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가와 스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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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전직 프로야구 선수(투수)이다. 현재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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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엔 역사상 최강 투수'''
도치기 사쿠신가쿠인고교 시절부터 엄청난 초고교급 유망주였다. 최고 150km/h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강속구[2] 와 각이 큰 커브만으로도 '''괴물 에가와(怪物江川)'''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물론 이 괴물이라는 별명은 에가와의 대단한 실력 때문에 붙은 별명이기도 했지만, 당시 인기리에 방영중이던 애니메이션 괴물군(국내번안명 몬스터왕자 몽짱)의 주인공과 닮았기 때문이기도 해서 붙은, 이중적인 의미의 별명이었다.(...)
여튼 뛰어난 신인투수에게 괴물이란 별명을 붙이게 된 '''원조'''격 인물로, 뒤를 이어 괴물이란 별명을 받은 인물이 헤이세이의 괴물이라 불린 마쓰자카 다이스케, 3대 괴물은 사사키 로키.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의 별명도 이 에가와로 비롯된 신인에게 괴물이란 별명을 붙이는 야구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애초에 창작물에서 대단히 강한 인물에게 괴물이란 별명을 붙이게 된 클리셰는 이 에가와의 인기가 원조다.
고교 재학 중 '''노히트 노런 9번, 퍼펙트 게임 2번, 그 당시 고시엔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경신''' 등의 기록을 쏟아내며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전 고교 야구의 최강자로 불렸다. 그 중 백미는 1973년 고시엔 봄 선발대회.
고시엔 통산 성적은 6경기 등판, 4승 2패, 59와 1/3이닝, 탈삼진 92 (9이닝당 탈삼진 14.0), 평균자책점 0.46.
에가와가 재학 중 사쿠신가쿠인고교는 고시엔에 단 2번 출전에(1973년 봄선발대회 4강, 1973년 여름 전국대회 2회전) 팀 성적도 그리 빼어나지 않았는데도, 역대 고시엔 넘버원 투수로 에가와가 항상 언급될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고교 시절의 이런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1973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도쿄에 있는 어느 전국구 유명 팀에 가고 싶었던 에가와는 입단을 거부한다. 대학교에 가기 위해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했고, 그래도 에가와는 호세이대학에 진학하여 대학 생활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통산 47승(대학리그 통산 2위)을 하는 등 여전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대학 4학년인 1977년 다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1순위 지명을 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도쿄의 유명 팀에 가고 싶었던 에가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미국에서 2년간 있다가 1978년 11월 20일부로 세이부의 지명권이 소멸하자 '''돌아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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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캔들 중 하나.'''
좌측 2번째에 한신 타이거스(阪神)에 지명된 에가와 스구루의 이름이 보이고, 보이다시피 우측 3번째 요미우리 자이언츠(讀賣)의 지명만 빠져있다.[3]
1978년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는 11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에가와는 11월 20일에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귀국하자마자 요미우리와 접촉해 11월 21일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해 '''드래프트 규약이 바뀔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드래프트의 대상 선수는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 중인 자'''[4] 였으나 이것이 범위가 너무 좁다고 판단한 NPB는 1978년 7월 31일 드래프트의 대상 선수를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 규정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 규정의 '''적용일은 다음 드래프트 회의 당일부터'''였다. 즉 새 규정은 에가와가 입단체결을 할 시점에서 아직 적용이 되지 않았고, 에가와는 그 당시 미국에 유학 중이었기에 '''일본의 학교에 재학중인 자가 아닌, 다시 말해 드래프트 번외의 자유신분'''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요미우리가 덥석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센트럴리그 회장이었던 스즈키 류지는 이렇게 말장난하듯 법의 헛점을 이용해 빠져나가면 규칙을 제정하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계약이 무효'''라고 간주했고, 이에 반발한 요미우리는 다음날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하고 아예 그 해 신인선수 지명 자체를 하지 않았다.[5] 그리고 에가와는 드래프트에서 한신에 1순위로 지명된다.[6] 요미우리는 '''이러면 우리는 독자 리그를 만들겠다 '''라는 주장까지 하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일본 프로 야구 기구는 센트럴리그의 결정을 인정하여 드래프트의 효력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다만 일본 프로야구 기구는 일단 한신과 계약을 하고 요미우리로 에가와를 트레이드시키라는 입장이었고, 한신은 이에 반대하다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고바야시 시게루와 맞트레이드하게 된다.[7]
