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

 


'''시호'''
'''경문대왕(景文大王)'''
'''존호'''
'''국왕(國王)'''[1]
'''성씨'''
김(金)
''''''
응렴(膺廉) / 의렴(疑廉)
'''왕후'''
영화부인 김씨, 차비 김씨
'''왕태자'''
김정(金晸)
'''왕자'''
[2], 김황(金晃), 김윤(金胤)[3]
'''왕녀'''
대랑(大娘)(?)[4], 김만(金曼)
'''형제'''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5], 김위홍(金魏弘)
'''부왕'''
의공대왕(懿恭大王) 김계명(金啓明)
'''모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김씨[6]
'''생몰년도'''
음력
843년 혹은 846년 [7] ~ 875년 7월 8일
'''재위기간'''
음력
861년 1월 30일 ∼ 875년 7월 8일 (14년 181일)
1. 개요
2. 즉위 이전
3. 치세
4. 설화
5. 궁예의 친아버지?
6. 일본 기록의 870년 대마도 정벌 준비?
7. 창작물
8.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신라의 제48대 국왕. 제43대 희강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아찬직에 있었던 김계명(金啓明)이다. 희강왕이 헌안왕의 아버지인 김균정왕위 쟁탈전을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특이한 사실.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팔공산에 3층 석탑을 만드는 등 과거에 처절했던 왕위 쟁탈전의 앙금을 봉합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다.

2. 즉위 이전


김예영
미도부인
박충연
김인겸
성목태후
김헌정
포도부인
김예영
미도부인
김충공
귀보부인
김헌정
포도부인
김충공
귀보부인
김균정
정교부인
김○명
김예영
미도부인
김충공
귀보부인
'''43대 희강왕'''
문목왕후
'''45대 신무왕'''
정종태후
김균정
조명부인
김계명
광의왕태후
'''47대 헌안왕'''
헌안왕비
'''48대 경문왕'''
영화부인 김씨
왕이 되기 전에는 화랑으로 활동했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18세에 국선에 임명되기도 했다.
경문왕이 헌안왕의 두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전해지고 있다. 헌안왕은 딸만 둘이고 아들을 두지 못했다. 헌안왕의 사망 기사를 보면 과거 선덕여왕진덕여왕여왕이 있었으므로 헌안왕의 딸을 여왕으로 올리자는 여론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헌안왕이 유교적 관점[8]에 의하면 잘못된 것이므로 본받을 수 없다고 고사하였고 대신 왕족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860년 9월 별궁인 임해전에서 신하들과 귀족들을 모이게 했다. 이때 헌안왕은 김응렴에게 "착한 사람을 본 적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김응렴은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임에도 남을 대할 때 자신을 낮추는 사람, 재물이 많은 부자였으나 사치 대신 절제를 덕으로 여기는 사람,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은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라는 답을 했다.
답변을 듣고 마음에 든 헌안왕은 사위를 삼기로 마음먹고 김응렴에게 "딸이 2명이 있는데 큰 딸은 20살이고 작은 딸은 19살이다. 그대가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한다. 자리에서는 곤란해한 김응렴은 집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언니가 여동생보다 못생겼다는 소문이 있는데 여동생에게 장가를 가는게 안 낫겠니?"라는 답변을 듣는다. 그 말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해 흥륜사(興輪寺)의 스님[9]에게 가서 다시 1번 고민을 말하니 스님은 "언니에게 장가를 들면 3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여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3가지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주었으나 그래도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김응렴은 헌안왕에게 가서 "제가 감히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겠사오니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말을 했고 왕은 김응렴에게 첫째 딸을 시집보냈다.[10] 이렇게 김응렴을 사위로 삼은 헌강왕은 훗날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제48대 경문왕이다.
훗날 경문왕이 영화부인 김씨의 여동생 차비 김씨까지 2번째 왕비로 받아들이게 되고 흥륜사의 스님에게 찾아가 "그 때 말한 3가지 이익이 뭐냐?"고 묻자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시에 왕과 왕비가 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여서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이로움입니다.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되었으니, 이것이 2번째 이로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부터 원하던 둘째 딸을 취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3번째 이로움입니다.”[11]

[12]

'''《삼국사기》'''


