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자키 토모야
* 야구 관련 인물(NPB)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현 야구해설자, 치바 롯데 마린즈 특별고문, 탤런트, 유튜버. 매우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일본 최고수준의 수비력과 공격형 포수라고 불러줄 만한 괜찮은 공격력을 보여주면서 그래도 일본에서 원탑은 못 되지만 정상급 포수로 활약했던 선수다. 2006년 WBC에서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주전포수를 맡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했다.
대학 시절에는 타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하다가 4학년 때에야 주전포수를 꿰찼다. 선배 중에 주전포수 자원이 있어서 밀린 듯. 하지만 대학 리그에서 베스트나인에 3번이나 들고, 4경기 연속 홈런을 치는 등 대학리그를 폭격하며 공수를 겸비한 거포형 포수로 꼽혔고 2라운드라는 상위라운드에서 롯데에 뽑혔다.
입단 첫 해에는 손목 골절 때문에 2군에서만 있었으나 두번째 해부터 슬슬 1군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고한 주전포수로 시미즈 마사우미[8] 와 하시모토 타스쿠[9] 가 있었기 때문에 한두 경기에 땜빵으로 나오는 것에 그쳤다.
사토자키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2003년으로 시즌의 절반 정도 출장하면서 8홈런에 3할 1푼 9리로 맹활약하고 바로 주전포수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2004년에는 부상 때문에 시즌을 날려먹어 60경기 정도밖에 나오지 못하고 주전포수도 하시모토 타스쿠에게 빼앗겼다. 2005년 시즌에는 부상에서 나아서 돌아왔지만 바비 발렌타인이 워낙 플래툰 성애자인지라 좌타 포수인 하시모토 타스쿠와 공동 주전으로 나와야 했다. 아무튼 이 해에 규정타석 미달이지만 3할 타율에 10홈런을 치며 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으로 떠올랐고, 일본시리즈에서도 4경기에 개근하며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팀을 이끌었다.[10] 참고로 이 시즌에 도루저지 1위를 기록했다.
2005 시즌 이후 열린 WBC에서는 부동의 원탑 아베 신노스케의 부상으로 인해 주전포수로 나와서 여기서도 일본 국대를 이끌며 한국 국대를 제치고 우승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22타수 9안타 (타율 .409) 1홈런 5타점으로 대회 베스트 팀에 뽑힐 정도의 활약. 거기다가 2006년 플래툰 라이벌 하시모토 타스쿠의 부상으로 인해 확고한 주전포수로 앉아 규정타석 100안타에 17홈런 56타점, OPS 8할을 기록하는 등 공격형 포수로 대활약을 한다.[11] 거기다가 도루저지 4할을 기록하면서 수비력 역시 최상급이었다. 그리고 퍼시픽리그 골든글러브와 베스트나인 동시 수상.
2007 시즌부터 주장을 맡았고, 이 시즌에 홈런과 장타율은 좀 떨어졌지만 개인 최다인 129안타를 치고 14홈런 75타점 OPS 7할 5푼을 넘기는 등 좋은 활약을 했다. 2년 연속 골글과 베스트나인 수상.
2008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시즌의 1/3을 날려먹고 주전포수도 하시모토 타스쿠에게 빼앗겼다. 이때 하시모토가 규정타석 미만이지만 3할에 11홈런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사토자키가 뒤늦게 복귀해서 90경기동안 15홈런을 치는 무력시위 끝에 2009년 시즌부터 하시모토를 밀어내고 다시 주전자리에 오른다. 사토자키가 커리어 동안 20홈런 시즌이 1번도 없는게 공격형 포수로써 아쉬운 점인데 이 시즌에 부상만 없었으면 20~25홈런정도 노려볼 수 있는 홈런 페이스였다.
2009년에는 다시 주전포수를 꿰차고 도루저지 1위를 기록했다. 2010년에는 부상 때문에 마토바 나오키가 포수로 자주 나오면서 반 시즌정도밖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즌에도 어찌어찌 10홈런을 치면서 규정타석 미달이긴 했어도 OPS 8할을 찍고 일본시리즈 전 경기에 선발포수로 나와 한 경기를 제외하고 완주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였다(...)