이 사건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옴에 따라 참의원까지 올라가서 관계자들이 해명해야 했으며,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의 주요 특징인 '''역지명 제도'''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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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들어가고 싶어한 요미우리에 들어간 에가와는 개막후 2개월까지 자숙하게 되었고 자숙이 풀린 6월 2일부터 1군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자신이 특급 유망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되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요미우리의 에이스. 1980년 다승왕, 1981년 다승(20승), 평균자책점, 승률, 탈삼진, 완봉의 5관왕을 하며 MVP를 수상. 이후에도 계속 13~19승 언저리를 달성하며 승승장구한다. 그런데 정작 사와무라상은 한 번도 타지 못했다. 1981년에 탈 수도 있었겠으나, 그 때는 팀 동료인 니시모토 다카시가 수상한다. 위의 공백의 1일 사건으로 인한 안티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한 예.[8][9]
그렇게 잘 나가고 있다가 1987년에 '''돌연 은퇴한다.''' 왜 돌연이냐면, 1987년 성적이 '''13승 5패 평균자책점 3.51...'''의 준수한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당연히 깜짝 놀랐고,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에가와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1983년 시즌에 에가와는 어깨 부상을 당한다. 물론 그 해 16승 그 다음해 15승 하면서 잘 나갔지만, 이 어깨 통증은 에가와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고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것. 은퇴는 1987년 봄부터 계획하고 있었고, 신인 때 9승 이후로 한 자리 승수를 올리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결심했다 한다. 1987년에는 일단 13승을 거뒀지만, 다음 해는 정말로 어찌 될지 몰랐다고 생각해 은퇴를 결정하였다.
은퇴 이후엔 야구 해설가/평론가로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그와 맞트레이드된 고바야시 시게루는 1979년 시즌에는 요미우리에 8승 무패를 거두며 '요미우리 킬러'로 활약했지만, 그 이후 요미우리와의 통산 전적 5승 15패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요미우리의 횡포에 한신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고바야시가 한신 이적 후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상술했듯 이적 첫 해인 1979년 22승을 거두고 사와무라상을 얻는 등, 고바야시가 한신에 재적했던 5년동안의 통산성적은 77승 56패 4세이브에 방어율 3.23의 훌륭한 성적으로 한신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팔꿈치 부상으로 1983년 시즌 종료 후 32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덤으로 고바야시의 통산성적은 139승 95패 19세이브로 에가와와 비슷하며 심지어 은퇴시즌이었던 1983년 성적도 13승 14패 1세이브, 방어율 4.05로 다소 부진한 면도 있지만 에가와와 마찬가지로(심지어 승수가 동일!) 은퇴시즌 치고는 나름 준수했다. 거기다 은퇴 이유였던 팔꿈치 부상조차 급작스레 생긴 부상이 아닌, 오랜 지병으로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에가와와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심지어 두자릿수 승수 못채우면(고바야시는 한술 더 떠서 '''15승 못하면 은퇴한다'''고 기자들에게 공언하기까지 했다) 은퇴하기로 결심했다는 점도 똑같다! 이래저래 악연이었던 두 사람답게(?) 유사점이 매우 많다.
여튼 두 선수는 은퇴 이후 '화해', '해후'를 컨셉으로 한 술 광고의 모델로 둘이 선택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2010년 고바야시가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자 에가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눈물로 젊은 날의 처신에 대해 다시 한번 사죄한 바 있다.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전직 프로야구 선수(투수)이다. 현재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 중.
2. 프로 입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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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엔 역사상 최강 투수'''
도치기 사쿠신가쿠인고교 시절부터 엄청난 초고교급 유망주였다. 최고 150km/h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강속구[2] 와 각이 큰 커브만으로도 '''괴물 에가와(怪物江川)'''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물론 이 괴물이라는 별명은 에가와의 대단한 실력 때문에 붙은 별명이기도 했지만, 당시 인기리에 방영중이던 애니메이션 괴물군(국내번안명 몬스터왕자 몽짱)의 주인공과 닮았기 때문이기도 해서 붙은, 이중적인 의미의 별명이었다.(...)
