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바 롯데 마린즈
1. 개요
2. 마스코트
3. 홈구장 - ZOZO마린 스타디움
4. 구단 역사
5. 팀 특징
6. 관중수 추이
7. 시즌 성적 및 이야기거리
7.1. 2009년 시즌
7.2. 2010년 시즌
7.3. 2011년 시즌
7.4. 2012년 시즌
7.5. 2013년 시즌
7.6. 2014년 시즌
7.7. 2015년 시즌
7.8. 2016년 시즌
7.9. 2017년 시즌
7.10. 2018년 시즌
7.11. 2019년 시즌
7.12. 2020년 시즌
7.13. 2021년 시즌
9. 감독ㆍ코칭스태프
10. 구단 스태프
11. 주요 선수
12. 역대 성적
13. 관련항목
14. 둘러보기
1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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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치바현 치바시. 모기업은 롯데그룹[8] .
대한민국의 프로야구단인 롯데 자이언츠와 한 형제로, 구단주도 창업주 신격호로 같았다.[9] 하지만 구단주가 야구단만 챙길 수는 없으니 구단주 대행을 신격호의 차남 신동빈 씨가 맡고 있었고, 현재 신동빈은 일본 롯데도 아니고 신격호 창업주의 별세로 한국 롯데를 이을 후계자가 된 상황이라서 부자가 쌍으로 구단에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문제.[10][11] 이 때문에 하단에 "구단 내부도 더러운 권력싸움"으로 시작되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신격호와 신동빈의 사이가 벌어진 지금은 야구단의 책임소재가 더욱 더 애매해진 상황. 그래도 일 자체는 자이언츠보다는 잘한다는 듯...신동빈 한국 롯데 회장은 2018년 2월 23일 치바 롯데의 이사직을 제외한 치바 롯데의 지위에서 물러났다. 롯데 자이언츠의 형제팀이라는 사실 때문에,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마린즈를 '''본캐''', 자이언츠를 '''부캐'''라고 칭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 때문에 '''지'''바 롯데 마린즈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한 일본 프로야구팀의 지역명 표기를 잘 안하는 한국 언론[12] 에서도 이 팀과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는 지역명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혹시라도 롯데 자이언츠와 헷갈릴까봐 구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매년 비시즌 기간에 롯데 자이언츠와 치바 롯데가 연습경기를 치렀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언론에 보도되는데, 기사 표제에 롯데 자이언츠는 그냥 '롯데', 치바 롯데 마린즈는 '치바 롯데'라고 약칭을 표기하기도 한다(예1, 예2 등등).
중국어 표기는 롯데그룹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롯데그룹의 롯데는 樂天(乐天)으로 쓰고 있지만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때문에(라쿠텐이 한자로 樂天[13] ) 혼동을 피하고자 羅德(罗德)[14][15] 로 표기한다. 참고로 중화권에서는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도 치바 롯데처럼 羅德(罗德)으로 강제 개명하는 경우가 있다(...).[16]
물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창단되기 전에는 치바 롯데 마린즈를 樂天(乐天)으로 표기했었고, 현재도 중국어권에서 종종 쓰이는 듯하다. 중화권에서는 예전 중국어 표기대로라면 롯데그룹이 같은 이름(樂天)을 가진 프로야구단을 무려 네 개(한국에 1개, 일본에 2개, 대만에 1개)를 거느리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고, 바꾼 표기대로라면 치바 롯데는 다른 기업 산하의 구단이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라쿠텐 몽키스,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가 롯데그룹 산하의 형제 구단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다른 팀 팬들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깔 때 흔히 ‘롯데노 파쿠리(ロッテのパクリ, 뜻은 롯데 베낀거)’라고 하는데 이 롯데가 치바 롯데 마린즈다.
2. 마스코트
참고로 마 군,린 짱,즈 짱의 앞글자를 따면 마린즈가 된다
3. 홈구장 - ZOZO마린 스타디움
치바 마린 스타디움 항목 참조.
여담으로 일본프로야구 12팀 중 유일하게 고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제2홈구장이 없다. 2020년 기준 토야마와 미토에서 경기를 치르는데 토야마의 경우는 여러 구단이 돌아가면서 경기를 하는 구장이라 제2홈구장이라 할 수 없고, 미토는 해당 구장에서 28년만에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것이고[18] , 롯데가 이바라키에서 경기를 한 것이 61년 만이기 때문에 롯데가 앞으로 매년 꾸준히 경기를 여는 것이 아닌 이상 제2홈구장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듯. 그나마 코로나 19로 인해 토야마와 미토 경기가 모두 취소되면서 말짱 꽝이 됐다.
예전에는 이시카와현립구장에서 25년간[19] 꾸준히 롯데 홈경기를 해 왔으나 2005년 이후로는 주최하지 않고 있다.
4. 구단 역사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을 모기업으로 하는 '''마이니치 오리온즈'''로 창단했다.[20] 그리고 1958년 다이에이(大映) 영화사가 운영하던 다이에이 유니온즈를 흡수 합병해서 '''다이마이 오리온즈(다이에이+마이니치)''', 1964년 '''도쿄 오리온즈'''를 거쳐 1969년 롯데 오리온즈가 되었다가[21] 1992년 치바시로 연고지 이전하며 지금의 팀명으로 변경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0년대 퍼시픽리그의 맹주로 '''마이니치 오리온즈''' 시절인 1950년 초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으며,[22][23] 이후 10년 단위(1960년, 1970년)로 퍼시픽리그 우승을 했다.[24] 저때까지는 나름 잘 나가던 시절. 가네다 마사이치가 감독으로 활약하던 1974년 후기리그 우승. 그 후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를 꺾고 이어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센트럴리그 10년 연속 우승 을 저지한 센트럴리그의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25] 그 이후로 1977년 후기리그 우승, 1980년~1981년 전기리그 우승을 제외하곤[26] 1984년과 1985년 연속 2위한걸 제외하고는 롯데 자이언츠 마냥 쭈욱~ 하위권을 맴돌았다가 명장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취임한 이후 1995년 퍼시픽리그 2위, 그리고 2차 집권기인 2005년 드디어 31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과[27]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2010년, 전 해의 부진을 딛고 주니치 드래곤즈를 4승 2패 1무로 꺾고 다시 한 번 일본시리즈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정규 시즌 우승이 아니라 리그 3위를 차지한 뒤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거쳐 일본시리즈에 올라갔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우승이라고 인정할수 없다고 까이는 경우가 있다. [28]
유독 흑역사가 많은 구단으로 유명하다. 첫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못지 않게 떠돌이 생활을 한 걸로 유명한데, 다이마이 - 도쿄 - 롯데 오리온즈 시절에 사용했던 도쿄 스타디움이 철거된 후 '''떠돌이 생활을 5년씩이나 했다.'''[29]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홈구장을 미야기 구장(現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의 홈구장)을 기반으로 고라쿠엔 구장,[30] 메이지진구 구장, 가와사키 구장 등을 떠돌아 다녔다. 이 때가 그 유명한 '''집시 롯데''' 시절. 1978년에 신축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차지하기 위해 타이요 훼일즈와 병림픽을 벌였는데, 결국 밀리는 바람에 타이요 훼일즈가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가고, 롯데 오리온즈는 타이요가 쓰던 낡은 가와사키 구장[31][32] 을 전전한 흑역사가 있었다. 구단에서는 '''"TV로는 볼 수 없는 가와사키 극장(テレビじゃ見れない川崎劇場)"'''이라고 하여 광고도 하고 그랬지만...
둘째, 이 팀은 한국의 형제팀의 비밀번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비밀번호를 찍은 경력이 있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9년연속 B클래스를 찍었고''' 중간에 1995년에 2위 찍고 '''1996년부터 2004년까지 B클래스를 찍었다.''' 중간에 한번 끊지 못했으면 난카이/다이에 호크스 이상의 기록을 세웠을지도...1995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팀을 리그 2위로 올려놓으니까 GM 히로오카 타츠로[33] 가 이에 열폭했는지 몰라도 결국 두 사람간에 트러블이 생겨 결국 이듬해인 1996년에는 감독이 에지리 아키라로 바뀌었는데, 이 사람이 히로오카 타츠로의 와세다대학 후배. 결국 1996년 리그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둘은 동반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콘도 아키히토 감독이 있었던 1998년에는 '''일본프로야구 팀 최다 연패기록이자 아시아 프로 스포츠 최다 연패[34] 타이'''인 18연패를 수립하였다[35] . 영상 이건 뭐 삼미 슈퍼스타즈도 아니고...이 해에는 결국 18연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최하위였는데, 충격과 공포인 건 이 해에 팀타율 1위, 팀 방어율 2위. 우승팀인 세이부 라이온즈와는 불과 9.5게임차 밖에 안 났었다. 실제로 이 연패직전까지는 A클래스(3위권)이었다. 연패도 경기때마다 상황이 꼬이고 꼬이다보니 기록하게 된 것.[36][37]
셋째, 선수들에게 선호하는 구단이 아니었다. 1990년 드래프트 당시 롯데, 세이부, 야쿠르트, 킨테츠, 닛폰햄, 주니치, 히로시마, 한신 등 무려 8구단에서 좌완 에스 투수 코이케 히데오를 지명했고 롯데가 추첨 끝에 교섭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코이케는 드래프트 기자회견장에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쇼크네요"라는 말까지 했고 입단을 거부하며 사회인야구로 발길을 옮겼다. 세이부, 야쿠르트, 요미우리 등을 입단 희망 구단으로 밝혔고 '''특히 롯데는 가장 가고 싶지 않다'''고까지 말했음에도 당시 롯데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이치가 강행지명한 것.[38] 또한 2006년 드래프트에서 오키나와의 고교생 투수 오오미네 유타를 놓고 소프트뱅크와 롯데가 동시에 고교생 드래프트 1라운더로 지명했는데 롯데가 교섭권을 획득하자 규슈공립대 진학까지 고려하다가 결국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39][40]
5. 팀 특징
원래 팀 컬러는 근성있는 플레이가 특징인 팀. 특히 9월 이후의 성적이 압도적으로 좋아서 가을의 롯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또 상대팀이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일 경우 어지간해서는 지지 않는 끈끈한 야구를 구사하는 덕분에 '''퍼시픽리그의 대표적인 고춧가루 부대'''로 기억에 남았고, 승률 5할도 못 넘겨 쩔쩔매는 팀 치고는 상대적으로 컬트적인 인기가 있었다.[41] 대표적인 예가 1988년 10월 19일, 10.19라고 불리는 킨테츠 버팔로즈의 리그 우승을 저지한 시즌 마지막 더블헤더 경기나, 다음 해 세이부-오릭스-킨테츠의 퍼리그 우승 3파전에서 오릭스를 떨어트린 10월 13일 경기 등에서 고춧가루 부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성적은 4위가 제자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21세기 들어와서는 좀 강해진 편. 더 무시무시한 사실은 이 팀은 2016년 기준으로 B클래스 횟수(39회)가 A클래스(28회)보다 많은데 통산 승률이 5할이 넘는다. 5할에서 70승을 더한 정도.
그리고 잘 안 알려져 있지만 2004년 재개편 이전 NPB 12구단 중 가장 늦게 최하위를 한 팀이다. 1983년 창단 33년 만의 구단 사상 최초로 최하위를 찍었다(...).[42] 또 롯데 오리온즈 시대의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1974년 이후[43] '''단 한번도 승률 1위에 오른 적 없다.''' 전후기리그 플옵 시절인 1977, 1980, 1981년 플옵진출 당시엔 승률 1위 달성에 실패했고, 현재까지 마지막 리그 우승인 2005년은 페넌트 승률이 2위였고, 2010년이야...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이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이 팀에서 처음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도끼투구법(マサカリ投法)으로 유명한 '일요일의 남자' 무라타 쵸지, 일본프로야구의 선인(仙人) 에노모토 키하치, 미스터 롯데 아리토 미치요 등이 유명하다.
이 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 선수는 일본프로야구에서 몇 안되는 언더스로 투수인 와타나베 슌스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활약하기도 한 이구치 타다히토 등이 있으며, 이승엽도 2004년~2005년에 선수생활을 했었다. 2010~2011 시즌에 김태균이 이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구단주가 한국계인지라 한국인 혹은 한국계 선수와 인연이 각별한 구단이다. 장훈 옹의 선수생활 마지막 팀이자 일본프로야구 유일무이의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팀이었고, 백인천도 일본 시절 말년 이 팀에서 몇년간 뛰었다. 카네다 마사이치는 이 팀 감독으로, 동생 카네다 토메히로는 에이스 투수로 1974년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롯데에서 18년 간 뛰며 1970년대 강타선을 이끌었던 '미스터 롯데' 아리토 미치요(본명 김유세), 현역으로는 니시오카 츠요시 등이 이 구단을 빛낸 한국계 선수. 응원단도 한국에서 레이지본 등에서 밴드 활동을 한 진 토시오씨가 오랜 기간 응원단장을 맡으면서 한국 노래를 많이 사용했는데, 2005년의 경우 이승엽을 포함한 주전라인업 선수 중 4명이 한국노래를 응원가로 썼을정도. 직접 들어보자. 이마에, 후쿠우라, 이승엽, 사토자키의 응원에 주목할 것. 후쿠우라 응원가 전에 부르는 히트콜도 두산의 응원과 흡사하다.[44] 노라조의 해피송도 자주 쓰이는 응원가 중 하나다. 2010년을 전후한 대부분 응원가들의 원곡이 정리되어 있는 페이지. 그리고 2014-15 오프시즌 때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하던 이대은을 영입하여 한국선수와의 인연을 잇고 있다.
2010년 시즌, 동방프로젝트의 BGM인 U.N. 오웬은 그녀인가?가 응원곡으로 등장했다. 충공깽. 하지만 이 응원가가 대타, 대수비 요원인 코베 타쿠미 선수의 응원가다보니 실제로 1년간 이 응원가를 부른 횟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이...또한 2010년에는 아이돌 마스터의 キラメキラリ도 응원가로 썼다.# 이것으로 일본 갈매기 응원단 어딘가에 오덕군자가 계심을 알 수 있다. 안타 쳤을 때 나오는 곡 중 하나이며, 이게 계기가 되었는지 반다이 남코 게임즈와 정식으로 콜라보레이션하여 타카츠키 야요이가 2017년도 응원 아이돌로 매치업되기도 했다.
롯데는 1992년에 이름과 연고지가 바뀌면서 여러가지 의미에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오리온즈, 마린즈로 나누기보다는 구장 이름으로 나누는게 일반적) 가와사키 구장 시대에는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의 팀이었...다라기보다는 워낙 인기가 없어서 아무도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었다. 오히려 부진한 성적과 얌전한 선수들보다는 퇴장을 일삼는 감독이나, 한산한 구장에서 마작을 친다던가, 나가시소멘을 먹는다던가(...)[45][46] 는 등 기행을 일삼던 관중들 때문에 여러모로 특이한 의미로서나 주목을 받는 팀이었다가, 치바로 연고이전 하면서부터 더러운 이미지로 가득찬 구단이 되어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제기된 약물문제가 있다. 당시 롯데 선수들이 암페타민계열의 약물인 그리니(통칭:환경운동가)를 복용했다고 주간 아사히가 기사를 냈고, 구단은 반박은 했으나 끝내 고소는 하지 않아, 뒤가 구려서 그렇다는 말이 많았다. 실제로 2006년에 오릭스, 요미우리 출신의 노무라 타카히토가 약물소지로 걸리면서 증언한 덕분에 팬들도 거의 사실로 인정하는 분위기.[47] 이게 큰 스캔들로 번지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터져나온 다이에의 사인 훔치기(그것도 팬까지 한패가 된...)덕분에 물타기되었고, 어차피 그 기간 동안 위에서 서술했듯 팀 성적은 개판이었기에 다른 팀 팬들도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약물 이외에도 12개 구단 중 가장 더티한 플레이로도 유명했다. 2009년 4월 세이부전에서 하야카와 다이스케가 포수를 향해 배트를 던진 악질적인 플레이는 많은 지탄을 받았다.[48] 이 외에도 볼 숨기기나 2006년에 이승엽의 홈런을 날려먹은 주루플레이 어필, 글러브 집어던지기[49] , 스파이크 날 세우기, 상대팀 포수 메치기[50] 등 주옥같은 플레이가 많다.
여담으로는 '도시락의 저주'가 있다(...). 팀에서 선수들의 이름을 딴 도시락을 만들면 해당 선수의 선수생명이 꼬인다는 저주이다. 출처 이 글이 올라온 뒤에도 자신의 이름을 딴 먹거리가 출시된 선수들의 커리어는 계속해서 꼬였다. 채드 허프만은 그 전까지 약 4개월동안 4홈런을 쳤는데허프만 덮밥이 나온 뒤로 1년 반 동안 0홈런이라는 졸전을 보이고 방출, 이대은 역시 이대은 덮밥이 나오기 전까지 4개월동안 8승을 올렸는데 덮밥이 나온 후 1년 반동안 꼴랑 1승을 올렸고 알프레도 데스파이네는 데스파이네 덮밥이 나온 해에는 잘했으나 그 다음 시즌을 말아먹었다. 2019년 현재도 자신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음식을 발매한 히라사와 타이가와 나카무라 쇼고가 작년에 비해 엄청난 부진에 빠져있다. 사실 2019년 기준으로는 억지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주전급인 선수들이 죄다 자기 이름을 걸고 음식을 내기 때문에.
2013년, 가까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사이타마 vs 치바 라이벌 시리즈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두 팀은 원래 서로 발목 잡는 구단으로 라이벌 역사가 깊은 편이다. 고춧가루 부대 때가 딱 세이부 황금기다 보니 아무리 세이부가 최강자라 해도 '롯데를 죽여야 결승 간다'는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황금기가 끝나도, 6강 클라이맥스 시리즈엔 사이타마 세이부와 치바 롯데가 세트로 올라갔다 떨어졌다 하고 있다. 오죽하면 치바 롯데 응원가 중에 세이부를 이기자고 하는 응원가가 있을 정도다.
센트럴리그와의 교류전을 맞이해서 구단에서 기념 광고를 내는데, 센트럴리그 6개 구단에 대한 디스의 수준이 대단하다.참고. 2017년에는 대놓고 한신전에서 33-4를 언급할 정도이다.(...)[51]
나루세 요시히사의 FA 보상선수로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마스코트'''를 지명했다(나루세는 먹튀...).
그리고 센트럴리그의 한신 타이거스와 함께 '''일본시리즈 우승을 홈구장에서 맛본 적이 1번도 없다.''' 기록을 보면.
이것도 안습하다면 안습하겠다(...). 참고로 4번 다 서부지역 팀을 상대로 이겼다.[54] 홈구장인 치바 마린 스타디움도 마찬가지로 일본시리즈 우승 확정팀을 배출해낸 적이 없다.
홈런타자와 유난히 인연이 없는 팀이기도 하다. 홈구장에 홈런 라군을 세우기 전 롯데 소속으로 마지막으로 한 시즌 30홈런을 때린 타자는 2005년의 이승엽이었으며[55] , 일본인 30홈런 타자는 '''1986년의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마지막으로 30년이 넘도록 단 한명도 배출한 적이 없다. 마이니치-다이마이 시절까지 합쳐, 팀 역사를 통틀어 일본인 30홈런 타자는 벳토 카오루. 야마우치 카즈히로, 오치아이 히로미츠 단 3명뿐이다. 일본인 좌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은 2008년 오마츠 쇼이츠가 기록한 24홈런(...)에 불과하다. 소프트뱅크로 이적하자마자 홈런왕이 된 알프레도 데스파이네의 사례를 볼 때 역풍이 불고 파울그라운드가 드넓은 홈구장 마린 스타디움의 환경이나, 희소한 파워히터를 사들이거나 오래 붙잡기 어려운 스몰마켓 팀이라는 약점이 뼈아픈 부분. 그러나 1군 거포와는 인연이 없는 대신 아오마츠 케이요, 코베 타쿠미, 이노우에 세이야, 키요타 이쿠히로[56] 같은 2군 본즈들은 줄기차게 배출한 것을 보면 육성 환경에도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심지어 팀홈런 1위는 '''롯데 오리온즈 초창기인 1971년(...)'''을 마지막으로 46년 동안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극악의 홈런 때문에 10홈런만 칠 수 있어도 클린업에 들어갈 수 있다(...). 다음은 마지막 30홈런 타자가 등장한 2005년부터 다시 나타난 2019년까지의 치바롯데의 선수별 홈런 기록이다.
참고로 이 13년 동안의 팀내 1위 홈런타자의 홈런 갯수의 평균을 내 보면 반올림해서 19개이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공인구가 바뀌기 전에는 반올림해서 22홈런, 바뀐 이후에는 17홈런. 일본인 타자로만 한정하면 13년 전체 평균 15홈런, 공인구 바뀌기 전에는 18홈런, 바뀐 이후에는 12홈런(...).
2018시즌 현재는 대타 위주로 나오면서 100타수도 못 나오고 7홈런을 친 맷 도밍게스와 시즌이 45%정도 지난 상황에서 56경기 10홈런을 친 이노우에 세이야 정도는 20홈런에 도전해 볼 만 하다. 특히 프로 첫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이노우에가 20홈런을 달성한다면 5년만에 등장한 토종 20홈런 타자이자 공인구 변경 이후 2번째로 20홈런을 친 토종 타자가 된다. 결국 도밍게스는 팀에서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바람에 7홈런에서 더이상 홈런을 추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노우에는 9월 8일 시즌 20호 홈런을 치면서 5년만에 롯데에 토종 20홈런 타자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2019년 8월 22일 시즌 20호 홈런을 치면서 2년 연속 20홈런을 넘겼다. 이 기록은 1990년대 후반(...)에 하츠시바 키요시가 기록한 이후 거의 20년만이라고...
2019년에는 두자릿수 홈런을 친 타자가 6명이고 30홈런 타자가 14년만에 나왔지만 펜스를 당긴 것 때문에 피홈런도 퍼시픽리그 1위를 찍어버렸다(...).
여담으로 일본 프로야구 구단중에서 팬 서비스가 가장 좋기로 유명한 구단이라 한다. 그 이유는 팬 서비스가 연봉고과에 반영되기 때문. 비슷한 예로 도호쿠 라쿠텐 이글스도 재계약시 팬 서비스를 어느 정도 참조한다고 하긴 하지만, 치바 롯데는... 물론 팬 서비스만 좋다고 연봉을 올려주는 것은 아니고 프로답게 성적에 플러스로 팬 서비스 현황을 보아 좀더 줄지 말지를 정한다고 한다.
