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회인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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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会人野球
1. 개요
사전적 정의의 사회인 야구는 "사회인들이 참여하는 야구경기"를 뜻한다. 대한민국이나 대만에서는 "선수가 아닌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야구경기"를 의미하는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약간 의미가 다르다. 선수가 아닌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리그뿐 아니라, 일본야구연맹에 소속되어있고 기업의 관리를 받으며 운영하고 있는 사회인 야구리그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일본 야구계가 아시안게임에 내보내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인 야구 소속 선수들이 아닌 고교, 대학 야구부 출신으로 사회인야구 기업팀에 소속된 아마추어 선수들이다.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옛 실업야구 팀과 선수들을 상상하면 가장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도하 참사(야구)의 주역들 역시 이런 레벨의 사회인야구 소속 선수들이었다.[1] 90년대까지는 올림픽에도 사회인야구와 대학야구 팀이 중심이 된 아마추어 선수들이 대표팀으로 출장[2] 했으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프로 선수들 중심의 대표팀이 출장해왔다.[3] 그 외에 하를럼 베이스볼 위크등 마이너한 국제대회의 경우 사회인 야구 연합팀 혹은 단일팀이 출전하는 경우가 많다.
2. 역사
1878년 신바시 철도국의 철도관계자들이 꾸려서 만든 신바시 스포츠클럽(新橋アスレチック倶楽部)을 일본 최초의 야구팀이자 일본 최초의 사회인야구팀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신바시 사나가와에 보건장(保健場)이라는 운동장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는 일본최초의 야구장이라고 한다.
이후 사회인야구는 점차 성장을 거듭해 1927년에 출범된 도시대항야구대회(都市対抗野球大会)는 일본 최초의 실업야구대회로 규정되고 있다.
1951년에는 일본산업대항야구대회(日本産業対抗野球大会)가 창설되었고 1971년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全日本クラブ野球選手権大会)가 출범하면서 일본의 사회인 야구는 성장세를 이뤄나갔다.
3. 분류
- 기업팀 또는 회사등록팀(会社登録チーム)
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는 경식 야구팀. 옛 한국에 있던 실업야구에 해당한다. 해당 기업에서 선수를 선발해서 운영하며 당연히 월급도 받으면서 야구를 한다. 드래프트에서 원하는 팀에 뽑히지 않거나 혹은 지명되지 못 했을 때 입단하며, 대부분 경식야구 대회는 기업팀들이 싹쓸이하고 있기에 논란이 일기도 한다. NTT나 미쓰비시 같은 기업들은 각 공장별로 야구팀을 운영[4] 하고 있으며 이러한 다수 팀을 운영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때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기업별 1팀만 참가 가능하도록 룰을 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도시대항야구대회에 비하면 인지도가 시망이라(...) 결국 이 규칙은 사라졌다.
프로 지망생이 많은만큼 한 팀에서 오래뛰는 선수가 많지 않다. 100년 가까이 되는 일본의 사회인 야구리그에서 한팀에서 10년넘게 뛰면 기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20대 후반에 프로에 진출하는 노망주도 많다.[5] 오치아이 히로미츠, 노모 히데오, 후루타 아쓰야같은 일본 야구계 레전드들이 거쳐가기도 했으며 초노 히사요시나 후쿠도메 코스케처럼 "특정 구단(대체로 요미우리) 아니면 다 X까!"라며 자기가 원하는 팀에 지명될 때까지 버티는 경우도 간혹 있다. 역으로 프로의 러브콜을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사회인야구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프로 세계보다 최고 페이는 적어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인듯.[6] 은퇴 후에는 회사에서 직장인으로 일하게 되며 대부분의 회사는 선수로 뛸 때도 오전에는 회사 근무를 하고 오후에만 훈련 및 경기를 갖는다. 단 100% 이런 것은 아니다. 사회인야구 기업팀은 정직원으로 계약하는 선수와 계약직으로 계약하는 선수가 있는데, 보통 정직원으로 계약하는 선수는 오전에 회사 근무를 하고, 오후에 야구 연습을 해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야구를 때려치면 아예 회사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어 고용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계약직으로 계약하는 선수는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지만 야구를 때려치면 회사도 퇴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 프로를 노리는 선수들은 계약직을, 프로에 꿈이 없거나 프로에 갈 자신이 없는 선수는 정규직을 선호할 듯.[7] 월급은 초봉 30만 엔 정도에 일반적인 대기업 사원처럼 수당이랑 보너스 등이 들어온다고 한다. 또 대회에서 입상할 시 추가 보너스가 들어오기도 한다고. 일반적으로 프로에 가지 않고 사회인 야구에서 30대 중후반까지 꾸준히 야구를 하는 선수들의 경우 35~40만엔 까지 월급이 올라간다고 한다.
