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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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철학자. 활동시기는 남송, 세부분야는 유학. '''성리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본명은 주희(朱熹).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다.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3] 등 여러가지가 있다. 남송 휘주(현재의 중국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출생하여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사후 영종에게 문공(文公)이란 시호를 받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료 추봉되었다.
신안 주 씨(新安 朱氏) 시조(주문공, 朱文公)이며 현재 성균관 대학교 명예 교수 주삼환, 카이스트치과 주현성 원장 등의 조상이다.
2. 학문
공자의 초기 유교는 경험론적 성격을 띠었지만, 이를 본인의 합리론적 성격과 우주론적 이론을 결합시킨후 '''변형하여 성리학을 탄생시킨 인물'''[4] 이다. 주희는 일생을 바쳐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우리가 보통 삼국지연의를 보며 유비의 촉한(蜀)을 정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주자가 주장한 촉한 정통론(蜀漢正統論)에 근거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조위(魏)를 정통으로 보았고, 자치통감에서는 모두 정통으로 보지 않는 무통설이 대세를 이루었으나[5] 주자가 자치통감을 보완한 자치통감강목을 펴내면서 촉한 정통론을 주장한 이후 촉한 정통론에 무게가 실렸고, 지금의 삼국지연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상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정립되었다. 다만 촉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미 송나라 이전부터 호의적이었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딱히 주희 혼자서 주장해 이렇게 대세가 된 것은 아니다, 이미 북송 연간부터 관우만 해도 공적, 사적인 차원에서 신으로 숭배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촉한 정통론자임은 둘째 치고 제갈량의 광팬(...)이었다. 아예 와룡암이라는 암자까지 지어서 기거했을 정도고 심지어는 '''"맹자 이후로의 인물로는 오로지 장량과 제갈량, 이 두 사람만 있었을 뿐이다."'''라는 패기넘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주자가 맹자의 위상을 어떻게 봤는지 생각하면 가히 충공그깽에 가까울 정도의 빠심(...).
'''사서[6] 에 모두 주석을 단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보통 읽고 있는 모든 사서(논어, 맹자, 예기의 일부인 대학, 중용)는 주희가 자신의 해석과 종전의 여러 주석을 모두 모아 정리한 것이다. 대학의 경우는 주석에 그치지 않고 아예 원문에 손을 대서 자구를 수정하고 자신만의 체계로 분장分章했으며, 심지어 소실된 구절이 있다 생각되는 부분에 자신이 글을 지어 넣기도 했다. 죽기 하루 전까지 대학 주석을 손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7] 그 탓에 주희가 손보기 전에 예기에 편입된 대학, 중용의 번역서는 한국 출판계에서 접하기 어려워졌다. 사서오경 번역시에 주희의 저서를 기준으로 하는 한국의 풍토상 예기 번역본들이 하나같이 대학, 중용은 없는 셈 치고 번역하는 경향 때문이다.[8]
개인의 정치적 운은 불운했다. 특히 불교 측에 공격을 받는 일이 잦았다고.[9] 남송시절에는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사후에는 그의 사상은 학계에서 주류적 위치를 점했다. 이후 명, 청, 조선, 심지어 에도막부에서도 성리학은 관학의 지위를 얻었다. 그리고 다른 양명학 등이 인기라도 얻은 명, 에도막부와는 달리 조선은 거의 성리학이 주류 학설로서 지배하다시피 했다.[10] 하지만 이는 청나라에 비하면 양반이었으니, 공식적으로는 국학을 성리학에 근거하긴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문자의 옥 크리로 고증학으로 돌아가 학문이 시망이었다. 밑에서도 나오지만 도올은 성리학이 조선의 학문적 도그마 역할을 했다고 주자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으나 조선은 양명학이나 고증학을 연구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연구가 비주류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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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성 주장시의 루산에 위치한 백록동 서원
또한, 주자는 성리학의 상징과도 같은 서원 문화를 재정립하여 신사 계층의 형성에 기초를 놓았다. 서원 자체는 당말~북송 대에도 있었지만 11세기 후반에 초심을 잃고 과거 시험을 위한 입시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북송 말의 당쟁과 정강의 변의 혼란 속에 여러 서원이 버려지고 말았다. 서원의 관학화와 세속화에 거부감을 느낀 주자는 명망이 자자했으나 폐철되었던 백록동 서원을 재건하였고 백록동 게시를 적었다. 이는 후대의 서원들과 16세기 조선의 서원 건립에 큰 영향을 주며 우리가 흔히 아는 서원의 모습과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계속 비판을 받다가 문화대혁명 기간 주자의 사상은 사실상 중국 주류 사상에서 깨끗하게 배제되었지만 최근 들어서 연구가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황 같이 성리학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받은 학자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도 이런 성리학의 재발견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은 "유가에서 공자, 맹자까지는 유학이라는 학문 자체로의 훌륭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증자고 주자고 하는 아류들은 별로 난 유학 그 자체로 쳐줄 생각이 안 든다."며 주자를 깎아내렸다.[11]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자를 무작정 깍아내릴 수 없는 것이 유가하면 공맹을 같이 떠올리도록 만든 것이 주자가 성립한 성리학이다. 물론 주자학의 조선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는 "논어 등에서 조선 유학은 주자의 주석에만 의존하여 자기 주석을 만들지 않을 정도로 주자학에 절대의존적이었다. 이를 통해 다양한 학문적 논의가 불가능해졌다."라며 주자학이 조선 사회의 도그마 역할, 즉 절대종교적 역할을 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물론 도올은 주자도 (일단은) 대단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자기가 주자(주 선생님)라고 부르기엔 좀 부족한 면이 있다고 증자보단 덜 깐다.