여튼 뛰어난 신인투수에게 괴물이란 별명을 붙이게 된 '''원조'''격 인물로, 뒤를 이어 괴물이란 별명을 받은 인물이 헤이세이의 괴물이라 불린 마쓰자카 다이스케, 3대 괴물은 사사키 로키.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의 별명도 이 에가와로 비롯된 신인에게 괴물이란 별명을 붙이는 야구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애초에 창작물에서 대단히 강한 인물에게 괴물이란 별명을 붙이게 된 클리셰는 이 에가와의 인기가 원조다.
고교 재학 중 '''노히트 노런 9번, 퍼펙트 게임 2번, 그 당시 고시엔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경신''' 등의 기록을 쏟아내며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전 고교 야구의 최강자로 불렸다. 그 중 백미는 1973년 고시엔 봄 선발대회.
고시엔 통산 성적은 6경기 등판, 4승 2패, 59와 1/3이닝, 탈삼진 92 (9이닝당 탈삼진 14.0), 평균자책점 0.46.
에가와가 재학 중 사쿠신가쿠인고교는 고시엔에 단 2번 출전에(1973년 봄선발대회 4강, 1973년 여름 전국대회 2회전) 팀 성적도 그리 빼어나지 않았는데도, 역대 고시엔 넘버원 투수로 에가와가 항상 언급될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고교 시절의 이런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1973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도쿄에 있는 어느 전국구 유명 팀에 가고 싶었던 에가와는 입단을 거부한다. 대학교에 가기 위해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했고, 그래도 에가와는 호세이대학에 진학하여 대학 생활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통산 47승(대학리그 통산 2위)을 하는 등 여전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대학 4학년인 1977년 다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1순위 지명을 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도쿄의 유명 팀에 가고 싶었던 에가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미국에서 2년간 있다가 1978년 11월 20일부로 세이부의 지명권이 소멸하자 '''돌아왔는데...'''
3. 공백의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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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캔들 중 하나.'''
좌측 2번째에 한신 타이거스(阪神)에 지명된 에가와 스구루의 이름이 보이고, 보이다시피 우측 3번째 요미우리 자이언츠(讀賣)의 지명만 빠져있다.[3]
1978년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는 11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에가와는 11월 20일에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귀국하자마자 요미우리와 접촉해 11월 21일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해 '''드래프트 규약이 바뀔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드래프트의 대상 선수는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 중인 자'''[4] 였으나 이것이 범위가 너무 좁다고 판단한 NPB는 1978년 7월 31일 드래프트의 대상 선수를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 규정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 규정의 '''적용일은 다음 드래프트 회의 당일부터'''였다. 즉 새 규정은 에가와가 입단체결을 할 시점에서 아직 적용이 되지 않았고, 에가와는 그 당시 미국에 유학 중이었기에 '''일본의 학교에 재학중인 자가 아닌, 다시 말해 드래프트 번외의 자유신분'''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요미우리가 덥석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센트럴리그 회장이었던 스즈키 류지는 이렇게 말장난하듯 법의 헛점을 이용해 빠져나가면 규칙을 제정하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계약이 무효'''라고 간주했고, 이에 반발한 요미우리는 다음날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하고 아예 그 해 신인선수 지명 자체를 하지 않았다.[5] 그리고 에가와는 드래프트에서 한신에 1순위로 지명된다.[6] 요미우리는 '''이러면 우리는 독자 리그를 만들겠다 '''라는 주장까지 하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일본 프로 야구 기구는 센트럴리그의 결정을 인정하여 드래프트의 효력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다만 일본 프로야구 기구는 일단 한신과 계약을 하고 요미우리로 에가와를 트레이드시키라는 입장이었고, 한신은 이에 반대하다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고바야시 시게루와 맞트레이드하게 된다.[7]