나무배트를 사용하고 대부분의 장비 및 규칙은 일본프로야구에 따르나 콜드게임이나 승부치기 제도[8] 가 도입되는 등의 독특한 규칙도 존재한다.
일본 드라마 루즈벨트 게임이 기업팀을 보유한 중소기업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간혹 프로에서 실패한 선수들이 여기 오기도 한다. 2018년 아시안게임 일본 국가대표 중 유일한 프로 출신인 호소야마다 타케시가 바로 이런 케이스. 이 선수는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학력도 나름 되고 야구 실력도 백업인생이더도 프로에서 나름 뛰었기 때문에 토요타 자동차 야구부에 정직원으로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9] 토요타에서 받는 연봉은 600만 엔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에서 활동하였던 스다 코타, 마츠모토 케이지로는 팀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은 후 JFE히가시니혼 경식 야구부에 입단하여 2019년 도시대항전 우승멤버로 활약하였다.
프로 지망생이 많은만큼 한 팀에서 오래뛰는 선수가 많지 않다. 100년 가까이 되는 일본의 사회인 야구리그에서 한팀에서 10년넘게 뛰면 기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20대 후반에 프로에 진출하는 노망주도 많다.[5] 오치아이 히로미츠, 노모 히데오, 후루타 아쓰야같은 일본 야구계 레전드들이 거쳐가기도 했으며 초노 히사요시나 후쿠도메 코스케처럼 "특정 구단(대체로 요미우리) 아니면 다 X까!"라며 자기가 원하는 팀에 지명될 때까지 버티는 경우도 간혹 있다. 역으로 프로의 러브콜을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사회인야구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프로 세계보다 최고 페이는 적어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인듯.[6] 은퇴 후에는 회사에서 직장인으로 일하게 되며 대부분의 회사는 선수로 뛸 때도 오전에는 회사 근무를 하고 오후에만 훈련 및 경기를 갖는다. 단 100% 이런 것은 아니다. 사회인야구 기업팀은 정직원으로 계약하는 선수와 계약직으로 계약하는 선수가 있는데, 보통 정직원으로 계약하는 선수는 오전에 회사 근무를 하고, 오후에 야구 연습을 해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야구를 때려치면 아예 회사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어 고용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계약직으로 계약하는 선수는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지만 야구를 때려치면 회사도 퇴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 프로를 노리는 선수들은 계약직을, 프로에 꿈이 없거나 프로에 갈 자신이 없는 선수는 정규직을 선호할 듯.[7] 월급은 초봉 30만 엔 정도에 일반적인 대기업 사원처럼 수당이랑 보너스 등이 들어온다고 한다. 또 대회에서 입상할 시 추가 보너스가 들어오기도 한다고. 일반적으로 프로에 가지 않고 사회인 야구에서 30대 중후반까지 꾸준히 야구를 하는 선수들의 경우 35~40만엔 까지 월급이 올라간다고 한다.
나무배트를 사용하고 대부분의 장비 및 규칙은 일본프로야구에 따르나 콜드게임이나 승부치기 제도[8] 가 도입되는 등의 독특한 규칙도 존재한다.
일본 드라마 루즈벨트 게임이 기업팀을 보유한 중소기업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간혹 프로에서 실패한 선수들이 여기 오기도 한다. 2018년 아시안게임 일본 국가대표 중 유일한 프로 출신인 호소야마다 타케시가 바로 이런 케이스. 이 선수는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학력도 나름 되고 야구 실력도 백업인생이더도 프로에서 나름 뛰었기 때문에 토요타 자동차 야구부에 정직원으로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9] 토요타에서 받는 연봉은 600만 엔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에서 활동하였던 스다 코타, 마츠모토 케이지로는 팀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은 후 JFE히가시니혼 경식 야구부에 입단하여 2019년 도시대항전 우승멤버로 활약하였다.
