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의 당금

 

'''慶元黨禁'''
1. 개요
2. 배경
2.1. 남송의 정치 상황
2.2. 한탁주와 조여우의 갈등
3. 전개
4. 결과


1. 개요


경원의 당금은 남송대에 벌어진 대규모의 학문 탄압 사건이다. 남송의 4대 황제 영종(寧宗)의 연호인 경원(慶元)에서 따서 경원의 당금, 경원위학의 금이라고 부른다.

2. 배경



2.1. 남송의 정치 상황


효종이 1189년에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태상황이 되고 황태자인 조돈(趙惇)이 새로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황제로 즉위한 광종은 심약한 성격에 황후인 자의황후(慈懿皇后)에게 휘둘렸으며, 자의황후는 효종과 광종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효종과 광종의 갈등이 극대화되고, 효종은 결국 쓸쓸함 속에 1194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광종의 실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당시 재상이었던 조여우(趙汝愚)[1]한탁주(韓侂胄)[2]가 헌성자열황후와의 논의 끝에 광종을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황태자인 조확(趙擴)을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남송의 제4대 황제이자 송나라의 제13대 황제인 영종이었다.

2.2. 한탁주와 조여우의 갈등


하지만 한탁주와 조여우는 영종을 즉위시킨 후 갈등을 겪게 되었다. 한탁주는 자신의 이모인 태황태후를 설득하고 이를 주도했기에 여기에는 자신의 공적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한탁주는 영종의 즉위로 자신이 권신의 자리에 한발짝 더 다가섰다고 생각했지만 조여우는 그런 한탁주의 성격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주희(朱熹)가 상소를 올렸고 이것이 경원의 당금의 시작이었다.

3. 전개


한탁주는 우선 경원(慶元) 원년(1195년)에 조여우를 탄핵하여 재상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뒤이어 경원(慶元) 3년에는 주희를 비롯하여 팽귀년, 주필대, 유정 등 59명의 신하들이 금고에 처해지고 다음 해에는 주자의 주자학도 한탁주에 의해 거짓 학문으로 탄압받았다.

4. 결과


한탁주는 경원의 당금을 계기로 권신의 지위를 굳혀나간다. 한탁주에 의해 재상의 자리에서 쫓겨난 조여우는 실각 이후 얼마 안 있어 1196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자를 비릇한 정주학의 학자들도 경원의 당금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주자는 결국 1200년에 세상을 떠났다.[3]
그러나 권신의 지위를 굳혀나갔던 한탁주도 황후와 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영향력이 약해졌고 경원의 당금으로 인한 내부의 반발로 자신의 권력에 흠이 가게 되었다. 한탁주는 이러한 내부의 반발 무마와 자신의 영향력 회복을 도모하고자 경원의 당금으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을 복직 또는 복권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부의 반발은 여전해서 한탁주는 당시 금나라의 국제 정세를 확인하고 남송 내부의 반금 감정을 이용하여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북벌을 준비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한탁주의 몰락을 가속시켰다.
한편 한탁주에 의해 거짓 학문으로 탄압받았던 정주학은 한탁주가 몰락한 이후 이종 시기에 들어 주희를 배향하며 남송이 공인하는 학문이 되었고,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주류사상의 위치에 서게 된다.

[1] 종실 출신으로 송태종의 아들 조원좌의 후손이다.[2] 송나라의 명신 한기의 증손으로 외척 출신이다.[3] 퇴위된 광종도 1200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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