭탈하고(그래도 이전에 이보국을 도와 당대종을 세우는 데 공이 있었다 하여 죽이지는 않았다.) 고향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환관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짙어지자 환관이었던 광주시박사 여태일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하기도 했다. 이후 정원진은 어떻게 해서든 복귀해보려고 몰래 '''여장'''하고 장안에서 돌아다니며 로비하다가 걸려서 강릉으로 유배되면서 사라지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당 조정 내에서 절도사들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자의적인 판단 내지는 감정에 따라 수도인 장안이 공격 받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 특히 복고회은은 이전에 의심받은 일에 더해 이때 움직이지 않음으로 인해 '''사실상 반란의 길로 내몰리게 된다.'''

3.2.2. 복고회은의 난


해당 문서 참조.

3.2.3. 의의


이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난은 그 당시 당나라의 내외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당은 그래도 토번과 돌궐의 협공을 어찌저찌 버텨가며 국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당현종 집권시기만 해도 성공적인 방어와 그 사이 틈틈이 행한 군제개혁으로 돌궐의 멸망과 토번의 쇠락을 일으킨 희대의 역공을 성공시키기도 했으며 방해꾼을 없앰으로서 실크로드 일대의 각국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정도의 강국이었다.[15]
문제는 '''이 전쟁들이 너무 장기간 동안 쉬지않고 벌어졌다는 것''' 이 과정에서 당의 중장집권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전란 자체의 피해도 막심한 상태에서 절도사들이 반 독립국화 해버리기까지하며 당의 전력은 말그대로 반토막났는데, 이게 어느정도냐면 적어도 토번과 돌궐 양대 세력을 상대로도 방어하는 덴 문제없었던 당 현종 이전까지보다도 못 할 정도로 토번이나 회흘 둘 중 하나 막는 데만도 절도사의 지원이 없다면 힘들어할 정도였다. 특히 다시금 세력을 키운 토번을 막기 위해 당나라는 회흘, 남조, 아바스 왕조 등을 전부 끌여들여 대 포위망을 만들었는데, 이는 언뜻보면 아직 당나라의 외교력이 강대하단 의미도 있지만 '''그 외교력에 의지하지 않는 한 당나라로선 토번을 감당하지 못한단 뜻'''이 된다. 즉 중앙아시아 최강국이라 불리던 당나라의 이미지가 무너지게 된 것.
이후 당나라의 외교는 어쩔수 없이 절도사들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며 통제하는 한편 다른 국가들과 외교를 통해 최대한 전쟁을 벌이지 않고 세력을 보존하는 한편 겨우겨우 보존하는 세력으로 당에 반발하는 세력에 맞서는 방법으로 고착화되었다. 그나마 이럼에도 불구 대규모 전쟁은 몰라도 중소규모의 전쟁이 계속 벌어졌을 정도로 주변국에게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3.3. 대내적인 영향