- 클럽팀(クラブチーム)
기업 활동의 일환으로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인 유시에 의해 운영되는 경식 야구 팀. 이중에서도 기업들이 컨소시움을 만들어 운영하는 팀도 있으며 유명인사가 팀원들을 모아서 운영하는 팀도 있다. 하나의 기업 소속팀이 아니다보니 월급이 없고, 오히려 팀에 참가비를 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다만, 후원회나, 지방자치단체등에서 후원금을 받는 팀도 있고, 여러 기업 사원들로 모인 컨소시엄 팀같은 경우는 각 회사의 지원금을 받는 경우도 있다. 아래 풀뿌리 야구와의 차이점은 일본야구연맹에 정식 등록되었으며, 따라서 일본 야구 연맹이 주최하는 3대 대회(도시대항, 일본선수권, 클럽선수권)에 출장할 수 있고, 연식을 주로 쓰는 풀뿌리 야구와는 달리 이곳은 무조건 경식 야구라는 점이 다르다.
단 특정 기업에서 만든 클럽 팀의 경우는 해당 기업의 직장인들이 모인 팀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선출'이 프로 드래프트를 노리고 이런 팀에 가기도 한다. 이 경우는 위에서 언급한 기업 팀 선수들과는 다르게 오전 오후를 모두 업무를 봐야 하고 휴일에만 연습을 할 수 있기에 환경이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풀뿌리 야구팀이랑은 다르게 야구를 계속하면서 돈도 벌고 프로도 준비할 수 있으니... 이런 식으로 프로에 간 선수로는 오카다 요시후미나 모리 유이토 등이 있다.[10] 실력은 어지간한 기업팀 저리가랄 정도로 전문화된 팀이 있는가 하면, 그냥 직장인 동호회 수준인 팀도 있어서 천차만별이다. 사실상 한국의 사회인야구 1부리그랑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11]
- 풀뿌리 야구팀(쿠사야큐, 草野球)
한국의 사회인야구와 같은 성격을 띄는 사회인야구팀을 말한다.[12] 그냥 동네 야구 수준에서 꽤 전문적인 수준까지 다양하다. 풀뿌리 야구팀이 참가하는 대회들은 대부분 나무배트가 아닌 알루미늄 배트가 사용되며 주로 연식야구공[13] 을 사용한다. 한국은 사회인 야구도 경식공을 주로 쓰는 경우가 많은것과 차이점.
4. 리그
간단히 설명하자면 경식 야구공은 일반 프로팀이 쓰는 야구공으로 경식 야구공을 쓰는 리그는 실업야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고 연식 야구공은 사회인 야구팀들이 쓰는 공으로 연식야구공을 쓰는 대회들은 순수 아마추어들이 출전하는 풀뿌리리그, 한국의 사회인 야구와 같다.
4.1. 경식야구
4.1.1. 도시대항야구대회
해당 항목으로.
4.1.2. 사회인야구일본선수권대회
社会人野球日本選手権大会
1951년에 창설된 일본산업대항야구대회(日本産業対抗野球大会)가 1973년에 이름을 바꿔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역대 모든 대회가 관서지방[14] 에서 개최되었다. 마이니치 신문사가 일본야구연맹과 함께 주최하고 잇으며 스포츠닛폰, 쿄세라돔이 후원하고 있는 대회다. 다만 인지도나 인기면에서 도시대항전에게 밀리고 있고 관객동원도 안습한 수준이라 2006년에 참가팀을 26개팀에서 32개팀으로 늘리고 도시대항전과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 우승팀에게도 출전권을 부여하는등 흥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로 1991년부터 전일본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팀과 사회인야구일본선수권대회 우승팀이 맞붙는 전일본아마추어야구왕좌결정전(全日本アマチュア野球王座決定戦)도 존재했지만 1997년이후 폐지되었다.
