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카미 테츠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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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헌액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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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말년의 카와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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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No.16 '''
'''카와카미 테츠하루
(川上 哲治)
'''
'''생몰년도'''
1920년 3월 23일 ~ 2013년 10월 28일 (93세)
'''국적'''
일본 [image]
'''출신지'''
구마모토현 쿠마군 오오촌 (현 히토요시시)
'''출신학교'''
쿠마모토현립고등학교
'''포지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선수 경력'''
'''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 (1938~1958)'''[1]
'''지도자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1959~1960)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61~1974)'''
'''1941년 일본프로야구 MVP'''
스다 히로시
(도쿄 교진군)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 교진군)'''

미즈하라 시게루
(도쿄 교진군)
'''195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고즈루 마코토
(쇼치쿠 로빈스)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드래곤즈)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3년 일본시리즈 MVP'''
벳쇼 다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
(1950~1960)

<color=#373a3c> '''카와카미 테츠하루'''
'''(1961~1974)'''

나가시마 시게오
(1975~1980)

1. 개요
2. 현역 시절
3. 감독 시절
4. 이후
5. 관련 문서


1. 개요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이자 감독. 포지션은 1루수로 좌투좌타이다. 그리고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기록의 사나이'''로 불린다.
별명은 '''타격의 신(神)'''.

2. 현역 시절


고교야구 시절에는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고시엔 대회에서 두 차례 준우승했다.[2]193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하 거인)에 투수로 입단했지만 투수를 계속하지는 못하고 1루수로 포지션을 변환했고, 1939년 수위타자 자리에 오르며 거인의 주축선수로 도약하기 시작한다. 1943~1945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잠시 야구계를 떠나 있었지만, 이후 1946년 프로야구가 재개되며[3] 다시 복귀, 일명 '''빨간 배트'''로 불리며, 오시타 히로시의 푸른 배트와 후지무라 후미오의 장대 배트와 함께 전후 일본 프로야구의 열기를 주도하였다.
특히 그의 진가는 선구안에서 발휘하는데 1950년 '''559타수 29삼진''', 1951년 '''374타수 6삼진'''[4]이라는 경이적인 선구안을 보여주며 타격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맹활약한다. 그 외에도 1950년에는 사상 첫 개인통산 100홈런을, 1951년에는 3할7푼7리라는 최고타율 신기록을 수립.(이 기록은 1970년 장훈이 3할8푼3리로 경신했다가 다시 1986년 랜디 바스가 3할8푼9리로 경신한다.) 1956년은 사상 처음으로 개인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다.

3. 감독 시절


하지만 그의 '''먼치킨스러움'''이 돋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감독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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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이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니시테츠 라이온즈(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난카이 호크스(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4년 내리 일본시리즈를 내주고 1960년 시즌에는 만년 하위팀 다이요 훼일즈(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센트럴리그 우승을 뺏긴 후 감독직을 사임하자 후임으로 카와카미가 거인 감독이 되었으며, 스파르타 훈련과 취재진과의 접촉을 차단하여 정보유출을 방지하는 신비주의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이에 기자들은 카와카미의 이름을 따서 구 소련의 대 동유럽 정책에 빗대 '''철(哲)의 장막'''[5] 이라고 비아냥 대기도 했다. 그런 매스컴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카와카미는 엄청난 지도력를 발휘하여 14년의 감독생활 동안 무려 '''11번의 일본시리즈 우승'''[6]이라는 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 동안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시리즈 9년 연속 우승, 일명 V9'''이라는 대업도 남겼다.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 요미우리는 당대 최고의 강타자들을 보유했지만 카와카미 시절 요미우리의 전략은 수비와 주루, 작전에 방점이 찍힌 흔히 말하는 '일본식' 스몰볼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일본에서 스몰볼을 본격적으로 체계화하고 신화로 만든 이가 가와카미라 할 수 있는데, 1961년 감독으로 취임한 뒤 LA 다저스와 합동 스프링캠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저스 코치 출신의 알 캄파니스가 쓴 'The Dodgers' Way to Play Baseball'[7]에 감명받아 이에 기반한 체계적인 훈련을 실시했고 사인, 히트 앤드 런, 번트 시프트 등 당시 일본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전술들도 도입했다. 다저스가 브랜치 리키 단장 주도 하에 당시 야구계를 뒤흔든 여러 혁신의 선두주자로 여겨졌던 걸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야구 문물을 도입한 셈인데, 요미우리가 V9 성공가도를 걷자 다른 팀들도 이러한 모습을 벤치마킹하고 히로오카 타츠로, 모리 마사아키 등이 선수시절 V9의 경험을 토대로 지도자로서 성공을 거두며 스몰볼이 일본 야구의 지배적인 트렌드로 자리잡은 것이다.
덧붙여 장훈 선수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하며 그걸로 인해서 아무에게도 안 보여줬다는 어린 시절 모닥불에 심하게 데여 흉하게 망가진 오른손을 카와카미 에게만 보여줬고 카와카미는 "이런 손으로 어떻게 선수 생활을 했느냐" 며 눈물을 보였다고. 단 이러한 훈훈한 일화와는 별개로 후지타 모토시, 이나오 가즈히사 등 다른 야구계 원로들과 함께 새역모 지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74년 '''1866경기 1066승 739패 61무''' 라는 기록을 남기고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나는 영원히 요미우리 맨으로 남고 싶다"는 말과 함께 타구단의 감독 요청을 일체 거절하고 세상을 떠나는 날 까지 영원히 요미우리 맨으로 남았다.
하지만 카와카미도 감독 생활 중 흑역사가 하나 있었다. 1970년 신인 드래프트 1위로 요미우리에 지명된 좌완 투수 유구치 토시히코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카와카미와 2군 감독 나카오 히로시의 강한 질책에 시달린 끝에 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 에서 요양 중 1973년 3월 22일 병상에서 변사체로 발견된[8] 일명 '''유구치 사건'''에 대해 카와카미가 입장을 밝혔는데...