'''안사의 난이 당나라 내에 미친 가장 핵심적인 영향은 율령제의 파괴와 지방통제력의 약화다.''' 균전제, 부병제, 조용조라는 제도적 뒷받침을 받는 율령제는 그 세 가지가 모두 무너져 내리면서 형식적인 것으로 전략했고, 급격한 인구감소와 토지대장 및 호적부의 손실, 난립한 절도사들이 호적부를 중앙에 올려보내지 않고 그들 자신이 그걸 가진 채 조세와 행정을 자의적으로 행한 것, 전란으로 인해 황폐해진 점이 결합하여 당의 재정은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당은 조용조 대신 양세법을 도입하고, 소금 전매를 유지하면서 재정을 지속적으로 확충한다. 그러나 이는 혹독한 징세를 통한 재정확충이었기에 결국 최종적으로 당이 망하게 되는 원인 중 한 가지가 된다.
'''그러나 율령제보다 더 큰 문제는 내지번진의 난립이었다.''' 안사의 난 이전, 천보 시대의 10명의 절도사(천보십절도사)들은 그 군사력은 강대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 통치 영역이 매우 협소했다. 4개 절수를 동시에 역임하고 27만에 달하는 거대한 군대의 통솔권을 가져 당 역사상 장수로써는 곽자의와 함께 최대의 군권을 휘둘렀던 왕충사가 직접적으로 통치하던 주는 고작해야 15개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러나 내지번진은 그와 달랐다. 중원 내부에 만들어진 내지번진들은 큰 번진의 경우 7, 8개 주에 달하는 강역을 지배했으며, 평로치청번진이나 노룡번진, 산남동도번진처럼 10개 이상의 주(이정도면 어지간한 나라 이상의 강역이다.)를 지배하는 거대 번진도 존재했다. 이러한 내지번진은 중국 전역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사실상 기존의 통치체제인 주와 현 위의 상급 광역지배기관으로 군림했다.
거기다 이들은 영역 내의 조세와 호수를 자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 영역의 독립세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실제로 원화중흥 이전까지 '''당나라의 중앙정부에 조세와 호적을 바치지 않고 단지 명목상으로만 충성하면서 독립세력화한 절도사들의 지배영역은 당시 당의 강역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이런 절도사들은 외부세력의 힘까지 빌리려 들었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도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영토 할양을 포함해 막대한 재화와 이권을 넘겨주는 모습도 보였다. 토번과 회흘은 이를 통해 계속 이득을 받아 챙겼으며, 발해와 신라 또한 당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로 군을 파견한 기록이 존재한다.
'원화중흥'을 이룩한 여러 재정개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세율을 통해 백성들을 쥐어짜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강대한 금군을 편성한 것인데, 이런 식의 수탈이 일어난 이유 또한 번진의 난립으로, 절반밖에 남지 않은 영토에서 나머지 절반을 장악한 절도사들을 제압하고 외적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더해, '''환관들의 군권 장악 또한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이보국, 정원진, 어조은 등 이시기에 권세를 누린 환관들은 모두 군권과 군 인사권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황제도 이들을 함부로 제거하지 못했고, 상황이 된 당현종은 심지어는 유폐된 상태로 죽었다. 당대종이 어조은을 숙청하는 데 성공한 후 금군의 지휘권을 회수했지만 이는 이미 전례가 되었으며, 당헌종이 다시 환관에게 군권을 부여하면서 환관들의 천하가 시작된다. 이들은 중앙에서 각종 부정부패를 자행했으며, 안 그래도 고세율이였던 당 중후기의 조세정책은 부정부패와 가렴주구에 의해 심하게 망가져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절도사들의 난립, 이들을 제압하기 위한 고세율과 소금 전매, 환관들의 전횡과 그로인한 부정부패가 세트로 겹치면서 당을 멸망시키는 반란, '''황소의 난'''이 일어난다.
다만 실제로 이 시기에 존재하는 당나라 견문록이라든가 여행기 같은 걸 보면 번진들이 난립하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거나, 그걸 제압하기 위해 고세율의 수취제도를 구축한다고 해서 무슨 생지옥이 펼쳐지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시기를 전후로 해서는 몰락한 민생과 그로 인한 농민봉기가 나타나지만, 번진 난립시기나 이를 평정한 원화중흥 초반에는 이런 일이 드물었으며, 그 이전의 번진 난립기에도 어느정도 질서가 성립한 후에는 그럭저럭 살아갔던 듯 싶다.[16] 한편, '''문화적으로는 당이 왕조의 특징이였던 북방민족 특유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상실해 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전까지 당은 매우 개방적인 사회여서, 당현종 사망시에 당에서 관리로 일하던 이민족들이 수백 명에 달할 정도였고, 당현종이 장안에서 파천할 때 태자를 분조로 보내면서 '서북 사람들에게 잘 해 줬으니 그들을 힘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적고 개방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반란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개방성은 차츰 사라져 갔고,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고 국제적이던 것이 차츰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한유, 이고 등의 고문파들이 등장해 불교를 비판했고 845년 당무종의 '''회창폐불'''으로 상징되는 대대적인 불교 탄압 사건이 바로 그것. 이로 인해 교종 불교는 쇠퇴하고 대신 선종 불교가 이 공백을 메우며 성리학의 완성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를 이끌게 된다. 경교(네스토리우스교)도 마찬가지로, 원화중흥 이전에는 대진경교중국유행비가 세워지는 등 그 세가 강성해지기도 했으나, 845년에는 폐불 정책 때 덤으로 같이 탄압당해 사실상 중국에서 소멸한다. 명교(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도 불똥을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상업은 쇠퇴하지 않고 북송으로 이어졌다. 황소의 난 당시 광주에서 황소군에 의해 살해된 회회인(아랍인)의 수가 거의 10만여에 달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이런 장거리 무역 또한 점차 약해지고 신라 등과의 근해 교역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한국사에서 신라방청해진이 한참 전성기를 맞던 시기가 당과 신라의 전성기였던 8세기 초가 아닌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까지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발해도 내지는 엔닌의 중국 여행과 법화원의 건립과 같은 일이 이때에 일어난 것.

