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화천

 

加花川
1. 개요
2. 역사
3. 특징
4. 사건사고
5. 기타


1. 개요


진주 남강의 진양호에서 발원하여 사천시 사천만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원래 발원지는 낙남정맥[1]의 산으로,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의 가호마을 앞에 흐르는 조그만 실개천이었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그곳의 지명이 경남 사천군 곤양면 가화리였기 때문에 가화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남강 유역의 홍수 방지를 위해 낙남정맥을 관통하는 방수로를 만들어 가화천과 연결하면서 현재 모습이 되었다.

2. 역사


가화천은 원래 낙동강 수계와는 관련이 없는 작은 하천이었다. 그런데 해마다 큰비가 내리면 남강과 낙동강이 범람하여 하천 주변의 농지와 가옥이 파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하여 남강과 가화천의 상류를 연결하여 가화천을 남강의 물을 우회하여 빼낼 수 있는 방수로로 이용하고자 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이와 관련된 첫 번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 5월 8일(서기 1796년 양력 6월 12일) 임자 2번째기사#

간민(姦民) 장재곤(張載坤)이란 자가 용동궁(龍洞宮)에 고하기를,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긴 강을 만들고, 그 강이 곧장 진주(晉州)로 흘러가 다시 김해(金海)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번 장마가 지면 함안(咸安)·창원(昌原)·초계(草溪)·영산(靈山)·양산(梁山)·현풍(玄風)·김해(金海)·칠원(漆原)·의령(宜寧)·창령(昌寧)·밀양(密陽)·진주(晉州)·성주(星州) 등 13개 고을의 강에 인접한 토지가 모두 침수되어 한 포기도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 강 상류에는 진주의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라는 곳이 있는데, 양쪽 강안이 가파른 절벽이고 지세가 좁고 낮으며 중앙에 우묵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물길을 뚫어 강물의 방향을 돌려 사천(泗川)의 바다로 흘러가게 한다면, 그 형세가 마치 병을 거꾸로 세워 쏟아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곳은 바다와의 거리가 25리에 불과하고 뚫고 소통시킬 곳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길을 뚫은 뒤에 지소두 아래에 제방을 쌓아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한다면 13개 읍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장차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비변사가 본도에 공문을 하달하여 물으니, 경상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하기를, "보좌관을 보내 특별히 사정을 탐색하고 고을원들을 엄하게 경계하여 착실히 살펴보게 한 결과, 지역의 형세와 백성들의 뜻이 건의한 자의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 광탄에 제방을 축조한다 하더라도 낙동강의 하류는 그대로 있고, 지소두의 목에 물길을 뚫는다 하더라도 조곡(助曲)의 지맥(地脈)이 점점 높아지게 되면, 예전의 포구는 침수지의 가감이 없어 새로이 튼 물길은 유리하게 유도하기 어렵게 됩니다. 더구나 두류산(頭流山) 남쪽에서 발원한 물이 멀리 광탄에까지 흘러오는 과정에 절벽과 산록이 서로 뒤엉키면서 물살이 매우 빨라지니, 지금에 장정들의 힘을 빌어 하류를 막고 우묵하게 들어간 곳으로 선회하는 물살을 유도한다 하더라도, 한번 여름의 호우를 당하여 상류의 물이 급하게 불어나게 되면, 그 형세가 틀림없이 제방이 터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이 제방을 쌓기 전보다 더 극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읍의 성지(城池)가 강변의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범람하는 사태는 본래 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지소두에서 물길을 뚫을 만하다는 곳에 대하여 말하면, 그곳은 바다에서 30리의 거리에 있으며 땅의 형세가 점점 높아져서 물길이 왕왕 막히고 있는데, 실로 13개 고을의 백성으로 그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13개 고을이 혜택을 입는다고 한 것은, 함안 등 9개 고을은 남강(南江)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혹 그럴 수 있겠다고 하겠으나, 성주 등 네 고을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 애당초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장재곤의 성명은 호적에 실려 있지 않으며 행동이 거의 허황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수본(手本)을 보고서 일의 형세로 유추하건대 지극히 허황하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해궁(該宮)의 사체는 다른 궁방(宮房)과는 특별하다. 해도에 물어보지도 않고 지레 먼저 결정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이다. 비록 글을 만들어 판하(判下)하였더라도 해도의 장계를 받아 본 뒤에 처치하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보니 요량했던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 근래에 이러한 간교한 일의 폐단에 대하여 얼마나 엄중히 경계했던가. 이른바 ‘고발하는 자에 대하여는 네 번 고발하면 한 차례 상을 내린다.’는 법을 시행하지 말게 했다면 감히 상언(上言)하거나 정소(呈訴)할 수 있었겠는가. 백성들의 습속이 가증스러우나 간사한 백성들을 어찌 다 논하겠는가. 당해 차지(次知) 중사(中使)는 내시부로 하여금 각별히 엄중 조사하게 하고 앞으로 다시 이런 허황된 일에 대한 수본(手本)을 올릴 경우에는 해당 중사에게 등급을 올려 엄중 처치하는 법을 시행하라. 이러한 뜻을 해도에 지시하여 즉시 13개 고을의 수령에게 통지하게 하라." 하였다.