2011년부터 다시 주전포수 자리를 꿰찼지만 공인구가 바뀌면서 확실히 중장거리포였던 이전과는 다르게 똑딱질 위주의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결국 2013년부터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서 백업포수로 전락했고, 2014년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하여 은퇴 선언 약 2주 후인 9월 말에 1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장하는 은퇴경기를 치렀다. 이때 사토자키는 2번~9번 타순에서 홈런을 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은퇴 경기에서 홈런을 치면 일본프로야구 포수 사상 최초로 전 타순 홈런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2타수 2삼진을 기록한 후 대타 알프레도 데스파이네로 교체되어 기록 달성은 하지 못했다.
여담으로 2012년에 통산 100호 홈런을 날렸는데, 치바 롯데 마린즈의 프랜차이즈 포수[12] 중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사토자키가 최초라고 한다.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TV 방송에도 고정출연하는 등 탤런트 생활도 시작했다. 또한 야구 칼럼도 쓰고 있다.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FCtAX45lgHcf4s0vAgAxww
공수를 겸비했기 때문에 수비형 포수라고 봐야 할 지 공격형 포수라고 봐야 할 지 애매하다. 하지만 수비형 포수라고도 부를 수 있고 공격형 포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타격은 우선 컨택면에서는 떨어지지만 힘이 좋고 극단적으로 어퍼스윙을 하는 스타일이라서 15~20개의 홈런을 칠 수 있다. 아마 타자친화구장이 홈인 팀으로 갔으면 20개 이상의 홈런을 꾸준히 칠 수 있었을 듯. 아쉽게도 홈런 20개를 친 해는 없었다. 그리고 컨택이 떨어진다고는 하는데 2할 5푼~2할 7푼 정도의 타율을 꾸준히 냈다. 선구안은 평범한 수준. 종합해보면 준수한 중장거리포 수준의 타격을 보여주었다. 포수로써는 이정도만 해도 리그 상급의 공격형 포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공격형 포수로는 이미 끝판왕 아베 신노스케와 죠지마 켄지가 있어서 그렇지...
수비는 몸쪽으로 집요하게 찔러넣는 포수 리드를 좋아했다. 그리고 포구 및 송구동작이 빠르고 어깨가 강해서 도루저지율이 리그 최고 수준이었고, 블로킹도 리그 최상급이었기 때문에 포일이 정말 없었다. 53경기당 1포일 수준이었는데, 30경기당 1포일을 기록한 선수가 통산 3위, 43경기당 1포일을 기록한 선수가 통산 2위인 것을 감안하면 블로킹 실력은 역대 포수들을 통틀어서 군계일학 수준이었다. 당장에 뛰어난 수비력에 컨택은 떨어지지만 파워가 좋은 또 다른 포수인 호소카와 토루와의 국가대표 자리 경쟁에서 매번 이겼다. 호소카와 역시 수비력이라면 퍼시픽리그 최고수준이었는데도.
1. 개요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현 야구해설자, 치바 롯데 마린즈 특별고문, 탤런트, 유튜버. 매우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일본 최고수준의 수비력과 공격형 포수라고 불러줄 만한 괜찮은 공격력을 보여주면서 그래도 일본에서 원탑은 못 되지만 정상급 포수로 활약했던 선수다. 2006년 WBC에서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주전포수를 맡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했다.
2. 선수 경력
대학 시절에는 타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하다가 4학년 때에야 주전포수를 꿰찼다. 선배 중에 주전포수 자원이 있어서 밀린 듯. 하지만 대학 리그에서 베스트나인에 3번이나 들고, 4경기 연속 홈런을 치는 등 대학리그를 폭격하며 공수를 겸비한 거포형 포수로 꼽혔고 2라운드라는 상위라운드에서 롯데에 뽑혔다.
입단 첫 해에는 손목 골절 때문에 2군에서만 있었으나 두번째 해부터 슬슬 1군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고한 주전포수로 시미즈 마사우미[8] 와 하시모토 타스쿠[9] 가 있었기 때문에 한두 경기에 땜빵으로 나오는 것에 그쳤다.
