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선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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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선일체'''('''內鮮一體''')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내놓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이자 일제강점기의 표어이다. 자매품으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가 있다. "내지(內地: 일본 열도[1] )와 조선[2] 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비슷한 예로는 1930년대의 '''일만일체'''[3] 와 청나라에서 나온 '''만한일체'''[4] 도 있다. 또한 괴뢰 국가 만주국을 만들면서 내세운 오족협화(五族協和)[5] 도 마찬가지이며, 현재 중국이 내세우고 있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말 또한 매우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협력일치, 세계의 승자'''
2. 상세
본격적으로 이 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미나미 지로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이다. 다만, 내선일체라는 단어를 정말로 먼저 쓰기 시작한건 전설적인 친일파였던 '''선우순'''이다. 1927년에 이미 그 단어를 만들었다. 출처.
"조선과 일본은 하나이므로 조선인도 (권리는 없지만)[6]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만' 다해야 한다."는 식. 한마디로 '''수탈과 동화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용도'''였다. 내선일체라면서 정작 총선 참정권은 안 주고, 조선에서의 고등교육을 장려하긴커녕 억제했다는데서 그 이율배반성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인적 자원 부족 문제 해결 의도도 있었는데 그 근거가 의무교육 실시.
사실상 일제강점기 말기에 민족말살정책의 기본적인 이념으로 작용한 개념으로 내선일체의 개념에 따라 천황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하고 신사참배를 의무화했으며 창씨개명을 추진하고, 조선어 교육[7] 을 전면 금지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한글 신문들도 폐간을 유도했다. 또한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강제징용과 징병, 성노예 착취 등도 이루어졌다.
사실 경술국치 이후, 조선은 일본에 강제병합되어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조선인들도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 열도만을 가리켜 내지라 이르고 한반도는 외지라고 차별하며 조선인들은 '2등 신민'이라 부르고 일본 본토의 일본인(내지인)들과 동등한 일본 신민[8] 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렇게 동등한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으면서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신민으로서 의무만 강조하며 권리와 대우는 해주지 않는 현상이 더더욱 심화되었다.[9]
이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일선동조론'''이 있다. 이는 위의 내선일체를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인과 일본인이 같은 조상을 가졌으며, 그래서 일제의 조선 강점은 그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는 사이비 역사학이다. 이 주장의 핵심은 일본인의 조상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정착한 기마민족이라는 것. 그래서 대종교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단군을 스사노오로 일치시키는 부일행위까지 했다. 그리고 이 주장을 학문적으로 합리화하려고 한 자가 바로 변절자 최남선이다. 소위 "불함문화론"이 그것이다. 다만, 세부적인 정황이나 시기는 이견이 있지만 일본인이 한반도 지역의 농경 민족, 드물게는 기마 민족이 열도로 이주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대체로 유력한 학설들의 공통점이긴 하다.[10] 다만 내선일체/일선동조론이나 환빠 등으로 인해 상당히 언급이 불편한 사실이긴 하다. 현대의 환빠와 같은 극렬 민족주의자들이 일선 동조론에서 그 주체만 한국인으로 바꾸어서 일본은 한국에게 종속시켜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하기 때문.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시 '''일본 제국에겐 (사회 하층의 서민)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어떤 민족이든 똑같이 자신들의 착취대상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 지도층이 전쟁 말기에 일반 병사들을 카미카제 등으로 써먹고, 미군이 일본에 쳐들어오면 '1억[11] 총옥쇄를 하자' 같은 망언이나 내뱉은 걸 보면...실제 1910년 한국병합을 강행하기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조선인, 중국인 같은 구 식민지 출신자 뿐만 아니라 대일본제국 신민, 즉 일본 국민까지도 가혹한 억압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근대국가가 되기는 했지만 '국익'이라 불리면서도 실은 일부 지배자들의 권익에 지나지 않는 것을 지키기 위해, 민중을 '영토'와 마찬가지로 '영민(領民)'으로서 국가의 소유물로 만들고 소비하다 버렸다.[12]
영화 '''수업료'''(1940)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어로 학교에서 수업하는 내용과 조선과 일본 지도를 같이 칠판에 교사가 그리는 내용이 있다. 수업료(1940)
학생들이 학교에서는 일본어, 밖에서는 한국어를 쓴다.