이 사건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옴에 따라 참의원까지 올라가서 관계자들이 해명해야 했으며,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의 주요 특징인 '''역지명 제도'''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4. 일본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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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들어가고 싶어한 요미우리에 들어간 에가와는 개막후 2개월까지 자숙하게 되었고 자숙이 풀린 6월 2일부터 1군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자신이 특급 유망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되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요미우리의 에이스. 1980년 다승왕, 1981년 다승(20승), 평균자책점, 승률, 탈삼진, 완봉의 5관왕을 하며 MVP를 수상. 이후에도 계속 13~19승 언저리를 달성하며 승승장구한다. 그런데 정작 사와무라상은 한 번도 타지 못했다. 1981년에 탈 수도 있었겠으나, 그 때는 팀 동료인 니시모토 다카시가 수상한다. 위의 공백의 1일 사건으로 인한 안티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한 예.[8][9]
그렇게 잘 나가고 있다가 1987년에 '''돌연 은퇴한다.''' 왜 돌연이냐면, 1987년 성적이 '''13승 5패 평균자책점 3.51...'''의 준수한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당연히 깜짝 놀랐고,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에가와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1983년 시즌에 에가와는 어깨 부상을 당한다. 물론 그 해 16승 그 다음해 15승 하면서 잘 나갔지만, 이 어깨 통증은 에가와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고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것. 은퇴는 1987년 봄부터 계획하고 있었고, 신인 때 9승 이후로 한 자리 승수를 올리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결심했다 한다. 1987년에는 일단 13승을 거뒀지만, 다음 해는 정말로 어찌 될지 몰랐다고 생각해 은퇴를 결정하였다.
은퇴 이후엔 야구 해설가/평론가로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5. 기타
- 1973년 한일 고교 친선경기 때 동대문야구장(당시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유대성[10] 에게 홈런을 얻어맞은 바 있다. 1980년대 단신으로 에가와가 한국 언론에 소개되면 꼭 언급되던 일화이다.[11]
- 원래는 손가락의 길이 문제로 커브 말고는 별다른 변화구가 없었지만 1985년부터 슬라이더를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 슬라이더를 고시히카리라 명명하고 던졌다. 그러다 고시히카리를 진짜로 선물받았고, 이것에 맛들린 에가와는 다음 변화구를 준비하는데, 그것은 바로 머스크 메론...
- '한신 킬러'로 유명하며, 한신과의 통산 전적 36승 18패를 남겼다. 이는 그의 통산 승수 135승의 약 ¼을 차지한다.
- 근육맨의 주인공 근육 스구루의 이름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뛰어난 명투수와 유명한 만화주인공하면 뭔가 멋져 보일 수 있는데, 사실은 초기에 에가와 스구루의 평이 안 좋았던 시기를 패러디한 작명이다. 이 당시 근육맨은 코믹 패러디물에 가까웠다. 그래서 스구루라는 이름은 코믹 요소였고, 이 이름을 알았을 때 근육맨은 상당히 마음에 안들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에가와 스구루가 성적을 내는 한편 근육 스구루도 열혈 근성물 주인공으로 성장했고, 에가와 스구루도 근육맨에 대해서 상당히 생각이 많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훈훈한 마무리.
- 2018년엔 그와 일생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니시모토 다카시의 전기를 그린 만화 '에가와와 니시모토' 가 인기리에 연재중이다. 여러모로 만화와 인연이 깊은 인물인 듯.