사토자키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2003년으로 시즌의 절반 정도 출장하면서 8홈런에 3할 1푼 9리로 맹활약하고 바로 주전포수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2004년에는 부상 때문에 시즌을 날려먹어 60경기 정도밖에 나오지 못하고 주전포수도 하시모토 타스쿠에게 빼앗겼다. 2005년 시즌에는 부상에서 나아서 돌아왔지만 바비 발렌타인이 워낙 플래툰 성애자인지라 좌타 포수인 하시모토 타스쿠와 공동 주전으로 나와야 했다. 아무튼 이 해에 규정타석 미달이지만 3할 타율에 10홈런을 치며 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으로 떠올랐고, 일본시리즈에서도 4경기에 개근하며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팀을 이끌었다.[10] 참고로 이 시즌에 도루저지 1위를 기록했다.
2005 시즌 이후 열린 WBC에서는 부동의 원탑 아베 신노스케의 부상으로 인해 주전포수로 나와서 여기서도 일본 국대를 이끌며 한국 국대를 제치고 우승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22타수 9안타 (타율 .409) 1홈런 5타점으로 대회 베스트 팀에 뽑힐 정도의 활약. 거기다가 2006년 플래툰 라이벌 하시모토 타스쿠의 부상으로 인해 확고한 주전포수로 앉아 규정타석 100안타에 17홈런 56타점, OPS 8할을 기록하는 등 공격형 포수로 대활약을 한다.[11] 거기다가 도루저지 4할을 기록하면서 수비력 역시 최상급이었다. 그리고 퍼시픽리그 골든글러브와 베스트나인 동시 수상.
2007 시즌부터 주장을 맡았고, 이 시즌에 홈런과 장타율은 좀 떨어졌지만 개인 최다인 129안타를 치고 14홈런 75타점 OPS 7할 5푼을 넘기는 등 좋은 활약을 했다. 2년 연속 골글과 베스트나인 수상.
2008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시즌의 1/3을 날려먹고 주전포수도 하시모토 타스쿠에게 빼앗겼다. 이때 하시모토가 규정타석 미만이지만 3할에 11홈런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사토자키가 뒤늦게 복귀해서 90경기동안 15홈런을 치는 무력시위 끝에 2009년 시즌부터 하시모토를 밀어내고 다시 주전자리에 오른다. 사토자키가 커리어 동안 20홈런 시즌이 1번도 없는게 공격형 포수로써 아쉬운 점인데 이 시즌에 부상만 없었으면 20~25홈런정도 노려볼 수 있는 홈런 페이스였다.
2009년에는 다시 주전포수를 꿰차고 도루저지 1위를 기록했다. 2010년에는 부상 때문에 마토바 나오키가 포수로 자주 나오면서 반 시즌정도밖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즌에도 어찌어찌 10홈런을 치면서 규정타석 미달이긴 했어도 OPS 8할을 찍고 일본시리즈 전 경기에 선발포수로 나와 한 경기를 제외하고 완주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였다(...)
2011년부터 다시 주전포수 자리를 꿰찼지만 공인구가 바뀌면서 확실히 중장거리포였던 이전과는 다르게 똑딱질 위주의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결국 2013년부터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서 백업포수로 전락했고, 2014년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하여 은퇴 선언 약 2주 후인 9월 말에 1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장하는 은퇴경기를 치렀다. 이때 사토자키는 2번~9번 타순에서 홈런을 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은퇴 경기에서 홈런을 치면 일본프로야구 포수 사상 최초로 전 타순 홈런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2타수 2삼진을 기록한 후 대타 알프레도 데스파이네로 교체되어 기록 달성은 하지 못했다.
여담으로 2012년에 통산 100호 홈런을 날렸는데, 치바 롯데 마린즈의 프랜차이즈 포수[12] 중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사토자키가 최초라고 한다.