2020년 현재도 파워히터 문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용병타자 브랜든 레어드와 레오니스 마틴, 국내 선수는 이노우에 세이야 한 명에게 의존하는 상황. 그나마도 레어드는 부상으로 시즌의 대부분을 날렸고 이노우에는 후반기에 극심한 부진에 빠지면서 15홈런도 치지 못했다. 유일하게 20홈런을 넘긴 마틴도 시즌을 2주 정도 남겨두고 시즌아웃. 또한 작년에 17홈런을 친 나카무라 쇼고는 컨택에 집중한 것인지 홈런이 반토막이 났고, 2017년 1라운더인 거포 유망주 야스다 히사노리는 풀 시즌을 뛰면서 겨우 6홈런 쳤다(...). 결국 오늘도 롯데의 타격코치들은 까이는 상황. 다만 롯데의 투수코치 쪽은 1군 코치인 요시이 마사토는 그렇게 좋은 평을 못 듣지만[72] , 2군 투수코치인 카와고에 히데타카[73] , 오노 신고, 오토나리 켄지는 고졸 하위픽 투수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호평을 받고 있다.[74]
5.1. 서포터즈
가와사키 시대와 마린 스타디움 시대를 나누는 또 한가지 특징은 바로 팬들의 성향. 가와사키 시대는 팬들이 적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마린 스타디움으로 넘어오면서 열성팬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매너는 최악으로 변하게 된다. 롯데 팬은 그 수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다는 인상이 있고, 2000년대 초반에는 구장에서 쓰레기를 솔선수범해 줍는 등 좋은 매너로 지역에서 표창을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반면 이러한 결속력은 (주로 상대 팀에 대해)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매너 나쁜 팬이라고 하면 한신이나 주니치를 먼저 떠올리지만, 한신, 주니치는 보다 팬 수가 많아서 눈에 띄는 것이고 찌질함과 패악질의 순도에 있어서는 롯데를 따라갈수가 없다고 한다.
롯데의 악질적인 팬의 특징은 대부분이 마린 스타디움 시대와 함께한 2, 30대라는 데 있다. 한신의 경우 대부분이 술 취한 아저씨라는 이미지이지만, 롯데의 경우는 잘 결집된 유럽축구나 J리그의 훌리건에 가깝다. 그 이유는 롯데의 독특한 응원문화에서 찾을수 있는데, 대개 다른 팀의 응원은 트럼펫, 플라스틱 메가폰/배트 등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일본 야구의 응원이지만, 마린즈 팬들의 응원은 축구, 그 중에서도 일본 J리그 서포터들에게 깊게 영향을 준 이탈리아의 '울트라스'식의 응원문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응원 단장이 아니라 콜리더가 확성기를 들고 응원을 지휘하고, 플라스틱 메가폰/배트 대신에 박수를 이용하고, 응원가 자체도 일본 야구 특유의 '4소절의 응원가 - 2소절의 응원 구호'로 이어지는 응원가가 아닌 축구의 응원가에 가까운 4소절 내지 8소절의 응원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다른 구단에서 '시야 방해' 라는 명목으로 터부시되는 개인 깃발과 게이트기(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정사각형의 깃발) 등이 종종 이용되며[76] 반데이라(남미 축구 문화에서 파생된, 관중석을 세로로 길게 덮는 천)가 이용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타 구단과는 응원 문화가 크게 다른 편.[77]
다만 2009년을 전후하면서 아래 서술할 구단 내부 권력 싸움(...)의 여파로 막장이 된 분위기에서 기존의 응원을 주도하던 외야 응원단[78][79] 이 강도높은 프론트 디스를 벌임과 함께, 타팀 팬들과 충돌을 빚는 등 폭주하는 일들이 벌어지며 결국 시즌 종료 뒤 해산하게 된다.[80] 그 뒤 응원단이 전면적으로 물갈이[81] 되었고, 기존의 응원가들이 대대적으로 교체되는 등의 홍역을 치루었다.[82] 2010년에 롯데가 극적으로 우승한 뒤로는 매너 문제는 상대적으로 잦아든 듯. 오히려 그 해 일본프로야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을 뽑는 쇼리키 마쓰타로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결국 같은 팀의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이 수상했지만, 좋은 지도력을 보인 감독이나 팀 리더급 선수가 주로 받는 상이니만큼 팬들이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것부터가 이례적인 케이스라고.
어쨌든 일본 야구계에서도 열성적인 응원을 하는 것으로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유명하다. 단 현재 들어서는 바비 발렌타인이나 그 이전 시절보다 응원 포스나 열기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얘기가 롯데 팬덤내나 타 구단에서도 자주나온다. 2009년 니시오카 사건[83] 으로 무기한 출입금지 당하고 해체한뒤 현재 사회인 야구단 "도쿄 메츠"의 응원단, 후원자로 있는 MVP의 복귀를 바라는 롯데팬들도 있었지만 [84] 2009년 니시오카 사건에 대해 MVP는 2017년 지금까지 사과 한번 없고 오히려 자신들이 그렇게 응원하던 팀과 연고지를 버리고 도쿄 메츠란 팀으로 가는 짓거리를 저지르니 거기에 대한 배신감도 겹쳐 그들을 거부하는 팬들도 많다. 여러모로 MVP는 일본 야구 응원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지만 그만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집단1.
2016년에는 MVP 응원가가 몇몇 부활해 후쿠우라와 사부로등 선수응원가와 스킨헤드러닝, 엘리제, 프라이드등이 쓰였지만, 전반기가 끝날즈음해서 암묵적으로 쓰이지않다가 올스타 이후로 완전히 쓰이지않게 되었다. 당시 공식적인 발표에서는 "응원만을 위해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MVP의 잔당들과 모종의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하며 옛날응원가를 다시 쓰지않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팬들이 스킨헤드러닝등 옛날 응원가를 다시 부르지 못하는것을 아쉬워 하긴 했지만, 대부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며 수긍을 하였다. 이런 반응들로 보면 MVP가 아직도 팬들사이에서 좋은 이미지는 아닌듯하다.
또 대만 프로야구의 라미고 몽키스와 구단간 교류로 비시즌 경기를 치루는데 이 과정에서 치바 롯데 서포터즈의 응원 문화와 응원곡이 대만으로 전파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위의 영상에서 고시엔 구장에서 서포터들이 부르는 "We Are" 챈트의 경우 라미고 몽키스 역시 사용하고 있다.[85]
현재 서포터즈 이름은 Team 26. 특이한 점은 팬클럽이 6개의 등급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 때 주니어 회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이용이며 프리미엄 골드 회원은 연간 티켓을 사는 등의 소수에게만 허용되어 있으므로 일반인들에게는 사실상 골드, 레귤러, 캐주얼 레귤러, 마린즈 총 4개의 선택권이 존재한다. 이 중 골드 회원은 10만원이 넘는 돈을 내는 대신 기념품과 티켓을 많이 주며 이벤트와 티켓 판매에서 최우선권을 얻는다. 레귤러와 캐주얼 레귤러는 그냥 일반회원인데 캐주얼 레귤러는 기념품이 없는 대신에 만원이 싸다.[86] 마린즈는 무료회원이다. 물론 무료회원은 포인트가 쌓이는 것 빼고는 혜택이 전혀 없다. 사실상 거의 명예회원. 회원카드도 구장에서 직접 가입하지 않는 이상 안 나온다. 그 외에도 여러 마린즈 팬 소모임이 있다. 개중에는 외국인을 받아주는 소모임도 있으니 잘 찾아보자.[87] 참고로 이런 소모임 중에서는 MVP 출신들이 모인 소모임도 있으며, MVP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미야기와 오사카라고 한다.
단 응원 열기는 옆 나라의 자매팀처럼 과격하고 엄청나지만, 인기 자체는 일본에서 꼴찌를 두고 오릭스 버팔로즈와 경쟁하는 수준(...). 2017년 기준 저 두 팀이 가장 인기있는 지역은 아예 없다.[88] 그런데 2018년 조사에서는 치바에서 쿄진을 꺾고 인기팀 1위를 기록했으며, 시가 현은 한신이, 나가노 현은 쿄진이 1위를 차지하면서 뒤바뀌었다. 참고로 도쿄돔 쓰던 닛폰햄이 야쿠르트보다도 인기가 없다고 안습취급을 받았는데, 롯데는 그 닛폰햄보다도 관중동원을 못 했다(...)
여담으로 입장권 예매가 매우 쉬운 편이지만 특정 경기에서의 화력은 인기팀 못지않다보니 이런 특정 경기에는 응원석 예매도 쉽지 않다. 팬클럽 선예매로 들어간 사람이 응원석을 못 가는 일도 일어난다![89] 보통 이런 특정 경기는 개막전이나 특별 행사[90] , 그리고 '''한신 코시엔 구장 원정''', 마지막으로 '''제3구장 경기'''이다.[91][92] 물론 이런 경기도 내야석은 며칠 후에 천천히 매진되거나 아예 자리가 남는 수준이다. 단 예외도 있었다. 바로 '''후쿠우라 카즈야 은퇴 경기.''' 이날만큼은 팬클럽 선예매일에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몰려 '''서버가 뻗어버리는 바람에'''(...) 응원석은 일단 팬클럽 선예매 때 서버가 뻗어버리는 와중에도 조금씩 조금씩 표가 나가서 다 팔려버렸고, 결국 구단 측에서 일반 예매 때 남은 소수의 자리는 선착순이 아니라 추첨 판매로 판다고 공지해버렸다. 비인기팀인데다가 일본시리즈도 거의 못 나가다 보니 이렇게 예매가 몰리는 일은 굉장히 드문 케이스.
5.1.1. 응원가
치바 롯데 마린즈/응원가 항목 참조.
5.2. 구단 안팎의 권력 다툼
구단 내부의 권력싸움 역시 유명하다. 구단의 보스인 신동빈이 사실상 손을 놓고있는지라 사장인 세토야마 류조[93] 를 중심으로 한 수뇌파와,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을 중심으로 한 현장파의 대립이 심하였다. 상술됐듯 발렌타인 1차 취임기(1995) 때 단장인 히로오카 타츠로와 파워게임을 벌이고 모양새 안 좋게 떠난 바 있는데, 이후 2차 취임기(2004~2009) 후반기 즈음에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고야 말았다. 200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발렌타인이 초노 히사요시를 강행지명한 것[94] 을 계기로 그동안 쌓여있던 수뇌파의 불만이 폭발, 주간지에 발렌타인의 비리[95] 를 죄다 까발리면서 발렌타인이 2009년까지만 감독직을 맡게 되면서 사태는 끝을 맺었다.[96] 그리고 이 사실을 메이저리그 팬덤에서도 알고 있는지 2012 시즌을 앞두고 봑빠들이 발렌타인이 건수 하나 터뜨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97]
2015년 이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으로 신격호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매각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성적이나 흥행이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고, 수 년간 적자를 떠안아온 구단이지만 신격호 회장의 야구에 대한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계속 유지해왔는데 신격호가 왕자의 난으로 물러나면서 야구단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 아예 익명의 일본 재계 관계자를 인용해 신격호 본인의 야구단 유지에 대한 의지가 왕자의 난을 부른 지배구조의 취약성의 원인이었다는 논조의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단 2016년 말 롯데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 이후에는 신동빈 회장이 매각설을 부인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2018년 2월 28일에는 최순실 게이트에 뇌물죄로 연루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신동빈 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치바 롯데의 대표이사 대행직에서도 물러난다는 기사가 나왔다.#
6. 관중수 추이
관중수가 양대리그 통틀어 꼴지인 팀이었지만 2018년에 드디어 오릭스를 제쳤다.
7. 시즌 성적 및 이야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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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키☆스타에 나타난 30년간 우승 못한 팀의 비애가 드러난 짤. 우승 못 하고 있는 30년 기간 동안 바다 건너 같은 그룹 산하의 구단은 2번 우승했다.'''이즈미 코나타''': 선생님, 롯데가 우승하면 과자값이 좀 싸질까요? (ㅠㅠ)
'''쿠로이 나나코''': 니 머라카노? '''내 선생되고 30년동안 못하고 있다 아이가.'''
저 대사가 나왔을 때는 2004년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인 2005년에 '''리그 우승+일본 시리즈 우승''', 5년 뒤에는 '''사상 최대의 하극상'''을 일으키는 이변을 보여주며 일본시리즈에 우승하게 된다[98] . 특히 2005년에는 이승엽과 이마에 등 투타의 기막힌 조화로 한신 타이거스를 시리즈 4전 전승, 총합 스코어 33:4로 발라버리며 '33-4'라는 관용어를 만들어 버렸고, 제1회 코나미컵에도 결승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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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7일 애니메이션 불꽃 소방대와 콜라보 이벤트를 개최하여 아서 보일역을 맡은 성우인 코바야시 유스케가 조조 마린 스타디움의 전광판에 출연하여 스타팅 라인업을 읽었다.
7.1. 2009년 시즌
어이없게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해임이 결정 나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팀 상태는 막장 of 막장. 팬들의 분위기도 흉흉하여 외야 응원단이 프론트 비난을 자제할 것을 팬들에게 촉구한 니시오카 츠요시를 디스하는 현수막을 거는 등의 해프닝들이 있었다. 결국 의욕없는 감독 및 코치진과 프런트와 현장의 갈등, 이 사이에 새우등 터져 갈팡질팡하던 선수들의 방황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오릭스 버팔로즈와 함께 퍼시픽리그 꼴찌 경쟁을 하다가 62승 77패 5무로 오릭스 버팔로즈를 제치고 5위를 기록, 다행이 꼴찌만은 면했다.
그나마 이 해에 건질 만한 기록이라고는 6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상대로 한이닝 초최다 15득점 신기록 및 '''1이닝 타자일순 두 번''' 정도...
오프시즌에는 이러한 분위기를 타파해 보고자 하여 후임 감독으로 장기간 수석코치를 맡았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니시무라 노리후미를 선임하였으며 한신 출신 스타급 선수인 이마오카 마코토를 비롯해, 타팀에서 방출되었지만 충분히 써먹을수 있어보이는 선수들을 위주로 대규모 전력보강을 하여 다음 시즌을 대비하였다. 또한 김태균이 FA풀리자마자 그날로 구단주가 달려가 계약서에 도장 받아오는 등, 다른해에 비해 발빠르고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7.2. 2010년 시즌
2010년 시즌 시작 전, 하위권을 예상한 반응이 많았으나 무시무시한 타력을 앞세워서 상위권 싸움을 벌였다. 투수진은 고만고만하지만 홈런-도루 만능 테이블세터 니시오카 츠요시와 무시무시한 도루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는 신인 오기노 타카시, 쩔어주는 출루율에 2루타 머신인 이구치 타다히토와 타점 우걱우걱 씹어먹는 김태균, 한방이 있는 오마츠 쇼이츠까지의 1-5번 라인은 리그 최강의 득점력을 자랑했다. 심지어 요미우리 타선하고 비교하고 기록상으로는 밀리지 않는다. 2005년 일본시리즈의 주역들인 후쿠우라 카즈야, 오오무라 사부로, 사토자키 토모야, 이마에 토시아키 등 베테랑들이 포진한 하위타선도 지뢰밭. 허나 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힘이 딸리는지 3위권으로 추락하고, 여기에 김태균이 체력저하로 후반기에 19타점밖에 못 올리면서 일조를 했다. 결국 막판 뒷심을 발휘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끌고가는 접전끝에 0.5게임차로 간신히 3위에 안착.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 진출하여 2위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격돌한다. 재밌는 점은 닛폰햄과 0.5게임차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놓고 싸운것은 2년전 시즌인 08년에도 있었다. 그 때는 0.5게임차로 닛폰햄이 승리. 역사는 돌고 도는듯(...).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서는 시즌 막판 역전당해 우승 놓치고 헤롱헤롱한 세이부를 상대로 선발싸움에서는 밀렸지만 릴리프진들을 집중 공략하여, 2경기 모두 9회에 동점으로 따라붙는 뒷심을 발휘하면서 연속경기 연장 승리. 2연승으로 세이부를 제끼고 CS 2차전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CS 2차전은 정규시즌 우승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어드밴테이지 1패를 먼저 안고 시작하며 전경기 원정이라는 악조건에 한때 1승 3패로 수세에 몰렸었으나, 시즌중 신나게 쳐맞던 막장 투수진이 갑자기 분발한 덕에 , 벼랑끝에서 3연승으로 기사회생. 우승팀을 제치고 퍼시픽 리그 대표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다. 정규시즌 3위팀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한것은 클라이맥스 제도가 실시된 이후 이번이 처음.[100]
일본시리즈는 3년만에 진출한 주니치 드래곤즈와 대결.[101] 그런데 롯데나 주니치나 자기 지역에서만 인기 있고 다른데서의 인기는 시망인 팀들이라 일본시리즈 1, 2, 5차전을 지상파 전국 방송에서 중계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5차전에 우승팀이 정해지면 일본시리즈 우승 순간을 두 팀의 연고지 이외의 지역에는 공중파로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뻔했다. 단 양팀 전적이 두 팀 모두 2승씩은 건진 덕에, 5차전에 끝날 일이 없어져서 일본시리즈 우승 순간 공중파 불방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비인기 카드의 일본시리즈가 얼마나 초라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102]
그러나 일본시리즈 내용 자체는 대단한 명경기였으며, 특히 6차전은 '''연장 15회, 경기시간 5시간 43분'''이라는 일본시리즈 역대 최장시간 경기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결국 이런 치고박는 명승부 끝에 7차전도 연장 12회까지 가는 혈전을 승리로 장식한 롯데가 2010년 우승을 차지하였다. 구단 역사상 4회째 우승.
이번 우승은 '''일본야구 사상 처음으로 3위팀으로 일본 시리즈 제패'''라는 사상 최초의 대기록이며, 이를 두고 일본 언론은 '''사상 최대의 하극상''' 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기렸다.
7.3. 2011년 시즌
그야말로 선발 부재, 타선 실종중. 전해부터 예견되었지만 투수 공백이 심해서 에이스급인 나루세와 카라카와의 1,2선발로 근근히 먹고 사는정도로 나머지는 처참한 수준. 전반기는 신선놀음 하는 2강 밑에서 '''12.5'''게임차로 간신히 3위로 통과했으나 시즌 뒤로 갈수록 전해 우승팀의 포스를 잃어가며 결국 최하위까지 굴러 떨어졌다.
타선 역시 니시오카 츠요시의 공백과 거포 부재로 팀 전체 홈런이 홈런 1위 1선수보다도 못할정도로 물방망이 과시중. 이 시즌에 나카무라 타케야가 친 홈런이 '''48개'''였는데 마린즈 팀 전체가 친 홈런은 겨우 '''46개'''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김태균마저 부상으로 퇴단하는 바람에 물배트화가 가속중.
7.4. 2012년 시즌
2012년 4월 기준으로 20경기에 11승 8패 1무로 2위를 마크하고 있다. 뻘영입이라고 까이기까지 했던 세스 그레이싱어의 뜻밖의 회춘투가 크게 작용한듯 하다. 하지만 시즌 중반이 지나면서 전반적으로 팀 전체에 힘이 떨어져가면서 점점 내려가기 시작하여 결국 시즌 5위로 마감하고 말았다. 꼴찌까지는 안 한 이유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친척팀의 체질이 이쪽으로 옮겨온 듯. 결국 니시무라 감독은 시즌 끝나고 재계약을 맺지 않는 방향으로 해임되었고 후임 감독으로는 두산 베어스에서 수석코치를 지내던 이토 쓰토무가 부임하게 되었다.
7.5. 2013년 시즌
7.5.1. 페넌트레이스
작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전력에도 이토 쓰토무 감독의 용병술이 잘 맞아떨어졌는지 분전하면서 전반기에는 퍼시픽리그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중반부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리그 1위 자리를 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에서 리그 막바지에 무섭게 치고 올라온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패하여 3위로 내려갔다. 어쨌거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는 진출하였다.
7.5.2. 포스트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승 1패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꺾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맞붙게 되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10월 17일 1차전에서는 0:2로 패하였으나, 10월 18일 2차전에서는 4:2로 승리하였다. 10월 19일 3차전에서는 0:2로 패배, 10월 21일 4차전에서는 5:8로 패하여 부전패 포함 1승 4패로 일본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7.6. 2014년 시즌
스토브리그에서 FA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 에이스이자 이토 쓰토무 감독의 애제자였던 와쿠이 히데아키를 영입하여 선발진을 보강하였고 외국인 선수로 채드 허프만과 루이스 크루즈를 영입했다. 개막전부터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3연패를 하는 등 초반 5연패로 고전을 하였다. 다만 선발진의 부진이 매우 심각하여 선발진 중 유일하게 10승과 3점대 방어율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한 이시카와 아유무를 제외하고 와쿠이와 기존에 에이스 노릇을 하였던 나루세 요시히사 그 외 선발 자원인 후지오카, 후루야, 카라카와 등이 죄다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타선에서는 2루수 루이스 크루즈가 16홈런을 치며 팀 내 홈런 1위로 분전하였고 쿠바 국가대표 타자 알프레도 데스파이네가 도중에 합류하여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그 외에는 부진했다. 최종적으로 팀은 퍼시픽리그 4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시즌 이후에는 FA 신분이 된 에이스 나루세 요시히사가 팀 개혁을 조건으로 협상을 했지만 팀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FA 권리를 행사, 야쿠르트로 이적했다. 이후로는 시카고 컵스 산하 마이너 소속이던 한국인 투수 이대은을 영입하며 선발진을 보강했다.
이 시즌 후에 노망주를 꽤 정리했다. 코베 타쿠미, G.G.사토[103] , 헤이우치 히사오, 스미 코타 등이 정리되었고[104] , 왕년에는 팀의 우승을 이끈 주전포수였으나 노쇠화로 인해 제대로 뛰지도 못하게 된 사토자키 토모야는 은퇴했다.
7.7. 2015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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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속과의 콜라보기획 기념 이미지다.
전반기를 다 마친 현재 37승 1무 42패로 파리그 4위에 랭크되어 있다. 본전 뽑아야 할 교류전에서도 막상 10승 8패로 큰 재미를 본 건 아니었다. 한신과의 고시엔 3경기가 치바 입장에선 매우 아쉬웠는데, 첫 경기는 오승환을 털어서 이겼지만 두 번째 경기는 '''0-8에서 8-8까지 따라잡고도''' 역전 못 시키고 동점만 만들어서 지고 말았다.[105] 이후로 한 때 5할에 턱걸이하나 했더니 전반기 막판에 좀 미끄러진 상태다. 하지만, 세이부 라이온즈가 7월 15일부터 괴물같은 11연패를 당하면서 3위 자리를 차지, 5할 미만의 승률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 진출을 꿈꾸고 있다. 8월 2일 부로 다시 5할을 찍었으나 4위 세이부와 2경기 차, 5위 라쿠텐과 4경기 차로 불안한 3위를 유지하고 있다.
9월 27일 기준으로 66승 1무 68패로 3위 세이부와 1.5경기차로 4위에 위치해 있다. 세이부가 3경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8경기나 남겨 두고 있는 상황이 롯데에게 유리할 지 불리할 지는 과연...