간단히 상황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장재곤이란 사람이 해마다 남강이 범람해서 남강 유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피해를 보니 안타까워 산을 깎아 남강의 일부 물길을 가화천으로 돌려서 사천 앞바다로 흘려보내는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정조에게 보냄.
2. 비변사가 경상도 관찰사에게 사실확인을 요구하였고, 경상도 관찰사가 조사관을 파견하여 조사 후, 장재곤의 주장은 너무 허황되고 공사가 매우 어려우며 장재곤은 호적에도 실려있지 않은 자 라 믿을게 못 된다고 보고를 함.
3. 보고를 받은 정조는 분노하며 이런 장난식의 상소를 올리는 자는 엄벌하라고 으름장을 놓음.
4. 결국 장재곤의 상소는 무시되고 장재곤은 조선 역사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간민(姦民)[2]으로 기록되는 불명예를 안음.
장재곤이 정조에게 상소를 올린 지 약 백 년이 지나서 가화천 방수로 방안에 대한 기록이 또 나온다.#
구한말 마지막 진주 관찰사 황철이 부임해 있던 시절 영남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남강 홍수를 방지함에는 일거양득의 좋은 방법이 있으니 이는 사천만으로 절하(切下)하는 것이다. 이는 치수와 8천 정보의 비옥한 토지를 얻게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1937년 8월 말에 이른바 병자년 대홍수가 발생하면서 진주 읍내 6,700여 호의 가옥 중 무려 80%이상인 5,500여 호가 침수피해를 입었고 인명피해도 101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남강 범람으로 인한 진주 읍내 침수피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어서 193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가화천 방수로 공사가 착공되었으나, 1943년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공사는 중단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 방수로 공사가 2차 착공되었지만, 또다시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되었다. 이후 1962년 남강댐 공사가 착공되면서 방수로 공사도 3차 착공되었고, 결국 7년만인 1969년에 남강댐(구 댐)이 준공되면서 가화천을 통한 사천만 방류도 시작되었다. # 이후 1999년 남강 다목적댐(보강댐)이 준공되면서 가화천 방수로도 그 공사과정에서 재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3. 특징


자연적으로 발생한 원래의 가화천은 이름 모를 조그만 실개천에 불과했지만, 현재의 가화천은 진양호 물을 방류하기 위한 인공하천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렸다. 발원지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10.38km 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하천이지만 진양호 방수로로 이용되는 전략적 가치 때문에 국가하천으로 관리되고 있다. 하천의 형태도 10.38km 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구간 내에서 중류, 하류, 기수역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가화천의 상류에 위치한 정수역에는 진양호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붕어, 잉어, 배스, 메기, 쏘가리, 피라미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하류에는 기수역이 형성되어 있어 검정망둑, 민물두줄망둑, 가숭어 등 기수역을 선호하는 어류가 서식하고 있고 하천과 바다를 오가는 회유성 어종인 황어, 뱀장어, 참게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사천시는 가화천에 연어 치어도 방류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으나 아직 성체 연어가 가화천에 회귀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10km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구간에 1차 담수어(계류성), 2차 담수어(회유성) 어종이 혼재되어 서식한다는 사실이 낚시인이나 탐어인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포인트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가화천은 다소 위험한 지역이므로 출입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수자원공사 측에 따르면 진양호의 수위 및 남강댐 유량 조절을 위해 진양호 물을 가화천으로 연중 불시 적으로 방류하고 있어 위험할 수 있으므로 가화천 출입 자제를 권고하고 있다. 가화천에서 낚시나 탐어를 즐기는 위키러들이 있다면 '''가화천에서 수위 상승이나 유량 변동의 징후가 포착되는 즉시 주저하지 말고 바로 하천에서 나오길 바란다. 여과 생활도 중요하고 조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여러분의 안전이다.'''