3. 당시 반응
3.1. 조선인들의 반응
조선인들은 극히 일부 친일파들을 빼면 '''당연히''' 믿지 않았다. 심지어 대다수의 친일파들조차 불신하며 헛소리 취급하는 개념이었다. 당장 일본 제국에서 조선인 차별이 횡행하는 현실에서[13] 이런 이론상 개념은 별 실효성이 없었다. 친일파로 변절하여 민족개조론을 주입시키려 든 이광수조차도 반민특위에서 자신은 일본이 아니라 조선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고 비겁하다면 비겁한 변명을 했을 정도다.[14] 게다가 당시에 독립은 당장 불가능할 것 같다는 인식이 조선인들 사이에 생기면서, '지금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우리 조선인들도 영국의 아일랜드인들처럼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누리고 언젠간 조선인에게 통치를 맡기거나 독립을 시켜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소극적 친일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모두 순진한 생각이었음이 내선일체가 진행되며 밝혀진 셈이 되었다.[15]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화장실 낙서 이런 사례들을 보면 많은 평범한 조선인들도 독립 의지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다만 아주 어린 학생들의 경우 교육의 영향으로 내선일체를 믿고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3.2. 일본인들의 반응
정작 '''일본에서도 내선일체 정책은 매우 불만이 많았다.''' 당시 일본인들은 관동주·사할린·타이완·남양군도·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서 자신들이 특권을 가진 '지배민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 등을 통해 일본인이 되어 자신들과 동등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16]
사실 당시 조선, 대만, 사할린, 만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일본 열도에서 먹고 살기 어려운 빈곤층이 많았다.[17] 이미 일본 열도에도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도시로 이주하는 일이 늘어났고, 이들이 도시의 하층민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은 당연했다. 현대 사회의 '지배 민족'의 '빈곤층', 예를 들어 푸어 화이트, 화이트 트래시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자존심의 근본은 단지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점뿐이었다. 식민지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얻는 우월감과 조그만 경제적 특권, 알량한 정치적 특권에 매우 극심하게 집착하였다.[18]
만주국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만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특별 대우 받고 자라난 일부 일본인들은 정작 본국인 일본에선 하류층 일본인들이 막노동을 하며 가난하게 사는 걸 보고 '특별우대민족'인 일본인이 이렇게 사는 것에 충격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주국이나 식민지에서 나가야 했던 일본인들은 대다수가 일본에서 뼈저리게 고생하고 살아야 해서 세월이 지나 늙어버린 이들이 과거에 우대받고 뻐기며 살던 곳으로 와서 그 세월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다.[19] 때문에 본토에서 비슷하게 착취당했던 경험을 가진 일본 노인들이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적 아픔에 공감하며 유화책을 지지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식민지에서 착취자로 살다가 종전 이후 모든 기반을 잃고 본토로 쫓겨온 사람들은 주변국들이 되려 '피해자 행세'를 한다며 역사 왜곡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처럼 일본 제국 내의 모순적인 사회상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니 당연히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같은 그럴듯한 슬로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식민지 조선인을 차별하여 자신들의 자존심을 충족시키려는 야욕과 그들을 착취해서 부유해지고자 하는 욕망만 있었다. 심지어 통감 정치 당시 조선에서 발행한 일본어 잡지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조선인을 너무''' '''우대한다'''"는 조선인으로선 황당해 할 비판을 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조선 이주 일본인이 되려 본토 거주 일본인보다 우월 의식이 훨씬 컸고, 차라리 일본에서 사는게 낫겠다고 생각하여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도 있었다. 물론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일본 사회에서 조선 본토와 다를게 없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일제가 선전하던 내선일체의 위선을 보여주는 예시로, 이봉창 의사 역시 일본인이 되고 싶어 창씨개명까지 했음에도 일본 사회에서 식민지 조선인이라고 거부당한 바 있고, 이것이 의거로 이어졌다. 또한 이후 내선결혼[20] 을 장려하던[21] 태평양 전쟁 시에도 조선 남자에게 시집 온 일본 여자들은 대부분 본토 사람이었고 조선 거주 일본인 중 조선인과 결혼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외는 부득이하게 조선인 사회에 섞여 산 이들인데 그 수는 적었다.[22]