10월 1일 기준으로 롯데는 69승 1무 68패로 5경기를 남겨두었고, 세이부는 69승 5무 69패로 정규시즌의 모든 경기를 소화하였다. 따라서 자력으로 3위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 2승 3패만 해도 규정에 의해 동률임에도 불구하고 세이부를 제치고 3위를 차지하게 되어 상당히 유리해졌다.[106]
상대팀 분석을 하면 라쿠텐의 경우 최하위가 확정적이기 때문에[107] 경기에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닛폰햄의 경우 상황이 복잡한데,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3위 팀과 맞붙어야 하기 때문에 세이부를 상대팀으로 원할 경우 전력으로 임할 가능성이 높고, 롯데를 상대팀으로 원할 경우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거나 경우에 따라 져주기 게임도 할 수 있다. 만약 닛폰햄이 상태팀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앞두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롯데로서는 2승만 하면 되는 상황이고 최하위인 라쿠텐과의 대결이 3경기이기 때문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다.
10월 2일 라쿠텐전은 선발 이대은이 4⅓이닝 4실점하면서 4-3 패배를 당했다. 3일, 라쿠텐을 2-0으로 이기며 어제의 패배를 설욕했다. 이제 남은 3경기중 1경기만 이기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제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를 탈 수 있다! 4일, 니혼햄에 5-3으로 승리하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 탑승에 성공했다.
10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 롯데의 공인 천적 '괴물' 오타니를 2.2이닝동안 5자책으로 강판시키면서 승기를 잡았다. 이후 12연속 볼넷 등 볼질로 자멸한 니혼햄 투수들을 착실하게 털어먹으며 9-3으로 승리, 먼저 1승을 가져갔다. 그러나 2차전에서 8회까지 2대1의 박빙의 리드를 가져가다가 8회말 투수 교체 타이밍을 놓치고 털리면서 4대2로 역전패, 1승1패로 마지막 3차전까지 치르게 되었다. 12일 3차전, 에이스 와쿠이 히데아키가 1회부터 볼넷과 피안타로 만루를 만들며 1점을 먼저 니혼햄에 내줬다. 하지만, 2회초 이구치 다다히토가 솔로포를 날리며 1-1, 동점으로 팽팽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 이후 요시카와와 와쿠이의 투수전 이 이어지다 7회초, 데스파이네가 솔로포를 터뜨리며 2-1로 한점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마츠나가-오타니-우치의 불펜진이 닛폰햄 타선을 틀어막으며 2-1로 승리,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성공했다. 닛폰햄은 10개의 안타를 기록했는데도 단 1점(...)을 올리며 6.5경기차가 나는 롯데를 맞아 자멸했다. 또한, 공동 다승왕 와쿠이 히데아키는 무려 143개의(...) 공을 던지면서 4볼넷 10피안타를 허용했지만 물이 오른 경기운영 능력으로 6.1이닝 1실점 1자책을 기록하며 오늘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렇게 2위인 닛폰햄을 꺾고 기세좋게 적지인 후쿠오카로 들어와서 파이널 스테이지를 치르게 되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시작 되기도 전에 5년 주기설(...) 등을 동원해서 2005, 2010년의 기적을 재현한다면서 호기롭게 하극상을 선언했다.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6.5게임 차나 벌어져있던 상대팀을 꺾고 올라오는 등 파이널 스테이지에 임하는 분위기는 꽤 좋은 편이었다. 교류전에서 센트럴 리그 상대팀들 상대로 사용하던 도발 포스터를 클라이맥스 시리즈 전용으로 제작[108] 하는 등 상대팀을 도발하여 압박을 주는 작전도 동원했다. 그러나 상대팀은 정규시즌에서 무려 18.5게임이나 차이가 나는 2015년의 대정의. 적장 쿠도 키미야스는 롯데의 도발에 「한 경기도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만」이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리고 벌어진 1차전에서 상대팀 선발 다케다 쇼타의 제구 불안을 틈타서 키요타의 적시타로 3회초에 2점을 선취했으나 곧이어진 3회말에 상대 타선에게 계속 안타를 허용하던 선발 오미네 유타가 야나기타 유키에게 동점 홈런을 허용했다. 결국 이토 감독은 선발 오미네를 3이닝만에 포기하고 계투진을 짧게 이어가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적절한 타이밍에서의 교체로 상대팀 타선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5회초 무사 2, 3루의 찬스에서 다케다를 구원해서 올라온 센가 고다이에게 용병 두명이 잇달아 삼진으로 기회를 날린 후 9회까지 2안타로 틀어막히면서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 10회초를 삼자범퇴로 이어진 10회말 수비에서 시즌 막판 원래 마무리였던 니시노의 부상으로 임시 마무리로 기용된 우치 다쓰야가 선두타자인 대타 우에바야시 세이지를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으로 출루 시키면서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희생번트 뒤에 대타 하세가와 유야에게 안타를 허용해서 1, 3루가 되자 다음타자 야나기타 유키를 걸르고 만루작전을 썼다. 그러나 만루에서 우치카와 세이이치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고 1차전을 내줬다. 2차전에도 선발 후루야가 5회까지 1실점으로 버텼으나 6회 2사후 갑작스럽게 연속안타를 허용하면서 난타당하며 순식간에 5실점했고 결국 1대6으로 궁지에 몰리게 됐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3차전에서는 선발 이시카와가 초반에 우치카와에게 적시타, 이대호에게 투런 홈런을 내주며 3대0으로 끌려갔고, 타선은 나카타 켄이치를 공략하지 못하고 1득점에 그치면서 5년만의 하극상을 호기롭게 선언했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18.5게임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총 전적 0승 4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대체적인 분위기는 현재의 전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최선을 다했다는 평이 대세이고, 이토 감독도 파이널 시리즈 내내 현격한 전력 격차를 실감한다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거듭하는 등[109] 팀 전체적으로 파이널 스테이지에서의 패배가 그렇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은 모양. 구단에서도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성과를 낸 이토 감독을 유임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해부터 이케멘 5라는 이름의 여성팬들을 대상으로 한[110] 꽃미남 투표 이벤트를 시작했다. 이때 뽑힌 5명은 마린즈 레이디데이 특집 잡지에 실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 해의 이케멘 5에서 뽑힌 5명은 1위 오기노 타카시, 2위 요시다 유타, 3위 이마에 토시아키, 4위 카라카와 유키, 5위 이대은. 이대은은 외국인 선수 중 유일하게 뽑혔다.
7.8. 2016년 시즌
7.8.1. 스토브 리그
주전 2루수 루이스 크루즈의 요미우리 자이언츠행으로 인하여 그 대안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맹활약 했었던 야마이코 나바로를 영입하였고 NPB 통산 64승을 거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출신의 선발 투수 제이슨 스탠릿지를 영입하였다.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2005년, 2010년 일본시리즈 MVP 이마에 토시아키는 FA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하였다. 3루 공백을 두고 백업, 유망주 내야수들의 대격돌이 예상된다.
하지만 야마이코 나바로는 시즌 시작 전 실탄 소지 혐의로 총도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큰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어서 석방 되었고, 구단에서는 불기소처분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7.8.2. 페넌트레이스
오랜만에 홈에서 맞는 개막전이며 개막 시리즈 상대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이다. 롯데의 선발은 와쿠이 히데아키, 닛폰햄의 선발은 오타니 쇼헤이이다. 전년도 다승왕들의 매치업이 성사되었다. 초반부터 롯데의 타자들이 오타니를 두들겼고 3점을 먼저 선취했다. 와쿠이는 7이닝 무실점 짠물투를 보였으며 8회에 2점을 내주긴 했지만 끝까지 리드를 잘 지켜서 3-2로 승리를 거두었다.
4월 13일 현재 퍼시픽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역대급 페이스를 기록하면서 추월당해 2위로 떨어졌다. 6월 17일 현재, 교류전에서 12개팀중 2위를 기록중이며 퍼시픽리그에서도 2위에 랭크되어있다. 교류전, 퍼시픽리그 선두는 모두 호크스. 6월 20일 현재, 교류전에서 12승 6패(승률 0.666)을 기록하며 소프트뱅크에 이어 2위로 마쳤다.
투수는 '14년 퍼시픽리그 신인왕 출신의 이시카와 아유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리그 수위타자인 외야수 카쿠나카 카츠야가 공격진을 이끌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를 앞세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파죽의 15연승을 달성하며 3위로 처졌다...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대진 팀이 확정된 9월 19일 기준으로 4위 도호쿠 라쿠텐과의 승차는 7.5경기이고, 남은 경기는 9경기다. 라쿠텐이 기적을 보이지 않는 이상 3위로 시즌을 마칠 확률이 높다. 2위는 13경기차라 들 수 없다. 결국 9월 24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고 라쿠텐이 닛폰햄에게 짐으로써 2년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CS에선 호크스에게 2연패로 광탈당하면서(...) 늘 해왔던 하극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전 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부터 사실상 전열에서 제외된 가운데 2016시즌 거의 대부분을 2군에서 보낸 이대은은 병역 의무를 위해 10월 31일 퇴단했다.
여담으로 이 시즌의 이케멘5 투표결과는 1위 오기노 타카시[111] ], 2위 요시다 유타[112] , 3위 나리타 카케루[113] , 4위 히라사와 타이가, 5위 이시미네 쇼타.
7.9. 2017년 시즌
'''퍼시픽 리그의 kt wiz'''
'''시작부터 처참하게 무너지며 맞이한 6년만의 최하위'''
2년 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의 성과를 믿고 이토 쓰토무 감독과 재계약을 했건만 이건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 먹튀를 하고 있다. 도대체 겨울과 캠프 때 뭘 한 건지 투타 모두 싸그리 폭망한 가운데 그나마 4월 한달은 부상으로 주력을 잃은 닛폰햄 덕분에 5위를 유지했으나 닛폰햄이 서서히 전열을 정비하면서 최하위로 가라앉은 채 5월 중순이 다되도록 10승도 못올리고 승률 3할도 못 넘고 있다. 5월 13일까지 9승 25패로 옆 리그 최하위 팀보다 더 참혹한 성적을 거두면서 물 건너 KBO 리그 팀과 누가 더 못하나 경쟁하는 수준이다. 결국 5월 16일 자로 12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자력 우승 가능성이 소멸되었다. 팀 득점, 실점, ERA, 타율 모두 독보적인 꼴지이며 특히 팀타율은 5월 말이 지나도록 2할을 못 넘고 있다.
거기다가 외인마저 개판이다. 이 팀에 오기 전부터 일본에서 몇 년 째 든든하게 선발을 해왔던 제이슨 스탠드릿지도 ERA 5점대로 털리고 있고[114] ,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대신 사 온 지미 파레디스는 1할대 초중반, 맷 더피[115] 는 간신히 2할을 치는 바람에 이대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던 천관위를 초반부터 1군에 콜업해서 선발 로테이션으로 돌리는 등 상황이 매우 안좋다.[116]
참고로 아무리 지금 팀 상황이 개판이라곤 해도 진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번 시즌에 36승 이상을 못거두고 35승을 거둔다면 통산승률 5할이 무너진다.
엠팍에 올라온 썰에 의하면, 지미 파레디스의 경우는 방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대체 선수를 찾고 있는 듯.
결국 5월말에 새 타자 로엘 산토스를 영입하였다. 그러나 새 타자 영입을 한 뒤에도 부진한 지미 파레디스를 방출하지는 않았다. 결국 거포가 필요하던 6월 6일. 새 외인 타자 윌리 모 페냐를 영입하였다.
그리고 그나마 믿을 구석이었던 교류전에서조차 파리그 팀으로는 유일하게 3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며 폭망하고 있다(...). 교류전 직전까지 꼴찌 다툼을 하던 오릭스가 교류전 들어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6연승을 구가, 4위까지 치고 올라간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비참할 따름(...). 그리고 6월 11일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에서는 '''11연패'''의 늪에 빠진 야쿠르트에게 6-9로 패하며 11연패를 끊어줌과 동시에 교류전 첫 승을 조공하고야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거인과의 3연전에서는 '''스윕패'''를 당하며 퍼시픽리그 6개 구단, 아니 2017년 NPB 11개구단 중 유일하게 '''교진전 전패'''라는 굴욕을 자초했다(...). 결국 믿었던 교류전에서도 6승 12패로 11위를 기록하면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교류전 통산 성적에서도 닛폰햄에게 2위자리를 내주고 3위로 내려앉았다.
투수도 노답이지만 타격은 더 심각한 노답이라 그런지 7월 27일 현재 1군에 외국인 타자만 3명을 쓰고 있다. 근데 셋 중에 로엘 산토스만 그냥저냥 하고 있고 다른 둘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도 답이 없는 건 매한가지로, 7월 30일 기준 29승으로 아직도 30승을 못 찍고 있다(...)였다가 8월 2일 같이 최하위 다툼(...) 중인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게서 겨우 시즌 30승을 따냈다.
어쨌든 올해는 꼴지이거나 5위로 시즌 마감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4위 오릭스와 10경기 이상 차이가 나서...
현재 투수 다패왕을 이 팀에서 배출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8월 8일 기준 패배 1위에 랭크된 투수 4명중 2명이 롯데 선수다.(...) 바로 이시카와 아유무[117] 와 가라카와 유키[118] . [119]
결국 이토 감독이 8월 13일에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 의사를 밝히고야 말았다. 당장 물러나는 것은 아니고 시즌이 끝난 뒤에 하겠다고 하지만. 이후로도 무난하게 무너지는 모양으로 꾸준히 패배를 적립하다가 오타니 한명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니혼햄을 상대로 위닝 및 40승(...)을 달성했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1, 2위는 불가능해짐과 동시에 트래직 넘버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9월 5일 퍼시픽 리그 팀들 중 가장 먼저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다.
2015, 2016년에 기요타 이쿠히로,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등의 선수들이 도시락의 저주를 깼다는 것 때문인지, 올해는 아예 선수들이 직접 구상해낸 도시락을 대대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한번에 끝난 줄 알았던 행사를 두 번이나 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많은 선수들이 도시락을 출시했다는 것(...).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 표에 나온 선수들은 17시즌에 대부분 폭망했다.(...)''' 이구치 타다히토는 은퇴 시즌이라 애초에 많이 나오지도 못했고, 이시카와 아유무와 카쿠나카 카츠야는 거의 커리어로우를 찍었으며, 사사키 치하야와 가라카와 유키는 쌍으로 다패왕 레이스를 벌였다. 이노우에 세이야는 2군만 폭격하고 1군에서는 거포 유망주라면서 똑딱이질만 했고 천관위는 땜빵선발과 패전처리를 왔다갔다 하고 있으며 기요타 이쿠히로는 주전에서 백업으로 밀려난데다 홈런과 타율이 급감하였고 나카무라 쇼고는 차세대 이마에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시즌 중반까지 1군에 올라오지도 못했다. 후타키 코타 역시 다패왕 레이스에 참전했으며, 니시노 유지는 1군에 얼굴을 드러낸 날도 거의 없었고 특급 셋업맨과 마무리를 왔다갔다 하던 마스다 나오야는 17시즌에는 나올 때마다 블론세이브에 대량실점을 허용하며 일본판 윤길현이 되었다. 타무라 타츠히로는 큰 차이는 없었지만 전 해에 비해서 타율/출루율이 1~2푼 정도 하락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유망주 히라사와 타이가는 1할 대 타율의 식물타격으로 백업자리도 아까운 수준의 타격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주장 스즈키 다이치만이 10홈런을 치며 데뷔 첫 두자릿수 홈런과 홈런 커리어하이를 찍는 등 장타력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또한 타율이 전해 대비 2푼이나 떨어졌다.
10월 2일. 결국 맷 더피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구단에서는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9월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구단에서는 윌리 모 페냐, 천관위, 스탠드릿지[125] 3명에게는 재계약 얘기를 했다고 한다. 더피는 방출이 확정이고 파레디디스와 산토스는 아무 말 없는 상황.
10월 3일. 방출 선수 공지가 떴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카나모리 타카유키[126] , 쿠로사와 쇼타, 다나카 에이스케[127] , 시가라키 아키후미[128] , 후루야 타쿠야, 테라시마 칸다이[129] , 이노모토 켄타로, 시바타 코헤이[130] , 와키모토 나오토[131] , 스가와라 쇼타[132] .
10월 9일. 로엘 산토스도 결국 재계약 포기 기사가 나왔다. 지미 파레디스는 새 외국인 타자가 탐탁치 않을 시 재계약을 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결국 두산 베어스로 갔다.
여담으로 이 해에 한국인 선수 한 명이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조건부 합격 판정을 받았지만 감독이 사임을 결정하면서 입단이 무산되었다. 바로 김정후.
이 해의 이케멘5 투표는 1위 오기노 타카시[133] , 2위 사사키 치하야, 3위 요시다 유타, 4위 히라사와 타이가, 5위 나리타 카케루.
7.10. 2018년 시즌
전년도보다는 조금 나아진 모습이지만 여전히 바닥이었다.
자세한 정보는 치바 롯데 마린즈/2018년으로.
7.11. 2019년 시즌
전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B클래스를 탈출 못하는 건 여전했다.
치바 롯데 마린즈/2019년 항목으로.
7.12. 2020년 시즌
드디어 4년만에 A클래스에 들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치바 롯데 마린즈/2020년 항목으로.
7.13. 2021년 시즌
치바 롯데 마린즈/2021년 항목으로.
8. 유니폼 소개
치바 롯데 마린즈/유니폼 문서 참조.
9. 감독ㆍ코칭스태프
10. 구단 스태프
11. 주요 선수
11.1. 현역
11.1.1. 투수
11.1.2. 포수
11.1.3. 내야수
[148]
11.1.4. 외야수
11.2. OB
11.2.1. 투수
- 코야마 마사아키 (1964 - 1972)
일본프로야구 통산 다승 3위[150] 인 320승을 기록한 대투수. 정교한 제구력으로 '정밀기계'로 불리며 무라야마 미노루와 함께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 역할을 했으나, 결국 무라야마에게 밀려 오리온즈의 강타자 야마우치 카즈히로와의 맞트레이드로 오리온즈로 이적한다. 오리온즈 이적 후에도 1964년에 30승을 올리는 등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했다.
- 나리타 후미오 (1965 - 1979)
롯데 재적 14년동안 통산 169승을 올린 70년대의 에이스.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공헌자였다.
- 이원국 (1966 - 1967)
1군 등판은 1경기 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너리그로 떠나게 된다.
- 무라타 쵸지 (1968 - 1990)
도끼투구법(マサカリ投法)으로 유명한 '일요일의 남자'로 오리온스 시절을 대표하던 에이스.
- 카네다 토메히로 (1974 - 1978)
한국명 김말홍. 카네다 마사이치의 동생. 1974년 다승왕-리그 MVP를 차지하면서 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다.
- 쿠라모치 아키라 (1972 -1976, 1979 - 1982)
다른 구단의 흑역사가 된 선수들과는 비교도 못하는 진정한 흑역사이자 일본판 이호성. 1988년 최다탈삼진을 한 차례 기록한 것 외엔 평범 이하의 성적만 거두고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구단 직원으로 10년 가까이 일했으나, 구단 내 파벌싸움에서 밀린데다가 개인적으로 진 빚이 너무 많아서[151] 윗사람들에게 찍혀서 해고당했다. 이후 대만프로야구 코치 제의를 받았으나 월급이 적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일반 회사에 취직했는데, 전처[152] 에게 줘야 했던 이자료 등 거액의 빚에 허덕이다가 2004년, 당장 갚아야 할 돈 3만엔[153] 을 빌리려고 찾아간 회사 사장의 가정부를 죽이고 175만엔을 빼앗는 강도살인을 저지르고 말았고[154] , 결국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155] 여담으로 현역 시절 등번호가 26번이었는데, 오가와가 살인사건을 저지른 다음해인 2005년에 등번호 26번이 마린즈의 준영구결번이 되면서 "사건을 잊어보려고 준영구결번 지정을 한 게 아니냐" 는 설이 일본 내에서 퍼지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선술했듯 선수 시절에는 연봉이 4000만엔이 넘어갔었다. 그러나 선수시절 돈관리를 못해서 버는 대로 다 써버리는 스타일이었고, 은퇴 후에도 월급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흥비와 휴대폰 성인사이트 등으로 엄청난 돈을 썼다고 한다. 말년에 진 빚이 많았다곤 하지만 몇천만 엔 수준이라 선수시절 번 돈을 잘 모았으면 그럭저럭 살아갈만 했을 텐데 자업자득인 셈.[156] 투수코치의 말에 의하면 성격도 끈기가 적고 멘탈이 약해서 한번 무너지면 와르르 무너지는 성격이었다고 하니 큰 인물이 되기엔 그릇이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크 크룬 이전 일본프로야구 최고속 공인기록(159km/h) 보유자. 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 코미야마 사토루 (1990 - 1999)
일명 고글맨. 빼어난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로 유명했다.
- 카와모토 야스유키 (1992 - 1999)
좌완투수로 아래의 우완 나리모토와 더블 스토퍼로 활약했다.
- 나리모토 도시히데 (1993 - 2000)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마무리를 맡기 전까지 활약한 마무리 투수.
- 오노 신고 (1994 - 2013)
무라타 쵸지의 뒤를 이은 제2대 '일요일의 남자'로 별명이 '선데이 신고'였다.
- 에릭 힐만 (1995 - 1996)
바비 발렌타인 감독을 따라 롯데로 온 메츠 출신의 장신(208cm) 왼손투수로 록 반 밀 이전까지 일본프로야구 최장신 선수였다. 높은 타점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제구력과 변화구를 이용한 완급조절에 능했던 기교파 스타일의 이색적인 투수였으며, 롯데에서의 2시즌 연속 2점대 ERA-두자릿 수 승리를 거두며 1996년 퍼시픽리그 투수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롯데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거액에 이적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2년간 2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한 먹튀가 되었다.
- 쿠로키 토모히로 (1995 - 2007)
별명 조니 쿠로키. 우완투수로 팬들 사이에서 '영혼의 에이스'로 불리며 코미야마와 함께 90년대 롯데의 암흑기를 이끌었다.
아래의 고바마사와는 달리 주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
- 코바야시 료칸 (1998 - 2002)
고양 원더스에서도 뛴 적 있어서 나름 알려진 투수. 그러나 롯데에서는 1군 기록 없이 방출당해 독립 리그를 전전하다가 대만프로야구와 멕시칸리그에서 뛴 후 고양 원더스로 와서 은퇴했다.
- 후지타 소이치 (1998 - 2007)
한때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등판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좌완 셋업맨. 야부타-후지타-고바야시 마사히데는 'YFK'라 불리며 롯데의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 코바야시 마사히데 (1999 - 2007)
일본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임과 동시에, 팬들의 똥줄을 타게 만드는 장작쌓기와 방화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코바마사 극장'. 이렇게만 소개하면 불쇼만 저지른 형편없는 투수로만 생각되겠지만 롯데에 재적한 9년동안 8년연속 20세이브 포함 통산 227세이브를 올린 훌륭한 마무리 투수였다.
- 시미즈 나오유키 (2000 - 2009)
2005년 시즌의 에이스였던 우완투수
- 브라이언 시코르스키 (2001 - 2003, 2008 - 2009)
일본에서만 11시즌, 4개의 팀(롯데, 요미우리, 야쿠르트, 세이부)에서 뛴 저니맨 우완 구원투수. 준비동작에서 어깨를 풀며 오른팔을 크게 회전하는 루틴이 헬리콥터를 연상시켰고, 마침 그의 성과 같은 이름의 유명 헬리콥터 메이커인 시코르스키도 있는지라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다.
