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루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
Domus Severana
'''
193년 ~ 235년
'''성씨'''
세베루스(Severus)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93~211)
'''주요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로마 제국의 왕조'''
다섯 황제의 해
3세기의 위기
1. 개요
2. 역사
3. 세베루스 가문의 시리아 여성들
4. 평가
5. 역대 황제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네 번째 세습왕조. 과거에는 3세기 군인황제 시대와 묶여 서술되거나, 창건자 외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세습왕조였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제정중기 원수정 변화와 3세기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세베루스 왕조에 대한 연구, 업적이 주목받고 재평가받고 있다.
2세기 말에 시작돼 3세기 전반기까지 존속한 왕조로, 로마 제정 중기와 후기의 구분을 오현제 시대가 끝나는 서기 180년보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죽는 211년 또는 알렉산데르가 암살당하는 235년에 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암살로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로마는 '위기의 3세기'라고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로 접어든다. 참고로 이때가 동양에서는 삼국지를 찍고 있는 시기와 같은 시기였다.
[image]
▲세베루스 왕조의 가계도.[1]
창건자는 리비아, 튀니지로 대표되는 푸닉(옛 카르타고) 일대의 식민도시 렙티스 마그나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이다. 콤모두스 암살 이후 벌어진 내란기를 수습하고 시작된 왕조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2 세기 후반의 격변 이후 평화를 성공적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이 왕조는 다른 세습왕조와 비교하더라도 매우 불안정한 가족 관계와 창건자 직계들의 불화로 인해 단명했다. 그래서 3세기의 위기를 예고하는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또 창건자 이후 즉위한 세베루스 가의 황제들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점과 카라칼라와 게타,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사이의 긴장은 시리아 여제들의 섭정통치 아래에서 일시적 안정만 가져올 뿐 혼란을 가중시켰다고 비난받았다.
부계 혈통, 성씨로 따지면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의 이탈리아기사계급 가문이지만, 카라칼라 이후 세베루스 가문의 혈통은 끊기고 다음 두 황제는 모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두 번째 아내이자 황후였던 율리아 돔나의 가문, 즉 시리아의 에메사에서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모시던 율리우스 바시아누스의 두 딸을 통해 이어진 세습왕조이다. 따라서 혈통상으로는 카라칼라 암살 이후의 두 황제는 모계를 통해 이 가문의 계보를 이었으며, 그 정당성 역시 퇴색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과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외가의 정치적 입김이 상당히 강했다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비교되는 이전 세습왕조와 비교해 그 정통성 측면에서는 모계 영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이 측면에서도 왕조가 단명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이후 율리아 돔나와 그녀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 마이사의 딸 율리아 마마이아가 어린 황제를 앞세운 모양새를 띠거나, 대놓고 섭정 노릇을 했다. 그래서 세베루스 왕조 시대는 시리아 출신의 황실 여성들이 시리아 여왕, 여제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권력 조종은 이전 왕조의 리비아 드루실라를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2. 역사


콤모두스가 몰락한 이후, 페르티낙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도움 아래 즉위했지만 프라이토리아니와 라이투스를 개혁대상으로 삼다가 살해당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제위를 경매로 내놓고 경쟁을 유도했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즉위는 문제도 많았고, 콤모두스 몰락 이후 제위를 노린 야심있는 이들이 연이어 황제를 참칭하게 된다. 이중 한명이 원로원 의원으로 당시 상판노니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는데, 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를 제압한다. 이후 세베루스는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상대로 연이어 실력으로 승리하고 콤모두스 치세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단절 이후 벌어진 정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스코틀랜드 원정을 위한 브리타니아에서 전쟁 중 병사한다.
세베루스 사후,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 게타 형제가 공동황제 신분에서 자연스레 뒤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1년도 못 가 카라칼라가 어머니 방으로 친동생 게타를 유인해 동생을 손으로 직접 죽인 후 단독황제가 된다. 카라칼라는 군사적으로 상당한 공을 세웠지만, 동생과 그 지지자, 옛 안토니네 황족 등을 재판없이 학살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연이는 실책을 벌였다. 그러다가 행군 중 암살당하고 중간에 마크리누스가 끼어들어서 잠시 끊긴다. 이후 카라칼라의 오촌 조카[2] 엘라가발루스가 뒤를 잇지만, 온갖 기행을 펼친 엘라가발루스는 4년도 안 되어 암살된 후에는 그 이종사촌 동생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3]가 뒤를 이었다가 알렉산데르가 암살되어 최종적으로 단절된다.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의 개별 항목 참조.