2.1. 경세론
주자는 무조건적인 복고주의나 통제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토지론만 봐도 그러한데 주자의 토지론이란 간단하게, '부의 불평등을 막고 자발적인 경제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낮은 세율과 공평하게 나뉘어진 토지가 필수이다, 그렇지만 토지는 적고 사람은 많은 현실에서는 이걸 진짜 하려면 국가 개입이 지나쳐지고, 그럼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일단의 토지 국유화 대신 토지 간 경계를 확실하게 규정하고 토지의 거래와 양도를 일정 정도 허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라는 것이다.
주희는 삼대의 이상 통치를 찬양했지만, 남송의 현실에서 정전제의 복원을 주장하는 과격한 복고주의에 매몰되진 않았다. 그는 남송대의 현실에서 정전제의 복원은 이미 불가능해졌으며, 토지의 재분배를 위해 국가가 무리하게 경제에 개입할 경우 예기치 못한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또한 정전제의 복원을 위해선 농지의 압류와 재분배가 불가피하므로 황무지는 광활하고 인구가 희소했던 서한 초기나 동한의 중흥기가 마지막 기회였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는 맹자의 왕도를 논하면서 철저한 토지 조사에 근거한 공정한 징세와 투명한 재정 지출만이 정전제의 이상에 수렴해가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임을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남송의 현실에선 부민과의 타협 속에서 점진적 개선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정전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한편 상앙의 천맥제와 양염의 양세법에 대한 주희의 비판적 입장과 결부시켜 보면, 그는 과세의 투명성과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국가 주도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듯하다. 주희는 기본적으로 경작지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공공 부문과 사적 영역이 동시에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 겸병과 불법 점유는 판적의 혼돈과 전세의 불균등을 야기했고, 그 결과 불평등의 심화 및 조세 정의의 실패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땅이 없는 빈민이 세금을 내고, 땅을 가진 부빈은 조세를 회피하는" 부조리가 생겨난 것이다. 주희는 이를 모두 경계가 부정한 결과라 판단했다. 주희는 백성의 직업적 안정성, 직능의 분화, 토지 매매의 금지 및 황무지 개간의 장려를 통한 자영 농민 계층의 육성이 농촌 경제의 기초라 생각했다. 그는 고대의 정전제를 모방해 "호구의 숫자에 따른 토지 점유의 원칙" 아래 "일부가 100무의 전지를 점하는" 이른바 '수전지제'의 재도입을 경계법 시행의 기본 전제로 주장한다.
주희는 그러나 당초의 균전제와 같은 토지의 국유화 및 국가 권력에 의한 토지의 균등 재분배 등 파격적 주장의 실효성을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부 관료와 공신들에게 할양되었던 공전의 경우, 법적 재정비를 통해 침탈, 매매 및 대여 등의 불법 행위를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는 일반 지주 및 자영농 계층의 사적 소유권을 상당 부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방법으로 상사, 세습, 혼인, 매매 등의 형식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토지의 사용과 처분에 있어 대여, 매매, 교환 등을 일정 정도 허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주희가 이 정도의 토지 사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은 도학의 경세 담론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표면적으로 정전제는 토지의 국유화를 전제하고 있지만, 결국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자영 농민층 육성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전제의 이상에 따라 토지는 원칙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야 하지만, 사용 및 처분을 포함하는 실질적인 소유권은 결국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면 과격한 복고주의자의 수사를 차용하지만, 종합적으로 판단컨대 주희는 적어도 토지의 소유와 분배의 문제에 관해선 온건한 "중도 좌파"의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사료된다.[12]
이외에 번잡하고 과도한 예법을 실정에 맞게 간소화하고, 기존의 미신에 가까운 천인감응 사상을 타파한 것도 큰 공로라 할 수 있다.