공은 느리지만, 릴리스 위치를 늦게까지 숨기는 특유의 '마네키네코' 투구법의 디셉션을 무기로 활약했던 좌완 투수. 2014 시즌 후 팀과의 불화로 FA를 선언하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대만프로야구에서 17승을 거두고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호투했던 좌완 선발투수. 그 덕분에 2년 1억엔의 계약을 맺고 롯데에 왔지만 롯데에서는 부상 및 외국인쿼터에서 밀린 것 때문에 2경기 2선발 0승 0패 ERA 2.25에 그쳤다. 결국 사이버투수가 되어 방출당하고 대만으로 돌아갔는데, 돌아간지 1년만에 승부조작을 하는 바람에 영구제명되면서 흑역사화.
- 이토 요시히로 (2008 - 2016)
- 키무라 유타 (2009 - 2016)
정말로 특이하게 롯데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157] 를 선언했던 선수. 고교 시절에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부터 270만엔의 영양비를 받았고[158] ,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1라운드 지명을 해주겠다는 약속도 받았으나 전부 거절하고 사회인야구로 진출하였다. 사회인야구 시절에도 요코하마의 3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롯데에 가고 싶다면서 입단을 거부. 결국 2년 후인 2008년 드래프트에서 롯데의 1라운드 지명을 받으면서 원하던 롯데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에서 8년동안 뛰면서 1군 성적이라곤 47경기에 등판하여 1승 6패 1홀드 ERA 5.24에 그쳤고 결국 1라운드 잔혹사로만 남아버린 선수. 2016년 이후 방출당해서 은퇴했고 야구계를 떠나 치바의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현금 트레이드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
교토대 출신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였으나 3년 동안 1군 2경기에 출장밖에 못 하고 방출당했다.
- 사카이 토모히토 (2015 - 2017)
대졸사회인 즉전감으로 롯데에 2라운드로 입단해서 6선발과 필승조를 오갔다. 2019년에는 셋업으로 정착해서 20홀드를 거두었지만 짧은 이닝을 완벽히 막기보다는 적당히 맞으면서 길게 던지는 선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ERA도 4점대였고 블론도 꽤 많았다.[159] 결국 보상선수 보호명단에서 빠져서 미마 마나부의 보상선수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
- 미야자키 아츠시 (2016 - 2018)
11.2.2. 포수
마이니치 - 다이마이 - 도쿄 - 롯데 오리온즈 시기를 모두 경험한 선수였으며, 데뷔해인 1957년과 도쿄 - 롯데 시대에 정포수로 뛰면서 전시합출장 3시즌, 통산 1132안타 두 자릿 수 홈런도 2차례나 기록한 포수로써 나름 괜찮은 공격력을 선보였다. 은퇴 후엔 여러 차례에 걸쳐 롯데의 코치직을 역임. 2019년 12월 81세로 별세.
- 무라카미 키미야스 (1972 - 1977)
니시테츠 라이온즈에서 1971년 시즌오프 트레이드로 이적해왔으며, 1973년 카네다 마사이치 감독에 의해 정포수로 발탁되어 은퇴하는 1977년까지 정포수로 뛰면서 1974년 롯데 시대 최초의 우승을 이끌었다.
- 노무라 카츠야 (1978)
1970~1977년 난카이 호크스의 4번타자 + 주전포수 + 감독 등 많은 역할을 수행하다가 해임당하고 롯데로 넘어와서 1년간 뛰었다. 당시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으며 1978 시즌을 마치고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하여 2년을 더 뛴뒤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 하카마다 히데토시 (1978 - 1990)
80년대 롯데의 정포수. 무라타 쵸지와 함께 배터리를 이뤄 활약하였으며 은퇴 시합도 무라타 쵸지와 함께 치뤘다. 무라타와 함께 배터리를 이룰 때 사인 교환 없이 무라타의 공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은퇴 후 롯데에서 장기간 코치를 역임했다.
- 마이크 디아즈 (1989~1992)
- 죠즈메 마사히코 (1991 - 1996)
치바 롯데 초창기의 정포수. 강견을 자랑하던 포수였지만, 주전포수이면서 1할대 타율이란 개막장급 타격(...)을 선보이는 바람에 결국 얼마 안가 정포수 자리에서 쫓겨나고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후 2000년 은퇴.
- 하시모토 타스쿠 (1995 - 2009)
사토자키와 번갈아가며 주전포수를 맡던 중장거리형 타자. 실력은 쏠쏠했는데 사토자키에게 밀려서 백업, 좌타 플래툰으로 주로 쓰였다. 결국 주전 자리가 보장되는 팀으로 가고 싶다면서 FA를 선언했고 포수진이 박살난 요코하마에서 데려갔다. 처음에는 꾸준히 주전으로 나왔으나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오히려 롯데 시절보다 더 못하면서 먹튀가 되어 은퇴.
- 시미즈 마사우미 (1997 - 2004)
한때는 주전 안방마님이던 수비형 포수지만 발렌타인 감독이 공격형 포수인 사토자키와 하시모토를 중용하면서부터 입지가 급격히 좁아졌다. 결국 다른 팀으로 갔는데 그 후에는 거의 나오지 못하면서 쓸쓸히 은퇴. 그 후 코치로 롯데에 돌아왔다.
- 사토자키 토모야 (1999 - 2014)
2000년대 두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프랜차이즈 포수. 리그 최고의 수비력과[161] 2할 중후반 타율에 15개 안팎의 홈런을 꾸준히 쳐줬던 공격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포수였다. 현재는 해설가로 지내는 중.
- 카나자와 타케시 (2003 - 2018)
- 타나카 마사히코 (2004 - 2012)
- 마토바 나오키 (2010 - 2012)
- 사이토 토시오 (2010)
- 카와모토 료헤이 (2013 - 2015)
11.2.3. 내야수
- 니시모토 유키오 (1950 - 1955, 감독재적 1954 - 1960)
일본을 대표하는 콩라인 감독.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에노모토 키하치 (1955 - 1971)
- 야마자키 히로유키 (1965 - 1978)
60~70년대 롯데의 2루를 책임진 공수겸장의 내야수로, 1978년 이후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해 세이부의 황금기 개막에 기여했으며, 통산 270홈런은 역대 2루수 중 최다 홈런 기록이다.
롯데 오리온즈 시대의 간판 3루수로 통산 2057안타, 348홈런 1061타점, 282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의 강타자로써, 1969년 퍼시픽리그 신인왕, 1977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베스트나인 10회, 다이아몬드 글러브 4회를 수상하였으며, 현역 시절 미스터 롯데라는 애칭까지 생길 정도로 팀을 상징하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선수 은퇴 후 바로 이나오 카즈히사의 후임으로 1987년부터 3년간 감독으로 재임했는데, 2년 연속 꼴찌라는 흑역사를 쓰면서 해임되었다. 이 사람의 등번호였던 8번은 현재 롯데의 준영구결번. [163]
- 레론 리 (1977 - 1987)
롯데를 대표하는 외국인 강타자. 통산타율 .320으로 1993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25년간 일본프로야구 통산타율 1위에 랭크되어 있었다.[164] 2018년에 NPB로 복귀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아오키 노리치카가 4000타수를 채우면서 통산타율 .327로 일단 랭킹 1위의 자리는 내줬지만 향후 아오키가 은퇴할 때까지의 퍼포먼스 여하에 따라서 다시 랭킹 1위로 복귀할 가능성은 있다.
- 레온 리 (1978 - 1982)
레론 리의 동생으로 메이저리그 경력이 8년이나 되는 형과는 달리 메이저리그 경력은 없으나 형제가 같은 팀에서 활약하면서 둘 다 빼어난 활약을 했다. 롯데에서만 11년을 뛰면서 프랜차이즈급 외국인 선수로 활약한 형과는 달리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야쿠르트 스왈로즈등 팀을 옮겨다녔지만 일본에서 활동한 10년 동안 통산 타율 .308, 229홈런, 884타점으로 형 못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미국으로 귀국해서는 시카고 컵스의 아시아지역 스카우트 담당 등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2003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당시 감독 이시게 히로미치의 해임으로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 최희섭을 스카우트 한 것과 데릭 리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롯데 시절에는 이니셜이 형과 똑같기 때문에 형을 성인 「리」를, 본인은 이름인 「레온」을 등록명으로 사용하였다.
- 오치아이 히로미츠 (1979 - 1986)
롯데 오리온즈 시절 3번이나 삼관왕을 차지한 전설의 대타자.
- 니시무라 노리후미 (1982 - 1997)
1986년부터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카와사키 시절 고유 1번. 2010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그러나 다음 해인 2011년 최하위.[165] 2012년 5위란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퇴임. 2016년 현재는 오릭스 버팔로즈의 1군 코치로 재직 중.
- 호리 코이치 (1988 - 2010)
1번부터 9번 타순까지 모든 타순에서 홈런을 날린 진기록을 가진 타자로써, 2루수를 중심으로 내 외야 가리지 않고 출전한 유틸리티 선수였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롯데에서만 23년간 활약했다. 롯데 오리온즈 출신으로서는 마지막 현역 선수.
- 하츠시바 키요시 (1989 - 2005)
'미스터 마린즈'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치바현 이전 초창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강타자 3루수. '마쿠하리의 판타지스타'라는 별명도 있는데, 이는 공필성의 '화약고'와 비슷한 맥락으로 열심히는 하지만 좋다고 보기는 힘든 그의 3루수비가 관객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치바 롯데 마린즈 시대의 선수로써는 역대 최다이자 유일한 200홈런 기록인 202홈런(통산 홈런은 232개)을 기록한 바 있다.
일본야구 최초의 외국인 주장.
- 김용강 (1996 - 2005)
재일교포. 말이 내야수지 투수로 입단해서 9개 포지션을 모두 경험해본 보기드문 선수였다.
- 사카이 타다하루 (1996 - 2002)
암흑기 치바롯데에서 수비만큼은 최고였던 준주전급 2루수.
- 코사카 마코토 (1997 - 2005)
- 와타나베 마사토 (1998 - 2012)
1997년 드래프트 1차지명자. 탄탄한 수비력을 가졌고 풀 타임을 뛸 시 20홈런 이상이 가능한 거포형 유격수였으나 공갈포를 넘어서서 아예 배트에 공을 갖다대질 못하는 처참한 컨택의 소유자였다. 통산 타율이 .208이었으니. 결국 1차지명 잔혹사만 보여주고 백업자리만 전전하면서 15년 통산 492경기 11홈런밖에 보여주질 못했다. 방출 이후 독립 리그로 가서 2년간 더 선수생활을 하다가 독립리그 팀 감독을 거쳐 현재는 오릭스 전력분석원.
2군에서는 도루왕 경쟁만 여러 번 했고 도루왕도 3번이나 따냈던 최고의 테이블 세터였으나 1군만 오면 대주자/대수비 이상 할 수 없는 선수였다. 통산 타율도 1할 대였으니. 결국 2015 시즌 이후 전력외통보를 받고 은퇴.
2016 시즌 이후 전력외통보와 코치 제안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입단 테스트를 보러 갔다.
- 아오마츠 케이요 (2005 - 2016)
오마츠 쇼이츠와 입단 동기였고 거포 유망주였으나 2군만 거하게 폭격하고 1군에서는 통산 30경기도 못 뛴 채 2016 시즌 이후 전력외통보를 받고 은퇴.
2014 시즌 이후 전력외통보를 받았다. 현재는 독립 리그의 무사시 히트 베어스로 가서 거기서 감독으로 취임했다.
- 체이스 람빈 (2009)
특이하게도 응원가로 빅뱅의 붉은 노을을 사용했다. 한국과는 전혀 연관 없는 선수가 한국 가수의 노래를 응원가로 쓴 케이스. 그러나 실력은 처참해서 54경기에서 1할 9푼 2리 4홈런이라는 백업급 모습만 보이고 퇴출.
- 김태균 (2010 - 2011)
기껏 데려왔으나(...)
- (2010 - 2018)
그럭저럭 내야 유틸 백업, 대타로 5년 정도 활동했으나 2016년 때부터 큰 빚을 지는 바람에 그 빚 때문에 빚쟁이들이 구단에 찾아오기까지 이르렀고, 결국 심적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166] 시즌 중인 6월에 은퇴하며 흑역사가 되었다. 구단에서는 은퇴를 만류했지만 본인이 선수를 접겠다고 했다고...은퇴한 다음 해인 2019년에 공갈죄로 체포되면서 역대급 흑역사 확정.[167] 사실 드래프트에 지명된 직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음에도 술담배를 하는 모습이 걸리는 바람에 입단식에 참석도 못하고 입단을 거부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 또한 상기한 빚 중에서는 롯데의 후배 선수로부터 빌린 돈도 몇십만원 정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보다 어린 선수들에게 달라붙어서 돈 좀 빌려달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고 했으니.[168]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강도살인을 저지른 오가와 히로시, 성범죄를 저지른 멜 홀 바로 턱밑급이고 승부조작을 한 우스요우와 비슷한 수준의 흑역사이다.
- 스즈키 다이치 (2012 - 2019)
후쿠우라 카즈야의 뒤를 이을만한 몇 안 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대졸 2년차 때부터 풀타임 주전으로 뛰어와서 명구회 입단 가능성도 꽤 높았던, 롯데 팬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던 인기 선수였으나 2019년 시즌을 끝으로 라쿠텐에 FA로 이적.
11.2.4. 외야수
- 벳토 카오루 (1950 - 1957)
- 야마우치 카즈히로 (1952 - 1963)
- 타미야 겐지로 (1959 - 1963)
- 조지 알트만 (1968 - 1974)
- 백인천 (1977 - 1980)
- 장훈 (1980 - 1981)
이 팀에서 프로통산 3000안타를 기록했으며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보냈다.
- 타카자와 히데아키 (1980 - 1989, 1991 - 1992)
1988년 수위타자. 이 해, 전설의 10.19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 우승 일보직전에 와서 경기를 확실하게 매듭짓기 위해 구원 투입된 킨테츠버팔로즈의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로부터 동점 홈런을 뽑아내어 긴테쓰의 우승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결정타를 날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위의 오가와 히로시와 맞먹는 흑역사. 80년대에 시카고 컵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뉴욕 양키스에서 뛰면서 메이저리그 통산 1171안타, 134홈런의 나름대로의 기록을 남긴 뒤 일본으로 건너왔고, 롯데에서도 30홈런(덤으로 20-20도 기록)을 치는 등 4번타자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시합 중에 자기 타석이 아니면 다른 방에서 게임을 하고 격이 떨어진다며 다른 선수들을 업신여기는 등의[169][170] 방자한 행동가짐과 개차반스런 인간성, 오만한 성격 탓에 팀메이트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1994년 시즌 종료 후 롯데를 떠나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지만 여기선 부상으로 먹튀가 되었다. 이후 메이저리그로 돌아왔지만 1996년 한 해만 뛴 채 그대로 메이저 경력은 끝. 이후 독립리그를 전전했는데...2007년 무려 3차례의 아동 성폭행, 2차례의 아동 성추행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면서 체포. 결국 징역 45년형[171] 을 선고받으면서 결국 인간쓰레기 같은 행실로 자기 인생을 망쳐버렸고, 오가와처럼 질기게도 오래 살지 않는 한 여생[172] 을 감옥에서 보내게 생겼다.[173] 위에 나오듯 일본 시절 그 개차반스런 인성으로 동료들과 워낙 많은 트러블을 일으킨 탓에 당시 멜 홀과 함께 뛰었던 선수들은 인터뷰에서 멜 홀 얘기만 나오면 마구 비난을 퍼붓는다고 한다. 특히 그에게 많이 시달렸던 헨슬리 뮬렌은 "멜 홀은 정말 싫다. 그런 작자는 두 번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라고 했을 정도. 보통 선수들이 사이가 많이 안 좋았어도 은퇴 후엔 같이 늙어가는 입장이란 것도 그렇고, 후에 코치로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서 서로 화해하거나 그렇지 않아도 웬만해선 심한 비난을 삼가는 걸 생각하면 멜 홀이 얼마나 선수들에게 많은 원한을 샀는지 알 만하다.[174][175]
- 헨슬리 뮬렌 (1994)
- 오오츠카 아키라 (1994 - 2010)
고교시절엔 투수였으나 프로 입단 후 내야수로 전향, 결국엔 외야수로 자리잡은 선수. 신인때는 2군에서 차기 유격수로 실험해보았으나 잦은 실책으로 나가리, 그래도 호타준족 외야 유망주 소리를 들으며 나름 기대를 받았었으나 끝내 주전이 되진 못하고 준수한 백업 정도로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사실 툴은 좋았는데 센스가 떨어졌던 선수였다. 은퇴 이후 3루 주루코치를 하는데 홈 아웃이 급증해서 코칭스태프가 된 후에도 주루센스의 부족을 보여주며 욕을 먹고 있다. 근데 후쿠우라 카즈야랑도 친하고[176] 데뷔 이래 롯데 원클럽맨으로 지낸 성골라인이라 한동안은 오래 붙어있을듯.
- 모로즈미 켄지 (1994 - 2006)
만 25세의 나이에 5라운더로 입단한 늦깎이 무명신인이었지만, 팀의 준주전급 외야수로 자리잡은 숨은 하위픽 성공사례. 전국구 선수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빠른 발과 허슬 플레이, 쇼맨십 덕분에 치바에서만큼은 큰 사랑을 받았었다.[177]
도쿄 6대학리그 1시즌 타율 최고기록인 .535를 보유했고, 케이오대학 4년 간 통산 100안타를 쳤던 특급 교타자 유망주였다. 1라운드로 지명받고 프로에서도 1년차 때 2경기 연속 끝내기 안타를 치는 등 기대받았으나 바비 발렌타인으로 감독이 바뀐 후 전혀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06년을 끝으로 1라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5년만에 방출당해 은퇴한 비운의 선수. 참고로 사토자키 토모야는 1군에서 2경기 연속 끝내기를 얘기하면서 기대감을 높여놓고 무명 선수라고 평했다(...).
- 베니 아그바야니 (2004 - 2009)
바비 발렌타인이 양아들처럼 챙겼던 용병 선수. 2004년에 3-30-100에 OPS 10할을 했는데 이게 커리어하이였다. 그 후로는 3할도, 20홈런도, 100타점도 기록하지 못했다. 다만 아주 먹튀급으로 못 한건 아니고 2할대 중후반 타율과 OPS 8할 안팎에 15홈런 정도는 쳐줬던 적당한 중장거리 교타자로 6년 동안이나 활약했다. 통산 타율도 2할 8푼에 통산 OPS도 8할 4푼대로 준수했다. 특이점으로는 하와이 출신이라 등번호 50번을 고수했고[178] 후쿠우라 카즈야와 친했는지 2019년에 은퇴식을 치르는 후쿠우라에게 영상편지를 보냈으며, 자식의 중간이름도 카즈야라고 지었다.
- 코베 타쿠미 (2007 - 2014)
- 후안 카를로스 무니즈 (2009 - 2010)
유학파가 아닌 정말 브라질 국적의 외국인 용병. 원래는 쿠바 프로야구 출신이었다.
야마다 테츠토와 야나기타 유키, 아키야마 쇼고, 센가 코다이[179] 등의 쟁쟁한 선수들을 죄다 거르고 뽑은 1라운드 희대의 망픽. 데뷔 시즌이 커리어하이였다. 201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 주루코치로 롯데에 부임.
11.2.5. 감독
- 유아사 요시오 (1950~1952)
- 카네다 마사이치 (1973 - 1978, 1990 - 1991)
한국명 김경홍. 선수로서는 뛰지 않았으나 감독으로서 장기 집권을 했다.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 이나오 카즈히사 (1984 - 1986)
니시테쓰 라이온즈의 전설적인 에이스.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프로 초창기 시절 온갖 비판의 화살을 막아내며 오치아이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할 수 있도록 후원자 역할을 해서 오치아이의 기량이 만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7살의 나이에 데뷔한 늦깎이 신인이 일본프로야구의 레전드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들이 타격폼이 괴상하다고 지적할 때에도 억지로 수정하려 하기 보다는 본인이 뜻을 펼 수 있도록 배려해준 이나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웬만해서는 야구계의 선배들에게조차 별다른 존경심을 표시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해온 오치아이조차 이나오만큼은 프로에서의 스승으로서 진심으로 존경을 했으며 이나오의 퇴임이 주니치 드래곤즈로의 트레이드를 요청하게 된 가장 큰 계기였다. 또한 1995년에 롯데가 10년만에 A클래스에 들어가기 전까지 1984~1985년 2년 연속 2위를 기록하며 롯데 오리온즈 시대의 마지막 A클래스로 팀을 이끈 감독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6년 4위를 기록하며 물러났다.
- 바비 발렌타인 (1995, 2004 - 2009)
33-4 당시 감독.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우승감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 니시무라 노리후미(2010 - 2012)
롯데 오리온스 시절 1번타자로 활약하던 스위치히터이자 프랜차이즈 외야수였다. 코치로도 꽤 오래 활동했고, 감독이 된 이후에는 일본시리즈 우승과 퍼시픽리그 최하위를 모두 기록하는 등 절반의 성공과 실패를 거두었다.
