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탁주

 


남송 4대 권신
진회
한탁주
사미원
가사도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남송의 권신
韓侂胄 | 한탁주
'''

'''이름'''
한탁주(韓侂胄)
''''''
절부(節夫)
'''부친'''
한성(韓誠)
'''생몰'''
1152년 ~ 1207년
'''주군'''
송효종
송광종
송영종
'''국적'''
남송(南宋)
1. 소개
2. 생애
2.1. 광종의 강제퇴위와 경원의 당금
2.3. 몰락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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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韓侂胄'''
(1152~1207)
남송의 외척이자 남송 영종대의 권신이다. 북송의 명신 한기의 증손자이며 송고종의 황후인 헌성자열황후 오씨의 조카, 영종의 황후인 공숙황후(恭淑皇后) 한씨의 종조부이다. 자는 절부(節夫). 한탁주는 남송의 대유학자 주자를 핍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광종의 강제퇴위와 경원의 당금


한탁주는 하남 안양[1] 사람으로 1152년 태어났으며 증조부는 북송의 명신 한기이며 어머니는 남송 고종의 황후였던 헌성자열황후 오씨의 여동생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황실의 외척이었고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한탁주는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황태자 조돈이 40살을 넘겨서 즉위하여 광종이 되었다. 광종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의심이 많고 우둔하였기에 황후 이씨(이봉랑)의 말밖에는 듣지않았다. 광종은 즉위한 지 2년이 지날 무렵 정신병을 앓게 되었으며 이후 이봉랑의 이간질에 아버지 효종과 사이가 멀어졌는데 태자 건저 문제를 놓고 효종을 의심하면서 아버지의 문안 인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그 사이가 더욱 벌어졌다. 그러다가 아들을 그리워하던 효종이 병을 얻어 눕게 되고, 아버지가 사망했을때에도 광종은 패륜에 가까운 행동들을 했다. 이렇게 광종이 더이상 정상적인 업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하자 조정 안팎의 신망을 잃고 말았다. 이에 재상 조여우(趙汝愚)와 한탁주 등이 주도하여 광종은 강제퇴위당했다.
한탁주는 태황태후인 이모 헌성자열황후가 광종의 강제퇴위에 명분을 실어 줬고, 자신이 이모를 설득하고 이를 주도했기에 자신의 공적이 크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영종 즉위 후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 등은 한탁주을 멀리했다.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와 그를 따르던 주희 등 대신들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1195년 대간들을 이용하여 조여우를 재상직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편에 섰던 주필대, 유정, 왕난, 주희(朱熹), 팽귀년 등 59명이 금고에 처해졌다. 그 다음 해에는 주희의 주자학도 거짓 학문이라고 탄압받았는데 한탁주와 그 당파들이 주도한 일련의 사건을 경원의 당금이라 불렀다.