3.4. 대외적인 영향


'''국제적으로 당은 사실상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당현종 시기에 당은 돌궐 제2제국을 붕괴시키고 토번에 대해 우세를 점하며 실크로드 각국의 통제권을 거머쥐는 등 중앙아시아 국제정세 측면에서 주도국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시기 회흘은 아직 통일 유목제국으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탈라스 전투의 패전 이후 아바스 왕조에게 살짝 밀리긴 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여전히 상당수 서역 국가들은 당의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안사의 난은 당의 주도권을 박탈했다. 위구르는 통일 유목제국으로 성장했고, 토번은 서역 각국을 아우르며 중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영토의 절반도 통제하지 못하는 당은 이들 중 하나를 막기에도 버거웠으며, 토번의 침략으로 인해 섬처럼 고립된 안서, 북정지역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에 당은 회흘, 남조, 아바스 왕조를 끌어들여 토번에 대한 대포위망을 구축해 토번을 억제했으며, 곽자의와 그 뒤를 이은 이성, 마수, 혼감의 활약으로 인해 토번이 동쪽으로 침탈해 오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후 회흘은 심각한 역병으로 약화되고, 토번은 내부 정쟁으로 인한 반란세력이 연달아 등장하여 그 세가 약해지지만, 대신 남조가 거듭 세를 확대하여 당의 서남부 일대에 상당한 위협이 되기도 했다. 이때 상실한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은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 시대를 거쳐 송나라가 건국된 후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이런 국제환경 속에서 발해는 이득을 챙겼다고 할 수 있다. 발해 문왕은 이 과정에서 '발해국왕'의 칭호를 받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발해를 전성기로 이끌었고, 당은 하북지역의 번진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발해를 우대하였다. 신라 또한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당과의 무역이 활성화되는 등 이득을 챙길 만한 여지가 많았으나, 혜공왕이 들어서면서 자체적으로 말기적 증세를 나타냈기에 그닥 이득을 챙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은 신라에 대한 대우를 토번과 동급인 최상위 수준으로 했고, 많은 유학생들을 배출했다.
한편 이 사건은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에 간접적인 방해를 제공했다. 일본은 신라 침공을 계획하고 여기에 발해의 협조를 얻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그런데 발해는 일단은 침공에 맞춰주는 척했으나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신라와의 전면전이 발해에게도 부담스러웠고 기대할 만한 이득도 크지 않은 게 가장 컸다[17]. 이에 더해서 이 안사의 난으로 인해 당나라와 발해의 국경 지대가 매우 불안정해지자, 발해로선 일단 자국 방위가 더 급하다고 여기고 그렇지 않아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신라 침공을 주저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으로서도 독자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기는 어려워졌고, 결국 침공 계획은 흐지부지 끝났다.

3.5. 그 외


이 시기에는 바로 전 '개원의 치' 시대까지 이름을 날리던 문필가들 또한 살아있을 때라, 당의 문학 작품을 공부하면 이 시기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두보는 장안이 점령되고 고향에 갈 수 없자 그리운 심정을 노래한 '춘망'을 지었다. 또 그의 시 '강남봉이구년'에서 당의 중흥기와 기왕 이범이 이구년을 매일같이 불러 놀던 시절, 그리고 안사의 난으로 망가진 나라와 늙어버린 두보 / 이구년이 만난 시절이 일치함을 생각하면 세월무상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두보의 중장년(56세에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말년이다) 시절 작품이 거의 다 안사의 난에 고통받는 백성들 모습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는데, 심지어 두보의 막내자식도 이 시기에 굶어죽었고 그 슬픔이 시에 절절히 나타나 있다.
이태백의 경우 안사의 난 사이에 일어났던 영왕 이린의 난에 가담했다가 귀양가서 죽을 뻔했다가 곽자의의 요청으로 간신히 용서받은 바 있으며, 왕유는 이때 장안에 머무르다 안록산의 반란군에 붙들려 낙양으로 끌려가 협박에 못 이겨 안록산의 치하에서 관직을 맡았고, 이 일이 문제가 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가 동생의 도움으로 살아났는데, 이때의 경험에서 인간 사회에 대한 환멸을 처절하게 느끼고 불교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한유의 작품 또한 이 혼란기를 그린 사례가 존재한다. 한편 이 시대 사람은 아니지만 백거이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피란을 '장한가'로 노래했다.
지방 세력을 끌어들인 국가 중앙 세력의 반란,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으로 비롯된 1세기 뒤쯤의 군벌 난립 등은 같은 시대를 보내던 신라와 무섭도록 일치한다. 반면 발해의 경우 이 시기 문왕 대흠무의 통치 아래 전성기를 맞고 있었으나, 상경과 동경으로의 천도가 안사의 난으로 인한 혼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 또한 존재한다.

