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시게루
1. 개요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
별명은 '''비극의 영웅(悲劇のヒーロー).''' 논란의 트레이드에 휘말려 이후의 선수 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2. 선수 시절
2.1. 프로 데뷔 이전, 사회인 야구 시절
초등학생 때는 소프트볼 선수였다가, 중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 오버핸드에서 사이드암 투수로 변신했다.
원래는 고교 졸업 후 칸사이대학 야구부로 진학하려 했으나, 간사이대학 측에서 체육특기생 제도를 갑자기 없애버리면서 진로가 붕 뜨고 만다. 이제 와서 프로야구에 지명을 받을 수도 없었고, 다른 대학으로 가기에도 타이밍이 늦은 상태였는데, 자신에게 간사이대학의 입학을 권유했던 선배의 추천으로 1971년 다이마루에 입사한다.
그렇게 사회인 야구 리그에서 1년간 뛰다가 드래프트 참여를 권유받는다. 킨테츠 버팔로즈, 난카이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세 팀이 관심을 보였지만, 고바야시는 우선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프로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킨테츠와 난카이는 이 반응을 보고 고바야시의 지명을 포기했고, 요미우리 또한 고바야시를 6순위라는 후순위에 지명했다.
1972년 다이마루는 도시대항야구대회 본선에 올랐으나 1차전에서 패하고, 고바야시는 그 후 자신의 지명권이 남아 있었던 요미우리에 입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실 이 당시 지명권의 유효기간은 1년이라 조금만 더 버티고 이 해 드래프트에서 상위 지명을 받는다는 선택도 할 수 있었지만[1] 고바야시 본인이 요미우리 팬이라 그냥 입단한 것.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입단 후 1년간은 2군에서만 있었고, 2년차인 1973년 9월에 1군으로 콜업. 그리고 74년까지 불펜 투수로 뛰다가, 1975년부터 서서히 선발 투수로 전향한다.
전성기는 1976년부터. 1976년 43경기(29선발) 217.1이닝 18승(2위) 8패 2세이브 방어율 2.99(2위), 1977년 42경기(30선발) 216.1이닝 18승 8패 7세이브 방어율 2.92를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에이스가 되었고, 1977년에는 사와무라상도 수상한다. 팀도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 일본시리즈에 진출한다. 다만 이 두번의 일본시리즈에서 고바야시 시게루가 불을 질러버리면서(...)[2] 일본시리즈 우승은 달성하지 못한다.[3]
1978년에는 전 해 너무 달린 탓인지 43경기(31선발) 191.1이닝 13승 12패 방어율 4.03이라는 살짝 떨어진 성적을 기록. 뭐 그래도 출장 경기수나 소화이닝이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직전 해 사와무라상 수상자기도 해서 요미우리의 에이스 자리가 위협받을 일은 없겠구나 싶었는데, '''미국에서 유학 마치고 돌아온 괴물 신인 때문에 두고두고 손해를 보게 되었다.'''
2.3. 공백의 1일
자세한 것은 에가와 스구루 항목으로.
1978 시즌 후, 일본프로야구는 평소대로 드래프트를 진행했는데, 요미우리에 입단하고 싶었던 에가와[4] 는 드래프트 제도의 헛점을 이용하여 드래프트 전날(11월 20일) 요미우리와 번외계약을 체결한다. 문제는 앞서 말한 드래프트 제도의 헛점(드래프트 대상의 범위)을 개선한 새 규약이 드래프트 당일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던 것. 이 때문에 센트럴리그 사무국은 번외계약이 무효라고 통보했고, 에가와는 드래프트에서 한신에 지명된다. 그러나 에가와와 요미우리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5] , 일본프로야구기구는 12월 21일 중재안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일단 한신이 에가와와 계악하고 1월 31일까지 한신이 요구하는 선수와 에가와를 트레이드할 것.'''
한신은 처음에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고 트레이드 협상을 진행했는데, 여기서 한신이 요미우리의 에이스 고바야시를 트레이드 대상으로 요구한다. 요미우리는 이를 '''바로 승낙한다.''' 요미우리는 고바야시를 1월 31일 내내 설득했고, 고바야시는 트레이드를 계속 거부하다(앞서 밝혔듯이 고바야시는 요미우리 팬이었다.) 결국 받아들인다. 2월 1일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고바야시는 최대한 담담하게 심중을 표현했지만, 속으로는 요미우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옛 동료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6] 쫓기듯이 한신으로 떠나야 했다.
2.4. 한신 타이거스 시절
2.4.1. 1979년
트레이드에 있어 지금보다도 훨씬 부정적인 시각이 강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고바야시는 요미우리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고, '''"요미우리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 '''"나를 버린 것을 후회하게 하겠다"'''라는 생각으로 1979 시즌을 맞이한다. 당시 한신 감독에게 자기의 선발 로테이션을 요미우리전에 맞춰 짜달라고 했을 정도. 이렇게 복수심을 불태우며 요미우리전에 표적등판한 결과는 요미우리전 8연승. 시즌 성적도 37경기(36선발) 273.2이닝 22승 9패 1세이브 방어율 2.89로 데뷔 이래 최고 성적을 기록하고 사와무라상까지 획득하며 자신을 버린 요미우리를 단단히 후회하게 해 주는 듯 하였다.
그러나 고바야시 자신은 이 때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했다.