4. 사건사고


1999년 12월 1일 MBC 뉴스데스크는 가화천에서 발생한 물고기 떼죽음 사태를 보도하였다.# 가화천 상류의 물이 고인 지점에서 잉어, 붕어, 쏘가리, 황어, 메기, 피라미 등 수만 마리의 어류가 떼죽음 당하여 물 위로 둥둥 떠오르는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해당 보도에서 진주시 관계자는 낚시꾼 중에서 누군가가 독극물을 가화천에 살포하여 물고기 떼죽음 사태가 벌어진 거 같다고 주장하였다.
2011년 7월 경남 사천시의 환경 시민단체인 사천환경운동연합이 가화천 변에 있는 한 축산 업체가 무단으로 축산 폐수를 가화천에 방류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사천환경운동연합 측에 따르면, 가화천 변에 사천지역의 최대 양돈축사가 있는데 이 축사가 수년째 축산폐수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가화천을 통해 사천만으로 무단 방류하여 가화천 및 사천만 지역에 악취가 발생하고 수질이 악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사천환경운동연합이 가화천 주변에 사는 주민들에게 수질오염 의혹을 제보받아 수질 오염 및 가화천 생태 조사를 하는 도중 가화천 하류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대추귀고둥의 대량 서식지를 발견하였고, 일부 개체는 이미 수질 오염으로 인해 폐사하였다고 한다. 사천환경운동연합 측은 해당 조사에서 문제가 제기된 해당 축사에서 대량의 축산 폐수가 가화천으로 무단 방류된 사실은 확인하였고, 이로 인해 가화천의 수질이 악화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천시에 "가화천 수질 정상화와 멸종위기종인 대추귀고둥의 보존을 위해 해당 축산 업체에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하였다.

5. 기타


가화천의 상류인 진주 내동면 유수리에 백악기 화석 산지가 있다.# 1997년 경북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고생물 화석 산지 답사팀이 이곳에서 알로사우르스과에 속하는 수각류 육식공룡의 이빨 화석을 발견했다.# 당시 답사팀 조사관에 따르면 알로사우르스과 공룡의 이빨 화석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초의 사례이며, 1992년에도 이 장소 부근에서 공룡 발자국과 공룡 배설물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진주 내동면 유수리 백악기 화석 산지는 그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12월 30일 문화재청에 의해 천연기념물 제390호로 지정되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가화천은 수자원공사에서 안전성 문제로 출입 금지를 권고하고 있고 유수리 화석 산지의 접근성이 좋지 않아 일반인이 직접가서 관찰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안내판같이 일반인이 알기쉽게 설명해주는 시설물이 없어 일반인이 직접 가서 보아도 화석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진양호 담수 방류 문제로 사천에 사는 주민과 수자원공사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한다. 가화천 방수로는 진주, 의령, 함안 등 남강 유역 범람 방지를 위해 진양호의 물을 방류하고 있는데 담수가 사천만에 대거 유입되면서 사천만 해수의 염도가 낮아져 그 일대에서 양식을 하는 어민과 조업을 하는 어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사천시의 어민들이 수자원공사 남강댐 관리단에 항의 집회를 열고 있지만, 수자원공사 측은 남강의 수량 관리를 위해 가화천을 통한 담수 방류랑을 증가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 이러한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가화천은 산을 깎아 만든 인공하천이기 때문에 산경표의 산자분수령의 원리에 어긋나는 하천이 되었다. 가화천 외에 산자분수령에 어긋나는 하천으로는 경인 아라뱃길이 있다. 한강 하구는 휴전선에 걸쳐있어 선박이 한강과 서해 사이를 왕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고자 이명박 정부 시절 한반도 대운하의 시범사업 성격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진양호 수량 조절이라는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가화천과는 달리 경인 아라뱃길은 화물과 여객 이용량 예측에 실패하여 혈세를 낭비한 사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하천 덕분에 사천, 고성, 통영, 창원, 김해등은 어떤 경로로든 교량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실질적 섬이 되었다.[3]

[1]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지리산의 영신봉(靈神峰)에서 김해 분성산(盆城山)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즉, 낙동강 수계와 남해로 흐르는 작은 하천을 나누는 분수령이다.[2] 말 그대로 간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장재곤에게 이러한 서술을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일단 장재곤은 이름이 호적에 실려있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아 가화천 방수로 공사를 통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해마다 홍수로 고통받는 남강 유역의 백성들을 위해 가화천 방수로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용기를 내어 왕에게 상소문을 올린 그의 행동은 칭찬받고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오히려 지방관리의 말만 듣고 분노를 한 정조나 호적에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한 경상도 관찰사나 장재곤을 간민으로 비하한 사관들의 태도가 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유교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더라도 진정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누구든지 모여서 토론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3] 아무도 라인마인도나우 운하로 유라시아 본토와 떨어진 서유럽을 섬이라곤 하지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