- 이토 츠토무 (2013 - 2017)
2010년대 중반에 롯데가 최강팀은 아녀도 A클래스 정도는 여러번 들어가게 만든 공신. 그러나 2017 시즌을 홀라당 말아먹으면서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전 감독인 니시무라나 후임 감독 이구치와는 달리 선수시절에는 롯데와 인연이 없었으나 감독으로 큰 공을 세운 케이스. 여담으로 원래 계약기간 자체는 2018년에도 이어질 예정이었는데, 이토가 2018년까지 연임했다면 김정후가 롯데에 용병으로 입단할 수 있었다.[181]
11.3.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이라부 히데키 (뉴욕 양키스→몬트리올 엑스포스→텍사스 레인저스→일본복귀 후 한신 타이거스)
- 코미야마 사토루 (뉴욕 메츠→일본복귀 후 원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 코바야시 마사히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일본복귀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오릭스 버팔로즈)
- 야부타 야스히코 (캔자스시티 로열스→일본복귀 후 원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 니시오카 츠요시 (미네소타 트윈스→일본복귀 후 한신 타이거스)
11.4. 역대 선수
치바 롯데 마린즈/역대 선수 항목 참조
11.4.1. 역대 외국인 선수
- USA : 미국
- DOM : 도미니카 공화국
- VEN : 베네수엘라
- KOR : 한국
- PRI : 푸에르토리코
- CUB : 쿠바
- TWN : 대만
- MEX : 멕시코
- BRA : 브라질
- PAN : 파나마
12. 역대 성적
13. 관련항목
14. 둘러보기
15. 관련 문서
[1] 구단 자체는 기본적으로 도쿄를 공식 연고지로 잡으려는 쪽이였고, 미야기 쪽은 임시 연고지 이전. 참고로 연고 이전 당시 '''"우리는 일본시민에게 사랑받는 구단이 될 꺼다! 우리의 연고는 일본 그 자체다!"'''란 개드립을 쳤기 때문(...). 집시 롯데 참고.[2] 주로 센다이의 미야기 구장을 사용. 이외에도 도쿄의 메이지진구 야구장, 고라쿠엔 구장 등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3] 대표 마스코트, 한국에 있는 아우 갈매기보다는 좀 더 매스미디어에 자주 출현하는 녀석이다.[4] 전후기리그제 성적도 포함.[5] 페넌트레이스 결과는 2위였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우승.[6] 정규시즌 3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통과하여 진출, 우승까지 달성했다. 1992년의 자매팀이 연상된다.[7] 2005년 페넌트레이스 1위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지만, 2004년에서 2006년까지 퍼시픽리그에서는 플레이오프 우승팀을 리그 우승팀으로 간주했다. [8] 일본에서는 롯데홀딩스이다.[9] 그래서 한국에서는 일본 롯데라고 이 팀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10] 알려진 후계 구도대로는 장남 신동주이 일본 롯데를 맡고 차남 신동빈이 한국 롯데를 맡도록 되어 있다. 근데 기업 규모는 한국 롯데가 일본 롯데의 10배가 넘는다.[11] 신동빈이 롯데 자이언츠도 챙긴 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업적으로는 바비 발렌타인의 친구인 제리 로이스터를 데려온 것이 전해지고 있다.[12] 유독 야구만 심하다. 타 종목의 경우엔 지역명 + 기업명 표기를 한다.[13] 일본에서 쓰이는 신자체로는 楽天이라고 쓴다.[14] 쓸 일은 거의 없겠으나, 이것을 굳이 일본 신자체로 옮긴다면 羅徳이 된다(德에서 心 위에 있는 가로획 하나를 생략). 대체로 중국의 간화자(간체자)가 일본 신자체보다 간략한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반대인 경우도 있는데 德(徳) 자도 그 예이다.[15] 중국어 풀네임은 과거에는 千葉樂天海洋/千叶乐天海洋이었다가 현재는 千葉羅德海洋/千叶罗德海洋으로 변경.[16] 한때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롯데 자이언츠 문서의 표제를 羅德巨人(간체 변환 시 罗德巨人)으로 바꾼 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乐天巨人(정체 변환 시 樂天巨人)으로 되돌려졌다.[17] 2017년 쿨이 은퇴하고 그 자리를 채운 제3마스코트로, 초롱아귀에서 모티브를 따왔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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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 변신'''을 하는 충격적인 마스코트이다. 그리고 특유의 눈과 입 모양 때문인지 일본 내에서는 아따맘마가 떠오른다는 반응도 나왔다.[18] 그마저도 롯데의 경기는 없었다.[19] 1981-2005년. 그러나 1996년은 시합 중지가 되어 실질적으론 24년.[20] 참고로 이때 마이니치 신문의 창단을 요미우리 신문과 주니치 신문이 거세게 반발했고 그결과 일본야구연맹이 해체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주니치 드래곤즈를 중심으로 창단 반대파가 뭉쳐 만든 리그가 센트럴리그, 창단을 지지하는 구단들이 모여서 만든게 퍼시픽리그이다.[21] 정확하게는 마이니치가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오늘날의 키움 히어로즈처럼 명명권 판매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했는데, 1969~1970년에 네이밍 스폰서를 맡은 롯데가 1970년 파리그 우승 뒤에 "이거이거 대박인데?" 하면서 아예 시즌 종료 후 구단을 사들인 것.[22] 이때 상태팀은 쇼치쿠 로빈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꽤 있을텐데, 그게 그럴만도 한게 1952년 승률 3할미만 팀 강제합병 정책 대상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타이요 훼일즈와 합병당해 사라졌기 때문이다(...).[23] 이 덕에 다른 프로야구 선배들 사이에서 창단하자마자 우승을 먹은 전무후무한 로얄로더가 되었다.[24] 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 타이요 웨일즈(1960)와 요미우리 자이언츠(1970)에게 지고 말았다. [25] 그러나 당시 (임시라지만) 연고지나 마찬가지였던 센다이에서 아무 행사도 안 하였기에 욕을 한바가지로 먹었다.[26] 그마저도 전부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다. 1977년엔 한큐 브레이브스, 1980년엔 긴테츠 버팔로즈, 1981년엔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패배했다.[27] 정확히는 정규시즌 2위, 그 뒤 플레이오프에서 우승. 당시엔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리그 우승팀이 되는 방식이었다.[28] 그나마 이웃 반도국가에 위치한 어느 구단보다는 나은편인게 그래도 '''21세기에 두번이나 우승을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승횟수도 두배나 되고...거기다 한국의 형제팀은 현재 우승을 가장 오랫동안 못해 본 팀으로 악명높다.[29] 사실 이건 자신들이 자초한 것이, 롯데가 다이에이한테서 구단을 인수할 당시 다이에이가 "야구장도 같이 사 가시죠?"라고 했는데 롯데 기업은 물론 팀 감독마저 구장이 너무 작아 투수가 털린다며 "노"를 외쳤고, 이 후 다이에이가 부도가 나면서 구장이 제3자에게 매각되면서 철거 크리티컬을 맞은 것.[30] 1974년 일본시리즈 홈경기를 여기서 치뤘다. 이유는 미야기 구장의 관중수용량이 2만 3천명밖에 되지 않아 일본시리즈 개최조건인 관객수용량 3만명에 맞지 못했기 때문. 다만 위에 보다시피 롯데그룹의 인수 이전에 고라쿠엔을 홈구장으로 쓴 적 있다.[31]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제1홈구장으로 사용. 현재는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리모델링되어 있다.[32] 장훈이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전인미답의 3,000안타를 이곳에서 멋진 홈런으로 기록했다.[33] 広岡達朗. 선수 시절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만 뛰었으며 이 후 1976~1979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1978년 스왈로즈에게 첫 센트럴 리그 우승과 더불어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고, 1982년~1985년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으로 있으면서 라이온즈에게 1982년 24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기고 그 뒤 1983년도 일본시리즈를 연속우승하며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이끈 명감독이기도 하였다.[34] 저거 세울 당시에는 야구를 넘어 전종목이었다. 이 기록은 얼마 안 가 깨졌는데, 누가 깨뜨렸는지는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적을 정도.[35] 6월 13일부터 7월 8일까지 기록. 중간에 1무(6월 30일 세이부전)가 포함된 기록이다. 18연패 이전에는 일본프로야구 원년(1936년)에 다이도쿄군(이후 쇼치쿠 로빈스로 팀명 변경. 첫 일본시리즈에서 맞붙은 그 상대 맞다.)이 16연패를 기록한 게 최다 연패였다. 치바 롯데 이후로 17연패 이상 기록한 팀은 없다. 참고로 센트럴리그 기록은 1970년 야쿠르트 아톰즈/2019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16연패.[36] 하도 연패가 안 끊기자 구단주가 사죄를 하기도 했고, 급기야 연패 타이기록 직전을 앞두고 액막이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37] 롯데가 6월 13일 오릭스전부터 7월 8일의 오릭스전까지 18연패 하는 과정에서 16연패때 완투승리를 눈앞에 두었던 외로운 에이스 투수 쿠로키 토모히로(黒木知宏)가 9회말 동점 투런을 맞으면서 마운드에 주저 않았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38] 결국 고이케는 사회인야구 생활을 마치고 킨테츠에 입단하지만 1997년 퍼시픽리그 다승왕(15승) 타이틀을 따낸 것 외에는 실적을 남기지 못했고 2005년에 유니폼을 벗었다.[39] 드래프트 결과를 교장선생님이 오오미네에게 통보했는데 당황하는 표정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오오미네를 설득하러 바비 발렌타인 감독과 베테랑 투수 시미즈가 이시가키 섬까지 찾아간 것 끝에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나카 마사히로와 함께 주목받던 동급생 오오미네는 정작 프로에서 큰 실적을 남기지 못했다.[40] 참고로 원래 오미네는 소프트뱅크 단독지명 예정이었고, 롯데는 히지리가오카고교의 내야수 후쿠다 슈헤이를 고교생 1라운더로 뽑으려 했다. 그러나 롯데가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주장으로 갑자기 스틸픽을 해서 오미네를 데려간 것. 결국 이 후쿠다는 소프트뱅크가 하즈레로 뽑아갔다가 FA로 롯데에 이적하면서 결국 오미네와 후쿠다 둘 다 롯데에 왔다. 그리고 오미네는 기대치의 반도 성장을 못한 실패한 1라운더로, 후쿠다는 주전 보장만 되면 터질 줄 알았으나 부상으로 망한 FA먹튀가 되면서 둘 다...[41] 물론 팀 성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당시 롯데는 비인기 리그였던 퍼시픽 리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비인기 구단이었고, 아래에 서술하듯 카와사키 구장은 한산한 야구장의 대명사였다.[42] 당시 감독이었던 야마모토 카즈요시가 당연히(?) 짤린건 덤.[43] 이마저도 당시 파리그가 전후기리그 체제로 진행되던 시기였고, 승률은 1위였지만 전기우승을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내주고 후기우승을 한 뒤 PO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것이다.[44] 여담으로 이마에의 응원가 원곡은 이정현의 '와', 후쿠우라의 응원가 원곡은 조용필의 '해변으로 가요', 이승엽의 응원가는 '힘내라 힘', 사토자키의 응원가는 코요테의 '만남'이다.[45] 2008년에는 닛폰햄 주최 도쿄돔 경기에서 마스코트가 나가시소멘 퍼포먼스를 펼쳤다. 도쿄돔과 가와사키에서 쌍으로 파리날리던(...) 팀들의 자학놀이.(YouTube)[46] 비슷한 사례로 같은 퍼시픽 리그 킨테츠 버팔로즈의 홈구장이었던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관중들이 스토브를 반입해(...) 고기 파티를 벌였던 적이 있었다. [47] 이후 80~90년대 롯데-주니치를 거치며 활약한 팀의 OB 아이코 타케시도 은퇴 뒤 여러차례 안드로스텐다이온 등의 약물을 복용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이쪽은 노쇠화 뒤 주니치에서부터 약물복용을 시작했다고 증언했지만.[48] 악동 하야카와는 2010년 시즌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으나 별달리 활약은 못 하다가 2011년 시즌이 끝난 뒤 은퇴했다. 이 후 2016 시즌부터 친정팀 오릭스 버팔로즈의 2군 외야 수비 주루코치를 맡는다.[49] 보면 알겠지만 이익 본 건 없다. 희귀한 인정 3루타만 줬을 뿐(...).[50] 앞에 언급한 배트 던지는 하야카와다. 사실 저런 포수 메치기는 MLB에선 흔한 풍경이'''었'''으므로 일본 기준으로 험하긴 해도 완전히 이상한 건 아니다.[51] '롯코오로시'의 그 '롯코'를 뒤집어서 33-4 모양을 만들었다.[52] 난카이 호크스의 홈구장. 호크스의 후쿠오카 이전 후 모델하우스 부지 등으로 쓰이는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가(...) 1998년 철거.[53] 당시엔 아직 프랜차이즈가 제도화 되지 않아서 각지의 구장에서 경기를 치뤘다. 이 해 일본시리즈는 4승 2패로 우승했는데, 우승 결정전인 6차전은 오리온즈의 홈 경기였으나 당시 홈구장으로 쓰던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리지 않고 오사카 구장에서 열렸다.[54] 주니치 드래곤즈는 2군이 서부지방 팀들이 모인 웨스턴리그 소속이라 서부지역 팀이라 봐도 좋다.[55] 2019년 브랜든 레어드가 8월에 30홈런 달성. 14년만에 30홈런 타자가 나왔다.[56] 키요타는 그나마 15년에 플루크긴 했어도 준수한 중장거리포로 활약해줬다.[57] 5년 만에 일본인 20홈런 타자가 등장했다.[58] 팀 홈런 2위는 8홈런의 카쿠나카 카츠야와 스즈키 다이치.[59] 일본인 타자 홈런 1위는 카쿠나카 카츠야(8홈런)[60] 3년 연속 팀내 홈런 1위.[61] 이 때 팀내홈런 2위는 네모토 슌이치, 조시 화이트셀, 사토자키 토모야로 3명 다 9홈런을 기록했다.[62] 이 때 팀내홈런 2위는 이마에 토시아키. 8홈런을 쳤다.[63] 이 시즌까지는 일본프로야구가 지금보다 반발력이 강한 공을 써서 지금보다 타고투저가 심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64] 최후의 치바롯데 일본인 20홈런 좌타자이자 치바롯데 일본인 좌타자 중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65] 백업포수였다. 거포형 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커리어하이가 11홈런이었다는 것은 사토자키에게 밀려 출전 기회가 적었다는 것. 그래도 2년 15억원으로 FA 이적도 하는 등 나쁘지 않은 선수생활을 보냈다.[66] 롯데에 오기 전엔 오릭스에서 30홈런도 찍은 타자였다(...).[67] 이 선수는 277타수밖에 못 뛰고도 15홈런을 쳤다. 풀 시즌을 뛰었으면 30홈런을 노릴 수도 있었지만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롯데에 오기 전에 이 선수는 소프트뱅크에서 4년 동안 뛰면서 120홈런을 넘게 쳤던 일본 최강의 슬러거였다. 메이저 시절에도 200타석도 못 들어서고 9홈런을 쳤던 장타력을 보유했던 선수였으니.[68] 2004년에 롯데에서 3할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던 하와이 출신 타자. 그러나 그 시즌은 플루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시즌의 활약이 워낙 괴물같았고, 감독 바비 발렌타인이 매우 아끼는 선수였기 때문에 무려 6시즌 동안이나 롯데에서 뛰었다.[69] 최후의 팀 홈런 공동1위.[70] 반 시즌만 뛰고도 13홈런을 칠 정도로 장타력은 진퉁이었지만 볼삼비도 1:2로 선풍기 소리를 들었고, 득점권만 되면 긴장했는지 득타율이 '''1할 3푼'''이었다. 결국 13홈런 치고도 퇴출. 실제로 13홈런을 쳤는데 타점은 겨우 32타점이었다.[71] 치바롯데 최후의 20홈런 이상 치고도 팀내 홈런 1위를 먹지 못한 선수.[72] 다만 까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73] 2020년에는 1군 투코로 승격.[74] 그 외에도 코타니 타다카츠 등의 전직 롯데 2군 투수코치 중에서도 명 코치가 있었다. 이 사람은 롯데에서 후타키 코타를 터트리고 쿄진으로 가서 크리스토퍼 메르세데스를 키웠다.[75] 이때가 바비 발렌타인감독 재계약건으로 한참 시끄러울때고 후술할 MVP라는 조직이 앞장서서 발렌타인 재신임운동을 하고있었다.[76] 같은 리그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도 자주 이용한다. 특히나 이 둘이 대결하면 외야석에서 장관을 볼 수 있다.[77] 다만 마린즈 팬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 타 구단의 응원에서도 종종 이러한 축구 서포터에 가까운 응원 문화가 존재하기도 한다.[78] Marines Victory Productions(약칭 MVP), 치바 롯데 마린즈 외야 응원단 등. 축구와 유사한 롯데 특유의 응원 스타일을 주도했지만, 위에서 서술한 매너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는 터부시되는 견제 응원을 하다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79] 우연의 일치이지만, 견제 응원이 문제시되던 시기에 김성근은 치바 롯데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었다. SK 와이번스에서 보여준 그의 견제 응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80] 이들은 2012년에 창단한 일본 사회인야구팀 "도쿄 메츠"의 서포터이자 후원자로 활동을 재개한다.[81] 앞서 이야기한, 레이지본에서 활동했고 2005년까지 롯데 응원단 활동을 하다 구단 직원으로 일하던 진 토시오 씨가 응원단장으로 복귀해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상술한 U.N. 오웬이나 キラメキラリ는 그의 선곡이라고 한다.(...) 진 토시오는 2018년 시즌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응원단으로 옮겼다. 일본에서 몇 안되는 프로 응원단 일을 하는 사람으로, 2016년부터 진 토시오가 응원단장을 그만둔 후에는 지역별로 응원단이 운영되는 형태로 바뀌었다.(이전에는 응원단은 지역별로 존재했으나 그들을 통솔하는 응원단장은 진 토시오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했었다. 아무래도 진 토시오는 프로 응원단이기 때문에 원정 경기까지 일일이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던 것 같다.)[82] 이때 롯데 마린스 서포터들이 가장 좋아했던 "우리들의 자랑"이 금지곡이 된다. 단지 MVP가 이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83] MVP에서 발렌타인을 내치려는 프런트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외야에 건 적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 내용이나 단어선택이 다소 자극적이었다. 그 무렵 니시오카 츠요시는 어린 팬들을 위해서라도 현수막을 거두아달라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MVP의 미움을 사 한동안 MVP의 조롱과 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팬들은 니시오카를 옹호했고 이 때문에 MVP와 약간의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상황.[84] 단지 서포터 주축이 갈려지고 친 구단성향의 서포터 그룹이 응원을 주도하고 있을뿐, 기본성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85] 치바 롯데 마린즈의 서포터즈인 team 26 역시도 라미고 몽키스의 Oh! Lamigo! 응원가를 One Heart Marines 콜로 개사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알프레도 데스파이네의 롯데 시절 응원가는 라미고 몽키스의 찬스테마이며, 라미고의 왕보룽 응원가는 치바롯데 팀 응원가로 쓰이고 있다.[86] 무료로 주는 티켓도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는게 골드 이상은 내야 지정석도 입장이 가능한데 레귤러와 캐주얼 레귤러는 내야 자유석과 외야 응원석만 된다.[87] 사실 롯데 응원도 안 하면서 일본 여자를 헌팅하러 오는 한국 남자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한국 남자라고 하면 특히 싫어하는 소모임이 많다고 한다. 특히 김태균이 롯데에서 뛸 때 그게 심했다고...[88] 오릭스의 연고지인 오사카야 두말할 필요 없는 한신국이고, 치바 역시 요미우리의 인기가 가장 높다. 요미우리와 같은 연고로 두고 있는 야쿠르트는 도쿄에서야 요미우리에 밀리는 건 사실이나, 야쿠르트 창업자의 고향인 나가노현에서 가장 인기 좋은 야구 팀이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시 본진인 사이타마에서는 교진에 밀리지만, 세이부 회사 자체의 발상지나 다름없는 시가현 내 인기는 No.1이다. 그런데 치바 롯데나 오릭스는 그런 현도 없으니.[89] 홈 라이트 응원석 한정. 원정팀 응원구역 옆에 붙어있는 래프트 응원석은 팬클럽이라면 개막전같은 인기 경기도 갈 수 있다.[90] 2019년의 경우 후쿠우라 카즈야의 모교 응원단이 방문하는 올포치바데이 경기가 이런 케이스.[91] 코시엔의 경우 원정팀 응원구역이 8개의 구역이 있다. 이 중 적게는 1개부터(라쿠텐) 많게는 6개까지(히로시마) 상대팀 인기도에 따라서 원정 응원석으로 지정하는데 라쿠텐보다도 비인기인 롯데와의 경기에서는 요미우리나 히로시마처럼 5-6구역을 응원석으로 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속으로 표가 나간다. 왜 이런지는 의문. 칸사이에 롯데 팬이 많다고 하면 오릭스 버팔로즈 홈구장이 오사카라서 충분히 롯데 경기를 볼 수 있는건데... 혹자는 33:4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92] 롯데 홈인 제3구장 경기는 도쿄돔밖에 없다. 이 경기는 당연히 응원석이 광속매진인데 뜬금없이 '''남의 팀 지방구장 원정 응원석도 광속매진시켜버린다!''' 오미야나 군마같은 홈에서 그나마 가까운 지방구장은 물론 '''오비히로, 쿠시로 같은 삿포로에서도 한참 떨어진 촌구석 야구장까지 다 매진시켜버리는 수준'''이다. 왜인지는 불명. 참고로 이런 성향 때메 '''쿄진, 한신 팬'''은 어디든 '''있다'''면, '''롯데 팬'''은 어디든 '''간다'''(...) 는 말이 있다. 팬은 적지만 전국을 원정경기를 보러 다니는 코어팬은 많다는 것.[93] 다이에 출신의 경영인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구단 업무를 맡아 네모토 리쿠오 전무와 함께 호크스의 후쿠오카 정착과 리빌딩을 주도한, 일본프로야구 프론트 업무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하지만 1998년의 다이에 사인 훔치기 스캔들, 경영악화 이후엔 고쿠보 히로키 무상 트레이드로 귀결된 부패 운영 의혹 등에 연루되고, 롯데 구단 사장으로 복귀한 2004년 프로야구 재편문제 때는 후루타 아츠야 선수노조 위원장 등에 맞서 구단 오너들의 입장을 강경하게 대변하는 등 논란의 인물이기도 했다. 2011년 시즌 종료 후 롯데 구단본부장을 그만두고 2012년 오프시즌부터 오릭스 버팔로즈의 구단본부장을 맡았으나 2017년의 부진한 성적을 이유로 시즌 종료 후 사퇴한다.[94] 그러나 거인 일편단심인 초노는 결국 입단을 거부했고 이듬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재지명되어 요미우리의 간판선수가 됐다. 하지만 2018년 시즌 종료 이후, 히로시마 토요 카프에서 마루 요시히로가 FA를 행사하며 거인 유니폼을 입자 보상선수로 선택됐다. 3수까지 불사하며 거인에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충성도 높은 선수를 내치는 거인의 냉정함을 볼 수 있다.[95] 발렌타인의 고액 연봉과 미국에서 데려온 코치, 통역 등을 중심으로 프론트의 의사를 무시한 독단적인 운영을 했다는 식으로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비되는 발렌타인의 입장은 주로 일본 야구를 전문으로 다루는 미국인 기자들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History, tradition helped to undermine Valentine" - The Japan Times 소속 Robert Whiting 기자의 기사(4부작), 교도통신 Jim Allen 기자의 블로그 포스트. 