3. 성격
송나라 시대 신유학의 집대성자이자, 한 지방의 수령으로서 덕망 있는 인물이기도 했지만, 가끔씩 언행이 좀 답지 않았다고 한다(...). 깐깐한 성격 때문인지 정적이 많았고 특히 자신과 학풍이 다른 당중우와 대립하여 1182년에 6차례에 걸쳐 당중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탄핵 내용중에 당중우가 기녀 엄예와 놀아나 음행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있는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엄예를 체포해 1개월 넘게 옥사에 가둔 후 태장과 협곤[13] 등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도 했으나 결국 증거를 얻는데는 실패하고 이 사건은 주희 인생에 두고두고 남는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논적인 심학파(心學派)의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1139 ~ 1193)이 사망하자, 그를 조문하고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 일도 있다.
여기서 고자는 맹자의 논적으로, 성무선악설을 주장한 그 사람 맞다. 저 발언은 《주자어류(朱子語類)》의 한 대목인데, 이 충격적인 한 마디 이후로 어떤 부연설명도 없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는 해석하기 나름. 《맹자》에서 맹자는 고자와 논쟁을 벌이면서 '''"천하 사람들을 선동하여 인의(仁義)를 깨부수는 것은 바로 선생의 말씀일 것이외다!"'''하고 고자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고자께서는 일찍이 나보다 먼저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셨다."하며 그를 인정하기도 했다. 즉, 주자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일생일대의 라이벌의 죽음을 허탈한 마음으로 한탄한 것일 수도 있고, 육구연이 끝내 자기 학설에 동의 안 하고 '이단'으로서 죽었음을 비아냥댄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육구연도 주희를 고자라고 깠다. 서로 고자라고 깠으니 고자만 불쌍하다.'''"애석하다. 고자(告子)가 죽었도다."'''
4. 발언
공부에 대한 명언도 많이 했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옛날에는 수험생 책상에 자주 붙여놓기도 했다.[14] 권학문참조.精神一到 何事不成('''정신일도 하사불성''') - 정신을 하나로 모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少年易老 學難成 一寸光陰 不可輕 (소년이로 학난성 일촌광음 불가경) -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한순간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5. 대중매체에서
KOEI 게임 징기스칸 원조비사, 징기스칸 4에도 나온다. 징기스칸4에서는 시나리오 1에서 남송 장수로 나온다. 동아시아의 학문 판도를 바꾼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 답게 무력(23)은 당연히 안습이고 지모(53)도 낮지만 정치는 94로 최고 수준이다.
6. 이야깃거리
주희의 후손은 남송 말에 고려로 망명하여 오늘날에도 신안 주씨로서 남아있다. 주(성씨)#s-1.1 문서 참고.
참고로 고려 열전에 나오는 주열은 주잠의 아들인 주여경의 아들이 아니라 주경여의 아들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인 윤리와 사상에서 항상 '''킬러 파트'''로 출제된다.
[1] 중국 푸젠성 우시현.[2] 그 당시 나이로 보면 아주 장수한 것 이다.[3] 돈옹으로도 읽는다. 遯자는 강희자전, 설문해자 등에 '둔'과 '돈'의 발음 모두를 갖고 있고, 주역전의대전에 의하면 둘 모두 '은둔'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왜 주역전의대전이 전거가 되는고 하니, 주역의 33번째 괘 이름인데 그 자체가 은둔의 의미를 갖는다. '遯翁'이란 말은 역시 '은둔한 노인'이라는 뜻이다. 김장생, 김집 부자가 강학하던 곳에 세워진 돈암서원 또한 같은 의미이다.[4]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도 불리운다. 다만, 발원지 중국에서는 정주학程朱學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주희의 철학에 큰 영향을 준, 북송대의 유학자인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주희와 아울러 이르는 것.[5] 동진 시대의 습착치가 한진춘추를 저술하면서 촉한정통론을 내세운 사례가 있긴 하다.[6] 역사서가 아니고 사서삼경의 사서다.[7] 대학 주석은 특히 주자 학설의 근본 얼개이자 정수라 할 수 있다.[8] 전통문화연구회에서 예기 대학편, 중용편을 내긴 했다. [9] 사실 주희 철학의 근본은 불교와 도가의 비판이다. 그러나 정작 주자학을 비롯한 신유교는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理)를 본질적 근원을 뜻하는 것으로 쓴 것도 본래는 화엄학 쪽에서 쓰던 표현 중 하나였다.[10] 물론 조선도 강화학파 등 양명학을 연구하는 학파가 있었으나 이는 비주류에 가까웠다.[11] 사실 증자의 경우 주자 이상으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라 쉴드치기를 포기했지만, 맹자를 포기하게 되면 유교와 인본주의의 연결고리가 통째로 없어져버린다.[12] 송재윤, "전부의 공공 철학 - 토지의 소유와 분배에 관한 12~13세기 중국의 경세 담론"[13] 나무 막대기 세 개를 평행하게 줄로 이은 후 이 사이에 죄인의 발목을 넣고 조르는 고문으로 바로 이 고문 방식이 훗날 조선에 유입되어 주리틀기로 변모한다.[14] 그러나 이것은 주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