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희북벌
1. 개요
開禧北伐
중국 남송대에 벌어진 남송의 금나라 북벌. 남송의 황제였던 영종(寧宗)의 재위 기간에 한탁주가 주도한 북벌로 개희(開禧)는 영종 재위기의 연호(1205년 ~ 1207년)이다.
2. 배경
재상 조여우(趙汝遇)와 함께 광종(光宗)을 퇴위시키고 가왕(嘉王) 조확(趙擴)을 즉위시킨 외척 출신의 한탁주는 조여우를 몰아내고, 그 뒤에 주자를 중심으로 한 도학파를 탄압하는 경원의 당금을 일으켰다.
경원의 당금을 일으킨 한탁주는 권력을 유지하며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을 재상 등의 요직에 앉혔다. 하지만 그의 뒤를 보호해주었던 황후[1] 와 태황태후[2] 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고, 경원의 당금에 대한 반대급부로 한탁주에 대한 반발이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한탁주가 권신으로 지위를 굳혀가는 가운데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북방에서는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여 세력을 점점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금나라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한탁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원의 당금에 대한 반발로 금이 간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정강의 변 이후의 반금 감정을 이용하여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계획하게 된다.
개희북벌 이전인 가태(嘉泰) 4년(1204년)에는 악비(岳飛)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를 악왕(鄂王)으로 추봉하였다. 또한 한탁주는 경원의 당금으로 추방되었던 인물들 중 일부를 복직 또는 복권시키기도 하였다.
3. 내부의 반발
하지만 한탁주의 대금 북벌은 시작부터 큰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한탁주의 북벌 계획이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북벌론자였던 신기질 등도 북벌에 대한 반대의사를 내비쳤으며 조정대신들도 금나라 북벌에는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한탁주는 이러한 내부의 반발을 자신의 권력으로 억제했으며 개희(開禧) 원년(1205년)부터는 본격적인 북벌을 시작하게 된다.
4. 북벌의 전개
1205년 5월에 남송의 영종은 금나라 정벌 조서를 내려 북벌 군대가 출병하게 된다. 처음 몇달 동안은 남송이 금나라에게 우세해지면서 옛 북송의 영토를 일부 수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4.1. 금나라의 반격
남송의 북벌 공세는 순식간에 금나라에게 역전되었다. 한탁주는 몽골의 침입으로 금나라가 약해졌다고 보았지만 그 이상으로 남송의 북벌이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 계획이 터무니없이 무모한 계획이었다.
게다가 개희북벌을 뒤집는 더 큰 사건이 있었으니...
4.2. 오희의 배신
한탁주가 최고의 전력으로 기대했던 오희(吳曦)가 사천에서 금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오희는 자신의 객장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촉왕(蜀王)으로 봉할 것을 요구하였고, 금나라에서는 오희를 촉왕으로 봉하였다.
오희는 흥주에서 참위까지 하면서 남송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내부의 인심장악에 실패하고 자신도 살해당하여 완전히 패배하였다. 오희의 배신과 계속되는 금나라의 반격으로 점점 불리해진 남송의 군대는 점차 패배를 거듭하면서 남송 조정에서는 금나라에 화평을 희망하는 사신을 보내게 된다.
5. 북벌의 결과
결국 한탁주는 개희북벌의 실패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한탁주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빗발치면서 결국 개희(開禧) 3년(1207년)에 한탁주는 사미원(史彌遠) 등에 의해 살해되었고, 한탁주의 일파도 완전히 몰락하였다.
금나라에서는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북벌의 주동자였던 한탁주의 목을 요구하였고 결국 한탁주의 머리를 금나라에 보내면서 다음해인 가정(嘉定) 원년(1208년)에 남송과 금나라 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한탁주를 주벌한 사미원은 영종, 이종대에 재상이 되어 1233년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권력을 장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