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제6공화국
이명박 정부
李明博 政府 | Lee Myung-bak Government
'''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출범 이전'''
'''이후'''
'''참여정부'''
'''박근혜정부'''
'''대통령'''
'''이명박''' ,(17대),[1]
'''국무총리'''
'''한승수''' ,(2008.2.29~2009.9.28),
'''정운찬''' ,(2009.9.29~2010.8.10),
'''김황식''' ,(2010.10.1~2013.2.26),
'''여당'''
'''한나라당''' ,(2008.2~2012.2),
'''새누리당''' ,(2012.2~2013.2),
1. 개요
2. 이념
3. 슬로건
4. 국정원리/목표/과제
5. 경제
6. 외교
7. 사회
8. 논란
9. 주요 사건
9.1. 2008년
9.2. 2009년
9.3. 2010년
9.4. 2011년
9.5. 2012년
9.6. 2013년
10. 인사

[clearfix]

1. 개요


<color=#ffffff>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취임선서'''
'''이명박 정부'''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명박이 이끌었던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다섯 번째 정부이다.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권교체로 탄생한 정부이기도 하다. 2008년 2월 25일부터 2013년 2월 24일까지 5년간 존속했다.
이전 정권까지는 참여정부, 국민의 정부, 문민정부 등 각 정권마다 추구하는 핵심 가치를 담은 정부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의 실명을 공식적으로 명칭에 사용했다. 한때 '실용 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된 적도 있었으나, 과거 정권들의 명칭 패턴을 반복하는 것은 구태의연한데다가 '실용'이라는 표현이 밋밋하고 의미가 다소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이명박 정부'를 공식 명칭으로 채택하였다. 언론에서는 이명박의 이니셜에서 유래된 '''MB 정부'''라는 명칭을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2. 이념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 보수정당 소속의 정부 중 하나이다. 집권 당시 중도실용주의를 표방했다.
이명박 정부의 기본적인 이념은 신보수주의라는 분석이 많다. 신보수주의는 미국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마거릿 대처 총리가 1980년대 자국의 국내외 정치에 활용한 보수주의 이념이다. 신보수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은 경제적 자유주의(특히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며 영미권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우호적이라는 점이다. 또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공주의, 사회윤리적, 사회도덕적 가치를 지키려는 사회보수주의 성향을 띤다.[2]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이며 포퓰리즘보다는 엘리트주의에 가까운 편이다.
다만 이명박 정부는 관치 우호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 예로 4대강 정비 사업이 있다. 이 때문에 정부 실패의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는 공기업의 경영 방만 역시 이명박 정부 시기에 커졌으며, 공기업 민영화 추진은 다른 의미로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메우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게다가 굳이 따지자면 이명박 정부는 시장 친화보다는 대기업 친화적인 경향을 보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시장 친화와 대기업 친화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를 동일한 것으로 본 것 같다.

3. 슬로건


  •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
  • 저탄소 녹색성장

4. 국정원리/목표/과제


'''국정목표''': 신 발전체제 구축
  • 국가, 사회 간 시너지 협력을 통한 발전
  • 질적 성장 추구, 성장과 복지 간 선순환구조 구축, 선성장 후복지
  • 법치의 확립과 헌법 존중
  • 다원주의 가치, 개성, 창의 존중 인재 양성
  • 글로벌 스탠더드와 내셔널 스탠더드의조화
  • 고신뢰 사회
'''과제'''[3]
[image]
  • 섬기는 정부 - 36개 과제
  • 활기찬 시장 경제 - 50개 과제
  • 능동적 복지 - 42개 과제
  • 인재 대국 - 18개 과제
  • 성숙한 세계 국가 - 47개 과제
'''3대 국정운영기조'''[4]
  • 글로벌 외교 강화
  • 경제 활력을 높이면서 선진화 개혁에 박차
  • 친서민 중도실용의 정책 기조
'''5대 핵심 과제'''[5]
  • 일자리 창출을 핵심으로 한 경제 살리기
  • 공교육 질 향상을 위한 교육 개혁
  • 지역 발전의 전기 마련
  • 정치 선진화 개혁
  • 전방위 외교 및 남북관계 실질적 변화 추구