2.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오늘날의 리비아 지역인 북아프리카 속주의 기사계급 출신. 로마의 식민도시 렙티스 마그나 태생으로 조상은 포에니 전쟁 후 일찍이 이탈리아에서 북아프리카로 건너간 사람이다. 재위 기간 내내 스스로를 항상 군인이라고 강조했지만 즉위 전까지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그리스 아테네로 유학까지 갔다 온 엘리트이자 변호사 출신이다. 판노니아 총독 시절, 페르티낙스의 암살 이후 로마가 내란에 빠진 틈에 황제를 자임한 뒤 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한 뒤 황제로 인정받았다. 로마 입성 후 이탈리아 출신들로 구성된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시키고, 자신이 이끌던 판노니아 군단병들로 새로이 프라이토리아니를 꾸렸다. 이후 황제에 등극한지 4년 만인 197년 마침내 로마 전역을 장악한다.[4] 내란기 당시 자신을 반대한 자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린 데다가,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한 채 콤모두스에게 내려진 기록말살형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던 탓에 원로원과의 관계는 재위 기간 내내 냉랭했고[5],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정적들을 처단한 까닭에 민중들에게 ‘푸닉 술라(북아프리카의 술라)’라는 나쁜 별명까지 얻게 됐다.
단독 황제 등극 후 그의 치세기 때 다시금 로마는 평화와 경제적 안정[6]을 가져왔다는 점과‘빵과 서커스’를 시혜하고 하드리아누스 이후 처음으로 로마에 대규모 공공건축 사업을 재개한 까닭에 대중들에게는 꽤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군대의 지지로 제위에 올랐고, 지지기반도 일반 군단병들이었던 까닭에 스스로를 군인황제라고 칭했고, 사이가 상당히 틀어진 원로원의 구성을 갈아치우고 자문기관화시키면서 군단들에게 권위를 빌렸다. 또한 병사들의 처우를 상당부분 개선해줬다. 따라서 군대 역시 세베루스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월급 인상 + 보너스 + 복무 중 결혼 허용은 로마군인의 오랜 숙원이었으며 갈수록 군인을 충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세베루스는 병사들에게 무얼 해줘야 하는지 섬세하게 아는 황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원정을 성공 시키면서 군인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선군정치를 했고,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시도하기도 한 황제였다.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속주화하고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스코틀랜드 원정도 진행하여서 칼레도니아 전역을 점령하려 시도하는 한편 안토니누스 방벽을 일시적으로 재점령하고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보수하기도 했다.

2.2. 카라칼라(211~217)