'''あの年に俺がやったことは野球選手として褒められたことじゃないんだよ。自分のためだけの野球をやっていたから。あんな事件があって、トレードで阪神に移って、悔しくてね。だから、『俺は生きるぞ、負けてなんかいないぞ』って主張したかった…それだけの野球。そんな野球は全然、駄目でしょ。チームより自分が先に立っていた…そんなのは、あざといだけの野球だよ。なのにファンもマスコミも俺が巨人に勝つたびに大騒ぎをする。世の中が、そんな風に動くのが嫌だった。『あんたら馬鹿か』と思いながら、それでも、俺は巨人に負けたくないと思って必死に投げていたんだ。結局、世間に踊らされていたんだよ、あの年の俺は。'''
그 해 내가 했던 행동은 야구선수로서 기릴 만한 건 아니었다. 자기만을 위한 야구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건으로, 트레이드로 한신으로 가고 나서, 분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살 거야, 지지 않을 거야"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것뿐인 야구. 그런 야구는 정말, 안 되겠지. 팀보다 자기를 먼저 앞세우고... 그런데도, 팬들도 매스컴도 내가 교진에게 이길 때마다 난리니.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싫었다. "니네들 바보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나는 교진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던지고 있었다. 결국, 세상에 놀아나고 있었던 거다, 그 해의 나는.
2.4.2. 선수 생활 후반
고바야시는 그 이후에도 별 일 없으면 200이닝 이상 먹어주고 2점대 후반 ~ 3점대 초반의 방어율과 10승 이상을 기록해 주는 한신의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1979년도와는 다르게 요미우리전에서의 결과가 나빠지고 있었다. 80년부터의 요미우리전 전적은 5승 15패. 특히 1980년 처음으로 자신의 트레이드 상대 에가와 스구루와 선발 맞대결을 펼쳤으나, 에가와가 9이닝 3실점을 기록한 데 반해 고바야시는 5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털린다. 고바야시 본인은 79년 이후로 요미우리전에 임할 동기가 사라졌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82시즌 후 그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83년에 15승을 거두지 못하면 은퇴하겠다." 82년 성적이 조금 안 좋긴 했지만(27경기 163.1이닝 11승 9패 방어율 3.42) 은퇴를 불사할 성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를 그저 다음 시즌을 대비하는 자세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83년 최종 성적은 35경기(32선발) 209이닝 13승 14패 방어율 4.05. 15승을 거두지 못하자 약속대로 그는 은퇴를 선언한다.[7] 그가 은퇴 선언을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한신으로의 트레이드 때부터 갖고 있었던 팔꿈치 부상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트레이드 이후 야구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것.'''
'''こんなことを言っても仕方がないけれど、もし、あのトレードがなくて、ジャイアンツに残っていたとしたら、もっと長く現役を続けていただろうね。ジャイアンツにいたら35歳ぐらいまで、いや投げれる間はユニフォームを着ていたんじゃないかな。結局、あのトレードから、人の評価に振り回される僕の人生が始まった。自分のやりたいように生きていなかったね。周りの評価ばかり気にして、そんな自分が嫌で、つかれて、もう野球から離れたかったんだと思う。だから引退を決めた時、自分の野球人生を振り返ろうともしなかったし、感傷に浸ることもなかった。'''
이런 말을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만약, 그 트레이드가 없어서, 자이언츠에 남아 있었다면, 좀 더 길게 현역생활을 이어갔겠구나. 자이언츠에 있으면 35세 정도까지, 아니 던질 수 있는 동안에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 않았을까. 결국, 그 트레이드로부터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는 내 인생이 시작됐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는데 말이지. 주위의 평가에만 신경쓰는, 그런 자신이 싫었고, 피곤했고, 이제 야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은퇴를 결심한 때, 내 야구인생을 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감상에 젖지도 않았다.
3. 은퇴 이후
1984년부터 1996년까지 TBS, TV아사히에서 해설가로 활동한다. 1985년 일본시리즈에서 한신 타이거스가 우승할 때 축승회를 취재하다 한신 시절 동료인 가와토 고조가 그에게 맥주를 끼얹기도. 사실 은퇴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을 때라 동료라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해설자로 뛰던 중간에 카와카미 테츠하루로부터 신당 사와야카의 참의원 선거 후보로 나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비례 1번으로 출마했지만, 일본의 신생 정당이 그렇듯(...) 득표율 1%도 못 나오고 낙선하고 만다. 득표율이 저러니 공탁금이나 그 외 선거비용도 보전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타격을 크게 입고 만다. 결국 이것 때문에 파산신청을 한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는 킨테츠 버팔로즈 투수코치로 재직. 긴테츠는 1997 시즌에 파리그 3위, 2001 시즌에 파리그 우승을 차지[8] 했지만 사실 투수들의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9] , 때문에 리그 우승을 하고도 투수진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2001년 시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 후에는 아까 말한 한신 동료 가와토 고조의 소개로 골프장 지배인을 맡았다가 앞서 말한 이유로 파산신청을 하고 물러난다.
2007년에는 한국으로 건너와 SK 와이번스의 2군 투수코치를 맡기도 하다가, 2009년부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투수코치로 부임한다. 그러다 2010년 1월 17일, 스프링캠프를 불과 2주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레 사망하고 만다. 사인은 급성 심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