미-일간 문화적 차이도 엿볼 수 있는 부분.[96] 프런트와 갈등이 심하긴 해도 팬들에게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하다. 막장스런 '집시 롯데' 시대 이후 가와사키, 치바 시대까지 질기도록 이어진 암흑기를 청산해 준 (마린즈 팬 측에서는) 명장이기도 하고 2차 취임기 때 포스트시즌 진출 단골팀(특히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만들어 준 감독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팬들이 이 조치에 반발하였다.[97] 간단히 설명하자면, 바비 발렌타인과 보삭스 선수들 간의 불화설이 시즌 내내 나왔다. 바람잘날이 없었던 셈. 자세한 내용은 보스턴 레드삭스/2012년을 참조바람.[98] 참고로 2005년 우승이 아니었다면 이 분과 더불어 '''세계 프로야구 사상 유이의 70년대 우승 후 우승 없는 팀'''이란 기록을 유지했을 것이다. 한술더떠 현해탄 건너 자매팀보다도 더 우승을 오랫동안 못한 팀이란 치욕도 가지고 있을 뻔 했다.[99] 이 때부터 2011년 아시아 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 호코스가 삼성 라이온즈에게 결승에서 3:5로 패하기 전까지, 일본팀이 AS에서 4연속 우승을 하게 된다.[100] 정확히 말하면 70년대 퍼시픽 리그에 플레이오프 제도가 존재했었기 때문에 처음은 아니다. 이전 플레이오프 제도까지 포함하면 1973년의 난카이 호크스가 최초.[101] 이 두 팀은 1974년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한 바 있다. 결과는 롯데 오리온즈의 승리.[102] 최종전인 7차전은 후지 TV에서 중곙했다.[103] 이 사람은 왕년에는 잘나갔으나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히 드랍 더 볼 이후로 노쇠화가 겹치며 빛의 속도로 추락했다.[104] 독립 리그로 간 스미 코타를 제외하면 전원 은퇴.[105] 이 때 상대 선발 후지나미 신타로가 7회 1사 이후 실책이 나오며 급격히 흔들렸고 결국 대량실점을 하며 마운드 퇴갤. 그뒤로 불펜을 털어 동점은 만들었지만 더는 점수를 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오승환도 치바 타선에게 점수를 허락하지는 않았다.[106] 2승3패를 하게 될 경우 동률이 되는데 이 경우 퍼시픽리그는 1) 맞대결 전적에서 우위에 있는 팀, 2) 1)로도 동률일 경우 교류전을 제외한 동일리그 소속팀과의 대결에서 승률이 높은 팀(즉, 교류전의 하위팀), 3) 1), 2)로도 동률일 경우 전년도 성적 상위팀의 기준으로 순위를 가르게 되어 있다. 2015년의 경우 세이부와 롯데의 맞대결은 13승 1무 11패로 롯데가 우위기 때문에 1)이 적용 되어 동률이면 롯데가 상위를 점하게 된다. 참고로 동률 팀의 순위를 가르는 기준이 양 리그가 다른데 센트럴리그의 경우는 동률일 경우 1) 승리수가 많은 팀, 2) 1)이 동률일 경우 맞대결에서 우위에 있는 팀, 3) 1), 2)까지 동률일 경우 전년도 성적 상위팀 순으로 기준을 정하게 된다.[107] 10월 1일 기준으로 최하위 트래직 넘버 1. 즉, 라쿠텐이 전승하고 5위 오릭스가 전패를 해야 라쿠텐이 탈꼴지를 하게 된다.[108] 도발 포스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퍼스트 스테이지 에서는 「매 사냥을 가기 전에 삿포로에 들러서 햄이나 먹고 가자」, 「퍼스트 스테이지? 네, 통과점입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통과율 100%의 충격」.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마린즈 팬 100명에게 물어봤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속담은 다음 중 어느 쪽? 삼세번 1명, 두번 있는 일은 세번 있다 99명」, 「기다려봐..., 이 상황. 좋은 기억밖에 없는 걸?」, 「클라이맥스 시리즈 호크스 상대 시리즈 패전 0%의 충격」. [109] 하지만 파이널 스테이지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중심타자 데스파이녜에 대해서는 팀의 사기를 꺾었다면서 이런 식이면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디스하기는 했다.[110] 남자도 투표는 가능하지만 집계는 따로 하고, 최종순위는 여성팬들의 투표 순위로 가른다.[111] 2년 연속 1위[112] 2년 연속 2위(...)[113] 15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지명을 받은 신인투수.[114] 일본 리그는 투고타저가 매우 심해서 5점대면... [115] 우리가 흔히 아는 메이저리거와는 동명이인. 이 선수도 전직 메이저리거긴 하나 몇 경기 등판하지 못했다.[116] 외인에 묻혀서 그렇지 일본 토종 선발투수들도 다들 ERA 4점대 이상이다. 지금 다른 팀 에이스 중에는 ERA 1점대도 있는데...[117] 8월 8일 기준 2승 9패 ERA 4.63[118] 8월 8일 기준 4승 9패 ERA 4.01[119] 근데 롯데보다 더 잘하고 있는 오릭스는 1~6선발이 모두 패배 TOP 20에 들어가 있는게 함정...[120] 원문은 井上晴哉の甘党カルーアミルク.[121] 사실 이건 말장난이다. 원래 이름은 おいどんのおい丼. 발음은 오이동노 오이동. 앞의 오이동은 큐슈 사투리로 나 라는 뜻이고, 뒤의 오이동은 덮밥을 뜻하는 돈부리메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 일본어에서만 통할 말장난. 후타키 코타는 큐슈 출신이다.[122] 후타키 코타는 한자로 二木康太(이목강태)다.[123] 이 선수는 실제로 스테이크를 와사비에 찍어 먹는다고 한다.[124] 원문 たむNEW麺~オレンジの香り~. 제 멋대로 아무렇게나 번역한게 좀 있으니 더 좋은 번역 가능하면 부탁드립니다.[125] 년수를 다 채웠기 때문에 18시즌부터는 일본인 선수 취급을 한다. 따라서 외국인 쿼터와 상관없이 재계약과 1군 등록 가능.[126] 2009년 닛폰햄에서 풀 시즌을 뛴 것은 아니지만 0점대 평자를 기록하며 셋업맨으로 주목받았던 선수. 그러나 09 시즌은 플루크였고 그 뒤로는 얻어맞기만 하다가 방출당해 독립 리그를 거쳐 롯데로 왔건만 결국 두 번째 방출을 당했다. 방출 이후 실업야구로 가서 파나소닉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127] 교토대학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라고 유명해진 그 선수 맞다.[128] 실업야구 출신. 실업야구 시절에는 운전면허 학원 팀에서 일했는데, 오전에는 야구를 하고 오후에는 운전면허 강사로 일했다고 한다. 운전면허 강사 출신 야구선수로는 최초였다. 롯데에서 방출당한 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나갔으나 새 팀을 구하지는 못했다. 이 과정이 일본 방송에 취재되기도 했다.[129] 정말 잘생겼다. 외모로도 넷상에서 나름 유명했었고, GV 출연 의혹으로도 유명했던 포수였다. 1군 경험이 아예 없었는데도 개인 상품이 출시될 정도로 얼빠가 존재했다. 방출 이후 클럽 팀 Revenge99로 갔다. 클럽 팀이라는 말로 보아 실업야구는 아닌 듯.[130] 이미 16년 시즌 이후에 팀에서 방출당해서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을 통해 치바롯데로 이적하였으나 1년만에 또...참고로 이 때같이 치바롯데에 입단한 동기로는 미케 카즈마와 이노모토 켄타로가 있었는데, 미케를 제외하고 모두 1년만에 방출. 방출 이후 한신 타이거스의 구단 직원으로 취직.[131] 방출 이후 연식 야구팀에 들어갔다. 보통 연식 야구 팀은 한국의 사회인야구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돈을 받고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132] 방출자 중 유일한 육성선수. 육성선수였는데도 입단 첫 해부터 1군 스프링캠프에 합류하는 등 기대를 모았으나 부상 때문에 내리 재활만 했다고 한다. 방출 이후 미국의 독립 리그로 가서 거기서 주전으로 활약중.[133] 3년 연속 1위. 결국 명예의 전당에 올라 18시즌 투표부터 투표 불가.[134] 롯데의 2010년 4라운더. 1군 기록은 1경기에 그쳤다.[135] 롯데의 2006년 6라운더. 중간계투로 꽤 뛰었으나 와쿠이 히데아키의 보상선수로 세이부에 간 후 2년만에 은퇴했다.[136] 롯데의 2004년 자유획득 선수. 그러나 1군 1경기에 그쳤다.[137] 롯데의 2005년 4라운더. 홀드왕도 기록했었으나 20대 후반에 퇴물화가 되어 30대 초반에 은퇴해야 했다.[138] 킨테츠의 1985년 3라운더. 1군 기록은 없다.[139] 롯데의 1985년 1라운더. 프로에서 9년이나 뛰었지만 2경기 출장에 그쳤으며, 통산 방어율은 무한대(...)[140] 롯데의 2013년 4라운더. 즉전감이었으나 1군 통산 6경기 등판에 그쳤다.[141] 카나자와학원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롯데에 불펜포수로 입단한 선수. 요미카타가 아무리 찾아도 안 나와서 정보를 찾은 후 수정 예정.[142] 1988년 롯데 드래프트 번외입단.[143] 롯데의 1990년 4라운더.[144] 한신의 2002년 8라운더.[145] 오릭스의 1986년 1라운더. 선수 기록은 화려하진 않지만 한국나이 42세까지 현역으로 뛰었을 정도로 가늘고 길게 버텨온 선수였다.[146] 2020년 시즌을 앞두고 야심차게 FA로 데려왔다. [147] 시즌 중 타카노 케이스케와 트레이드.[148] 외야수 중에서도 오기노 타카시가 유격수를 본 경험이 있어서 유격수에 세워놓을수 있는 선수가 더 있다. 다만 오기노는 유격수를 본게 신인 시절이라 지금은 못 볼 테지만...[149] FA로 롯데에 이적.[150] 코야마의 앞에는 가네다 마사이치와 요네다 테츠야밖에 없다.[151] 1750만엔이었다고 한다.[152] 이 사람 이혼을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했다(...)[153] 이 사람 90년대에 선수로 뛸 때 연봉이 4000만엔이 넘던 사람이다! 한낱 3만엔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154] 사장이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가정부한테라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했고, 홧김에 때려서 기절시킨 것. 이후에 발각되는 게 두려워서 기절한 가정부를 아라카와 강에 던져버렸다.[155] 이후 감옥에서 소프트볼 대회가 열리자 프로에서 탈삼진왕도 기록해서 동료 죄수들이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유격수로 출장하여 무안타를 기록해서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애초에 현장을 떠난 지 15년 이상 됐던 사람이고 당시에 40대 중반이어서 몸이 안 따라준듯.[156] 하다못해 비슷하게 금전 문제로 선수생활과 인생을 말아먹은 팀 후배 오미네 쇼타만 봐도 연봉이 가장 높을 때가 1000만엔 수준이었다. 그것도 2010년대 기준으로. 20년 전 수준이랑 비교하면 오가와가 번 돈은 오미네의 5~10배는 됐을 텐데 어마어마한 낭비벽이었던 것.[157] 사실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원하다보니 거의 연구대상 수준. 사실 키무라의 경우는 처음부터 센트럴리그 팀은 입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도쿄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퍼시픽리그 팀인 롯데를 원했던 것으로 추정. [158] 이로 인해 사회인야구 시절 1년 출전정지도 당했다.[159] 중간계투 ERA가 4점대 중반이면 보통 1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 특성상 2경기마다 한번씩 실점을 했다는 건데 셋업으로 쓰기에는 그 점이 문제였다.[160] 1군 출장기록은 1974년이 마지막.[161] 특히 포일 실책이 거의 없었다. 일본 신기록을 찍었을 정도로.[162] 재일한국인. 한국명 김유세.[163] 그 전설의 10.19 당시 롯데 감독이 바로 아리토였다. 그리고 아리토는 그 날 2차전 때 8분이나 지연행위를 벌이며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어버려 킨테츠의 우승실패에 제대로 일조를 했다(...). 자세한 건 10.19 항목 참조.[164]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산타율 랭킹의 기준은 4000 타수이다. 한국의 경우는 3000타석이 기준이다. 이는 경기수가 적었던 80년대 초창기 선수(특히 장효조, 통산타수 3050)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짙다. 타수 기준을 그보다 더 높이면 장효조의 통산 타율(.331)이 그냥 참고기록으로 밀려나버리기 때문에 올드 야구팬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기준을 낮춘 감이 있다. 참고로 아오키 이전까지 일본인 규정타수 만족 통산타율 1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레전드이자 대선배, 아오키의 신인시절 감독이기까지 했던 와카마츠 츠토무. 이치로는 타석은 4000을 넘었지만 타수가 3619라 통산타율 랭킹에는 들어오지 못한다.[165] 이렇게 일본시리즈 한 팀이 다음 해 리그 꼴찌인 사례는 1961년 미하라 오사무가 이끌던 다이요 훼일즈, 1979년 히로오카 타츠로가 이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결국 히로오카는 도중 사임), 그리고 2011년 치바롯데, 2014년 호시노 센이치의 라쿠텐 이글스(호시노는 건강문제도 있어서 이 해 시즌 종료후 퇴임) 이외엔 없다.[166] 이로 인하여 이혼까지 했다. 빚 자체는 2천만원 수준으로 적었지만 오오미네가 1군에 자리잡기 전인 2016년까지는 연봉이 5~7천만원 수준이라 세금을 떼고 자녀 양육비를 제외하면 오히려 돈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렇게 수십, 수백만원씩 빌린 것이 몇천만원까지 돼 버린 것. 그런데 오오미네는 사실 2017~2018년 연봉은 1억원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세금을 떼더라도 2천만원 정도는 일시불로 갚을 수 있을텐데 도대체 그 돈은 어디에 갖다바치고...?(구단 내부 관계자로부터의 빠찡꼬를 좋아한다는 증언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일진 비슷하게 놀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생활이 방탕한 것이 아닌가 싶다.)[167] 그것도 은퇴 직후에 인터뷰했던 기자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거부당하자 야쿠자를 들먹이면서 40만 엔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168] 롯데는 선수끼리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랬다![169] 어떻게 게임을 할 수 있었냐면, 롯데 시절에는 딱 한 경기를 빼면 전부 지명타자로 나왔다. 즉 수비 이닝 때는 계속 대기실에 가서 게임만 했다는 것(...) 후술하겠지만 저 행위 때메 다른 선수와 싸움이 난 적도 있었다. 여담으로 주니치 시절에는 센트럴리그가 지명타자가 없어서 좌익수로 계속 나왔다.[170] 헨슬리 뮬렌 상대로 엄청난 괴롭힘을 한 이유도 뮬렌은 AAA와 메이저를 오가며 메이저에선 백업 정도의 성적을 내고 일본에 왔고, 일본에서도 컨택과 선구안이 떨어지는 공갈포였기 때문. 메이저리그에서 꽤 오랫동안 주전으로 뛰었던 홀과 비교하면 미미한 기록이다.[171] 가석방도 최소 22년 4개월은 경과해야 한다고 한다.[172] 멜 홀은 1960년생이다. 즉 가석방되어도 최소 69세는 넘으며 형량을 다 채우면 무려 92세다. 진짜 질기게 살지 않는 한,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173] 게다가 미국에선 아동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같은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자기들보다 더한 쓰레기 취급 받고 심지어 린치까지 당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감옥에서의 여생도 험난하리라 예상된다.[174] 헨슬리 뮬렌은 놀림, 폭행, 음료수 셔틀 짓까지 당했다. 은퇴 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시기의 멜 홀과의 경험을 왕따당하는 것으로 표현했을 정도. 감독이 하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줬으나 전부 묵살당했다고 한다. 심지어 1995년에는 홀은 주니치, 뮬렌은 야쿠르트에서 뛰었는데, 주니치와 야쿠르트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홀이 뮬렌을 찾아가서 괴롭혔다고 한다! 거기다가 주니치에서 1994~1996년까지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던 알론조 파월 역시 메이저리그 커리어가 별볼일없다는 이유로 뮬렌처럼 괴롭힘을 당했다.(이 선수는 메이저리그 기록은 2시즌 71경기에 불과했지만 일본에서 7년이나 뛰었고, 주니치에서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하며 2020년엔 순회타격코치로 주니치에 돌아올 정도로 주니치에선 전설급 용병타자 중 한 명이었다.)[175] 그 외에도 벤치클리어링 때 말리러 온 상대팀 포수를 폭행한 적도 있고, 1993년에 롯데에서 뛰었던 맥스 베너블과도 싸운 적이 있었다. 싸운 이유는 덕아웃에서 게임을 하는 것을 보고 베너블이 뭐라 하자 발끈해서 싸움이 난 것. 또한 일본인 팀메이트인 아이코 타케시, 코미야마 사토루 역시 멜 홀은 역대 최악의 야구선수라고 인터뷰하거나, 멜 홀이랑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자식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의 인터뷰를 쏟아낸 걸 보면...[176] 데뷔 동기고 고졸이라 동갑내기였다. 오노 신고, 오오츠카 아키라, 후쿠우라 카즈야 이렇게 3명이서 94년 드래프트 고졸동기로 친하다. 또한 이들 셋 다 현역 시절도 은퇴 후에도 롯데를 떠나지 않은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라서 뒷배경이 탄탄하다.[177] 같은 드래프트에서 더 하위픽이었던 오노 신고,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묻힌 감이 있지만 이 사람도 롯데에서 은퇴 후 코치와 스카우터를 하면서 원클럽맨으로 버텨오고 있다.[178]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이다.[179] 단 센가는 드래프트에 참여할 때는 가능성은 있었으나 당장 전혀 써먹기 어려운 선수였기에 상위지명 가능성은 없던 선수였다. 프로에서 급성장한 케이스. 물론 다른 3명은 상위픽 지명이 유력한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롯데가 뻘짓한 게 맞다.[180] 1952년 7월 16일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홈구장인 헤이와다이 구장에서의 원정경기 때 4대 9로 뒤지던 마이니치가 우천과 일몰 노게임(당시 헤이와다이 구장은 조명시설이 없었다.)을 노리고 고의적인 경기 지연행위를 벌여 결국 5회초에 노게임 선언이 되자 분노한 니시테츠 팬 수천명이 그라운드에 난입한 사건. 이 때 니시테츠의 오시타 히로시와 노구치 마사아키가 둘이서 함께 팬들의 주먹과 발길질에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관객들을 저지했고 결국 이날 소동은 3300명의 경찰 기동대가 투입되어 겨우 진정되었다. 이날 관객들의 소란을 저지한 공으로 오시타와 노구치는 연맹 표창을 받은 반면 지연 행위를 조장했던 유아사 요시오 총감독은 해임, 와카바야시 타다시 감독은 2군 감독으로 강등당하는 조치를 받고 벳토 카오루가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였다.[181] 이토 감독이 김정후의 입단 테스트 후에 2017 시즌 전반기를 독립 리그에서 보내면서 실전 경기를 치르는 걸 봐서 후반기에 입단시켜주겠다고 판단 보류 판정을 내렸는데, 이토의 사임이 정해지면서 그대로 무산. 후임 감독 이구치는 2017년 인터뷰에서 이토의 구단 운영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이토가 영입하려고 한 김정후의 영입도 백지화를 해버렸다.[182] 리두쉬안 같이 국적은 외국이지만 드래프트로 입단하여 일본인 쿼터에 해당하는 선수는 제외.[183] SK 와이번스에 있던 그 호세 페르난데스 맞다.[184] 이름인 쇼트가 일본어로 유격수를 뜻하는 말이다 보니 이 선수가 롯데에서 뛸 때 올스타전 유격수 부문에서 엄청난 표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프로야구는 올스타전 투표를 할 때 모든 선수를 포지션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단 투수를 타자로 투표하거나 타자를 투수로 투표하는 것은 금지.)[185] 요코하마에서 8년을 뛴 장수 외국인 용병. 2년의 공백기를 갖고 롯데에 복귀했으나 흑역사가 되었다.[186] 스프링캠프 도중 야구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면서 방출을 요구했다.[187] 롯데 시절에 이승엽은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밀려 좌익수를 자주 봤다.[188] 2002년 한화 이글스에 영입되어 한국에 입국까지 하였으나 부적격 선수임이 밝혀져서 퇴출되었다. 그 당시에는 직전 시즌과 2년 전 시즌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등록이 되어 있는 선수는 용병으로 데려오면 안 되는데 세라피니는 2년 전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들어 있었기 때문.[189] 롯데 시절에 이승엽은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밀려 좌익수를 자주 봤다.[190] 2002년 한화 이글스에 영입되어 한국에 입국까지 하였으나 부적격 선수임이 밝혀져서 퇴출되었다. 그 당시에는 직전 시즌과 2년 전 시즌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등록이 되어 있는 선수는 용병으로 데려오면 안 되는데 세라피니는 2년 전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들어 있었기 때문.[191] 일본을 떠난 후 두산에서 뛰게 된다. 근데 거기선 더 못해서 광속퇴출.[192] 2013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193] 일본을 떠난 후 두산에서 뛰게 된다. 근데 거기선 더 못해서 광속퇴출.[194] 대만 복귀 반 시즌만에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해 흑역사화.[195] 대만 복귀 반 시즌만에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해 흑역사화.[196] 쿠바에서 귀화.[197] 입단 한 달만에 지배 등록이 되긴 했다.[198] 사실 투포수 빼고 다 가능한 만능 유틸이었다. 주 포지션이 저 두 개. [199] 쿠바에서 귀화.[200]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201] 부상으로 인해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5월에 방출당했다.[202] 사실 계약기간이 남아 있었는데 본인이 공인구 교체로 인한 부진과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으로 인해 팀에 방출을 요구했다.[203] 사실상 시즌 중 중도퇴단한 김태균의 대체 용병이다. 일본프로야구는 용병이 무제한이라 대체 영입이라는 표현은 없다.[204] 이후 2018년 12월 6일 베네수엘라 윈터리그를 마치고 차량으로 이동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LA 에인절스에서 뛰었던 루이스 발부에나도 사망. 해당 차를 운전했던 카를로스 리베로(2017년 야쿠르트에서 뛰었다.)는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205]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206]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207]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208] 2014년 시즌이 끝나고 기대이하의 퍼포먼스로 자유계약으로 풀렸으나 2015 시즌 전에 다시 롯데와 협상을 하여 재입단했다. 시즌 중 입단도 아니기에 사실상 재계약이라고 봐야겠지만...[209] 한국 국적 시절 이름.[210] 한국에서 미국으로 귀화했다.[211]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한국인 용병투수. 최후의 용병타자는 하재훈이며 외국인 취급을 받지 않는 김무영까지 총 3명의 한국인이 2016년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다. 그 후로 일본프로야구에 입단한 한국인은 없다.[212] 본인이 계약해지를 요구하여 7월 초에 웨이버 공시. 시즌 내내 1군 콜업 없이 2군에서만 뛰어서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213] 이 선수는 2019년 멕시칸리그에서 타율 .380에 31홈런 OPS 1.078로 터졌다. 