당시 일제 지배층에게는 내선일체가 '''통치에 유리하므로''' 추진할 동기가 있었던 정책이었지만, 하층 일본인에게는 동화정책과 민족말살의 과정을 거쳐서 조선인들이 자신과 동등해짐으로서 '''일본인이라는 유일한 특권이 사라진다는 것에 매우 불만이 컸다.''' 이들은 내선일체 정책이란 명목으로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고 일본어 쓰면서 토종 일본인으로 둔갑하여 일본인과 맞먹으려 드는 정책이라고 보아 불쾌하게 여겼다.[23]
이렇게 내선일체는 일본 일반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할 수 없었다. 다만 전쟁이 격화하여 일본의 인력 부족이 심해지자 조선에서 더 적극적으로 인력을 수탈할 필요가 커진 데다가 일본 바로 옆에 있는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었고 장기적인 통치를 위한 다른 유력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추진한 정책이다.
어차피 내선일체는 '''차별하되 흡수하기로 동화를 한다고 차별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다.'''그리고 아이누인에게는 아예 별개의 민족이란 인식도 안해주면서 차별과 강제동화정책을 계속 병행했었다.[24]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어를 쓰건 말건, 이런 저런 단서를 집요하게 조사하고 '''조선인'''을 이 잡듯이 찾아내서 차별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상 가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한해 일본에 취업하는 한국인 및 재일교포 숫자만 봐도 20세기 초반과 같은 차별행위가 대놓고 존재한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결국 본토인이 아니라는 것에서 출발한 미미한 차별은 있다. 하지만 역으로 한국 또한 이러한 차별 자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지라...
물론 부라쿠민이나 류큐인들이 현대에 와서 참정권과 제한적인 지방자치제 및 천황 이외 최고 지도자 선출 선거권을 보장받았듯, 일본국이 조선 보유를 끝내 연합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고 가정하면 동일한 맥락으로 오키나와인이나 부라쿠민과 같은 대우를 받았을 수도 있다라고 예측할 수 있다.[25][26] 당장 거수기에 불과하지만 45년도 스즈키 간타로 내각 전후 일부 중의 및 참의원에 조선인을 참가시킨다는 구상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것부터 사실 일본 제국 상부에서는 조선 식민지를 전형적인 자원착취형 프랑스/베트남 케이스같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덧붙여 전후 대한민국의 국력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당장 손 마사요시 또는 한창우 마루한 회장과같이 성공한 조선인이 일본 국내에서 탄생했다는점 자체가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같은 훌륭한 케이스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알제리.[27] 그리고 애초에 부라쿠민과 류큐인 또한 법적 차별에서 벗어난 것과 별개로 실질적인 차별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는 힘든 상황이다.
4. 현대 반응
한국의 친일파들이 이때를 상상하며 아쉬워 하기도 한다. 독립하지 말고 계속 식민지로 남아 오키나와(류큐)마냥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통합됐다면[28] 1980년대 당시 세계 경제 2위였던 일본 국민으로서 버블경제 시대의 부유한 생활과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AV등 일본의 다양한 서브컬쳐를 맛봤을테고 현재까지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살고 있었을 거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조선이 계속 일본 식민지라는 말은 일본이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했거나 패전 이후에도 조선에 대한 지배권 유지에 성공[29] 했다는 이야기인데 일제가 2차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지금처럼 민주주의가 제대로 세워졌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일제가 승리한 세상에서 조선인들은 잘해봐야 부라쿠민 보다 조금 나은 취급을 받을 정도로 차별에 시달렸을 것이다.