4.1.3. 지구연맹에서 주최하는 야구대회
地区連盟主催大会
4.1.4.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
全日本クラブ野球選手権大会
도시대항전에는 엄청난 팀들이 몰려 대도시의 팀의 경우 예선을 뚫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기때문에 1976년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 대회가 창설되었다. 2011년 기준 일본야구연맹에 소속된 클럽팀 259팀 중 16팀만이 출전하기 때문에 342팀 중 32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도시대항전보다 더 빡센 구멍을 자랑한다. 마이니치 신문과 일본야구협회, 일본야구기구가[15] 공동주최하며 미즈노가 스폰서로 참가하고 있다. 도시대항은 물론, 일본선수권보다도 인기가 없는 편.
4.2. 연식야구
- 덴노배 전일본연식야구대회(全日本軟式野球大会)
- 국민체육대회 연식야구대회(国民体育大会 軟式野球競技会)
- 전일본연식야구대회(全日本軟式野球大会)
- GBN 전국동네야구대회(GBN全国草野球大会)
- 전일본여자연식야구선수권대회(全日本女子軟式野球選手権大会)
5. 사회인선수의 프로 진출
사회인야구는 프로 구단의 입장에선 좋은 선수 공급처이다. 대개 '즉시전력감'으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많이 포진된 곳이 바로 사회인야구이기 때문.
일반적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사회인에 진출한 선수보다는 고교와 대학을 모두 거친 뒤 사회인에 진출한 선수들의 기량이 대체로 뛰어나다. 신체능력이 가장 전성기인 25~6세에 프로진출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많은 아마야구 지도자들을 거쳐오면서 육체적, 기술적으로 완성되어있는 선수들이 많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데뷔 첫 시즌부터 1군 레귤러 멤버로 뛰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그만큼 성적에 대한 압박도 많이 받게 되는데 일단 나이가 최소 20대 중반이니 고졸 선수마냥 성장을 바랄수도 없는 처지고 애초에 육성해서 쓰려고 데려온게 아니라 구멍난 자리를 메꿔주라고 데려온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1군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주지 못하면 입지가 위태로워진다. 게다가 늦은 나이에 데뷔를 했으니 그만큼 전성기도 짧을수밖에 없고 자연히 에이징 커브도 빨리 찾아오게되니 선수생명을 길게 이어나가기가 어렵다. 실제로 상위픽이라고 해도 성적이 안 나오면 몇 년 만에 잘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하위픽의 경우는 1~2년 내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칼같이 정리당한다.
고교졸업 후 대학을 가지않고 사회인에 진출한 선수들의 경우에는 당장의 성적을 내야 할 압박이 비교적 적다. 나잇대가 대졸선수와 같다보니[16] 즉시전력감 평가를 받은 선수가 아닌 이상 1~2년 정도는 구단에서 시간을 투자해가며 추가적인 육성을 별도로 행하면서 1군에 올리는 경우가 많다.
6. 출신 선수
- 가네코 치히로 (토요타)
- 가토 하지메 (다이쇼와 제지)
- 겐다 소스케 (토요타)
- 고바 타케시 (닛테츠 후타세)
- 고바야시 세이지 (일본생명)
- 고바야시 시게루 (다이마루)
- 곤도 히로시 (브리지스톤)
- 기요타 이쿠히로 (NTT 히가시니혼)
- 김성길 (혼다 스즈카)[17]
- 나가노 쇼지(혼다)
- [18]
- 네모토 리쿠오 (일본 콜럼비아)
- 노가미 료마 (닛산)[19]
- 노모 히데오 (신일본제철 사카이)[20]
- 노우미 아츠시 (오사카 가스)
- 니시무라 노리후미 (가고시마 철도 관리국)[21]
- 다니 요시토모 (미쓰비시 자동차 오카자키)
- 도히 세이야 (오사카 가스)
- 마스이 히로토시 (도시바)
- 마쓰나카 노부히코 (신일본제철 키미츠)
- 마유미 아키노부 (덴덴 규슈)[22]
- 마츠나가 타카히로 (오사카 가스)
- 마츠다 신 (혼다)
- 마키타 가즈히사 (일본통운)
- 모리 시게카즈 (스미토모 금속)[23]
- 모리후쿠 마사히코 (시닥스)[24]