3.6. 대중 매체


전설적 로맨스를 자랑하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안사의 난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데, 다만 사극 《양귀비비사》《대당부용원》, 영화 《요묘전》, 1990년대 CCTV사극 《당명황》에서는 난리를 피하여 도망가다 양귀비가 죽거나 일본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끝을 맺기에 사망 배경으로 잠깐 나온다. 다만 2017년 국내에 소개된 사극 《대당영요》는 기본적으로 삼각관계 로맨스 사극이지만, 안록산의 난-사사명의 난 등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거의 직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안록산의 난이 종결되고 드라마가 끝을 맺는 데다가 궁정암투물이라 실제 역사를 따라가면서 스토리가 전개되기에, 전반적으로 전란의 진행과정을 보고 싶으면 추천하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대당영요(大唐荣耀): 사라진 황후는 중국의 당나라 '안사의 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중국 문화의 황금기, 대당제국의 역사 이야기로 2017년 4월 중국 BTV, 한국 아시아N 에서 방영 되었으며 경첨, 임가륜, 진준걸 주연으로 나왔다. 당현종을 배경으로 하여 안사의 난과 당숙종, 당대종의 즉위까지를 다뤘다. 대당영요:사라진 황후
[1] 당은 이 반란을 겨우겨우 진압했다.[2] 본 문서에 나와있는 안사의 난 종료 이후 사건인 토번 제국의 장안 침략과 복고회은의 난은 나와있지 않다.[3] 해안선의 모양이 현재와는 조금 다른데, 이유는 황하 문서 참조.[4] 출저: 전쟁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지정학. 약 3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여담으로, 1, 2, 3위는 각각 제2차 세계 대전, 마오쩌둥 시대(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몽골 제국의 정복이다.[5] 인구 대비 사망자 수는 1위라고 보기도 한다.[6] 이는 당 중기의 학자인 두우통전에서 주장한 수치. 실제 호구수를 1300~1400만 호라고 기술하였다. 출처는 '중국의 역사 - 수당오대'(구리하라 마쓰오 외 지음.)[7] 안록산이 당나라에서 가장 두려워한 사람이 이임보이며, 이임보 앞에선 땀을 뻘뻘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임보 문서에도 있듯이 이 사태의 원인을 만든 것이 바로 이임보였다.[8] 南詔, 지금의 윈난 성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국가. 대리국의 전신[9] 사실 비관롱 관료 입장에선 관롱계열에 적대적인 양국충이 그들의 영향력을 줄여서 자기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었기에, 은인된 자에게 막 대할 순 없었다.[10] 당현종은 천보 3년부터 년(年) 대신 재(載: 실을 재)를 쓰게 했다.[11] 안록산의 혈족으로 가까운 사이였다.[12] 고선지가 가장 신임하던 부하로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 패전 책임을 지고 안서절도사 직에서 물러나면서 봉상청에게 직을 넘긴 것이다.[13] 1월은 1월인데, 중국 사서에서는 음력을 쓰다보니 '''윤달이다.'''[14] 이로써 평로치청번진은 총 10개의 주를 관장하게 되었다.[15] 굳이 따지면 이 과정에서 발해와 사이가 좀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발해도 세워진지 얼마 되지않은 국가라 당나라와 대놓고 틀어질 순 없는 입장이었고 문왕 대흠무 재위시기엔 당나라가 발해를 인정해주는 대신 발해또한 친당적인 색채를 띄었다.[16] '''혼란스럽기는 해도 의외로 살 만했던 분위기'''는 오대십국시대까지도 쭉 이어지는데, 절도사들이 자기 나와바리를 지키려다 보니 생각보다 어느정도 사람 살 만하게 통치를 하긴 했던 측면도 있다. 황소의 난 때 황소가 여기저기 도망다니다 장안을 점령하게 된 이유도 이건데, '''절도사들이 잘 지키고 있는 동네보다 장안이 여러모로 점령하기 훨씬 만만하고 통치자에 대해 인심도 사나웠었던 것...'''[17] 일단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신라가 바로 한반도 내인데다가 한반도는 고대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크고, 신라가 아직까지는 강력한 국가였기에 자신들이 침략한다한들 전력 손실이 큰 데다가 대대적으로 병력을 보내면 변방에 문제도 크기에 오히려 안 도와줄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