5. 경제


이명박 정부는 경제면에서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를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추진된 소득세·법인세·종부세 인하, 금산분리를 비롯한 경제적 규제의 완화, 공기업 매각 및 합병 등의 정책들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 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 이래로 국가자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 경제체제의 특성상 국가자본주의적인 정책을 입안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4대강 정비 사업이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불리우는 세계 금융 위기를 고환율정책으로 통해 상당히 안정적으로 극복했으며, 전세계가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때 2009년에는 주요 선진국 중 거의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을 하였으며 2010년에는 6.1% 성장하면서 세계 GDP의 2.1%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2020년 현재까지도 한국의 GDP가 세계에서 차지한 비중 중에 가장 높은 수치이다.
2010년의 무역수지는 417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이것은 2년 연속 400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사상최대치다. 기업의 실적도 증가해 상장기업 157사의 순이익이 2분기 19조 원, 3분기 22조 원으로 분기 사상 최대치를 달성했다. GDP성장률은 글로벌금융위기 직후 -4.5%에서 0.2%로 플러스전환했는데 이는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빠른 회복이다. 2011년 1월 4일에는 종합주가지수가 2085를 기록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1년 12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무역 1조 달러 달성의 신화를 썼다. 아울러 2012년에도 2년 연속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무역이 줄어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역 1조 달러 클럽 진입에 성공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으며, 특히 수출과 수입이 비슷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세계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열린 무역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012년에는 이탈리아를 제치고 사상 최초로 무역 8강에 진입하기도 하였다.
수도권그린벨트를 일부 해제해서 '보금자리 주택'이라는 서민용 주택을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했는데, 기존 신도시보다 저렴한 가격과 좋은 거주환경 때문에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자료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때 서울 집값 상승률은 -13%였는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상승률이 각각 73%, 94%나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명박 정부는 부동산 정책에서 상당히 선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집값이 안정됨에 따라 전세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세 가격이 급등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2010년에는 처음으로 정부의 채무가 400조를 돌파하였다. 이는 2년새 100조가 증가한 것으로 정부는 "OECD 국가들에 비하면 안정적인 수준"이라고 말하였으나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는 점, 증가 속도가 매우 가파랐다는 점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경제위기에 따른 막대한 재정 지출을 이유로 균형 재정 목표 시점을 당초 2012년에서 2013∼2014년으로 미루면서 정부가 장밋빛 전망에 안주하였다는 지적도 나왔다.
2010년 9월에는 엥겔 계수가 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였으며 이러한 엥겔 계수의 상승은 소득 대비 식비 지출 비중이 큰 서민층이나 빈곤층에게 타격을 주게 된다. 이명박 정부는 물가 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집중 관리 품목을 선정하여 물가 관리에 나서기도 했는데 오히려 관리 품목들의 물가가 더 많이 올라버렸다. 이러한 물가 상승의 영향을 받아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가 매년 악화되어 2009년에는 0.345를 기록하였다. 임금 상승률도 선진 27개국 중 가장 낮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2년 연속으로 마이너스를 보였다. 2008년에는 -1.5%, 2009년에는 -3.3% 등을 기록했다.[다만]
일자리 정책을 경제 정책의 최우선으로 내세웠지만 일자리 상황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4대강 정비 사업도 일자리 창출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2009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실업자수가 90만 명을 돌파하여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특히 청년 실업자수가 2년 연속 8%를 기록해 실업난이 가장 심각했다. 결국 2011년 2월, 대졸 실업자수가 34만 명을 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노사 갈등이 일어날 경우 지나치게 경영자의 입장에만 선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노동자들의 시위에 신속하게 경찰 병력을 투입하여 진압하고 구속시켜버리는 일방적인 입장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부터가 현대건설의 CEO 출신이었으니 노동조합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수도권의 투기지역과 투기과열지구를 해제하거나 수도권 산업단지 내 공장의 신설과 증설을 전면 허용했는데, 이는 국토균형발전을 포기한 '지방 죽이기'라는 야당의 비판을 받았다.

6. 외교


이명박 정부는 역대 한국 정부를 통틀어 영미권, 특히 미국에 대해서 가장 우호적인 편이었다.직전 정권 당시 한미동맹이 '이혼관계'라는 평을 들을 만큼 한미 양국이 여러 갈등을 겪으며 서로 껄끄러웠는데, 이명박 정부는 대미 외교관계의 복원에 많은 노력을 했다. 참여정부로부터 이어져 온 한미 FTA제주해군기지 건설 등 미국과의 경제적, 군사적 협력체계를 더욱 강화하는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하는가 하면[6], 이명박 대통령 개인으로서도 부시 대통령 및 오바마 대통령과의 인간적 친분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에 대해서는 지일파적인 성향을 보이는 편으로[7].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를 모토로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를 추구하고 협력하고자 했으나, 한일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엔 한국의 입장을 최대한 관철하고자 노력하였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의 체결을 추진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일본과 독도를 놓고 거세게 대립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독도를 방문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약탈된 국내 문화재 반환에 힘을 기울여 정상 간에 합의를 통해 일사천리로 진행하였다. 이명박은 2010년 11월 12일 한국에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만나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반환하는데 정상이 합의하여 2011년 5월 24일에 모두 국내로 돌아왔고,# 2010년 11월14일 요코하마에서 간 나오토 총리와 만나 '조선총독부를 거쳐 일본으로 반출된 도서 1천205책을 한국에 인도한다'는 내용의 한일도서협정을 체결하여 2011년 12월 6일자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최종 반환되었다.#
그 외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 2010 G20 서울 정상회의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등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올리기 위해 힘쓰기도 하였다.

7. 사회


교육정책에 있어서는 평등주의에 입각하기보다는 자사고 확대, 영어 몰입 교육,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의 전면적 실시 등의 정책들을 실행하였다. 그로 인하여 고소득, 자사고, 특목고 위주의 교육중점으로 한 수월성 교육을 지향하는 편이었다. 또 5+2 광역경제권이라는 이름의 국토 개발 정책을 입안하기도 했다.

8. 논란



9. 주요 사건



9.1. 2008년



9.2. 2009년



9.3. 2010년




9.4. 2011년



9.5. 2012년



9.6. 2013년



10. 인사




[1] 2020년 10월 29일 실형 선고로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2] 대표적인 사회보수주의 정책은 성매매 합법화 반대, 음란성·폭력성을 띠는 미디어 규제, 낙태 반대, 마약총기의 소지 또는 거래를 반대하는 성향을 띈다.[3] 2009년 11월 제시되었다.[4] 2010년 대통령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3대 국정운영기조를 설정하였다.[5] 2010년 대통령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3대 국정운영기조하에 주력할 5대 핵심 과제를 발표하였다.[다만] 지니계수를 참여 정부 와 비교해보면 지니계수가 아주 약간은 나은 정도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6] 정작 당시에 여당으로서 이러한 정책들을 입안했던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민주당은 야당이 되고 나서는 이러한 정책들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7] 좌파 진영은 이명박을 친일파로 매도하기도 했는데, 애시당초 이명박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반대했던 6.3 항쟁의 주역들 중 한 명이다. 그의 저서들에서도 일본을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듯한 구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8] 이에 따라 공군 비행장 활주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