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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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나라의 제12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3대 황제.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순무성철자효황제(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順武聖哲慈孝皇帝). 휘는 돈(惇).
2. 생애
2.1. 즉위와 표독스런 황후
효종의 3남이자 성목황후 곽씨[1] 의 소생으로 1147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효종의 총애를 받다 장남 장문태자가 요절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태상황인 양할아버지 고종[2] 과 아버지 효종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태자로 있었다. 이런 까닭에 황태자 시절 자신이 40살이 넘어감에도 아버지가 양위할 의사가 없어보이자 자신의 하얗게 된 수염을 보이면서 주변에 이를 한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187년 태상황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치른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자 양위를 받아 43살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기본적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하며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명군인 아버지 효종과 달리 심약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끔찍한 공처가라서 아내 자의황후 이씨(이봉랑)[3] 의 말밖에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봉랑의 질투가 심하고 성격이 영 좋지 않아서, 이봉랑을 간택한 시할아버지 고종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시아버지 효종도 이봉랑을 싫어해서 시행하지만 않았을 뿐 폐후로 만들려고 했을 정도로 영 사이가 나빴다. 이에 이봉랑도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며 광종과 효종 사이를 이간질하여 부자 사이를 시간이 지날수록 갈라놓았다.
즉위 후, 자의황후의 친정 아버지 이도(李道)를 왕에 봉하고, 이씨 일족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자의황후와 이씨 일족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거기다 투기와 질투가 심한 자의황후는 광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는데, 한번은 광종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는 궁녀의 손이 뽀얗고 아름답다며 웃으며 쓰다듬자, 그날 밤 광종의 처소로 그 궁녀의 잘린 두 손을 찬합에 넣어 배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판국이니 광종의 후궁들 역시 자의황후의 마수에 자유롭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귀비 황씨는 광종이 공왕 시절 맞아들인 후궁으로 사려 깊은 성격이라 광종이 총애했는데, 자의황후는 질투심 때문에 광종이 없는 사이 사람을 보내 귀비 황씨를 때려죽이고는 횡사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른 후궁인 귀비 장씨와 첩여 부씨는 궁궐 밖으로 내쫓았는데, 그녀들은 다른 사람에게 재가했다. 자의황후의 투기심.
이렇듯 심약한 성격에 연달아 아내 자의황후에게 시달리던 광종은, 고작 즉위한지 2년만에 정신병자가 되어 결국 맛이 가 버렸다. 갑자기 한밤중에 발작해 혼자 울부짖기도 하고 미친 듯이 궁궐 안을 방황하기도 했다. 이때 자의황후는 남편을 대신해서 국정을 주관했는데 자신의 친척 100명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2.2. 강제 퇴위와 죽음
이런 와중에 효종과 광종의 갈등은 태자 책봉 문제를 계기로 폭발하고 만다. 광종은 아버지가 자신과 이봉랑의 아들 조확이 아닌 조카 가국공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한다고 의심하며 효종과 이 문제를 놓고 대립했고, 부자 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광종이 효종의 생일에도 아버지의 처소를 찾지 않기에 이른다. 이봉랑의 이간질과 광종의 의심이 결합되어 부자 사이는 벌어졌고, 결국 아들을 그리워하던 효종은 이 일로 병이 들게 되었다. 하지만 광종은 오히려 “짐이 심질(心疾: 정신병)을 앓고 있어서...”라며 변명만 하고 효종의 문안을 가지 않았고, 한술 더 떠서 아버지가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한다는 의심까지 하며 황실과 신하들의 권유조차 거절했다.
이로 인해 조정 안팎에서는 광종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광종이 “태상황의 병문안을 가겠다”고 발표하며 마무리되나 싶었던 상황에서 본인이 이 발언을 취소했고, 이후 다시 이를 뒤엎는 등 오락가락한 행동이 계속 반복되었다. 이런 광종의 모습에 민심은 이반하고 황제에 대한 신하들의 신망도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임종 순간에도 아들을 그리워하던 효종이 결국 승하하였는데, 이때도 광종은 효종의 죽음을 믿지 않아 상을 치르려 하지 않았다. 더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평소처럼 후궁으로 향했다. 이런 광종의 행동에 아들 조확이 울면서 할아버지의 상을 치루자고 했지만 광종은 이마저도 믿지 않고 의견도 듣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에 재상 조여우[4] , 한탁주[5] 등은 태황태후인 헌성자열황후 오씨와 의논하여 민심과 조정의 신망을 잃고 정상적인 황제 업무가 불가능해진 광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차남 조확을 즉위시켰다.[6] 이후 광종은 명목상 상황이 되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 발작 증세 등을 보이다가 경원 6년이던 1200년 9월 17일 고독 속에서 향년 54세의 나이에 사망하여 영숭릉에 안장되었다. 한편 자의황후 이봉랑 역시 남편이 강제퇴위 당한 이후 1200년 7월 56세의 나이에 남편처럼 고독 속에 사망했는데, 얼마나 밉보였으면 누구 하나 시신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궁녀 중엔 시신에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엔 한 환관이 시신을 거두었다고.
3. 송사의 논찬
광종(光宗)은 어려서 좋은 명성이 있었고 시문을 짓고 읊조리는 풍류를 누렸다. 그의 즉위에 이르러, 정권의 대강령을 총괄하고 폐행을 물리치며, 세금을 적게 매겨서 물리고 형의 집행을 너그럽게 한 것을 소희(紹熙)의 정사를 시작한 데에서 볼 수 있었으니, 가히 배울 만했다. 궁궐의 투기가 사나워지자, 안에서는 능히 막을 수 없었고 놀람과 근심이 병으로 이르렀다. 이때부터 정치가 나날이 혼란해졌고 효도와 봉양이 나날이 게을러졌으며, 이렇게 건순(乾淳)의 업적이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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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 광종 논찬
4. 여담
징기스칸 4 시나리오 1에서 효종의 아들로 본명인 조돈으로 등장한다.[7] 능력치는 별 거 없지만 수명이 긴 효종이 죽을 때 살아있다면 뒤를 잇는다. 다만 남송으로 플레이한다면 효종이 꽤 장수해 주기 때문에 차라리 연회를 벌여서 다른 아들을 낳아(...) 자리를 넘기는 게 훨씬 낫다. 남송의 문화치가 높기 때문에 조돈보다 능력치 좋은 왕족을 생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5. 둘러보기
[1] 남편인 효종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하여 황후로 추존되었다.[2] 아버지 효종이 고종의 양자로 입적했다.[3] 1144년생으로 하남의 절도사 이도의 딸이다. 송 고종이 황보탄의 건의를 받아 간택된 뒤, 광종과 결혼하였다.[4] 송 태종의 후손으로 황실 종친이다.[5] 인종, 영종 대의 명신 한기의 증손자이자 헌성자열황후 오씨의 외조카로 송황실의 외척이다.[6] 광종의 장남 조정은 요절했고 조카인 조병은 태황태후가 차기황제가 되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따라서 조확이 뒤를 이었다.[7] 한글판에서는 '조순'이라고 오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