또 일제가 만약에 승리라도 했다면, 반대로 말하자면 미국과 중국 등 연합국들이 패배했다는 이야기로 이건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에게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같은 고퀄리티의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전후 일본의 민주화 덕분에 가능하였음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1930년대 일본 대중문화계에서 검열은 혹독했고[30][31] 자유를 떠들거나 제국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묘사가 보인다면 만화고 책이고 싸그리 금지하고 관련 인물은 특고라고 불리던 검찰 기구에게 넘겨져 매국노 취급당하던 시절이었다. 아예 1940년대에 이르면 패망 전까지 일제를 미화하는 선전물만 허락됐다.
독재정권 치하 한국에서 간윤위가 만화 검열제를 실시하며 관변단체나 각급 학교 등이 어린이날마다 '만화 화형식'을 열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서울 YWCA 만화모니터회 및 서울YMCA시청자시민운동본부, '건전비디오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등 시민단체들, 그리고 1997년 제정된 청소년보호법이 국산 만화와 애니를 박삭(剝削)하는데 성공했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후유증이 남아 있는데다[32] , 당장 나치 독일만 해도 문화적으로 검열이 극심해서 반나치적인 것, 유대볼셰비즘[33] 딱지가 붙은 것 말고도 사회 미풍양속을 바로잡는다면서 누드촌 같은 곳도 강제로 폐쇄하고 음란 잡지는 물론이고 무수한 성인 문화 또한 극심하게 탄압했다.
이러한 탄압은 일본이라고 다를게 없었다. 일본의 대표 문호로 꼽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만 해도 그가 쓰던 교토 출신 네 자매의 잔잔한 일상 이야기를 다룬 세설(細雪)이 '시국에 맞지 않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연재 및 출판이 금지되었다. 다니자키는 반발하며 자비출판을 해서라도, 그마저도 지인들에게 나눠주며 소설을 계속 내려고 했지만 계속 거부당하여 2차대전 전후에야 가능했다.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가 만화와 애니메이션계의 창작가로서 몸담게 된 동기도 만화, 애니메이션이 군국주의 선전으로 쓰였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함이었고 일본 애니가 PTA의 압박을 이겨낸 것도 전후 민주화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 외 가상역사 소설에서도 나치가 이긴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사회적 문화, 영화, 소설 온갖 매체가 점잖은 사회 풍속대로 나오는 걸 꼬집는 게 허다하다. 그래서 추축국이 승리했을 경우 19금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은 존재하지도 않거나 음지를 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의 퀄리티가 높은 것과 별개로 1980~90년대에 에반게리온과 같은 내용들도 봐줄 만한 혹은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 나온 배경 중에선 전공투 세대의 대학생들의 유입으로 올라간 것도 있다. 나름대로 당대에 지식인으로 분류되며 사상과 철학에 대해 고뇌하던 청년들이 들어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니 철학적인 내용·현실풍자·사회비판적·과거사 반성 문제에 대한 견해를 넣기 쉬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반성없이 식민지를 유지한 시대라면 전공투 세대 같은 것이 나왔을 리 없고, 실제로 전공투 세대가 은퇴할 시기인 2010년대에는 이런 문제에 대한 고찰과 인식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5. 유전적 유사성
국제정치적 논란들을 뒤로하고 과학적으로만 따져봤을 때,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 유사성은 깊은 편이다. 야요이 문서나 일본인 문서에도 서술되었듯이, 한반도에 거주하던 북방계 민족이 일본에 도래해온, 이른바 야요이인이 죠몬인을 복속하면서 구성된 민족이 일본인이다. 하플로그룹 등의 방법으로 연구한 결과로는 대략 일본인 평균 유전자의 75%~80%정도가 야요이인, 20~25%정도가 죠몬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선동조론 참고
6. 인터넷 용어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사고를 저지를 때 비꼬는 뜻으로 쓰인다. 일본 같은 경우 한국과 일본이 저지른 병크가 너무나 한심할 때는 아예 한 단계 업그레이드로 동조선(히가시조센), 서일본(니시니혼) 등의 드립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서 지나친 일빠들을 비꼴 때도 쓰인다.