물론 멕시칸리그가 공인구 교체 이후 미친듯이 홈런이 급증해서 펠릭스 피에보다 OPS가 낮았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나름대로 성공했던 자펫 아마도르, 루이스 크루즈보다도 OPS가 높았으니 한번도 안 긁어본 것은 아쉬운 선수.[214] 마약 소지로 체포되면서 시즌 중 계약해지.[215]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 [216] 새 각주가 없는 이상 페넌트레이스 1위만 일본시리즈로 진출.[217] 1954~1956년엔 퍼시픽리그가 8팀 체제였기에 4위까지 A클래스였다.[218] 1973~1982년의 전후기리그제의 경우는 플레이오프 우승으로 리그 우승을 확정지을 시 페넌트레이스 순위에 관계없이 1위 결정. 그 이하는 전후기 합산 승률 순위에 따라 결정.[219]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후기 우승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 한 팀이 전후기 독점 시 일본시리즈 직행.[220] 실제 순위는 2위였으나, 페넌트레이스 3위였던 난카이(전기 우승)가 플레이오프에서 한큐(후기 우승)를 꺾고 리그 우승을 결정지었고 그 결과 페넌트레이스 1위였던 한큐가 2위로 내려가면서 롯데의 순위가 3위로 하락.[221] 참고로 이해 시즌에 롯데는 1위 킨테츠와 불과 8모 차이로 페넌트레이스 1위 달성이 좌절되었다.(킨테츠 .5573/롯데 .5565) 즉 반올림 시엔 '''동률 1위'''가 될 수 있었다...라고 하지만 저 때 규정상 플레이오프를 이겨야 우승하는 것이니 별 상관 없는 이야기다.[222] 단독 플레이오프 시대일 경우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무조건 1위가 되며, 나머지는 정규시즌 순서로 세운다.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정규시즌만 반영.[223] A클래스 전원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플레이오프에, 2007년부터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한다.[224] 페넌트레이스 순위는 2위였으나, 플레이오프 우승으로 리그 우승 결정.[225] 로고가 상당히 비슷했으나 2020년 밀워키의 로고가 교체되며 상관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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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 변신'''을 하는 충격적인 마스코트이다. 그리고 특유의 눈과 입 모양 때문인지 일본 내에서는 아따맘마가 떠오른다는 반응도 나왔다.[18] 그마저도 롯데의 경기는 없었다.[19] 1981-2005년. 그러나 1996년은 시합 중지가 되어 실질적으론 24년.[20] 참고로 이때 마이니치 신문의 창단을 요미우리 신문과 주니치 신문이 거세게 반발했고 그결과 일본야구연맹이 해체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주니치 드래곤즈를 중심으로 창단 반대파가 뭉쳐 만든 리그가 센트럴리그, 창단을 지지하는 구단들이 모여서 만든게 퍼시픽리그이다.[21] 정확하게는 마이니치가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오늘날의 키움 히어로즈처럼 명명권 판매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했는데, 1969~1970년에 네이밍 스폰서를 맡은 롯데가 1970년 파리그 우승 뒤에 "이거이거 대박인데?" 하면서 아예 시즌 종료 후 구단을 사들인 것.[22] 이때 상태팀은 쇼치쿠 로빈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꽤 있을텐데, 그게 그럴만도 한게 1952년 승률 3할미만 팀 강제합병 정책 대상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타이요 훼일즈와 합병당해 사라졌기 때문이다(...).[23] 이 덕에 다른 프로야구 선배들 사이에서 창단하자마자 우승을 먹은 전무후무한 로얄로더가 되었다.[24] 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 타이요 웨일즈(1960)와 요미우리 자이언츠(1970)에게 지고 말았다. [25] 그러나 당시 (임시라지만) 연고지나 마찬가지였던 센다이에서 아무 행사도 안 하였기에 욕을 한바가지로 먹었다.[26] 그마저도 전부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다. 1977년엔 한큐 브레이브스, 1980년엔 긴테츠 버팔로즈, 1981년엔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패배했다.[27] 정확히는 정규시즌 2위, 그 뒤 플레이오프에서 우승. 당시엔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리그 우승팀이 되는 방식이었다.[28] 그나마 이웃 반도국가에 위치한 어느 구단보다는 나은편인게 그래도 '''21세기에 두번이나 우승을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승횟수도 두배나 되고...거기다 한국의 형제팀은 현재 우승을 가장 오랫동안 못해 본 팀으로 악명높다.[29] 사실 이건 자신들이 자초한 것이, 롯데가 다이에이한테서 구단을 인수할 당시 다이에이가 "야구장도 같이 사 가시죠?"라고 했는데 롯데 기업은 물론 팀 감독마저 구장이 너무 작아 투수가 털린다며 "노"를 외쳤고, 이 후 다이에이가 부도가 나면서 구장이 제3자에게 매각되면서 철거 크리티컬을 맞은 것.[30] 1974년 일본시리즈 홈경기를 여기서 치뤘다. 이유는 미야기 구장의 관중수용량이 2만 3천명밖에 되지 않아 일본시리즈 개최조건인 관객수용량 3만명에 맞지 못했기 때문. 다만 위에 보다시피 롯데그룹의 인수 이전에 고라쿠엔을 홈구장으로 쓴 적 있다.[31]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제1홈구장으로 사용. 현재는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리모델링되어 있다.[32] 장훈이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전인미답의 3,000안타를 이곳에서 멋진 홈런으로 기록했다.[33] 広岡達朗. 선수 시절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만 뛰었으며 이 후 1976~1979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1978년 스왈로즈에게 첫 센트럴 리그 우승과 더불어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고, 1982년~1985년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으로 있으면서 라이온즈에게 1982년 24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기고 그 뒤 1983년도 일본시리즈를 연속우승하며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이끈 명감독이기도 하였다.[34] 저거 세울 당시에는 야구를 넘어 전종목이었다. 이 기록은 얼마 안 가 깨졌는데, 누가 깨뜨렸는지는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적을 정도.[35] 6월 13일부터 7월 8일까지 기록. 중간에 1무(6월 30일 세이부전)가 포함된 기록이다. 18연패 이전에는 일본프로야구 원년(1936년)에 다이도쿄군(이후 쇼치쿠 로빈스로 팀명 변경. 첫 일본시리즈에서 맞붙은 그 상대 맞다.)이 16연패를 기록한 게 최다 연패였다. 치바 롯데 이후로 17연패 이상 기록한 팀은 없다. 참고로 센트럴리그 기록은 1970년 야쿠르트 아톰즈/2019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16연패.[36] 하도 연패가 안 끊기자 구단주가 사죄를 하기도 했고, 급기야 연패 타이기록 직전을 앞두고 액막이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37] 롯데가 6월 13일 오릭스전부터 7월 8일의 오릭스전까지 18연패 하는 과정에서 16연패때 완투승리를 눈앞에 두었던 외로운 에이스 투수 쿠로키 토모히로(黒木知宏)가 9회말 동점 투런을 맞으면서 마운드에 주저 않았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38] 결국 고이케는 사회인야구 생활을 마치고 킨테츠에 입단하지만 1997년 퍼시픽리그 다승왕(15승) 타이틀을 따낸 것 외에는 실적을 남기지 못했고 2005년에 유니폼을 벗었다.[39] 드래프트 결과를 교장선생님이 오오미네에게 통보했는데 당황하는 표정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오오미네를 설득하러 바비 발렌타인 감독과 베테랑 투수 시미즈가 이시가키 섬까지 찾아간 것 끝에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나카 마사히로와 함께 주목받던 동급생 오오미네는 정작 프로에서 큰 실적을 남기지 못했다.[40] 참고로 원래 오미네는 소프트뱅크 단독지명 예정이었고, 롯데는 히지리가오카고교의 내야수 후쿠다 슈헤이를 고교생 1라운더로 뽑으려 했다. 그러나 롯데가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주장으로 갑자기 스틸픽을 해서 오미네를 데려간 것. 결국 이 후쿠다는 소프트뱅크가 하즈레로 뽑아갔다가 FA로 롯데에 이적하면서 결국 오미네와 후쿠다 둘 다 롯데에 왔다. 그리고 오미네는 기대치의 반도 성장을 못한 실패한 1라운더로, 후쿠다는 주전 보장만 되면 터질 줄 알았으나 부상으로 망한 FA먹튀가 되면서 둘 다...[41] 물론 팀 성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당시 롯데는 비인기 리그였던 퍼시픽 리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비인기 구단이었고, 아래에 서술하듯 카와사키 구장은 한산한 야구장의 대명사였다.[42] 당시 감독이었던 야마모토 카즈요시가 당연히(?) 짤린건 덤.[43] 이마저도 당시 파리그가 전후기리그 체제로 진행되던 시기였고, 승률은 1위였지만 전기우승을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내주고 후기우승을 한 뒤 PO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것이다.[44] 여담으로 이마에의 응원가 원곡은 이정현의 '와', 후쿠우라의 응원가 원곡은 조용필의 '해변으로 가요', 이승엽의 응원가는 '힘내라 힘', 사토자키의 응원가는 코요테의 '만남'이다.[45] 2008년에는 닛폰햄 주최 도쿄돔 경기에서 마스코트가 나가시소멘 퍼포먼스를 펼쳤다. 도쿄돔과 가와사키에서 쌍으로 파리날리던(...) 팀들의 자학놀이.(YouTube)[46] 비슷한 사례로 같은 퍼시픽 리그 킨테츠 버팔로즈의 홈구장이었던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관중들이 스토브를 반입해(...) 고기 파티를 벌였던 적이 있었다. [47] 이후 80~90년대 롯데-주니치를 거치며 활약한 팀의 OB 아이코 타케시도 은퇴 뒤 여러차례 안드로스텐다이온 등의 약물을 복용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이쪽은 노쇠화 뒤 주니치에서부터 약물복용을 시작했다고 증언했지만.[48] 악동 하야카와는 2010년 시즌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으나 별달리 활약은 못 하다가 2011년 시즌이 끝난 뒤 은퇴했다. 이 후 2016 시즌부터 친정팀 오릭스 버팔로즈의 2군 외야 수비 주루코치를 맡는다.[49] 보면 알겠지만 이익 본 건 없다. 희귀한 인정 3루타만 줬을 뿐(...).[50] 앞에 언급한 배트 던지는 하야카와다. 사실 저런 포수 메치기는 MLB에선 흔한 풍경이'''었'''으므로 일본 기준으로 험하긴 해도 완전히 이상한 건 아니다.[51] '롯코오로시'의 그 '롯코'를 뒤집어서 33-4 모양을 만들었다.[52] 난카이 호크스의 홈구장. 호크스의 후쿠오카 이전 후 모델하우스 부지 등으로 쓰이는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가(...) 1998년 철거.[53] 당시엔 아직 프랜차이즈가 제도화 되지 않아서 각지의 구장에서 경기를 치뤘다. 이 해 일본시리즈는 4승 2패로 우승했는데, 우승 결정전인 6차전은 오리온즈의 홈 경기였으나 당시 홈구장으로 쓰던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리지 않고 오사카 구장에서 열렸다.[54] 주니치 드래곤즈는 2군이 서부지방 팀들이 모인 웨스턴리그 소속이라 서부지역 팀이라 봐도 좋다.[55] 2019년 브랜든 레어드가 8월에 30홈런 달성. 14년만에 30홈런 타자가 나왔다.[56] 키요타는 그나마 15년에 플루크긴 했어도 준수한 중장거리포로 활약해줬다.[57] 5년 만에 일본인 20홈런 타자가 등장했다.[58] 팀 홈런 2위는 8홈런의 카쿠나카 카츠야와 스즈키 다이치.[59] 일본인 타자 홈런 1위는 카쿠나카 카츠야(8홈런)[60] 3년 연속 팀내 홈런 1위.[61] 이 때 팀내홈런 2위는 네모토 슌이치, 조시 화이트셀, 사토자키 토모야로 3명 다 9홈런을 기록했다.[62] 이 때 팀내홈런 2위는 이마에 토시아키. 8홈런을 쳤다.[63] 이 시즌까지는 일본프로야구가 지금보다 반발력이 강한 공을 써서 지금보다 타고투저가 심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64] 최후의 치바롯데 일본인 20홈런 좌타자이자 치바롯데 일본인 좌타자 중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65] 백업포수였다. 거포형 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커리어하이가 11홈런이었다는 것은 사토자키에게 밀려 출전 기회가 적었다는 것. 그래도 2년 15억원으로 FA 이적도 하는 등 나쁘지 않은 선수생활을 보냈다.[66] 롯데에 오기 전엔 오릭스에서 30홈런도 찍은 타자였다(...).[67] 이 선수는 277타수밖에 못 뛰고도 15홈런을 쳤다. 풀 시즌을 뛰었으면 30홈런을 노릴 수도 있었지만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롯데에 오기 전에 이 선수는 소프트뱅크에서 4년 동안 뛰면서 120홈런을 넘게 쳤던 일본 최강의 슬러거였다. 메이저 시절에도 200타석도 못 들어서고 9홈런을 쳤던 장타력을 보유했던 선수였으니.[68] 2004년에 롯데에서 3할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던 하와이 출신 타자. 그러나 그 시즌은 플루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시즌의 활약이 워낙 괴물같았고, 감독 바비 발렌타인이 매우 아끼는 선수였기 때문에 무려 6시즌 동안이나 롯데에서 뛰었다.[69] 최후의 팀 홈런 공동1위.[70] 반 시즌만 뛰고도 13홈런을 칠 정도로 장타력은 진퉁이었지만 볼삼비도 1:2로 선풍기 소리를 들었고, 득점권만 되면 긴장했는지 득타율이 '''1할 3푼'''이었다. 결국 13홈런 치고도 퇴출. 실제로 13홈런을 쳤는데 타점은 겨우 32타점이었다.[71] 치바롯데 최후의 20홈런 이상 치고도 팀내 홈런 1위를 먹지 못한 선수.[72] 다만 까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73] 2020년에는 1군 투코로 승격.[74] 그 외에도 코타니 타다카츠 등의 전직 롯데 2군 투수코치 중에서도 명 코치가 있었다. 이 사람은 롯데에서 후타키 코타를 터트리고 쿄진으로 가서 크리스토퍼 메르세데스를 키웠다.[75] 이때가 바비 발렌타인감독 재계약건으로 한참 시끄러울때고 후술할 MVP라는 조직이 앞장서서 발렌타인 재신임운동을 하고있었다.[76] 같은 리그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도 자주 이용한다. 특히나 이 둘이 대결하면 외야석에서 장관을 볼 수 있다.[77] 다만 마린즈 팬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 타 구단의 응원에서도 종종 이러한 축구 서포터에 가까운 응원 문화가 존재하기도 한다.[78] Marines Victory Productions(약칭 MVP), 치바 롯데 마린즈 외야 응원단 등. 축구와 유사한 롯데 특유의 응원 스타일을 주도했지만, 위에서 서술한 매너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는 터부시되는 견제 응원을 하다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79] 우연의 일치이지만, 견제 응원이 문제시되던 시기에 김성근은 치바 롯데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었다. SK 와이번스에서 보여준 그의 견제 응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80] 이들은 2012년에 창단한 일본 사회인야구팀 "도쿄 메츠"의 서포터이자 후원자로 활동을 재개한다.[81] 앞서 이야기한, 레이지본에서 활동했고 2005년까지 롯데 응원단 활동을 하다 구단 직원으로 일하던 진 토시오 씨가 응원단장으로 복귀해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상술한 U.N. 오웬이나 キラメキラリ는 그의 선곡이라고 한다.(...) 진 토시오는 2018년 시즌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응원단으로 옮겼다. 일본에서 몇 안되는 프로 응원단 일을 하는 사람으로, 2016년부터 진 토시오가 응원단장을 그만둔 후에는 지역별로 응원단이 운영되는 형태로 바뀌었다.(이전에는 응원단은 지역별로 존재했으나 그들을 통솔하는 응원단장은 진 토시오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했었다. 아무래도 진 토시오는 프로 응원단이기 때문에 원정 경기까지 일일이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던 것 같다.)[82] 이때 롯데 마린스 서포터들이 가장 좋아했던 "우리들의 자랑"이 금지곡이 된다. 단지 MVP가 이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83] MVP에서 발렌타인을 내치려는 프런트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외야에 건 적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 내용이나 단어선택이 다소 자극적이었다. 그 무렵 니시오카 츠요시는 어린 팬들을 위해서라도 현수막을 거두아달라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MVP의 미움을 사 한동안 MVP의 조롱과 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팬들은 니시오카를 옹호했고 이 때문에 MVP와 약간의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상황.[84] 단지 서포터 주축이 갈려지고 친 구단성향의 서포터 그룹이 응원을 주도하고 있을뿐, 기본성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85] 치바 롯데 마린즈의 서포터즈인 team 26 역시도 라미고 몽키스의 Oh! Lamigo! 응원가를 One Heart Marines 콜로 개사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알프레도 데스파이네의 롯데 시절 응원가는 라미고 몽키스의 찬스테마이며, 라미고의 왕보룽 응원가는 치바롯데 팀 응원가로 쓰이고 있다.[86] 무료로 주는 티켓도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는게 골드 이상은 내야 지정석도 입장이 가능한데 레귤러와 캐주얼 레귤러는 내야 자유석과 외야 응원석만 된다.[87] 사실 롯데 응원도 안 하면서 일본 여자를 헌팅하러 오는 한국 남자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한국 남자라고 하면 특히 싫어하는 소모임이 많다고 한다. 특히 김태균이 롯데에서 뛸 때 그게 심했다고...[88] 오릭스의 연고지인 오사카야 두말할 필요 없는 한신국이고, 치바 역시 요미우리의 인기가 가장 높다. 요미우리와 같은 연고로 두고 있는 야쿠르트는 도쿄에서야 요미우리에 밀리는 건 사실이나, 야쿠르트 창업자의 고향인 나가노현에서 가장 인기 좋은 야구 팀이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시 본진인 사이타마에서는 교진에 밀리지만, 세이부 회사 자체의 발상지나 다름없는 시가현 내 인기는 No.1이다. 그런데 치바 롯데나 오릭스는 그런 현도 없으니.[89] 홈 라이트 응원석 한정. 원정팀 응원구역 옆에 붙어있는 래프트 응원석은 팬클럽이라면 개막전같은 인기 경기도 갈 수 있다.[90] 2019년의 경우 후쿠우라 카즈야의 모교 응원단이 방문하는 올포치바데이 경기가 이런 케이스.[91] 코시엔의 경우 원정팀 응원구역이 8개의 구역이 있다. 이 중 적게는 1개부터(라쿠텐) 많게는 6개까지(히로시마) 상대팀 인기도에 따라서 원정 응원석으로 지정하는데 라쿠텐보다도 비인기인 롯데와의 경기에서는 요미우리나 히로시마처럼 5-6구역을 응원석으로 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속으로 표가 나간다. 왜 이런지는 의문. 칸사이에 롯데 팬이 많다고 하면 오릭스 버팔로즈 홈구장이 오사카라서 충분히 롯데 경기를 볼 수 있는건데... 혹자는 33:4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92] 롯데 홈인 제3구장 경기는 도쿄돔밖에 없다. 이 경기는 당연히 응원석이 광속매진인데 뜬금없이 '''남의 팀 지방구장 원정 응원석도 광속매진시켜버린다!''' 오미야나 군마같은 홈에서 그나마 가까운 지방구장은 물론 '''오비히로, 쿠시로 같은 삿포로에서도 한참 떨어진 촌구석 야구장까지 다 매진시켜버리는 수준'''이다. 왜인지는 불명. 참고로 이런 성향 때메 '''쿄진, 한신 팬'''은 어디든 '''있다'''면, '''롯데 팬'''은 어디든 '''간다'''(...) 는 말이 있다. 팬은 적지만 전국을 원정경기를 보러 다니는 코어팬은 많다는 것.[93] 다이에 출신의 경영인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구단 업무를 맡아 네모토 리쿠오 전무와 함께 호크스의 후쿠오카 정착과 리빌딩을 주도한, 일본프로야구 프론트 업무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하지만 1998년의 다이에 사인 훔치기 스캔들, 경영악화 이후엔 고쿠보 히로키 무상 트레이드로 귀결된 부패 운영 의혹 등에 연루되고, 롯데 구단 사장으로 복귀한 2004년 프로야구 재편문제 때는 후루타 아츠야 선수노조 위원장 등에 맞서 구단 오너들의 입장을 강경하게 대변하는 등 논란의 인물이기도 했다. 2011년 시즌 종료 후 롯데 구단본부장을 그만두고 2012년 오프시즌부터 오릭스 버팔로즈의 구단본부장을 맡았으나 2017년의 부진한 성적을 이유로 시즌 종료 후 사퇴한다.[94] 그러나 거인 일편단심인 초노는 결국 입단을 거부했고 이듬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재지명되어 요미우리의 간판선수가 됐다. 하지만 2018년 시즌 종료 이후, 히로시마 토요 카프에서 마루 요시히로가 FA를 행사하며 거인 유니폼을 입자 보상선수로 선택됐다. 3수까지 불사하며 거인에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충성도 높은 선수를 내치는 거인의 냉정함을 볼 수 있다.[95] 발렌타인의 고액 연봉과 미국에서 데려온 코치, 통역 등을 중심으로 프론트의 의사를 무시한 독단적인 운영을 했다는 식으로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비되는 발렌타인의 입장은 주로 일본 야구를 전문으로 다루는 미국인 기자들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History, tradition helped to undermine Valentine" - The Japan Times 소속 Robert Whiting 기자의 기사(4부작), 교도통신 Jim Allen 기자의 블로그 포스트. 미-일간 문화적 차이도 엿볼 수 있는 부분.[96] 프런트와 갈등이 심하긴 해도 팬들에게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하다. 막장스런 '집시 롯데' 시대 이후 가와사키, 치바 시대까지 질기도록 이어진 암흑기를 청산해 준 (마린즈 팬 측에서는) 명장이기도 하고 2차 취임기 때 포스트시즌 진출 단골팀(특히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만들어 준 감독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팬들이 이 조치에 반발하였다.[97] 간단히 설명하자면, 바비 발렌타인과 보삭스 선수들 간의 불화설이 시즌 내내 나왔다. 바람잘날이 없었던 셈. 자세한 내용은 보스턴 레드삭스/2012년을 참조바람.[98] 참고로 2005년 우승이 아니었다면 이 분과 더불어 '''세계 프로야구 사상 유이의 70년대 우승 후 우승 없는 팀'''이란 기록을 유지했을 것이다. 한술더떠 현해탄 건너 자매팀보다도 더 우승을 오랫동안 못한 팀이란 치욕도 가지고 있을 뻔 했다.[99] 이 때부터 2011년 아시아 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 호코스가 삼성 라이온즈에게 결승에서 3:5로 패하기 전까지, 일본팀이 AS에서 4연속 우승을 하게 된다.[100] 정확히 말하면 70년대 퍼시픽 리그에 플레이오프 제도가 존재했었기 때문에 처음은 아니다. 이전 플레이오프 제도까지 포함하면 1973년의 난카이 호크스가 최초.[101] 이 두 팀은 1974년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한 바 있다. 결과는 롯데 오리온즈의 승리.[102] 최종전인 7차전은 후지 TV에서 중곙했다.[103] 이 사람은 왕년에는 잘나갔으나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히 드랍 더 볼 이후로 노쇠화가 겹치며 빛의 속도로 추락했다.[104] 독립 리그로 간 스미 코타를 제외하면 전원 은퇴.[105] 이 때 상대 선발 후지나미 신타로가 7회 1사 이후 실책이 나오며 급격히 흔들렸고 결국 대량실점을 하며 마운드 퇴갤. 