'''거인이야 말로 이번 사건의 진정한 피해자이다. 큰 돈을 들여 애정을 갖고 키운 선수 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성을 태운 교통사고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한 마디에 카와카미는 물론 요미우리는 매스컴의 맹 비난을 피할 수 없었고, 1973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가 지명한 선수 7명 중 무려 상위권(1~3위) 3명을 포함한 4명이 요미우리 입단을 거부하는[9][10]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등 요미우리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기도 했다. 결국 이 여파인진 몰라도 1974년 요미우리는 V10을 이루지 못하고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센트럴리그 우승을 허용. 더 안습인 것은 주니치와 게임차가 없이 승률에서 밀려 2위다(...). [11] 결국 카와카미는 그 해를 마지막으로 감독직을 그만두었다.

4. 이후


퇴임 뒤 1976~1992년까지 여름방학마다 <NHK 소년야구교실>에서 주임강사로서 어린 유망주들을 가르친 바 있으며, 1985년부터 <닛칸스포츠>에서 야구평론가도 맡았다. 2013년 10월 28일, 카와카미는 도쿄의 병원에서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 해 봄까지 카와카미는 노령임에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택에서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후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요양하던 중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했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1]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43~1945년은 휴식[2] 1936년 대회에서 준우승을 한 뒤 한신 고시엔 구장의 흙을 주머니에 담아가 모교의 운동장에 뿌렸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 고교야구에서는 고시엔 대회에서 패한 선수들이 구장의 흙을 가져가는 풍습이 있는데, 그 유래가 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3]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 외국인 최초 감독타이틀을 가졌었던 이팔룡.[4] 골드스타감독 겸 선수 '''츠보우치 미치노리'''가 1946년 393타수 6삼진, 그리고 다이에 스타즈의 사카자와 마사오가 1951년 363타수 6삼진으로 카와카미와 타이 기록을 공유하고 있다.[5] 철(鐵, 일본식 한자로는 鉄)의 장막과 발음이 동일('''테츠''')해서 나온 조롱.[6] 그것도 '''일본시리즈 패퇴 기록 없이 달성한''' 대기록이다. 당연히 승률도 '''100%'''다.[7] 다저스가 브루클린에 있던 1954년에 출판되었고, 1957년 정신과 의사이자 야구광이었던 우치무라 유시에 의해 '다저스의 전법'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일본에 소개되었다. 우치무라 유시는 무교회주의 기독교인으로 잘 알려진 우치무라 칸조의 아들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야구기구 제 3대 커미셔너를 지내기도 했으며 많은 야구서적을 번역했다. 커미셔너 재임 시기 대표적인 활동으로 무라카미 마사노리를 둘러싼 난카이와 샌프란시스코 사이의 이중계약 문제를 중재한 것이 있다.[8] 사인은 심장마비로 발표 되었지만 항간에는 자살설이 떠돌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사건이 현재까진 센트럴리그에서 마지막으로 현역 선수가 사망한 사례다. 이 이후로 현역 선수가 사망한 사례는 몇번 더 있었지만 전부 퍼시픽리그에서 나왔다.[9] 이 중 1위 지명자였던 코바야시 히데카즈는 현재까지 유일한 요미우리의 1위 지명을 거부한 선수로 남아있다. 코바야시는 그러나 프로에 가지 못하고 사회인야구에서만 뛰다가 모교인 아이치학원대학에서 감독을 역임했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아이치학원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10] 2위 지명자였던 쿠로사카 유키오는 3년 후 야쿠르트에 입단하지만 6년 동안 고작 50경기에 등판한 후에 27세로 은퇴했고, 3위 지명자 나카무라 유지는 1위 지명자 코바야시처럼 프로에 가지 않고 사회인야구에서만 뛰던 중 암에 걸려서 30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었다. 참고로 나카무라 유지는 고3 시절에도 도쿄 오리온즈의 7순위 지명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입단을 거부했던 5위 지명자 오니시 카즈오는 2년 후 킨테츠 버팔로즈에 지명됐으나(2순위) 6년 간 9경기에 등판하여 은퇴하고 배팅볼 투수로 몇년간 야구계에 남아있었다. 입단을 택한 4위, 6위, 7위 지명자는 모두 프로에서 실패했다. 이들 중에서는 4위 지명자 사코마루 킨지로만이 1군을 밟았는데, 프로에서 10년 동안 뛰면서 35경기에서 3안타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11] 당시 롯데가 미야기 현을 임시 연고지로 삼았으나 미야기 구장의 수용 인원이 모자라서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면 고라쿠엔 구장을 사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