- 특이하게도, 요미우리 순혈 이며, 2018년 시점까지도 순혈자격을 유지하고 있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자격이 되는 몇 안되는 사람인데, 정작 요미우리 감독은 절대 승낙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 요미우리가 그렇게 순혈을 따지는 구단이고, 요미우리 감독 한 번 하겠다고 몇년이상 다른 팀은 쳐다도 안 보고 해설자로만 뺑뺑이도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다. 실제 2012년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후임 격으로 에가와를 수석코치로 임명하려 했지만, 에가와는 저 말을 하면서 거절했다. 아마도 아래에 하술할 고바야시 시게루의 사망으로 인한 쇼크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5.1.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관계
그와 맞트레이드된 고바야시 시게루는 1979년 시즌에는 요미우리에 8승 무패를 거두며 '요미우리 킬러'로 활약했지만, 그 이후 요미우리와의 통산 전적 5승 15패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요미우리의 횡포에 한신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고바야시가 한신 이적 후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상술했듯 이적 첫 해인 1979년 22승을 거두고 사와무라상을 얻는 등, 고바야시가 한신에 재적했던 5년동안의 통산성적은 77승 56패 4세이브에 방어율 3.23의 훌륭한 성적으로 한신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팔꿈치 부상으로 1983년 시즌 종료 후 32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덤으로 고바야시의 통산성적은 139승 95패 19세이브로 에가와와 비슷하며 심지어 은퇴시즌이었던 1983년 성적도 13승 14패 1세이브, 방어율 4.05로 다소 부진한 면도 있지만 에가와와 마찬가지로(심지어 승수가 동일!) 은퇴시즌 치고는 나름 준수했다. 거기다 은퇴 이유였던 팔꿈치 부상조차 급작스레 생긴 부상이 아닌, 오랜 지병으로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에가와와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심지어 두자릿수 승수 못채우면(고바야시는 한술 더 떠서 '''15승 못하면 은퇴한다'''고 기자들에게 공언하기까지 했다) 은퇴하기로 결심했다는 점도 똑같다! 이래저래 악연이었던 두 사람답게(?) 유사점이 매우 많다.
여튼 두 선수는 은퇴 이후 '화해', '해후'를 컨셉으로 한 술 광고의 모델로 둘이 선택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2010년 고바야시가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자 에가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눈물로 젊은 날의 처신에 대해 다시 한번 사죄한 바 있다.
[1] 공백의 1일 참조[2] 그 때는 아직 스피드건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을 때라 한다. 스피드건이 도입되고 나서 프로시절의 구속은 153km/h을 기록한 적이 있다. 보통 당시의 스피드건이 현재의 스탯캐스트/트랙맨 데이터에 비해 늦은 포인트에서 측정했기에 요즘 기준으로 쟀다면 조금 더 빠르게 나왔을 수도 있다.[3] 에가와의 이름이 적힌 종이의 오른쪽 옆 종이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1차 지명 선수를 적은 종이로, 종이에 적힌 인물은 2016년 시즌 도중부터 2018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을 역임한 모리 시게카즈다.[4] 이것도 1967년부터 변경된 것이었다. 그 전에는 일본 국적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나 김일융 입단 당시 요미우리가 한국 국적이라는 허점을 이용해 육성선수로 입단시키자 규정이 바뀐 것.[5] 원래는 2순위로 무려(!)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지명하려고 했다. 결국에는 1994년 FA로 요미우리에 제60대 4번타자로 입단하면서 선수시절 유일한 우승커리어를 추가했다.[6] 그래서 이 해 드래프트는 단 44명만 지명된 역대 최소 지명선수 드래프트란 기록을 갖고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아무도 지명하지 않았고, 당시 드래프트 규정(1975~1980)상 최대 4순위(4명)까지 지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7] 이 트레이드로 한신에 건너간 고바야시는 22승을 거두고 사와무라상을 차지한다.[8] 당시에도 이는 큰 사건이었고, 그 때까지 순수하게 기자단 투표로만 이루어졌던 사와무라상 선정에서 지금의 시상 기준을 정한 계기가 되었다.[9] 일본의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야구를 주제로 책을 여럿 쓸 정도로 야구팬인데(주니치 팬이다), 자전적 성격이 강한 "스무살 도쿄"에서 등장인물과 작가 본인이 20세이던 79년이 등장한다. 여기서 에가와가 얼마나 당시 욕을 먹었는지 나오는데, "전국민을 적으로 돌렸다"는 표현이 나오는가 하면 자이언츠 골수 팬인데도 에가와가 홈런 맞은 걸 좋아하는 아저씨도 나온다. 소설이긴 하지만 당시 작가가 체감한 79년 일본 야구 팬들 사이 분위기가 대충 그렇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다.[10] 당시 중앙고 재학중, 실업야구 포항제철 야구단에서 활약하다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되기는 했는데 입단하지는 않은 듯. 2000년대 초반 중앙고 감독을 역임했다.[11] 에가와의 일본 고교 통산 피홈런이 0개였기 때문에 이 홈런이 한일 양국에서 유명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