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타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image]
'''휘'''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Publius Septimius Geta)
'''생몰 년도'''
189년 3월 7일 ~ 211년 12월
'''재위 기간'''
209년 ~ 211년
1. 개요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2.2. 아버지의 죽음과 유언
2.3.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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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둘째아들이자 카라칼라의 친동생.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다. 형 카라칼라와 공동황제였으며, 형에 의해 어머니 앞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재위기간은 209년부터 212년까지이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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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시절의 게타가 도안된 로마시대 주화들)
본명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Publius Septimius Geta). 189년 메디올라눔 태생으로 아버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어머니는 시리아 출신의 율리아 돔나. 위에는 연년생 형인 카라칼라가 있다. 게타는 카라칼라가 태어난 지 1년 후인, 아마도 189년 3월 7일에 로마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외모는 아버지 세베루스를 닮았다고 한다.
9세이던 198년, 1살 위의 형 카라칼라가 황제(Augustus)로서 아버지와 공동황제가 되었을 때 부황제(Caesar) 칭호를 받았고, 199년 가을에 어머니, 형과 함께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의 파르티아 원정길에 동행했다. 이 원정길에서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변까지 침공해서 부유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하고 귀환했다. 그리고 202년 열린 로마에서의 개선식에서 아버지, 형과 함께 나란히 개선장군이 타는 마차를 타고 갓 건립한 세베루스 개선문을 지났다.
203년 형의 장인이자 황실 근위대장인 플라우티아누스와 14세의 나이에 집정관을 지냈고,205년 1월 1일에는 16세의 나이에 17세의 친형 카라칼라와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때 형제간의 불화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아버지의 명령으로 가까스로 취임했다.
208년부터 211년까지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에서 벌어진 스코틀랜드 원정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하였다. 전투는 원주민의 게릴라 전술로 병력 손실이 많았고, 큰 성공을 직접적으로 거두진 못했지만, 브리타니아 속주 방어선과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안정화되었다.

2.2. 아버지의 죽음과 유언


211년 2월 4일, 아버지이자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영국 땅에 있는 에부리쿰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게타는 론디니움(런던)에 있다가 황제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전부터 곁을 지켰다고 한다.
동시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죽기 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제가 서로 아끼면서 사이좋게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무시해도 좋다. 그러나 병사들을 우대하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1]

2.3.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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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뒤, 왼쪽 하단에 그려진 동생의 얼굴을 지우게 했다.
브리타니아에서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하자 23세의 카라칼라와 22세의 게타는 공동황제가 되었다. 이 때 이들은 브리타니아의 칼레도니아인들과 강화조약을 맺고는 아버지의 유해를 수도에 매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로마귀환을 서둘렀다. 이윽고 황제 일행은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형제 간의 공존은 힘들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극도로 사이가 나빴으며,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둘은 각기 군대를 갈라 나눴고, 내란의 기미가 곳곳에서 감지될 정도로 극도의 불안 상태가 유지되었다.
212년 2월 로마의 황궁 안에서는 대형 참사가 벌어지게 된다.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가 머물던 곳으로 유인하여 어머니 앞에서 동생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22세의 게타는 어머니를 껴안으며 죽었다. 게타는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죽으면서 "엄마, 형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절 살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죽었다.
이후, 카라칼라는 동생의 초상화를 제거하도록 지시내리고, 게타의 지지자들과 친구들, 저명한 법률가이자 친위대장인 파피니아누스를 무자비하게 제거했다.[2] 그리고 게타 암살에 대해 불만이 나오며 카라칼라의 행동을 비난하는 군인들[3]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인상시켜주었다.[4] 이렇게 카라칼라에 의해서 살해됨으로 인해 게타의 이미지는 순교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제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카라칼라보다 더 나은 또는 더 많은 덕을 지닌 황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게타는 성품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기록도 상당히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게타는 어려서부터 얼굴이 잘생겼고 무례하진 않았지만, 무뚝뚝했으며, 여자를 밝혔고 비열하고 탐욕스러웠으며 다양한 향신료를 넣은 음식과 포도주를 좋아했고, 자신의 옷과 보석에 돈을 많이 쓰면서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선물을 하지 않는다는 평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생전 비정함과 짠돌이의 대명사로 대중에게 알려졌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경우처럼 단순히 성격에 모가 났다고 좋은 황제가 되진 못 했을 거라 단정 짓는 것도 잘못된 것이긴 하다. 애초에 게타는 22살의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 실력을 입증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의 사이가 극도로 벌어져 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카라칼라와 게타 간의 대립과 결과를 너무 잘 알았기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미 결과를 예측했다고 말한다.[2] 자신을 변호해 달라는 카라칼라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3] 디오에 따르면 군인들은 세베루스 황제와 닮은 게타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세베루스 황제가 창설한 제2 파르티카 군단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4] 이 결과, 국고는 고갈되었고, 이는 결국 카라칼라에 의해 화폐 개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안토니니아누스'라는 화폐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