정식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이고, 줄여서 안토니누스 또는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이다. 카라칼라는 갈리아 망토를 일컫는 별명이다. 10살도 안 된 나이에 카이사르가 됐고, 10살의 나이에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공동황제가 된 사람이다. 14살 때 아버지의 동향친구이자 최측근인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의 딸 플라우틸리아와 결혼했는데, 17살의 나이에 사이가 극도로 틀어진 장인과 처가집 식구들을 모조리 반역 혐의를 이유로 살해한 뒤, 아내를 유배보낸 뒤 즉위 이후 사람을 보내 죽였다.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원정에서 병사한 이후 원수보다 못한 사이였던 친동생 게타와 함께 그 뒤를 계승했다.
안토니누스법을 발표해 제국 내 모든 자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것이 카라칼라 시기의 일이다. 법의 배경이나 목적에 대해서는 현대 학계에서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7]. 세금을 더 걷기 위함일 뿐이라는 디오 카시우스의 평부터, 레기온의 질적 저하를 해결하기 위한 입대 대상 확대[8], 로마법의 보편적 적용, 로마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의 확립 등에 주목하기도 한다. 군사적으로는 비교적 재능이 있어서 게르마니아 원정 과정에서 꽤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즉위 전부터 대립하던 장인과 아내를 죽인 전례라든지, 동생이자 공동 통치자로 지명된 게타를 직접 칼로 찔러 죽여버린 것에서 보이듯이 성격이 난폭했고 다혈질인 데다 잔인했다. ''국고가 고갈나자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서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 ‘언 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위기를 넘겼으나, 결과적으로 로마시민들과 속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고 제국 전역에서의 수탈이 심해져 민생이 피폐해지고, 제국의 세수 체계를 완전히 망가뜨렸다''라고 디오 카시우스는 카라칼라를 신나게 까고 있지만 현대 많은 고고학적 성과로 디오의 글이 과장되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제국의 재정은 특정 속주의 세금을 면제해 줄 정도로 여유가 있었으며 제국 경제 역시도 안토니누스 역병 시기를 견뎌내며 견실한 상태였다.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이후부터 종종 환청에 시달렸고, 죄책감으로 후사도 볼 수 없게 되는 후유증까지 얻었다. 또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성격적 결함과 동생 등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결과, 많은 정적들에게 수없이 많은 암살시도에 시달리게 됐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도 파르티아 원정길 도중 근위대에게 암살. 카라칼라의 뒤를 이어 마크리누스가 등극하면서 잠시 동안 세베루스 왕조는 단절되게 된다.

2.3. 게타(21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둘째아들이자 카라칼라의 동복 친동생으로 형과는 연년생 형제다. 재위기간은 209년부터 211년까지이며, 이 중 209년부터 211년 2월 4일까지는 아버지 세베루스와, 211년 2월 4일부터 같은 해 12월 26일까지는 형 카라칼라와 공동황제였다. 아버지 세베루스 사후 211년 카라칼라와 함께 제위를 이어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1살 위인 형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형인 카라칼라의 다혈질적이고 난폭한 성격 못지 않게 그 역시 여자를 밝히고 사치스러웠으며 성품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형제 편에 붙은 사람들의 이간질과 중상모략이 계속 벌어지면서 부모조차 어떻게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원수가 됐다. 그래서 205년 1월 형과 공동 집정관에 취임할 당시, 불화가 너무 심해 아버지가 명령을 내려 가까스로 취임하기도 했다. 208년부터 아버지의 명령으로 형과 아버지를 따라 브리타니아 전쟁에 참전했으며, 아버지가 211년 사망하자 즉위 후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형과 황궁을 반으로 나눠 사용할 정도로 반목했는데, 211년 12월 형에 의해 어머니 앞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이때 카라칼라는 동생을 거짓 편지로 속여 어머니 방으로 유인했으며, 어머니 앞에서 동생을 칼로 찔러 죽였다. 게타는 어머니에게 안겨 사망했는데, “어머니, 살려주세요. 형이 절 이렇게 했어요”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게타가 죽은 뒤, 카라칼라는 동생의 친구들과 지지자 등 2만여 명을 재판없이 모조리 죽였으며, 제 손으로 죽인 동생을 기록말살형 시키도록 추인한 뒤 로마 내 모든 황제 가족 초상화와 조각상에서 게타의 흔적들을 지워버렸다.