그뒤로 불펜을 털어 동점은 만들었지만 더는 점수를 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오승환도 치바 타선에게 점수를 허락하지는 않았다.[106] 2승3패를 하게 될 경우 동률이 되는데 이 경우 퍼시픽리그는 1) 맞대결 전적에서 우위에 있는 팀, 2) 1)로도 동률일 경우 교류전을 제외한 동일리그 소속팀과의 대결에서 승률이 높은 팀(즉, 교류전의 하위팀), 3) 1), 2)로도 동률일 경우 전년도 성적 상위팀의 기준으로 순위를 가르게 되어 있다. 2015년의 경우 세이부와 롯데의 맞대결은 13승 1무 11패로 롯데가 우위기 때문에 1)이 적용 되어 동률이면 롯데가 상위를 점하게 된다. 참고로 동률 팀의 순위를 가르는 기준이 양 리그가 다른데 센트럴리그의 경우는 동률일 경우 1) 승리수가 많은 팀, 2) 1)이 동률일 경우 맞대결에서 우위에 있는 팀, 3) 1), 2)까지 동률일 경우 전년도 성적 상위팀 순으로 기준을 정하게 된다.[107] 10월 1일 기준으로 최하위 트래직 넘버 1. 즉, 라쿠텐이 전승하고 5위 오릭스가 전패를 해야 라쿠텐이 탈꼴지를 하게 된다.[108] 도발 포스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퍼스트 스테이지 에서는 「매 사냥을 가기 전에 삿포로에 들러서 햄이나 먹고 가자」, 「퍼스트 스테이지? 네, 통과점입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통과율 100%의 충격」.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마린즈 팬 100명에게 물어봤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속담은 다음 중 어느 쪽? 삼세번 1명, 두번 있는 일은 세번 있다 99명」, 「기다려봐..., 이 상황. 좋은 기억밖에 없는 걸?」, 「클라이맥스 시리즈 호크스 상대 시리즈 패전 0%의 충격」. [109] 하지만 파이널 스테이지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중심타자 데스파이녜에 대해서는 팀의 사기를 꺾었다면서 이런 식이면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디스하기는 했다.[110] 남자도 투표는 가능하지만 집계는 따로 하고, 최종순위는 여성팬들의 투표 순위로 가른다.[111] 2년 연속 1위[112] 2년 연속 2위(...)[113] 15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지명을 받은 신인투수.[114] 일본 리그는 투고타저가 매우 심해서 5점대면... [115] 우리가 흔히 아는 메이저리거와는 동명이인. 이 선수도 전직 메이저리거긴 하나 몇 경기 등판하지 못했다.[116] 외인에 묻혀서 그렇지 일본 토종 선발투수들도 다들 ERA 4점대 이상이다. 지금 다른 팀 에이스 중에는 ERA 1점대도 있는데...[117] 8월 8일 기준 2승 9패 ERA 4.63[118] 8월 8일 기준 4승 9패 ERA 4.01[119] 근데 롯데보다 더 잘하고 있는 오릭스는 1~6선발이 모두 패배 TOP 20에 들어가 있는게 함정...[120] 원문은 井上晴哉の甘党カルーアミルク.[121] 사실 이건 말장난이다. 원래 이름은 おいどんのおい丼. 발음은 오이동노 오이동. 앞의 오이동은 큐슈 사투리로 나 라는 뜻이고, 뒤의 오이동은 덮밥을 뜻하는 돈부리메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 일본어에서만 통할 말장난. 후타키 코타는 큐슈 출신이다.[122] 후타키 코타는 한자로 二木康太(이목강태)다.[123] 이 선수는 실제로 스테이크를 와사비에 찍어 먹는다고 한다.[124] 원문 たむNEW麺~オレンジの香り~. 제 멋대로 아무렇게나 번역한게 좀 있으니 더 좋은 번역 가능하면 부탁드립니다.[125] 년수를 다 채웠기 때문에 18시즌부터는 일본인 선수 취급을 한다. 따라서 외국인 쿼터와 상관없이 재계약과 1군 등록 가능.[126] 2009년 닛폰햄에서 풀 시즌을 뛴 것은 아니지만 0점대 평자를 기록하며 셋업맨으로 주목받았던 선수. 그러나 09 시즌은 플루크였고 그 뒤로는 얻어맞기만 하다가 방출당해 독립 리그를 거쳐 롯데로 왔건만 결국 두 번째 방출을 당했다. 방출 이후 실업야구로 가서 파나소닉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127] 교토대학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라고 유명해진 그 선수 맞다.[128] 실업야구 출신. 실업야구 시절에는 운전면허 학원 팀에서 일했는데, 오전에는 야구를 하고 오후에는 운전면허 강사로 일했다고 한다. 운전면허 강사 출신 야구선수로는 최초였다. 롯데에서 방출당한 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나갔으나 새 팀을 구하지는 못했다. 이 과정이 일본 방송에 취재되기도 했다.[129] 정말 잘생겼다. 외모로도 넷상에서 나름 유명했었고, GV 출연 의혹으로도 유명했던 포수였다. 1군 경험이 아예 없었는데도 개인 상품이 출시될 정도로 얼빠가 존재했다. 방출 이후 클럽 팀 Revenge99로 갔다. 클럽 팀이라는 말로 보아 실업야구는 아닌 듯.[130] 이미 16년 시즌 이후에 팀에서 방출당해서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을 통해 치바롯데로 이적하였으나 1년만에 또...참고로 이 때같이 치바롯데에 입단한 동기로는 미케 카즈마와 이노모토 켄타로가 있었는데, 미케를 제외하고 모두 1년만에 방출. 방출 이후 한신 타이거스의 구단 직원으로 취직.[131] 방출 이후 연식 야구팀에 들어갔다. 보통 연식 야구 팀은 한국의 사회인야구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돈을 받고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132] 방출자 중 유일한 육성선수. 육성선수였는데도 입단 첫 해부터 1군 스프링캠프에 합류하는 등 기대를 모았으나 부상 때문에 내리 재활만 했다고 한다. 방출 이후 미국의 독립 리그로 가서 거기서 주전으로 활약중.[133] 3년 연속 1위. 결국 명예의 전당에 올라 18시즌 투표부터 투표 불가.[134] 롯데의 2010년 4라운더. 1군 기록은 1경기에 그쳤다.[135] 롯데의 2006년 6라운더. 중간계투로 꽤 뛰었으나 와쿠이 히데아키의 보상선수로 세이부에 간 후 2년만에 은퇴했다.[136] 롯데의 2004년 자유획득 선수. 그러나 1군 1경기에 그쳤다.[137] 롯데의 2005년 4라운더. 홀드왕도 기록했었으나 20대 후반에 퇴물화가 되어 30대 초반에 은퇴해야 했다.[138] 킨테츠의 1985년 3라운더. 1군 기록은 없다.[139] 롯데의 1985년 1라운더. 프로에서 9년이나 뛰었지만 2경기 출장에 그쳤으며, 통산 방어율은 무한대(...)[140] 롯데의 2013년 4라운더. 즉전감이었으나 1군 통산 6경기 등판에 그쳤다.[141] 카나자와학원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롯데에 불펜포수로 입단한 선수. 요미카타가 아무리 찾아도 안 나와서 정보를 찾은 후 수정 예정.[142] 1988년 롯데 드래프트 번외입단.[143] 롯데의 1990년 4라운더.[144] 한신의 2002년 8라운더.[145] 오릭스의 1986년 1라운더. 선수 기록은 화려하진 않지만 한국나이 42세까지 현역으로 뛰었을 정도로 가늘고 길게 버텨온 선수였다.[146] 2020년 시즌을 앞두고 야심차게 FA로 데려왔다. [147] 시즌 중 타카노 케이스케와 트레이드.[148] 외야수 중에서도 오기노 타카시가 유격수를 본 경험이 있어서 유격수에 세워놓을수 있는 선수가 더 있다. 다만 오기노는 유격수를 본게 신인 시절이라 지금은 못 볼 테지만...[149] FA로 롯데에 이적.[150] 코야마의 앞에는 가네다 마사이치와 요네다 테츠야밖에 없다.[151] 1750만엔이었다고 한다.[152] 이 사람 이혼을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했다(...)[153] 이 사람 90년대에 선수로 뛸 때 연봉이 4000만엔이 넘던 사람이다! 한낱 3만엔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154] 사장이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가정부한테라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했고, 홧김에 때려서 기절시킨 것. 이후에 발각되는 게 두려워서 기절한 가정부를 아라카와 강에 던져버렸다.[155] 이후 감옥에서 소프트볼 대회가 열리자 프로에서 탈삼진왕도 기록해서 동료 죄수들이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유격수로 출장하여 무안타를 기록해서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애초에 현장을 떠난 지 15년 이상 됐던 사람이고 당시에 40대 중반이어서 몸이 안 따라준듯.[156] 하다못해 비슷하게 금전 문제로 선수생활과 인생을 말아먹은 팀 후배 오미네 쇼타만 봐도 연봉이 가장 높을 때가 1000만엔 수준이었다. 그것도 2010년대 기준으로. 20년 전 수준이랑 비교하면 오가와가 번 돈은 오미네의 5~10배는 됐을 텐데 어마어마한 낭비벽이었던 것.[157] 사실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원하다보니 거의 연구대상 수준. 사실 키무라의 경우는 처음부터 센트럴리그 팀은 입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도쿄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퍼시픽리그 팀인 롯데를 원했던 것으로 추정. [158] 이로 인해 사회인야구 시절 1년 출전정지도 당했다.[159] 중간계투 ERA가 4점대 중반이면 보통 1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 특성상 2경기마다 한번씩 실점을 했다는 건데 셋업으로 쓰기에는 그 점이 문제였다.[160] 1군 출장기록은 1974년이 마지막.[161] 특히 포일 실책이 거의 없었다. 일본 신기록을 찍었을 정도로.[162] 재일한국인. 한국명 김유세.[163] 그 전설의 10.19 당시 롯데 감독이 바로 아리토였다. 그리고 아리토는 그 날 2차전 때 8분이나 지연행위를 벌이며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어버려 킨테츠의 우승실패에 제대로 일조를 했다(...). 자세한 건 10.19 항목 참조.[164]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산타율 랭킹의 기준은 4000 타수이다. 한국의 경우는 3000타석이 기준이다. 이는 경기수가 적었던 80년대 초창기 선수(특히 장효조, 통산타수 3050)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짙다. 타수 기준을 그보다 더 높이면 장효조의 통산 타율(.331)이 그냥 참고기록으로 밀려나버리기 때문에 올드 야구팬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기준을 낮춘 감이 있다. 참고로 아오키 이전까지 일본인 규정타수 만족 통산타율 1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레전드이자 대선배, 아오키의 신인시절 감독이기까지 했던 와카마츠 츠토무. 이치로는 타석은 4000을 넘었지만 타수가 3619라 통산타율 랭킹에는 들어오지 못한다.[165] 이렇게 일본시리즈 한 팀이 다음 해 리그 꼴찌인 사례는 1961년 미하라 오사무가 이끌던 다이요 훼일즈, 1979년 히로오카 타츠로가 이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결국 히로오카는 도중 사임), 그리고 2011년 치바롯데, 2014년 호시노 센이치의 라쿠텐 이글스(호시노는 건강문제도 있어서 이 해 시즌 종료후 퇴임) 이외엔 없다.[166] 이로 인하여 이혼까지 했다. 빚 자체는 2천만원 수준으로 적었지만 오오미네가 1군에 자리잡기 전인 2016년까지는 연봉이 5~7천만원 수준이라 세금을 떼고 자녀 양육비를 제외하면 오히려 돈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렇게 수십, 수백만원씩 빌린 것이 몇천만원까지 돼 버린 것. 그런데 오오미네는 사실 2017~2018년 연봉은 1억원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세금을 떼더라도 2천만원 정도는 일시불로 갚을 수 있을텐데 도대체 그 돈은 어디에 갖다바치고...?(구단 내부 관계자로부터의 빠찡꼬를 좋아한다는 증언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일진 비슷하게 놀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생활이 방탕한 것이 아닌가 싶다.)[167] 그것도 은퇴 직후에 인터뷰했던 기자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거부당하자 야쿠자를 들먹이면서 40만 엔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168] 롯데는 선수끼리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랬다![169] 어떻게 게임을 할 수 있었냐면, 롯데 시절에는 딱 한 경기를 빼면 전부 지명타자로 나왔다. 즉 수비 이닝 때는 계속 대기실에 가서 게임만 했다는 것(...) 후술하겠지만 저 행위 때메 다른 선수와 싸움이 난 적도 있었다. 여담으로 주니치 시절에는 센트럴리그가 지명타자가 없어서 좌익수로 계속 나왔다.[170] 헨슬리 뮬렌 상대로 엄청난 괴롭힘을 한 이유도 뮬렌은 AAA와 메이저를 오가며 메이저에선 백업 정도의 성적을 내고 일본에 왔고, 일본에서도 컨택과 선구안이 떨어지는 공갈포였기 때문. 메이저리그에서 꽤 오랫동안 주전으로 뛰었던 홀과 비교하면 미미한 기록이다.[171] 가석방도 최소 22년 4개월은 경과해야 한다고 한다.[172] 멜 홀은 1960년생이다. 즉 가석방되어도 최소 69세는 넘으며 형량을 다 채우면 무려 92세다. 진짜 질기게 살지 않는 한,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173] 게다가 미국에선 아동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같은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자기들보다 더한 쓰레기 취급 받고 심지어 린치까지 당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감옥에서의 여생도 험난하리라 예상된다.[174] 헨슬리 뮬렌은 놀림, 폭행, 음료수 셔틀 짓까지 당했다. 은퇴 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시기의 멜 홀과의 경험을 왕따당하는 것으로 표현했을 정도. 감독이 하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줬으나 전부 묵살당했다고 한다. 심지어 1995년에는 홀은 주니치, 뮬렌은 야쿠르트에서 뛰었는데, 주니치와 야쿠르트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홀이 뮬렌을 찾아가서 괴롭혔다고 한다! 거기다가 주니치에서 1994~1996년까지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던 알론조 파월 역시 메이저리그 커리어가 별볼일없다는 이유로 뮬렌처럼 괴롭힘을 당했다.(이 선수는 메이저리그 기록은 2시즌 71경기에 불과했지만 일본에서 7년이나 뛰었고, 주니치에서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하며 2020년엔 순회타격코치로 주니치에 돌아올 정도로 주니치에선 전설급 용병타자 중 한 명이었다.)[175] 그 외에도 벤치클리어링 때 말리러 온 상대팀 포수를 폭행한 적도 있고, 1993년에 롯데에서 뛰었던 맥스 베너블과도 싸운 적이 있었다. 싸운 이유는 덕아웃에서 게임을 하는 것을 보고 베너블이 뭐라 하자 발끈해서 싸움이 난 것. 또한 일본인 팀메이트인 아이코 타케시, 코미야마 사토루 역시 멜 홀은 역대 최악의 야구선수라고 인터뷰하거나, 멜 홀이랑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자식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의 인터뷰를 쏟아낸 걸 보면...[176] 데뷔 동기고 고졸이라 동갑내기였다. 오노 신고, 오오츠카 아키라, 후쿠우라 카즈야 이렇게 3명이서 94년 드래프트 고졸동기로 친하다. 또한 이들 셋 다 현역 시절도 은퇴 후에도 롯데를 떠나지 않은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라서 뒷배경이 탄탄하다.[177] 같은 드래프트에서 더 하위픽이었던 오노 신고,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묻힌 감이 있지만 이 사람도 롯데에서 은퇴 후 코치와 스카우터를 하면서 원클럽맨으로 버텨오고 있다.[178]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이다.[179] 단 센가는 드래프트에 참여할 때는 가능성은 있었으나 당장 전혀 써먹기 어려운 선수였기에 상위지명 가능성은 없던 선수였다. 프로에서 급성장한 케이스. 물론 다른 3명은 상위픽 지명이 유력한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롯데가 뻘짓한 게 맞다.[180] 1952년 7월 16일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홈구장인 헤이와다이 구장에서의 원정경기 때 4대 9로 뒤지던 마이니치가 우천과 일몰 노게임(당시 헤이와다이 구장은 조명시설이 없었다.)을 노리고 고의적인 경기 지연행위를 벌여 결국 5회초에 노게임 선언이 되자 분노한 니시테츠 팬 수천명이 그라운드에 난입한 사건. 이 때 니시테츠의 오시타 히로시와 노구치 마사아키가 둘이서 함께 팬들의 주먹과 발길질에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관객들을 저지했고 결국 이날 소동은 3300명의 경찰 기동대가 투입되어 겨우 진정되었다. 이날 관객들의 소란을 저지한 공으로 오시타와 노구치는 연맹 표창을 받은 반면 지연 행위를 조장했던 유아사 요시오 총감독은 해임, 와카바야시 타다시 감독은 2군 감독으로 강등당하는 조치를 받고 벳토 카오루가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였다.[181] 이토 감독이 김정후의 입단 테스트 후에 2017 시즌 전반기를 독립 리그에서 보내면서 실전 경기를 치르는 걸 봐서 후반기에 입단시켜주겠다고 판단 보류 판정을 내렸는데, 이토의 사임이 정해지면서 그대로 무산. 후임 감독 이구치는 2017년 인터뷰에서 이토의 구단 운영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이토가 영입하려고 한 김정후의 영입도 백지화를 해버렸다.[182] 리두쉬안 같이 국적은 외국이지만 드래프트로 입단하여 일본인 쿼터에 해당하는 선수는 제외.[183] SK 와이번스에 있던 그 호세 페르난데스 맞다.[184] 이름인 쇼트가 일본어로 유격수를 뜻하는 말이다 보니 이 선수가 롯데에서 뛸 때 올스타전 유격수 부문에서 엄청난 표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프로야구는 올스타전 투표를 할 때 모든 선수를 포지션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단 투수를 타자로 투표하거나 타자를 투수로 투표하는 것은 금지.)[185] 요코하마에서 8년을 뛴 장수 외국인 용병. 2년의 공백기를 갖고 롯데에 복귀했으나 흑역사가 되었다.[186] 스프링캠프 도중 야구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면서 방출을 요구했다.[187] 롯데 시절에 이승엽은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밀려 좌익수를 자주 봤다.[188] 2002년 한화 이글스에 영입되어 한국에 입국까지 하였으나 부적격 선수임이 밝혀져서 퇴출되었다. 그 당시에는 직전 시즌과 2년 전 시즌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등록이 되어 있는 선수는 용병으로 데려오면 안 되는데 세라피니는 2년 전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들어 있었기 때문.[189] 롯데 시절에 이승엽은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밀려 좌익수를 자주 봤다.[190] 2002년 한화 이글스에 영입되어 한국에 입국까지 하였으나 부적격 선수임이 밝혀져서 퇴출되었다. 그 당시에는 직전 시즌과 2년 전 시즌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등록이 되어 있는 선수는 용병으로 데려오면 안 되는데 세라피니는 2년 전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들어 있었기 때문.[191] 일본을 떠난 후 두산에서 뛰게 된다. 근데 거기선 더 못해서 광속퇴출.[192] 2013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193] 일본을 떠난 후 두산에서 뛰게 된다. 근데 거기선 더 못해서 광속퇴출.[194] 대만 복귀 반 시즌만에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해 흑역사화.[195] 대만 복귀 반 시즌만에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해 흑역사화.[196] 쿠바에서 귀화.[197] 입단 한 달만에 지배 등록이 되긴 했다.[198] 사실 투포수 빼고 다 가능한 만능 유틸이었다. 주 포지션이 저 두 개. [199] 쿠바에서 귀화.[200]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201] 부상으로 인해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5월에 방출당했다.[202] 사실 계약기간이 남아 있었는데 본인이 공인구 교체로 인한 부진과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으로 인해 팀에 방출을 요구했다.[203] 사실상 시즌 중 중도퇴단한 김태균의 대체 용병이다. 일본프로야구는 용병이 무제한이라 대체 영입이라는 표현은 없다.[204] 이후 2018년 12월 6일 베네수엘라 윈터리그를 마치고 차량으로 이동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LA 에인절스에서 뛰었던 루이스 발부에나도 사망. 해당 차를 운전했던 카를로스 리베로(2017년 야쿠르트에서 뛰었다.)는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205]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206]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207]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208] 2014년 시즌이 끝나고 기대이하의 퍼포먼스로 자유계약으로 풀렸으나 2015 시즌 전에 다시 롯데와 협상을 하여 재입단했다. 시즌 중 입단도 아니기에 사실상 재계약이라고 봐야겠지만...[209] 한국 국적 시절 이름.[210] 한국에서 미국으로 귀화했다.[211]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한국인 용병투수. 최후의 용병타자는 하재훈이며 외국인 취급을 받지 않는 김무영까지 총 3명의 한국인이 2016년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다. 그 후로 일본프로야구에 입단한 한국인은 없다.[212] 본인이 계약해지를 요구하여 7월 초에 웨이버 공시. 시즌 내내 1군 콜업 없이 2군에서만 뛰어서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213] 이 선수는 2019년 멕시칸리그에서 타율 .380에 31홈런 OPS 1.078로 터졌다. 물론 멕시칸리그가 공인구 교체 이후 미친듯이 홈런이 급증해서 펠릭스 피에보다 OPS가 낮았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나름대로 성공했던 자펫 아마도르, 루이스 크루즈보다도 OPS가 높았으니 한번도 안 긁어본 것은 아쉬운 선수.[214] 마약 소지로 체포되면서 시즌 중 계약해지.[215]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 [216] 새 각주가 없는 이상 페넌트레이스 1위만 일본시리즈로 진출.[217] 1954~1956년엔 퍼시픽리그가 8팀 체제였기에 4위까지 A클래스였다.[218] 1973~1982년의 전후기리그제의 경우는 플레이오프 우승으로 리그 우승을 확정지을 시 페넌트레이스 순위에 관계없이 1위 결정. 그 이하는 전후기 합산 승률 순위에 따라 결정.[219]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후기 우승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 한 팀이 전후기 독점 시 일본시리즈 직행.[220] 실제 순위는 2위였으나, 페넌트레이스 3위였던 난카이(전기 우승)가 플레이오프에서 한큐(후기 우승)를 꺾고 리그 우승을 결정지었고 그 결과 페넌트레이스 1위였던 한큐가 2위로 내려가면서 롯데의 순위가 3위로 하락.[221] 참고로 이해 시즌에 롯데는 1위 킨테츠와 불과 8모 차이로 페넌트레이스 1위 달성이 좌절되었다.(킨테츠 .5573/롯데 .5565) 즉 반올림 시엔 '''동률 1위'''가 될 수 있었다...라고 하지만 저 때 규정상 플레이오프를 이겨야 우승하는 것이니 별 상관 없는 이야기다.[222] 단독 플레이오프 시대일 경우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무조건 1위가 되며, 나머지는 정규시즌 순서로 세운다.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정규시즌만 반영.[223] A클래스 전원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플레이오프에, 2007년부터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한다.[224] 페넌트레이스 순위는 2위였으나, 플레이오프 우승으로 리그 우승 결정.[225] 로고가 상당히 비슷했으나 2020년 밀워키의 로고가 교체되며 상관없어졌다.