3. 은퇴 이후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면서 TV 방송에도 고정출연하는 등 탤런트 생활도 시작했다. 또한 야구 칼럼도 쓰고 있다.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FCtAX45lgHcf4s0vAgAxww
4. 플레이 스타일
공수를 겸비했기 때문에 수비형 포수라고 봐야 할 지 공격형 포수라고 봐야 할 지 애매하다. 하지만 수비형 포수라고도 부를 수 있고 공격형 포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타격은 우선 컨택면에서는 떨어지지만 힘이 좋고 극단적으로 어퍼스윙을 하는 스타일이라서 15~20개의 홈런을 칠 수 있다. 아마 타자친화구장이 홈인 팀으로 갔으면 20개 이상의 홈런을 꾸준히 칠 수 있었을 듯. 아쉽게도 홈런 20개를 친 해는 없었다. 그리고 컨택이 떨어진다고는 하는데 2할 5푼~2할 7푼 정도의 타율을 꾸준히 냈다. 선구안은 평범한 수준. 종합해보면 준수한 중장거리포 수준의 타격을 보여주었다. 포수로써는 이정도만 해도 리그 상급의 공격형 포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공격형 포수로는 이미 끝판왕 아베 신노스케와 죠지마 켄지가 있어서 그렇지...
수비는 몸쪽으로 집요하게 찔러넣는 포수 리드를 좋아했다. 그리고 포구 및 송구동작이 빠르고 어깨가 강해서 도루저지율이 리그 최고 수준이었고, 블로킹도 리그 최상급이었기 때문에 포일이 정말 없었다. 53경기당 1포일 수준이었는데, 30경기당 1포일을 기록한 선수가 통산 3위, 43경기당 1포일을 기록한 선수가 통산 2위인 것을 감안하면 블로킹 실력은 역대 포수들을 통틀어서 군계일학 수준이었다. 당장에 뛰어난 수비력에 컨택은 떨어지지만 파워가 좋은 또 다른 포수인 호소카와 토루와의 국가대표 자리 경쟁에서 매번 이겼다. 호소카와 역시 수비력이라면 퍼시픽리그 최고수준이었는데도.
5. 기타
- 2010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하자 사상 최다의 하극상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하였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 2012년 간호사와 결혼하여 2014년에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 은퇴식에서 노래를 불렀다. 들을지 말지는 알아서 결정하자.(...)
- 비흡연자다. 본인 유튜브에서 2군 대우를 얘기랄 때 2군 캠프는 1인실을 안 주고 여러명을 한 방에 넣는다는 얘기를 하면서 밝혔다. 가장 맘에 안 드는 룸메이트가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받았을 때 흡연자가 제일 싫었다고 대답했다.
- 은퇴 후 유튜브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장 3개와 싫어하는 구장 3개를 얘기할 때[13] 평생 홈이었던 마린 스타디움을 좋아하는 구장 3위로 꼽았다. 이유는 수비가 12개의 1군 메인 홈구장 중에서 제일 까다로웠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유명한 거센 바닷바람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데이 게임 때는 백스크린 뒤에 해가 떠서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것도 악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1, 2위를 주기엔 다른 구장들이 더 좋았던 기억이 많아서라고. [14][15]
[1] 마지막 해 등장곡. 사실 등장곡을 몇 번 바꿨다. 2014년 기준 한국 가수의 노래를 등장곡으로 쓰던 치바 롯데 마린즈 선수는 사토자키 외에도 빅뱅의 Fantastic baby를 쓴 이구치 타다히토, 소녀시대의 Gee를 등장곡으로 쓴 G.G.사토, 카라의 GO GO サマー!를 등장곡으로 쓴 헤이우치 히사오까지 총 4명이다. [2] 가사는 없었다.[3] '''歓声の渦巻いて 大きく放り込め 歌え! 踊れ! 打ちまくれ! いざ行け里崎(함성이 소용돌이친다 크게 던져 넣어라 노래해라! 춤춰라! 마구 쳐내라! 자 가자 사토자키)'''[4] 프레시 올스타전이란 2군 올스타전을 말한다. 한국으로 치면 퓨처스리그 올스타전. MVP는 당연히 한국으로 치면 미스터올스타.