3. 치세


위와 같이 본인은 꽤 명석한 면이 있었는지 몰라도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엔 재위 기간 동안 역병, 지진, 홍수, 흉년과 같은 재난이 심심찮게 터져나왔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진골 귀족들이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각종 모략을 꾸미는 등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수준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즉위 6년(866년)엔 이찬 윤흥(允興)과 그의 아우 숙흥(叔興), 계흥(季興)이 모반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즉위 8년엔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이 모반죄로 처형, 즉위 14년엔 이찬 근종이 반란을 일으켜 대궐을 점했다가 근위군에게 격퇴되어 거열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난장판을 무난히 수습하고 과의 외교 관계도 정상 궤도에 올리는 등 난세에 보위에 오른 것 치곤 무난한 치적을 쌓았다.
영화부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순서대로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이 되었다. 셋 모두 젊은(혹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하나같이 요절했다. 그나마 제일 오래 산 진성여왕이 사망 당시 30~34세로 추정되니... 삼형제가 모두 왕이 된 것도 한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케이스인데 더욱이 삼남매가 왕이 된 건 세계사로 범위를 넓혀도 굉장히 드물다. 굳이 따지자면 에드워드 6세-메리 1세-엘리자베스 1세의 삼남매 계승 정도? 경문왕의 3남매는 암군이라고 까이는 경우는 있어도 계승 과정에서 별로 싸운 것 없이 순서대로 즉위했으니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듯.[13]
다만 고려는 이런 일이 의외로 있었는데 태조(혜종, 정종, 광종 )와 현종(덕종, 정종, 문종), 문종(순종, 선종, 숙종 )도 아들 셋이 모두 왕을 했다. 인종의 경우 아들 다섯 중 셋(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이쪽은 무신정권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갈린 케이스. 고려는 훈요십조에서 형제 계승이 가능하다고 명문화했기 때문인지 사례가 많은 편이다.] 궁예도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니 이것까지 치면 네 명의 자녀가 왕이 되었다.
사실 실패한 개혁 군주인 측면도 있기에 그에 대한 긍정적인 연구도 많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국학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으며 당나라에 국비 유학생까지 파견해 인재 등용의 폭을 넓히고서 이들을 왕의 친위 세력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귀족들의 반란을 제압한 것도 경문왕이 그리 녹록치 않았던 인물임을 보여준다. 후술된 《삼국유사》의 뱀들은 사실은 경문왕이 육성한 친위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망해 가는 나라에서 뭔가 해 보려고 노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고려공민왕이나 조선흥선 대원군 포지션에 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4. 설화


경문왕에 관련해서는 민간에 기록된 기담이 여럿 남아있어 상당히 주목받는다.[14]
1) 위에서 설명한 헌안왕 시절 공주를 얻게 되는 이야기.
2) 뱀에 관한 설화가 전해져 온다.

왕의 침전에는 날마다 저녁 때면 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쫓으려 하니 왕은 말히기를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잘 수가 없으니 쫓지 말라.'''" 했다. 왕이 잘 때에는 늘 뱀들이 혀를 내밀어 온 '''가슴'''을 덮어 주었다.

'''《삼국유사》'''


3) 무엇보다도 경문왕 관련된 설화 중에 유명한 설화가 바로 귀에 대한 설화로 이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한국판'''이 된다.[15]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 그러나 왕후와 궁인들 모두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직 두건을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속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나무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

그 후로 바람이 풀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

왕이 이 소리를 싫어해서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면 다만 이러한 소리만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삼국유사》'''


5. 궁예의 친아버지?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친아버지였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 중 하나로 거론되는 인물. 선왕 헌안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는데 큰 지지를 받는 학설은 아니다. 궁예는 헌안왕 부친설보다는 경문왕 부친설이 상대적으로 더 지지를 받고 있는 편. 사극 태조 왕건 역시 경문왕 부친설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궁예에 대한 혈통 논란은 이렇다 할 정설이 없는 논란거리라는 것은 염두에 둘 것. 자세한 것은 궁예 문서를 참고. 그리고 견훤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왕의 재위기다(867년).

6. 일본 기록의 870년 대마도 정벌 준비?