- 모토니시 아츠히로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 미마 마나부 (도쿄 가스)
- 미야모토 신야 (프린스 호텔)[25]
- 미야자키 토시로 (세가 사미)
- 벳토 카오루 (전오사카)
- 사사오카 신지 (NTT 주고쿠)
- 사이토 토시오 (미쓰비시 자동차 오카자키)
- 세키야 료타 (JR 히가시니혼)
- 소요기 에이신 (닛산)[26]
- 쇼다 고조 (신일본제철 히로하타)
- 스가노 츠요시 (히타치)
- 스기모토 타다시 (다이쇼와 제지)
- 스기우치 도시야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 아다치 료이치 (도시바)
- 아리요시 유키 (규슈 미쓰비시 자동차)
- 아카호시 노리히로 (JR 히가시니혼)[27]
- 안권수 (카나플렉스)
- 야마다 히사시 (후지제철 카마이시)
- 야마모토 다이키 (미쓰비시 자동차 오카자키)
- 야마우치 카즈히로 (카와시마 방적)
- 야부 케이이치 (아사히생명)
- 에노키다 다이키 (도쿄 가스)
- 에모토 타케노리 (쿠마가이구미)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NTT 간토)[28]
- [29]
- 오가와 준지 (카와이 악기 제작소)
- 오기노 타카시 (토요타)
- 오다 코헤이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
- 오오스기 카츠오 (마루이)
- 오츠카 아키노리 (일본통운)
- 오치아이 히로미츠 (도시바 후추)[30]
- 오카다 요시후미 (아시카 가스)
- 오카모토 신야 (야마하 등)
- 오타니 토모히사 (토요타)
- 와카마츠 츠토무 (덴덴 홋카이도)[31]
- 와타나베 슌스케 (신일본제철 키미츠)
- 와타나베 케이타 (NTT 동일본)
- 요다 츠요시 (NTT 도쿄)
- 우츠미 테츠야 (도쿄 가스)
- 이노우에 세이야 (일본생명)
- 이리키 사토시 (미쓰비시 자동차 미즈시마)[32]
- 이시게 히로미치 (프린스 호텔)[33]
- 이시카와 아유무 (도쿄 가스)
- 이와세 히토키 (NTT 도카이)
- 이케나가 마사아키 (호후 클럽)[34]
- 이토하라 켄토 (JX-ENEOS)
- 주동식 (혼다)
- 초노 히사요시 (혼다)
- 츠다 츠네미 (쿄와 발효)
- 츠지 하츠히코 (신일본통운 우라와)
- 치카모토 코지 (오사카 가스)
- 카가 시게루 (스미토모 금속 가시마)[35]
- 카나이 마사유키 (오지제지 가스가이)[36]
- 카네다 마사히코 (닛산 규슈)[37]
- 카네다 토메히로 (일본통운 우라와)
- 카도타 히로미츠 (쿠라레 오카야마)
- 카미자토 카즈키 (일본생명)
- 코사카 마코토 (JR 히가시니혼 도호쿠)
- 쿠라모토 토시히코 (일본신약)
- 키나미 세이야 (혼다)
- 킨죠 타츠히코 (스미토모 금속)[38]
- 타자와 준이치 (신일본석유 ENEOS)[39]
- 타카기 하야토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 토죠 타이키 (JR 히가시니혼)
- 황목치승 (세가 사미)
- 후루타 아쓰야 (토요타)
- 후지오카 유다이 (토요타)
- 후지이 마사오 (닛산 규슈)
- 후지타 모토시 (일본석유)[40]
- 후쿠도메 고스케 (일본생명)
- 후쿠라 준이치 (오이타 철도 관리국)[41]
- 후쿠모토 유타카 (마쓰시타)[42]
- 후쿠하라 미네오 (일본통운)
- 히라이시 요스케 (토요타)
7. 논란
최근 NPB의 프로야구단들, 주로 요코하마와 주니치가 로스터를 아끼기 위해 사회인야구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팀에 1,2년 후에 영입되는 것을 전제로 사회인야구 팀에 심어뒀다가 국제대회에서 그들을 주로 출전시키는 등 사회인야구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경우가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43] 특히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내야수들 중 2명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NPB로 진출하는 등 사회인야구를 프로구단의 로스터 절약용 팀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일본 내에서도 어느 정도 논란과 비판이 따르고 있다.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도 출전 선수들 중 몇몇이 요코하마, 주니치와 가계약을 했다는 점이 밝혀져 일본 내에서도 해당 논란은 끝없이 나오고 있다.