2.4. 엘라가발루스(218~222)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동생인 율리아 마이사에 의하여 마크리누스를 제거하기 위한 패로 쓰여 황제로 추대됐다. 즉위 당시, 로마군에게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로 소개됐는데, 즉위 전까지는 외가가 있는 시리아 일대에서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섬기던 사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황제로서의 자질이 빵점에 가까웠고, 로마 문화에 대한 이해 역시 빵점이었다. 그래서 첫 등장부터 로마인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매일같이 정상인의 범주에서도 이해못할 행동들을 선보였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엘라가발루스는 '''희대의 돌아이'''로 공인되고 있다.
애초에 전해지는 사료도 거의 없고, 고대 사료 특유의 과장성을 생각하면 어디까지 진실인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상상 속에서 일어날 기행들을 실제로 다했다. 또한 거리낌없이 동성애를 자행하고[9] 심지어 베스타 여사제를 강간하기도 했다.[10] 이런 까닭에 훗날 엘라가발루스의 발언이 와전돼 트렌스젠더 수술을 받았다는 말조차 나올 정도(...)
다행히 통치 자체는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배후에서 처리했기 때문의 콤모두스 시대와 같은 개판의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에게 실망한 율리아 마이사는 대체자로 또 다른 외손자인 사촌 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선택하고, 그를 양자로 삼을 것을 엘라가발루스에게 요구했다. 처음에는 이 요구를 별다른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엘라가발루스이지만, 알렉산데르가 대중과 병사들에게 인기를 끌자 갑자기 질투심이 발동했는지 자신의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암살할 것을 명령(...)한다. 애초에 암살 명령 자체가 정신이 나간 짓인데, 암살 명령을 은밀히 킬러를 고용한 것도 아니고 로마의 공적인 군대, 그것도 로마군의 꽃이라고 불리는 근위대에게 명령했으니 엘라가발루스가 얼마나 미친놈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엘라가발루스의 정신나간 명령을 들은 근위대장은 애초에 부하들과 함께 알렉산데르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 명령을 고스란히 '''반대로''' 실행하였고 엘라가발루스는 어머니와 함께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조리돌림을 당하고 끔살. 이후 어머니, 최측근과 함께 시신의 팔다리가 짤려 로마 거리에서 조롱을 받고, 테베레 강과 연결되는 하수구에 버려졌다.

2.5. 알렉산데르 세베루스(222~235)


본명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Marcus Julius Gessius Bassianus Alexianus). 221년,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그의 외사촌형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한 까닭에 엘라가발루스의 후계자이자 양자로 입적되면서 이름을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Caesar Marcus Aurelius Alexander )로 바꿨다. 그러나 양자 입적 이후, 위기감을 느낀 엘라가발루스가 그를 살해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고 공개적으로 근위대장과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제거하라고 지시내렸다. 그러나 근위대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알렉산데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뒤, 엘라가발루스를 죽였다. 따라서 222년 3월 열네 살의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다.
시리아 출신이라는 콤플렉스가 상당히 큰 까닭에 자신의 부계를 강조하는 족보까지 만들었고, 종교적 광기에 휩싸여 있던 전임자와 달리 조용하고 굉장히 로마귀족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고, 즉위 초에는 외할머니 마이사, 당대의 훌륭한 고문들의 보좌를 받았다. 재위 내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로 돌아가자'라는 모토 아래 내치에 상당히 신경썼으나, 통치 방식 등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고전적인 원수정 스타일과 비슷했다고 한다. 따라서 당대 로마인들로부터 “그의 치세는 13여년에 불과했지만, 로마가 카라칼라 이후 하락의 길로 가지 않은 것은 알렉산데르 덕분이다”[11]고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사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치에 간섭한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의 전횡을 막지 못한 마마보이 군주였다.
알렉산데르는 성년이 된 이후에도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는데, 치근거리에서 자신을 호위하던 근위대도 통제 못할 정도였다. 따라서 사산조와의 전쟁에서도 군대 장악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가 게르만 족과의 전쟁에서 초반 승기를 잡았음에도 어머니 마마이아의 말만 듣고, 돈을 주고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했다. 따라서 장군들과 게르마니아 일대 로마군들은 그에게 완전히 실망했고, 불만을 가진 부하들에게 모자가 함께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로마는 위기의 3세기라고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3. 세베루스 가문의 시리아 여성들