한국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사건이나, 일본삼대실록에서는 경문왕 치세인 870년, 대마도 사람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卜部乙屎麿呂)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 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고 있었고,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 대비했다고 한다.
다만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신라에서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그런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당시 신라구 해적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혔고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구들의 해적 기지였을 가능성도 꽤 높다. 훗날 일본에 붙잡힌 신라 해적 현춘도 신라 왕이 명령해 출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7. 창작물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본래 신라 유명 가문 화랑들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화랑 범교[16]가 밀어준 끝에 헌안왕의 딸인 공주 두 명 중에서 첫째와 정략결혼을 선택해 왕이 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경문왕은 화랑으로서는 유능했으나, 임금 자리에는 맞지 않은 인물이었고, 항상 왕비들에게 휘둘리는 처지였다. 내레이션에서도 '당나귀 귀' 설화를 줏대없는 그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정무는 제쳐놓고 떠돌며 방황하던 중 지나가던 여염집 아낙을 만나 왕궁에 데려가 하룻밤을 보내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바로 궁예.''' 처음에는 점을 보는 일관이 그 왕자가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언[17]하면서 동시에 화근의 씨앗을 없애야 한다고 하자 분노해 일관을 내보냈지만 이후 신하들과 일관이 합심해 아이를 내치라 낮, 밤 가리지 않고 의견을 굽히지 않자, 왕은 "어찌할꼬..."라는 말만 되뇌인다. 미리 왕비들에게 부탁받고 그들의 편에 선 동생 김위홍은 이미 두 분의 왕자가 있으니 아이를 내치라는 신하들과 문의왕후(영화부인)의 뜻을 받들자고 하자, 경문왕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따지고 동생마저 자기 편이 아니자 왕자리가 싫었던 걸 자괴감으로 밝히지만, 모자의 목숨만은 빼앗지 않는단 걸로 반수긍을 한다. 결국 김위홍은 독단적으로 일을 저질러 왕의 뜻과 반대로 궁예의 친모와 유모, 궁예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범교가 도와준 덕분에 유모와 궁예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수십년 뒤, 고려국 임금 궁예는 순행길에 허월의 추천을 받아 한 신라 왕의 영정이 걸려 있는 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경문왕의 영정이었고, 분노한 궁예는 영정에 칼빵을 놓는다. 판타지 요소가 많은 태조 왕건에서도 유독 이 장면은 초현실적이면서도 호러스런 연출을 보여주는데, 칼을 맞은 자리에서 '''붉은 피까지''' 흘러나온다. 궁예에게 있어서 경문왕은, 줏대 없이 남의 말에 휘둘리다가 갓난아기인 아들을 버린 비정한 아비일 뿐이었다. 이 사건 직후 궁예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신라를 '멸도(滅都, 멸해야 할 도읍)'라 부르겠다고 선포했다. 게다가 궁예가 하도 깊게 꽂아 안 빠지는 칼을 왕건이 쉽게 뺀 것도 심상치 않은 뒷소문을 불러왔고, 간접적으로는 궁예가 흔들림 없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이후 궁예의 행보를 엇나가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그날 밤, 궁예는 성불하지 못한 경문왕의 원혼이 찾아오는 악몽을 꾼다. 경문왕 말로는 궁예가 영정에 칼빵을 놓으면서 자신의 영혼은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훗날 독화살을 맞은 궁예가 사경을 헤멜 때, 꿈에서 경문왕의 원혼이 양길과 미향 부녀의 원혼과 함께 또다시 등장했다. 궁예가 자신을 대놓고 죽이려 한 숙부 김위홍에겐 증오심보다는 한심함을 느꼈으며, 궁예가 분노를 보이는 대신 대놓고 위홍을 조롱했다는 걸 감안하면, 궁예에게 경문왕은 큰 트라우마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왕자 태생이라는 점에서도, 속세의 혈육이라는 점에서도, 자기 인생 비극의 시작이라는 점에서도 미륵임을 자처하는 궁예에게는 평생을 두고 떨쳐내고자 했던 만악의 근원.

