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송)

 


<colcolor=#ece5b6> '''송 제11대 황제'''
'''孝宗 成皇帝 | 효종 성황제'''

'''묘호'''
'''효종(孝宗)'''
'''시호'''
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신무명성성효황제
(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神武明聖成孝皇帝)
'''연호'''
융흥(隆興, 1163년 ~ 1164년)
건도(乾道, 1165년 ~ 1173년)
순희(淳熙, 1174년 ~ 1189년)[1]
'''출생'''
1127년 11월 27일
'''사망'''
1194년 6월 28일 (67세)
'''국적'''
남송(南宋)
'''재위'''
'''남송의 황제 '''
1162년 7월 24일 ~ 1189년 2월 18일 (27년)
'''남송의 태상황 '''
1189년 2월 18일 ~ 1194년 6월 28일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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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ce5b6> ''''''
조(趙)
''''''
신(昚)
''''''
영원(元永)
'''부모'''
양부 고종, 양모 헌성자열황후
생부 조자칭(趙子偁)
'''황후'''
성목황후, 성공황후, 성숙황후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와 후손
4. 악비 사랑
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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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나라의 제11대 황제.[2] 묘호는 효종(孝宗), 시호는 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신무명성성효황제(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神武明聖成孝皇帝). 휘는 조신(趙昚). 연호는 융흥(隆興), 건도(乾道), 순희(淳熙)를 사용했다. 아들인 광종에게 선위 후 지존수성태상황제(至尊壽聖太上皇帝)의 존호를 받아 송 수황(壽皇)이라고도 한다.

2. 생애


북송의 초대 황제인 송 태조 조광윤의 둘째 아들 조덕방의 6대손[3]이자 송 고종의 양자이다. 송 고종의 친자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
본명은 조백종(趙伯琮)이었지만, 황태자로 책봉된 이후 조신으로 고쳤다. 황태자가 된 지 2년 후 금나라가 침입했지만 이를 격퇴했다.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후 몇개월 안가 고종은 양위를 선언하고, 36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효종은 고종과 달리 북쪽 영토 수복에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이었고, 그가 황제가 되었을때 이미 진회는 사망한 후였지만 그의 일가가 권력을 휘두르는걸 못마땅하게 여겨 권력 승계를 막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즉위 직후에는 주화파 대신 주전파의 핵심인 장준을 재상으로 삼기도 했다. 다만 융흥 원년에는 북벌을 시행하여 일부 영벽과 숙주를 되찾았지만 핵심 장군들이었던 이현충과 추굉연의 반목과 더불어 맹렬한 금의 반격으로 숙주를 다시 빼앗기고 부리집에서 참패했다. 이는 남송의 군사력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결국 효종은 주화파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4] 금나라와 화의를 맺는다.
이후에도 북벌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구휼 제도를 개선하는 등 민심을 안정시키고 내정 안정에 주력하였다. 염상들에게 국가가 진 빚을 모두 갚고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는 한편 각종 부가세를 줄이는 등 세수를 확대하면서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에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매관 매직을 금하고 가문이 좋으면 관리가 되던 관행도 고쳤다. 즉, 능력 있는 인재 선발을 위해 노력한 것. 이러한 노력으로 남송은 재기를 할 수 있었고, 이 효종의 재위기를 이른바 '건순지치(乾淳之治)'라고 부르기도 한다.
효종은 금나라의 침략 위험과 직전 진회[5]의 공포 정치로 인해 경직되었던 남송의 기반을 다진 왕조의 몇 되지 않는 명군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남송 입장에선 불행하게도 동시대 금나라엔 '''작은 요순'''이라 불릴 정도의 명군이었던 금 세종이 있었고, 송 효종은 번번히 금 세종에게 발목을 잡히며 그토록 바라던 북벌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군신 관계였던 송과 금의 관계를 숙질(숙부~조카) 관계로 완화시키고, 세폐를 줄이려고 노력해서 고종 때 금에게 지불하던 세폐의 반만을 지불하는 가시적인 성과도 거두긴 했다.
효종은 어릴때부터 태상황이었던 양부 고종과 양모 오태후를 극진히 모시던 효자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고종은 안 그래도 어려운 나라 살림에 유유자적하며 소일에만 몰두했다. 그러면서도 온갖 조정일에는 간섭하고 효종의 북벌에도 걸림돌 역할을 제대로 하는 등 그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사사건건 태클을 걸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최대한 고종의 비위를 맞추고 극진히 모시고자 노력하였다.[6] 오죽하면 황제임에도 고종의 수레바퀴를 직접 밀고 말까지 몰았다고 한다.(...) 묘호가 괜히 효종'''(孝宗)'''이 아니다.