7. 다른 나라들의 비슷한 사례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는 1919년부터 문관 총독이 부임한 이래 내대융합(內臺融合)을 내세우며 대만인에 대한 차별적 조치들을 철폐하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했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식민지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류큐 왕국도 마찬가지로 일유동조론으로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류큐는 유전적으로 조몬 계통, 언어적으로는 일본어와 함께 일본어족에 속하는 등 사실상 일본인과 동일 조상을 둔 형제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다른 나라였기 때문에 단순히 민족, 언어가 유사하다고 일본과 류큐의 역사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34] .
나치 독일이 같은 아리아인들은 독일인과 동등하게 대하겠다고 외쳤지만 정작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덴마크, 노르웨이 등지를 점령하자 약속과 다르게 차별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인은 (민족적 의미로) 같은 독일인이라 좀 덜했지만 다른 게르만계 민족들은 차별이 잦았다.
러시아가 중심이 된 범슬라브주의 역시 여러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터키 역시 범투란주의를 내세우며 한떄 이란계 쿠르드인들을 산악 터키인이라 개드립치며 강제 동화정책을 자행한 적이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이 동북공정 등을 통해 소수민족들에 대한 통치 지배를 합리화하고 있다. 티베트, 위구르, 내몽골에서 몽골어 강제동화정책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현재진행형으로''' 강제동화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서남공정, 동북공정 등을 통해 전통적으로 한족의 영역이 아닌 곳에 대한 역사왜곡을 자행하거나, 소수민족들을 위해 설치한 자치구에 자치권을 무시하고 친중 성향 인사를 낙하산으로 앉히는 등[35] 으로 소수민족들의 자립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자세한 것은 중화민족 항목 참조.[36]
[1] 당시 일제가 말하는 일본은 조선 등 외지(식민지)까지 포함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일본 열도만 한정해서 가리키는 용어로 내지라는 말을 썼다. 지금도 오키나와에서는 혼슈 쪽을 '내지'라고 부르기도 한다.[2]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을 한 글자로 줄여 부를 때 朝가 아닌 鮮을 썼다. 지금의 북조선을 朝로 줄이는 것과는 대조된다.[3] 일본과 만주는 한 몸[4] 만주족과 한족은 한 몸[5] 일본민족, 조선민족, 한(漢)족, 만주족, 몽골족의 협력. 당연히 실제로는 일본인만 대접받았고 나머지는... 중화민국이 내세웠던 오족공화(五族共和 - 한족, 만주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를 따라한 것.[6] 구체적 예시로, 한반도 거주자에겐 참정권이 없었다. 정확하겐 총선 참정권이 없었고, 문화 통치기 이후 지선 참정권은 있었다. 물론 그것도 보통선거는 아니었지만.[7] 일단 당시 일본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역사상 원래 고대 일본에는 지역별로 구어(口語 말하는 말)가 있었는데,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중앙의 언어가 바른말이며, 지방의 언어는 잘못된 사용법이다"라는 취급이 되어, 서적등에서 지방 구어가 급격하게 사라지게 되었지만, 전국시대에 중앙권력이 무너지면서, 각 지방별 구어가 다른걸 용인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도 각 지방마다 사용하는 구어가 달라도 문서상의 언어인 문어는 어느지방에 가도 동일하기에,각 지방의 방언이 달라도 각 방언들의 지위는 동등했었다. 그러나 에도시대가 끝나, 일본이 근대화로 가는 중에 "언문일치운동"(말하는 말과, 서류상의 말을 동일하게 하자)가 일어났다. 이 때까지는 문어 밑으로 모든 지방의 방언이 동급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운동으로 수도로된 현 동경인 에도 방언이 공적언어인 문어의 지위를 가져가 현재의 일본어로 되었다. 