세베루스 왕조가 이전의 여러 세습 왕조와 비교해 가장 특이한 점은 입양 관계와 제위계승 과정에서 창건자 아내의 친정가문이 황실 안팎에서 가계가 단절되는 순간까지 힘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계의 영향이 강했던 아우구스투스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트라야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부분이었는데, 세베루스 왕조의 경우에는 이전까지 황후, 황녀들과 달리 황제를 대신해 직접 정사에 관여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강했다.
오늘날의 레바논에서 그리멀지 않은 에메사 출신의 시리아 여성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들은 오늘날까지 ‘시리아의 여왕들’이라고 불리는데, 시리아 여왕이라고 불린 황실 여인들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두 번째 부인인 황후 율리아 돔나, 돔나의 여동생인 율리아 마이사, 마이사의 두 딸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가 있다. 이들은 왕조의 성립부터 멸망때까지 제국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창건자의 아내, 후임황제들의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시리아 지역에서 근무할 때, 재혼한 사람으로 다마스쿠스 북쪽의 에메사 출신의 시리아 여인이다. 그녀는 과거 리비아 드루실라를 연상시킬 만큼 철학과 교양이 깊었고, 남편 생전부터 남편과 아들 카라칼라가 외정에 주력하는 사이 내정을 사실상 주관할 정도로 정치적 자질이 빼어났다. 따라서 남편 생전부터 과거 리비아 드루실라, 아그리피나 등 정치에 개입했던 황후들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녀의 권력은 카라칼라와 게타, 카라칼라 단독통치까지 계속 되었다.
그녀의 가문은 에메사에서 대대로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모시던 토착 신관 집안이었는데, 세베루스의 아내인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세베루스의 처제) 율리아 마이사는 자신의 언니 이상으로 능력이 상당한 여걸이었다. 그녀는 언니의 남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부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조카들이 제위에 오른 이후에도 정사에 조금씩 개입했다. 그러다가 조카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언니가 자살한 이후 로마에서 추방된 상황임에도 정략으로 마크리누스를 축출하고 자신의 손자인 엘라가발루스를 제위에 올리면서 대가 끊길 뻔한 세베루스 왕조를 재건했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의 각종 기행과 막장 행각으로 왕조가 다시금 위기에 빠지자 엘라가발루스의 후계를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로 정하는 등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율리아 마이사가 죽은 후, 그녀의 둘째 딸인 율리아 마마이아는 자신의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게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못지 않게 야심은 많아도 지나칠 정도로 과시적이고 스스로를 여제로 생각했다. 따라서 아들 알렉산데르의 모든 결정에 직접 개입했는데, 적절한 선에서 개입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와 달리 군무까지 개입해 혼란을 야기했고, 며느리와 사돈 일가와의 대립도 지나친 까닭에 프라이토리아니 통제 부분에서도 약점을 노출하게 된다. 이후, 그녀의 잘못된 판단 등이 게르만족과의 전쟁 중 발생하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옹립한 병사들의 손에 무너지게 된다.