8. 관련 문서
[1] 다만 이들 중 일부가 이미 프로에 갈 수 있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팀에 가기 위해 소속만 사회인야구인 경우가 있었다. 1993~2006년까지 일본 프로야구에 존재했던 역지명제도의 영향.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가거나 사회인야구에서 3년 이상을 뛰면 '''선수가 스스로 원하는 팀을 골라서 입단할 수 있었다.''' 역지명제도는 2007년 폐지되었지만,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팀에 들어가기 위해 사회인야구를 방패로 삼는 경우가 많고, 구단과 모종의 커넥션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이 심해진 경우가 하술할 인천과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 사건이다.[2] 하술할 스기우라 마사노리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3] 일본 위키에 따르면 1998년 프로선수가 포함된 한국 대표팀에게 힘도 못쓰고 패하는 것을 보고 프로팀이 출전해야된다는 의견이 커졌다고 한다.[4] 예를들어 미쓰비시 중공업만 보더라도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미쓰비시 중공업 고베"등 산하 기업장 별로 운영되었다.[5] 일반적으로 대졸+사회인야구 테크를 탄 선수는 한국나이 26살에 프로에 진출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시카와 아유무(한국나이 27세 프로진출), 셋츠 다다시(한국나이 28세 프로진출), 쿠사노 다이스케(한국나이 31세 프로진출), 야마자키 타카히로(한국나이 31세 프로진출) 등의 극단적으로 늦은 나이에 프로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이런 선수들은 완벽한 즉전감으로 살아남지 못하면 얼마 못 가서 퇴출되는 경향이 크고, 즉시전력으로 1군에서 살아남는 선수도 에이징커브가 빨리 오다 보니 그렇게 프로에서 엄청난 기록을 남기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술한 쿠사노는 7시즌 629경기나 출장했지만, 야마자키는 4시즌 22경기 출장에 그쳤다. 셋츠도 2009년 신인왕, 2012년 사와무라상을 받는 등 소프트뱅크의 에이스였지만 2016년부터 급격히 기량이 하락하여 2018년 은퇴하였다.[6] 이 분야의 레전드로는 1992, 1996, 2000년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 일본생명의 '미스터 아마야구' 스기우라 마사노리가 있다. 올림픽 야구 통산 5승으로 이 분야 세계기록 보유자. 특히 2000년에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 프로선수가 일부 포함되었음에도 대표팀에 선출되었다. 당연히 사회인야구에서도 에이스였으며 도시대항 야구에서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연속 출장했다. 은퇴 뒤에도 일본생명 팀의 코치와 감독을 거쳤다.[7] 다만 프로를 노리는 선수도 사회인야구에 가는 경우는 상당수가 프로에서 지명받지 못해서 간 케이스라서 정규직으로 입사한 후 프로에 지명되면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원래는 은퇴하면 기업에 남으려고 정규직으로 입사한 선수가 갑자기 야구에 뜻이 생겨서 팀에서 방출 통보를 받은 후 회사까지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세가사미의 타카시마 슈고같은 케이스. 그러나 타카시마는 결국 프로에 가지 못하고 독립리그에서 야구를 접었다.)[8] 연장 13회까지 진행되었음에도 무승부가 되었다던지, 경기시간이 4시간 이상 된다면 승부치기를 시행해 승부를 가린다.[9] 일본은 고교/대학 야구부원들에게도 최소한의 공부는 시킨다. 전공도 원하는 전공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법학부, 공학부 등을 졸업하는 선수도 꽤 많다. 