2.2. 개희북벌


한탁주는 그 후 권신으로서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 원림이라고 부르는 정원을 만들고 첩 10명에게 구슬이 달린 모자를 선물을 내리는 등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온갖 아부를 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토산물과 금은보화 등이 뇌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뒤를 보호해 주던 황후와 태황태후가 차례로 붕어하자, 권력이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때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는 영종과 조정대신들에게 금나라를 칠 것을 주장했지만 원래부터 금나라에게 복수를 하자고 주장해온 신기질과 같은 강경파 조정 대신들조차 반대[2]했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영종이 북벌 조서를 내리고 북벌을 위한 남송 군대는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으로 나눈 뒤 세 갈래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각 군의 최고사령관인 통수에는 개인적인 역량이 의심되는 인사들이 배치되었다. 서로군은 정송[3], 동로군은 곽예[4]로 삼았기 때문에 출발때부터 삐걱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동로군을 지휘하던 장수 중 용장 필재우가 스스로 자신의 성인 '필(畢)'자가 적힌 깃발을 높이 들고 싸워 사주(泗州)일대의 두 성을 함락시켰다.[5] 아울러 동로군의 전준이 필재우와 함께 자신들이 이끌던 민병들과 함께 용맹스럽게 전진하여 7일만에 숙주성 아래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재우,전준의 활약 이외에는 큰 진전도 없었고 서로군, 중로군은 연패를 거듭하고 있던 상황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필재우와 전준이 이끌던 민병들이 공을 세울 것을 시기한 송군 후속 부대가 숙주성을 공격하려고 사다리를 타고 공격하는 민병들에게 마구 화살을 쏴서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4개월 후, 갑작스러운 남송의 공격에 방어를 하던 금나라가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금군은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공격을 펼쳐 양회 일대를 빠르게 점령하고 장강 북안까지 진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늘 스스로를 제갈량이라고 하며 과시한 동로군 총사령관 곽예는 장남 이남으로 도망갔으며, 서로군 총사령관 정송 역시 삼협까지 도망쳤다. 더해서 서로군 대장 오희는 북벌군을 배신하고 금나라와 내통하여 촉왕을 참칭였다. 말 그대로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한탁주의 주도로 이뤄진 북벌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외부적으로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했고 제대로 준비조차 되지 않은 무리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도저히 답이 없게 된 남송 조정은 1207년 금나라와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협상을 하였는데 이때 금나라는 점령한 양회지역 할양, 거액의 전쟁배상금 지불, 세폐, 포로교환과 함께 전쟁의 주동자인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였다. 이것을 들은 조정에선 한탁주를 옹호하기보다는 그를 비판,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2.3. 몰락과 최후


14년간 권신으로 조정을 뒤흔들던 한탁주가 자신의 위세를 공고히 하고자 무리하게 추진한 개희북벌은 완전하게 실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이 실패는 한탁주 제거를 생각하던 이들에겐 기회가 됐다. 과거부터 한탁주의 전횡을 끝내야 된다고 생각하던 영종의 황후 양씨는 황자들의 스승인 예부시랑 사미원에게 한탁주와 그를 따르며 조정을 농락하던 세력을 제거할 명분을 주고 힘을 실어 주었다. 하지만 여론의 비난에도 한탁주와 그 세력의 힘이 여전히 강해 머뭇거리던 사미원에게 장자가 “죽이면 그만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정변의 빠른 추진을 주장하여 사미원은 한탁주 제거를 결행하였다.
1207년 11월 한탁주는 애첩 중 한명인 만두화의 생일 주연을 열고 늦게까지 자신의 무리들과 술을 마시고 즐겼다. 이때 그의 측근 중 한명인 주균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을 파악하고 그에게 ‘지금 도성 안에서 군사들이 움직인다는 풍문이 도니, 내일 아침 조회에는 나가지 마시라’하고 급히 편지를 보냈다, 그럼에도 한탁주는 이 편지를 읽고도 무시했다. 이 무렵, 영종 역시 한탁주 제거를 묵인하면서 사실상 승인하였기에 사미원의 주도로 한탁주 제거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하진이 금군 300명을 이끌고 육부교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레 하나가 지나가자 하진은 그 수레가 한탁주의 것임을 알아차리고 이를 멈추게 했다. 곧이어 군사들을 시켜 한탁주를 수레 밖으로 끌어낸 뒤 무장들이 칼로 그를 내려쳐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죽은 한탁주의 머리는 베어진 뒤, 소금에 절여졌고 그 머리를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을 맺었다. 한편 한탁주를 살해한 사미원은 권력을 장악하고 그 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1] 지금의 허난성 안양시[2] 북벌을 하자던 한탁주의 주장에 원래부터 북벌론자였고 금나라를 피해 산동반도에서 남송으로 도망쳐왔던 신기질마저도 지금 국력으로는 무리라면서 반대하고, 북벌을 하려면 20년을 준비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탁주는 이런 현실적인 조언조차 깡그리 무시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북벌을 밀어붙였다.[3] 한탁주의 애첩과 이름에 같은 한자가 있다고 하여 한탁주에 의해 서로군을 지휘하게 되었다.[4] 곽예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음에도 자기 스스로를 늘 촉한의 명승상 제갈량에 비유했던 인물이었다.[5] 이때 한탁주는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자랑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