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 개요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경주시 낭산 동북쪽의 구황동에 위치한 황복사터에 있는, 전체 높이 7.3m의 화강암제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효소왕 원년인 692년에 세워졌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1942년(또는 1943년)에 있었던 본 석탑의 해제, 수리 중에 발견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의 금동제 사리외함 내부에 남아 있는 명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현재 황복사터에는 본 삼층석탑 외에는 비석받침인 귀부 2기[1] 와 주춧돌, 당간지주 일부 정도만 남아 있고 절터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다. 하지만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에서 '황복(皇福)', 혹은 '왕복(王福)' 이라는 명문[2] 이 발견되었고,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주 낭산 동쪽 기슭에 황복사가 있었다고 하기에 여기가 황복사터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황복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인 652년에 의상대사가 출가한 사찰이며, 황복사에서 경문왕의 화장을 치뤘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위가 높은 사찰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3]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국보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기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은 낮게 하고 1층의 몸돌을 크게 해놔서 다소 둔한 느낌이지만, 위로 올라 갈수록 몸돌과 지붕돌의 크기가 차츰 줄어들어 비례감과 안정감을 준다. 각 층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형 장식을 양각으로 새겨놨으며, 지붕돌의 하단에는 5단으로 이루어진 역계단형 받침 장식이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기단과 몸돌에 약간 소실된 부분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하지만 본 석탑도 현전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처럼 삼층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소실되어 없으며 머리장식 받침 정도만이 남아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제작 양식에서 이전의 석탑들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이전 양식은 몸돌과 지붕돌을 여러 돌을 짜맞추어서 조합하는 방식이었다면 본 석탑은 하나의 돌을 통채로 깎아서 만들었다. 이러한 차이는 석탑의 크기가 작아지는 점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지만 본 석탑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나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과 비교해보면, 크기 면에서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9m,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은 13.4m의 거대한 석탑이기에 탑을 이루는 부재들을 하나의 거대한 돌로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여러 조각들을 짜맞추는 방식으로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7.3m로 크기가 확연하게 줄었으며 이에 따라 굳이 조각들을 결구시킬 필요 없이 하나의 석재로 하나의 부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볼 때,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처럼 신라의 석탑 건축 양식이 변화하고 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여타 다른 신라의 석탑들과는 다르게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인 1942년(자료에 따라 1943년으로 나오기도 한다)에 있었던 석탑의 해체, 수리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덕분이었다. 본 석탑의 2층 지붕돌에 안치되어 있던 금동제 사리외함, 사리병, 황금제 불상 2구,[4] 금제 및 은제 고배, 금제방형합, 은제방형합, 유리판, 유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5] 사리장엄구 유물 가운데 금동제 사리외함의 뚜껑 내부에는 장문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명문에 따르면 692년 신목태후(신문왕의 왕후)와 효소왕이 승하한 신문왕을 위하여 본 삼층석탑을 건립하였고, 이후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이 불사리 4과와 순금 아미타불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안치하였다고 한다.[6] 여기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692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본 석탑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건립 목적이 확인된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대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잘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보임과 동시에 석탑 양식의 변화 과정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점, 사리장엄구를 통해 석탑의 건립연대와 건립목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 등의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이 인정 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7호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 한국 미의 재발견 - 탑 : 경주 황복사지삼층석탑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 두산백과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4. 국보 제37호
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2년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 거북이 머리의 목은 잘려 있으며 비석 본체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주변에서 비석 조각이 총 12편이 수습되긴 하였다. 물론 일부만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어서 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출처 : 황복사비편[2] 출처 : ‘왕복’명 암키와[3]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황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 황복사터[4] 본 황금제 불상 2구는 불교 문화재로서의 뛰어난 가치를 인정 받아 각각 국보 제79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국보 제80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으로 지정되었다.[5] 이는 특이한 경우로 일반적으로는 탑신이나 탑의 주춧돌인 심초석에 사리장엄구를 안치한다.[6]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 탑 : 경주 황복사지삼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