8.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경문왕 본기'''
一年春二月 경문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죄수를 크게 사면하다
二年春一月 이찬 김정을 상대등, 위진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秋七月 견당사를 보내다
二年秋八月 견당사 부량 등 일행이 익사하다
三年春二月 왕이 국학에 행차하다
三年冬十月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다
三年冬十一月 눈이 내리지 않다
三年 영화 부인을 얻은 세 가지 유익함을 논하다
四年春二月 감은사에 행차하다
四年夏四月 일본국 사신이 오다
五年夏四月 에서 왕을 책봉하다
六年春一月 왕의 부모와 부인 그리고 왕자 정을 책봉하다
六年春一月十五日 황룡사에 행차하고 백관에게 잔치를 베풀다
六年冬十月 이찬 윤흥 형제가 모반하다 발각되어 멸족되다
七年春一月 임해전을 중수하다
七年夏五月 서울에 전염병이 돌다
七年秋八月 홍수로 곡식이 익지않다
七年冬十月 10도에 사신을 보내 위문하다
七年冬十二月 객성이 태백성을 범하다
八年春一月 이찬 김예[18]와 김현이 모반하다
八年夏六月 벼락이 쳐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
八年秋八月 조원전을 중수하다
九年秋七月 왕자 소찬 김윤을 당에 보내 물품을 진상하다
十年春二月 사찬 김인이 당에 가서 숙위하다
十年夏四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夏五月 왕비가 죽다
十年秋七月 홍수가 일어나다
十年 눈이 내리지 않고 백성이 질병에 걸리다
十一年春一月 황룡사 탑을 고쳐 세우도록 명하다
十一年春二月 월상루 중수하다
十二年春二月 왕이 신궁에 제사지내다
十二年夏四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二年秋八月 황충이 곡식에 해를 입히다
十三年 구휼책을 시행하다
十三年秋九月 황룡사 탑이 완성되다
十四年春一月 시중 위진을 상대등에, 인흥을 시중으로 삼다
十四年夏四月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와 유지를 선포하다
十四年夏五月 이찬 근종이 반역을 꾀하다 죽다
十四年秋九月 월정당을 중수하다
十四年 최치원이 당에서 과거에 급제하다
十五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五年 혜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十五年夏五月 이 왕궁 우물가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十五年秋七月八日 경문왕이 죽다
[1] 민애대왕석탑사리합기 기록.[2] 삼국유사 왕력편 기록. 물론 굉장히 뜬금없어서(...) 일반적으로는 무시되고 있다.[3] 가왕자로 추정[4] 868년에 세워진 전남 담양 개선사지 석등의 명문에 기록되어있다. 이 인물이 누구인지 불분명해서 역사학자들의 여러 추측이 있는데, 대랑(大娘)을 '큰 딸'로 번역해서 경문왕의 장녀인 진성여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경문왕의 차비 김씨로 보는 견해도 있다.출처[5] 경문왕의 누나이다. 호칭이 장옹주(長翁主)인 걸 봐선 김계명의 장녀로 추정. 봉암사지증대사탑비에 의하면 864년 남편을 잃고 단월(檀越)이 되었다. 원주시 부론면에 소재하는 현계산(賢溪山) 일대를 영지로 두고 있었으며 그녀가 영지를 불교계에 공헌하자 그 자리에 안락사가 세워진다.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에서도 등장하는데 진성여왕의 명으로 실상사에 수철화상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6] 신무왕의 딸[7] 843년 혹은 846년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안왕 4년(860년)에 나이 15세로 헌안왕의 연회에 참석하여 사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이 일이 18세 때 있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8] 서경을 인용하였다.[9] 이때 경문왕에게 3가지의 이로움을 알려주었다는 사람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흥륜사의 스님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낭도 중의 우두머리인 범교사라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10] 여담이지만 경문왕의 1번째 부인은 870년 5월에 죽었다.[11] 당연하겠지만 둘째 딸과 먼저 결혼했다면 첫째 딸을 처분(...)하지 못한 왕의 총애도 얻지 못하고 첫째 딸에게 밀려 왕위를 잇지도 못했을 것이며 왕위를 잇기 위해 첫째 딸을 왕비로 들일수도 없었을 것이다.[12] 참고로 둘째 딸과 먼저 혼인했다면 첫째 딸의 부마나 첫째 딸이 여왕으로 즉위할 확률이 높았다. 헌안왕이 아들이 없다고 한 대목을 보면 선덕여왕진덕여왕이 여왕으로 즉위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본받을 것이 되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 헌안왕영화부인 김씨를 직접 즉위시키는 것 또한 고려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고 여차하면 실제로 실행에 옮겼을 수도 있다. 헌안왕이 후궁과의 사이에서 본 아들이 한 명 더 있었지만 이쪽은 아예 옵션에도 못 꼈던 모양.[13] 아이러니하게도 윗동네인 발해강왕의 아들들인 정왕, 희왕, 간왕이 모두 왕 노릇했다. 물론 이쪽은 '''형제들끼리 치고박았다는 설'''도 있다.[14] 비슷하게 설화가 많이 남아있는 신라 왕으로 소지 마립간이 있다.[15] 참고로 이 설화를 경문왕의 우유부단하고 줏대 없는 성품을 반영한 것이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며, KBS의 대하 사극 태조 왕건에서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16] 위에 언급된 흥륜사나 범교사의 중이 모티브가 된 인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후 화랑에서 은퇴한 뒤 승려가 된다.[17] 사실 이는 원래 점괘를 안 문의왕후(영화부인)의 압력과 협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경문왕에게 원래 점괘와 다르게 조작해서 말한 것이었다.[18] 문성왕의 사촌동생으로 한자가 銳인데, 이를 당시에 발음이 통용되던 乂로 바꾸면 이름이 '''궁예가 된다.''' 궁예헌안왕의 서자라는 설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미심쩍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