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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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강석린(姜錫麟)

시철(施綴)
생몰
1919년 3월 2일 ~ 1997년 9월 1일
출생지
전라북도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
본관
진주 강씨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석린은 1919년 3월 2일 전라북도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산구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39년 2월부터 동창생 유재우, 성창환, 민병구(閔丙九) 등과 함께 항일투쟁에 투신하기로 결의하고, 교내 친목단체인 '여우회'를 단순한 친목단체에서 항일투쟁단체로 탈바꿈시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첫 작업으로 한국인 재학생과 신입생을 대상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강석린은 중일전쟁에서 일제가 패전할 것이며, 해외 독립군과의 연결을 꾀하면서 국내에서도 국외의 독립운동세력과 홍으해 일시에 봉기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구상을 품었다. 그는 요원들을 양성하기 위해 교내에서 비밀결사 독서회를 결성하고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윤독했다. 또한 내선일체, 창씨개명, 지원병 제도, 그리고 조선어 폐지에 대해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40년 7월 산구현 당국에 의해 비밀결사 조직이 발각되면서 관련자 19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1년 7월 석방된 그는 1942년 1월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1946년 1월 조선에 귀국한 뒤 1946년 3월 한국독립당에 가담해 상임위원을 역임했으며, 단국대학교 이사를 맡기도 했다.
1955년에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뒤 자유당에서 당원으로 지내다가 1957년 탈당했고, 다시 한국독립당에 복당해 1959년부터 1970년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1970년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했다가 몇달 안되어 탈당했고, 이후 신민당, 국민당을 거쳐 1986년 신한민주당에 입당해 1989년까지 활동하다가 1989년 11월에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후 서울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97년 9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강석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