그런데도 야구하느라 공부를 못해서 직장일에 애로사랑이 크다고 말이 나올 정도. [10] 종종 특정 기업의 클럽 팀은 이러한 '선출'들이 많기에 이러한 야구선수 출신 사원들의 야구 환경 개선 등을 이유로 기업 팀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단 클럽팀이 기업팀으로 전환하는 순간 전일본클럽야구선수권대회에는 나가지 못한다.[11] 사실 사회인야구 클럽팀이 일본의 경식야구 중 최하위 레벨이라서 전부 경식야구인 한국의 사회인야구 1부보다 못하는 팀이 있을수도 있겠으나 자료 부족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12] 다만 한국의 사회인야구와 같은 성격을 띄는 경식야구 클럽팀도 있기는 하다. 일본의 순수 비선출 아마추어들이라고 연식야구만 하는 것은 아니기에. 당장 와세다대학 아마추어 야구동아리에서만 뛰다가 요코하마에 지명된 카사이 타카마사의 사례만 봐도 대학의 공식 야구부가 아닌 아마추어 야구부 중에서도 경식 야구 동아리가 있다.[13] 고무등을 이용해 만든 공, 소프트볼과는 다르다.[14] 한신 고시엔 구장(1974~1979) - 오사카구장(1980~1989) - 홋토모토 필드 고베(1990-1996) - 오사카 돔(1997-현재)[15] 일본프로야구를 운영하는 기구[16] 칼같이 프로에 가는 경우는 사회인야구에서 3년을 뛰고 프로에 가다 보니 오히려 1살 어리다.[17] 혼다 본사 야구부(사이타마현 소재)와는 다른 팀으로 미에현 스즈카시 소재. 혼다는 이 둘 외에도 쿠마모토 현에도 야구부를 하나 두고 있다.[18] 현 NTT 서일본. 검은 안개 사건 연루로 영구제명.[19] 2010년부로 구조조정상 휴부.[20] 참고로 이쪽은 2003년 "노모베이스볼 클럽(NOMOベースボールクラブ)"이라는 사회인야구팀을 창단하여 직접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NPB에 5명의 선수를 1군무대로 데뷔시켰다. 마이너리그에 진출한 선수도 1명(스다 겐타) 있다.[21] 현재의 JR 규슈[22] 이후 NTT 서일본 규슈로 이름을 바꾼 뒤 2001년 해체.[23] 아래의 스미토모 금속 가시마(신일본제철 가시마, 이바라키현 소재)와는 다른 팀으로 와카야마현 소재. 1999년 폐부.[24] 2002~2005년 노무라 카츠야가 감독을 맡은 적이 있다. 2006년 해체.[25]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회사인 세이부 철도 계열의 회사이다. 모기업의 경영합리화 정책으로 2000년 야구부 해체.[26] 2010년부로 구조조정상 휴부.[27] 실제로 차장 자격증이 있다.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할 때를 대뷔해서 따놓았다고.[28] NTT 사업부가 재편되면서 1998년 해체되었고, 선수단은 NTT 히가시니혼에 편입되었다.[29] 원래 고졸로 프로에 지명되었으나 방출되고 난 뒤 사회인야구를 전전하다 다시 프로에 복귀했지만, 검은 안개 사건 연루로 영구제명.[30] 현재는 도시바 본사 야구부에 편입되었다.[31] 현재는 NTT 홋카이도.[32] 현재는 미쓰비시 자동차 구라시키.[33] 상술했듯 세이부 철도 계열의 회사로 모기업의 경영합리화 정책으로 2000년 야구단 해체. 이시게는 네모토 리쿠오 전무의 주도로 아예 작정하고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시킬 수 있도록 그룹 산하 사회인야구 팀으로 빼돌린, 드래프트를 실질적으로 우회한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34] 검은 안개 사건 연루로 영구제명되었다가 35년이 지난 2005년 복권.[35] 현재는 신일본제철 가시마.[36] 현재는 오지.[37] 위의 닛산 본사 야구부(가나가와 현 소재)와는 다른 팀. 2010년부로 구조조정상 휴부 후 감독과 주요 멤버들이 '칸다 빅토리즈'라는 클럽팀을 중심으로 재결합했다고 한다.[38] 1999년 구조조정으로 폐부.[39] 현 JX-ENEOS. 일본프로야구를 건너뛰고 곧바로 MLB로 진출했다.[40] 현재의 JX-ENEOS.[41] 현재의 JR 규슈.[42] 현재의 파나소닉.[43] 이는 2군에 외국인 용병을 무제한으로 보유할 수 있는 반면 그렇게 보유한 만큼 국내 선수의 로스터 보유 한도도 줄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