그리고 "중앙의 언어가 바른말이며, 지방의 언어는 잘못된 사용법이다"라는 편견이 다시 발생하였고 이후에 각 지방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거나 군대내에서 명령전달이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방언박멸운동"이 발생하였고, "에도방언"과 거리가 먼 방언부터 표적이 되어 말살의 대상이 된다. 동북어, 류큐어, 아이누어 등등... 그 중 하나로 한국어가 존재한 것이 배경에 있다. 이 운동의 로직이 "국가 = 민족"이라는 사관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같은 계열의 언어라는 것만 증명되면, "같은 언어(같은 언어의 방언)다" = "같은 언어를 쓰는거니까 같은 나라다"라는 결론이 나는 논리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운동에 계기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1873년부터 일본 동경대의 외국인 교수로 근무한 영국인 바실 홀 체임벌린(조선 서해 탐사기의 작가의 딸의 아들)이 일본어의 단어와 류큐어의 단어를 하나하나 분석한 결과, 류큐어가 고대 일본어부터 상당히 초기에 분파된 같은 조상의 언어라는 걸 증명해버렸다.(단, 일본어의 일개 방언정도가 아니라, 영어와 독일어보다 동일성이 먼, 독립된 별개 언어로서의 "류큐어"로서의 분파라는 것) 에도 말기부터 류큐어와 일본어가 비슷함이 거론되었지만, 그래도 다른 언어다.가 정설이였지만, 실은 오래전에 생이별한 형제였었다는 막장드라마급 출생이 비밀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의 원동력이 되었다.[8] 국민은 일제가 패망한 후에 제정된 신헌법에서 미군정 초안의 인민을 우격다짐으로 바꿔 제정한 거고 구헌법에서 일본인은 신민이었다.[9] 이런식의 구분전략은 일본뿐만 아니라 당시 제국주의시기의 유럽열강들에서도 이름은 달라도 비슷하게 추구하고있던 전략의 일종이었다. 식민지를 폭력으로 일방적으로 다스리는 전략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자 영국 등의 대표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들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독립활동이 거센 지역들을 중심으로 일방적인 수탈대상이 아닌 식민지인들을 본국인과 구별하는 2등국민으로 재편성하는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식민지인들중에서도 뛰어난 엘리트 지식인들은 본국유학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지식인으로 키워내곤하였다. 아이러니한건 이후 이렇게 본국유학을 마친 엘리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이 많이 나오기도했다는 점이다.[10]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제대로 된 학계에선 이 이주가 어디까지나 고대에 잠시 존재했던 혈연적인 연관 관계에 불과하며, 한국사와 일본사의 독자성과는 무관한 별개의 요소로 본다. 이는 영국인의 주요 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이 독일 작센에서 건너왔다고 영국이나 독일이 어느 한쪽에 종속된다는 식의 개드립을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11] 당시 일본 내지의 인구만 따지면 7천만이지만, 일제는 거기에 조선과 타이완의 인구를 포함해 1억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온 것.[12]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지음, 후지이 다케시 옮김, 301쪽) 출판사 서평 중 일부 발췌.[13] 일본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차별을 안 할 수 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일본 국민이 주권자였던 적이 있을까. 단지 일본 국민에게는 권력에 복종하는 한 그 대가로 혜택으로서 '특권'이 주어졌지만, 그 실태는 '계속 우롱당한 민(民)'에 불과하다. 이 '특권'이란 외국인과 비교한 경우에만 국민이 권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착각을 일으키기 위해 존재하며, 국가와의 사회계약에서는 거의 실효성을 지니지 않는 허구의 '특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주권이 그림의 떡임을 은폐하는 바로 그 목적으로 일본의 '외국인' 차별은 유지되고 있다."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지음, 후지이 다케시 옮김, 301쪽)[14] 특히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했다가 나중에 광복이 되자마자 바로 취소했다.[15] 게다가 일본은 이런 식의 생각을 유도하게끔 해서 독립운동을 방해했다. 자치론이 그 좋은 예. 