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베 다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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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베 다쿠미(神戸拓光/Takumi Kobe)
생년월일
1985년 2월 23일
출신지
일본 이바라키현 우시쿠시
학력
쓰치우라 니혼 대학 고등학교, 류쓰 게이자이 대학
포지션
외야수, 1루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2006년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3순위 지명(치바 롯데 마린즈)[1][2]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2007~2014)
응원가
U.Nオーエンは彼女なのか?(U.N 오엔은 그녀인가?)[3]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2010'''
1. 소개
1.1. 대학 시절
1.2. 프로 활약
2. 특징
3. 응원가
4. 연도별 성적


1. 소개


치바 롯데 마린즈의 야구선수. 포지션은 외야수이나 주로 대타·대수비 요원으로 출장했다.

1.1. 대학 시절


소속학과는 경제학부 경영학과였으며, 1학년이었던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통산 14홈런.

1.2. 프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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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1년차인 2007년에는 1군 출장이 없었고, 2군에서 홈런 4개를 기록하는 등 나름대로 장타력이 있다는 기대[4]와는 달리 별반 활약을 하지 못했다. 당시 타율 .290, 장타율 .391. 다만 2군 선수들 중에서 가장 많은 87경기에 출장하였다. 2루타는 팀에서 2위인 16개로, 1년차는 장타보다는 중거리 타자로써의 가능성을 보였다. 다만 선구안이 별로라서 삼진은 62개로 팀에서 2등.
이듬해인 2008년 5월 5일 1군에 첫 출장하여 첫 홈런을 뽑아내기도 했지만 그 때뿐, 타격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여 시즌 내내 2군에 머물러야 했다. 2009년은 더 심각해서 출장 경기 수가 겨우 9경기(…)에 불과하였다.
2010년에는 대타ㆍ대수비 요원으로 26경기를 뛰었다. 4월 9일 對 세이부전에서 1회부터 자기가 친 파울볼에 맞는 바람에 실려나간 후쿠우라 카즈야의 대타로 급히 출장, 와쿠이 히데아키로부터 라뱅스리런 홈런을 뽑아냈다. 그런데 이 때 취했던 득점 세레모니가 세이부 벤치의 어그로를 끄는 바람에 다음 타석에 사구를 맞게 되었고, 그대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경기 후 코베는 이 일에 대한 사죄를 해야 했다.[5] [6] 이 해에는 1군과 2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이 잦아 홈런은 위에 언급한 1개에 그쳤다. 그래도 2010년 일본시리즈 엔트리에 들었고, 주로 주니치의 홈경기라 투수가 타석에 올라야 할 때 투수 대타로 출전하였다. 그리고 롯데가 우승하면서 우승반지도 하나 획득.
2011년에는 외야수 외에도 1루수를 봤지만, 1군에는 겨우 22경기만 출장하였다.
2012년에는 비시즌 동안 자율훈련을 하다 전치 2개월의 손등 부상을 입었고, 그 여파로 1군에 전혀 올라오지 못했다. 2군에는 84경기에 출장해서 7홈런을 쳤다.
2013년에는 개막전 1군에 이름을 올렸지만 고열 증상을 보여 하루만에 말소되었고 4월 12일에야 1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 4월 16일 닛폰햄전에서 모리우치 도시하루(森内壽春)를 상대로 3년만에 홈런을 쳤다. 하지만 타율은 15타수 3안타 0.200의 멘도사 라인급 타율을 찍는 바람에 4월 30일 다시 1군에서 말소되었다. 고베 다쿠미의 1군 경기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0월에는 교육리그인 피닉스 리그에 참가하던 도중 트위터에서 여고생 살인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처신을 탓하는 뉘앙스의 부적절한 멘션을 남기는 바람에 근신 처분을 받았다. 참고로 마지막 선발 출장은 4월 25일 7번 좌익수 선발출장. 2013 시즌의 유일한 선발출장이었다.
2014년에는 1군 출장이 없었고, 2군에서 102경기를 뛰고 7홈런을 쳤다. 그해 10월 5일 구단에서 전력외 통보를 받았고, 11월 23일에는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 후에는 일반 기업에 취직하겠다고 밝혔다. 12월 2일 자유계약 공시가 되어 유니폼을 벗었다.
2015년 신파라는 이름의 사회인 야구팀에 플레잉 코치로 들어갔다. 본업은 보험판매원이라고 한다.

2. 특징


  • 대학시절 애주가로 유명했고, 치즈를 좋아해서 치즈 프로페셔널 자격증도 있다고 한다.
  • 2군에서 비거리 150m짜리 홈런까지 쳤을 정도로 힘이 세서 별명이 마쿠하리의 고질라였다. 하지만 1군에서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타격폼만 수십 번씩 바꿔대면서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어 많이 말렸다고 한다. [7]
  • 사토자키 토모야가 롯데의 드래프트 상위픽에 대해 분석해 보는 방송을 할 때 무명으로 끝난 선수라고 까였다(...).