[5]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은 2008년까지 최우수 선수상 1명+우수 선수상 4명을 뽑았다.[6]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은 2009년부터 우수 선수상을 폐지하고 베스트 타자상과 베스트 투수상을 그 자리에 끼워넣었다. 즉 과거의 우수 선수상이랑 똑같다.[7] 롯데는 1998년 이후로 주장 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다가 사토자키가 주장을 맡으면서 부활.[8] 사토자키보다 2년 선배였다. 풀타임 주전포수로 뛰고도 2할이 될락말락한 절망적인 타격을 보유한 수비형 포수였던데다가 하필 우타자여서 플래툰으로 돌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토자키가 주전을 먹은 이후 급속도로 전력외로 전락하여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되었다. 문제는 주니치에서도 전력 외로 분류되어 커리어 하이 시즌이 27경기 출장일 정도로 안습의 나날을 보냈다. 거기서 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트레이드됐으나 여기서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결국 소프트뱅크에서 은퇴를 선언. 신인 시절에는 주전포수였는데 마지막 3년간은 3년 동안 6경기 나올 정도로 용두사미의 선수생활을 했다. 참고로 사토자키는 본인 유튜브에서 이 선수에 대해서 말하길 자기가 1군에서 나오기 전까지 주전포수를 하고 있었던 선수였고, BB등급 선수라고 했다(...). 그래도 하시모토는 등급 얘기도 안하고 그냥 하시모토 타스쿠 포수 하고 넘어간 걸 보면 그거보단 나은 평가일지도...인데 사실 사토자키 유튜브 보면 본인(...)과 오오무라 사부로를 SS로 해 놓고, 통산 200세이브를 넘기고 메이저리그까지 밟았던 코바야시 마사히데는 S로 평가했으니 그냥 재미로만 생각하는 게 좋다.[9] 사토자키와 동갑이었지만 고졸이라 프로에 빨리 데뷔했다. 하시모토는 좌타거포 스타일의 공격형 포수였기 때문에 그래도 주전포수는 못 됐지만 플래툰으로 꾸준히 출장하는데는 성공하였으며 사토자키가 부상으로 많이 못 나온 2008년에는 주전포수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시즌 이후 확실히 주전포수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FA를 선언하여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로 이적하였으나 이적 후에 노쇠화로 더 기회를 못받고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방출당했다. 커리어를 보면 확실히 사토자키의 그늘에 가려져서 실력에 비해 빛을 못 본 선수. 뒤늦게 포수 뎁스가 약한 요코하마로 간 후에는 부상과 노쇠화 때문에...[10] 선발 포수 2경기, 지명타자 1경기, 교체 포수 1경기. 나머지 두 경기는 전부 하시모토가 선발포수로 나왔다.[11] 아베랑 비교하면 초라해보이는 스탯인데 애초에 투고타저에 수비를 중시하는 일본에서는 저런 포수 몇 명 없다. 투수구장인 마린 스타디움을 홈으로 쓴 것을 생각하면 더 고평가받을 수 있다.[12] 그러니까 다른 팀에서 뛴 적 없는 포수.[13] 참고로 편하고 불편하고를 다룬 것이 아닌 순수하게 구장에 대한 기억이 좋고 안 좋고만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편하고 불편하고를 기준으로 삼으면 무조건 돔구장이 최고라고(...) 다만 저것은 좋아하는 구장 한정이고, 싫어하는 구장 3개는 시설이 열악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꼽기는 했다.[14] 참고로 2위는 2년 연속 만루홈런을 쳤던 메이지진구 구장, 1위는 후쿠오카 PayPay 돔.[15] 싫어하는 구장으로는 라커룸이 더럽고 여러 다른 시설을 한 방에 몰아넣어서 공간이 비좁은 등의 문제를 가졌던 히로시마 시민구장을 3위로, 흙이 푹신푹신하고 천연잔디도 길어서 수비가 어려운데다가 덕아웃과 라커룸이 멀리 떨어져있는 홋토모토 필드 고베를 2위로, 백네트가 홈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폭투가 나오면 2베이스 이상 내주기 쉬워서 포수였던 사토자기에게 애로사항이 컸던 삿포로 돔을 1위로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