물론 일본은 자치도 허락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16] 참고로 일본 제국은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피지배 민족에게 창씨개명 등을 통해 '''특별우대민족'''인 일본인이 되는 것을 함부로 허락해 주지 않았다. 즉, 식민지의 피지배 민족을 일본 제국의 노예로서 써야지 고등교육•정치참여•고위직 진출 등의 정식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절대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의 격화와 인력 부족, 일본 바로 옆에 있는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조선인에 한해서는 정식국민으로 수용하는 조치를 예고했다.[17] 이는 당연한 것이, 이미 본국, 고향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이 뭐 아쉬워서 사실상 외국인, 본국보다도 훨씬 뒤떨어진 식민지에 가려고 하겠는가? 그 유명한 대영제국도 본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라고 식민지와 비교해서 나을 거 별로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숱하게 죽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통치 기관 실무자들과 일선 군 장병들이 그 빈곤층 출신 지원자들로 채워졌다.[18] 내선일체 이야기가 나오기 전인 염상섭의 만세전을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요보라고 말하면서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라는 문구가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딱 그 정도였다.[19] 헌데 이게 일본인만 꼭 그런 게 아니고 식민지에서 착취하며 부를 누리던 당시 제국주의 나라들 부유층 및 국적 인물들은 다 똑같다. 한 예로 2000년대에 국내에 나온 영국 관련 기행 책자에서 지은이가 만난 영국 노인이 비슷한 말을 했는데 자신이 어릴적에 인도에서 호강하고 살고 인도인은 머슴으로만 보았기에 인도 독립하고 영국으로 와서 고생하며 수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인들이랑 있으면 거부감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한 걸 쓰기도 했다.[20] '''내'''지인(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결혼'''[21] 정작 그런 혼혈이 일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사량 김시창이 쓴 <빛 속으로> 책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김시창은 이 책을 써서 1940년 아쿠다가와상 후보까지 올랐으나, 이율배반 속에서 갈등하다 중공군, 북한군을 거쳐 1950년 전쟁 중 북으로 퇴각하다가 원주에서 병사했다.[22] 왜냐면 이주해온 일본인들은 일본인 정착촌을 건설해서 그들의 주거지에만 살았지 조선인들과는 웬만하면 섞여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23] 사실 그전에도 일본 제국은 공식적으론 내선차별이 금지되었지만 실생활에서 일본인들은 한반도와 일본 본토를 포함해서 조선인을 철저하게 멸시하고 얕보았으며, 공식적인 차별만큼이나 사적인 인종차별 또한 많았다.[24] 아이누인을 정식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이미지도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어디까지나 '''2000년대 이후'''부터이다. 그것도 북방 4개 도서 관련해서 영토 권리를 위해 인정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25] 실제로 포츠담 회담 거부 당시 대만까지 돌려주겠다고 했던 일본이 천황제와 함께 마지막까지 내주지 않으려고 든 게 의외로 조선이었다. 즉 연합국이 조건부 항복을 받았으면 지금도 한반도가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을 거라는 의미다.[26] 다만 일본 열도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는 되는 한반도의 실질 거주 인구를 고려하면, 좋으나 싫으나 민주주의 외의 선택지가 허용되지 않았을 전후 일본이 제국 시절처럼 한반도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부라쿠민 같은 수직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의외로 낮고, (한국 입장에서) 잘 풀리면 영국 내의 스코틀랜드처럼 정치적으로만 자치권을 두고 투쟁하는 관계, 보다 현실적으로는 미국 내의 흑인이나 히스패닉들처럼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동등한 권리를 갖지만 은연중에 차별당하는 1.5등 시민 정도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27] 프랑스는 실상과 별개로 알제리를 본토라고 우겼다. 