3. 응원가


그런데 이렇게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대타ㆍ대수비 요원이 가뜩이나 나무위키에서 항목도 적은 NPB선수중에 단독 항목이 개설이 되었냐 하면 '''바로 오덕계에서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돼버린 이유인 응원가 때문이다.'''
동방홍마향플랑드르 스칼렛 테마곡 『U.Nオーエンは彼女なのか?』를 이 선수의 응원가로 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플랑드르 스칼렛이 롯데 유니폼을 입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대표적으로 이런 거라든가…. 선수 본인이 동방 프로젝트를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1군에 있던 기간이 매우 짧았고, 주로 대타로 나왔기 때문에 이 응원가가 불린 횟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8] 더군다나 2014년 이후 현역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이 응원가를 들을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오릭스 버팔로즈의 제2 홈구장인 고베 종합운동공원 야구장 경기에서 롯데 응원단이 간간히 이 응원가를 부르는 일이 있다고 한다.(...) 가사에 '''고베'''가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이 선곡을 주도한 인물은 롯데의 前 응원단장인 진 토시오. 한국에서 레이지본의 트럼펫 주자로 활동했으며 사직 야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 응원을 하기도 하는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한때 구단 직원으로 일하며 응원단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으나, 2009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해임을 둘러싸고 기존의 응원단이 분열되면서 진 토시오 씨가 다시 응원단장을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응원단이 사용하던 응원가들이 대거 교체되었는데 그로 인해 새롭게 U.N. 오웬이나 キラメキラリ 같은 노래들이 응원가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2018년 현재 진 토시오씨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응원단으로 옮겼다.
참고로 2009년까지는 응원가로 Dropkick Murphys의 『For Boston』을 썼다. 이전에는 롯데의 거포 용병타자이던 데릭 메이, 맷 프랑코[9]의 응원가였다. 거포 유망주로서의 기대를 보여주는 응원가 선정이었지만, 결국 그 정도로 성장하지 못하고 현역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도루
사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2007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기록 없음
2008
23
48
.208
10
1
0
2
3
1
1
16
.224
.354
2009
9
16
.125
2
0
0
0
0
0
1
5
.176
.125
2010
26
43
.209
9
1
0
1
7
0
4
13
.271
.302
2011
22
40
.200
8
2
0
0
2
0
4
11
.273
.250
2012
1군 기록 없음
2013
12
15
.200
3
1
0
1
5
0
0
6
.200
.467
2014
1군 기록 없음
'''NPB 통산(5시즌)'''
92
162
.198
32
5
0
4
17
1
10
51
.243
.302

[1] 2004~2007년 NPB는 대졸/사회인 선수와 고졸 선수를 따로 뽑는 방식으로 드래프트를 했다. 2008년부터 이전처럼 고졸/대졸/사회인 전부 뽑는 방식으로 통합했다.[2] 참고로 이 해 롯데는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1, 2라운드 지명선택권이 없었다. 당시 규정상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1순위는 '''희망입단권(지명후보가 원하는 팀을 선택 가능했던 제도. 현재는 폐지)'''을 사용한 구단만 지명 가능했고, 2순위는 고교생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선택권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만 지명 가능했는데, 롯데가 희망입단권을 쓰지도 않았고 고교생 드래프트 1순위로 오오미네 유우타를 지명했기 때문에 지명선택권이 소멸되었기 때문. 따라서 고베는 '''사실상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1차 지명자였다.''' 참고로 이 해의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7순위 지명자가 바로 카쿠나카 카츠야. 상위픽이 망하고 하위픽이 터진 드래프트의 대표적인 사례이다.[3] 노래가 나올 때는 어이!를 3번 외치고 노래 사이사이에 고베를 8번 외친다. 궁금하면 직접 들어보길. [4] 힘은 좋았다. 2군 경기에서 150m짜리 홈런을 쳐낸 걸 보면...[5] 영상 찾아보면 예능에서 이 부분 영상을 성우가 더빙해서 엄청 웃기게 만든 것도 있다(...) 이때의 세레모니 보면 그냥... 대놓고 환호는 물론에 선수랑 껴안고 투명의자 퍼포먼스까지 하는 등 상대팀 팬들이 보면 매우 화가 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근데 그 때의 코베의 상황을 보면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선발로 나오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운 좋게 1회부터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된 데다 그 희박한 기회를 홈런으로 연결했으니.[6] 정작 코베는 데드볼을 맞은 후 그닥 발끈하지 않았고 투수도 형식상의 사과표시는 했는데 코치들끼리 뒤엉켜 싸움이 난거다.[7] 웃긴 건 호소야가 고졸이라 프로에 먼저 입단했다. 다만 나이는 호소야가 어리다.[8] 저 응원가를 쓴 5년 동안 약 60경기 정도 나왔다. 거기다가 선발 출장보다는 대타 요원이었기 때문에 이 60경기동안의 타석도 겨우 108타석에 그친다. 1경기 평균 1.8타석.[9] 이승엽과 함께 2005년 롯데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