3. 가족 관계와 후손


효종은 3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첫번째 황후인 성목황후 곽씨는 효종이 즉위하기 전인 1156년에 세상을 떠나 황후로 추존되었다. 2번째 황후인 성공황후 하씨는 효종이 즉위하고 5년 뒤인 1167년에 세상을 떠났다. 3번째 황후인 성숙황후 사씨는 효종이 광종에게 제위를 물려준 이후 태상황후가 되었고, 1194년 효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엔 황태후가 되었으며, 광종이 퇴위하고 광종의 아들인 영종이 즉위했을 때 태황태후가 되어 120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종에게는 4남 2녀가 있었는데 자식운은 영 좋지 못했다. 장남 장문태자 조기가 어이없는 일로 요절해서[7] 차남 위왕(魏王) 조개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8] 그런데 3남 조돈이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해서 마음에 들었는지 덜컥 조돈을 태자로 삼아 버리자 이에 조개는 억울했는지 홧병에 걸려 생을 마감했으며, 막내 아들 소왕(邵王) 조각[9]과 두 공주도 요절했다.
때문인지 효종은 1189년 덜컥 태자 조돈에게 양위 후 중화궁(重華宮)에 기거하였고, 조돈은 광종으로 즉위했으나, 태생이 온순하나 심약하였고 공처가부인의 이간질에 효종과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광종 본인도 스트레스로 정신병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효종은 말년까지 애먹이던 양아버지 태상황 고종을 모시다 그가 죽고 난 후 얼마 안되어 아들인 광종에게 양위했지만, 광종과도 멀어지면서 결국 1194년 씁쓸한 최후를 맞고 영부릉에 안장되었다.

4. 악비 사랑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남송 시대의 명장인 악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는 것. 즉위하자마자 악비를 왕으로 봉하여 명예회복을 시켜주었고 악비의 무덤을 크게 건축했으며 수감된 악비의 가족들을 석방시켜 주었다. 또한 악비의 아들들인 악림, 악진, 악애 형제를 무관직에 발탁했다. 심지어 악비의 5남인 악애에게는 황제 본인이 정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악비의 사위인 고조와 악비의 장손인 악침까지 벼슬길에 오르도록 하기도 했다.
효종의 악비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는 송사의 기록에도 나온다. 악비의 아들들이 효종에게 부친의 억울함을 성토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게 좀 지나쳐서 효종의 꼭지가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효종은 오히려 악비의 억울함을 짐이 모르겠냐며 악비의 아들들을 달래주었고 그 이후에도 악비의 아내와 악비의 가족들을 돌봐주게 된다. 얼마나 감사했던지 악비의 아내는 황은에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
그러나 그러한 악비 사랑이 지나쳤는지 악비를 모함한 진회를 극도로 증오했다. 자신의 치세 동안 진씨들의 관직길을 죄다 틀어막아 버렸고 한술 더 떠 진회의 죄를 진회의 일족에게 물어 진씨 일족을 멸문시켜버리는 무시무시한 면도 보여주었다.

5. 대중매체에서


[image]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의 남송 황제로 있다. 시나리오가 시작하는 1189년은 이미 효종이 양위한 상태였는데도 아직 건재하다. 전투력이 역부족이지만 지모와 정치는 쓸만한 수준으로 이 게임에 등장하는 남송의 황제들 중 제일 능력치가 높다. 수명도 기니 높은 문화치를 바탕으로 고령의 나이임에도 우수한 후계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아들로 등장하는 조돈[10] 대신 우수한 아들을 낳아 물려줄 수도 있다.(...) 거기다 조금만 발전시키면 좋은 가공 장수가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며 징병 가능한 병과도 다양하다. 따라서 잘만 하면 화북의 금나라를 밀어내고 중원 수복을 노릴 수도 있다.

6. 둘러보기



[1] 본 연호에서 유래한 순희제(淳熙帝)라는 별칭이 있다.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11954&sType=_detail&q=&secType=uf&&fq=catePeriod2_fct%3A%EC%A4%91%EA%B5%AD%2F%EC%86%A1&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2] 북송 때부터의 전체 대수를 말하는 것으로, 남송 만으로 하면 2대 황제.[3] 북송의 황제는 조광윤을 제외하면 모두 조광윤의 동생인 송 태종 조광의의 후손들이다. 송 고종 또한 조광의의 후손이다.반대로 남송은 고종만이 조광의의 후손이고 모두 조광윤의 후손이다.[4] 참고로 송고종 때의 화평 정책으로 인해 일단은 남송의 사회 분위기가 안정적이었고, 이에 화평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더구나 상황인 고종 역시 확실한 화평론자라, 틈만 나면 주전론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며 효종을 압박했다.[5] 물론 현대 들어 진회에 대한 재평가가 약간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중국에서는 '''간신의 대명사'''로 진회를 꼽는 사람이 부지기수다.[6] 한번은 잔치에서 효종이 술에 크게 취해 태상황 폐하께 많은 돈을 바치겠다고 실언한 일이 있었는데, 다음날에도 이를 기억한 고종이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효종에게 은연 중에 그때 약속한 돈은 언제 줄거냐고 따졌다. 효종은 당시 술에 너무 취해 한 말이라서 당황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옆에 있던 오태후가 '황상께서 그 말씀을 하시고 신첩에게 돈을 맡겨두셨다'고 한 뒤 자기 사재를 대신 털어 고종에게 바친덕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후 효종은 오태후가 자신의 실수를 뒤처리해주고 효종이 고종에게 원망들을 수 있는 꼬투리도 잡히지 않게 해준 것을 감사해했다. 따라서 자신의 사재를 털어 그 몇배나 되는 은전을 오태후에게 드리고 양모를 더욱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7] 하필 효종의 정책에 항의하는 서생들이 난동을 부릴 때 가마를 타고 나갔다가 갑자기 시위대가 닥돌했다. 조기는 원래 심약한 성격이었던데가 허약한 체질이라 놀란 몸을 진정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사망하고 만다. 안습.[8] 시호는 혜헌왕(惠憲王).[9] 시호는 도숙왕(悼肃王).[10] 한글판에서는 조순으로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