4. 평가


과거 세베루스 왕조는 존속 기간도 길지 않고, 창립자 외에는 크게 주목받을 황제가 없다고 인식돼 연구자들에게 중요도가 크지 않은 세습왕조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 제정의 역사에서 원수정 시대 후기 연구를 비롯해 로마 제국의 위기라고 불리는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황제시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세베루스 가의 황제들에 대한 재평가가 끊임없이 이뤄지게 됐다. 이런 연유로 제정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분석 과정에서 이 시대에 있던 조치들이 재평가되면서 세베루스 왕조 치하의 연구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네로 몰락 이후 벌어진 네황제의 해 혼란을 수습한 플라비우스 왕조처럼, 세베루스 가 황제들은 콤모두스 암살 후 더 큰 혼란으로 이어질 뻔한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제국에 일시적 안정과 평화를 이룩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처럼 창건자 치하 아래에서, 이전과 달리 황제의 권력 기반을 원로원보다 군에 집중하면서 이전 세습왕조 아래에서 문제로 지적된 부분을 고쳐나간 부분 역시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세베루스 왕조의 최대업적으로 거론된다. 그리고 이런 평가처럼 실제 로마군의 기병 전환, 종심 방어 전략 계획의 도입 진행, 화폐 절하, 본국 이탈리아와 속주 간의 차별 철폐의 시초가 모두 이 왕조 아래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창립자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그 뒤를 이은 후계자들이 다들 어린 나이였던 데다 정치력도 초대 황제 셉티미우스 외엔 뛰어난 인물이 없었다. 그 예로 카라칼라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유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고 과격한 독불장군이었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명군이지만 마마보이였고 자신을 호위한 병사들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카라칼라와 게타의 불화,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종국적으로 왕조의 단명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왕조가 단명한 탓에 일시적 평화로 끝맺게 된 측면은 아쉽다는 평을 받고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생전 정치적 안정성과 황실의 안정 및 가계의 번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직계는 그가 걱정한대로 두 아들의 대립, 골육상쟁, 그리고 카라칼라가 원정길 중 암살되는 연이은 사건들로 끊기고 만다. 또 카카칼라 생전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세베루스 왕조의 일원들 중에 능력이나 업적에서 그나마 가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버금갈 만한 사람은 율리아 돔나와 셉티미우스의 '''처제''' 율리아 마이사였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카라칼라 이후 군을 제대로 장악 못 한 어린 황제들 치하에서 정치는 어지러웠고 황제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율리아 돔나와 그녀의 '''여동생'''이고, 카라칼라게타 형제의 '''이모'''이며 엘라가발루스알렉산데르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의 능력, 정치적 판단은 시리아 여제라는 말처럼 훌륭했으며, 그녀들이 생존한 시절에는 내치에 있어서는 진일보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까닭에 왕조는 한때 제위를 잃기도 했고, 존속기간도 짧아 로마 제국의 쇠퇴기를 연 왕조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그냥 통사적으로 간추릴 때 하는 얘기지 액면 그대로 전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상술한 것처럼 세베루스 왕조는 후기 로마 제국에서 보이는 변화들의 선구 역할을 하였고, 디오 카시우스와 헤로디아누스로 대표되는 당대 사가들에게도 가장 안정된 평화기를 구축했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5.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93년 4월 14일 ~ 211년 2월 4일
2대
카라칼라
211년 2월 4일 ~ 217년 4월 8일
공동황제
게타
211년 2월 4일 ~ 211년 12월 26일
3대
엘라가발루스
218년 6월 8일 ~ 222년 3월 11일
4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222년 3월 11일 ~ 235년 3월 18일 또는 19일

[1] 보라색 네모 안에 들어간 인물들이 황제 자리를 지낸 인물이다.[2] 이종사촌 누이의 아들.[3] 이종사촌은 엄마끼리 자매인 평행사촌이므로, 카라칼라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모네 쪽 오촌 조카가 된다.[4]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을 적대한 자들의 목숨을 남겨놓지 않는 비정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심지어 경쟁자의 시체를 말발굽으로 짓밟기까지... 인과응보인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뒤를 이은 왕조의 모든 황제암살당하거나 혈육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적대시하는 진기록을 세웠다.[5]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에 군단장이었는데,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고 그걸 결코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베루스가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 철회를 명령한 것은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경제적으로 소득없는 게르만족과의 전쟁과 안토니누스 역병에 더불어 콤모두스 황제 사후 엄청난 내전으로 고갈된 국고를 수습하였다.[7] Imrie, Alex. Introduction, The Antonine Constitution: An Edict for the Caracallan Empire. Brill, 2018.[8] Imrie, Alex. The Military Rationale, The Antonine Constitution: An Edict for the Caracallan Empire. Brill, 2018.[9]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야 전혀 문제가 아니겠지만, 고대 로마에서 동성애는 그리 썩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것으로 인식됐다.[10] 약간 과장 보태서 현대적인 관점으로 설명하자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카톨릭 수녀를 성폭행했다고 생각해보라...[11] 아우렐리우스 빅토르가 자신의 저서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삶과 치세를 평가하면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