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록산

 


'''당나라의 반란자'''
'''연 초대 황제
光烈帝 | 광렬제
'''
[image]
'''묘호'''
없음
'''시호'''
광렬황제(光烈皇帝)
''''''
안(安)
''''''
녹산(禄山)
'''연호'''
성무(聖武, 756년 ~ 757년)
'''체중'''
200kg
'''생몰기간'''
? ~ 757년 1월 30일
'''재위기간'''
756년 2월 5일 ~ 757년 1월 30일
1. 개요
2. 생애
3. 죽음
4. 비만
5.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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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 시기의 장군. 안록산의 난을 일으켜서 연나라 황제자칭했다. 한족식 이름이라서 한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소그드족[1] 출신으로 페르시아백인(코카소이드)과 돌궐족의 혼혈이다.[2] 본래 성씨는 강(康)이고, 아명은 알락산(軋犖山)이다. 그의 이름인 '록산'은 소그드어 '로흐샨(rwxšn/roxš(a)n)'을 음차한 것으로, '밝음, 빛나다'라는 뜻이다. 현대 페르시아어 이름, '로우샨(روشن, rowšan)'과 같은 어원이다. 한국에서는 안녹산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안록산은 소그드어를 모어로 사용했고, 그 이외에도 중국어(중고한어), 페르시아어, 티베트어, 토하라어 등, 총 6개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2. 생애


안록산의 아버지는 당나라 성씨를 가졌으나, 이란계 소그드인의 유력자인 것으로 추측되며, 어머니는 돌궐무녀였다고 한다. 돌궐 부족이 혼란에 빠지자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당나라에 망명하였는데, 안록산은 인근 부족의 6개 국어를 할 줄 알아 처음에는 호시아랑(互市牙郎)에 임명되었다. 교활하고 잔인하지만 재치가 많아 남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데 능숙했다고 한다. 상술에 뛰어나서 변방의 이민족들과 중계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다. 이를 통해 중앙의 고위 관리들에게 많은 뇌물을 뿌려 자신의 실책과 비리를 면했다. 그러다보니 딱히 큰 공을 세운 게 없음에도, 당현종에게 아첨하여 현종의 총애를 받아 3개 절도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안록산은 양귀비에게도 아첨하였는데 양귀비를 양모로 모시고 그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재상 양국충(楊國忠)과 마찰을 일으켰으며,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안록산의 난을 일으킨다.

3. 죽음


반란에 성공하고 낙양에서 웅무황제(雄武皇帝)에 즉위, 국호를 연(燕), 연호를 성무(聖武)로 했다. 하지만 당현종은 쓰촨성으로 도피하고, 당숙종은 분조를 이끌면서 계속 저항하여 안록산의 세력은 지지부진해졌다. 게다가 안녹산은 거병을 한 다음부터는 건강이 나빠졌는데 점점 눈이 나빠지고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아예 실명을 하게 되며 궤양에도 걸리게 되자 매우 난폭해졌다. 특히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쁘면 궁인들을 폭행하고 죽이는 일을 흔하게 벌여 궁인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된다. 나중에는 측근들과 가족에게도 폭력을 쓰게 되어 측근들과 가족들도 그를 두려워한다. 757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빚던 터에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3] 하지만 부하이던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이고 계속 반란을 이어갔고 그도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하고 사조의가 반란을 이어갔다가 당나라, 위구르 연합군에게 패해 자살함으로써 763년에서야 8년 만에 반란은 막을 내린다.

4. 비만


안록산은 매우 뚱뚱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랫배가 무릎까지 처지고, 몸무게가 230근(약 200kg[4])에 달했다고 한다. 현종이 그 불룩한 뱃속에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을 때 "단지 충심(忠心)만이 들어있습니다." 라고 대답해서 현종을 기쁘게 했다. 또 거란 출신으로 10세에 안록산이 직접 거세를 한 환관 이저아(李猪兒)를 곁에 두었는데, 이저아는 안록산이 옷을 갈아입을 때 머리로 배를 받쳐 들고 허리띠를 매어줬다고 한다.[5] 너무 배가 커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허리띠를 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뚱뚱했기 때문에 말년의 눈병과 실명은 당뇨병의 영향으로 추측되고 있다. 뚱뚱했던 것과는 별개로 몸놀림 자체는 재빨랐던 듯 하다. 안록산은 호선무[6]라는 춤을 잘 췄다고 전하는데, 이 춤은 서역에서 전래된 춤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도는 춤이다. 이런 춤을 잘 춘다는 건 뚱뚱한 체격과는 별개로 매우 민첩하고 운동신경이 좋았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활을 잘 다루었으며, 스스로도 그 활솜씨를 자랑으로 여겼다.

5. 둘러보기(계보)




'''당 제국''' '''상서좌복야'''
전임 이임보

'''안록산'''
754년~755년

후임 가서한
[1] 타지키스탄의 주류민족인 타지크인이 이들의 후예이고 특히 타지키스탄의 소수민족인 야그노비인은 그들의 언어인 야그노비어가 아예 소그드어까지 계승한 직계 후예라 한다.[2] 정작 중화권 사극에서는 황백혼혈 배우가 아니라 한족 등 순수 황인 배우가 맡는다. 안록산이 페르시아계 백인(소그드인)과 튀르크계 황인(돌궐족)의 혼혈이었으므로, 중국의 민족들 중 비슷하게 페르시아계 백인과 튀르크계 황인의 혼혈인 위구르족이나 우즈베크족이 안록산 역을 맡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캐스팅이다.[3] 아버지의 난폭함을 말리는 안경서와 갈등이 커지자 안녹산이 두 번째 아내의 아들을 후계자로 선포하여 충격을 받은 안경서가 아버지의 측근들과 합심해서 그를 살해한 것이다. 특히 안경서는 난폭해진 아버지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터라 그전에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결정했고 안녹산의 측근들도 갈수록 난폭해지는 안녹산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모두 안경서의 편이 되어 안녹산을 살해하는 것에 동의한 상황이었다. 이때 안녹산은 항상 곁에 칼을 두고 다녔는데 안경서와 측근들, 내관 이저아가 사전에 칼을 치운 터라 반격을 하려해도 할 수 없었고 결국 안경서의 지시를 받은 이저아의 칼에 찔려 죽는다.[4] 당나라 땐 1근이 10량이어서 1근이 370~375g이었다.[5] 이저아는 안록산이 폭력적이 되자 자주 얻어맞았는데 그러다보니 견딜 수가 없어 안록산의 측근 엄장, 장남 안경서와 함께 작당해서 안록산을 살해한다.[6] 고구려수나라에도 이 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