그 외의 서아프리카도 이론적으로는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 혜택을 받은 이들은 1930년만 해도 극소수였다. 이미 1910년대만 해도 세네갈 출신 흑인 국회의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제리건 그 외 지역이건 식민지가 받는 설움에서 자유롭진 않다.[28] 물론 이들은 오키나와보다 남한이 훨씬 더 잘 산다는건 고려하지 않는다.[29] 류큐(오키나와)만 하더라도 패전 이후에 일본이 아닌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다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더욱이 일본은 조야(朝野)가 지더라도 조선만큼은 꼭 잃지 않으려고 발악하였다. 특히 미국에 항복했을때 일본의 재야는 다른 곳은 몰라도 조선만큼은 잃으면 안된다며 조선을 잃으면 일본은 곡창을 잃어 모두 굶어 죽을 거라 통곡하였고, 일본 정부도 미국에게 조선 지배만큼은 보장해달라고 애걸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에게 한국을 전승국에서 빼달라고 로비를 하여 관철시키는 등 조선에 굉장히 집착했다. 그러나 류큐와 달리 한국은 카이로 선언에서 독립이 명시되었기에 일본의 시도는 실패했다. 게다가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과 루스벨트, 트루먼 대통령, 그리고 여론도 일본에 대한 분노로 눈이 뒤집힌 상황이라 일본의 말도 안되는 조선 지배권 요구를 씹었다.[30] 이런 검열은 사실 대중문화 자유방임으로 이름난 미국이나 유럽도 다를 거 없었다. 배트맨에 나온 조커가 1950년대 검열 때문에 나쁜 짓들이 그야말로 아이들 성적표를 빼앗아 버리는 황당한 수준으로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성 사회학에 대하여 연구하던 빌헬름 라이히(1897~1957)는 1930년대 나치 독일 속국 신세가 되어버린 오스트리아에서도 검열이 엄격해진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다. 하지만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고 한때 동독으로 가서 지냈으나 공산주의도 사회적 검열이 다를 거 없음을 알고 미국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라이히는 미국도 와보니 전혀 다를 게 없음을 한탄했다. 1971년 유고슬라비아 다큐멘터리 영화인 유기체의 신비가 빌헬름 라이히를 다룬 영화다.[31] 일례로 1950년대 미국의 대표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만 해도 TV에 나와 노래를 부를 때 상반신만 보여 방송하던 것이 하반신 흔드는 게 음란하다는 당시 검열에 부딪친 사항이니 말다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후 미국은 차츰 문화적 검열이 풀리면서 다르게 되었긴 하다.[32] 특히 한국 만화와 애니의 발전이 뒤쳐진 원인도 이때의 영향이 크다고 비판받는다.[33] 나치는 유대인과 공산주의를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34]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언어, 문화, 뿌리가 세르비아인과 완전히 똑같은 데도 불구하고, 종교 문제 하나로 서로 다른 민족으로 찢어진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을 봐도, 민족적, 언어적 유사성 하나로 동일시하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35] 대표적인 경우가 제11대 판첸 라마를 납치해 숨겨놓고, 친정부 성향인 사람을 새로운 판첸 라마로 옹립한 것이 있다.[36] 그런데 애초에 이런 행태는 청나라의 만주족이 먼저 시작한 것이고, 만주족 자신이 그 논리로 한족에 동화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탈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선 애초에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허구적인 요소가 많다고 생각해 둘 다 깔 수도 있지만. 실제 내선일체는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벗어나자라기보단 '내가 킹왕짱인데 알고보니 너도 나와 같은 부류였네 그러니 내 부하해라(...)' 같은 뉘앙스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