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서

 


'''당나라의 반란자'''
'''연 제2대 황제
晉剌王 | 진자왕
'''
'''묘호'''
없음
'''시호'''
진자왕(晉剌王)
''''''
안(安)
''''''
경서(慶緒)
'''생몰기간'''
723년 ~ 759년 3월 25일
'''재위기간'''
758년 ~ 759년 3월 25일
1. 개요
2. 생애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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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 영주 유성 사람이다. 안록산의 둘째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예황후 강씨이다. 연의 제2대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인집(人執)이었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2. 생애와 죽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현종은 그에게 경서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안록산이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홍려경에 임명되었다.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안경서는 범양에서 안록산을 만나러 온 위군 태수 길온을 변경까지 배웅한 바가 있다. 길온과 함께 말을 타 역으로 데려다주었다. 길온은 안록산의 부하인데 안록산을 길온을 통하여 장안에서의 모든 일들을 꿰뚫었다. 755년, 안록산이 양국충 제거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당 조정은 안경서의 어머니 예황후 강씨와 장남 안경종(安慶宗)을 처형하였다.
756년, 안록산은 안경서를 파견하여 동관을 쳐들어갔다. 하지만 가서한이 이를 물리쳤다. 이 해에 안록산이 낙양에서 황제를 칭하자 안경서는 좌상(左相)에 임명되었고 진왕에 봉해졌다. 757년, 안록산의 폐첩인 단씨가 아들 안경은(安慶恩)을 낳자 안경서를 대신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말이 세간에 떠돌자 안경서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심경에 두려워하였다.[1] 게다가 안녹산은 궁인들을 몽둥이로 마구 폭행하고 죽이는데다 측근인 환관 이저아까지 매질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안경서도 아버지를 더이상 감당할수 없었다. 엄장이 안경서에게 말하길을 '''“일에는 부득이한 것이 있으니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안경서가 '''“형이 행한 바가 있으면 감히 공경하여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저아도 모반하지 않으면 죽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며 동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757년, 에 엄장과 안경서가 무기를 가지고 장막에 서고 이저아가 칼을 집고 안록산의 배를 찔러 그를 살해한다. 안록산은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반드시 집안의 역적이라고 말하다가 끝내 숨졌다. 안경서는 안록산의 병이 위독한 탓에 자신을 태자로 삼고 얼마 안 있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2] 안록산을 높여 태상황으로 하였다. 하지만 안경서는 황제가 된 이후에는 술을 먹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자만하여 말을 할 때 차례를 지키지 않았다. 757년, 위구르군과 당군이 연합하여 낙양으로 진격해오자 안경서는 급하게 하북으로 달아났다.
안경서는 업군을 지키며 업군을 안성부로 승격시키고 연호를 천성으로 고쳤지만 아사나승경 등은 흩어져서 상산과 조군 그리고 범양에 투입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채희덕, 전승사, 무령순 등의 각기 군사가 돌아오자 그 무리가 6만에 육박했다. 그러나, 안록산의 제장이었던 사사명이 자기가 관장하고 있는 13군과 8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당에 항복해 귀의왕에 책봉되고 하북절도사에 임명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당 조정이 사사명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사전에 발각되자 758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사사명은 즉각 업군으로 들어가 안경서를 죽이고 그의 휘하 부장 손효철, 최건우, 고상 등을 죽였다.
[1] 당시 안록산은 시력이 점차 어두워져 사물을 볼 수 없었고, 등창이 생겨 성격이 난폭해져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차남이라고 하지만, 이미 지병으로 반쯤 맛이 간 아버지를 가만히 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안녹산은 난폭함을 말리는 아들 안경서를 폭행하여 안경서와도 사이가 틀어진 상황이었다.[2] 이 해에 연호를 재초(載初)로 개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